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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1:20-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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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영봉 목사 |
참고 :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
2013년 7월 7일 주일 설교
와싱톤한인교회 김영봉 목사
거룩한 동행"(Holy Companionship)
빌립보서(Philippians) 1:20-21
1.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지난 주, 저는 '사도신경' 연속설교의 결론으로서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라는 신앙 고백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 말씀을 드리면서 저는 바울 사도의 저 고백을 저 자신도 고백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라는 말은 "살아가는 목적이 그리스도니"라는 뜻도 되고, "살아가는 이유가 그리스도니"라는 뜻도 되며, "살아가는 힘이 그리스도에게서 나온다"는 뜻도 됩니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살면,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앞 절에서 사도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 살든지 죽든지, 전과 같이 지금도, 내 몸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리라는 것입니다.
"살든지 죽든지"를 달리 번역하면, "사는 것을 통해서든 죽는 것을 통해서든"이 됩니다. 만일 죽게 된다면, 죽는 방법을 통해서도 주님을 존귀하게 하겠다는 뜻입니다.
죽음이 먼 일처럼 보일 때는 이런 말을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지금 죽음이 코 앞에 닥쳐 온 상태입니다. 언제 끌려 나가 사형을 받을지 모르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실제로, 빌립보서를 써서 보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분은 참수형으로 순교를 당합니다. 그런 가능성을 앞에 둔 상태에서 "살든지 죽든지"라고 말했기 때문에 이 말에 특별한 무게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해져서"라고 말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초라하게 두려워 떨지 않게 되기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답게 죽기를 소망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죽는 모습을 지켜 본 백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막 15:39)라고 고백한 것처럼, 바울 사도는 자신이 죽음을 당하는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분의 순교에 대한 기록이 없지만, 분명히 그랬을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믿음과 삶을 저도 존경합니다. 하지만 그분은 전도자로서 복음 전파를 위해 전생애를 바친 분입니다. 그러니 그분이 그렇게 고백하고 그렇게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일 먹고 살기 위해 분투해야 하는 저는 그럴 수가 없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생각을 합니다만, 실은 핑게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죄의 바이러스에 오염되어 있고, '거짓의 아비'(a father of lies)인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끊임없이 교란시킵니다. 특별히, 거룩한 삶을 살려는 의지를 교묘하게 흔들고, 하나님께 가까이 가려는 열망을 잠재웁니다. 영적 생활을 무너뜨리는 가장 효과적인 핑계는 "나는 다르다", "나는 안 된다", 혹은 "나는 사정이 다르다"는 구실입니다. 그런 구실로써 스스로를 속이고 하나님까지 속이려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같은 얕은 속임수에 넘어가실 분이 아닙니다.
빌립보서가 목회자들과 선교사들에게 보내진 것이라면 위와 같은 핑계가 혹시 통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 편지는 빌립보에 사는 교인들에게 쓰여진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자기처럼 살아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서의 후반부에 가면 이렇게 씁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으면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3:17)
"나를 본받으십시오"라는 말은 다른 편지에도 나옵니다. 그 말씀들을 모두 조사해 보면 무슨 뜻인지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모든 면에서 완전하니 본받으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분에게도 단점과 허물이 있었고 때로 실수도 했습니다. 다만, 주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마음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고, 그분을 위한 전적인 헌신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것을 본받으라는 것입니다.
2.
