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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행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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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성령을 기다리라 하신 이유
2010년 5월 22일(토) 성령강림주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사도행전 1:2-5
교회 절기 가운데서 부활절 이후에 이어지는 중요한 절기가 바로 성령강림절입니다. 유대력으로 샤브옷, 칠칠절, 오순절에 해당되는데, 바로 그 날에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영어권 속담에 보면 성령과 관련된 속담이나 격언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이런 재미있는 말이 있더군요.‘성령 받은 사람은 그 집 개도 알아본다.’
이 말은 성경 말씀 중에 어느 구절과 연관될까요? 에베소서 5:18입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술 취함과 성령 충만함을 비교하고 있는데 이 둘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다 겉으로 표가 난다는 것이지요. 술에 취한 사람은 온 몸에 술기운이 가득 차있습니다. 옆에 가면 술 냄새가 쿨쿨 나고 얼굴이 벌겋게 되고 걸음이 비틀거리고 머리가 빙빙 돌아 어지럽고 속이 뒤집히고 난폭한 말과 행동을 해댑니다. 그래서 그 집 개도 금방 압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도 금방 티가 납니다. 어떻게? 얼굴빛이 달라집니다. 환해집니다. 기쁨이 넘치는 표정입니다. 마음이 평안하니까 그 얼굴에도 나타납니다. 또한 성령님의 감화력으로 인해서 그 말과 행동이 달라집니다. 부드러워지고 온화해지고 사람들을 격려하고 칭찬하고 사랑하는 언행을 합니다. 그의 말과 행동에서 예수님의 향기가 납니다. 그래서 술 취한 사람은 그 집 개도 알아보는 것처럼 성령 받은 사람 역시 그 집 개가 알아본다는 겁니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성령 받지 말고 주의 일 하라’ 성령 받지 말고 목사든, 선교사던, 장로, 권사, 집사던 그런 주의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칭찬입니까? 욕입니다. 성령 받지 않고 주의 일을 한다, 직분자가 되고 봉사자가 되고 사역자가 된다? 이건 욕이고 저주의 말입니다.
성령 받지 않고 주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서 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를 세우고 영혼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병들게 하고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왜요? 자기 힘으로 하거든요. 자기 뜻에 따라 하려고 하고 자기 욕심대로 하려고 하고 자기 기분 내키는 대로 하고 자기 힘과 지혜만 믿고 하려고 하기에 그리 되고 마는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히 사역자나 직분자, 봉사자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닐 겁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교회는 다니고 예수는 믿는 것 같은데 실제로 무기력하단 말이죠. 무감각하단 말입니다.
주의 일을 할 때도 처음에는 열정을 가지고 무언가 하는 것 같은데 얼마 가지 못하고 시험에 빠지고 자기만족이 되고 열심히는 하는데 열매는 없거나 혹은 영적 게으름과 타성에 빠져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고 시간만 허비하고 있단 말입니다.
세상에 나가서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지, 죄짓지 말고 살아야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지 마음은 먹는데 그리 오래가지 못하고 유혹에 넘어지고 혈기에 넘어지고 현실과 타협하고 세상 풍조와 유혹에 무기력하게 휩쓸리고 심지어는 죄악으로 자신을 더럽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지요.
적어도 교회를 다니고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죄에 대해 이기고 세상과 사탄의 유혹에 대해 이기고 나아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그런 삶을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겁니다. 무기력하다는 겁니다. 그 무기력이 이어지면 무감각해집니다. 영적으로 무감각해져서 나중에는 의욕도 없고 문제의식도 없이 그저 하나의 종교인으로 살아갑니다. 이건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주의 일을 감당할만한 능력도 없고, 죄와 싸우고 자신과 싸우고 세상과 사탄의 유혹을 이겨내고 나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만한 능력이 없거나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문 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십일 동안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계심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을 이들은 확실하게 경험했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경험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 메시아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이들은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게다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더욱 더 가슴이 뜨거워집니다. 열정으로 가득 찹니다. 가만히 있을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당장에라도 나가 부활하신 주님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고 싶은 열정에 온 몸과 마음이 뜨겁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무어라 하십니까? No! 아직 아니다, 이곳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 하십니다. 4절에 보면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분부하셨습니다. 명령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기다리라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너희가 다 성령 충만을 받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왤까요? 이미 부활하신 주님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들으며 가슴이 벅찼습니다. 그들에게 이미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열정이 있었단 말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왜 기다리라고 하셨을까요? 왜 성령을 받기까지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셨을까요? 부활 경험으로는 부족해서일까요?
