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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27-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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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주님께서 강경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2010년 1월 9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5:27-30
설교원고
"주님께서 강경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2010년 1월 9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5:27-30
오늘은 다시 산상수훈으로 돌아가서 말씀을 봅니다. 지난번에 앞의 본문을 다루면서 ‘토라에 울타리를 치라’의 뜻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이는 토라, 즉 성경본문의 해석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바른 해석을 통해 울타리가 바르게 쳐져야 바르게 말씀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유대인 랍비들은 토라의 울타리를 치는 일에 해당하는 성경본문에 대한 해석에 힘을 썼는데 많은 경우 논쟁도 일어나게 됩니다. 성경 해석을 놓고 논쟁에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토라를 바르게 해석할 수 있는 분은 오직 메시아시다. 우리는 그 답을 메시아가 오실 때 얻을 수 있다”는 결론입니다.
예수님께서 5:17에서 당신께서 오는 이유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하려 오셨다고 했는데, 바로 이런 맥락입니다. 토라를 바르게 해석해주시고 실제로 살아가심으로 토라를 완전하게 하려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 자체가 바로 예수님께서 자신이 메시아이심을 드러내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부분 성경 해석을 통해 토라의 울타리를 새롭게 쳐주셨습니다. 그동안 편협되고 문자적으로 해석되어 잘못 쳐지고 좁게 쳐진 울타리를 바르게 쳐주시고 더불어 넓게 쳐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늘 백성으로서 어떻게 말씀을 이해하고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쳐주셨습니다.
근래의 유대인 학자 중에 Philip Sigal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의 경우 예수님의 성서해석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했습니다. 특히 마태복음에 있는 예수님의 성경해석을 말하면서 예수님의 성경해석은 유대교의 할라카를 상당히 존중한 해석이었다는 것입니다.
할라카(הלכה)는 할라크(הלך)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로, 유대교의 종교, 생활 등 모든 부분에 관련된 법이나 규범을 말하는데, 우리말로는 '법도, 율법'이라고 번역할 수 도 있고 Jacob Neusner 같은 학자는 '길'로 번역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인간이 토라의 계시에 따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지를 알려주는 길이라는 것이지요.
어찌되었든 Philip Sigal은 예수님이 아주 탁월한 할라카 선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당시 샴마이 학파, 힐렐 학파 같은 유대교 학파들이나 다른 랍비들과 비슷한 해석도 있지만 많은 경우 독특하고 카리스마가 있는 성경해석자였다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절대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비록 Philip Sigal이 그의 책에서는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성서해석, 즉 토라에 울타리를 치는 권위에 대해서는 아주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이런 유대교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만 해도 아주 좋은 변화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쳐주신 토라의 울타리를 잘 깨닫고 실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성서해석은 '토라에 울타리를 치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단순히 해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서해석을 통해 쳐준 그 울타리에서 내가 순종하고 실천하면서 살아갈 때 비로소 성서해석은 완성되는 것이고, 그것이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토라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오늘 본문 역시 예수님께서 쳐주신 토라의 울타리입니다. 특별히 간음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혼에 관한 문제는 다음 주에 다루겠습니다. 간음이나 이혼의 문제는 참 중요하면서도 민감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어려운 문제이기도 합니다. 특히 성에 대해 관대해지고 이혼이 증가하는 오늘날 현실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성에 대한 개방과 이혼이 오늘날의 흐름이라면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특히 성경의 해석자이자 완성자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27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는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이것은 십계명 중 일곱 번째 계명입니다. 간음이라는 말은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성경은 영적 간음도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육체적인 간음에 국한된 것입니다. 간음과 더불어 같이 쓰이는 말이 음란입니다. 성적으로 음탕하고 문란한 생활을 말합니다. 간음이라는 말이 이미 결혼한 부부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면 음란은 기혼자뿐만 아니라 아직 결혼하지 않은 미혼자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간음과 음란에 대해 엄격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음란한 생활을 하지 말라,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십계명 안에 이 계명을 넣으셨고 이와 관련된 많은 규정들이 모세오경에 나옵니다. 간음을 행했을 때의 형벌 역시 매우 엄격합니다.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왤까요? 성경은 왜 간음이나 음란에 대해 이렇게 엄격한 것일까요? 과거 보수적인 문화의 반영입니까? 마치 우리나라 조선시대처럼 보수적인 문화의 반영이냐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을 주신 것은 다른 동물들과는 다릅니다. 다른 동물들은 순전히 번식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번식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성입니다.
