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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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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10: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2010년 7월 10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6:9-15
교인 두 사람이 대화하고 있었다.
“지난 주일에 교회 아래에서 돈이 잔뜩 들어있는 지갑을 주었어.”
“그래, 주인은 찾았어?”
“아니, 아직 주인을 찾아보지 않았어. 최근에 내가 금전적인 어려움을 놓고 기도 중이잖아. 도대체 이 지갑이 사탄의 유혹인지 기도의 응답인지를 모르겠어.”
혹시 이와 비슷한 경우는 없었는지?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오늘 함께 나눌 말씀이다. 이는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청원인데 우리에게 참 와 닿고 실제적으로 필요한 기도다. 왤까? 참 많은 사람들이, 그리고 많은 경우 우리는 시험에 들기 때문이다. 신앙생활 하면서도 ‘시험에 들었다’라는 말을 심심찮게 듣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험이 도대체 무엇인가? 말 그대로 시험, Test일까? 그러니까 “우리를 Test하지 말라”는 청원일까? 누가 우리를 Test하는가? 하나님이? 그럼 이 청원은 “하나님 우리를 Test하지 말아주세요”라는 청원일까?
그렇지 않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이 여섯 번째 청원은 주의 깊게 해석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여기서 나오는 시험의 의미가 무엇인지부터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시험’이란 말에 대해 혼동을 하는 이유는 우리 성경이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도 시험이고 저것도 시험으로 번역을 해서 더욱 그러하다. 성경 원어라고 할 수 있는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같은 단어지만 상황에 따라 그 뜻이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기에 먼저 원어에 담긴 뜻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신약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었는데, 본문에 시험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는 페이라스몬(πειρασμον)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의 맛사 מסה라는 단어에 해당하는데, 맛사 מסה라는 명사는 니사 נסה라는 동사에서 왔는데 니사 נסה라는 동사는 test, try, prove가 주된 뜻이나 tempt의 뜻도 있다. 헬라어 페이라스몬 역시 test, trial, temptation의 중의적인 뜻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어떤 목적이냐에 따라, 그리고 주어가 누구냐에 따라 다른 뜻을 갖고 있다. 우선 목적이 긍정적일 때다. 그럴 때 이 단어들은 test, try, prove의 뜻으로 쓰인다. 그 자체가 긍정적이지 않은가? 왜 test하나? 그 사람에게서 무언가를 확인하기 위해,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긍정적인 목적일 때는 이 단어들은 test, try, prove의 뜻으로 쓰인다.
반면에 부정적인 목적일 때는 이 단어들은 tempt, temptation의 뜻으로 해석한다. 왜 시험하는가? 그를 실패로 이끌고 잘못된 길로 이끌고 파멸로 이끌기 위해서다. 그래서 이 경우는 유혹의 뜻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주어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하나님이 주어로 사용될 때 이 מסה나 페이라스몬 같은 단어들은 어떤 의미로 사용될까? 당연히 test, trial의 뜻이다. 왜 temptation은 아닐까? 야고보서 1:13을 보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우리 성경에는 시험으로 되어 있어서 이것도 test인지 안다. 그러나 여기서 시험은 test가 아니라 temptation이다. 공동번역으로 읽으면 이렇다.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 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리고 우리를 사랑하신다. 이 말은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유혹하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부정적인 목적, 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대하지 않으신다. 어떠한 경우에도 인격적으로 대하신다. 유혹은 비인격적인 행위다. 그 자체가 부정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다. 악한 목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속이는 것이고 넘어뜨리는 것이고 끌어들이는 것이다. 이것이 유혹이다.
하나님이 이런 유혹을 하실 리가 없다. 애초부터 하나님은 이런 유혹을 하실 수 없다. 전능하신 그분이 하실 수 없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거짓말,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 그리고 사람을 악한 목적으로 유혹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이 결단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 단어들이 유혹이란 뜻으로 사용될 때는 누가 주어일 때일까? 둘이다. 먼저 사람이다. 다시 야고보서를 보자.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
이를 공동번역으로 보면 이렇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가? 왜 유혹을 당하는가? 왜 유혹에 빠져 어려움을 당하는가? 자기 욕심 때문이다. 내 안에 욕심이 없다면 유혹도 받지 않는다. 더불어 욕심이 없다면 다른 사람들을 유혹하지도 않는다. 유혹하고 유혹 당하는 이유는 자기 욕심 때문이다.
