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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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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11: 우리를 구하소서!"
2010년 7월 17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6:9-15
지난 7월 8일 저녁 부산의 한 주택에서 꽃다운 20세 베트남 여성이 흉기에 찔려 숨진 채 발견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베트남 여인은 나이도 거의 아버지뻘(47세)에 해당하는 한국 남성과 국제결혼을 한 여인으로 결혼한 지 일주일 만에 남편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문제는 이 남자가 8년 전부터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고 57차례나 정신병원 치료를 받아왔으며 환청으로 인해 부모를 폭행까지 했던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이번에도 ‘귀신이 아내를 죽이라고 하는 환청을 들었다’고 진술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른 것이 무분별한 국제결혼입니다. 지금은 지구촌 시대이고 다문화권 시대이기에 국제결혼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국제결혼은 그 출발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은 한국 여성과의 결혼을 하기 어려운 소외된 남성들이 꽤 있다는 사실이고, 이를 상대로 한 국제결혼을 알선하는 회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상대는 중국, 필리핀, 베트남, 중앙아시아 여성들인데, 이들 나라들은 우리나라보다 경제 수준이 낮은 나라들이고 대개 가난한 여성들이 대부분입니다. 이 여성들은 한국 남자와 결혼해서 잘 살아보겠다고 오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는 겁니다.
우선 국제결혼을 알선하는 업체들의 악행인데, 소개를 해주는 대가로 5백만 원에서 천만 원 정도를 받는다고 합니다. 돈에 눈이 먼 악덕 업체들이 경제적으로 빈약한 개발도상국 여성들을 마치 물건 수입하듯 마구잡이로 골라서 알선하는 경우가 많고, 결혼 상대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에 대한 전달도 없이 결혼만 성사시켜 주고 돈을 챙기거나 사기인 경우도 많다는 겁니다. 이번에 일어난 사건도 정상적인 결혼생활을 할 수 없는 정신질환자임에도 그것을 알려주지 않은 채 돈만 챙겼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한국 남자들과 결혼하는 여성들 중에는 돈을 벌려는 목적으로 위장 결혼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혼하여 한국 국적을 얻은 후에는 도망을 가버리는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성들의 부모들 중에도 돈을 위해 국제결혼을 시키는 예도 많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외국 여성과 결혼한 남자들 중 일부는 인격적인 면에서 매우 문제가 많아서 외국인 아내를 폭행하고 학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사건이 지금 주요한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고, 이 사건으로 인해 베트남과 동남아 지역에 반한 감정이 일어날까 주의하고 있을 정도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보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시옵소서”
여기서 말하는 시험은 유혹의 의미입니다. 결혼에서 소외된 남성들, 극심한 가난으로 인해 돈을 벌고 싶은 동남아 여성들, 이들을 대상으로 돈벌이에만 눈이 먼 악덕 국제결혼알선 업체들, 이러한 악덕 업체들을 제대로 규제하지 못하는 구조적인 문제... 이러한 것들이 결국 많은 사람들을 유혹에 빠지게 만들고 악에 빠지게 합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우리를 유혹에 빠지게 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혹에 빠지고 그 유혹으로 인해 악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그런 경험이 모두에게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혹을 잘 보면 분명하게 구별되는 유혹이 있고 구별하기 어려운 유혹이 있습니다.
분명하게 구별되는 유혹 중에 대표적인 것은 역시 돈에 대한 유혹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국제결혼의 경우도 문제가 된 원인은 돈에 있습니다. 돈에 눈이 먼 알선 업체들과 비록 어려운 생활 때문이지만 동남아 여성들의 경우도 돈이 그 원인이 됩니다. 왜 많은 공무원들과 정치인들과 기업들이 뇌물수수니 비자금이니 하는 것에 연루됩니까? 돈에 대한 유혹입니다. 왜 땅 투기를 하고 속이고 사기를 치고 착취를 합니까? 돈에 대한 유혹입니다. 이런 경우는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유혹입니다. 분명하게 구별되지만 강력한 유혹입니다.
