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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33-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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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Yes or No"
2010년 1월 23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5:33-37
오늘 말씀은 맹세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맹세를 많이 합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약속도 많이 합니다. 이 역시 맹세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우리 같은 경우는 하나님께 맹세하는 서원도 합니다. 그 약속이나 맹세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지키셨습니까?
또한 우리는 맹세와 비슷한 말들을 참 많이 합니다. ‘절대로 하지 않았어.’,‘반드시 할거야’, ‘정말이야. 맹세해.’ 등등의 말입니다. 그런 말에 어느 정도의 신뢰성이 담겨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리고 그 말들에 대해 실제로 얼마나 지키셨습니까?
사람들이 왜 그런 맹세와 관련된 말을 많이 쓰는 지 아십니까? 상대방이 자신을 믿지 않을 때 쓰기도 하지만 자신을 믿게 하려고 씁니다. 정말 사실이어서 그런 경우도 있지만 거짓임에도 자신을 믿게 하려고 할 때 절대로, 정말로, 반드시라는 말을 쓰면서 맹세를 합니다. 그리고 나서는 지키지 않거나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나 많은 경우 헛된 맹세와 거짓된 맹세, 지키지도 않을 약속을 남발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 자신의 말과 행함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의 말씀들처럼 먼저 구약성경의 가르침이나 당시 유대교 랍비들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을 하십니다.
33절인데,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이 부분은 구약성경의 어느 특정 본문의 인용이라기보다는 맹세에 관한 구약의 가르침을 종합하여 그 핵심적인 내용을 요약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맹세와 관련된 본문들이 몇 있습니다.
레위기 19:12,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민수기 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결심하고 서약하였으면 깨뜨리지 말고 그가 입으로 말한 대로 다 이행할 것이니라”
신명기 23:21-23,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그것이 네게 죄가 될 것이라 네가 서원하지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리라 그러나 네 입으로 말한 것은 그대로 실행하도록 유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이상이 구약성경에서의 맹세와 관련된 대표적인 말씀들입니다. 맹세라고 할 수 있는 다른 단어가 서약과 서원입니다. 서약은 맹세하고 약속하는 것이고, 서원은 하나님께 무엇을 하겠다거나 일정 기간 무엇을 하지 않겠다고 자발적으로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둘 다 맹세의 의미지만 서원이 보다 하나님께 대한 맹세의 의미를 갖습니다.
다시 말하면 서원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기 위해서나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무엇을 하거나 드리겠다고 하거나 일정 기간 무엇을 하지 않겠다는 자발적인 맹세입니다. 서원을 하지 않는 것은 죄가 아니지만 서원한 이상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서원한 것을 이행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속건제를 드려 용서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서원하지 말라는 것이고, 사원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는 겁니다.
이 서원을 했다가 더디함으로 해를 당한 사람이 있습니다. 야곱입니다. 창세기 28:20-22에 보면 야곱이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가는 중에 베델에서 노숙을 하게 되고, 거기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때 야곱이 서원합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창 28:20-22)
사실 이건 서원이라기보다는 거래에 가깝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조건을 내세우고 그리 해주시면 나도 하나님께 세 가지 것을 할 것인데 첫째는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고, 둘째는 이곳 베델에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에다 하나님의 집, 즉 하나님을 섬기는 제단을 세울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모든 소득의 십분의 일, 즉 십일조를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겁니다.
도망가는 신세고, 거할 곳도 없어 어느 한적한 곳에서 돌베개를 베고 자는 그를 만나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움과 외로움에 있는 그를 만나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하나님을n 나의 하나님으로 섬기고 하나님을 만난 그곳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제단으로 삼아야 하고 은혜를 받았으니 당연히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야곱은 이것을 자기의 조건을 내세우면서 그리 하신다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정말 야곱다운 발상이고 우스운 거래인데, 어찌되었든 하나님께 그리 하겠다고 했으니 서원은 서원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후에 가나안 땅으로 돌아와서 이 서원을 지킵니까, 안 지킵니까? 지키긴 지켰는데 더디 지켰습니다. 가나안 땅으로 와서 바로 베델로 가지 않고 세겜으로 갔어요. 당시 가장 큰 가나안 성읍 중에 하나인 세겜의 기름진 땅과 풍요로운 환경에 마음이 빼앗겨 한동안 거기 살았습니다. 서원한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켜주셔서 가나안 땅으로 평안히 돌아오게 하셨음에도 그는 서원한 것을 바로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외동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게 되고, 그 일로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에게 피의 복수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야 벧엘로 갑니다. 서원한 것을 더디 갚다가 화를 당한 경우입니다.
