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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식도 본질의 문제다

마태복음 이익환 목사............... 조회 수 2280 추천 수 0 2013.09.20 19:2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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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6:16-18 
설교자 : 류공석 목사 
참고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금식도 본질의 문제다
2010년 7월 31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마태복음 6:16-18

  제가 이스라엘에 대해 표현할 때 자주 쓰는 말이 있는데, ‘이 땅 자체가 바이블이다.’라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시는지요? 단순히 성지이기 때문에 이 땅 자체가 성경이란 말이 아닙니다.

  이 말에 대해 지난번에 우리 청년 중에 부모님이 방문하신 적이 있는데, 아버님이 이 말을 금방 이해하시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경상남북도 합친 것 밖에 되지 않는 이 땅에 얼마나 다양한 자연환경과 식생이 존재합니까?

  생명력이 꿈틀대는 갈릴리 호수가 있는 반면 같은 요단강 줄기임에도 어떠한 생물도 살 수 없는 죽은 바다 사해가 있고, 사막과 같은 네게브 광야가 있는가 하면 텔 단이나 훌라 호수처럼 물댄 동산처럼 물이 풍부한 지역도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 찾아보기 힘든 유대광야가 있는가 하면 우리나라 강원도 삼림을 연상케 하는 갈릴리 북부의 산악지대도 있습니다. 규모는 작지만 그랜드케년 같은 계곡도 있습니다. 마치 전 세계를 한군데 모아놓은 듯 한 곳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그 안에 동물들이 있고 식물들이 있습니다. 들에 핀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에도 주님의 말씀이 담겨 있고, 공중에 나는 새에도, 광야에서 발견하게 되는 여우에게서도 주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지금도 성경시대의 관습을 지키며 살아가는 유대인들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땅 자체가 성경’이라고 할 수 있고,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자연환경을 통해 말씀하신 것을 성경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스라엘의 자연환경 중에 제일 좋아하는 곳은 광야입니다. 특별히 유대광야입니다. 우리 교회를 맡으면서 예루살렘을 떠나 텔아비브 지역으로 이사를 왔는데, 제일 아쉬웠던 것은 유대광야를 자주 못 보게 된 것입니다. 그때 살던 아파트 위에만 올라가면 유대광야가 보였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고 1-20분 내로 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다른 분들도 그러한 것 같아요. 많은 분들이 유대광야를 좋아하거나 강한 인상을 받습니다. 서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는 나무들도 제법 있고 했는데, 산 정상에 있는 예루살렘을 넘어 동쪽으로 내려가자마자 나무라고는 거의 없는 황량한 구릉지대가 나오니까 우선은 놀라기도 하면서 강한 인상을 받습니다. 시간을 내어 유대광야 전망대나 광야 속으로 들어가서 얼마간 있다보면 유대광야만이 줄 수 있는 아주 독특한 느낌과 영성을 깨닫게 됩니다.

  한번은 제가 유대광야 전망대에서 사람들에게 물은 적이 있습니다. ‘만일 당신 혼자 저 광야 한복판에 있다고 하면 어떤 기분이 들 것 같은가?’하는 질문이었습니다. ‘무서울 것이다, 외로울 것이다, 외롭겠지만 낭만적일 것 같다, 보기는 좋은데 혼자 있고 싶지는 않다’그런 대답들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나중에 가족과 함께 잠시 들렸을 때 아내에게 똑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더군요. ‘홀딱 벗은 느낌일 것 같다.’

  명답 아닙니까? 저는 그렇게 받아들였습니다. 유대광야 한복판에 나 혼자 있다라고 생각해 보십시오. 유대광야는 그 기반암이 백악암이고 나무가 없어서 밝습니다. 겨울 우기 때 비 온 후에 광야를 보면 햇빛을 반사하는데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밤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달이 뜨면 다른 지역보다 유대광야는 더 밝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없습니다. 베두윈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들이 있는 지역은 근처에 샘이 있는 곳입니다.

이러한 곳에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철저하게 나 혼자뿐입니다. 누군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과 나만 있는 곳이 바로 유대광야입니다. 나무도 없기에 숨을 곳도 없고 가릴 것도 없습니다. 그런 곳에 나 혼자 있다고 하면 그 느낌은 아내가 말한 것처럼 홀딱 벗은 느낌일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유대광야는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여겨져 왔습니다. 성경시대 때 유대인들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깊은 기도를 드리기 위해 광야로 들어갔고, 에세네파 공동체가 유대광야나 인접한 쿰란 등으로 들어간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유대광야로 들어가 40일 동안 금식하신 이유도 이러한 유대적인 인식과 관련이 있습니다. 40일 동안 철저하게 혼자일 수 있는 공간이 바로 유대광야였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부 하나님과 앞으로 이루실 인류 구원의 길에만 집중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이후 여러 수도원들이 유대광야에 세워졌고, 그것이 기독교의 수도원의 원형이 된 것입니다.

