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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5:11-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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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아버지! 2
2010. 5. 8.(토) 어버이주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누가복음 15:11-24
지난주에도 설교 제목에 2라는 숫자가 붙었는데 오늘도 뒤에 2가 붙었습니다. 이는 교회 창립 첫해 어버이주일 때 ‘아버지!’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 적이 있기 때문이고, 그때 함께 나눈 말씀이 저에게도 은혜가 되어서 오늘 다시 한 번 그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정확하게 오늘이 어버이날입니다. 부모님들께 전화 하셨나요? 꼭 어버이날이나 어버이주일에만 부모님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날이 되면 더욱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됩니다.
IMF가 시작되면서 우리 사회에 유행하게 된 용어가 있었습니다. 구조조정과 명퇴라는 용어입니다. 명퇴, 명예퇴직이란 뜻이지요. IMF를 겪으면서 구조조정의 여파에 떠밀려 많은 우리의 아버지들이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고 거리로 나 앉았습니다. 그런 와중에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라는 소설입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비록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나름대로 성실하게 열심히 살아온 우리 사회의 아버지를 대표합니다. 6-70년대의 어려웠던 시기를 땀으로 살아오신 분들이 우리들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소설에 나오는 이 아버지는 언젠가부터 가족들에게서 소외를 받게 됩니다. 직장일로 늦어지고 자녀교육에 있어서는 어머니께 맡긴 탓인지 점차 아내와 자녀들과의 대화가 단절되고 급기야 아내와는 각방을 쓰게 되고 자녀들은 아버지에 대해 그다지 애정을 가져주질 않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는 췌장암에 걸리게 됩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더욱 심해지는 가족들로부터의 소외감이 그를 더욱 외롭고 견딜 수 없게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가족에게는 끝끝내 자신이 암에 걸렸음을 비밀로 하고 자신이 죽은 후 아내와 자녀들이 살아갈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아내와 자녀들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고 그저 죽는 날까지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아내와 자녀들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어주길 원하는 아버지...
참으로 답답할 정도로 속마음을 표현하지 않는 우리들의 아버지, 그러나 그 속에는 너무나도 깊고 눈물겨운 사랑이 배어있는 우리들의 아버지를 이 소설은 그려내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소설을 읽으며 자신의 아버지를 기억해내고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 역시 이 소설을 읽으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울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아버지하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어떤 상이 그려집니까? 어떤 감정이 듭니까? 아버지에 대해 좋은 생각, 좋은 감정, 좋은 그림, 긍정적인 그림이 그려진다면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그다지 좋지 않은 생각, 감정, 그림을 갖고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어둡고 그늘지고 부정적인 그림을 갖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성장하면서 겪은 아버지의 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비교적 아버지와의 갈등이 적거나 아버지로부터 긍정적인 영향을 받아온 사람의 경우는 아버지에 대해서 좋은 생각, 감정, 그림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성장과정에서 아버지와 갈등을 겪고, 상처를 받고, 부정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은 아버지에 대해 좋지 않은 생각, 감정, 그림을 갖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로 인한 상처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어머니로 인한 상처도 갖고 있지만, 그보다는 아버지로 인한 상처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상처가 너무 깊어서 쓴 뿌리가 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잘 모르는데 어느 샌가 그 상처가 깊게 내려져서 쓴 뿌리가 된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도 그랬고, 우리 가운데서도 여럿 있을 것입니다. 전에 청년들을 지도했을 때 어느 청년은 그것이 쓴 뿌리인지도 모르다가 수련회를 통해 자기 안에 아버지로 인해 생긴 쓴 뿌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치유 받은 청년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습니까?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지는 않습니까?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의 내면에 아버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 반발심, 미움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한 것들을 해결하지 아니하고 그냥 놔두면 그것은 여러분들의 심령에 깊게 뿌리를 내려서 여러분들의 영적, 정신적 건강을 해치는 쓴 뿌리가 됩니다. 그런 쓴 뿌리가 없습니까? 아버지로 인해서, 혹은 어머니로 인해서 생긴 쓴 뿌리가 여러분 안에 없습니까?
우리 안에 이 쓴 뿌리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그대로 남아있을 때 우리의 정신적인 건강을 해치는 장애가 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심한 걸림돌이 됩니다.
쓴 뿌리가 남아있을 때 어떤 문제가 생기는 지 아십니까?