그렇다면, 어떻게, 평범한 일상 생활을 살아가는 우리가 바울 사도의 높은 믿음과 삶의 자세를 본받을 수 있을까요? 그 대답을 우리는 바울 사도의 또 다른 유명한 고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사도께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갈 2:20)
이 고백에서 분명해지듯, 사도는 주님과 영적으로 하나가 되어 주님의 뜻과 생각으로 그의 내면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의 옛 자아는 힘을 잃고 성령께서 오셔서 그 자리를 채우셨습니다. 과거에는 마음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이 주님의 뜻과 어긋났고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주님께 근심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주님의 뜻을 소원하고 생각하고 열망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서 조금 더 내려가면 사도께서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셔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염원하게 하시고 실천하게 하시는 분입니다.(2:13)
이것은 사도가 아는 신학 이론이 아닙니다. 그분의 체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 거하는 거룩한 동행을 하게 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일을 생각하게 되고 그것을 소망하게 되며 그것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 번째 관심은 매일 이와 같은 거룩한 동행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매일 주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시간에 충분한 분량의 시간을 떼어 주님과 사귀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주일에 한 번 예배에 나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지 모릅니다. 마음과 정성을 다해 예배하는 것은 신앙 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주일에 한 번 예배 드리는 것에 만족한다면, 믿음에 있어서 결코 성장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사귐의 원리' 때문입니다. 모든 인격적인 사귐은 일대일의 만남에서 시작합니다. 군중 사이에 섞여서 일대 다수로 만나는 것으로는 진정한 사귐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은 군중에 섞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일 주일에 한 번 혹은 한 달에 한 두 번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는 사귐이 깊어질 수 없습니다. 지속적으로 만나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속성' 떄문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육신적인 존재이고 주님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육신적인 존재인 우리에게는 영적인 것을 갈망하고 접촉할 수 있는 '영성'(spirituality)이 주어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신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오감(five senses)을 우선적으로 따라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영적인 것을 감지할 수는 있지만, 그 능력은 너무도 쉽게 무뎌지고, 너무도 쉽게 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과의 사귐을 게을리 하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고 모두 다 거짓말 같아집니다. 영적으로 무감감해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과 함께 마음과 정성을 다해 드리는 예배에 더하여, 매일 하나님과 독대해야 합니다. 적어도 30분 이상, 가능하면 하루에 한 시간 정도는 하나님과의 독대에 떼어 바쳐야 합니다. 새벽기도회에 나오든, 홀로 QT를 하든, 기도와 말씀 묵상과 중보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들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기 전에 내 마음을 하나님께 붙들어 매도록 가장 귀중한 시간, 가장 좋은 시간을 떼어내야 합니다.
하루에 30분 혹은 1시간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루를 지내면서 TV 시청에 시간을 얼마나 사용합니까? 인터넷에서 헤엄치며 보내는 시간은 또 얼마나 됩니까? 신문을 읽거나 다른 일에 얼마나 시간을 사용합니까? 반면, 하루에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일에 얼마나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 시간을 비교해 보시기 바랍니다.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답습니까?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에 투자하는 시간에 비례하는 법입니다.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경쟁하고 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것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우리의 영혼을 어지럽히고 더러운 욕망을 부추기며 헛된 소비를 자극합니다. 그런 것에 붙들리면 주님을 까맣게 잊고 허망한 일에 휘둘리게 됩니다. 분주하고 경황없이 살면서도 무엇을 위해 살고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3.
매일 충분한 시간을 내어 하나님과 사귀는 것에 더하여, 모든 일을 통해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루 종일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한 시간 이상 기도와 말씀 묵상을 통해 하나님과 깊은 사귐을 나누었다 해도, 일상 생활을 시작하면서 하는 일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주님을 잊고 산다면, 충만했던 우리의 영성은 다시금 고갈되어 버릴 것입니다. 하루에 충분한 시간을 떼어 바치는 이유는 하루 종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루 종일 주님과 함께 동행하려면,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런 의식이 흐려지면, 일과 중에라도 잠시 멈추어 다시금 주님과 사귀는 시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그래서 수도원에서는 '낮기도'(daily examen)의 전통이 생겼습니다. 정오에 그리고 늦은 오후에 잠시라도 시간을 내어 묵상하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주님의 임재에 자신을 다시금 깨우는 것입니다. 저도 바쁜 일과에 쫓길 때면 일과 중간에 예배실에 와서 잠시 숨을 돌리곤 하는데, 그것이 영적으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이 점에 대해 바울 사도가 한 말씀을 기억하면 좋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 (고전 10:31)
어떻게 하면 먹는 것 혹은 마시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님께서 주셨으니 감사하게 먹고, 식탐을 위해 게걸스럽게 먹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해 일할 힘을 얻기 위해서 먹고, 초라한 식탁이지만 성찬을 대하듯 먹고 마시면,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주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과 동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니콜라스 허만(Nicholas Herman)이라는 사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1610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납니다. 청소년기에 그는 30년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고, 좌골신경(sciatic nerve)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습니다. 그 이후 그는 다리에 심한 장애를 입고 살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잠시 광야로 나가 수도 생활을 하다가, 파리에 새로 세워진 수도원에 요리사로 취직합니다. 15년이 지난 후, 그는 수도사들의 신발을 고치는 일로 자리를 옮깁니다. 그렇게, 40여년 동안 수도원에서 허드렛일을 섬기다가 그는 1691년에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 수도원에서 니콜라스는 가장 보잘 것 없는 일을 섬겼지만,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인해 모두로부터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특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의 말에는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배려와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그의 표정에는 늘 하늘의 평화가 깃들여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일하는 것을 보면 마치 아름다운 율동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늘 무엇엔가 취해 있는 것 같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그 기쁨을 전염시켰습니다. 그는 늘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고, 누군가와 말 없는 대화를 주고 받는 것 같았습니다. 그의 손을 거쳐 나오는 일은 항상 완벽했고 모두를 만족하게 했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걱정하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모두가 그에게서 특별한 것을 느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어디서 온 것인지, 몰랐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놀랍게도, 그가 남긴 글과 편지가 발견되었습니다. 그것을 읽어 본 사람들은 비로소 니콜라스의 비밀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은사의 이름을 따서 로렌스 형제(Brother Lawrence)라고 불리기를 좋아했던 니콜라스는 매일, 매 순간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고 살았다는 사실을 남겨진 글에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의 글이 묶여서 책으로 나왔고, <하나님의 임재 연습>(Practice of the Presence of God)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지금까지도 영성 고전(spritual classic)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주방에서 계란 프라이를 뒤집을 때조차도 주님을 생각하며 했고, 수도사들의 옷을 다림질할 때도 주님의 영광을 위해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감미롭고 행복한 삶은 다시 없다. 그것을 실천하여 그 맛을 본 사람이 아니고는 그것을 알 수가 없다.
