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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바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1800 추천 수 0 2013.09.20 19: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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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9-15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3: 하늘에 계신 우리 아바
2010년 3월 27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6:9-15

  ‘왕중 왕’, ‘King of King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1927년도 작품인데 ‘십계’, ‘벤허’등과 같이 명작에 속하는 고전영화입니다. 이 영화의 제목처럼 왕중 왕은 누구일까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영화의 감독이 세실 데밀인데, 데밀감독은 ‘삼손과 들릴라’,‘십계’등을 만든 거장에 속하는 감독입니다. 그가 ‘왕중 왕’을 촬영할 때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장면 중에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이 때 엑스트라가 약 200명 정도 동원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예수 믿는 이들도 있었고 안 믿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데밀 감독은 이 장면을 찍기 전에 엑스트라들에게 이렇게 부탁하였습니다.
“여러분!  조용히 5분 동안만 십자가를 바라봐 주십시오. 여러분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상관없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든지 상관없습니다. 종교가 없는 분은 어머니 생각을 하여도 좋습니다. 다만 시선은 십자가만 바라봐야 합니다.”

  이제 촬영이 시작되었습니다. 데밀 감독이 부탁한대로 모두가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모든 이들이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흐느껴 울고 있었습니다.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모두가 울고 있었습니다.

  데밀 감독은 이런 장면이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하였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조용히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십자가에 매료되었습니다. 심지어 로마 병정 역을 맡은 이들까지 십자가에 매료되어 있는 순간이 연출되었습니다.

  데밀 감독은 그 때의 감격스러웠던 순간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나의 허물을 대신 책임지고 인간이 되셨고 고통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누구에게나 감격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인류역사상 최대의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모든 인간들의 죄를 지시고 속죄의 피를 흘리심으로 죄용서 받는 구원의 길을 여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담긴 그 의미를 깨닫는 자는 ‘왕중 왕’이란 영화의 엑스트라들처럼 십자가 앞에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십자가 사건을 주기도문과 연결시켜 생각하면 첫 구절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바’로 볼 수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과 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대신 죽으심으로 속죄의 구원을 이루신 사건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 죄인과 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우리는 성육신, Incarnation이라고 합니다. 성자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피 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를 씻으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영생을 얻을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즉 대속의 구원입니다.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과 그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께서 이루신 대속의 구원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 둘을 다르게 표현하면 내재성과 초월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말은 친밀감입니다. 이 친밀감을 다른 말로 하면 내재성입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 안에 계시는 친밀감입니다.

  초월성은 신적 초월성입니다.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초월성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이 내재성과 초월성입니다. 좀 더 쉽게 설명을 해드리면, 우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초월성이 필요합니다.

  죄인이 죄인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유한한 인간이 똑같이 유한한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보다 무능하거나 세상보다 작은 존재 역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고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존재는 인간보다 커야 하고 세상보다 커야 합니다. 온 우주보다 커야 합니다. 죄로부터 구별되어야 합니다. 그 능력에 있어 무엇보다 강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초월성입니다.

  하나님은 초월성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주보다 크십니다. 우주를 만드신 분이시고 우주를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이 우주에서 그 누구보다도 막강하십니다. 전능하십니다. 죄로부터 구별되어 계십니다. 즉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에 제한을 받지 않으십니다. 어디에나 계실 수 있습니다. 이것 역시 초월성입니다. 이러한 초월성을 갖고 계신 분만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초월성만 갖고 우리와 뚝 떨어져 있으면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를 도울 수는 있지만 죄의 문제와 죄로 인한 죽음의 문제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이 바로 내재성입니다. 초월하신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 가운데 오시는 겁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인간들 가운데 오시는 겁니다. 바로 성육신입니다. 임마누엘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재성입니다.

  초월자이신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오셔서 인간의 죄를 지시고 죽으시는 것이 곧 내재성이고, 이로써 온전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죄인의 죄는 그 죄인이 피 흘려 죽는 방법과 누군가 죄 없는 이가 대신 피 흘려 죽는 방법밖에는 죄용서의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방법이 바로 우리가 성육신이라고 하는 내재성입니다. 죄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을 대신 해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죄인들의 죄값을 치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용서 받게 하시고 구원받게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고,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입니다.

