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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3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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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하나님을 경외하라
시편 34장 9절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어느 날 런던의 한 클럽에서 문학인들이 만나 역사에 빛나는 사람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 하나가 "만일 밀턴이 지금 이 방안으로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자 "그가 살아있는 동안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을 생각해서라도 열렬하게 환영해 주고 싶은데"라고 대답했습니다. "셰익스피어가 온다면요" 라는 물음에는 "그에게 모두 일어나 영광의 관이라도 씌워주고 싶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걸어 들어오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모두들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그 발 앞에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드려야 할 것입니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언제나 마음속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거슬리거나 섭섭하게 하거나 노하게 할까 하여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은 늘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며 죄악을 멀리 함으로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강퍅한 사람은 언제나 마음이 완악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하며, 고집을 피우고, 회개할 줄 모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은 자신의 그 강퍅한 마음으로 인해 재앙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항상 경외하는 자는 복되거니와 마음을 강퍅하게 하는 자는 재앙에 빠지니라"(잠28:14)
잠언 1장 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그리고 시편 115편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대소 무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또 누가복음 12장 4∼5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한 마디로 말하면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이 말씀은 온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우리에게 사람이나 세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은 본래 우리 인간의 본능 가운데 하나로, 하나님께서 이 본능을 우리 인간에게 주신 것은 우리 생명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고 유익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다음부터는 인간을 유익하게 해주는 본능이 본래의 지경을 지나서 도에 넘치게 되고, 또한 그 형태가 변해서 마땅히 두려워해야 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을 두려워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공포심이라는 것 이 보통 사람에게 있어서는 생명에 도움이 되는 것보다 여러 가지 인간생활을 해하는 하나의 감정적 요소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람은 흔히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눈을 두려워합니다. 사람의 말을 두려워합니다. 흔히 민주사회에서는 사람이 소위 여론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거듭거듭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라, 하나님을 경외하라.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만 보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까지 보십니다. 사람은 밖으로 나타나는 행동만 살피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행동 배후에 숨어 있는 동기를 보십니다. 사람은 겉만 보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속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 사무엘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나는 중심을 보노라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의 은밀한 일까지 살피시고 인간의 모든 비밀을 드러내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사람이 하나님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이 은밀한 가운데 행한 것도 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감추인 것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없고 숨은 것이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소근 소근 거린 말이 집 위에서 다른 사람이 다 듣게 전파된다고 성경은 말씀했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시지요? 요셉의 형들이 동생을 시기해서 멀리 애굽으로 팔아 버린 후에 자기 아버지 야곱에게 돌아가서 어떻게 했습니까? 형들이 어떻게 할까 생각하던 중에 요셉의 채색옷을 벗기고 양을 잡아 그 피를 요셉의 옷에 묻혀 그것을 가지고 집에 돌아가 슬픈 낯을 하면서 아버지 야곱에게 내밀었습니다. 야곱은 그 옷을 보더니 내 사랑하는 아들을 짐승이 잡아먹었구나 하면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를 감쪽같이 속였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속일 수는 없었습니다.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13년이 지났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은밀한 가운데 지은 죄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애굽의 궁중에서 환하게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렇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취해서 간음한 뒤에 자기의 범한 죄를 덮어버리기 위해서 그 남편되는 우리아를 모함했습니다. 우리아는 다윗의 충신이었습니다. 비밀문서를 써서 우리아에게 주며 요압 장군에게 갖다 주라고 했습니다. 그 내용은 우리아로 하여금 최일선 암몬성 가까이에 가서 싸우게 해서 암몬 사람의 칼에 죽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요압 장군은 우리아를 통해서 전달받은 다윗의 친서를 받자 그 지시대로 했습니다. 결국 우리아는 일선에 나가 격전지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윗의 손을 대지 아니하고 적의 손을 통해서 죽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아가 일선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것으로만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일시로 사람의 눈을 가리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이 험악한 죄는 오래가지 아니해 서 드러나고야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은밀한 곳을 다 보십니다.