  광야는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존재하는 공간입니다. 인간에 대한 어떠한 의식이 없는 곳입니다. 이러한 개념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골방의 기도입니다. 마태복음 6:5-6에서 예수님께서는 기도할 때에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외식적인 기도를 하지 말고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골방이라는 공간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기도, 광야에서 드리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 앞과 뒤에 있는 구제와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제할 대 외식하는 사람처럼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고, 금식 역시 외식하는 자들처럼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 하십니다. 마치 유대광야 한복판에서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면서 드리는 그러한 금식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제와 기도와 금식, 이 세 가지는 예수님 당시 유대교에 있어서 경건생활의 중심에 해당하는 것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구제는 공의를 뜻하는 쩨데카로써 가난한 자들,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 대한 구제를 통해 하나님의 쩨데카, 공의를 이루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불공평한 세상을 고치는 티쿤 하올람에 참여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구제가 경건생활에 있어 필수적인 것으로 강조가 되었고, 이와 더불어 기도와 금식이 강조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 가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책망하신 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진실성이 결여된 외식적인 경건주의였습니다. 경건생활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칭찬받고 존경을 받으려고 하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집중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이 더 익숙합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배우면서 자라왔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배워왔고, 어떤 경우에는 아닌 척 해야 한다고 배워왔습니다. 부모님들이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남한데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말입니다. 특히 집안일에 대해서는 말이죠. 이렇게 저렇게 포장되어 자라왔습니다. 거기다가 우리나라의 경우는 체면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더 포장되고 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사는 것을 배웁니다.

  그래서인지 일기조차도 남을 의식하면서 쓴다고 합니다. 나중에 누군가가 볼 것을 생각하면서 일기를 쓰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지요.

  어느 정도는 필요합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제 멋대로 하는 것보다는 낫지요. 체면문화의 부정적인 면이 많지만 한편으로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관계의 진실성을 깬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너무 포장된 것이 많아서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를 이야기하는데 개운칠 않습니다. 관계에 있어 그 이상 진전되기가 참 어렵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그 겹겹이 쌓여있는 껍질을 다 벗겨버리고 싶은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기는 하는데 무언가 겹겹이 쌓여있는 포장된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내가 이것저것으로 포장되어 있으니 어찌 하나님과 진실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온전히 맺을 수가 있겠습니까? 언 듯 보면 신앙이 좋은 것 같습니다. 예배도 잘 드리는 것 같고 교회 봉사도 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무언가에 막혀 있습니다. 하나님께 잘 나아가질 못합니다. 삐걱합니다. 시험에 듭니다. 진실성이 결여된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포장들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다름 사람들을 의식하면서 살아왔고 그래야 한다고 배워왔고,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포장하고 위장하고 거짓되게 만드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관계의 진실성을 깨뜨립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성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경건생활 조차도 이것으로 인해 그 진실성이 위협을 받습니다. 다 벗겨버려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다른 것 아닙니다.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는 나를 벗겨내는 것입니다. 하나하나 벗겨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서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과 나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생활이고 경건생활입니다.

  오늘은 금식에 대한 말씀인데, 앞에 있는 구제와 기도와 더불어 이 셋은 아주 좋은 것입니다. 마땅히 해야 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진실성의 결여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서 하는 구제와 기도와 금식, 그리고 그것을 하는 목적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존경받고자 하는 투명하지 않은 목적이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경건한 유대인들의 경우 금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원래의 금식은 욤 키푸르, 대속죄일에 하는 금식이었습니다. 유대력으로 티쉬레이월 10일, 지금의 태양력으로 하면 9월 중순에서 10월 초 정도인데, 이때는 지난 일년 동안의 죄를 회개하는 날이기 때문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금식을 하면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하나님의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이러한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서 해마다 욤 키푸르, 대속죄일이 되면 종교적인 유대인들이나 관습적인 유대인들(Traditional Jewish)들은 금식을 합니다.