사람이 주어가 될 때 이 단어들은 유혹의 의미로 사용된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주어는 사탄이다. 사탄이 주어가 될 때 역시 이 단어는 유혹의 의미로 사용된다. 당연하다. 사탄은 그 근본이 속이는 자이고 방해하는 자이다. 유혹하는 자이다.
예수님께서 광야 40일 금식을 하신 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는데, 여기서 사용된 단어도 מסה, 페이라스몬이다. 여기서는 예수님을 넘어뜨리려고 했던 악한 의도를 가진 유혹이다.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사탄은 언제나 악한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한다. 이 유혹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말씀을 전할 것이다.
다시 정리를 하면 우리 성경에 나오는 ‘시험’이란 단어는 세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Test, trial, temptation이다. 이 셋 중에 하나님과 관련 있는 단어는 test와 trail이다. 오늘은 이 부분을 볼 것인데 먼저 test를 보자.
자주는 아니지만 드물게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test하실 때가 있다. 왜? 무슨 목적을 가지고? 대부분은 그의 믿음을 보기 위해서다. 그 믿음을 test하실 때가 있다. 그래서 그 믿음의 test를 통과하면 새로운 축복이 주어진다.
그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했던 시험이다. 이것은 test다. 이런 test는 아무에게나 하는 것 아니다. 왜 이런 시험을 하셨을까? 이건 엄청나게 어려운 시험이다. 아들을 바치라니. 그것도 백세에 낳은 아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사랑하고 애지중지하던 아들을 말이다. 생각하면 너무 심한 것도 같다. 왜 이런 시험을 하셨을까?
하나님의 계획은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로, 복의 통로로 만드시는 것이었다. 그를 택하실 때 '너는 복이 될찌라'고 하셨다. 개역한글에는 복의 근원이라고 되어 있으나 원뜻은 복이다. 의역을 하면 복의 통로다. 왠가? 그의 후손을 통해 언약의 민족을 만드셨고, 그의 후손에서 메시아가 나와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장 1절이 어떻게 시작하는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로 시작한다. 이스라엘과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어야 한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복의 통로다.
또한 아브라함을 열국의 아비라고 부르는데, 단순히 이스라엘 민족과 아랍민족의 조상이 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역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말 그대로 열국의 아비가 되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이다.
이런 엄청난 복의 통로가 되고 열국의 아비가 되려면 그에 합당한 믿음과 순종이 있어야 한다. 시편 81:10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네 입을 넓게 열라는 말은 믿음의 그릇, 순종의 그릇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고 해도 그릇이 안 되면 주실 수 없다. 믿음의 그릇이 클 때 그에 합당한 복과 은혜로 채워주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요구하신 것이다. 믿음의 조상, 구원의 조상, 열국의 아비가 될 만한 믿음의 그릇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각하신 믿음의 그릇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순종이었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순종했고 하나님은 그 믿음을 보시고 그에게 열국의 아비, 믿음의 조상, 구원의 조상이 되는 복을 주신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시험은 말 그대로 시험, test다. 광야에서도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test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지,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test하셨다. test에는 상급이 따른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test를 통과했다. 그래서 열국의 아비, 믿음의 조상, 구원의 조상이 되는 복을 받았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test를 통과하지 못했다. 거듭된 불순종과 원망, 우상숭배와 반역을 일삼았다. 그 결과 40년 동안의 광야생활을 했고 출애굽한 세대들은 여호수아와 갈렙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죽게 된다.
이와 똑같지는 않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의 test가 주어질 때가 있다. 하나님께서 직접 test하시지 않을지라도 그 상황이 test가 될 때가 있다. 사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test가 아닌 상황적인 test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 상황적인 test가 무엇인가?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과 불순종하는 것이 같이 놓여있다. 이것이 상황적인 test다.