사람의 눈은 피할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눈은 절대로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사람 나단 선지를 통해서 드러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모르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모르시게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왜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범한 죄를 드러내실 뿐더러 모 든 죄를 죄대로 벌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마귀는 두 가지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니까 우리가 아무리 죄를 범해도 벌하시는 분이 아니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게 되면 어떻게 하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네가 아무리 죄를 회개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그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 고 합니다. 여러분, 분명히 들으세요.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아무리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중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은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나님 이 용서할 수 없는 죄는 없습니다. 아무리 더럽고 추하고 무서운 죄라도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옮기실 뿐더러 기억도 안 하십니다.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흰눈같이 희게 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벌하십니다. 금생에 벌을 받지 않으면 내생에 가서라도 반드시 형벌하십니다. 때로는 양심을 통해서 형벌하십니다. 때로는 육신의 병을 통해서 형벌하십니다. 어떤 때는 사업의 실패를 통해서 형벌하십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형벌을 통해서 벌하십니다. 어떤 때는 3, 4대까지 내려가면서 형벌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무서운 것은 마지막 심판입니다. 민수기 32장 23절 말씀에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우리는 아무리 다른 사람이 모르게 범한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보십니다. 그 죄는 그 사람의 뒤를 항상 졸졸 따라다닙니다. 그러다가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는 옛말처럼 요긴한 대목에 가서 꼭 마주칩니다. 그 죄가 꼭 그 사람을 벌하고야 맙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둡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만 벌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죽은 후 에 영혼까지도 지옥불에 던져 형벌하신다고 성경에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도 말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사람이 잠깐 실수해서 범한 죄 때문에 영원히 형벌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25장 30절에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는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 47∼48절에 보면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버리라 한 눈으로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고 예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한 분밖에 안 계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그런데 여러분, 왜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육신의 눈으로 보이지 아니합니다. 그러므로 대개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보지 못하시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은밀하게 죄를 범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은밀이라는 것이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만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보이지는 않지만 실체가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가령 공기가 우리 눈에 보입니까? 전파가 우리 눈에 보입니까? 사람의 영혼이 우리 눈에 보입니까? 그러나 실제로 있지 않습니까? 히브리서 기자가 모세의 신앙을 기록한 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살았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눈으로 보이지 않지 만 우리의 눈으로 보는 것이나 똑같이 그 앞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하나님을 직접 볼 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나를 내려다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 것을 언제나 의식하면서 생각하고 말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을 지으셨습니다. 눈을 지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생활을 감찰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우리 믿음의 선배 요셉의 생활을 보세요. 그의 상관의 아내가 자신은 종의 처지에 있는 신분인데도 그녀가 음욕을 채우려 할 때, 그것도 아무도 없는 데서 그러는데도 다른 사람 같다면 오히려 행운의 기회로 여기겠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서 이 악을 행할 수 있습니까? 하면서 도망쳤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보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보고 계시다는 것을 의식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성도 여러분, 제가 지금 이 단에 서서 여러분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시선의 방향, 몸의 자세가 다 보입니다. 누가 재미있게 듣고 계시나 아니면 곁눈질을 하고 계시나 다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시는 것은 제가 여러분을 보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저는 여러분의 외모만을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들여다보십니다. 병원에 가면 X-ray 촬영실이 있습니다. 우리 육안으로는 몸밖의 부분만을 봅니다. 그러나 X- ray를 비치면 우리 몸의 내부를 볼 수가 있습니다. 뼈가 다 보입니다. 폐나 심장이나 위장이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의 속마음, 심령의 상태를 다 보십니다. 밖으로 볼 때는 아무 리 웃는 낯으로 말하지만 속에는 칼을 품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것까지도 다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는 생활,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X-ray보다 더 밝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앞에서 바른 생활을 하려고 힘쓰는 사람에 대해서 사람이 흠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전에 다니엘 같은 사람은 이방에 포로되어 가서 지내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의 친구 세 사람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도 같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살았습니다. 누구도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밝게, 그리고 바르게 살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 예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하나님께 기도했는데 그를 시기하 는 동관들은 이것을 가지고 다니엘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다리오 왕에게 간하기를 앞으로 한달 동안 전국에 있는 사람 누구든지 다리오 왕 이외의 어느 신에게든지 기도하는 것이 발견되면 사자굴에 집어넣기로 조서를 꾸미고 왕이 어인을 찍게 했습니다.
그저 다니엘을 잡기 위해서 이런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다니엘은 이 사실을 알고도 그가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 예 루살렘을 향해 창문을 열어 놓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니엘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다리오 왕이 무섭지 않았습니다. 사자굴에 집어넣는 것이 무서울 것이 없었습니다.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는 어떠했습니까? 그 젊은이들이 얼마나 신실하게 살았습니까? 그들을 책잡을 만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금으로 신상을 만들어 세우고는 여기에다 절하라고 선포했습니다.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를 시기하는 바벨론의 동관들이 다른 것으로는 흠잡을 수 없고 왕에게 받는 총애를 뺏 을 수 없으니까 그들이 하나님 외에는 무엇에도 절하지 않는 것을 알고는 그들을 잡기 위해 그 물을 쳤습니다. 왕이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섬기지 아니하는 일 이라고 해서 지켜보고 있다가 금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는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를 끌고 왕 앞에 왔습니다. 신하들의 고발을 들은 느브갓네살 왕은 아주 노했습니다.