맞습니다. 부활 경험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부활 경험은 엄청난 경험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출애굽 사건입니다.
출애굽 사건과 부활 사건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우선 어린양의 피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내린 마지막 재앙이 사람이든 가축이든 첫 번째 난 것은 모두 죽는 재앙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의 피를 문인방과 좌우 문설주에 바름으로 장자가 죽는 재앙이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유래된 것이 פסח, Passover, 유월절입니다. 어린양의 피로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다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פסח, Passover, 유월의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로 인한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공통점은 홍해 사건과 부활 사건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의 절정은 홍해를 건넌 사건입니다. 우리나라 서해안에 가끔 바다에 길이 생기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모세의 기적이라고 떠드는데 그건 조수간만의 차이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고, 홍해가 갈라진 사건은 그 차원이 다릅니다. 정말 바다가 갈라진 겁니다. 사람들이 잘 믿지를 못하는데 정말 믿지 못할 일이 벌어진 겁니다.
홍해가 갈라진 것이 정말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증거가 있습니다. 홍해 사건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태동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노예였습니다. 야곱의 후손들과 더불어 허다한 잡족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한 민족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중심은 야곱의 후손들이지만 그 외의 다른 족속들이 섞여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야웨 하나님을 믿고 따랐던 신앙공동체가 아닙니다. 야곱과 요셉, 그리고 그의 형제들로 인한 야웨 신앙이 전승이 되었겠지만 애굽에서 4백 년 동안의 노예 생활에서 그들은 순수한 야웨 신앙보다는 오히려 애굽의 우상들을 숭배했습니다. 시내 광야에서 그들이 금송아지를 만든 것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게다가 노예였습니다. 노예근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노예의 최고의 관심은 먹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 몫을 챙기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매우 이기적이고 불평불만을 잘하고 쉽게 한 마음으로 단합이 되질 않습니다.
이렇게 이질적이고 종교적으로도 애굽의 우상숭배에 젖어있었고 노예근성을 가진 이들이 어떻게 한 민족이 될 수 있으며 게다가 어떻게 유일신 야웨 하나님을 믿는 신앙공동체가 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설명을 할 수 있겠으나 가장 확실한 설명은 홍해 사건입니다. 실제로 홍해가 갈라졌다는 것이고 갈리진 바다 사이를 이들이 건넜다는 것입니다. 출애굽 후에 시내 광야에서도 그들이 보여준 것은 이질적인 분쟁과 이기적인 노예근성과 우상숭배와 불평과 불순종이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결코 잊을 수 없고 부인할 수 없었던 공통의 경험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홍해 사건이고, 그 홍해 사건이라는 공통된 경험을 통해 우상숭배와 여러 잡족으로 이루어진 노예들임에도 불구하고 야웨 하나님을 믿는 신앙공동체 이스라엘이 태동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홍해 사건 없이 이스라엘이라는 신앙공동체의 형성은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의 시작을 출애굽으로 보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의 모습을 우리는 압니다. 구성 자체가 적과의 동침입니다. 열심당에서부터 세리까지 매우 다양하고 이질적인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을 3년 동안 따르면서 그들의 관심은 이기적인 것이었습니다. 크게는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회복부터 작게는 예수님이 왕이 되시면 한 자리 해보겠다는 것까지 자기 밥그릇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봉숭아 학당 그 자체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체포되셔서 고문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요한을 제외한 제자들을 다 도망갔습니다. 제자 중 하나는 스승을 팔았고 수제자라고 하는 베드로는 스승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이런 그들이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신앙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너무나도 다른 변화는 부활이라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원래 그럴만한 가능성이 있었다면 모를까 부활 전후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릅니다. 이들이 그렇게 변하고 이들을 통해 초대교회가 형성이 되었는데 이는 제자들이 주님께서 실제로 부활하신 사건을 경험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부활 사건이라는 그 공통된 경험이 주님의 케힐라, 교회 공동체를 태동시켰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홍해 사건과 부활 사건은 둘 다 초자연적인 기적이라는 것과 이 두 사건을 통해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신앙공동체와 교회라는 신앙공동체가 이 사건들을 통해 형성된 것입니다.