예를 들어 지난 주 말씀처럼 용서라고 하자. 하나님의 뜻은 용서다. 용서를 통한 관계회복이고 이웃사랑이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용서를 택할 것인지 내 감정과 분노에 따라 여전히 미워하고 정죄하고 저주할 것인지 이 둘이 내 앞에 놓여있다.
이 때 쉽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의 사랑에 따라 용서한다면 나는 용서라는 test, 사랑이라는 test에 통과한 것이 된다. 그랬을 때 나에게 주어지는 복이 있다. 우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 최고의 복이다. 그리고 내 안에 용서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복이 주어진다. 용서받은 자만이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해본 자만이 참된 용서를 안다고 했다. 용서가 무엇인지 용서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더불어 관계회복이 주어지고 이웃을 사랑하게 되는 복이 주어진다.
나눔과 섬김이라 하자. 내 앞에는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라 겸손히 낮아져 섬기고 내 것을 나누어주는 삶과 반대로 섬김만 받고 높아지기만을 바라고 내 욕심에 따라 사는 것이 놓여 있다. 이때 순종하여 나눔과 섬김을 실천한다면 나는 나눔과 섬김이라는 test에 통과한 것이 된다.
그랬을 때 나에게 주어지는 복이 있다. 섬김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고, 나눔이 왜 복인지를 알게 된다. 그리고 나는 더 주님 닮은 마음을 갖게 되어 더 주님 닮은 섬김과 나눔을 할 수 있게 된다. 나의 나눔과 섬김을 통해 사람들이 달라지고 공동체가 건강해지는 복을 받게 된다.
주일성수라 하자.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나 내게는 언제나 주일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들과 유혹이 놓여있다. 일이 있고 피곤하고 번거롭고 돈 벌고 싶고 딴 것 하고 싶다. 일이 있고 피곤하고 번거롭고 돈도 벌어야 하고 딴 것 하고 싶지만 주일 성수를 하는 것을 통해 나는 또 하나의 test를 통과하는 것이 된다. 주일성수 자체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것이기에 test가 될 수 있다.
주일을 거룩히 지켰을 때는 복이 있다. 우선 하나님을 온전히 예배함으로써 오는 하나님의 은혜다. 하나님과 관계다. 예배 없이 하나님과의 관계는 없다. 예배 안에서 내 영혼이 안식을 얻고 내 몸 역시 안식을 얻는다. 내가 제대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확인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나의 모습을 확인하고 새롭게 은혜를 받고 힘을 얻어 세상 가운데 나아갈 수 있다.
이 외에도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직접 test하시는 예는 드물다. 그러기에 함부로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신다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상황 자체가 우리에게는 test가 될 때가 많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종과 불순종이 우리에게는 test가 될 수 있고, 그 test를 통해 우리는 보다 큰 은혜와 복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하신다는 말은 하지 말자. 대신 이 상황이 나에게 test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기왕이면 그 test를 성공적으로 통과하는 사람이 되자. test의 성패는 순종에 달려있다. 순종이 비결이다. 기억하라.
두 번째로 trial이다. trial은 test와는 그 의미가 조금 다르다. 시련의 의미가 강하다. 어떤 상황적인 어려움, 시련이나 고통, 박해 등을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관련이 있다고 한 이유는 다음 말씀에서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0:13이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를 공동번역으로 보자.
"여러분이 겪은 시련은 모두 인간이 능히 감당해 낼 수 있는 시련들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신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십니다.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개역개정에는 시험으로 되어 있는데 공동번역은 이 뜻을 살려 시련이라고 번역하고 있다. 앞서 말한 대로 원어가 뜻하는 의미를 잘 살려 번역했다. 여기서 보면 우리에게 오는 시련이 하나님의 뜻과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떤 시련은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기억할 것은 여기서 시련은 나의 욕심 때문에 야기된 어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내 잘못이고 내 죄값이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시련은 나름대로 예수 잘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는데, 그렇게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오는 어려움, 고난, 박해이다. 실제로 그러한 경우가 있다. 이른 바 욥과 비슷한 경우이다.
