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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7:11-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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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2013.6.23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예수님을 만난 사람(12) 외아들 잃은 어머니
누가복음7:11-17
1979년 12·12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 등 신군부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승인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정병주 특수전사령부 사령관, 장태완 수도방위사령부 사령관 등을 불법적으로 체포하여 구속한 사건입니다.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으로 신군부에 맞섰던 분이 참 군인으로 평가받았던 장태완 장군입니다. 신군부에 저항하다가 서빙고분실에 끌려가 두 달간 문초를 당했고, 이등병으로 강등돼 강제예편 된 후 2년 간 가택연금을 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습니다. 신군부에 의한 12·12 사태는 장 전 사령관 일가족의 처참한 불행을 가져다주었습니다. TV뉴스를 통해 보안사에 끌려가는 아들의 모습을 본 시골의 아버지는 곡기를 완전히 끊고 매일 막걸리만 마시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우울증을 앓다가 아파트에서 투신자살을 하였습니다. 아들은 서울대 자연대에 수석 입학한 수재였지만, 아버지의 비운(悲運)에 괴로워하다가 낙동 강변 야산 할아버지 산소 옆에서 꽁꽁 얼어붙은 시신으로 발견되었습니다. 당시 장 전 사령관은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 서울로 올라오는 차 안에서 죽은 아들의 코와 입 등에 꽉 들어찬 얼음을 모두 혀로 녹여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살다 사람 잘 못 만나 이런 일을 당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우리가 살다 뜻하지 않게 어려운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에 나온 여인이 바로 그런 여인입니다. 나인성에서 어릴 때 꿈을 꾸며 산 소녀였을 것입니다. 결혼하였는데 남편이 아들 하나 남겨 놓고 죽은 것입니다. 독자인 아들 하나 의지하며 아들에게 유일한 희망을 걸고 양육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인생의 기둥이요, 소망이요, 삶의 의미요 삶의 목적이었던 그 아들마저 죽은 것입니다. 그녀의 삶을 지탱해주는 마지막 희망의 끈이 사라진 것입니다. 장례를 치르기 위해서 장지를 향해 동네 밖으로 나가는데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 완전히 회복이 된 것입니다.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죽음이 삶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실패가 성공으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걱정이 근심이 살아지고 기대와 소망이 생긴 것입니다. 저와 우리 성도님들도 예수님 만나 이런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1. 예수님을 만나면 절망에서 소망으로 일어납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뜻하지 않게 절망적인 상황이 올 수가 있습니다. 톨스토이는 인생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험한 산길을 가다가 맹수를 만났습니다. 힘을 다해서 도망치다가 황급히 크고 깊은 동굴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위에서는 맹수가 으르렁 거리는데 그는 동굴절벽 중간에 박혀있는 한 나무뿌리를 잡고 대롱대롱 매달렸습니다. 아래로 뛰어내릴까 생각하고 밑을 보니 큰 뱀이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생벌집에서 꿀이 흘러내려 그 사람은 그 꿀을 찍어먹습니다. 그때에 나무뿌리 곁에 있는 쥐구멍에서 흰쥐와 검은 쥐가 들락거리면서 그 사람의 생명줄이 되고 있는 나무뿌리를 갉아먹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이런 상황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에서 일어나게 할 돕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오늘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잃은 여인처럼 위로 올라갈 수도 없고 아래로 내려갈 수도 없는 상황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자식을 가르쳐야 하는데 이제는 빌릴 돈도 없을 때가 있습니다. 사업을 하여야 하는데 자금이 없어 이제는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습니다. 질병을 치유받아야 하는데 이제 임계점을 넘어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다가올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예수님께 나오면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절망으로 쓰러져 가는 여인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절망을 소망으로 반전시키기 위해 예수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절망을 장례 치르기 위해 예수님께서 장례 행렬에 찾아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그녀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1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울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절망의 눈물을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예수님이 울지 않도록 만들어 주시겠다는 약속이며 선포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행렬에 참여하였지만 이 불쌍한 여인의 불행을 막아 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울지 마십시오.' '염려하지 마십시오.'