그런데 차이점이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건넌 놀라운 경험을 했던 그들이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신앙공동체의 모습을 유지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무엇입니까? 40년 동안의 광야 생활입니다. 물론 40년이란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훈련시키시는 광야 학교의 역할을 했지만 그대로 보면 실패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기적은 진정한 믿음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말하는 분들 있지 않습니까? 보여주면 믿겠다, 나도 보면 믿겠고 들으면 믿겠다. 정말 그럴까요? 아닙니다. 기적을 보는 순간은 믿겠지요. 그러나 그리 오래 가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것을 보여줍니다. 이 사람들은 홍해의 기적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경험했습니다.
네게브 광야에 가본 적 있습니까? 출애굽 한 때가 유월절 기간이니까 우기가 끝나고 건기가 시작되는 시간입니다. 여름입니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고 낮에는 40도, 50도 이상 올라가고 광야니까 나무도 없으니 그늘도 없습니다. 광야는 낮과 밤의 온도차가 큰데 밤에는 매우 춥습니다.
제가 지난 유월절 기간에 네게브 바란 광야에 갔는데 낮에는 그렇게 뜨겁더니 밤에는 두꺼운 옷을 입을 정도로 춥습니다. 그런 광야에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가 되실 겁니다.
저는 몇 해 전에 구름기둥을 봤습니다. 버스를 타고 사해인근을 지나고 있었는데 하늘에 짙은 구름이 펼쳐져 있는데 맨 앞에는 기둥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기둥이 있고 마치 망토처럼, 부챗살처럼 쫙 펼쳐진 구름기둥을 보았습니다. 굉장히 넓은 지역을 덮고 그늘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때 감탄사가 나오더라고요. '이! 이런 것이 바로 구름기둥이구나! 이런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셨구나!' 그리고 탄식했습니다. 카메라가 없어서. 그때 카메라가 없어 얼마나 탄식을 했는지 몰라요.
이 사람들은 그런 경험도 했어요. 그뿐입니까? 목마르면 반석에서 물이 터져, 배고프면 만나도 내려, 고기가 먹고 싶다니까 메추라기가 제 발로 날아와. 만나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이게 뭐야?'라는 뜻입니다. 자신들도 처음 본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경험들을 한 사람들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어땠습니까? 진정한 신앙공동체로 성공했나요? 실패했어요. 믿음은 생겼어요. 그러나 그때뿐이었어요. 기적을 경험한 그때뿐이었어요. 눈으로 기적을 보았을 때는 '할렐루야!'하다가 조금만 힘들고 어려워지면 불평하고 그러다가 조금 괜찮아지면 불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무엇을 말하는지 아십니까? 기적은 참된 신앙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은 신앙의 동기를 제공해줄 수는 있지만 참된 믿음을 가지고 믿음의 길을 걸어가게 해주는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이어령 교수가 얼마 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을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뽑는데, 많은 사람들이 이분이 믿게 된 동기를 암에 걸린 딸과 과잉행동장애로 고통 받던 외손자가 기적적으로 치유된 것을 계기로 기독교인이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이어령 교수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신이 믿게 된 것은 딸이 기적적으로 나아서가 아니라는 겁니다. 딸과 외손자가 기적적으로 낫는 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자신이 세례를 받은 진짜 이유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들으면서 가슴을 치며 회개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기적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건 하나님과 거래하는 것이고 아주 값어치 없는 회심이라는 겁니다. 기적이나 돈과 명예가 필요할 때가 있지만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자신은 기적을 믿지 않고 영원한 부활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는 초자연적인 기적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봐야 믿겠다는 생각을 버리십시오. 이어령 교수의 말처럼 기적을 봐야 믿겠다는 말은 하나님과 거래를 하겠다는 뜻이고 그것은 참된 신앙으로 이어지기 어렵습니다. 기적을 찾는 사람들이 이단이나 신비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많은 이유도 그 탓입니다. 하나님 손에 들린 빵을 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많은 기적들을 체험하고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신앙공동체를 이루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출애굽한 세대들이 다 광야에서 죽고 나서야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성령강림사건은 이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공통된 기적 경험을 통해 신앙공동체가 태동이 되었지만 이들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실패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장은 무언가를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부활이라는 놀라운 경험을 했고, 가슴 벅찬 하나님 나라의 일에 대해 들었습니다.