성의 초점은 기쁨입니다. 나를 위한 기쁨이기도 하지만 상대방을 위한 기쁨입니다. 성을 통해 이러한 기쁨을 누리라고 주신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하신 범위가 있습니다. 바로 부부관계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 결혼하여 부부의 연을 이루었을 때 사용하여 서로에게 기쁨을 주며 그래서 더욱 더 깊은 부부의 관계를 이루어가라는 것이 성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성을 주시고 가정을 손수 만드신 겁니다.
이것이 성과 가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인데, 간음과 음란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부부관계에서 어느 한쪽이 다른 사람과 간음을 했다고 했을 때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파기하는 죄입니다. 우리는 단순히 간음을 간통죄라 해서 도덕적인 범죄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간음은 성과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에 정면으로 거역하는 심각한 죄입니다.
간음이라는 것이 부부 사이에 들어올 때 그 관계는 정상적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부부관계는 연합입니다. 한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육체적 연합, 정신적 연합, 감정적 연합, 영적 연합, 즉 전인격적인 연합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음을 했다, 이것은 둘 사이에 다른 몸이 끼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은 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 사람들이 갖는 생각은 성은 그저 육체적인 관계라고만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은 육체적 관계 이상의 것입니다. 정신과 감정, 영적인 영역까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부부간의 성적인 연합을 통해 두 사람의 감정과 느낌이 연결되고 영적인 연합까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부부간의 성적인 책임을 성실하게 져야 하는 겁니다.
이것이 성의 역할인데, 배우자가 다른 사람과 성적인 관계를 가졌다는 것은 부부의 연합을 깨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부부의 연합이 깨어지고 그래서 가정이 깨지고 자녀들이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간음을 통해 가정까지 무너지게 되는 겁니다. 가정을 만드신 하나님의 뜻을 무너뜨리게 됩니다. 간음은 하나님께도 심각한 범죄요, 배우자에게도 심각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간음과 음란에 대해 단호하고 엄격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성경의 가르침을 존중하면서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계십니다. 그것이 28절입니다. 이것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렇게 말한다.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란한 생각을 품는 사람은 벌써 마음으로 그 여자를 범했다."
개역한글이나 개역개정성경에는 음욕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를 공동번역은 음란한 생각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음욕이 무엇입니까? 음란한 욕심, 음행하려는 욕망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공동번역처럼 음란한 생각입니다.
음욕은 단순한 성적인 욕구가 아닙니다. 성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식욕과 마찬가지로 본능입니다. 그 자체로는 악한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성적인 욕구는 있습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 누구나 갖게 되는 욕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성욕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음욕입니다. 그 대상이 여자라면 어떻게 해서든 이 여자의 순결을 뺏거나 성적으로 범하고자 하는 욕구입니다. 대상이 남자여도 마찬가지입니다. 저 여자를 갖겠다는 겁니다. 저 남자와 자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간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왜 음욕에 대해 말씀하셨을까요? 간음이라는 행동의 원인이 바로 음란한 생각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대부분은 마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간음하는가? 그 속에 음란한 생각이 있기 때문에 간음한다는 것입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하셨는데, 모세 오경에서는 다른 남자의 아내와 간음하는 것을 말하는데 반해 예수님은 그 범위를 모든 여자로 넓히십니다.