서원을 함부로 했다가 낭패를 본 사람도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사사 입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암몬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이기게 하시면 자기를 제일 먼저 환영하는 사람을 번제로 드리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그런데 누가 제일 먼저 환영하러 나왔습니까? 자기의 딸입니다. 함부로 서원했다가 딸을 번제로 바치게 됩니다.
입다의 경우에서 우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맹세했고 서원했다고 하지만 어떻게 딸을 번제물로 바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이것은 맹세의 어원적인 의미와 당시 고대 근동에서의 맹세의 이해, 그리고 성경적인 맹세의 이해를 통해 봐야 합니다.
먼저 맹세, 서약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 단어는 שבועה(쉬부아)입니다. 이 단어는 '맹세, 서약'의 뜻만 아니라 '저주'라는 뜻도 갖고 있습니다. 이 שבועה(쉬부아)라는 단어는 שבע(샤바)라는 동사에서 왔고, שבע(싸바)동사는 보통 שבע(쉐바)라는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봅니다.
שבע(쉐바)는 우리가 아는 것처럼 일곱을 뜻합니다. 이 '일곱'을 뜻하는 שבע(쉐바)에서 나온 말이 '맹세하다'라는 동사인 שבע(샤바)이고 '맹세'라는 뜻의 명사인 שבועה(쉬부아)입니다.
유대교에는 게마트리아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수치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단순히 히브리어 알파벳을 숫자화해서 계산하는 차원을 넘어 숫자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에서 7이란 숫자는 천지 창조의 숫자로 완전수이며, 7이라고 했을 때는 완전성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지요.
완전함의 뜻을 갖고 있는 이 שבע(쉐바)라는 단어에서 바로 '맹세하다, 서약하다'라는 뜻의 동사 שבע(샤바)가 나왔고 명사로는 맹세를 뜻하는 שבועה(쉬부아)라는 단어가 나왔다는 것입니다.
브엘세바라는 도시가 있지요? 무슨 뜻입니까? 일곱 개의 우물, 맹세의 우물이라고 말하는데, 둘 다 맞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21:22-31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 아브라함이 일곱 마리의 얌양 새끼를 따로 구별한 다음에 그 일곱 마리의 암양 새끼를 아비멜렉에게 줍니다. 그러면서 맹세를 합니다.
왜 일곱 마리의 암양 새끼를 주었는지 이해가 되십니까? 일곱이란 숫자 자체가 맹세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말로만 아니라 구체적인 숫자를 통해 맹세를 확실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브엘세바인데, 어떤 분들은 정말 브엘세바에 일곱 개의 우물이 있냐고 묻는데, 아브라함이 일곱 마리의 암양 새끼를 아비멜렉에게 줌으로써 맹세한 땅이라는 의미로 봐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맹세라는 말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있습니까? 완전함이란 뜻입니다. 즉 이 말은 맹세한 것을 완전하게 이행하지 않으면 그것은 맹세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고대 근동에서는 보통 맹세를 할 때 당사자들이 그들이 섬기는 신을 증인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면서 그 맹세를 지키지 않거나 어길 경우에는 저주를 받아도 좋다는 조항까지 넣어서 맹세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세를 뜻하는 שבועה(쉬부아)라는 단어가 저주의 뜻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겁니다. 그만큼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하고 지키지 못했을 때는 그 책임을 묻는다는 겁니다.