청년 들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뜨거워지고 당장이라도 하나님 나라를 세울 것 같은 열정이 생기는데 이들이 그러했을 겁니다. 당장은 뜨거운 감격과 열정으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의 일을 열심히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과연 얼마나 갈까요? 얼마나 그 열정과 감격이 지속될까요? 과연 그들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신앙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었을까요?
아니었을 겁니다. 부활 사건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겠지만 고난과 박해가 찾아올 때 그들은 낙심하고 시험에 빠졌을 것입니다. 열정은 가지고 덤볐는데 능력은 없기에 이내 자신들의 한계를 경험하며 낙심했을 것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부활 사건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를 구원함에 있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감당하기에는 부활 사건을 경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열정은 있으나 능력이 없고 경험은 있으나 열매를 맺을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다리고 하신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입니다. 누가복음 24:49에서는 주님께서 이렇
게 말씀하셨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주님께서 성령 강림을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지는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즉 제자공동체에는 능력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기적을 공통적으로 경험했지만 그래서 뜨거운 감격과 열정이 생겼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능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능력으로 덧입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이들이 담대히, 그리고 지혜롭게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박해와 핍박의 상황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그들의 신앙을 견지할 수 있을 것이며, 아울러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앙공동체를 세워나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신 이유입니다.
실제로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순절에 제자들이 다 같이 한 곳에 모여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늘로부터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무엇을 합니까?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서서 소리를 높여 유대인들에게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사셨음을 증거함으로 예수께서 주님이시며 메시아이심을 전했습니다.
지금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을 잘하는 사람인지 몰랐어요. 자기도 깜짝 놀랐을 겁니다. 구약성경의 내용을 정확하게 요약하면서 예수님의 주되시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하면서 묻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분명하게 말합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 2:38)
정확하게 해답을 제시합니다. 그러자 그 말을 듣고 회개하고 세례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이 삼천 명이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제자들이 성령 충만을 받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지혜와 능력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하시고 믿게 하시고 또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인 성경 말씀도 깨닫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 충만을 받자 제자들에게는 전에 없었던 증거의 지혜와 능력이 생겼습니다.
며칠이 못가 박해가 시작됩니다. 사도들이 체포됩니다. 그러나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초대교회 성도들 역시 함께 모여서 사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핍박과 박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심지어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력한 신앙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이들의 공동체에서 놀라운 일들이 벌어집니다. 사도행전 2:43-47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지금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기적인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사랑의 교제와 섬김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마치 천국을 보는 것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성령 충만을 받은 후에 제자공동체는 믿음공동체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나누어주고 섬기는 사랑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공동체를 우리는 초대교회라고 부릅니다.
초대교회는 지금도 가장 아름답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의 모델로 삼고 있습니다. 순전한 믿음과 전도의 열정과 능력과 말씀과 사랑의 나눔과 섬김으로 충만한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이렇게 해서 태동이 된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바로 성령님의 작품이고 성령 충만을 받은 사람들이 세워나간 공동체입니다.
교회가 성령 충만해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의 여느 공동체와 다릅니다. 친목 단체도 아니고 이익단체도 아닙니다. 신앙공동체입니다. 그저 단순히 예배드리고 신앙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생긴 집단도 아닙니다. 교회는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피 값으로 세워졌고 성령 강림을 통해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가 될 때 교회는 진정으로 교회다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성령 충만을 많이 이야기하고 사모하고 그런 운동을 많이 하는데 일부에서는 본질을 놓치고 있습니다. 성령운동을 하고는 있는데 주로 무엇에 집중하고 있습니까? 은사입니다. 방언, 예언, 치유... 이런 은사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습니다. 성령의 은사도 중요합니다. 그것 역시 성령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늘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왜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가, 왜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가입니다. 무엇을 위해?