  여기서 잠간 타종교의 신관을 비교해 보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부인하는 신론이 있습니다. 무엇이라 부릅니까? 범신론입니다. 불교나 힌두교가 대표적인 범신론적 종교입니다. 범신론에서는 인간을 구원하는 신이 따로 있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초월적인 존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부처는 초월적인 신이 아닙니다. 인생의 문제를 고통으로 보는 불교에서 그 고통의 반복, 즉 윤회로부터 벗어난 자, 그것을 해탈이라고 부르는데, 그 해탈을 이룬 자가 부처입니다. 그러기에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범신론의 결론 자력 구원입니다.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을 구원이라고 보기에 자기를 비우는 구도를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범신론이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매력을 갖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는 고통이 아니라 그 고통을 가져다주는 죄의 문제이며, 더욱 더 근본적인 문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해탈은 무의미합니다. 고통으로부터는 벗어났는지는 모르나 그것은 구원이 아닙니다.

  반대로 신의 초월은 인정하지만 신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에게로 와야 한다는 측면, 즉 내재성은 부인하는 종교관이 있습니다. 바로 이신론인데 이슬람교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슬람에서는 우리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신이 존재합니다. 알라입니다. 알라를 성경의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슬람교 자체가 성경에서 많은 부분을 차용했기 때문에 하나님 역시 성경에서 그 개념을 가져 왔지만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야웨 하나님과는 다릅니다. 어찌되었든 이슬람교에서는 알라의 초월성을 매우 강조합니다. 알라는 위대하다 라는 것이 이슬람 사원에서 매일 여러 번 반복되는 기도의 첫 선포입니다.

  그러나 그 알라는 하늘 저 꼭대기에 홀로 앉아있을 뿐이지 결코 이 타락한 세상에 오지 않습니다. 내재성은 없습니다. 그러기에 결국 이슬람교 역시 자력 구원론에 빠지게 됩니다. 메카를 순례하고 금욕을 하고 라마단 금식을 하고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를 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는 적선을 많이 하는 것을 통해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심지어 자폭 테러를 하면 알라에게 직행하여 천국의 가장 좋은 곳을 차지하며 거기에 순결한 처녀 다섯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초월적인 신을 말하지만 결국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는 자력 구원입니다. 혹은 숙명론에 빠집니다. 모든 것이 초월적인 신 알라의 뜻입니다. ‘인샬라’, 모든 것이 알라의 뜻이다 라는 말 아닙니까? 모든 것을 알라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숙명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떠한 하나님을 말씀하십니까? 초월성의 하나님뿐만 아니라 그 초월적인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로 오시는 내재성을 동시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바로 구약성경이고, 그것이 예수님을 통해 실현된 것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초월하신 하나님과 우리 가운데 오신 내재적인 하나님을 동시에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성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의 첫 구절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바”라는 첫 구절입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하나님의 초월성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가리켜 ‘하늘에 계신’이라고 했을 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하나님의 창조주 되시고 섭리자 되심, 하나님의 무소부재, 하나님의 뛰어나심 등에 대한 표현입니다. 즉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말이 바로 ‘하늘에 계신’입니다.

  시편에 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기도들이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서 97:9에 보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이렇게 강조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

  야웨 하나님께서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다, 즉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말씀인데, 여기서 지존이라는 말이 바로 히브리어로 '엘리온', ‘עליון’입니다. 이 '엘리온', ‘עליון’이 영어에서는 'Most High'로 번역되었는데, 우리말로도 '가장 높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할 때 '엘 엘리온', ‘אל עליון’ 이라는 말을 쓰는데, '가장 높은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온 우주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장 높은 하나님, '엘 엘리온', ‘אל עליון’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야웨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라고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로는 'נעלית על כל אלוהים'입니다. 당신은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다라는 뜻인데, 여기서 '신들'이라는 단어가 바로 '엘로힘', אלוהים입니다.

야웨 하나님을 표현할 때도 똑같은 엘로힘이라는 말을 씁니다. 사실 엘로힘이라는 말은 복수입니다. '신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방의 많은 신들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유일한 신, 홀로 살아계신 초월적인 신이신 야웨께 동일하게 쓰고 있습니다.

  제가 이 구절을 보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방의 무수한 신들을 표현하는 단어인 엘로힘을 유일하신 하나님이신 야웨께 그대로 썼을까? 영어에서 다른 단어가 없어서 하나님을 보통의 신을 뜻하는 god을 그대로 쓰면서 첫 글자만 대문자로 바꾸어 God이라고 쓰는 것과 같은 것일까? 왤까?'