전에 IMF가 있을 때도 그런 경우가 많았다. 욕심 때문에 빚내서 기업 운영하다가 부도가 난 경우는 자기 잘못이다. 그러나 열심히 정직하게 일했는데 갑작스럽게 어려움에 처한 이들도 많았다. 이런 경우다. 그때 목사님들이 그런 말을 했단다. '욥기가 없었으면 어떻게 했을까?' 욥기가 있기에 어려움에 처한 분들을 위로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욥기는 의인이 받는 고난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이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롭게 살 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엄청난 고난을 당하게 된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욥은 자기의 욕심 때문에 그런 엄청난 고통을 당한 것이 아니다. 물론 사탄이 그를 시험하였지만 욥 자신에게 고난의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부분이다.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을 허락하신다고 했는데 욥의 경우는 그 극한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극한의 시련은 예가 드물다.
우리는 그런 생각을 한다. 왜 하나님은 시련을 막지 않으시는가? 왜 시련을 허락하시는가? 내가 잘못해서, 내 욕심에 이끌려 그리 되었다면 할 말 없지만 나름대로 하나님도 잘 믿고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고 했는데 왜 이런 시련이 나에게 찾아오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때 하나님이 처음부터 시련을 막아주시면 안되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한다.
그럴까? 나는 시련 역시 test라고 생각한다. 이 시련은 분명 하나님이 주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영역이다. 우리가 바라는 것처럼 막으실 수도 있다. 막기도 하신다. 아는가? 하나님께서 막지 않으셨다면 내 삶은 이미 여러 번 큰 시련을 당했을 것이라는 것을. 결정적인 순간에 막으신다. 나만해도 정말 죽을 수 있는 상황이 몇 번 있었다. 나는 그때 하나님의 손이 막으신 것을 경험했다. 그렇게 막기도 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막기도 하시지만 막지 않으시고 허락하실 때도 있다. 왤까?
사랑 때문이다. 이해가 되는가? 우리는 하나님이 시련을 막아주시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시련을 허락하시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말이다.
나는 우리 아이들을 볼 때 가끔 이런 마음이 들 때가 있다. 이 아이들의 인생이 너무 평탄하지 않기를 바란다. 가끔 실패도 하고 가끔 넘어지기도 하고 가끔 고난이라는 것도 겪었으면 싶다. 내가 이상한 아버지인가? 아니다. 난 우리 아이들을 정말 사랑한다. 날마다 축복하는 아버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평탄함이 우리 아이들에게 유익한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쉽지는 않지만 실패도 경험해보고 넘어지기도 하고 고난도 당해보고 아프기도 해봐야 건강하고 성숙한 사람들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시련을 겪을 때 아마도 나는 힘들어 할 것이고 아파할 것이다. 그러나 염려하거나 낙심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실패하고 어떻게 고난당하고 어떻게 아프냐가 문제다. 그 가운데 예수가 있으면 된다. 우리 아이들이 시련 가운데서 예수님 바라볼 수 있고 그분 붙들 수 있고 그래서 주님께서 만져주신다면 열 번 실패하고 백번 넘어지고 아파도 좋다. 그건 고통이 아니라 축복이다.
내가 그러한 사람이었다. 내가 평탄하고 건강하고 잘 나갈 때 내게는 예수님이 없었다. 교회는 다녔는데 예수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실패하고 병상에 눕고 고통을 겪었을 때 나는 예수님을 새롭게 만났고 그분이 나를 만져주셨고 나를 다듬어 주셨고 나를 새롭게 해주셨다. 내 안에 예수가 분명해졌다. 내가 아주 대단한 고난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난 내가 겪은 실패와 아픔과 고난이 축복이었고 은혜였다고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시련만을 허락하셨고 그 시련을 당할 때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심으로 이길 힘을 주셨고 피할 길을 열어주셨다. 뿐만 아니라 그 시련을 통해 앞서 말한 것처럼 내 안에 예수가 분명해졌고, 내 안에 많은 상처가 치유되었고, 모난 나의 인격과 성품들이 다듬어 졌고, 내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분을 사랑하는 법과 그분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은혜를 주셨다.
