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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43-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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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용서는 나의 것!
2010년 2월 20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5:43-48
2주전에 오늘 본문의 앞 부분을 다루면서 ‘복수는 나의 것?’(? 마크의 의미)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것과 이어지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본성은 ‘복수는 나의 것’인 것이 맞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가 사실 우리의 본성에 맞고, 그 이상의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 사실 우리들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반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복수는 너의 것이 아니다. 복수는 하나님의 것이다, 즉 원수를 심판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대신 무엇이 너의 것이 되어야 하는가? 용서와 사랑. 용서와 사랑이 바로 너희의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복수가 나의 것이 아니라 용서가 바로 나의 것이고 사랑이 나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따라 해봅시다. “복수는 나의 것이 아니다.”, “용서는 나의 것이다.”, “사랑이 나의 것이다.”
이것이 38-48절까지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그 대상이 원수일 때는 더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계명입니다. 아마도 가장 지키기 어려운 계명일 것입니다.
46-47절 말씀과 같은 사랑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물론 요즘 세상을 보면 이런 사랑도 그리 잘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점점 더 개인주의화되고 이기적인 사회가 되다보니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조차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상처가 있고 쓴 뿌리가 있고 이기적인 마음, 자신의 입장을 주장하는 것, 거짓과 욕심,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죄성 등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사랑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조차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고 나를 사랑하는 자조차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정도의 사랑은 세리도 하고, 이방인들도 가까운 형제에게 문안한다-이것은 축복과 평화를 비는 것을 말하는데, 이방인들도 가까운 이들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정도의 사랑이 아니라 그 이상의 사랑을 하라는 것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그냥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셨다면 그래도 여기까지는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용기가 생길 것입니다. 나와 가까운 사람들도 아니고 나에게 선을 행하거나 친절하게 하지 않았어도 그 정도까지는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다거나 나와 특별한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라도 그 정도는 그래도 사랑할 만 하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거기서 한 차원 더 나아가 원수도 사랑하고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나에게 악의를 품고 나에게 해를 가하고 나를 미워하고 증오하면서 음해하고 공격하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걸림돌이라는 것입니다.
나와 관계된 사람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내 마음에 드는 사람들, 내게 유익을 주고 선하게 대해주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그리 어렵지 않고, 조금 마음을 크게 먹고 나와 직접 관계가 없지만 다른 사람들까지도 도와주고 사랑하는 것까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나에게 악의와 증오심을 가지고 해를 가하고 공격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니 여기에서 걸리는 겁니다.
왜요? 우리의 본성과 달라도 너무나 다르고 세상의 일반적인 흐름과 생각과도 너무나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기를 보호하고 개인주의가 강조되는 사회입니다. 또한 그러한 악인을 응징하고 보복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성 역시 여기까지는 쉽게 용납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말씀은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일까요? 정말 예수님은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을 명하고 계신 것일까요?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모든 계명들 가운데 실현 불가능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을 명하셨고, 더불어 꼭 지켜야만 되는 계명들만 명하셨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 역시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고, 더불어 해야만 하는 계명이기에 주신 것입니다. 비록 우리의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적인 것이라고 해도 이 계명은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계명입니다. 이것을 먼저 기억하고 이 말씀을 대하시길 바랍니다.