  이외에도 성경에서 국가적 재난(삿20:26)이나, 병들었을 때(시35:13), 애곡할 때(삼상31:13), 회개할 때(왕상21:27), 위험이 임박할 때(대하20:3)에 금식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성전 파괴가 자신들의 죄로 인한 것임을 깨닫고 회개의 뜻으로 그리고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는 의미로 금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유대교에서 지키고 있는 금식일을 보면 욤 키푸르 외에 다섯 번의 공식적인 금식일이 있는데, 대부분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관련된 것들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티샤 베아브(תשעה באב), 아브월 제 9일 금식일로 두 번의 성전 파괴를 기억하며 금식합니다.  

  이 외에도 추가적인 금식 전통이 생겼는데, 주로 바리새파 유대교인들이 그러했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 목요일과 월요일에 금식을 했는데, 이는 모세가 시내산에 율법을 받으러간 날이 목요일이고 그 율법을 받아서 내려온 날이 월요일이라고 주장하면서 생긴 것입니다.

  이와 관련된 것이 바로 오랄 토라(Oral Torah), 우리말로 하면 구전 토라인데, 유대교의 한 분파인 바리새파 유대교가 발전을 하면서 많은 현자들과 랍비들이 성경을 실생활과 연결해서 해석한 것들이 구전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그것들을 오랄 토라라고 불렀는데, 그것을 집대성하여 성문서로 만든 것이 바로 미쉬나이고, 미쉬나에 더 많은 판례들과 다양한 해석들이 추가해서 수십 권으로 편집된 것이 바로 탈무드입니다.

  이러한 현자들과 랍비들의 성경해석에 대한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주장하게 된 개념이 바로 오랄 토라입니다. 즉 모세가 시내산에서 기록된 토라, Written Torah와 더불어 Oral Torah도 받았다는 것입니다.

  전에 소개한 바 있는 미쉬나의 제 4부 9편에 들어있는 '피르케이 아봇', 우리말로 선조들의 어록이라고 할 수 있는 책에 보면 그 오랄 토라가 여호수아에게 전해졌고, 여호수아는 장로들에게, 장로들은 예언자들에게, 예언자들은 대의회 의원들(120명으로 구성된 유대교 현자들의 모임을 말함)에게 넘겨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전 2세기경에 형성된 랍비들이 현자들을 계승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유대교를 다른 말로 하면 랍비 유대교인데, 랍비들의 성경 해석에 대한 권위를 세우기 위해 생겨난 것이 바로 오랄 토라의 개념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유대교 역시 랍비 유대교의 전통에 있기에 구약 성경과 더불어 오랄 토라에 해당하는 미쉬나, 탈무드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이런 오랄 토라의 권위를 내세우는 흐름에서 생겨난 금식이 바로 일주일에 두 번하는 금식입니다. 즉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간 목요일과 율법을 받아서 내려온 날 월요일을 기념해서 금식일로 지켰습니다. 이러한 내용이 누가복음 18:12에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외식적인 기도를 하는 바리새인을 책망하시면서 하신 말씀인데, 거기에 보면 바리새인이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예수님 당시의 금식의 한 형태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이처럼 당시 경건하다고 스스로를 내세우는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이처럼 많은 금식일을 지켰는데, 외경 유딧서 8:6에 보면 일주일에 절반 이상을 금식한 예도 있습니다.

  자, 생각해 보십시오. 욤 키푸르와 성전파괴일 등의 공식적인 금식일 외에 일주일에 이틀을 금식합니다. 일 년에 백일 이상을 금식했다는 것인데, 이렇게 금식하면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받을까요? 대단하다는 말 듣지 않았겠습니까? 대단한 사람이다, 경건한 사람이다, 정말 신앙이 좋은 사람이란 인상을 사람들에게 받았을 것이고 그에 걸맞는 칭찬과 존경을 받았을 것이라는 겁니다.

  게다가 목요일과 월요일은 시장이 서는 날입니다. 금요일은 오후부터 안식일이 시작되기 때문에 목요일에 장이 서고, 안식일이 지나고 그 중간쯤 되는 월요일에 장이 섰습니다. 지금도 슈퍼마켓에 가면 목요일과 월요일에 사람들이 많은 것을 봅니다. 물론 요즘은 생활이 바빠서 금요일에 제일 붐비지만 안식일을 기점으로 일주일이 진행되는 이스라엘에서는 목요일과 월요일에 장이 서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금식일과 딱 맞아떨어집니다. 큰 장이 서는 목요일과 월요일에 금식을 합니다. 이것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줘야 합니다. 내가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이 뭘까요? 금식하는 모습으로 나가는 겁니다.