첫째, 자아상에 심한 손상이 생깁니다.
정태기 교수라는 분이 있습니다. 한신대 목회상담학 교수시고, 크리스챤 치유목회연구원 원장으로 섬기는 분이신데, 이 분의 책의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나무꾼이 어미를 잃은 독수리 새끼를 발견했습니다. 불쌍히 여긴 나무꾼은 독수리 새끼를 데려다가 병아리 우리에 넣어 길렀습니다. 시간이 흘러 병아리는 닭의 모습으로, 독수리 새끼는 독수리의 모습으로 자랐습니다. 하지만 독수리는 자신이 독수리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어느 날 독수리는 낯선 독수리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펴고 유유히 하늘을 날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늘을 나는 독수리가 자신의 동족임을 꿈에도 알 리가 없는 그 독수리는 두려움과 부러움이 섞인 눈으로 하늘을 날고 있는 독수리를 바라보면서 탄식을 했습니다. “아, 한번만이라도 저렇게 멋진 모습으로 날아봤으면...”
이 독수리는 독수리임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는 독수리가 아닌 닭이 들어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안고 있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분명히 날 수 있는데도 날개를 펴볼 생각조차 못하게 하는 무엇인가가 우리 안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독수리인 우리에게 끊임없이 “너는 닭이야, 그러니 절대로 날 수 없어!”라고 속삭이면서 작고 구부러지고 부정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정태기 교수는 ‘마음의 운전사’라고 부릅니다. 우리 안에는 이러한 마음의 운전사가 있어서, 우리의 인생을 성공의 길로 인도해가는 유쾌한 운전사가 있는 사람도 있고, 불행의 나락으로 몰고 가는 구부러진 운전사가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어떤 운전사가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인생의 길과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운전사가 다른 말로는 우리의 자아상입니다.
정태기 교수의 경우 자신이 무척 상처가 많았던 사람이었다고 고백합니다. 특별히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컸던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매우 무서웠는데, 무서운 아버지 때문에 불안과 공포가 그의 마음속에 뿌리를 내렸고,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한 어머니는 ‘일중독자’로 들에 나가 살았기에 어머니의 사랑에도 허기를 느끼며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했답니다.
정태기 교수의 아버지는 양반임을 자부하는 사람으로 매우 엄격하게 자녀교육을 했던 분이랍니다. 특히 식사 때 엄격한 규율을 지켜야 했는데, 아버지가 숟가락을 들기 전에 먼저 숟가락을 드는 자식은 후레자식이라고 야단을 치는 분이었답니다.
그런 아버지 앞에서 한번은 자신이 무척 좋아하는 생선요리가 올려져 있어 무심결에 아버지보다 먼저 젓가락을 댄 적이 있었답니다. 그러자 이에 격노한 아버지가 생선에 젓가락을 댄 그의 손을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그러자 그 힘에 튕겨 나간 생선이 천장에 붙었다가 떨어지고 젓가락은 공중제비를 돌았습니다. 어찌나 세게 얻어맞았던지 떨어진 젓가락을 다시 잡을 힘도 없었고 손가락이 금방 퉁퉁 부어올라왔습니다.
그래도 그는 어머니가 집어준 젓가락으로 꾸역꾸역 밥을 먹었습니다. 얼이 빠져버린 것입니다. 아버지가 너무나 무서워서 그 앞에서는 아프다는 소리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그의 안에는 증오와 공포감으로 똘똘 뭉친 운전사가 들어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 때 그 안에 자리 잡은 어린 운전사가 서른일곱 살이 되도록 그를 자라지 못하게 하고 그의 인생을 조종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유증으로 정태기 교수는 사람들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억압하면서 살았습니다. 나이 서른이 넘을 때까지 귀가 닳도록 들었던 말들이, 자존심 센 사람, 말이 없는 사람, 착실한 사람, 얌전한 사람, 소극적인 사람, 꿔다놓은 보리자루, 사람들 앞에 서면, 특히 여자들 앞에 서면 다리를 후들후들 떤다고 해서 붙여진 재봉틀이라는 별명까지... 자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무시하는 것만 같았고, 나를 좋아하지 않을 것만 같은 의식에 사로잡혀 살았기에 그의 얼굴 표정은 언제나 굳어 있었습니다.