4.
이 대목에서 직업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직업을 가진 사람은 하루의 가장 많은 시간을 직장에서 보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루 종일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려면 직장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님을 위해 섬기는 직업이 따로 있고 그럴 수 없는 직업이 따로 있다고 오해합니다. 목회, 선교, 의료, 교육 같은 직업은 주님을 위해 섬길 수 있는 직업이고, 그 외에 다른 직업들은 그냥 '밥 먹고 사는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직업에 종사하면서 주님과 동행하고 그 일을 통해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직업 현장에서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직장을 바꾸거나 직업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래야만 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예컨대, 법률회사에 근무하는 변호사를 생각해 봅시다. 법률회사가 클 경우에는 대개 위에서 시키는 대로 케이스를 맡아야 합니다. 그런데 상사가 아무런 정의감도 없이 돈이 되는 케이스면 무조건 수임하여 변호하도록 시킨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러면 내가 맡은 고객이 뻔히 잘못했고 거짓말을 하고 있음에도 그 사람을 위해 변호해야 합니다. 그런 일이 반복될 경우, 심각하게 고민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불의한 피고를 위해 변호할 수 없고, 그런 일을 통해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혹은 직업을 바꾸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람의 몸에 해로운 식품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고 칩시다. 그 회사에서 일하면서 주님을 높일 수는 없습니다. 혹은 음란물을 만드는 일을 하면서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을 높일 수는 없습니다.
우리 교회를 거쳐 가신 분 중에서 한국에서 건축 사업을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지난 번 한국에 방문했을 때 그분에게, 요즈음 사업이 어떠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분 대답이, 그 동안 하던 일을 멈추고 다른 일을 준비하고 있다고 하십니다. 그 동안에 그분은 주로 아울렛 즉 창고형 대형 마트를 지어 팔았습니다. 그런데 대형 마트가 골목의 작은 상점들을 망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소상인들의 아우성을 들으니 자신이 그들을 망하게 한 것처럼 가책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일에는 손을 떼고 지금은 중저가의 오피스텔을 짓기로 방향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분이 그런 고민을 하시는 것에 대해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고민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더 많은 경우에는 직장이나 직업이 아니라 일을 대하는 태도만 바꾸면 됩니다. 그러면 하루 종일 주님과 동행할 수 있고, 직업을 통해 주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직장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에 기도로써 주님께 자신을 맡깁니다. 오늘 하루 직장에서 만날 모든 사람들을 '변장하고 찾아온 주님'으로 대하게 하시고, 오늘 하게 될 모든 일이 주님께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람의 눈이 아니라 주님의 눈을 의식하며 일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일과 중에 때때로 자신을 돌아보며, 주님께 대한 의식이 흐려져 있으면, 잠시라도 한적한 곳에 가서 조용한 시간을 가집니다. 그렇게 하면 하루 종을 주님과 동행할 수 있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할 수 있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알던 장로님 한 분은 주유소를 운영하셨습니다. 그분은 오너이지만 바쁠 때는 직접 주유기를 손에 듭니다. 그분은 늘 주님과 동행하며 주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힘쓰는 분입니다. 주유기를 차에 넣고 기다리는 동안 그분은 속으로 기도한다고 합니다. "주님, 저 사람의 차에 기름이 들어가듯, 저 사람의 영혼에 성령이 흘러들어가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한 사람이 어찌 손님에게 바가지를 씌우겠으며, 불친절하게 행동하겠습니까?