너희가 내가 세 운 금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다는데 그것이 사실이냐? 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신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이 말을 들은 느브갓네살은 말할 수 없이 노했습니다. 너희들, 잘 들으라. 이제라도 풍악이 울릴 때 내가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면 좋지만 만일에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을 것인데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냐? 고 했습니다. 이때 사드락, 메삭 그리고 아벳느고가 왕에게 한 말이 이렇습니다. 느브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시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여러분, 어쩌면 이렇게 대왕 앞에서 포로의 신세로 있는 청년들이 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할 수가 있었습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보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히브리서 13장 5∼6절을 보세요.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장래를 위해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대개 장래에 대해서 두려운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장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대개는 싫어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장래에 대한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4장에 보면 로마 총독 벨릭스가 그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예수 믿는 도를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기를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였다는 장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서 말하면 두려워합니다. 왜요?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는 사람의 장래는 심판 받을 것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는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왜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까? 우리를 위해 우리 아버지 집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23편 마지막 절에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러분, 우리를 위하여 아버지의 집이 마련되어 있는 것을 믿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5장 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 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장래가 분명히 약속되고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심판이요 형벌이기 때문에 이것처럼 두려운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죄를 멀리 해야 합니다. 혹시 죄를 범하면 즉시 회개해서 죄를 씻어 버려야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죄사함 받고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 때, 그 하나님의 얼굴은 두려운 재판장의 얼굴이 아니라 인자하신 아버지의 얼굴입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사랑이 됩니다.
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받는 축복 및 결과가 무엇인가를 봅시다.
첫째, 복을 받습니다. (신5:29, 시115: 13)
주식회사 영성 대표 회장 이 장로님 이야기입니다. 33 나이인 1969년 갑자기 피를 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쓰러졌습니다. 정신을 잃었습니다. 당시 결핵은 치명적인 불치병이었습니다. 진료를 받아 보니 사망 선고였습니다.
"가망이 없습니다" 의사의 한 마디에 충격을 받고 마지막으로 찾은 곳이 서대문 시립병원 근처 폐병 환자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으로 가 보니 매일 수많은 폐병 환자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그는 간절한 기도를 하였습니다. "하나님! 한번만 살려 주시면 결핵 환자들을 위하여 이 생명을 바치겠습니다" 생명을 건 필사적인 서원기도였습니다.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병을 고침받았습니다. 완쾌되었습니다. 그는 사업 전선에 뛰어 들었습니다. 오직 하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사업의 이익금은 모두 결핵환자들을 위하여 사용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장로님은 <베데스다 선교회>를 만들었습니다. 폐병환자들의 보금자리를 만들었습니다. 종로 YMCA 옆 금싸라기 땅 500평(시가 1000억원)과 인천시 내오리 산 28번지 1만 8,900평(시가 30억원), 현금 26억여원을 모두 바쳐서 폐병 환자들을 위하여 복지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40년 간 매월 평균 200명 정도 환자를 돌보았습니다. 모두 7만명 환자에게 약을 보내 주었습니다. 그는 늘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빚진 자로서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온 일을 실천에 옮기는 것뿐입니다"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112:1)
둘째, 생명에 이릅니다.