앞에 있는 다른 다섯 가지의 안티테제, 반제들처럼 이것 역시 구약성경의 말씀이나 당시 유대교의 해석 내지는 일반적인 통념을 언급하고 계십니다. 43절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네 이웃을 사랑하고’, 이 말씀은 레위기 19:18 말씀에 해당됩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리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사실 구약성경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다만 시편 139:21-22 등의 말씀 등에서 유추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하오며 주를 치러 일어나는 자들을 미워하지 아니 하나이까 내가 그들을 미워하니 그들은 나의 원수들이니이다”
네 원수를 미워하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명하신 말씀이라기보다는 시편 139편과 같은 성경의 다른 곳들에서 유추된 해석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이러한 성경 해석이 있었고 사람들 역시 당연한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보통 에세네파라고 하는 쿰란 공동체 역시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자들을 증오하라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사고에서는 이웃은 동족 유대인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원수는 이스라엘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이방민족이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동족 유대인을 사랑하는 것이고, 자신들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이방인은 원수이고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을 괴롭히는 원수이므로 당연히 미워해야한다는 것이 당시의 당연한 상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언급하셨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어라 말씀하셨습니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 말씀을 처음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가히 충격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고 배워왔고 그렇게 생각해왔는데, 원수를 사랑하라니 이건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지금까지 어느 랍비에게도 이러한 가르침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매우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자신을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참 어려운 말씀이고 상식을 벗어나는 말씀이라고 여겨지지만 예수님 당시에 처음 이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에게도 역시 매우 충격적이고 상식을 벗어난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받은 제자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세워진 초대 교회에서는 이 말씀을 실현 불가능한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많은 역사 기록에 의하면 초대 교회 사람들은 실제로 원수를 사랑했고 자신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38-48절은 예수님 당시의 제자공동체와 초대교회의 상황에서 먼저 이해해야합니다. 즉 예수님을 메시아로 선포하고 천국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제자공동체가 받은 모욕과 박해의 상황,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선포하고 복음을 전한 초대 교회가 받은 박해의 상황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러한 상황에서 받는 모독과 박해에 대해 대적하지 말고 인내하라는 것이고 그러한 원수들을 악으로 갚지 말고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구절을 이해하는 첫 번째 관문이지만, 제자공동체와 초대교회의 상황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실천되어야 할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이 말씀이 그대로 진리이고 주님께서 명하신 계명으로 받아들여서 실천해야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는 이 말씀에는 대 전제가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바탕에 깔려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이러한 계명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전제가 무엇일까요? 바로 용서입니다.
마태복음 9장에 보면 갈릴리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왔는데 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작은 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마태복음 5장부터 7장까지의 산상수훈은 어떤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이냐?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5:1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고 했는데, 이는 단순히 많은 무리들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죄 용서를 받은 사람들에게 명하신 말씀이 바로 산상수훈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산상수훈을 읽을 때 우리는 이 전제를 앞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너의 죄가 사해졌으니 이제는 복이 있는 사람으로 살라’는 겁니다. 그것이 팔복입니다.
‘너의 죄가 사해졌으니 이제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라’는 겁니다.
‘너의 죄가 사해졌으니 이제는 분노를 품지 말고 증오심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너의 죄가 사해졌으니 이제는 음란한 삶을 버리고 정결하고 구별된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너의 죄가 사해졌으니 이제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복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되라’는 겁니다.
‘너의 죄가 사해졌으니 이제는 너의 원수까지도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겁니다.
즉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 명령은 단순히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감정을 가지고서는 결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원수를 향한 감정은 사랑의 감정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감정에 따라 사랑한다면 우리는 평생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없을 겁니다. 우리의 변덕스런 그 감정으로 과연 몇이나 사랑하겠으며 얼마나 진실 되게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사랑은 감정적인 차원이 아니라 의지적인 행동입니다. 모든 사랑이 그러합니다. 심지어 부부간의 사랑도, 가족 간의 사랑도 의지적인 사랑을 명하십니다. 사랑해서 결혼했지만 그 다음부터는 의지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형제 사랑도 이웃 사랑도 의지적인 사랑이고, 원수 사랑도 의지적인 사랑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헬라어로 ‘아가파오’, 아가페입니다. 의지적인 사랑,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즉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시는 사랑은 의지적으로 실천해야할 구체적인 행동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감정에 충실합니다. 그래서 감정이 생기고 마음이 동해야 무언가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을 감정적인 면에서 이해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감정을 뛰어넘는 실천입니다. 사랑은 우리가 행해야하는 그 어떤 것입니다.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죄용서 받은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이 해야 하고 실천해야할 구체적인 행동이라는 것입니다. 감정이 사랑의 동기가 아니라 죄용서 받은 은혜가 사랑이 동기입니다.
