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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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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5: 나라가 임하시오며
2010년 5월 29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마태복음 6:9-15
여러 행사와 절기 등으로 인해 한 달간 쉬었던 산상수훈 시리즈, 주기도문 강해를 오늘부터 다시 시작합니다. 오늘은 주기도문 그 다섯 번째 시간인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부분입니다. 오늘과 다음 주 두 번에 나누어서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미 앞서 주기도문 처음에 나오는 세 가지 청원은 모두 하나님의 것을 구하는 것으로 우리말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원어를 보면 앞에 ‘당신의’라는 말이 붙어 있기에 이 세 가지 청원을 당신 청원이라고도 부른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확하게 읽으면 ‘당신의 나라가 임하시오며’이고, 동사가 간접명령형이기에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고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당신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최종적으로는 ‘하나님,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는 청원인데, 하나님의 나라, 히브리어로는 ‘말쿳 엘로힘(מלכות אלוהים)’, 영어로는 ‘Kingdom of God’인데, 하나님 나라라고 했을 때, 이 말을 들을 때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무엇이 연상되십니까? 혹시 하늘나라, 천국이 아닙니까?
실제로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되어 있지만 마태복음의 경우에는 '천국'이라고 되어 있기에 그렇게 말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국, 하늘나라와는 개념이 다릅니다.
먼저 마태복음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과 다르게 천국, 말쿳 하샤마임(מלכות השמים)이라고 한 이유는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쓴 것으로 유대적인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경우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을 계시하신 이름은 יהוה(YHWH, YHVH)입니다. 오랜 동안 이를 Yehowah로 읽었고 우리 성경에도 여호와를 표기되어 있는데, 학자들이 연구하다 보니 야훼라고 읽는 것이 맞다하여 공동번역에는 야훼로 표기되어 있고,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히브리어 자음인 ה가 음가가 약한 약자음이라서 실제로는 야웨라고 읽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 이름을 Tetra Grammaton, 신성 사문자, 4글자로 된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해서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인 이 4글자가 나올 때 대신 읽은 것이 바로 '아도나이'(אדוני)입니다. 주님이란 뜻이지요.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항상 아도나이로 읽습니다.
이것이 유대인들이 지금까지 하고 있는 전통이고 교회 역시 이 전통에 따라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할 때 YHWH를 Lord, 주님으로 번역을 했습니다. 꼭 밝혀야 할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그리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개역성경이나 공동번역 성경은 그대로 표기하고 있습니다. 표준새번역 성경만 이런 전통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주님으로 번역을 해놓았습니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교회가 너무 하나님의 이름을 쉽게 부르는 것은 아닌가 싶어서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이름을 아도나이, 주님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너무 쉽게 부르고, 어떤 경우에는 너무 함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것이 우선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바르게 해놓고, 읽을 때는 우리도 유대인들처럼 하나님의 이름이 나올 때는 '주님'이라고 읽는 것이 어떨까 생각을 합니다.
이와 더불어서 예수님의 이름도 정확하게 불러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의 정확한 히브리어 이름이 무엇입니까? '예슈아'(ישוע)입니다. 영어로는 Jesus라고 하는데 헬라어와 라틴어와 영어를 거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었지만 그냥 듣기에는 다른 이름처럼 들립니다.
우리는 '예수'라고 하는데, 왠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저주하고 거부하는 뜻으로 부르는 '예슈'와 비슷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제대로 불러야 하는데, 예수님의 이름도 '예슈아'라고 불러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합니다. 최소한 '예수님'이라고는 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천국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경외심을 보였는데, 그것이 나중에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나님, 즉 엘로힘(אלוהים)이라는 호칭까지도 삼가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 호칭 안에 하나님의 이름인 יהוה(YHWH)의 4글자 가운데 세 글자가 같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제로 지금도 정통파 유대인들의 경우 엘로힘이라고 하지 않고 엘로킴(אלוקים)이라고 합니다.
어쨌든 그래서 하나님을 부를 때 엘로힘보다는 하쉠(השם, 그 이름)이나 '카도쉬 바룩 후'(קדוש ברוך הוא, 거룩하며 복되신 분)라고 불렀고 지금도 유대교인들은 그렇게 부릅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의 나라'라고 할 때는 '말쿳 엘로힘'(מלכות אלוהים)이라고 불러야 하는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의 표현으로 하나님을 뜻하는 엘로힘 대신에 하늘을 뜻하는 '샤마임'(שמים)을 써서 '말쿳 하샤마임'(מלכות השמים)으로 표현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되시는지요?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과 달리 마태복음은 독자가 유대인들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유대적인 전통과 배경에 따라 마태복음은 다른 두 복음서와 달리 하나님의 나라, '말쿳 엘로힘'(מלכות אלוהים)이라고 하지 않고, 하늘나라, '말쿳 하샤마임'(מלכות השמים)으로 표기한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 성경에는 천국이라고 번역한 것이지요.