입다의 경우 경솔하게 맹세를 했지만 당시 고대 근동의 풍습에 따르면 그는 그 맹세를 완전하게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자신이 그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러한 맹세에 대한 개념이 담겨 있는 것이 바로 구약성경에서의 맹세에 대한 규정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맹세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되고 맹세했을 경우에는 반드시 완전하게 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맹세의 규정들을 요약하여 제시하신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구약성경은 맹세 자체를 금하고 있지 않습니다. 신중하게 하며 동시에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맹세 자체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의 맹세에 태도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맹세를 남용하거나 오용하고나 악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맹세의 남용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맹세의 의미는 완전성인데, 이는 곧 맹세를 지키는 성실함이 따라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맹세는 하는데 그 맹세를 완전하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키지 않았다는 겁니다. 더디 했다는 겁니다. 자꾸 미루고 변명을 해대고 자기 합리화를 내세우면서 맹세의 의미를 희미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맹세는 그냥 하는 맹세가 아니었습니다. 신명기 6:13에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맹세의 완전함을 위해 고대 근동 사람들은 자신들의 신의 이름으로 했다고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다른 신들은 우상이요 거짓 신이니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하지 말고 오직 유일하시며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를 하라는 겁니다.
이 말씀은 맹세의 완전성을 더하시는 의미입니다. 맹세 자체가 완전함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그 맹세를 완전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라고 하셨을 때는 그 맹세가 얼마나 완전해집니까? 완전의 완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완전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면서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죄에 해당되는 지 아십니까? 맹세를 지키지 않는 죄도 해당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에 해당됩니다. 십계명 중 제 3계명을 어기는 죄에 해당합니다. 이런 짓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맹세의 오용 내지는 악용입니다. 출애굽기 22:10-11 말씀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배상에 관한 규정 중에 하나입니다.
"사람이 나귀나 소나 양이나 다른 짐승을 이웃에게 맡겨 지키게 하였다가 죽거나 상하거나 끌려가도 본 사람이 없으면 두 사람 사이에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여호와께 맹세할 것이요 그 임자는 그대로 믿을 것이며 그 사람은 배상하지 아니하려니와"
자신의 가축을 다른 사람에게 맡겼는데 죽거나 어디가 상했거나 도둑을 맞았습니다. 그런데 본 사람이 없어요. 그럴 때 어떻게 하라? 그 가축을 맡은 자가 이웃의 것에 손을 대지 아니하였다고 하나님께 맹세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임자는 그대로 믿고 그 사람은 배상하지 말라는 겁니다.
이 규정이 악용되었다는 것이지요. 이 규정의 전제가 무엇입니까? 정직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할 때는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바탕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직입니다. 정말 자신이 정직하다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때 그 책임을 묻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규정이 악용되었습니다. 실제로 자신이 그것을 빼돌렸음에도 뭐라고 말합니까? '내가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수 있다.'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악용하는 추악한 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맹세를 지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렇게 맹세함으로써 자신을 믿게 하려는 데 맹세가 악용되었다는 겁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지 않습니까? 주로 사기성이 강한 사람들이 더 맹세를 잘 합니다. 정말이다, 반드시 한다, 믿어 달라,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 내 손에 장을 지진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그 의도는 사람들이 자기를 믿게 하려는 것이지 실제로 그것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의도로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어느 분이 '나는 보통사람입니다. 믿어주세요.'라고 수없이 말했는데 그 보통사람께서 수천억 원의 비리를 저질렀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분 역시 수천억 원을 드셨는데 그걸 국고에 반납하라는 형벌이 주어지자 자기 수중에는 십몇만원만 있다고 했지요.
지금도 맹세가 그것을 지키겠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을 믿게 하려는 것으로 악용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심지어 교인들 중에서도 그러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맹세를 합니다. 분명 거짓이 분명한데도 하나님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자신을 믿게 하려고 합니다. 맹세를 악용하는 사례입니다.
게다가 초기의 랍비들이 맹세에 대한 분류를 했는데, 이것이 또한 오용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다가 점차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을 가지고도 맹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늘을 두고 맹세한다거나 땅을 두고 맹세한다고나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맹세를 하기도 했고, 성전의 제단을 두고도 맹세 했고 제단에 드리는 예물을 두고도 맹세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 머리를 두고 맹세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무화과 따는 자의 생명을 걸고' 맹세한 경우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초기 랍비들은 어떤 맹세가 정당한 맹세이며, 어떤 맹세가 효력이 없는 맹세인가를 구별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당한 맹세와 그렇지 못한 맹세의 차이점을 가르쳐주고 그럼으로써 합당한 맹세로써 맺어진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오용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비슷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태복음 23:16-22에 보면 예수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호되게 책망하시며 화를 선포하시는 내용이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눈 먼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지라 하는도다"(16, 18절)
성전으로 맹세하는 것과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는 것이 나오고, 제단으로 맹세하는 것과 제단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는 것이 나옵니다.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맹세의 분류를 오용했다는 것입니다. 초기 랍비들이 맹세를 분류한 것은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이것저것으로 맹세하는 것이 문제가 되어 무엇이 정당한 맹세이며 무엇이 효력이 없는 맹세인가를 구별한 것인데, 이것을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교묘하게 오용을 했다는 것이지요.