전에 어느 개척교회 사모님의 솔직한 고백을 본 적이 있습니다. 사모님은 회사를 다니다가 목사님이 개척을 하게 되면서 부부가 개척목회에 전념하기 위해 회사를 그만 두었습니다. 퇴직금을 받아 얼마 동안은 버텼는데, 점점 더 경제적인 어려움이 심해졌습니다. 그러던 중에 통장에 백만 원 쯤이 입금이 되어 있었습니다. 입금자가 누군가 했더니 전에 다녔던 회사였습니다.
이미 퇴직금을 받았는데 왜 또 이런 돈이 입금되었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드는 충동이 지금 당장 돈이 필요한데 우선 이 돈을 빼서 쓸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주 강한 충동이었는데, 그런 생각에 망설이고 있는데 전화가 왔습니다. 전에 다니던 회사입니다. 직원이 실수로 잘못 입금했으니 다시 회수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일을 겪은 사모님이 그래요. ‘좋다 말았지요. 그런데 정말 그 순간은 너무 강한 충동에 사로잡혀 있었답니다. 만약 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돈을 찾아 썼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돈은 정말 큰 힘이 있더군요. 조심해야겠어요.’
참 순진한 분이시죠? 이렇게 순진한 분에게도 돈은 강력한 유혹입니다. 그래서 돈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성적인 유혹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분명하게 구별되는 유혹입니다. 이 외에도 우리가 유혹인지를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는 것들이나 상황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유혹인지 분명하게 안다고 해서 우리가 그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는가 하면 자신 있게 그렇다 라고 대답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그 유혹에 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런 유혹들은 자신도 주의하고 신앙양심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면 웬만큼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잘 구별되지 않는 유혹들입니다. 사실 이런 유혹들이 더 많고 더 위험합니다. 유혹과 악은 대개의 경우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가장한 채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또한 우리가 방심하는 틈을 타서 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사탄에게 유혹을 받는데, 그 유혹은 하와에게 있어서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보였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상)
여자의 눈에는 선악과가 어떻게 보였다고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게 보였습니다. 즉 선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먹음직도 하다, 음식은 선한 것입니다. 보암직도 하다, 아름답다는 겁니다.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다, 지혜는 우리의 삶을 바르게 이끌어줍니다. 그렇게 다가왔다는 것입니다. 추하고 혐오스럽고 미련한 것으로 다가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유혹은 이렇게 선하고 아름답고 지혜로운 것으로 가장한 채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러한 유혹이 더 위험하다는 것이지요. 결국 인류 전체를 죄악과 악으로 던져 넣어버린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광야 40일 금식 후에 사탄은 예수님을 유혹합니다. 사탄이 유혹한 세 가지를 보면 다 선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메시아이시기에 하실 수 있는 일들입니다. 돌을 빵으로 만드는 것은 선한 일입니다. 빵을 만드는 것 자체는 선한 일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 기적을 행하라는 것인데, 기적을 행하는 것도 선한 일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라는 유혹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을 다스리는 일도 선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예수님에게는 선한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유혹이라는 것이지요. 돌을 빵으로 만들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기적을 행하고 세상 모든 나라들을 다스리는 것이 선한 일 같은데 그것은 예수님을 걸려 넘어트리려는 사탄의 미끼였습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오신 예수님을 넘어뜨리려는 사탄의 유혹이었습니다.
참된 구원은 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기적이 참된 믿음을 불러일으키지 않습니다. 힘으로 세상을 통치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져오지 않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한 이들이 그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오병이어를 경험한 이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 했는데, 그들의 관심은 빵이었고 예수님이 왕이 될 때 자신들에게 떨어질 떡고물이었습니다.
그때 만일 예수님께서 선해 보이는 그 유혹에 넘어졌다면 십자가도 없었을 것이고 그럼 구원도 하나님의 나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아담이 행한 치명적인 실수를 두 번째 아담이신 예수님께서는 거절하셨습니다.