그런데 이 천국이 우리나라 사람들이 보통 생각하는 천국과 개념 자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갖고 있는 천국에 대한 개념은 불교의 극락이나 도교나 무속에서의 저승의 개념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저 죽어서 가는 좋은 곳, 낙원, paradise 같은 곳으로 생각을 합니다.
이러한 천국에 대한 개념은 기독교인들에게서도 비슷하게 나타나는데, 천국하면 뭘 생각하십니까? 예수 믿고 죽어서 가는 곳, 낙원, 금은보화로 가득하고 고급 맨션이 나를 위해 준비된 곳 정도 아닙니까? 불교의 극락이나 저승과 별 차이가 없어요. 있다면 예수 믿어 가는 곳입니다.
마태복음에서 말하는 천국, 그리고 정확한 의미로는 하나님 나라가 이런 개념일까요?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혹은 천국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천국의 개념과는 다릅니다. 그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으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주기도문에 나오는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는 기도 역시 그저 '천국가게 해 주소서' 혹은 '이 땅이 천국 되게 해 주소서' 정도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성경적인 이해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주제를 가지고만 신학교에서 한 학기를 할 수 있는 내용인데, 간단하게 요약을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먼저 일반적인 상식을 점검해봅시다. 국가를 형성하는 3가지 요소가 무엇입니까? 영토, 국민, 주권입니다. 이 세 가지가 있어야 국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이 국가입니까 아닙니까? 아닙니다. 팔레스타인이 국가가 아닌 이유는 땅도 있고 사람도 있지만 주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땅을 점령지라고 부릅니다. 주권이 없는 땅이고, 지금은 어느 정도의 자치권이 주어져있지만 온전한 주권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은 국가가 아닙니다.
그래서 영토와 국민, 주권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주권입니다. 이러한 상식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역시 영토, 국민, 주권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영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의 국가처럼 지상적인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공간이면서 동시에 시간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국민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토는 사람을 뜻하기도 합니다. 조금 어려운 개념인데 하나님의 나라는 일반적인 국가 개념과는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주권입니다. 누구의 주권?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통치를 받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스라엘의 역사를 또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구약성경에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용어는 나오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왕이시고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심판하신다는 개념이 구약성경 전체에 나옵니다. 그 핵심이 바로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입니다.
이스라엘과 맺은 언약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그들의 왕이시며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의 왕이시지만 그 가운데서 특별히 이스라엘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를 세우길 원하셨고, 이스라엘이 그런 나라가 될 때 이스라엘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제사장 나라로 삼으시겠다는 것이 바로 언약의 핵심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중심은 하나님께서 왕이 되셔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고 구원하신다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 그리고 그 주권과 통치에 대한 인정입니다.
그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제일 먼저 주어졌고, 그의 자손들인 족장들, 이삭, 야곱, 요셉을 통해 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때가 언제인가 바로 다윗 때입니다. 땅도 없던 유목민들이었고 애굽의 노예였던 그들이 강대한 나라를 형성한 때가 바로 다윗 때였고, 다윗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부르는데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하나님의 법도와 규례에 따라 나라를 통치한 이가 바로 다윗입니다. 영적으로나 국가적으로 가장 강대했고 황금시기가 바로 다윗 왕 때입니다.
그러나 그 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그분의 통치를 거절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와 불순종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이 주어지게 되고 결국에는 이방민족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러한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역사 가운데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이 바로 다윗 왕조이고 포로기 이후를 거치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이 다윗 왕조의 회복과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한 회복을 가져다주는 이가 바로 메시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져다주는 이라는 기대를 갖게 되었습니다. 원래의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인데, 이스라엘의 역사적 경험이 다윗 왕조의 회복 내지는 이스라엘의 회복으로 규정된 것이지요.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 당시의 거의 대부분의 유대인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거의 동일했습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인위적으로 얻겠다고 한 것이 바로 열심당입니다. 자신들의 노력으로 로마에 저항해서 그들의 쫓아냄으로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룸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운동이 바로 열심당입니다. 반면에 영적인 회복을 통해 이스라엘의 회복을 이루겠다는 것이 바로 쿰란공동체와 같은 에세네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는 이스라엘의 회복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을 통해서도 볼 수 있는데, 사도행전 1:6에서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물었던 질문이 무엇입니까?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이니까?"