사실 나는 그렇게 큰 시련을 당했던 것은 아니다. 딱 내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시련을 주셨다. 그런데 정말 욥만큼은 아니지만, 욥과 비슷할 만큼 시련을 당한 사람이 있다. 더글라스라는 사람이다. 기독교 저술가 중에 필립 얀시라는 분이 있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기독교 저술가이며 목사다. 이 분이 욥기 주석을 쓰기 위해 애매하고 억울하게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이들, 믿음 생활을 나름대로 잘 했음에도 큰 고난을 당한 이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심정을 조사했다.
그러던 중에 더글라스라는 사람을 만났다. 신학생이었는데 목회를 시작하려 할 때 아내가 유방암에 걸려 가슴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2년 후에 암이 재발되어 폐까지 전이 되었고 치료를 받는 동안 아내는 정상적인 집안일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래서 집안일과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더글라스가 해야 했고, 아내의 간호까지 해야 했기에 목회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아내와 12살짜리 딸을 태우고 운전하던 중에 교통사고가 났다.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음주운전을 한 사람 탓이었다. 정면 충동이었는데 기적적으로 가족은 살아남았다. 그러나 아이는 팔이 부러지고 유리 파편에 얼굴이 말이 아니었고 더글라스는 머리에 엄청난 충격을 받아 중상을 입었다.
그 사고로 인해 늘 심한 두통에 시달렸고 방향감각과 기억력이 감퇴되어 무언가를 잃어버릴 때가 하루에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길을 가다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거기에 있는지를 잊어버려서 쩔쩔매곤 했다. 더욱이 고통스러웠던 것은 사고로 인해 한쪽 눈이 제멋대로 움직여 초점이 잡히질 않았다. 어떤 것을 볼 때 상이 이중으로 보여서 도움이 없으면 혼자서는 계단을 내려가기 어려웠고 책도 한 두 페이지 이상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경건한 신학생이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신학교에 갔고 착실하게 목회를 준비하던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욥과 같은 고난이 닥친 것이다.
필립 얀시 목사님이 그를 만나서 식사를 하며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당신은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비극을 당했습니다. 죄송합니다만 당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실망을 내게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잠시 후 더글라스는 이렇게 말했다.
"목사님, 나는 하나님께 아무런 실망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일에 관해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당혹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마음 놓고 삶의 불공정성을 저주하고 나의 모든 슬픔과 분노를 다 표출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도 그 교통사고에 대해서 나와 똑같이 슬픔과 분노를 느끼고 계신다고 믿습니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그 분을 탓하지 않습니다."
깜짝 놀라는 필립 얀시 목사님을 바라보며 더글라스는 계속 말했다.
"나는 이 세상의 물질적 실재 너머에 있는 영적 실재를 보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존재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까지도 나의 양호한 건강상태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나는 건강을 잃고 난 다음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돈독히 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다 많이 가졌습니다. 나는 이 현실 너머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나름대로 하나님도 잘 믿으려고 하고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했는데도 시련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는가? 혹은 최소한 내가 내 욕심에 이끌린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 열심히 살려고 하는데 어려움을 당한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는가?
욥을 생각하고 더글라스를 생각하라. 그 이유가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시련이라 생각하라. 그 뜻은 정확히 모른다. 우선 겸손하자.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욥이 나중에 깨달은 후에 한 말을 기억하라.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겪는 시련으로 인해 하나님께 대해 실망하거나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고 그런 생각과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기억하라. 우리는 다 알지 못한다. 욥처럼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우리의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짓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다만 기억하라. 내게 시련을 허락하시는 주님의 뜻이 분명 있음을. 그 뜻은 선한 뜻이며, 축복의 뜻이며, 사랑의 뜻이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감당할 만하기에 허락하신다. 이 말은 이 시련을 통해 나를 만지시고 새롭고 하시고 고치시고 나를 성장하게 하시고 내게 더 큰 은혜와 복을 주시기 위함이다.