아버지나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상처로 인해, 그것이 그대로 쓴 뿌리로 남아있을 때 우리의 자아상이 병들게 됩니다. 마음의 운전사가 병들면 불행의 나락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쓴 뿌리가 치유 받아야 합니다.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의 자아상은 건강하십니까?
쓴 뿌리가 남아있을 때의 두 번째 문제는 우리가 아버지, 어머니. 부모가 될 때 심각한 장애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라는 말처럼, 우리는 알게 모르게 아버지, 어머니를 닮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모가 되면 우리 역시 우리의 부모님이 나를 대했던 모습으로 자녀들을 대하게 됩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부모님에게서 받은 습관들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게 됩니다.
저의 경우도 우리 집 아이 대할 때 가끔씩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나도 모르게 내 아버지의 모습이 내게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지금 나에게 아버지에 대한 쓴 뿌리는 없습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나의 아버지의 모습이 내게서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제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그 쓴 뿌리가 치유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집 아이를 대한다면 어떨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저는 제 아이를 바른 모습으로 사랑하거나 양육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 아이들 대할 때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쓴 뿌리가 나도 모르게 독처럼 스며 나와서 내 뜻과 상관없이 내 아이를 대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님에게서 받은 상처와 쓴 뿌리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결혼하고 자녀를 기른다면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정태기 교수님의 경우도 결혼해서도 그 쓴 뿌리로 인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답니다. 아내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에서도 사랑을 받지 못하고 어머니에게서도 많은 사랑을 받지 못하다보니까 아내에게 그런 사랑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쓴 뿌리 때문에 가족들에게 짜증내고 투정을 부리고, 그래서 가족들도 괴롭고 본인도 괴롭고, 그런 결혼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쓴 뿌리가 치유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치유 받지 못하면 나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나의 자녀들에게 또 상처를 줌으로써 쓴 뿌리를 만들어주게 됩니다. 내가 받은 쓴 뿌리가 나의 자녀들에게까지 대물림되는 악순환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자녀에게 건강한 자아상을 물려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건강한 마음의 운전사를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부모가 먼저 건강해야 합니다. 여러분 안에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쓴 뿌리가 치유되어야 합니다.
쓴 뿌리가 남아있을 때의 세 번째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걸림돌이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청년 중에 기도할 때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이 힘들고, 그냥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도저히 못하는 청년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 청년은 정말 몸서리가 치도록 아버지를 미워하는 청년입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아버지가 노름에 정신이 팔려 집 재산 다 말아먹고, 술만 퍼마시고, 집에 들어오면 어머니 때리고 자식들도 때리고, 급기야 나중에는 바람까지 피워서 배다른 동생까지 만들고, 그로 인해서 어머니는 병들고...
그런 아버지를 자기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아버지하면 떠오르는 것이 극도의 증오심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겁니다. 기도할 때 아버지라고 부르면 자기가 미워하는 자신의 아버지가 생각나는 겁니다. 너무나 괴로운 것입니다.
이 청년의 경우는 조금 극단적인 경우지만, 많은 사람들이 쓴 뿌리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벽을 갖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당황해 합니다.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으로, 근엄한 표정을 띠고 있는 하나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마음이 편하다는 겁니다. 왜? 그런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도 아버지로 인해 받은 쓴 뿌리가 있었습니다. 그 쓴 뿌리가 그대로 남아 있을 때 어딘지 모르게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막힌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관계 회복이 이루어지면서, 내 안에 쓴 뿌리가 치유되면서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으로 이어졌던 것을 경험했습니다. 막혔던 벽들이 무너지니까 20대 때에 그토록 하나님께 매달렸던 내 인생의 길이 열렸고, 기도의 응답들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어떤 벽이 없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이며, 예물을 제단에 드리기 전에, 즉 예배드리기 전에 먼저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 미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그것도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 어머니를 미워한다면 어찌 하나님께 바르게 나아갈 수가 있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그 쓴 뿌리가 치유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과의 관계도 온전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시고 건강하길 원하십니다. 우리 안에 있는 상처, 쓴 뿌리가 치유되길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쓴 뿌리가 해결될 수 있겠습니까?