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인간에는 슬픔을 그치게 할 능력도 없고 울음을 멈추게 할 길도 없으면서 말로만 위로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울음을 변하여 웃음으로 바꿔줄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염려 근심을 해결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시기 때문에 울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분은 하늘에서 내려오신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려움을 당하면 다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오히려 고난당하고 절망 가운데 처한 자를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눈물을 거두어 주고 절망을 소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성 밖으로 향하는 장례 행렬은 절망의 행렬입니다. 그러나 성안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행렬은 소망의 행렬입니다. 예수님 만나면 누구라도 소망의 행렬에 편승할 수 있습니다. 눈먼 자가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당시 의학으로는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예수님은 그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한센씨 병으로 집도 잃고 고향도 잃고 가족과 친척을 떠나 평생동안 슬픔과 죽음을 안고 절망적인 그들을 예수님을 치유시켜 주었습니다. 38년 동안 실패를 거듭하면서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던 환자를 예수님을 고쳐 주셨습니다. 혈루증으로 수없는 세월을 눈물로 보내야 했던 여인의 질병을 예수님을 고쳐 주셨습니다. 오늘 날도 예수님은 절망하는 자, 나락으로 떨어진 자, 쓰러지는 자,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한 자를 찾아오십니다. 왜 예수님이 찾아 오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보시고 불쌍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절망적인 문제를 모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사정과 아픔과 고통을 다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긍휼 때문에 고쳐 주시는 것입니다. 넓게는 사랑 때문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인간들은 남의 결핍을 통해 돈을 벌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인간의 결핍을 불쌍히 여기시며 아무런 조건 없이 도우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이 먼저 찾아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손을 내민 것입니다. 그 여인의 조건이나 믿음을 본 것이 아닙니다. 성품을 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긍휼 때문에 그녀를 찾아 간 것입니다.
절망 가운데 있습니까?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시는 분계십니다. 계속적으로 쓰러져 가는 인생을 보며 낙담하시는 분계십니까? 주님이 우리 삶의 현장에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십시오. 우리의 절망의 현장에 주님이 찾아오십니다. 아니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와 함께 그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우리가 절망하고 있을 때 우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소망으로 일으켜 주십니다. 이 시간 이런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절망에서 일어나지 못하면 인생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절망 가운데 쓰러져서는 안 됩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이러한 절망의 종착역은 죽음입니다. 절망은 자살사고를 설명하는데 우울보다 1.3배 정도 중요한 변수라고 합니다(Beck). 미국의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가르친 해리 할로는 원숭이를 통해 실험을 통해 절망의 종말이 무엇인지를 증명해 주었습니다. 그는 '절망의 구덩이'라는 심리적 고문 상자를 만들었습니다. 직육면체 상자로 윗면만 빼고 사방이 막힌 스테인리스강으로 만들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피라미드를 거꾸로 놓은 것처럼 위는 넓고 아래는 좁게 제작되었습니다. 어린 원숭이를 이곳에 가둬 놓으면 위로 오르려고 노력하지만 스테인리스 표면이 미끄럽고 경사가 져 있기 때문에 미끄러져 내려와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연구팀은 어린 원숭이를 이 상자에 넣고 관찰하였습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원숭이들은 올라가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좁디좁은 바닥에 끼어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원숭이는 찾아 볼 수 없었고, 이런 시간을 보낸 원숭이들은 상자에서 다시 꺼내주어도 여전히 우리 구석에 웅크려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갔습니다. "사람을 움직이는 100가지 심리법칙(정성훈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존 홉킨스 대학에서 쥐를 가지고 실험을 했는데 따뜻한 물속에 쥐가 얼마나 오랜 시간 생존하는지 보았더니 60시간을 버텼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음 쥐는 손으로 붙잡고 체념할 때까지 기다린 후 물에 넣었더니 바로 물에 빠져 죽었다고 합니다. 절망하는 사람에게는 기대도, 기대에 대한 확신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생을 포기합니다. 하루에 절망으로 1100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그 중 36명쯤이 사망하고 있다고 합니다. 1년에 13,000명이 사망합니다. 아무도 나를 도울 사람이 없다고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사43:2-3)"
아름다운 장미는 퇴비로 기릅니다. 어두울수록 등대는 더 밝게 보입니다. 광풍타고 비상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파도타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오히려 큰 파도를 기다립니다. 연을 높이 날리려는 아이들은 바람을 기다립니다. 골이 깊으면 봉우리도 높습니다. 우리 예수님을 만나면 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실제적으로 닦아 주십니다.