주님께서 원하시는 참된 신앙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를 세워나가기 위해서입니다. 아무리 전교인이 방언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하고 치유를 하고 축사를 하면 뭐합니까? 은사가 많다고 그것이 곧 성령 충만한 교회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고린도교회 아닙니까? 고린도교회는 은사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방언, 예언, 치유, 축사 등등의 은사가 넘치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정말 성령 충만한 교회였습니까? 아닙니다. 그 안에 음란과 불순종과 탐욕과 미움과 죄악이 있었습니다. 은사가 곧 성령 충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은 초대교회처럼 말씀의 능력이 있고 영혼 구원의 열정이 있고 그러면서 동시에 죄악으로부터 구별된 거룩함과 이기심으로부터 구별된 사랑의 섬김과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교회가 될 때 교회는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해나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이런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길 소망합니다. 우리 교회의 영원한 표어가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입니다. 이천년 전 성지에 있었던 주님께서 원하시는 그 교회처럼 우리 교회도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가 되는 것이 우리가 소망하는 바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입니다. 그런 교회가 되려면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우리 교회가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될 수 있도록 구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어떤 하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신비한 현상이 아닙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의 한 위격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성령 충만을 받는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능력만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신 성령님으로 내가 채워지는 것, 나의 결핍이 채워지고 온전해지는 것을 뜻하고 나의 자아와 죄성과 인격이 하나님이신 성령님의 은혜 아래 있게 되는 것을 뜻합니다. 만일 우리가 은사만을 구한다면 그것은 성령님 손에 들린 빵만 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님의 임재를 구하십시오. 인격이신 성령 하나님께서 내 안에 충만해지기를 구하십시오. 그분께서 나의 결핍과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나의 상처와 모난 부분을 치유해주시고 나의 자아와 뿌리 깊은 죄성과 모난 인격을 그분의 은혜로 덮어주시기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능력을 구하십시오. 성령의 은사도 능력이기에 그것을 구할 수 있지만 그보다는 먼저 능력을 구하십시오. 어떤 능력? 내 자아를 컨트롤 할 수 있는 능력, 죄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능력, 세상의 풍조와 유혹을 분별하고 이길 수 있는 능력,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능력, 거룩의 능력, 순종의 능력, 사랑의 능력, 주님 닮아갈 수 있는 능력을 달라고 구하십시오. 성령 하나님께서 충만히 임하셔서 나의 영과 인격을 온전히 지배해달라고, 당신의 은혜와 능력으로 덮어달라고 구하십시오.
성령 충만의 가장 확실한 증거는 인격과 삶의 열매로 나타납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갈라디아서 5:22-23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기서 말씀하는 성령의 열매를 잘 보십시오. 우리가 보통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라고 하지만 사실은 하나의 열매입니다. 열매라는 말 자체가 단수입니다. 하나의 열매 안에 아홉 가지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이 아홉 가지 하나하나를 잘 보십시오. 이것들은 모두 인격적인 것들입니다. 이러한 인격을 모두 소유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이 모든 것들을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열매는 결국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앞서 성령님은 단순한 능력이 아니라 인격적이신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 뜻입니다. 누가 성령 충만을 받았다라고 했을 때 그 증거는 그가 방언을 하냐 예언을 하냐 치유를 하냐가 아니라 그가 얼마나 예수님 닮은 인격과 삶의 열매를 맺어가고 있는가 하는 데 있습니다.