아십니까? 유혹과 악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에서도 비롯되고,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돕고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에서도 비롯된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좋은 사람이 좋은 장소에 있다고 해서 유혹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고, 좋은 사람이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해서 유혹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좋은 예가 교회라는 신앙공동체 아닐까요? 하나님을 예배하는 곳에서,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고 하는 교회에서 수많은 유혹과 악이 형성된다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 유혹들 가운데는 겉으로는 선해 보이는 것들이 많습니다. 선한 의도와 목적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기업과 정부 역시 그런 예입니다. 기업과 정부는 본래 선한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엄청난 자원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 안에 얼마나 많고 크고 추악한 악이 존재하는지 말입니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우범지대라고 할 수 있는 빈민가나 지하 범죄 세계보다 더 많은 악이 존재하는 곳은 사람들이 보통 선하다고 생각하는 곳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겉으로는 체면과 품위, 사회적인 지위와 명성 등에 감추어졌고 포장되어 있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훨씬 더 많은 유혹과 악이 선하다고 하는 그 안에 존재합니다. 좋은 곳에 있다고 해서 유혹이 없는 것이 아니고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유혹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유혹인지 분명하게 구별되는 유혹도 문제지만 오히려 선해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고 지혜로워 보이는 이 유혹, 잘 구별되지 않는 이 유혹이 훨씬 더 위험하고 우리 주위를 둘러싸고 있고 쉬지 않고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우리는 여기서 유혹의 뿌리가 무엇인지, 유혹의 근원이 무엇인지를 잘 인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왜 유혹에 빠지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이 됩니다. 왜 유혹에 빠집니까? 유혹하니까? 아닙니다. 유혹한다고 다 유혹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유혹에 빠지는 무언가가 있기에 그렇습니다. 그 무언가가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야고보서 1:13-15을 공동번역으로 봅니다.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 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
지난주에 나눈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누구도 유혹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는가? 무엇 때문에? 자기 욕심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유혹에 빠지고 그래서 함정에 빠지는 모든 경우를 보세요.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자기 욕심이에요. 사기를 친다, 사기를 당한다, 왭니까? 욕심 때문에 남을 속이고 속는 것 아닙니까? 왜 뇌물을 주고 받습니까? 욕심 때문이지요. 왜 성적인 유혹을 하고 넘어갑니까? 욕심 때문이지요. 유혹은 언제 어디서든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그 유혹에 넘어가는 이유는 자기 욕심, 탐욕 때문입니다.
자기 욕심은 늘 자기 합리화로 이어집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는 것이지요. 이번 한번만, 딱 이번 한번만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이게 문제입니다. 다윗도 그랬잖습니까? 어쩌다 목욕하는 여자를 봤어요. 이 여자가 의도적으로 유혹을 한 것인지 무심코 한 것인지는 모르나 어쩌다 보았어요. 그러다가 탐욕에 사로잡혔는데, 어떤 생각이었을까요? 이 정도는 괜찮아, 보는 사람도 없는데, 이번 한번만, 그런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다가 그렇게 된 것 아닙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번 한번만, 이번이 마지막이야 하는 자기 합리화의 소리에 끌려 다니지 마십시오. 매우 위험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전에 소개한 적이 있는데 에스키모들이 늑대를 잡을 때 사용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칼에 피를 잔뜩 묻혀서 얼립니다. 춥기 때문에 금방 엄니다. 그리고 다시 피를 잔뜩 묻혀 얼립니다. 이것을 몇 번 반복하면 칼은 핏덩어리로 둘러싸이게 됩니다. 그 칼을 땅에 거꾸로 세워둡니다.
밤이 되면 배고픔에 늑대들이 민가로 찾아옵니다. 그러면 제일 먼저 느껴지는 것이 피 냄새입니다. 피 냄새를 맡은 늑대는 칼에 얼어붙은 피를 혀로 핥습니다. 얼어붙은 핏덩어리를 계속 핥다보니 점차 혀의 감각이 마비됩니다. 그래도 계속 피를 핥습니다. 이윽고 칼날이 드러나는데 늑대는 그것도 모른 채 계속 핥습니다. 칼날에 혀가 베어 자기 피가 흐르는데 늑대는 계속 핥습니다. 마침내 늑대는 혀가 갈기갈기 찢겨진 채로 입 주위에는 피로 범벅이 된 채로 죽고 맙니다.