절망 가운데 살았던 박민스터 풀러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다니던 대학에서 퇴학을 당했고, 벌인 사업마다 실패했답니다. 서른 두 살의 나이에 자살을 결심한 그는 추운 겨울밤 미시간 호수 속으로 몸을 던지려다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답니다. 순간 그는 찬란하게 빛나는 밤하늘과 별들과 맑은 하늘을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신비에 대한 경외감에 사로잡혔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존재가 스스로 없어지지 않는 것처럼 너에게도 네 생명을 스스로 없앨 권리가 없다"라는 음성이 들려왔답니다. 그 후 그는 새로운 삶을 살아 열두 개 분야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았답니다. 발명가, 기술자, 수학자, 건축가, 시인 및 천문학자로서 지구를 무려 57회나 돌며 강연하였고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강연에 매료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절망(絶望)의 종말은 시작됩니다. 한 시대 영국을 변화시키고 세계적으로 영적 각성을 일으킨 설교자 스펄전은 17세 때 말씀 붙들고 일어났습니다. 썩어져 가는 세상을 보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희망을 주시는 주님을 붙들고 일어났습니다. 리빙스턴은 23세 때 일어나라는 하나님 말씀 붙들고 아프리카 대륙으로 선교사로 떠났습니다. 아프리카를 바라보고 절망한 것이 아니라 아프리카를 바라보게 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일어난 것입니다. 요한 칼빈은 썩어져 가는 시대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일어나 26세 때 기독교 강요를 집필해 세상을 바꾸었습니다.예수님 오늘도 말씀합니다. “울리 말라.” 울리 말라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실패할 때 세상사람 다 외면해도 우리 예수님 우리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2. 예수님 만나면 죽음에서 생명으로 일어납니다.
근본적으로 여인이 절망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남편의 죽음, 아들의 죽음, 죽음 때문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이겠습니까?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솝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날씨 좋은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하루살이와 매미 그리고 개구리가 모처럼 회동하여 안부 인사를 나누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꽃을 피웠습니다. 항상 그렇듯이 촐랑대는 하루살이가 기염을 토하며 마치 세상살이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 자신의 경험담을 털어놓았습니다. 손사래를 쳐가며 자기가 겪은 세계가 신기한 듯 장광설을 늘어놓았습니다. 매미와 개구리는 물끄러미 하루살이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무덤덤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하루살이는 매미와 개구리의 시큰둥한 반응에 재미없다는 듯 "내일 만나자."하고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매미가 개구리에게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습니다. "개구리 형님, 쟤는 언제나 철이 들지 걱정입니다. 자기 수분도 모르고 날뛰니... 자기가 이 세상을 보면 얼마나 본다고. 오죽하면 하루를 살다 가는 것이 하루살이 아닙니까. 제 주제에 감히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닌데..." 매미는 하루살이가 겪지 못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일주일을 살기위해 7년 동안 땅속에서 지내는 구더기생활에서부터 이슬을 먹고 사는 이야기 등을 흥미진진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매미는 '내년에 만나자'라고 작별인사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동그마니 앉아 있던 개구리가 입맛을 쩍쩍 다시며 구시렁댔습니다. "야, 네게 내년이 어디 있어. 여름 한철 사는 네가 뭐 안다고...세상을 다 본 양 떠들고 있어." 모든 생물은 한계가 있습니다. 수명의 한계가 있고, 인식의 한계가 있고,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관리하여도 천년만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죽음으로 끝나겠습니까?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의학의 발달은 단지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생명의 시간을 연장해 줄 뿐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가 그의 저서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라고 말했듯이 죽음은 인간의 본질적 문제입니다. 