1.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나의 의지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나의 노력으로 치유될 수 없습니다. 나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나의 의지, 나의 상처, 나의 쓴 뿌리를 덮을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사랑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참된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만나야 하고, 이 사랑으로 내 쓴 뿌리를 덮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버지의 사랑을 보십시오. 둘째 아들이 재산 상속을 요구합니다. 자유를 달라고 요구합니다. 아버지의 간섭이 싫다고 떠나겠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요구대로 재산을 상속해 줍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난 아들은 얼마 못되어 재산을 다 탕진합니다. 흥청망청 마음대로 돈을 쓰고, 술과 방탕함으로 허랑방탕하게 인생을 허비합니다. 마침내 돈 한 푼 없는 신세가 되었을 때 그는 어느 사람의 종이 되어 목숨을 연명합니다. 들에서 돼지를 치는 일을 했는데, 거기서 돼지 먹이로 주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워보려 했지만 그조차 주는 이가 없어 굶주려야 했던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이 외롭고 힘들 때 누가 제일 먼저 생각납니까? 부모님입니다. 군대 가면 효자 된다는 말이 있죠? 힘들고 외로우니까 부모님 품이 생각나는 겁니다. 이 둘째 아들도 짐승만도 못한 삶 속에서 예전에 따뜻하고 자상하고 넉넉했던 아버지의 품을 생각했습니다. 차마 돌아가기가 용기가 안 났지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큰 맘 먹고 아버지에게 돌아가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완전히 거지 신세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아버지는 어떻게 대합니까?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너 같은 놈은 내 아들이 아니라고 문전박대했습니까? 아니면 받아들이긴 했지만 무슨 벌레 보듯이 했습니까? 돌아온 아들을 야단치며 꾸짖었습니까?
20절을 보십시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 무슨 말입니까? 이 말은 걸어오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인하기에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는 그가 자신의 아들인 것을 알고 달려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것도 그날만이 아니라 날마다, 아들이 집을 나간 후 날마다 동네 어귀에 나가서 아들을 기다렸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한자 가운데 ‘어버이 친’자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부친, 모친할 때 쓰는 한자입니다. 이렇게 생겼습니다. 親. 이 글자를 잘 보십시오. 어떤 글자들로 이루어졌습니까? 나무 木 위에 설 立자 있고, 그 옆에 볼 見자 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집 나간 자녀가, 전쟁터에 나간 자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그저 기다릴 수 없어서 동네 어귀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가 서서 먼 곳을 보면서 기다리는 것이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고,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부모님의 마음입니다.
아버지는 돌아오는 아들을 향해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며 기뻐합니다. 아들이 입고 있던 더럽고 누추한 옷 대신에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고, 발에 신을 신깁니다. 그리곤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아버지의 사랑, 특별히 기다림의 사랑, 용서의 사랑을 말합니다. 집을 나간 아들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사랑, 돌아온 아들을 용서하고 따뜻하게 맞이해주는 사랑, 곧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이 사랑을 우리가 만나야 합니다. 거룩한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도 좋지만, 하나님을 떠난 내가 돌아오기만을 목 놓아 기다리셨고, 돌아왔을 때 용서해주시고 그 크신 사랑으로 맞이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부모님에게서 받은 상처와 쓴 뿌리가 치유될 수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만 있으면 그 누구도 용서할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먼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 안에 있는 쓴 뿌리를 치유하길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나의 아버지, 어머니를 이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부모님께 불만이 있거나 갈등을 겪고 있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왜 우리 아버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일까? 왜 아버지는 자기 방식대로만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일까?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미워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러분들은 아버지를 이해해보려고 노력한 적이 있습니까?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해 본 적 있습니까? 앞서 ‘아버지’라는 소설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땅에서 아버지로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들의 아버지는 그것이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입니다. 비록 표현 하지도 않고, 아니 그 표현 방식이 이해가 안 되고 싫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우리 아버지들의 사랑 표현방식임을 알아야 합니다.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나를 이해해 주기만을 바라는 입장에서 벗어나 부모님의 입장에 서서 이해해보려고 해보십시오.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러분들의 아버지, 어머니는 여러분들을 사랑하십니다. 그 표현방법이 다를 뿐입니다.
저는 한 형제의 고백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로 인해서 많은 상처를 받았어요. 그런데 그런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긍휼히 여기고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먼저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형제는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어요. 그러니까 그것이 미움이 아니라 사랑으로 바뀔 수가 있었다는 겁니다.