1955년 미국에서 흑인 가수로는 처음 메트로폴리탄에 출연, 영감있는 노래로 관중을 사로잡은 여가수가 있었습니다. 마리아 엔더슨이라 불리우는 그녀의 대표적인 곡은 '그 누가 나의 괴로움을 알며'입니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인종과 피부에 대한 편견과 차별로 불행한 나날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그녀의 믿음은 모든 고난을 이기고 더욱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내 괴로움을 아무도 모르나 오직 주님을 아신다." 그녀는 이런 고백을 하며 현실을 극복했습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의 모든 삶을 예비하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바로 영혼이 잘 되는 길이요, 범사에 잘되는 길이요, 건강하게 되는 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간구를 들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며, 재앙이 변하여 복이 되게 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기도할 수 있다는 것에 얼마나 큰복인지를 알고,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지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로 찬양하며 맡겨 드려야 하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만나지 아니하느니라." (잠19:23)
셋째, 장수하고 승리를 주십니다.(시60:4)
영국이 차알스 1세의 악정으로 고통에 처해 있을 때 새벽별처럼 나타나 영국을 구한 크롬웰에 관한 일화입니다. 크롬웰은 어려서부터 청교도의 가정에서 신앙 훈련을 받고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항상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는 하나님의 편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편에서 일하는 사람은 기도하는 일과 성경 읽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크롬웰은 국왕을 반대하는 청교도들로 구성된 강한 군대를 지휘하는 대장이 되었습니다. 국왕의 군대와 크롬웰의 군대가 맞서서 전쟁을 하였습니다. 크롬웰은 전쟁터에서도 시간이 생기면 기도하였고 쉬는 시간에는 성경을 읽었습니다. 싸움은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고 크롬웰은 언제나 선두에서 싸웠습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갑자기 크롬웰이 말에서 떨어졌습니다. 적의 총알에 맞은 것입니다. 말에서 떨어진 크롬웰은 땅에 떨어지면서 “이제 마지막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별로 아픈 곳이 없었고 총을 맞은 가슴도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참 이상한 일이군!” 살펴보니... 총알은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둔 성경에 박혀 있었습니다. 총알이 머문 곳은 전도서 12장 1절이었습니다.
“네가 젊었을 때 네 조물주를 기억하라!”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년세는 짧아지느니라"(잠19:27)
넷째, 여호와께서 소원을 이루어 주시고,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또한 양식을 주시고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십니다.
유태영 박사는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모들은 형편 때문에 교육시킬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유 박사는 어릴 때 동네 사람들로부터 똑똑하다는 인정을 받아 겨우 국민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5학년 때부터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하나님께 기도하면 무엇이든지 들어주신다는 교회학교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는 중학교를 다니게 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통신중학교를 다녔으며 그 후에 서울로 올라와서 낮에는 구두닦기를 하면서 저녁에는 야간 고등학교를 다녀 졸업했습니다. 그는 여러 번 굶어 보았으며 남의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구하기도 했습니다. 한강이 얼어 붙은 추운 겨울에는 냉방에서 내의도 없이 있어야 했는데 너무 추워 잠을 못 자고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새벽에는 교회에 가서 기도하고 햇볕이 나면 교회 담 밑에서 몸을 녹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언제나 하나님을 믿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처럼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의지하자 비록 과정은 힘들었지만 하나님께 복을 받아서 미국, 이스라엘, 덴마크로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유 박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꿈을 가지고 기도에 힘쓴 것이 형통의 비결이었다고 말합니다.
"저가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시145:19)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며 그 언약을 영원히 기억하시리로다"(시111:5)
다섯째, 주께서 도움과 방패가 되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 도움이시오 너의 방패시로다"(시115:11)
오래 전에 미국 캘리포니아주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겁에 질려 이리 뛰고 저리 피하고 야단법석이었는데 나이 많은 한 부인성도는 자기 집에 조용히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지진이 끝난 후 사람들은 그 노부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런 소동 속에서도 의자에 기쁜 얼굴로 앉아 계실 수가 있습니까? 부인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내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그토록 흔드시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생각과 그러는 가운데서도 나를 그의 손안에 안전하게 붙들어 주신다는 생각으로 기쁨에 잠겨 무서워 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라고 말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자시요 나의 하나님이 시요 나의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
여섯째, 견고한 의뢰와 자녀에게 피난처가 있습니다.