이들은 여전히 유대적인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시고 하늘로 올리시는 것을 경험한 이들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이심을 분명히 확신했지만, 여전히 유대적인 개념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해를 했습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시기에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실 때가 지금이 아니냐는 질문입니다. 나중에 이들이 바른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을 갖게 되는데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대해서 설명을 하면서 하나님 나라는 우선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천국의 개념과는 다르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인 국가의 3요소와 비슷하면서도 다른데 그 중심은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말하는 것이고, 이제부터는 정말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의 개념에도 그 중심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리고 회복을 통해 시작이 됩니다. 그러나 이 회복은 당시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회복이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인 회복입니다. 바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의 회복입니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결핍입니다. 결핍이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입니다. 이 결핍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생긴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했을 때는 이러한 결핍이 없었습니다. 에덴동산은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를 받은 상태를 말합니다. 그때는 어떠한 결핍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함으로 인해 결핍이 생겼습니다. 범죄는 다른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탄이 여자를 유혹했을 때 뭐라 했습니까?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다'고 했습니다. 사람 역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하나님처럼 되어보겠다고 불순종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 되어 내가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의 본질은 자기주장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거절한 인간에게 찾아온 것이 바로 결핍입니다.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고통이 찾아왔습니다. 죽음이라는 생명의 결핍이 찾아왔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서의 고귀함과 거룩함의 결핍이 생겼고 하나님을 닮은 사랑과 정의로움도 결핍이 생겼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하나님 되어 자기만을 사랑하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런 존재가 되었고 온갖 거짓과 불의와 부정을 행합니다. 거룩함도 고귀함도 사랑도 공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생긴 결핍을 채우겠다고 한 짓이 바로 우상숭배이고, 재물과 권력과 명예와 성공으로, 쾌락으로 그 결핍을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핍이 채워집니까? 채워지지 않습니다. 더 갈증이 생기고 허탈해지고 더 더러움이 빠지고 맙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결핍은 결코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어리석게도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질 않고 더 멸망의 길로 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고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이것을 너무나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있을 때는 결핍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주장을 합니다. 아버지의 간섭 싫다는 겁니다. 내 인생 내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떠납니다. 처음에는 좋은 것 같습니다. 내가 주인되어 내 마음대로 하니 신납니다.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됩니까? 가진 것 다 떨어지고 돼지우리에서 돼지와 먹을 것 가지고 다투는 그런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실존은 결핍입니다. 사람들은 성공으로, 재물로, 권력으로, 쾌락으로 그 결핍을 채울 수 있다고, 채워보겠다고 하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소개한 이어령 교수도 학문으로 그 결핍을 채우려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고 하나님 없이도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의 학문이 그의 결핍을 해결해 주지 못했습니다. 더욱 더 진리의 갈증을 느끼게 했습니다. 그가 고백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바로 탕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탕자하면 허랑방탕한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탕자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떠난 인간의 실존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 무엇으로도 그 결핍을 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령 교수는 이것을 깨달은 겁니다. 그리고는 가슴을 치며 회개를 했습니다. 내가 탕자라고 말합니다. 그리곤 하나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탕자이며 뿌리 채 뽑힌 나무와 같습니다. 뿌리 채 뽑힌 나무는 살아있는 것입니까? 죽은 것입니까? 살아있으나 죽어가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면 열매도 있고 잎도 무성하고 푸르니까 부족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뿌리가 뽑혀 있기에 그 나무에는 결핍이 있습니다. 공급되어야 할 수분과 양분의 결핍이 있습니다. 생명의 결핍입니다.
우리 인간이 바로 그러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잘 생각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내가 열심히 살아야 하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과 성공과 힘이 나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인 만족과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과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본질적인 문제는 결핍이고 이 결핍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 해결이 될 수 있습니다.
탕자의 비유가 그것을 보여주는 것 아닙니까? 아버지를 떠난 아들의 결핍의 극치를 경험했지만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예전의 풍요로움을 다시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숙명은 결핍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돌아온 인간의 숙명은 풍요입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 결핍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서 주어지는 데 여기에서 필수적인 것이 바로 죄 문제의 해결입니다. 요한복음 3:3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남이 무엇입니까? 죄의 문제가 해결된 것을 말합니다. 인간에게 결핍을 가져다 준 죄의 문제가 해결된 사람,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앞서 죄의 본질은 자기주장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고 하나님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 따르지 않는 불순종입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인 자기주장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럽니다. ‘왜 자꾸 죄를 회개하라고 하냐고, 내가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냐고, 약간의 죄는 있지만 다들 있는 것 아니냐고, 그래도 나는 사람도 죽이지 않았고 남의 것 훔치지도 않았고 나름대로 바르게 살았다’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그것이 죄의 본질이 아닙니다. 죄는 자기주장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있는 나 자신이 죄 덩어리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불순종하고 하나님 없이 내가 하나님 되어서, 혹은 돈이나 권력, 성공 등이 하나님처럼 되어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죄 덩어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회개는 다른 것 아닙니다. 자기주장에 대한 회개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은 자기주장에 대한 회개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불순종하고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교만에 대한 회개입니다.