여러분들의 사랑의 근거, 사랑의 동기는 무엇입니까? 여전히 감정입니까? 죄용서 받은 은혜입니까? 단순히 내게 잘 해주는 사람, 친절한 사람, 마음에 드는 사람, 친한 사람, 가까운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집중되는 여전히 감정에 근거한 사랑입니까? 아니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까지도 나의 죄를 용서해주신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해서 사랑하는 그런 사랑입니까?
여기서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누가 용서할 수 있습니까? 죄 용서 받은 사람이 용서할 수 있습니다. 누가 사랑할 수 있습니까? 죄인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통해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이 나에게 상처나 해를 끼친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여전히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면서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이 여전히 용납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정죄하고 똑같이 보복하면서 살아가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될 때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딸이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다고 했을 때는 아주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짐을 뜻합니다.
셈족 문화나 언어에서 ‘아들’은 특별한 관계를 뜻합니다. 그 아버지의 성품이나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요한과 야보고에게 ‘우레의 아들’이라고 하셨는데, 이는 우레, 즉 천둥인데, 천둥처럼 급하고 쉽게 화를 잘 내는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다고 했을 때는 우리에게 어떠한 성품과 속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이 무엇입니까?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하시는 사랑입니다. 심지어 악인들,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에게조차도 자비를 베푸시는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그 크신 사랑을 경험했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게 된다고 했는데, 이 말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라는 특별한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특별한 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용서와 사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용서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별한 관계가 열렸지만 그 관계가 발전하고 성숙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이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장 중심되고 뚜렷한 성품과 속성이 용서와 사랑인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는 이들이 여전히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이처럼 원수조차도 사랑할 수 있고 그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는 그런 용서와 사랑을 할 때 너희가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다운 성품과 삶이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하시는 것처럼 여러분도 용서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악인에게도 똑같이 태양빛을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고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용서와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나와 관계된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 거기에는 원수까지도 포함되는데, 그렇게 사랑하고 용서하는 것이 우리가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증거입니다.
용서와 사랑이 없다면 우리가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직분을 맡고 어떤 훌륭한 사역을 한다 할지라도 그것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예수님의 제자라는 증거가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내가 도무지 너희들을 도무지 모르겠다’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용서와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이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가장 확실하고 중요한 징표입니다.
만일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면 못할 사랑이 없습니다. 우리가 품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갖고 있습니다. 관계에 있어 장애를 갖고 있습니다. 사랑하고 싶은데 사랑하지 못합니다.
가족 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부모 자녀간의 상처와 미움이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부부간의 상처와 갈등이 있습니다. 고부간의 갈등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역시 관계에 장애가 있습니다. 상처가 있습니다. 상처를 주기도하고 받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았음에도 여전히 용서와 사랑에 있어 힘들어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의 범위를 넓히라는 겁니다. 용서의 범위를 넓히라는 겁니다. 내가 마음에 드는 사람,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 나를 알아주고 친절하게 대해주는 사람, 내게 유익이 되는 사람, 나와 가까운 사람, 나와 맞는 사람, 그런 사람들만 사랑하는 그건 차원에서 이제는 벗어나라는 겁니다. 그건 세리와 이방인, 이 둘은 예수님 당시에 죄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런 차원의 사랑은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모르는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런 차원을 뛰어넘어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라는 겁니다, 그 끝이 무엇이냐? 바로 나에게 악의를 품고 해를 끼치는 사람들까지라는 겁니다. 거기까지 나아가라는 겁니다. 그렇게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겁니다.
그렇게 용서와 사랑의 범위가 넓어지면 내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 내가 사랑하지 못할 사람이 없어지게 됩니다. 부모님, 그분들에게서 상처를 받고 미움이 있지만 능히 용서할 수 있습니다. 능히 사랑할 수 있습니다.
내 감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나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은혜로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받게 되는 상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을 때는 힘듭니다. 칼에 찔리면 정말 아픕니다. 그렇지만 품을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용서와 사랑의 차원을 넓히십시오.
48절에서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은 완료형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용서와 사랑은 완전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신 사랑처럼 우리도 온전하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미래형입니다.