즉, 사람들이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맹세한 것에 대해서는 괜찮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 맹세에 대해서는 그렇게 관대하면서 성전에 드리는 금이나 예물을 두고 맹세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가르쳤다는 것입니다. 왜요? 그건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한 것이니까 해야 한다는 겁니다. 물질이거든요. 성전이나 제단을 두고 맹세한 것, 즉 오늘날로 하면 교회에서 혹은 예배를 드리면서 한 맹세는 안 지켜도 큰 문제가 없지만 돈이나 예물을 드리겠다고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이러한 가르침을 하던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며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 즉 하나님으로 하는 맹세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 역시 지켜야 한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책망의 요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러한 맹세의 분류가 결국 맹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정직과 성실함을 희석시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맹세의 규정을 명하신 이유는 다른 것 아니거든요.
우선은 신중하라는 겁니다.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지 않고 하늘을 두고 맹세를 하고 땅을 두고 맹세를 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맹세를 하고 제단을 두고 맹세를 하고 제단에 드릴 예물을 두고 맹세를 하건 모든 것이 결국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요, 땅은 그분의 발등상이며 성전은 하나님의 전입니다. 심지어 자신의 머리로 맹세하는 것 조차 결국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라는 겁니다. 왜요? 나를 만드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고 나는 내 머리로 맹세를 한다고 해도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 하거나 검게할 수 없다는 겁니다.
결국 모든 것이 하나님께 귀결되는 것이 맹세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중하게 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키라는 겁니다. 서원한 것은 해가 될지라도 갚으라는 겁니다. 이것이 맹세의 규정을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해서 하는 맹세뿐만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하는 맹세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맹세의 의미는 완전함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말은 정직과 성실함이 맹세의 생명이고 핵심이라는 겁니다. 하나님께 맹세했다, 무엇인가를 하겠다, 무엇인가를 드리겠다고 서원을 할 때 정직하게 하라는 겁니다. 성실하게 하라는 겁니다. 누가 하니까 나도 하고, 체면 때문에 하고, 순간적인 기분으로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정직하게 하고 성실하게 그 서원을 갚으라는 겁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에 대한 사건이 나옵니다. 이 부부가 자기 소류를 팔아 교회에 헌금을 합니다. 왜 그랬는가? 바로 앞에 보면 당시 초대교회의 경우 부유한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를 팔아 교회에 내놓음으로서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데 사용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바나바라는 사람이 자기 밭을 팔아서 사도들에게 다 내 놓아 구제와 선교를 위해 사용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 일로 인해 바나바라는 사람이 크게 칭찬을 받고 교회의 리더 그룹으로 들어선 것 같습니다.
이 일을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봤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무엇이 발동했어요? 시기심입니다. 우리가 이 교회에 먼저 있었는데 보니까 바나바가 자기 밭을 팔아 헌금한 이후에 크게 칭찬받고 교회의 리더그룹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우리가 사도행전을 통해 보는 바나바는 단지 이 일만 아니라 바울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는 일을 했습니다. 복음의 열정과 섬김의 수고가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그것만 봤어요. 그래서 시기심이 발동해서 우리도 그렇게 해서 칭찬받고 인정받자는 마음으로 소유를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교회에 내놓으려 하니 어땠어요? 아까웠어요. 다 드리려고 하니까 너무 금액이 큰 겁니다. 아까운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그 값에서 얼마를 슬쩍 숨겼어요. 그리고 다 드리는 것처럼 했어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정직의 상실입니다. 먼저 교회에 서약했겠지요. 우리도 그렇게 하겠다고 말입니다. 서약을 했을 때는 정직해야 합니다. 서약할 때부터 정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서약의 동기는 시기심이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동기부터 잘못되었습니다. 그 결과 그 서약을 갚는 것도 역시 거짓이었습니다. 성령께서 그것을 책망하자 거짓말을 합니다. 회개하기는커녕 끝까지 거짓말을 합니다. 그 대가가 무엇입니까? 죽음이었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는 지 아십니까? 하나님께 대한 맹세든, 사람에 대한 맹세든 맹세의 생명은 정직과 성실이라는 겁니다. 정직하지 않은 맹세, 지키지 않는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라는 겁니다. 맹세를 정직하고 성실하게 지켰을 때는 복이 주어지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는 저주가 오는 겁니다. 그래서 맹세와 저주는 같은 단어 שבועה(쉬부아)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결국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이 무엇이냐 하면 정직과 성실입니다. 맹세의 규정을 주신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이 무엇이냐? 사람들이 자신들의 말에 절대적으로 진실하고 자신들의 서약에 충실한 것입니다. 말에 대한 정직과 말한 것에 대한 성실을 요구하시면서 주신 규정이 바로 맹세에 대한 규정들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가르침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희석시켰고, 사람들 역시 맹세를 남용하거나 오용하고 악용했기에 예수님께서 책망하시고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 겁니다.