텍사스 시스코의 한 호텔 방에서 한 젊은이가 절망스러운 신음을 내뱉고 있습니다. 탁자에는 하얀 색 알약 수 십 알이 널려 있습니다. 한참 몸부림을 치던 젊은이가 갑자기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나님, 어릴 적 어머니께서 ‘세상 사람은 모두 널 잊고 버려도 하나님은 널 잊지 않으신다. 그 분은 너에게 참 피난처, 요새가 되신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가 그동안 피난처 되신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그는 마침내 눈을 떴습니다. 무엇인가 결심한 듯 두 주먹을 꽉 쥔 채 방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투자자 여러분, 여러분이 투자하신 그 귀한 돈을 다 날리고 부도 위기에 처하게 됐습니다. 여러분을 뵐 면목이 없어 자살하려고 수면제를 사서 호텔에 투숙했다가 어릴 적 어머니가 해주신 말씀, 하나님이 저의 피난처이시라는 말씀이 생각나 밤새 회개와 헌신의 기도를 드리고 이 자리에 용기를 얻어 나타났습니다. 한 번만 용서하시고 상환을 유예해 주시면 원금과 이자 모두를 쳐서 갚겠습니다.” 그 후, 투자자 가운데서도 가장 큰 피해를 본 두 투자자가 다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도록 허락해줬습니다. 그의 새로운 사업은 대성공을 거뒀습니다. 이 사람이 세계적인 호텔 체인 힐튼의 창업자 N. C. 힐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 맡길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어서 맡기세요. 그 분은 기꺼이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좋은 하나님이십니다. 맡기기를 미안해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교만임을 기억하십시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로다"(잠14:26)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이와 같은 은혜를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기도: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게 하시고 우리의 일생이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아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 2부: 분반(구역)공부 자료
1. 말씀: 하나님을 신앙하는 인생
파스칼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 하나님을 탐구하는 인생, 하나님을 신앙하는 인생으로 분류하면서 이들을 각각 어리석은 자, 불행한 자, 그리고 행복한 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하나님과 무관한 인생은 감사와 무관합니다. 하나님을 탐구하는 인생은 감사도 자기 기준에서 탐구만 합니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인생은 감사에 풍성한 인생입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들입니다. 감사에 풍성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믿는 사람이 풍성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역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지식과 지혜의 근본입니다.
2. 묵상 및 토의
0 당신은 매순간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습니까? 혹 마음을 강퍅하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0 나의 생애 목적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인가?
0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자인가?
0 나는 진정 세상 무엇보다도 하나님만을 더 사랑하는가?
0 나는 이 세상에서보다 하나님 나라에서 존귀하게 되기를 사모하는가?
0 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것을 불살라 바칠 수 있겠는가?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3. 예화: 성경의 인물- 오바댜
1)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오바댜는 아합 왕의 궁내대신으로서 여호와를 잘 섬기는 사람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한 왕 아합의 신하로서 여호와를 잘 섬기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바댜는 하나님을 크게 경외하는 자였습니다. 모든 사람이 자기의 이권과 실익을 찾아 왕후 이세벨을 따라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섬겼지만 오바댜는 오직 하나님만 경외한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2) 두터운 신임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합이 가뭄이 들어 짐승들이 갈증으로 죽게 되자 수원을 찾아나서게 되는데 그때 아합이 오바댜만을 데리고 가는 것을 보면 그가 아합 왕에게 커다란 신임을 받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나 옥중에서나 성실하게 일함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두터운 신임을 얻는 생활을 했습니다.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어 총리가 되었으며 왕들이 바뀌어도 오랫동안 총리 일을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나 권력에 타협하지 않았고 신앙을 철저히 지키면서 또한 세상일에 있어서도 모범적이었습니다.
3)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종들을 도왔습니다. 오바댜는 아합과 이세벨이 모든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이는 때에 왕이 찾아 죽이려는 여호와의 선지자 100명을 몰래 숨겨주고 먹을 것까지 제공했습니다. 오바댜의 이런 행동은 모든 권력을 포기할 각오는 물론 죽음까지도 각오한 행동이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의 종들을 위해 죽음까지도 각오했습니다. 에스더는 이스라엘 민족을 살리기 위해 ‘죽으면 죽으리이다’고 결심하고 왕 앞에 담대히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에스더도 살게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만의 간교한 꾀에서 살려내셨습니다. 명예와 권력을 잃음은 물론 죽음까지도 각오하고 행동하는 오바댜를 하나님께서 지켜주셨습니다.
4. 찬송: (30 장) 여호와 하나님
1. 여호와 하나님 하늘에 계시니 온천하 만민 주 앞에 찬송하네 이 천지 만물도 주 앞에 엎드려 그 거룩하신 이름을 늘 높이네
2. 주 언약하신 것 끝까지 지키니 저 하늘나라 향하여 곧 가리라 주 얼굴 뵈올때 내 맘이 기쁘고 영원히 주의 영광을 찬양하리
3. 왕의 왕 되신 주 하늘에 계시니 이 세상 죄악 이기신 구주 예수 저 천군 천사들 주 옹위하고서 뭇성도 함께 영원히 늘 섬기네
4. 주 삼위일체께 승리한 무리들 다 기쁜 음성 높여서 감사드려 창조주 하나님 내 주도 되시니 주 앞에 나도 엎드려 경배하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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