생을 향한 애착과 죽음 앞에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죽음 문제를 기피한다고 그 문제에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심리학자 헤르만 파이펄은 심상 투사 테스트를 해 본 결과 "쉰을 넘은 사람에게 잠재해 있는 가장 기본적인 관심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몰두"였다고 합니다. 예측이 가능한 불가항력의 원천적으로 다가오는 자연사든, 예측 불허의 사고사든 인간은 언젠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죽음은 차별이 없고 신분의 귀천이나 지위 고하가 없습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던 싸르트르도 1980년 3월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병명도 묻지 않고 한달 동안 발악을 하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 갔다고 합니다. 1883년 3월 14일 칼 마르크스가 사망하던 날, 그의 하녀가 다가와서 "저에게 당신의 마지막 말을 남기시면, 제가 기록해 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마르크스는 "시끄러워, 나가 !" 라고 소리치며 죽어갔고, 나폴레옹은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 ...." 이라며 초라하게 숨졌다고 합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도 언제가 죽을 것입니다. 죽음 가운데 일어날 믿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죽음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장례 행렬을 멈추게 하고 어떻게 하십니까? 14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라고 말씀합니다. 청년의 아직 죽음의 관에 머물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는 자를 살리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구든지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고 예수님처럼 우리도 예수님 재림하시는 날 부활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예수님을 만나면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썩어져 가는 나사로를 향하여 "나사로야, 나오라!"하자 썩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만 만나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에게 "달리다굼"(소녀야, 일어나라!)하시면 죽은 소녀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께서 이런 기적을 보여 주었겠습니까?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인 하나님이시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죽음의 세력이 물러가고 부활의 새 생명으로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믿으면 누구든지 죽음에서 자유를 얻을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죽음의 행렬에 가담하고 있습니까? 생명의 행렬에 가담하고 있습니까?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요5:25).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행 16:31)"
예수 만나면 생명이 시작됩니다. 마른 나무에도 새순이 솟아나고 고목나무에도 꽃이 핍니다.
이 시간 죽음으로 쓰러져 가는 나를 생명으로 일으켜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죽는 것은 잠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들의 죽음은 희망이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는 88세로 죽음에 임했을 때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했으며 유명한 19세기의 미국 부흥사 D.L 무디는 임종을 당하여 슬퍼하는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하는 친구 여러분! 내일 아침에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이 신문에 나거든 정말 내가 죽은 줄로 생각지 마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좀 더 높은 곳으로 옮겨가는 것 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은 이의 묘비에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새로운 생명에 들어간 것이다."라고 새겼습니다.
인류 역사상 우리 인간을 불행케 하고 슬프고 고통스럽게 하고 모든 것을 헛되게 하는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할 자는 없었습니다. 예수님만은 죽음에 대하여 손을 대시고 그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온 인류가 가는 죽음의 행렬을 바꾸기 위해서 역사 속에 뛰어 들어 오셨습니다.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바꾸셨습니다. 슬픔과 절망과 눈물과 통곡의 소리 나는 안타까운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시어 기쁨과 환희와 감격의 행렬로 바꾸어 주신분이 예수님이 십니다. 죽음의 행렬을 생명의 행렬로 지옥으로 가는 행렬을 천국으로 초상집을 잔치 집으로 바꿔 주셨습니다. 오늘 죽음에서 일어나야 할 청년이 누구이겠습니까?