사도행전이나 다른 서신서를 보면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서원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 것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아예 하나님께 서원하는 것 자체를 금하신 것은 아니라고 생각이 들지만 서원을 포함한 맹세에 대해서 매우 엄격한 기준을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을 오늘날 우리 자신에게 적용한다면 어떤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핵심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지금도 맹세를 남용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그 예는 이미 앞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합니까? 말을 할 때 '절대'라는 말, '반드시'라는 말, '정말'이라는 말 자주 하지 않습니까? 약속 많이 하시지요? 맹세도 합니다. 하나님께 서원도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맹세와 약속을 많이 합니다. 어떠십니까? 그대로 잘 지키고 있습니까?
맹세의 핵심은 정직과 성실입니다. 정직하게 맹세하십니까? 그 약속, 정직합니까? 그리고 정직하고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습니까? 혹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원하거나 맹세한 것이 있지는 않습니까?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맹세의 가르침의 마지막에서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두 가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우선 말을 많이 하지 말고 함부로 맹세하지 말라는 겁니다.
전에 소개한 바 있는 미쉬나 제 4부 9편에 있는 피르케이 아봇, 우리말로는 선조들의 어록에 보면 이런 글이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자는 죄를 일으킨다."
이것은 잠언 10:19을 조금 바꾸어 말한 것인데, 잠언 10:19에 보면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다보면 실수가 많고 그러다보면 진실이 담겨져 있지 않은 맹세도 하게 된다는 겁니다. 기도는 많이 하되 말은 적게 하는 것이 좋고, 말을 하되 헛된 맹세를 하는 등의 실수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허풍이 많아요. 체면치레, 허세, 허풍이 많은 것 같아요. 예수님의 말씀처럼 예라고 할 때는 예라고 하고 아니오라고 할 때는 아니오라고 하는 것이 최선입니다. 내가 할 수 있거나, 해야 하는 것이면 예라고 하면 됩니다. 그리고 하면 되는 겁니다. 못하는 것, 아닌 것은 아니오라고 하면 그뿐입니다. 여기에 무엇을 더하는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더불어 '글쎄요'라는 애매모호한 말도 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글쎄요가 많은 사람은 되는 것이 별로 없어요. 예면 예, 아니면 아니라고 하고 그대로 하십시오.