십계명이 주어졌을 때나 예수님 당시에도 아내는 남편의 재산으로 여겨졌습니다. 십계명의 마지막 계명이 '네 이웃의 집을 탐하지 말라'는 것인데, 그러면서 구체적인 내용의 첫 번째가 네 이웃의 아내입니다. 네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말라는 겁니다. 실제로는 간음에 대해 십계명에서 두 번이나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겁니다.
네 이웃의 집, 즉 다른 사람의 재산인데, 그 첫 번째 재산이 바로 아내입니다. 남편에게는 아내에 대한 배타적인 권리가 있습니다. 간음한 자는 아내에 대한 남편의 권리를 빼앗은 것이고 그 여인을 훼손된 여성으로 만드는 죄가 있다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그 범위를 넓혀서 다른 사람의 아내를 포함한 모든 여자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의 아내뿐만 아니라 어떤 여자든 음욕을 품고 보는 자는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겁니다. 더불어 남자도 결혼한 남자뿐만 아니라 모든 남자를 말합니다. 결혼을 했던 안했던 남자가, 물론 여자도 마찬가지겠지만, 음란한 생각을 가지고 여자를 본다, 그 여자가 유부녀든 미혼이든 그러한 음란한 생각을 가지고 여자를 보았다면, 그 본 것 자체가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범한 간음죄와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 있는 말씀인 살인과 마찬가지입니다. 살인의 동기 역시 마음에 있습니다. 그 마음에 미움이 있고, 분노가 있으면 이것이 상황만 딱 맞아떨어지면 살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간음이나 음란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상시에 음란한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여자나 남자를 음란한 생각을 가지고 봅니다. 머릿속에는 이미 옷을 벗기고 상대방을 탐하고 범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지만 이미 생각으로는 간음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딱 상황이 맞아떨어진다고 했을 때 어떻게 할까요? 다른 사람들이 있거나 상황이 그렇지 않을 때는 못하겠지만 단 둘이 있다, 나에게 그를 제압할 수 있는 힘도 있다, 유혹할 만한 능력이 있다고 했을 때, 혹은 그러한 환경 속에 내가 있다고 했을 때 과연 어떻게 할까요?
잠언 6:27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불을 품에 품고야 어찌 그 옷이 타지 않겠으며"
옷이 왜 타는가? 불덩어리를 가슴에 안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잠언 6:27 다음에 이어지는 것이 간음의 문제입니다. 즉 그 마음에 음욕이라는 불을 품고 있으니 옷이 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결국 행동의 문제는 생각의 문제라는 겁니다. 행동의 동기가 무엇이냐? 생각이라는 겁니다. 생각이 행동이 된다는 것이지요. 생각이 쌓여서 결국 행동이 된다는 것이지요. 생각이 바로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생각의 문제를 거론하고 계시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안에 일어나고 갖게 되는 음욕, 음란한 마음을 제거하는 것입니다. 감사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음욕의 제거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29-30절입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이 말씀을 읽으니 어떠십니까? 무섭습니까? 이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면 우리 중에 눈과 손이 남아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겁니다. 아주 강경한 표현인데, 이런 경우를 수사법에 있어 과장법이라고 합니다. 과장법은 그 요점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조하기 위해서 쓰는 표현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런 표현을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만큼 단호하고 엄격하게 음욕을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욕은 굉장한 힘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음욕에 있어 안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기본적으로 성적인 욕구가 있는 정상적인 몸을 갖고 있고, 우리 주변에는 음란한 문화가 있기 때문에 이 음욕에 있어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녀들도 그렇고 청년들, 부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 무엇부터 건드는지 아십니까? 우리의 생각입니다. 선악과 사건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탄이 여자에게 자꾸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노린 것이 무엇입니까? 여자의 생각입니다.