의미를 살려 번역하면 ‘너희도 온전하여져라’는 뜻입니다. 즉, 너희에게 보여주신 아버지 하나님의 온전하신 용서와 사랑을 본받아 너희도 용서하고 사랑하면 너희의 사랑도 온전하여질 것이므로 그렇게 용서하고 사랑함으로써 너희의 사랑도 온전하여져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고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우리를 자녀 삼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닮은 자녀가 되길 원하십니다. 그 길이 바로 용서와 사랑입니다.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용서가 필요하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습니다. 인정은 하지만 꺼려합니다. 심지어는 용서는 나약하고 비겁한 태도라고까지 간주합니다. 각자의 권리를 주장해야하지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말합니다.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정의의 이름으로 복수하고 심판하는 것이 옳다고 배워왔습니다.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것이 사실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과 논리를 뒤집은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고 하심으로 왜 우리가 용서해야 하고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용서의 행위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습니다. 보복을 하는 것이 훨씬 쉽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만 보복은 결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증오를 낳고 또 다른 보복으로 이어집니다.
그러한 보복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용서이고 사랑입니다. 보복을 통해서는 절대 평화가 이루지지 않습니다. 화해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용서와 사랑만이 화해와 평화를 이루어냅니다.
그것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고, 예수님의 뒤를 따른 스데반, 사도 바울, 베드로, 요한,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과 성도들의 삶이었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수많은 박해와 증오심이 그들을 향했지만 그들이 한 것은 보복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이 결국에는 승리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현대사에 있어서는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을 예를 들 수 있을 겁니다. 1960년대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해 예수님의 정신으로 저항했던 분입니다.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2백여 년간 인간으로서 존중받지 못한 채 차별대우를 받고 고통을 받아왔는데 그에 대한 저항운동을 이끌면서 그가 생각하고 끝까지 붙잡았던 것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그동안 당한 부당한 대우에 대해 동일한 반응으로 나선다면 흑인과 백인간의 폭력만이 난무할 것이고 결국에는 더 깊은 앙심과 증오심만이 남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한 것입니다. 인종적인 편견과 증오의 장벽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더 높아질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그동안 자신들을 압제했고 지금도 편견과 증오심으로 압제하는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흑인과 백인을 파괴의 소용돌이에서 구해 낼 수 있고 용서와 사랑만이 밝은 미래로 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믿음대로 인종차별이 철폐되고 흑인들과 백인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가는 세상으로 점점 변하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그의 책인 ‘사랑하는 힘’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한 말입니다.
“우리는 용서의 능력을 개발하고 유지해야만 한다. 용서하는 능력이 결여된 사람은 사랑할 능력도 없는 사람이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거듭거듭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지 않는다면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사실은 피해를 당한 사람이 언제나 먼저 용서의 행위를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뿌리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 불법적인 행위의 희생자, 그리고 압제의 피해자들이 먼저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다.
용서는 죄악을 그저 무시해 버리거나 악한 행위를 모른 척 무마시키는 것은 아니다. 용서는 악한 행위로 하여금 우리의 사귐에 방해가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용서는 새롭고 신선한 시작을 하는데 필요한 분위기를 마련해 주는 촉매제 같은 것이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한 말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용서의 능력을 개발하고 유지해야한 합니다. 용서하는 능력이 결여된 사람은 사랑할 능력도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을 거듭거듭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는 성처입은 사람, 불법적인 행위에 희생당한 사람이 먼저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래 용서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복수에 가깝지 용서에 가까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러한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용서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적인 삶에서 여전히 용서가 힘들고 용서가 힘들기에 사랑은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용서의 능력을 개발하고 유지해야 합니다. 먼저 자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사람임을 기억합시다. 하나님의 눈으로 사람들을 봅시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나나 나에게 악의를 품고 해를 가하는 사람도 역시 죄인이고 연약하고 상처가 많고 흠이 많은 사람일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악인에게도 똑같은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원수도 역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내가 받은 용서의 은혜, 가슴 벅찬 사랑을 기억하면서 나도 그 사랑 본받아 용서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합시다. 앞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사랑은 의지적인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용서하기로 결심하십시오. 사랑하기로 굳은 결심을 하십시오. 그리고 실제로 용서하시고 사랑하십시오. 그래서 우리 안에 잃어버린 기술, 용서를 회복하고, 주님 닮은 용서를 키워나가고 주님 닮은 사랑으로 사람들을 품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용서는 나약하고 비겁한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건강하고 용기있고 자존감과 존엄성이 높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용서는 보복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이 있고 사랑은 미움과 증오가 만들 수 없는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그것을 해내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아시는 것처럼 지난 주 화요일에 이단문제 공청회가 예루살렘에서 열렸습니다. 어느 한 분이 이단과 관련된 증거와 의혹이 있었는데 잘 끝났는데, 그 과정에서 이 분이 이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에게 매우 감정적으로 대했습니다.