이 회개가 있어야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동시에 외친 것이 무엇입니까? 죄의 회개입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자기주장이라는 죄의 회개를 통해서입니다. 그리고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나라는 메시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명확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왜 예수님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실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까? 그분이 우리의 본질적인 문제인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나 자신의 힘으로는 죄의 문제를 해결 못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을 때, 그분을 나의 주님으로 영접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주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주십니다.
예수 믿으십시오. 교회만 다니지 말고 예수님을 믿으십시오. 그분이 나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나를 의롭게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왜 예수님만이 진리요 생명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인간에게는 진리가 결핍되어 있습니다. 생명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실존은 비진리입니다. 거짓과 모순입니다. 죽음이고 영원한 죽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를 알게 되고 생명을 얻게 되고 나아가 영원한 생명을 약속으로 받게 됩니다. 예수 믿으십시오. 예수 없이 회복 없습니다. 이 회복의 다른 말이 바로 구원입니다. 예수 없이 구원 없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는 관계회복을 통해서 나타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시는 동안 많은 치유 사역을 하셨습니다. 병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병을 고치고 귀신 쫓아낸 것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예수님의 치유사역의 핵심은 관계 회복입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신 일이 있으셨지요? 그때 하셨던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의 병이 나았다.'입니까? '너의 죄가 용서 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았던 여인에게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막 5:3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단순히 병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신 것이 아니라 죄 용서를 선언하셨고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이루어주셨습니다.
관계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보면 삭개오에 대한 기사가 나옵니다. 삭개오는 세리였습니다. 이 말은 그가 유대인들로부터 로마의 앞잡이요 헤롯의 개라는 경멸과 미움을 받았다는 것과 수많은 비리와 부정을 저질러 부자가 된 사람임을 뜻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래서 죄 용서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그걸로 끝납니까?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겠고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서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고 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그동안 세리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속여 더 세금을 징수해서 부자가 되었는데 그것들을 다 돌려줄뿐더러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것을 계산해보았는데 재산의 80%를 포기한 거라고 합니다.
무엇을 보여줍니까? 이웃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뿐만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 이것이 바로 구원이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나서 죄용서 받고 나서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혹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경험하고 나서 일어나는 마음과 변화가 무엇입니까? 용서입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용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내가 예수님 믿어 거듭난 존재라는 증거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했고 용서하고자 하는 것이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아무런 편견 없이 섬기고 사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용서와 사랑, 섬김과 나눔은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이것이 사람들과 관계에서 확대하고 사회적으로까지 확장되고 이루어지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이 있고 더불어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고 섬김과 나눔이 있다면 여러분의 가정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 교회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이 있고 더불어 서로를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며 다른 사람들의 섬기는 사랑이 있다면 우리 교회가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말지니 하나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 안에 있습니다. 내 안에 있습니다.
여러분들 마음 가운데 죄 용서를 통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여러분 안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결핍된 인간에서 다시 풍요를 가져다줍니다. 거룩이 결핍된 인간에게 거룩의 힘을 가져다줍니다. 정직과 공의가 결핍된 인간에게 정직과 공의를 따를 수 있는 힘을 가져다줍니다. 순종이 결핍된 인간에게 순종의 힘을 가져다줍니다. 용서와 사랑이 결핍된 인간에게 용서와 사랑의 힘을 가져다줍니다. 늘 불안과 염려에 사로잡혀 평화가 결핍된 인간에게 진정한 샬롬을 누리게 합니다. 능력이 결핍되고 지혜가 결핍된 인간에게 능력과 용기와 지혜가 주어집니다. 생명이 결핍된 인간에게 치유의 은총이 임하고 영생에 대한 소망을 주십니다.