그동안은 선악과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유혹을 받으니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각이 달라졌어요. 그전까지는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니까 당연히 하지 말아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달라지니까 보임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였어요. 이렇게 생각이 달라지니까 어떻게 해요? 덜컥 선악과를 따먹고 맙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사탄은 늘 우리의 생각으로 접근합니다. 세상의 문화를 가지고 접근하고, 내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 접근하고, 나의 환경을 가지고 접근합니다. 그래서 유혹합니다. 생각하게 합니다. 생각이 음란한 생각으로 바뀌게 하고 음욕으로 채우게 합니다. 그러니까 여자를 볼 때 어떻게 봐요? 정상적으로 못 보는 겁니다. 음란한 마음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다가 상황이 맞아 떨어지면 실제로 행하는 겁니다.
우리 안에 생기는 음욕이 다 사탄이 주는 것은 아닙니다만, 요는 성적인 범죄에 있어 우리 모두는 안전하지 않다는 겁니다. 남자건 여자건, 미혼이건 기혼이건 모두가 안전하지 않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보면 그렇지 않습니까? 오죽하면 온 나라가 바람났다고 합니까? 원조교제라니 이게 말이 됩니까? 음란의 영이 온 나라를 휩쓸고 있습니다.
성적인 범죄에 있어서는 누구도 결코 안전하지 않고, 음란한 생각은 누구에게나 들어올 수 있고, 그 음란한 생각의 힘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겁니다. 그러기에 어떻게 해야 한다? 내 오른 눈을 빼어버리고 내 오른 손을 찍어버리는 것과 같은 단호하고 엄격한 결심과 태도를 가져야한다는 겁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하는 태도로는 안된다는 겁니다.
우리 안에는 오늘날 성적으로 개방되고 문란해지는 시대의 흐름을 쫒아가고 싶은 은근한 유혹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어정쩡한 마음과 태도로는 안된다는 겁니다. 정말 내 오른 눈을 빼어버리고 내 오른 손을 찍어버리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결심하고 그런 태도로 성적인 범죄를 경계해야 한다는 겁니다.
먼저 보는 것부터 단호하고 엄격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사람들은 보는 것에 대해서는 참 관대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위험한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한 사건도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했습니다.
보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음란한 마음을 가지고 보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지요. 다윗도 처음에는 그냥 봤습니다. 우연히 봤습니다. 거기까지는 그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보는 것을 즐겼다는 것입니다. 보고 또 봤어요. 계속 보다가 저 여자를 갖고 싶다, 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욕이 다윗의 마음속에 생겼습니다. 그래서 결국 남의 아내와 간음하고 그걸 숨기기 위해 충신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 겁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음란한 사진이나 동영상을 보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겁니다. 여자들도 그렇겠지만 남자들의 경우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보는 것에 굉장한 충동을 갖게 됩니다.
많은 남자들이 처음으로 헐벗은 여자의 사진을 보는 때가 중학교 때입니다. 굉장한 충격입니다. 마음이 꿍꽝거리고 이상해지고 몸도 이상해지고 교회 다니는 친구들은 큰 죄를 저지른 것 같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사춘기 때 왕성하게 분비되는 성호르몬 때문에 성적인 호기심이 생기고 헐벗은 여자의 사진을 보면 흥분되고 또 보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건 나이가 들어서도 계속된다는 겁니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마찬가지고, 군대에 가서도 마찬가지고, 직장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결혼해서 자녀들을 낳은 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인이 되니 이제는 합법적으로 봅니다. 남이 보면 뭐하니까 몰래 봅니다.
그런데 보는 것으로 끝납니까? 아니거든요. 머릿속에서 상상이 됩니다. 아주 음란한 상상이 내 머릿속을 채우게 됩니다. 그것으로 끝납니까? 예수님 말씀처럼 그런 음란한 마음을 품고 다른 여자를 보고 남자를 보게 됩니다. 겉으로는 모르지요. 멀쩡하게 생겼거든요. 사회적인 지위도 있고 학력도 있고. 그런데 실제로 보도되는 사건들을 보십시오. 대학교수나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 원조교제 했다가 적발되고 많은 사람들이 불륜에 연관되지 않습니까?