제 이야기를 잠시 하면, 저의 아버지께서 십이 년 전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지만 저는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감사하는 것이 있습니다. 적어도 저에게는 아버지로 인한 쓴 뿌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생전에 아버지께 잘 해드리지 못했고, 효도다운 효도도 제대로 못했지만 그래도 내 안에는 아버지에 대한 미움도 원망도 없고 상처도 쓴 뿌리도 없습니다.
저는 외아들이자 장남이자 막내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컸습니다. 아버지도 제게 해주실 수 있는 것들은 다 해주셨습니다. 참 자상하시고 좋으신 분이셨습니다. 저 역시 공부도 곧 잘했고 착하고 모범적인 아이로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저에게는 부담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괜찮았는데, 고 2 말에‘내가 왜 대학에 가야 하나, 왜 살아야 하나,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하는 의문과 함께 방황을 하게 되면서 공부도 안하고 그러다보니까 아버지가 원하는 수준의 대학을 가지 못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의 사업은 실패를 하고, 집안이 기울면서 술을 마시고 들어오는 날이 많아지시고, 그나마 기대했던 아들놈마저 기대와는 다르게 나가니까 술을 마시고 들어와서는 이놈이 교회에 미쳐서 이렇게 되었다고, 교회 때문에 망쳤다고, 교회를 욕하고 어머니를 구박하셨습니다.
몇 번을 아버지와 교회 때문에 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저에게는 아버지로 인한 상처와 쓴 뿌리가 생긴 것입니다. 점점 아버지와의 관계는 멀어지고, 아버지와 거의 대화를 안 하고 그렇게 몇 년을 지냈습니다.
그러던 중에 제가 28살 때 복막염 수술로 입원을 하게 되었고, 수술 후 장 폐쇄 증세까지 나타나서 한 달 동안을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병원에 찾아오셨습니다.
그 때 저는 서울 목동에 있는 병원에 입원해 있었고, 아버지의 직장은 구로동이었고, 집은 안양이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당뇨를 앓고 계셨고, 당뇨 합병증으로 중풍 끼가 조금 있었습니다. 쉽게 피곤해지시고, 다리는 조금 저시면서 다니셨습니다. 하루 종일 일을 하시다보면 피곤하셔서 바로 집으로 가시고 싶으실 텐데도 아들이 누워있는 병원으로 거의 매일처럼 오셨습니다.
그 때 제 마음이 무너졌습니다. 아버지가 당뇨를 앓으신지 몇 년이 되셨고, 그래서 다리를 저셨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제대로 관심 있게 본 적이 없었는데, 그 때 병원에서 본 아버지는 어느덧 쇠약해지시고 늙으신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자신이 불편하심에도 불구하고 아들이 염려되어서 그 몸을 이끌고 날마다 병원에 찾아오셨습니다.
그 아버지가 내 손을 잡았을 때 저는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제 안에 있었던 쓴 뿌리가 치유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못난 아들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깊은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아버지는 마침내 교회에 다니게 되셨고, 그 후 신앙생활 잘 하시다가 천국에 가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만약 내 안에 그대로 아버지에 대한 쓴 뿌리가 있었다면 저는 지금도 돌아가신 아버지로 인해 무척이나 괴로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있는 부모님으로 인한 쓴 뿌리, 특히 아버지로 인한 쓴 뿌리가 치유받기를 바랍니다. 그 상처 그대로 주님 앞에 내어놓으십시오.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앞에 다 내어놓으십시오.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먼저 받아들이십시오. 나의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으로 용서하고 사랑하십시오.
용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용서의 고백을 하십시오. 사실 용서하지 못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분이 나의 아버지입니다. 내가 싫어도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나의 아버지이며, 나의 어머니고, 나의 부모님입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의 아버지, 어머니를 위로하고 축복하고 사랑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아버지는 그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부모님의 어깨에는 여러분들의 인생이 얹혀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부모님의 젊음을 빨아먹고 자란 흡혈귀 같은 자식들입니다. 우리를 위해 젊음을 주셨고, 모든 것을 다 주셨습니다.
그분들 역시 많은 상처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받은 상처, 사람들에게서 받은 상처, 그리고 자녀들에게서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부모님께 상처를 받았다면, 여러분들의 부모님들도 여러분들 때문에 많은 상처를 받으셨습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부모님들은 그 상처 그대로 안고 우리를 키워주셨고, 지금도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아버지를 위로하십시오. 여러분들의 어머니를 축복하십시오. 여러분들의 부모님을 사랑하십시오.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도 좋은 부모가 되기를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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