왜 우리가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날마다 경건의 시간을 통해 주님을 만나야 합니까? 왜 우리가 주님께 순종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성령충만을 사모해야 하고 성령충만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풍요와 능력과 생명과 사랑을 계속해서 누리며 살아가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 14:17)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내 안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과 동행하십시오.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성령 안에서 순종하며 살아가십시오. 내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누리고 산다면 우리의 삶은 무력하지 않습니다. 고되지 않습니다. 힘이 있습니다. 재미있습니다. 살 맛 납니다. 힘이 넘칩니다. 꿈이 생깁니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자꾸 자꾸 자랍니다.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들,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누리며 사시길 축복합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6: 나라가 임하시오며 2"
2010년 6월 5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6:9-15
지난주에 이어 주기도문 가운데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부분을 가지고 말씀을 나눕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를 어법과 뜻을 살려 읽으면 ‘아버지,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고 읽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 당신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 Kingdom of God인데, 하나님의 나라는 신구약 성경을 통해 가장 중요한 주제이고,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의 핵심이고, 산상수훈과 주기도문의 중심 역시 하나님의 나라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잘 모르고 있거나 그저 단순히 우리가 죽은 후에 가는 천국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바르게 이해해야 하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지난주에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하나님 나라의 시작과 완성이라는 면에서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정의할 때 사용되는 용어 중에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already, but yet’ 혹은 ‘but not yet’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이미,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란 뜻입니다. 이 말의 의미가 이해되시는지요? ‘하나님은 나라는 이미, 그러나 아직’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왔다는 것입니다.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지난주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이해를 말씀드리면서 하나님의 나라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회복이고 회복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시작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회복을 가져오는 이가 바로 메시아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경우는 메시아가 가져올 회복을 다윗 왕조의 회복 내지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회복으로 생각했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역사 가운데서 다윗 왕조의 회복 또는 이스라엘의 회복이란 개념으로 좁아진 까닭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고 예수님께서 생각하셨던 회복은 보다 본질적인 문제에 대한 회복이라고 했습니다. 그 본질적인 문제는 바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 본질적인 문제인 결핍의 문제입니다. 이 결핍은 하나님을 떠난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는 결핍입니다. 생명의 결핍, 거룩의 결핍, 사랑의 결핍, 평화의 결핍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이고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결핍이 왜 생겼는가? 바로 자기주장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를 주장함으로써 생긴 결핍입니다. 그래서 죄의 본질은 자기주장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이 되어서 살겠다는 것이고, 하나님 아닌 다른 것으로 하나님 삼아 살아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통치에 불순종하는 이 자기주장이 바로 죄의 본질입니다. 그리고 이 자기주장이 인간에게 결핍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탕자의 비유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결국 이 결핍의 문제의 해결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불가능합니다. 즉 인간에게 결핍을 가져다 준 죄의 문제의 해결 없이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이 회복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가 전적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인데 그 출발점은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입니다. 죄의 문제의 해결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은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인간에게 회복불능의 결핍과 그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회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회복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우리가 왜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까? 그분만이 회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상영된 영화중에 ‘회복’이란 영화가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성지 이스라엘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깊은 김종철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입니다. ‘회복’이란 영화는 사마리아 지역에 있는 정착촌 도시인 아리엘에 사는 한 메시아닉 유대인 청년이(아미) 정통파 유대인에 의해 폭탄 테러를 당한 사건으로 시작하는데, 현재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메시아닉 유대인들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으며, 또 메시아닉 유대인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 중에 보면 정통파 유대교인들이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라고 하면서 거절하는 인터뷰 장면이 있습니다. 어느 유대교인이 저주를 퍼부으면서 그럽니다. “우리가 버린 찌꺼기를 너희는 하나님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버린 찌꺼기’, 아주 정확한 표현입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하는데 11-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예수님은 어떤 분? 너희들이 버린 돌이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를 하나님께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셔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고 그래서 수많은 영혼들이 구원받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지도자들, 이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 없이 이스라엘의 회복도 없고 하나님 나라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당시 유대인들, 유대인으로 태어나서 율법을 지키고 있음으로 당연히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했던 그들에게 ‘아니다. 유대인이고 율법을 지킨다는 이유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죄의 문제 해결 없이는 구원 없다. 이 구원은 오직 예슈아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러니 주 예슈아를 믿으라.’고 담대하게 선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회복’이란 영화를 보면서 더욱 더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유대인들은 하나님 신앙을 유대교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 포로 이후의 그들의 역사가 하나의 이유가 되었고 교회의 핍박이 이유가 되긴 했지만 그들은 온 세계를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유대민족의 종교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회복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예슈아가 정말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증거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회복입니다. 만일 예슈아가 메시아가 아니라면 예슈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예슈아를 통해 죄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까?
그리고 더 나아가 예슈아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무엇인지를 깊이 알게 되고 예슈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됩니다. 예슈아를 통해 우리에게 있던 본질적인 문제, 죄로 인해 찾아온 결핍의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죄용서 받았고 구원받았고, 영생에 대한 약속을 받았고, 참된 자유와 평화와 기쁨이 주어졌습니다.
회복이란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유대인들 역시 예슈아를 통해 참된 구원의 기쁨과 자유와 평화를 맛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동족 유대인들에게 그렇게 미움을 받고 핍박을 받으면서도 예슈아를 전하는 것입니다.
만일 예슈아를 믿어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가짜 메시아입니다. 문선명이나 이재록 같은 이단 사이비 교주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이끄는 척 하면서 자신의 사악한 욕심을 드러내고 자기가 메시아 되고 하나님 되어서 사람들을 파멸로 이끕니다.
그러나 참된 메시아이신 예슈아를 통해 모든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인 죄로 인한 결핍의 문제를 해결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오직 예슈아만이 유대인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을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already,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주로 시인하여 영접하였다면 그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already, 이미 시작되었고, now and here,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질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인 차원의 것인가 하는 질문과 우리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질문 같으면서도 하나로 연결된 질문입니다.