  저 나름대로 얻은 결론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신이라고 섬기는 모든 신들, 즉 엘로힘들을 대신할 수 있는 자가 바로 나 야웨다.'라는 겁니다. 다른 모든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가짜다. 너희가 신이라고,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신들, 모든 엘로힘을 다 모아서 대신할 수 있는 자가 바로 나 야웨다. 모든 엘로힘보다 훨씬 크고 위대한 이가 바로 나 야웨다. 모든 엘로힘을 다 모아도 나를 대신할 수 없다. 또한 실제로 다른 엘로힘은 없다. 내가 곧 유일한 엘로힘이다. 그러므로 나만을 엘로힘이라 부르라.'

  이해가 되시는지요? 모든 엘로힘, 모든 신들보다 뛰어나실 뿐만 아니라 모든 엘로힘을 대신할 수 있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 야웨, 엘로힘 야웨이십니다.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에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이 담겨져 있다면 이어지는 '우리 아바'라는 말에는 하나님의 어떠한 면이 담겨져 있을까요? 바로 내재성입니다.

  지난 두 주에 걸쳐서‘우리 아바’라는 말은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과 가지셨던 친밀한 관계, 하나 되는 관계를 표현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표현을 우리에게 쓰게 하심으로서 우리 역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임을 강조하시면 그 친밀한 관계를 기도를 통해 이루어가라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주기도문의 첫 구절인 ‘우리 아바’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의미하지만 이 친밀함은 그저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이 친밀함은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을 몸을 입고 오심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 즉 내재성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저 멀리 떨어져 계시다면 즉 초월적인 하나님으로만 계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아바’라고 부르는 친밀함을 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라고 나의 사랑하는 자녀라고 하셔도 하나님은 여전히 거룩하시고 우리와는 너무 큰 차이가 나는 분이시기에 감사와 경배는 드릴 수 있어도 어린아이가 아빠를 부르는 것처럼 그런 친밀함을 느끼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우리 가운데 계시다 라고 했을 때는 달라집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 임마누엘인데, 이랬을 때는 우리가 느끼는 거리감은 상당히 다릅니다. 거룩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그래서 감히 가까이 갈 수 없는 그 하나님이 나와 똑같은 사람의 몸을 입고 내 곁에 계시다 라고 했을 때는 훨씬 더 가까운 친밀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청소년 때, 고 1 말로 기억되는데, 여러 가지로 힘들었던 때였습니다. 그때 밤에 교회에 기서 소예배실 뒤쪽에 앉았습니다. 사람도 없었고 불도 꺼져 있는 상태에서 강단 앞에 십자가만이 은은한 불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도 사춘기가 있었을까? 예수님도 이렇게 가정의 어려움을 겪으셨을까?’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이런 생각은 처음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도 사춘기를 겪으셨을까요? 예수님 역시 가정 안에서 일어나는 어려움을 겪으셨을까요?

  처음에는 잘 모르겠더라고요. 나 스스로 질문을 했지만 잘 모르겠어요. 그런데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하는데, 그런 확신이 들더군요. 예수님 역시 나처럼 사춘기를 겪으셨다는 것이고, 나처럼 가정의 어려움도 겪으셨다는 것입니다. 분명한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희한한 것은 이러한 깨달음이 드니까 예수님이 얼마나 가깝게 느껴지는지! 전에는 그저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만 알고 믿었는데, 그 예수님께서 나와 똑같이 사춘기를 겪으셨고 나처럼 가정의 어려움도 겪으셨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까 예수님이 전과는 다르게 느껴지는 겁니다. 정말 가깝게 느껴지고 친구처럼 느껴지는 겁니다.

  그러면서 힘이 났습니다. 위로가 되었고 용기가 났어요. 예수님도 나처럼 사춘기를 겪으셨고 가정의 어려움을 겪으셨다는 것을 알고 나니까 어찌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요. 왜요? 예수님이 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거든요. 나를 아신다는 말이거든요.

  가장 큰 위로는 나를 아는 사람이 해주는 위로입니다. 나와 똑같은 경험을 해본 사람이 해주는 위로입니다. 나처럼 병상에서 투병을 해 본 사람이 주는 위로입니다. 나와 똑같이 방황과 아픔을 경험한 사람이 해주는 위로입니다. 나처럼 가난과 배고픔을 경험한 사람이 해주는 위로입니다.