3. 예수님 만나면 동정받는 인생에서 영광돌리는 인생으로 일어납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무더운 지방이라 당일에 장사를 지냅니다. 유대인의 장례식은 우리나와 비슷합니다. 온 동네 행사가 됩니다. 장례에 참여하고 도와주는 것을 되돌려 받지 않으니까 가장 큰 선행으로 생각했습니다. 동네에서 장례 위원회가 만들어지고 동네 사람들이 장례를 치루어 주었습니다. 장례 때에는 피리 부는 자와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은 상여 앞에 가며 곡을 하고 또 상여 뒤에는 곡을 하는 사람들이 뒤를 따르며 울고, 조가를 부르는 사람들이 따랐습니다. 그들은 동정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렇게 남편도 죽고 아들도 죽어."라고 안타까워했을 것입니다. 남편이 죽었을 때 사람들은 얼마나 안타까워했겠습니까? 이제 자식이 죽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아는 사람마다 혀를 찾을 것입니다. "참 안되었다." "참 불쌍하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은 예수님 만나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아들이 살아난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이제 동정의 눈빛이 아닙니다.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닙니다. 부담스러운 대상이 아닙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을 목격하신 것입니다. 큰 선지가가 일어난 것을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동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 가정을 볼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가정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 가정을 볼 때 하나님께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큰 선지자가 자신들 가운데 일어난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본다는 사실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17절을 보십시오. 그 절망스러운 가정 죽음의 행렬로 이어지는 가정에 임한 예수님의 생명의 역사가 사방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렇게 바뀌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볼 때 사람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우리의 삶의 진보와 우리 삶의 기적을 통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동정 받는 사건을 영원히 동정 받는 사건으로, 동정 받는 환경을 영원히 동정 받는 환경으로 동정 받는 기업을 영원히 동정 받는 기업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힘이 없으면 목회자들도 동정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힘이 없고 실패하고 연약하면 사람들은 동정의 말로 무시합니다. 우리는 동정적 환경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 반전시키고 역전시켜야 합니다. 주님 만나면 절망적인 사건과 환경도 하나님의 큰 영광은 더욱 드러낼 기회가 될 것입니다.
역사에 아름다운 흔적을 남긴 사람들을 보십시오. 괴테는 81살에 필생의 역작인 파우스트를 쓰기 시작해 7년 뒤 탈고했습니다. 증기기관을 발명한 제임스 와트는 64살 때 은퇴하고 나서야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사상 가장 방대한 역사기록인 `사기(史記)'를 써 남긴 사마천(司馬遷)은 정치범으로서 국부를 절단당하는 궁형(宮刑)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거기에서 동정 받는 인생으로 끝맺지 않고 사기를 썼습니다. 동료의 질투로 모함에 걸려 두 다리를 절단 당하고 얼굴에 죄인 표시인 문신(文身)까지 당한 손자(孫子)는 나폴레옹까지 애독했다던 만고의 병법을 남겼습니다. 얼마든지 인간적인 집념으로도 동정을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만나 우리의 아름다운 흔적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이제까지 내 인생 이렇게 살다 끝날 것인데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얼마든지 다 끝난 것같은 인생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삼손이 인생을 보십시오. 눈이 빼임 당하고 착고에 매여 마지막 같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 받습니다. 그의 젊은 날은 부모에게 짐 덩어리 인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잘못 사용하였습니다. 동정받는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얼마 남지 않은 인생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삿 16:28)" 하나님은 마지막에 그의 인생을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으로 바꾸어 주었습니다.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삿 16:30)"