아무리 멋진 방언을 하고 통변을 하고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면 무엇합니까? 이러한 것들이 별것 아니라는 말이 아닙니다. 사모하십시오. 구하세요.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고 가장 우선적으로 구해야 할 것은 예수님의 인격과 삶을 닮아가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성령 충만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렇게 성령의 은사와 능력도 있고 무엇보다 예수님 닮은 인격과 삶의 열매를 맺어가는 성령 충만한 교인들이 있는 교회가 어떠할지를. 성령 충만한 교회가 되지 않을까요? 초대교회 비슷한 그런 교회가 되지 않을까요? 우리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성령의 열매를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이 성령의 열매를 세 그룹으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맺어야 할 열매, 둘째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어야할 열매, 셋째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맺어야 할 열매로 아홉 가지를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맺어야 할 열매는 무엇일까요? 원래는 하나의 열매지만 편의상 아홉 가지로 본다면 무엇이 여기에 해당될까요? 사랑과 희락과 화평입니다. 둘째 그룹, 이웃과의 관계에서 맺어야 할 열매로는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입니다. 맞지요? 마지막 세 번째 자신과의 관계에서 맺어야할 열매는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겁니다. 맞지요. 상당한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기초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사랑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생기는 현상이 무엇입니까?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냐 사랑하는 것입니다. 누구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하되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5:5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놀라운 축복이 무엇입니까?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십자가 앞에 나왔을 때 제일 확실하게 경험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 아닙니까?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하는 깨달음 아닙니까? 은혜 받았다고 할 때 무슨 뜻입니까?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에 부어졌다는 것 아닙니까?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할 때 우리 안에 성령님께서 충만해지시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거하시기를 가장 좋아하시는 자리가 바로 사랑하는 자리입니다.
성령 충만하기를 원하십니까? 사랑하십시오. 정말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해 보십시오. 당신의 이웃을 당신의 몸처럼 사랑해보십시오. 당신 자신을 이기적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바라보시고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사랑해보십시오. 성령님께서 어떻게 임하시는지. 100% 보장합니다. 성령 충만을 받습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합시다. 사랑함으로 성령 충만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그리고 성령을 좇아 행하십시오. 갈라디아서 5:16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했는데 정확한 뜻은 성령 안에서 걸어가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늘 성령님을 구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받고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예수님을 주라 시인하는 자는 그 안에 성령님께서 계십니다.
그러기에 성령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도 말씀하십니다. 내 안에서 성령님께서 무언가를 나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무시하지 마십시오. '너, 그것 하면 안돼.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뜻이 아니야'라고 말씀하시면 그대로 하세요. 무엇인가를 하라고 하실 때도 무시하지 말고 순종하세요.
자꾸만 무시하고 불순종하면 우리는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자, 즉 우리 안에 뿌리 깊은 죄성과 탐욕을 쫓아가는 자가 되고 맙니다.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세요. 성경 말씀을 통해, 설교를 통해 말씀하시는 그 음성을 들으시고 내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 순종하십시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거하시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구하십시오. 사모하십시오. 성경은 말씀합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어요. 구하라고, 사모하라고. 왜 성령 충만을 받지 못하느냐? 게을러서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성경도 보지 않고 순종도 안하기 때문입니다. 혹은 왜 구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왜 우리가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하는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구하십시오. 사모하십시오. 사모하는 자, 찾는 자를 만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았던 대표적인 분 중에 한 분이 무디 목사님입니다. 그분의 일대기와 사역을 보면 정말 성령 충만한 삶을 사셨던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분이 늘 했던 말이 있습니다.
"나는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나 자신에 대한 무력감을 더욱 더 처절하게 느낀다. 내가 잠깐이라도 이기심과 교만으로 채워지는 그 순간, 나는 다시 육신의 사람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나는 때마다 시간마다 엎드려서 나를 비우게 해달라고, 나 자신을 포기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나의 이기심과 교만을 포기하는 그 순간마다 성령님은 다시 내게 임하시고 나를 채워주신다.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주께서 원하시는 일들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마음에 와 닿는 고백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무디 목사님이 능력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믿고 은혜도 받고 성령의 능력도 경험하지만 살다보면 무력감과 연약함을 느끼고 그럴 때마다 다시 육신의 사람으로 되돌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무디 목사님처럼 엎드려 기도함으로 성령님께서 임하시도록 그분을 사모하며 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성령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나 능력의 사람으로 또한 예수님 닮아가는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섬기는 교회 역시 많은 연약함과 부족함이 있지만 성령님의 능력과 은혜로 날로 새로워져서 성령 충만한 공동체, 주님께서 그토록 원하시는 바로 그 교회로 세워져 나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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