제가 교회에서 고등부를 마치고 청년부로 올라갔을 때 청년부 선배 두 명에게서 따로 성경공부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저 역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배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이었냐 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뒤집어엎어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해방신학 내지는 민중신학적인 내용이었습니다. 내용이 어렵기도 했고 저의 신앙색깔과는 다른 것 같아 몇 주 하다가 그만 두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런 운동과 흐름들이 청년들 사이에 많았습니다.
그때는 박통과 전통, 노통으로 이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유신독재가 있었고 이후에 신군부의 반란에 의해 군사독재정권이 이어지던 때였습니다. 안기부 요원이 교회 예배에 참석해서 설교를 감시하고 교회에서 나오는 프린트물도 검열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는 청년 대학생들의 고민이 취업이 아니었습니다.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이었습니다.
대학가는 거의 매일 데모가 일어났었고, 교회를 다니던 청년들 역시 이 문제로 인해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시 많은 교회의 청년대학부들이 몸살을 앓았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라는 이슈로 양분되었습니다. 한쪽에서는 교회가 독재와 불의에 대항해서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개인의 구원이 먼저라는 논리로 사회적인 문제에 외면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생긴 농담 중에 대학 내에 있는 긴 의자인 벤치에 앉을 때 오른쪽에 앉으면 우익, 왼쪽에 앉으면 좌익이라고 했고, 가운데 앉으면 회색분자라고 했습니다.
그런 시대였는데, 그때 이후 한동안 제가 가졌던 생각이 무엇이었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야 한다.’것이었습니다. 맞는 말입니까 아닙니까? 지금도 교회나 선교단체에서 그런 말 많이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자.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자.’ 맞는 말입니까 아닙니까? 우리의 노력과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룰 수 있고 확장시킬 수 있다는 말인데, 맞는 말입니까? 그것이 가능할까요? 아닙니다. 틀린 말이고 불가능합니다.
그런 운동은 이미 많이 있었습니다. 20세기에 남미를 중심으로 인해 일어난 해방신학을 보십시오. 독재와 불평등을 몰아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고 총을 들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해방되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졌습니까? 아닙니다.
공산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인류 역사의 최대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들이 만들려고 했던 것은 유토피아였습니다. 단, 하나님 없는 유토피아였습니다. 인간이 주인 되는 나라, 인간 중에서도 무산계급인 프롤레타리아가 지배하는 유토피아를 건설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부르주아, 유산계급을 학살하고 교회와 성직자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이 원하던 유토피아를 이루었나요? 100% 실패했고 1세기도 안되어 산산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과학기술도 마찬가지지요. 계몽주의시대와 산업혁명 이후 인간의 지성과 과학기술로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루었나요? 유토피아를 꿈꾸던 인간에게 찾아온 것은 탐욕과 미움에 눈이 멀어 서로를 죽이고 빼앗는 제국주의와 제 1차, 2차 세계대전이었습니다. 하나님 없이 인간의 지성과 과학기술로 유토피아를 만들겠다는 인간에게 찾아온 것이 바로 살인과 착취와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
이런 운동은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바로 열심당운동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회복이 곧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력으로 이방민족의 지배를 몰아내어 민족의 해방을 이루어내고자 했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성공했습니까?
왜 안 되는지 아십니까? 왜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 것이 불가능한지 아십니까? 인간의 본질적인 결핍이 걸림돌이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평화를 이루고 정의와 평등을 이루었다고 칩시다. 얼마가 갈까요? 며칠 못갑니다. 이내 다툼과 분쟁이 생기고 불의와 불평등이 생기고 맙니다. 인간의 본질적인 결핍,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죄성인데, 이 죄성은 평화롭고 정의롭고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고자 하는 선한 노력조차도 단숨에 뭉개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유토피아 조차도 만들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고 현실입니다.
그리고 만일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인간의 나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해서 인간이 이루고 인간이 확장하는 인간의 나라일 뿐입니다. 아무리 사회정의를 이루고 부의 공평한 분배를 이룬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노력과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겠다는 것은 열심당식 사고이고, 사탄의 속임수입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이 무엇입니까? 네가 왕이 되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을 위해 죽지 말고 인간들을 종으로 삼아 너의 왕국을 세우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후에 찾아온 유혹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꿈꾸는 나라, 메시아를 통해 로마를 쫓아내고 더불어 메시아의 힘으로 다른 이방민족들을 지배하여 유대인의 나라를 강력한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것입니다. 둘 다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자는 유혹입니다.
이를 예수님께서는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러한 인간적인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 출발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입니다. 그 관계회복을 위해 필수적인 해결이 죄의 문제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될 수 있고, 인간은 비로소 결핍이라는 본질적인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 합당한 경배를 드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를 받아들이고 순종하게 됩니다.