  예수님이, 그저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 나와는 별 상관없는 그런 분으로만 알았는데, 나와 똑같은 몸과 감정과 본능을 갖고 계셨고, 나와 똑같이 갓난아이로 태어나 어미의 젖을 먹으며 자라나셨고, 나와 똑같이 힘든 사춘기를 보내셨고, 나와 똑같이 가정과 삶의 어려움을 경험하시면서 자라나셨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었는지 모릅니다.

  그 이후로 예수님이 정말 가까워졌어요. 기도할 때도 너무 가깝게 느껴져요. 정말 예수님이 내 옆에 계신 것 같아요. 그래서 그렇게 기도합니다.
  “예수님, 아시지요? 저 힘든 것 아시지요. 예수님도 겪어보셔서 아시지요.”

  친밀한 친구에게는 솔직합니다. 체면 차리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합니다. 왜요? 친한 친구니까! 나를 알고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친구니까!

  나를 정확하게 알고 깊이 이해해줄 수 있는 최고의 친구이신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을 여러분의 친구로 삼아 친밀한 우정을 쌓아나가십시오.

  예수님께서 먼저 우리에게 친구하자고 하신 것 아십니까? 요한복음 15:15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

  이제부터는 우리를 종이라고 하지 않으시겠답니다. 사실 종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종이라 부르지 않고 친구라 부르시겠답니다.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신 성자 하나님께서 나를 친구라 부르시겠답니다. 친구하자는 겁니다. 친구의 깊은 우정을 쌓아가자는 겁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어떤 친구냐? 앞선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무슨 말씀입니까? 나는 너희들의 친구인데,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을 위해 내 목숨을 버리는 그런 친구라는 겁니다. 그것을 실제로 보여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 아닙니까?

  나는 원래 친구가 아닙니다. 종입니다. 피조물입니다. 수많은 한계와 약점을 지난 자입니다. 죄인입니다. 그런데 창조주시며 전지전능하시며 거룩하시고 죄 없으신 성자 하나님께서 나를 친구라고 부르시면서, 나를 사랑하는 친구라고 하시면서 친구인 나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인 나를 죄악의 수렁에서 구원하고 그 죄로 인한 사망의 수렁에서 구원하시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영생을 주시고 그래서 친구인 나와 영원히 살기를 원하신다는 겁니다.

  죄인이며 피조물인 나를 친구 삼으시고 친구라고 부르시는 예수님을 나의 친구로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구원의 길입니다. 누군가가 친구가 되자고 손을 내밀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을 믿고 내 손을 내미는 겁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다른 것 아닙니다. 나를 친구로 부르시면서 나에게 손을 내미시는 주님을 믿고 나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그 손을 잡는 겁니다. 그것이 곧 구원의 길이고, 친구이신 예수님과 깊은 우정을 쌓아갈 수 있는 길입니다.

  예수님과 친구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친구이신 예수님은 나를 잘 아시고 이해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능히 도우실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히브리서 4:15-16에서 무어라 말씀합니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15절)

  보십시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 즉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어떠신다? 체휼하지 아니하는 이가 아니요. 체휼이라는 말은 몸 體, 동정하다라는 뜻의 恤을 씁니다. 무슨 뜻입니까?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시는데 그저 마음으로만 동정하는 분이 아니라 몸 體, 몸소 경험하심으로써 우리를 알기에 동정하는 분이라는 겁니다. 모든 일에 있어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동정하는 분이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죄는 없으시다는 겁니다. 만일 죄까지도 우리와 똑같다고 하면 거기서 끝입니다. 위로까지만 됩니다. 동정하는 것까지만 할 수 있습니다. 죄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입니다. 그러나 죄는 없다고 했을 때는 달라집니다.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셨고 우리와 똑같이 몸소 경험하셨지만 죄는 없으시기에 무엇을 하실 수 있다? 우리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다는 겁니다. 우리를 능히 도우실 수 있다는 겁니다. 무엇을 강조하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초월성입니다.