상상하면 좀 끔찍한 일이나 여기서 우리는 유혹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알 수 있고, 이 정도는 괜찮겠지, 이번 한 번만 하는 자기합리화가 얼마나 큰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우리에 말씀하십니다. 에베소서 4:22-24 말씀입니다.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우리에게 옛 사람을 벗어 버리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가 벗어 버려야할 옛 사람이 무엇입니까?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삶입니다. 교회는 다니는데, 예수는 믿는 것 같은데 여전히 자기의 욕심에 따라 유혹에 이끌려 사는 그런 이전의 생활을 계속하고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대신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심령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내 안에 여전히 욕심으로 가득 차 있고 거짓과 상처와 두려움이 있어서는 새사람을 입을 수 없습니다. 앞서 유혹의 뿌리가 내 안에 있는 욕심이라고 했는데 그 외에 우리 안에 있는 상처와 두려움도 그 원인이 됩니다. 내 안에 상처가 있고 두려움이 있으면 유혹에 이끌릴 가능성이 큽니다. 물질에 대한 상처와 두려움, 사람에 대한 상처와 두려움, 실패로 인한 상처와 두려움, 자신의 한계로 인한 상처와 두려움 역시 우리를 유혹으로 이끄는 원인이 됩니다.
두려움에 관한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동물원에서 제일 인기 있는 고릴라가 죽었습니다. 이것이 알려지면 관객이 줄까봐 동물원측에서 사람을 채용해서 고릴라 가죽을 뒤집어쓰고 고릴라 연기를 하도록 했습니다. 너무 리얼하게 고릴라 연기를 했는데, 한번은 그네를 타다 사자 우리로 뚝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겁이 나서 이 고릴라가‘사람 살려’했더니 사자가 다가와서 그랬답니다. “야, 임마, 조용히 해, 우리 둘 다 직장 잃으려고 그래?”
두려움이란 것이 사실 별거 아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두려움 때문에 약해지고 유혹을 당합니다. 두려움은 사실 욕심입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내 것을 잃을까봐. 결국 욕심의 문제인 경우가 많아요. 두려움이 생길 수 있으나 그냥 놔두면 유혹에 빠지게 됩니다. 상처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물질이든 사람이든 일이든 상처를 받을 수는 있지만 그대로 남아있을 때는 위험해집니다. 유혹에 빠질 수 있어요. 상처와 두려움은 우리 안에 있는 욕심과 더불어 유혹의 원인의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심령이 새롭게 됩니까? 무엇보다 감사하세요. 우리 안에 있는 유혹의 원인은 자기 욕심, 상처와 두려움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욕심과 상처와 두려움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감사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늘 부족합니다. 늘 힘듭니다. 늘 염려합니다. 감사해보세요. 감사는 조건이 아닙니다. 조건에 따라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뛰어넘는 감사를 해보세요.
성경이 무어라 말씀합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왜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조건을 뛰어넘으라는 것입니다. 환경을 뛰어넘는 감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사가 어떻게 가능합니까? 내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지면 됩니다. 내가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으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신의 독생자까지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고 그 사랑을 붙잡고 그 사랑에 붙들리면 조건을 뛰어넘는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내 안에 있는 욕심이 감사와 자족으로 채워지고, 내 안에 있는 상처가 치유되고, 내 안에 있는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겁니다.
감사하세요. 내 안에 욕심이 일어날 때 감사함으로 이겨내세요. 내 안에 상처와 두려움이 있을 때 감사함으로 이겨내세요. 십자가를 바라보는 감사,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는 감사 앞에는 어떤 유혹도 힘을 잃고 떠나갑니다. 감사함으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이제는 우리를 유혹하는 사탄에 대해 봅시다. 주기도문의 여섯 번째 청원처럼 사탄은 우리를 유혹해서 악에 빠지게 합니다. 그리고 일곱 번째 청원인 “악에서 구하시옵소서”에서 악은 악으로도 보지만 악한 자로 보기도 합니다. 즉 사탄의 유혹으로 인한 악과 사탄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이지요.