성경에 보면 안나라는 여인을 보십시오. 출가한 지 일곱 해에 남편이 돌아가셨습니다. 짐 덩어리 같은 인생입니다. 동정 받는 인생입니다. 84년 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녀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주야고 금식 기도하다가 마지막에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영광스러운 인생이 되었습니다.(눅 2:36-38) 짐덩어리 같은 인생, 남의 동정만 받던 인생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인생이 되는 데는 늦은 시간이 없습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 예수님 만나면 영광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나에게 짐스러운 상황은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오히려 그것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습니다. 죽음을 생명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초상집을 잔칫집으로, 지옥 같은 집을 천국으로 바꿔 주신 예수님의 소문을 내는 인생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대지(大地)'의 작가 펄 벅 여사가 자폐증을 앓는 한 아이의 어머니였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그녀는 "차라리 이 아이가 죽어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마음속에서 몇 번이고 거듭 외친 적도 있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절망적인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만나고 인생의 삶과 죽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 고통으로 위대한 작품이 나왔습니다. 진주는 보석입니다. 그러나 진주를 품고 있는 조개는 그것은 아픔의 도구일 뿐입니다. 그 아픔을 통해 진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동정의 행렬을 영광의 행렬로 바꾸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인생에 놓여 있는 수많은 고통과 문제, 장애 안에는 그만큼, 아니면 그보다 더 큰 이익이나 기회가 숨어 있습니다. 고난을 하나님을 만나게 하고 고난은 겸손하게 하고 고난은 새로운 기회의 문을 열어줍니다. 몸의 열은 괴로움을 주지만 건강을 위한 희망입니다. 우리나라 강원도 태백 산골짜기에 예수원이라는 공동체를 세운 분은 아처 토레이 목사님입니다. 그의 아버지 루벤 토레이는 중국 선교사였습니다. 그가 1945년 중국 내지로 트럭을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병원에 와 보니 중상이어서 오른팔을 잘라 내야 했답니다. 그런 절망적 고통의 현실에서도 토레이 목사님은 원망하지 않았답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까지 두 팔을 주셔서 잘 살았는데, 이제 한 팔을 가져가시니 감사합니다." 중국이 공산화됨으로 그는 미국으로 귀국했다가 1952년 한국에서 사역하기 위해 돌아오자 그는 6.25 전쟁 이후 팔다리를 잃은 사람들을 수없이 많음을 목격하였답니다. 그 순간 그는 자신에게 팔이 없도록 하신 것이 한국 사역을 위한 하나님의 준비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답니다. 그는 팔이 없는 사람들의 괴로움과 불편함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었답니다. 그래서 토레이 목사님은 의수, 의족 만드는 기술을 익혀서 서울, 청주, 대구에 재활 센터를 세우고 팔다리가 없어진 군인들과 사람들에게 팔(의수)과 다리(의족)를 만들어 주었답니다. 덴마크의 세계적인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인생은 하나님의 손에 의해 쓰여 지는 동화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동화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입니다. 인생을 단편적으로 보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의 죽음, 아들의 죽음 그것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만나면 더 나은 삶을 통해 우리의 아픔과 실패를 얼마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릴 기회로 만들 수 있습니다. 하님은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롬 8:17)”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우리 가운데 계신 주님 그 빛난 영광 온 하늘 덮고 그 찬송 온땅 가득해 내 눈 주의 영광을 보네 찬송 가운데 서신 주님 주님의 얼굴은 온 세상 향하네 권능의 팔을 드셨네 주의 영광 이곳에 가득해 우린 서네 주님과 함께 찬양하며 우린 전진하리 모든 열방 주볼 때 까지”
죽은 남편과 아들로 절망하는 과부를 찾아가신 예수님이 오늘 우리에게도 찾아오십니다. 절망하지 마십시오.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계시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사람은 넘어지고 쓰러지면 도망하고 피하지만 우리 주님은 넘어지고 쓰러지는 사람에게 찾아 오셔서 손을 내미십니다.
절망의 행렬에서 소망의 행렬로 일어서기 바랍니다. 죽음의 행렬이 생명의 행렬로 일어서기 바랍니다. 동정 받는 행렬에서 영광을 드러내는 행렬로 소문난 인생으로 일어서기 바랍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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