욥이 그 엄청난 시련을 믿음으로 통과한 후에 무어라 말하는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만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더글라스가 무엇이라 고백하는가? 이 고난을 통해 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게 되었고 현실을 넘어 영적 실재를 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고 하지 않은가? 한 단계 성숙한 영적인 복을 받게 된다.
내 삶이 평탄하고 물질의 복, 건강의 복, 형통의 복이 주어지는 것만이 복이 아니다. 오히려 그 복들로 인해 하나님을 멀리하고 범죄한 경우가 많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것을 보여주고 우리 주변에서도 보지 않는가?
신앙의 사람들은 오히려 시련을 통해 더 큰 복을 받는다. 성경의 모든 신앙의 영웅들이 그러하고 기독교 역사에서도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시련을 통해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붙잡았고 그 믿음이 현실 너머의 영적 세계를 보는 눈을 가지게 되었고 더욱 더 다듬어지고 성숙한 신앙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께 크게 쓰임 받았다.
문제는 시련이 아니라 시련 가운데 나의 자세다. 시련이라는 문제를 보지 말고 그 뒤에 있는 하나님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보라. 비하인드 스토리, 나의 시련, 나의 고통 뒤에서 계획하시고 일하시고 싸우시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음을 보라. 시련 뒤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고 나를 다듬고 치유하고 성숙시키려는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고 현실 너머의 영적 세계를 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음을 보라.
그 가운데서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볼 수 있고 십자가 붙잡을 수 있으면 된다. 말씀하시지 않는가?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피할 길을 여신다고 말이다. 피할 길이 무엇인가? 깨달음의 길, 복의 길, 하나님께서 새롭게 예비하시는 복의 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시련을 겪을 때 이 시련이 내가 감당해야 할 것이라면 능히 잘 감당할 수 있는 믿음을 주시고 잘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옵소서."
이것이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청원,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에 담긴 첫 번째 뜻이다. 두 번째 뜻은 다음 주에 말씀을 나누려고 한다.
어떤가? 이 기도를 드릴 수 있다면 된 것 아닌가? 그리고 한 가지를 더 기억하라. 내가 시련을 겪을 때 주기도문에 따른 이 기도를 드릴 때 나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나와 함께 기도하는 분이 계시다. 누군가? 예수님이시다. 주기도문 강해 2번째 시간에 말한 것처럼 주기도문에는 '우리'라는 말이 강조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다. 여기에서도 '우리'가 강조된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이 '우리'는 단순히 너와 나가 아니다. 일차적으로는 예수님과 나다. 성부 하나님과 우리이신 예수님, 즉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신 예수님께서 그 우리에 나를 초청하시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에서의 우리다. 예수님과 내가 우리가 되어서 너와 내가 우리가 되는 것이 바로 주기도문에서의 우리다.
이 말은 나와 우리가 되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늘 기도하고 있다는 말이다. 주기도문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청원인데 예수님께서는 이 엄청난 기도를 우리에게 던져놓고는 뒷짐 지고 나 몰라라 하며 구경하는 분이 아니시다. 내가 주기도문에 담겨 있는 뜻에 따라 기도하고 그렇게 살아갈 때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기도하신다.
'주님, 지금 제게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제가 지금 견디기 힘든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 고난은 내가 감당할 수 있기에 허락하셨을 기억하게 하시고 이 고난을 통해 주님의 사랑, 주님의 뜻 더 잘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의 힘으로 이 고난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라고 내가 기도할 때 주님께서 나와 함께 우리가 되어 기도하신다. 그래서 내게 시련을 능히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시련을 통해 더 큰 성숙, 더 큰 주님의 사랑과 은혜와 복을 받게 하신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함께 우리가 된 우리 역시 당신을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기억하라. 나 역시 기도 가운데 여러분들을 만난다. 그 아픔, 그 실패, 그 좌절, 그 어려움, 주님께서 어루만져 주시고 힘주시고 새롭게 해주시길 기도한다. 주님 바라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이 때 믿음을 더해 달라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사람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뿐이겠는가? 예수님 안에서 함께 우리가 된 우리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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