사탄의 유혹에 대해 보기 전에 먼저 사탄에 대한 두 가지 극단에 대해 잠시 보겠는데 이 극단을 조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 번째는 사탄의 존재에 대해 부정하거나 그 힘을 무시하는 경우입니다. 쉽게 말하면 사탄은 없다거나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무시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성경은 사탄의 존재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공중 권세 잡은 자로 나오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하고 악으로 이끕니다. 그런 사탄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성경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이와 반대로 지나치게 사탄을 극대화하는 현상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고난과 질병과 악한 상황들을 모두 사탄과 연결시키는 현상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감기만 걸려도 사탄이고 귀신입니다. 안 좋은 일만 일어나면 다 사탄이고 귀신입니다. 성경에 없는 이상한 귀신론을 만들어서 가르치고 그렇게 믿습니다.
그 한 예로 피터 와그너 교수인데, 이 사람이 교회성장학 교수로 유명했던 사람인데 은퇴하고 나서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합니다. 이 사람의 최근 주장입니다.
요즘 세상이 왜 이렇게 시끄럽냐 하면 하나님의 왕좌 위에 천상의 여왕이 앉아 있어서 그렇다는 겁니다. 그 여왕이 하나님과 싸워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 천상의 여인이 누구냐 하면 사도 바울이 선교할 때 만난 고대 에베소의 다이아나 여신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이아나 여신을 바울이 그때 완전히 박멸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고, 그 다이아나 여신이 계속 살아 있다가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로 들어갔다가 얼마 전에 죽은 영국 찰스 황태자의 부인 다이아나와 연결이 됐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이아나가 천상의 여왕으로 앉아 있으면서 하나님과 싸워 세상이 이렇게 시끄럽다는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건 억측일 뿐입니다. 성경과 전혀 상관없는 소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비성경적인 귀신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럽니다. 도시마다 담당 귀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 귀신의 이름을 자기들이 안다는 것입니다. 그 지역을 누르고 있는 악한 영들의 역사는 분명이 있지만 도시마다 담당 귀신이 있다는 것은 비성경적인 억측일 뿐입니다.
이런 비성경적인 귀신론자들이 한국에도 있습니다. 성락교회라고도 하고 베뢰아라고도 하는 김기동 이단 집단입니다. 김기동이 쓴 귀신론 책만 수십권입니다. 도대체 이 사람은 귀신론만 쓰는 것 같아요. 이들 집단의 주장을 보면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모든 것이 사탄, 귀신과 연결이 됩니다. 감기 걸려도 귀신, 실패해도 귀신, 다 귀신입니다. 불신자가 죽으면 그 영이 귀신이 된다고 합니다. 무당들이 말하는 귀신론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런 귀신론이 왜 문제입니까? 극단적인 이분법적인 사고도 문제지만 우선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대한 신뢰가 약해집니다.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감격과 확신과 기쁨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사탄과 귀신에 대한 공포 속에 살게 된다는 것이지요. 하나님 중심이 아닌 사탄 중심의 세계관에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사탄의 권세를 이기셨음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역시 승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이름 앞에 사탄은 벌벌 떱니다. 두려워할 것 하나도 없어요. 쓸데없는 두려움을 갖지 마십시오.
C. S. 루이스가 아주 적절한 말을 했는데, 하는 일마다 사탄, 귀신 하는 사람들은 자꾸 그 귀신의 마력에 빨려 들어간다는 경고입니다. 이 말이 옳고 이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합니다.
그리고 극단적인 귀신론이 갖는 두 번째 문제는 우리의 책임과 결단이 약화된다는 것입니다. 모든 유혹과 죄악의 책임을 사탄에게 전가시키고 맙니다. 내가 죄를 지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모두 사탄의 유혹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니요. 내 안에 있는 욕심 때문인 경우가 훨씬 더 많아요. 성경은 우리의 책임과 결단을 요구합니다. 만일 모든 유혹과 죄악의 책임이 사탄에게 있다면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책임을 묻고 결단을 요청합니까? 믿음의 결단은 내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사탄은 늘 우리에게 말하지요. 내 욕심대로 살라고, 자기 주장하라고 말입니다. 여러 모양으로 부추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삶을 살 것을 요청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이 둘 사이에 우리의 책임이 있고 결단이 있습니다. 내가 결단을 해야 하고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런데 비성경적인 귀신론에 빠지면 모든 책임을 사탄에게 돌리고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두 가지 사탄에 대한 극단적인 사고나 주장을 주의해야 합니다. 다시 정리하면 사탄은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사탄을 지나치게 극대화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승리했고 승리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영적 전쟁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전쟁은 이 동네 귀신 저 동네 귀신 쫒아내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들고 의를 실천하고 사랑을 행하는 것이 실제로 영적 전쟁입니다. 사탄은 복음의 진리 앞에 무력해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실천할 때 사탄은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사탄을 대적하는 기도도 때로 필요하고 실제로 귀신들리는 현상도 있기에 귀신을 쫓아내는 기도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영적 전쟁이 아니라 복음과 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영적 전쟁입니다.