은퇴하여 더 이상 일하지 않습니까? 혹은 전업 주부입니까? 그런 분들도 직장에 다니는 사람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 믿는 사람들이 매일 가져야 할 가장 큰 관심사는 "어떻게 오늘 하루 동안 주님과 동행하며 어떻게 주님을 영화롭게 할까?"에 있어야 합니다. 여행을 해도 관심사는 주님을 높이는 것이요, 여가 활동을 해도 주님을 높이는 것에 관심을 두면 됩니다. 손주들을 돌보면서도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정성껏 돌보면,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렇게 살면,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사는 맛이 달라집니다. 바로 이것이 믿음의 비밀입니다.
5.
저의 부족한 경험을 통해서도 이 비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제가 주님과 사귀는 시간을 충분히 갖고 늘 주님과 동행하기 위해 힘쓸 때는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니"라는 찬양이 터져 나옵니다. 그럴 때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든든한 평안과 기쁨이 제 안에 넘칩니다. 추하고 더러운 생각이 들어오려 할 때,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 종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그 상태에 있으면 천국이 따로 없습니다. 제 안에 천국이 임했기 때문입니다. 그 상태에 있으면 부활도, 영생도, 새 하늘과 새 땅도 다 믿어집니다. 제 안에 임한 천국이 현실이 되는 것, 그것이 영생이요, 부활이며, 새 하늘과 새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으면 분주하게 허둥대지 않아도 제가 하는 일을 통해 선한 열매를 맺습니다. 그럴 때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 싶어도 두렵지 않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님과 사귀는 시간이 부실해지고 주님과의 거룩한 동행에 금이 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내 안에 나 밖에 없다는 공허감을 느낍니다. 그 동안 제가 경험했던 모든 영적 사건들이 거짓말처럼 보입니다. 추하고 더러운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죄에 감염된 저의 본성은 생쥐처럼 그것을 갉아먹으며 즐기고 싶어 합니다. 그럴 때면 공연한 일로 걱정하고 불안해 하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허둥댑니다. 부산하게 무엇인가를 하지만, 선한 열매가 맺히지 않습니다. 그럴 때, 죽음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 저의 모든 것을 파괴시키는 괴물처럼 보입니다. 그럴 때는 살아도 산 것 같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영적 부침'을 끊임없이 반복해 왔기에 간절한 마음으로 이 말씀을 나눕니다. 바울 사도라고 해서 매일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참되게 사는 길이요, 그것이 영원히 사는 길임을 알기에 늘 주님과 하나가 되기 위해 힘썼고, 주님과의 거룩한 동행을 사모했습니다. 저도 그것을 사모합니다. 저의 내면이 온통 주님으로 가득 차기를 소원합니다. 이 소원이 저만의 소원이 아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의 소원이 되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가 알았고 로렌스 형제가 알았으며 구름같이 많은 증인들이 알았던 그 믿음의 비밀을 저와 여러분 모두가 충만하게, 늘 맛보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진짜 사는 것이요, 그것이 영생을 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소원하고 노력하면 그렇게 이루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께서 그것을 더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주님,
주님께 더 가까이 가기를 원합니다.
주님과 더 연합하기를 원합니다.
주님과의 거룩한 동행을 사모합니다.
저희를 주님께 붙들어 매소서.
주님과의 사귐을 사모하게 하시고
언제 어디서나 주님과 동행하게 하소서.
주님과의 친밀한 사귐으로 인해
생과 사를 초월하게
주님 나라를 위해 살게 하소서.
아멘.
<속회자료> 2013년 7월 7일 주일 설교
"거룩한 동행"(Holy Companionship)
1. 찬송을 부르며 시작합니다. 435장(통 492)
2. 한 사람이 대표로 기도합니다.
3. 빌립보서 1장 20-21절을 읽습니다. 바울의 고백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10분)
4. 말씀의 요약 (한 사람이 말씀을 요약하여 발표합니다. 10분)
5. 말씀의 나눔 (한 질문에 대해 15분 정도를 할애하십시오. 전체 나눔 시간이 90분을 넘지 않게 하십시오.)
1) 오늘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으면 한 가지만 나누어 주십시오.
2) 당신은 매일 주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주님과의 사귐을 더 깊게 할 수 있을까요?
3) 당신은 하루를 살면서 얼마나 자주 주님을 생각하고 사십니까? 무엇이 제일 큰 장애물입니까?
4) 당신의 직장에서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높이기 위해 당신은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6. 기도
1) 주님과의 독대 시간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2) 항상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7. 중보기도
돌아가면서 기도 제목을 나누십시오. 각자 다른 사람의 기도 제목을 적어 두고 매일 한 번씩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8. 찬송을 부르며 헌금을 드립니다. 438장(통 495)
9. 주기도문으로 예배를 마칩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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