보는 것부터 엄격하고 단호하게 다스려야 합니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이상한 남성상을 갖고 있습니다. 성적인 경험을 해야 진짜 남자라고 말합니다. 음란한 사진들을 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함께 즐깁니다. 어렸을 때부터, 청년 때 부터 음란한 문화를 갖게 합니다.
그러니까 나중에 나이가 들어 가정을 이루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인 음란에서 벗어나질 못합니다. 실제로 성매매업소를 찾는 사람들의 2/3가 배우자가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건 굉장한 심각한 일입니다. 그게 남자다운 겁니까?
보는 것부터 엄격하고 단호하게 대처하십시오. 요즘은 인터넷도 조심해야 합니다. 누가 그러데요. 자기는 그냥 뉴스를 보려고 들어갔는데, 양옆에 헐벗은 여자들 사진으로 가득하더랍니다. 조심하세요. 예수님 말씀을 그대로 적용하세요. 빼어버리고 찍어버리세요. 그동안 그런 사진이나 동영상을 즐겼다면 이젠 빼어버리고 찍어버리세요. 그런 음란 사이트, 다 빼어버리고 찍어버리세요. 아예 차단을 시켜버리세요.
요셉이 아리따운 유부녀에게 유혹을 받았어요. 한두 번 받은 게 아니에요. 아주 매력있고 요염한 주인마님이 계속 유혹했어요. 이집트가 더운 나라니까 옷이나 많이 입었겠습니까? 유혹할 때는 더 보여주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요셉이 어떻게 했습니까? 도망갔어요. 인사하고 자리 뜬 게 아닙니다. 도망갔어요. 무슨 뜻입니까? 보는 것부터 차단했어요. 요셉이 왜 지혜로운지 아십니까? 보는 것의 위험성을 알았거든요. 그렇게 보다 보다 보면 넘어가거든요. 그럼 끝나는 겁니다.
미국의 부흥하는 교회의 한 목사님이 자신의 책에서 고백을 한 것인데, 이 분이 청년기 때 성적으로 문란했답니다. 미국의 많은 젊은이들이 그런 것처럼 성적인 죄들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답니다. 그때도 교회는 다녔답니다. 그러다가 제대로 예수님을 만났어요. 정말 회심하고 주님을 위해 살겠다고 헌신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그런 성적인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결혼 후에는 정말 아내에게만 충실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문득 자신에게 찾아오는 성적인 유혹이 있었다는 겁니다. 자신이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하루는 다른 교회의 설교 부탁을 받고 가는 길에 기차역 화장실에 들렸답니다. 좌변기에 앉는 순간 바닥에 무엇이 있었느냐 하면 플레이보이라는 잡지였습니다. 순간 집었답니다. 청년 때 아주 즐겨보던 잡지였거든요. 한 장을 넘기려는 찰라 자기 안에 있는 성령님의 음성이 들렸답니다.
"크레이그야, 너를 더럽히지 마. 너는 거룩한 사람이다." 그 순간 그 잡지를 꾸겨서 쓰레기통에 넣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분이 그래요. 누구도 성에 대해서는 안전하지 않고 장담할 수 없다는 겁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보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십시오. 보는 것부터 차단하세요. 여러분의 눈부터 다스리십시오. 그리고 손도 다스리세요. 음란 잡지 넘기는 손, 음란 사진이나 동영상 클릭하는 손을 찍어버리세요. 그런 단호하고 엄격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생각을 다스려야 합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지난 신년수련회 때 읽은 말씀을 다시 볼까요? 에베소서 4:22-24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예수님 만나고 예수님 믿기 전까지의 우리의 모습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이었습니다. 음욕에 따라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따라 사는 사람,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한다는 겁니다. 생각을 다스리고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2:2 말씀도 같은 의미입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말씀 역시 생각의 변화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냥 바꿔야지 하면 됩니까? 아닙니다. 기준이 있습니다. 우리가 가져야할 생각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해야"합니다. 우리의 기준은 선명합니다. 분명합니다. 이 세대의 흐름, 문화, 생각,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입니다. 이것으로 우리의 생각을 바꾸고 채워야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안에서 변화를 만들어내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채워야 합니다. 날마다 예수님 바라봐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으로 채우고,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의 도우심을 늘 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의 성적인 문제까지도 그리스도께서 주장하실 수 있도록, 예수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냥 바꿔야하지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결단과 단호한 태도와 노력도 필요하지만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안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채우고 그분의 말씀으로 채우고 그분의 성령으로 채우십시오. 그래서 내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으로 바뀌게 하세요. 행동의 문제는 생각의 문제라고 했는데, 내 생각이 예수님의 생각으로 바뀌면 내 눈도 바뀝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신 겁니다.