  이어지는 16절에서 이 사실을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 이 그러므로가 중요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다? 나와 똑같은 사람의 몸이 되셔서 똑같이 몸소 체험하셨고 똑같이 시험을 받으셔서 나를 능히 아시고 나를 동정하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의 본체시기에 죄는 없으시기에 나를 능히 구원하고 나를 능히 도우실 수 있으므로, 그러므로 어떻게 하라?

  그 예수님 의지하여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라는 겁니다. 그런 마음과 자세로 기도하라는 겁니다. 마치 주기도문의 첫 구절인 ‘우리 아바’에 담겨져 있는 친밀감처럼 그렇게 나의 친구 되신 예수님 의지하여 하나님 아바에게 나아가라는 겁니다.

  히브리서 4:15-16 역시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강조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의무가 아니라 관계다, 종교적인 의무가 아니라 아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나와 뚝 떨어져 있고 나와는 너무나 다른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아닙니다. 신의 노여움을 달래기 위해 두려워하고 아첨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알까, 나를 이해하실 수 있을까, 나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 나를 구원하실 수 있을까 그런 마음 가지고 기도하는 것 아닙니다.  

  기도는 관계입니다. 기도는 아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입니다.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살아보셨고 그래서 능히 우리를 이해하실 수 있고 능히 우리를 도우실 수 있고 구원하실 수 있는 아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바로 기도입니다. 그 기도를 지금 예수님께서 가르쳐주고 계시는 겁니다.

  주기도문의 첫 구절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바'라는 말에 담겨있는 이러한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사실이 우리의 기도와 삶에 있어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두 가지로 귀결된다고 봅니다. 경외와 신뢰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리가 알 때 우리는 그분께 가슴 깊은 경외심을 갖게 됩니다. 경외가 무엇입니까? 사전적인 의미로는 공경하고 두려워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존경한다는 것이 바로 경외입니다. 창조주 하나님,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악을 심판하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깨달을 때 우리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경외입니다. 두려운 마음으로 그분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그 하나님이 바로 '우리 아빠'이십니다. '나의 아빠'이십니다. 이 사실이 나에게 어떠한 마음을 줄까요?

  예를 들어 왕이 있습니다. 절대 권력자입니다. 모든 백성들은 왕을 두려워하며 절대 권력자에게 두려운 마음으로 공경을 합니다. 그러나 왕을 무서워하지 않는 이가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왕의 자녀입니다. 왕의 자녀 역시 왕의 위대함 앞에서 엎드려 경배를 합니다. 그러나 그 경배의 마음은 두려움이 아니라 가슴 깊은 존경이고 왕의 자녀는 왕의 위대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분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왕인 자신의 아버지를 신뢰합니다.

  이와 비슷합니다. 하나님은 경외의 대상입니다. 그분은 너무나 크고 높으시고 거룩하시고 놀라운 분이셔서 두렵고 존경하지만 기가 막히게도 그분이 바로 우리 아빠, 나의 아빠라는 사실입니다. 그 엄청난 분이 나에게 찾아오셔서 나의 아빠가 되셨습니다. 그 엄청난 분의 독생자께서 내게 오셔서 나를 친구라 부르시고 함께 아빠라고 부르자고 하시고 나를 도와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그저 두려움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가슴 깊은 신뢰가 생깁니다. 여전히 하나님은 두렵지만 무서워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피조물이고 죄인이고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아빠 되신 하나님의 마음을 알기에 더 이상 무섭지 않습니다. 나의 아빠이신 하나님의 용서의 사랑이 나를 향해 있음을 알기에 비록 죄를 지었어도 무서워 숨지 않고 십자가 앞에 나아가 내 죄를 고백합니다. 그렇게 엄청나신 분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나의 아빠이신 하나님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가슴 깊이 신뢰하며 친밀한 교제를 나눕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래서 그분을 가슴 깊이 신뢰하며 나의 아빠이신 분의 뜻에 순종하며 왕의 자녀답게 살아갑니다. 그것이 바로 삶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바', 이 말에는 우리의 아빠이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경외와 신뢰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 19:2)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6-7)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1-33)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하나님, 그리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이신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하늘에 계신 그 초월적인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아빠이심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빠이신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과 경배를 드립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이신 하나님의 사랑에 부응하는 신뢰를 가지고 그분을 믿으며 살아갑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이신 하나님과 날마다 사랑으로 넘쳐나는 친밀한 관계가 있는 기도가 여러분들의 기도 가운데 드려지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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