가만히 안 놔두겠다면서 법적 고발을 했습니다. 간접적으로 간여한 저까지 명예훼손으로 고발하겠다고 했고 변호사에게서 서한까지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해서는 안될 협박까지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해명을 요구한 분들이 감정이 많이 상했습니다. 화도 나고 이런 사람 그대로 놔두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어요.
그러던 중에 제가 산상수훈을 쭉 설교를 하고 있는데 때 마침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지 말고 악을 악으로 대하지 말고 선으로 악으로 이기라는 말씀이었어요. 용서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참 때에 맞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몇 분과 함께 나누었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이 사람을 잡자고 한 일이 아니지 않느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용서다. 이단과 관련된 의혹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해명해야 하지만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용서다. 그 사람이 자신의 잘못의 시인하고 사죄하고 책임을 지겠다고 하면 가장 좋은 것이고, 그렇지 않고 정말 법정으로 가더라도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용서다. 우리 안에 미움이 자리 잡아서는 안 된다. 그 미움이 결국 보복이 되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문제를 제기한 분들이 그러한 마음으로 공청회에 임했고 그 결과 이단 관련 의혹을 받은 분이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고 했고, 문제를 제기한 쪽에서도 오해한 부분이 있었는데 이 역시 사과를 하고 서로 화해하고 앞으로는 한인교회들과 선교사회, 한인사회가 합심해서 이단문제에 대처하기로 결론을 지었습니다.
참 감사한 일인데, 이 일을 통해 결국 하나님의 정의가 이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고, 더불어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안에 미움과 보복의 마음이 자리 잡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상대방은 자신의 잘못이 있음에도 분노와 보복으로 우리를 대하려고 했지만 우리가 붙잡아야 할 것은 용서이고 사랑이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분을 위해 기도 많이 했습니다. 그 위에 회개의 심령이 주어지고 다시 돌이킬 수 있기를 말입니다. 이 문제로 한인사회가 분열되고 갈등이 생기지 않도록 말입니다. 무엇보다 이 문제를 처리하는 사람들 마음이 다치지 않기를 구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용서와 용납하는 마음으로 채워주셔서 아무도 다치지 않고 잘 끝날 수 있었습니다.
용서는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나에게 악의를 품고 해를 가하려고 하는 이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기도할 때 참 승리가 주어집니다. 할렐루야!
전에 ‘토라에 울타리를 치라’는 말의 의미에 대해 말씀을 드렸는데, 산상수훈은 예수님께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 쳐주신 토라의 울타리, 말씀의 울타리입니다. 당시 유대교의 편협되고 왜곡된 해석과 사람들의 악용과 오용에 의해 잘못 쳐진 토라의 울타리를 다시 고쳐주시고 새롭게 해주시고 아울러 그 울타리를 넓혀주신 것이 바로 산상수훈입니다.
네 이웃 동족 유대인만 사랑하고 원수는 미워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제자들에게 네 이웃만이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심으로 우리가 해야 할 사랑의 울타리를 넓게 쳐주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할 일은 그 울타리를 채우는 일입니다.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그 말씀에 따라 용서하고 사랑하는 구체적인 순종과 실천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쳐주신 토라의 울타리를 채워나가십시오. 그것이 진정한 율법의 완성입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완성하시길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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