당시 종교적인 유대인들은 여자를 회피했습니다. 여자를 유혹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여자를 회피하고 자기 아내 외에는 개인적으로 만나질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르게 요구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에서 음욕이 제거되면 여자를 유혹의 대상으로 보거나 성적 대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섬겨야할 자매로 보게 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남자들에게 여자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요구하시는 겁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부릅니다. 우리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부릅니다. 지체는 다른 지체를 나의 탐욕을 이루려는 수단으로 보지 않습니다. 내가 존중하고 섬겨야 할 대상으로 보고 그렇게 대합니다. 그것이 지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새로운 남녀관계까지 우리가 올라가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음란한 생각을 엄격하고 단호하게 다스려야 하고 그러려면 우리의 눈을 다스려야 하고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하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그 마음으로 바꾸고 채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과 노력이 없다면 교회라고 해도 그 안에 음란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 음란에는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한 몸이요 한 지체로 부르심을 받은 교회에 음란이 들어왔다고 했을 때 어떤 추접한 일들이 벌어지는 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추구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교회 교인하면 방언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예언이나 병 고치는 은사, 귀신을 쫓아내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안에 성적 음란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그것을 꾸짖고 있는 겁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그들은 성령의 은사와 능력은 추구했는지 몰라도 정작 가장 중요한 것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추구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살았던 고린도 도시는 성적으로 아주 문란한 도시였습니다. 그러한 문화적인 바탕과 경험이 있는 자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예수는 믿지만 여전히 그들의 생각과 본성은 고린도의 음란한 문화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은사는 받고 능력은 받은 것 같은데 교회는 전혀 거룩해지지 않았고 수많은 갈등과 문제가 있었다는 겁니다.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사모하는 것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성령의 열매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내 생각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가 살아오고 경험한 음란한 문화를 끊어내야 합니다. 나의 인격뿐만 아니라 나의 성적인 문제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적용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성은 하나님이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라고 주신 최고의 선물입니다. 부부가 서로 사랑하며 한 몸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성에 있습니다. 부부는 서로에게 성적인 의무가 있습니다. 단순히 성관계의 의무가 아닙니다. 성을 통해 서로에게 기쁨을 주고 한 몸을 이루고자 하는 연합의 의무입니다. 성은 상호 존중입니다. 우리나라 남성들의 잘못된 성의 사고를 버려야 합니다.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거듭나야 합니다.
성은 인격입니다. 성은 배우자의 전인격과 관계하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 존중해야 하고 성실하게 그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라도 배우자 아닌 다른 사람과의 성관계는 갖지 말아야 합니다. 그전에 그런 경우가 있더라도 이제부터는 눈을 빼고 손을 찍는 단호하고 엄격한 결심과 태도를 가지고 음란한 생활을 끝장을 내십시오. 그리고 오직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나의 남편, 나의 아내와만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답고 건강한 가정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사탄은 어떻게든 우리의 행복을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가정이 무너지면 행복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취약하고 예민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성적인 부분을 유혹합니다. 성을 지키세요. 그래서 가정을 지키십시오.