사탄이라는 말은 대적자를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대적자입니다. 그래서 사탄은 늘 사람들을 거짓으로 유혹합니다. 왜요?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사탄의 가장 주된 목표물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 5:8)
우는 사자, 으르렁 거리면서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자처럼 사탄이 그렇게 삼킬 먹이감을 찾아다는 것입니다. 그 주된 타겟이 바로 성도들입니다. 교회입니다. 그렇지 않겠어요? 기독교인 하나 유혹해서 넘어뜨리고 목회자 한명 유혹해서 넘어뜨리고 교회 하나 유혹에서 넘어뜨리면 얼마나 경제적입니까? 불신자 몇 백 명 유혹하는 것보다 훨씬 낫지요. 근신하지 않으면, 즉 정신 차리고 깨어있지 않으면 사탄의 유혹에 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장 위험한 상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이것이 시험인지, 유혹인지도 모르는 영적 상태입니다. 그래서 정신 차리고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기도해야 합니까? 왜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까? 왜 말씀을 공부하고 복음의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합니까? 그래야 사탄의 공격을 알 수 있고 이겨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기도하십시오. 우리에게는 유혹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그 유혹이 사탄에게서 온 것이든, 내 안에 있는 욕심에 의한 것이든, 세상의 유혹이든 간에 내 안에는 그 유혹들을 이겨낼 힘이 없습니다. 내 안에는 끊임없이 자기를 주장하려고 하는 욕심과 상처와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의 유혹은 말할 것 없고 사탄은 내 안에 있는 연약함과 세상의 유혹들을 이용해서 나를 끊임없이 유혹합니다. 문제는 내 안에 그 유혹을 이겨낼 힘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경험하지 않습니까? 은혜 받았을 때는 이길 것 같고 실제로 이겨냅니다. 혹은 굳은 결심을 하고 나서는 이겨냅니다. 그러나 계속 가기는 그리 쉽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유혹들을 이겨낼 만한 힘이 넉넉치가 않습니다.
길선주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일정 36년 때 신사참배를 안 한다고 길선주 목사님 등을 일본 경찰들이 붙잡아다가 평양 기생집에 갖다 놓고 아주 아름다운 기생이 술을 한상 차려가지고 와서 유혹하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기생이 술상을 들고 들어오자 길선주 목사가 하는 말이 "하나님! 길선주 죽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길선주 죽습니다." 외치니까 기생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쳐버리고 그는 술 방에서 나올 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는 유혹을 이길만한 힘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길선주 목사님처럼 이런 상황이면 정말 그렇게라도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저주저하다가 머뭇거리다 두리번거리다 넘어지는 겁니다.
너무 자신을 과신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이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에 힘입을 때입니다. 왜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하십니까? 날마다, 유혹이 찾아오는 순간순간마다 기도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지 않고서는 결코 승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욕심으로 인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힘을 주시고, 또한 악한 자 마귀의 유혹과 속임수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우리를 악한 자로부터 구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날마다, 매 순간마다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지난주에 나눈 시련이라는 의미를 첨가하면 이렇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 능히 감당할 수 있는 힘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욕심으로 인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힘을 주시고 또한 악한 자 마귀의 유혹과 궤계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고 우리를 악한 자로부터 구하여 주옵소서.”
이 기도가 날마다, 매 순간마다 있기를 축원합니다.
베드로 후서 2:9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
여기서도 시험은 유혹을 말합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자를 유혹에서 건져내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사십시오. 자기 부인의 삶을 살아가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자기 부인 없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늘 주님의 도우심과 능력과 은혜를 구하십시오. 주께서 경건한 자를 유혹에서 건져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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