그리고 두 번째 의미는 영어 성경에서 그 뜻이 잘 나타나는데, NKJV나 NIV 성경에서는 이것을 "Let your 'Yes' be 'Yes', and your 'No','No'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헬라어 원어를 직역한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잘 살려서 번역했다고 봅니다. 너의 Yes를 Yes되게 하라는 겁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정직과 성실을 말하는 겁니다. 우선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나 자신에게도 정직하고 사람들에게도 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서 정직하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거나 하나님의 뜻이라면 다른 맹세 필요 없습니다. Yes라고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Yes를 Yes 되게 하면 됩니다. 말한 그대로 순종하면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과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맹세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이라면 Yes하면 되고 못하는 것, 아닌 것, 해서는 안되는 것은 No라고 하면 됩니다. No라고 하고 그걸 하면 안됩니다. 안 했다고 해놓고 한 것이 되거나 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선 말을 많이 하지 마십시오. 특히 맹세와 관련된 말은 정말 조심하십시오. 아예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다만 예라고 할 때는 예하시고 아니오라고 할 때는 아니라고 하십시오. 그리고 예라고 하신 말을 예가 되게 하십시오. 나의 입술로 Yes라고 한 말이 실제의 Yes가 될 수 있도록 정직과 성실을 행하라는 겁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가 기록한 유대전쟁사 2권에 보면 에세네파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들의 말 한 마디는 맹세보다 더 강한 힘이 있다. 그들은 맹세를 하는 것을 피했고, 말한 것을 어기는 것은 법정에서의 위증보다 더 나쁜 것으로 여겼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이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배척과 경멸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이라고 했다."(유대전쟁사 2권, 8장 6)
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 에세네파 사람들은 맹세하는 것을 피했다는 겁니다. 왜냐?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아도 서로를 믿을 수 있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 한 마디가 맹세보다도 힘이 있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믿을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이미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맞는 말 아닙니까? 이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예수님의 가르침 그대로 맹세를 주신 하나님의 참 뜻을 깨달아 정직과 성실로 살았다는 겁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래야 하는 것 아닙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이야 거론할 것 없고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맹세보다 힘이 있다라는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정직하고 그 말을 성실하게 지킨다는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습니까?
멋있지 않습니까? '예수 믿는 당신이 하는 말은 맹세보다 힘이 있다. 당신이 하는 말은 내가 전적으로 믿을 수 있다.'라는 인정이 우리의 삶의 현장 속에서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정에서, 부부관계에서, 자녀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직장에서, 비즈니스의 현장에서, 거래의 현장에서, 대인관계에서 이러한 인정을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세상은 서로를 점점 믿지 못하고 불신하고 서로를 속이려 합니다. 그러니 더욱 더 맹세가 난무하고 절대로, 반드시라는 말을 쓰고 믿어달라고 하면서 헛된 맹세를 합니다. 거짓을 행하고도 사실이라고 맹세를 합니다. 맹세가 많으면 많을수록 더 믿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라고 하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택해야할 길이 무엇이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그걸 요구하시는 겁니다. 말에 있어 정직과 성실입니다. 적어도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의 말과 한 말을 실천하는 것을 사람들이 정직하다고 성실하다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이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본래 거짓에 익숙한 사람들이고 자기변명에 익숙한 사람들이고 자기 합리화에 익숙하고 자신의 이익과 욕심에 충실한 사람들이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12:2에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
우선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에 집중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너희가 왜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고 거짓과 속임수로 맹세를 악용하는 사람들을 본받느냐 라는 겁니다. 본받지 말라는 겁니다. 우선 여기에 집중하십시오.
그리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세요. 이 변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가능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나의 왕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뜻이 나의 마음과 생각과 삶 가운데 이루어지게 하십시오.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께 순종하라는 겁니다. 그것이 쌓여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되는 것 아닙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는 결단,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말씀으로 생각을 새롭게 하고 변화를 받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입으로 고백된 Yes가 실제의 나의 인격과 삶 가운데 Yes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축적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직과 성실이 나의 삶의 특징이 되고 정체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나를 사람들이 관계하여 보고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정직한 Yes가 있고, 그것을 그대로 이루어가는 성실한 Yes가 있는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부정과 불의와 비리에 대해서 정직한 No가 있고, 실제로도 No인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정치계, 정부기관과 관공서에 많아져야 하고 그런 정직과 성실함으로 믿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경제계와 학계에도 많아져야 하고 모든 분야에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교회 역시 정직과 성실로 세상 사람들이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굳이 맹세를 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맹세가 자리 잡을 틈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닮은 정직과 성실이 있을 뿐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맹세에 대한 가르침은 우리의 말과 실천에 있어서 예수님을 닮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입니다. 올해 가정의 기도제목과 개인의 목표를 보면 예수 닮아가는 사람이 되는 것, 예수 닮아가는 가정이 되는 것이라고 쓰신 분들이 많은데 예수님을 닮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입니다. 말과 실천에 있어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정직과 성실입니다. 맹세하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정직하게 Yes라고 한 것을 성실하게 이루어감으로써 Yes를 Yes로 만들어가는 사람 되시길 우리의 Yes가 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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