이 본질적인 문제의 해결 없이 아무리 인간적인 노력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루어집니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 받아 구원받는데 있어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한 것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나의 죄를 지시고 대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나의 죄가 용서받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는 죄인이며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것뿐입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지 우리의 어떠한 노력과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자는 말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데 사용해달라는 것입니다. 나를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은혜의 통로로 사용해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은혜의 도구로 사용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했지만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할 수 있는 것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은 더욱 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점점 더 확장될 수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이라는 대립된 개념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부조리하고 부정과 불의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정의롭지 못하고 정직하지 못하고 평등하지 못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않은 수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 믿는 사람들과 교회는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관심 갖고 문제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가 보다 더 정의롭고 깨끗하고 정직하고 평등하고 살 맛 나는 세상으로 만드는데 앞장 서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안됩니다.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앞서야 합니다. 즉 한 사람 한 사람이 죄용서 받고 구원받아 그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 합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죄를 끌어안고 속까지 철저하게 썩어버린 죄인인데 어떻게 정의롭고 평등하고 정직한 세상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 본질적인 문제가 앞서야 합니다.
이것 없이 빵만 들고 세상에 나가면 안됩니다. 반대로 개인구원에만 관심을 갖고 사회적인 문제에는 등을 돌려서도 안됩니다. 한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손에는 빵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교회가 잘못된 세상에 대해 바른 목소리를 내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돌보고 사회의 정의와 평등을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무의미합니다. 죄인과 죄인들이 함께 살면서 그 죄성들로 인해 생긴 거짓과 고통들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를 구하고 또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이 땅에 임했습니다. 예수님 앞에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주어지는 것이고, 그 어떠한 인간의 힘과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야 하지만, 우리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로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 완성될까요? already, but not yet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온전히 이루어지는 때는 언제일까요? 바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실 바로 그때입니다. 그 때 하나님의 나라는 완성될 것입니다. 그 나라가 어떤 모습일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요한계시록 21장입니다.
“1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5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6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7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보십시오. 요한계시록 21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떠한지? 그 어떤 결핍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생명수 샘물을 값없이 주십니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를 바로 옆에서 누리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결핍이 없습니다. 오직 풍성함과 기쁨과 생명과 사랑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기에 찬양과 경배가 끊이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100% 순종하는 그 나라, 그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에 완성될 나라입니다. 마라나타,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그리고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맛보며 사는 것이 바로 신앙생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잘 믿고 주님과 동행하면 요한계시록 21장의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합니다. 왤까요? 잔치 중에 최고로 기쁜 잔치가 바로 혼인잔치입니다. 신랑과 신부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잔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큰 기쁨을 누립니다. 그리고 혼인잔치에는 큰 기쁨과 더불어 풍성함이 있고 서로 나누고 권하는 사랑으로 가득합니다. 그것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맛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좋아하는 시인데, 5절에서 뭐라고 노래합니까?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개역 성경에는 ‘내게 상을 베푸시고’로 되어 있어서 무슨 상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있는데, 무슨 상입니까? 잔칫상입니다. 그리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십니다. 기름은 풍부함, 기쁨, 존귀히 여김을 뜻합니다. 어떤 잔치입니까? 풍성한 잔치, 기쁨으로 가득 찬 잔치입니다. 내 잔이 넘칠 만큼 풍성하고 기쁜 잔치입니다.
그런데 누구 앞에서 잔치를 벌여주십니까? 원수의 목전에서! 원수가 나를 빤히 노려보고 있는 그 앞에서 주님께서 잔치를 벌여주신다는 겁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을 썼을 때의 상황은 이런 잔칫상을 벌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원수에게 쫓겨 다닐 때였습니다. 정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였습니다. 그런데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니 그 상황이 어떻게 되었다? 잔칫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잔치입니다. 큰 기쁨과 풍성함과 사랑으로 가득한 혼인잔치입니다. 장차 그런 혼인잔치에 우리 참여할 것이지만, 이 땅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혼인잔치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내 안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혼인잔치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혼인잔치의 그 풍성함과 기쁨과 사랑을 예수님을 통해 맛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시편 23편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는 것이 분명하고, 원수가 나를 넘어뜨리려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데 나는 기쁨의 잔칫상을 즐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주님께서 나에게 그런 하나님 나라의 혼인잔치의 기쁨을 맛보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now and here, 지금 여기에서 맛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축복입니다. 이걸 잘 보여주는 찬송이 바로 ‘내 영혼이 은총 입어’라는 찬송입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통해 내 안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계속해서 누리며 사는 것이고 장차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의 혼인잔치를 맛보며 사는 것입니다. 그 풍성함과 기쁨과 사랑과 평화를 맛보며 누리며 사는 것이고 더불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고 함께 나누며 사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면서 살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사십시오.
예수님께서 6:33절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시면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우리가 먹고 사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먹고 사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너희의 먹고 사는 문제, 대학가고 취업하고 결혼하고 성공하고 돈 버는 이런 문제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나의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었다 한들 내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하고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다.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장에 취업을 하고 성공하고 부자가 된들 나의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하나님의 나라가 나와 상관없다면 도대체 그런 것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먹고 사는 것보다, 대학가고 취업하고 성공하고 부자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의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그분께 합당한 경배와 사랑을 드리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나의 성공, 업적, 부와 명예, 영원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 눈에는 그것 그렇게 중요한 것 아닙니다. 하나님 눈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나입니다.