아직 결혼하지 않는 청년들과 청소년들도 분명하게 기억하고 명심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성을 함부로 굴리지 마세요. 주변에 있는 친구들이나 군대나 사회의 잘못되고 음란한 성적인 생각이나 가치관에 휩쓸리지 마세요. 우리의 기준은 분명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남성이 되십시오. 그런 여성이 되세요. 이것이 진짜 남성이고 여성입니다.
그리고 빨리들 결혼하세요. 기본적으로 성적인 욕구가 있어요. 그리고 젊어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빨리들 결혼하세요. 성적인 해결이 결혼의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2:19-22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실천하십시오. 표준새번역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초는 이미 튼튼히 서 있고, 거기에는 "주께서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아신다"는 말씀과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다 불의에서 떠나라" 는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하게 쓰이고, 어떤 것은 천하게 쓰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내가 말한 이러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그는 주인이 온갖 좋은 일에 요긴하게 쓰는, 귀하고 성별된 그릇이 될 것입니다. 그대는 젊음의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좇으십시오."
말씀을 잘 보십시오. 이건 청년들뿐만 아니라 모든 분들이 기억해야할 말씀입니다. 우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다 불의에서 떠나라 하십니다. 내가 있으면 안될 자리에서 떠나고 그런 불의한 생각, 더러운 생각에서 떠나라는 겁니다. 그래서 깨끗하게 하라는 겁니다. 영적으로나 육적으로 깨끗하게 하라는 겁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신다는 겁니다.
그리고 젊음의 정욕을 피하라는 겁니다. 음욕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을 피하라는 겁니다. 그런 자리에 있지 않도록 하라는 겁니다. 음욕을 만들 수 있는 환경이나 자리에 대해서는 주님 말씀처럼 단호하고 강경해야 합니다. 간단합니다. 피하면 됩니다. 그 자리를 떠나면 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됩니다. 어정쩡한 태도 취하지 말고 그런 경우에 대해서는 강경하세요. 단호하세요. 전혀 문제 생기지 않습니다. 어정쩡한 태도를 취하니까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그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있는 환경을 바꾸라는 겁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환경에 영향을 받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어떤 환경에 있느냐는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맨날 교회에서 살거나 수도원에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학교에서, 살아가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정말 믿음을 가지고 살려고 하는 사람,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것을 직장에 적용하면 직장에서 우선 직장동료와 좋은 관계를 맺으세요. 신앙과 관계없이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좋은 관계를 맺으세요. 교회 다니는 것이 부끄럽지 않게 하세요. 그러면서 직장 안에 믿음의 사람들과 관계를 가지라는 겁니다. 신우회가 있다면 신우회에 참석하라는 겁니다. 요즘은 직장인을 위한 제자훈련과정도 많습니다. 그런데 참여하라는 겁니다. 아무리 바빠도 예배는 빠지지 말라는 겁니다.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라는 겁니다.
사실 신앙양심을 가지고 직장 다니는 것 어렵지 않습니까? 자칫하면 나도 똑같아집니다. 그럼 교회는 교회고 직장은 직장이 되는 이중적인 신앙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같이 고민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위로해주고 같이 노력하는 믿음의 동지가 있다면 훨씬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앙인이라 해서 다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다 흠이 있고 부족합니다. 그러나 같이 고민하고 같이 기도하고 같이 노력하는 모습을 통해 우리가 성장할 수 있고 거룩함을 지켜나갈 수 있다는 겁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친구들과도 좋은 관계를 갖되 좋은 믿음의 친구들을 만나세요. 이단이나 이상한 단체 말고 건강한 복음주의 선교단체 같은데도 들어가세요. 대학생 제자훈련이나 성경공부 모임 많아요. 청년부모임에 참석하세요. 그래서 그들과 함께 고민하고 함께 위로하고 함께 노력하고 함께 기도해보세요. 말씀처럼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세요.
그래서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휩쓸리고 더럽혀지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고 말씀을 따르고 성령을 따르는 사람이 되어서 세상 가운데서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시고 그것이 우리의 빛이 되고 소금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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