내 영혼이 죄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에 순종하는 사람, 그래서 그 마음과 삶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할 수 있는 사람, 궁극적으로는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들이 다인 것인 양 그렇게 살지 말라는 겁니다. 그런 것에 마음 빼앗겨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며 사는 그런 삶을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가치관과 사고와 시각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삶의 방향과 스타일의 변화를 요구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사람이 봐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무엇에 가치를 두고 무엇을 소중히 여기며 살아야 합니까?
여전히 돈입니까? 여전히 성공입니까? 여전히 유명해지고 높아지고 부자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축복을 빙자해서 결국 내가 원하는 것 이루려고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그토록 원하셨던 하나님의 나라가 나에게 과연 무엇을 요구합니까? 어떠한 변화를 요구합니까?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구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것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신 주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을 사십시오.
두 번째는 자기부인입니다.
죄의 본질은 자기주장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되어 살겠다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 아닌 다른 것을 하나님 삼아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나 말씀보다는 나의 본성, 나의 생각, 나의 판단, 나의 경험, 나의 감정에 따라 살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예수님의 뒤를 따라 제자의 길,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을 가기 보다는 내가 편한 길, 부담되지 않는 길, 손해 보지 않는 길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주장이 죄의 본질이고, 이러한 자기주장은 예수님을 믿은 후에도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꿈틀거리고 일어납니다.
아십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나라로 초청하셨는데, 이 초청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명예나 높아짐으로의 부름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부인으로의 초청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예수 믿어 부자 되고, 예수 믿어 출세하고, 예수 믿어 높아지는 그런 부름이 아니라, 예수 믿기에 나누어주며 스스로 청빈의 길을 택하고, 예수 믿기에 세상의 성공과 명예도 버릴 수 있고, 예수 믿기에 누릴 수 있지만 자기를 겸손히 낮추어 다른 사람들을 섬기며 사랑하는 종의 길을 가는 그런 부름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낮아져 종으로 섬겨야 합니다. 때로는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나라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 받고 핍박 받을 수 있습니다. 오른뺨을 맞고 왼뺨을 돌려대야 합니다. 자기 십자가 지고 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로의 초청입니다.
오늘 제가 참 부담스럽고 여러분들에게 별로 달갑지 않은 말씀을 드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초청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자기부인 없이 결코 누릴 수 없습니다. 맛볼 수 없습니다. 여전히 내 욕심이 살아있고 내 고집이 살아있고 나의 의로움이 살아있는데 어찌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있겠습니까?
자기부인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내 안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힘들 것입니다. 왜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내 안에 들어왔는데, 나는 여전히 나를 주장하고 있거든요. 여전히 나를 주장하면서 내 욕심에 따라, 내 고집대로, 내가 의롭다고 착각하면서 지지 않으려고 하거든요. 입으로는 하나님을 인정하는데 실제로는 인정하지 않거든요. 순종하지 않거든요.
내 안에 들어온 하나님의 나라는 자꾸만 나에게 자기부인을 요구하는데 나는 계속 나를 주장하고 있거든요. 이 둘이 부딪혀요. 그러니 힘들죠. 그럼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아요. 나의 가정과 나의 인간관계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자기부인 없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날마다 십자가 바라보고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사십시오. 자꾸만 나를 주장하고 높아지려 하고 지지 않으려고 하고 욕심대로 살려고 하고 움켜쥐려고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불순종하려고 하는 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은혜와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나를 부인하기까지는 힘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순종하기까지는 정말 괴롭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가십시오. 거기서 멈추지 말고 자기부인의 길로 가십시오. 그때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나의 인간관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뿐만 아니라 나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희생을 요청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부인입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는 자가 되십시오.
예수님께서 전하셨던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명령 역시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죄와 사망에 노예가 되어서 본질적인 결핍과 욕구불만과 아픔과 슬픔과 고통 가운데 있고 사랑대신 아귀다툼 가운데 있는 자들, 즉 사탄의 나라에 있는 자들에게 참된 복음을 전해서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라는 것입니다.
이 사명은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들을 찾는 일”(마 10:6)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모든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은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예슈아를 메시아로 고백하고 믿어 영적인 회복을 이루는 것,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진정한 이스라엘의 회복입니다.
이 일에 우리 교회를 부르셨습니다. 이 사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더욱 더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합시다. 유대인들을 대하는 것이 힘드십니까? 더욱 더 그들을 품고 기도합시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들을 대합시다. 그리고 예슈아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합시다. 이 땅 주님의 땅이 진정한 주님의 땅으로 회복되길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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