성경에서 금식을 할 때, 금식이란 말 자체가 '내 영혼을 괴롭게 한다'는 뜻을 갖고 있는, 금식은 대개 죄의 회개를 동반하기 때문에 오래된 옷을 입거나 더 확실하게 보이기 위해 옷을 찟기도 했고 머리에 재를 둘러쓰기도 했고, 얼굴이 창백해 보이도록 화장을 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얼굴을 흉하게 했다는 것이지요. 왜요? 무엇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이것이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외식하는 금식의 행태입니다.

  예수님께서 책망하신 것은 결국 방향성입니다. 금식의 방향성이 문제라는 겁니다. 전에 기도에 대한 말씀을 전하면서 '카바나가 기도를 결정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유대교 문헌에 나오는 내용인데, 카바나는 방향, 의도, 목적을 의미합니다. 즉 기도의 카바나, 방향성이 참된 기도, 진실한 기도를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옳은 말입니다. 금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식은 기도의 다른 형태입니다. 금식의 카바나, 그 방향성이 잘못되면 그 금식은 이처럼 외식적인 아무 의미 없는 행위가 되어 버리고 만다는 것입니다.

  기도와 금식의 카바나, 방향성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기도와 금식의 카바나, 방향성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다른 사람이 카바나가 되고 나 자신의 욕심이 카바나가 될 때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순수한 의도에서 금식을 했을 것입니다. 금식은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과 회개,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에 대한 갈망이기에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점점 관습화되고 금식일 많아지면서 경건한 유대교인이라면 당연히 많은 금식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자신이 경건한 유대인이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 수많은 금식일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외식적인 차원으로 변질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한국 교회 역시 금식이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했습니다. 누가 20일, 40일 금식했다 하면 아주 신앙이 좋고 영적으로 높은 사람으로 인식되고 존경받기도 했습니다. 40일 금식한 목사님은 아주 신령하고 그렇지 않은 목사님은 덜 신령한 분으로 인식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공공연하게 자신이 40일 금식을 했고, 그것도 몇 번 했다는 것을 알린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른 모든 경건생활이 마찬가지지만 금식에 있어 중요한 것은 카바나, 방향성입니다. 그 방향성은 100% 하나님께 모아져야 합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한 방향성은 0%도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17절)

  앞서 금식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머리에 먼지나 재를 덮어씌우고 얼굴을 창백하게 보이기 위해 화장을 하기도 했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단순히 금식하는 티를 내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라, 금식의 카바나를 철저하게 100% 하나님께 향하도록 집중하라는 의미입니다.

  사실 금식을 하게 되면 사람들이 저절로 알게 됩니다. 하루 이틀 금식하는 것은 잘 모르겠지만 오일 이상 금식을 하면 알게 됩니다. 10일 이상의 장기 금식의 경우는 우선 체중이 빠지기 때문에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식할 때의 방향성은 100%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안 그러면 금식할 때도 은근히 자신이 금식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게 되기고 하고, 하고 난 후에 금식한 것이 자기 의가 되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내가 금식을 했었다라고 밝힐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의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금식하는 동안의 카바나,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방향성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경건 생활이 마찬가지입니다. 기도하는 것, 이것도 그 방향성을 놓치면 자기 의가 됩니다. 구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는 쩨데카가 아니라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외식과 체면치레가 되고 맙니다.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기껏 해놓고 자기 자랑, 자기만족이 되거나 시험 들거나 시험 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결국 문제는 카바나, 방향성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경주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과의 씨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카바나, 방향성입니다. 이것이 자칫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는 것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특히 교회 오래 다니신 분들, 봉사 열심히 하시는 분들, 직분자들이 그런 위험성이 있습니다. 늘 확인해야 합니다. 자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지, 내가 제대로 믿고 있는지를 돌아보고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방향이 비뚤어져 있으면 다시 바꿔야 하고, 잘못 가고 있으면 돌이켜야 합니다. 그래서 그 방향이 다시금 하나님께 향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변질되지 않습니다. 그래야 굳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야 위선적인 경건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금식에 있어 그 방향성이 잘못된 예 중에 하나가 보상적인 금식행위입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한국 교인들에게 있어 금식은 비장의 무기라고 말입니다. 무언가 안되면, 무언가를 원할 때 꺼내는 비장의 카드가 바로 금식이라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내가 금식을 하는 이 열심을 보시고 내 소원을 들어달라는 일종의 보상행위 내지는 비장의 카드처럼 금식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금식기도 했다, 열심히 하나님께 금식하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들어주셨다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금식하면 빨리 응답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인생의 어려움과 고난, 슬픔이 올 때 금식하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까? 금식을 통해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질 수는 있지만, 단순히 무언가를 받기 위해 금식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건 제대로 된 금식이 아닙니다. 뭡니까? 돈 놓고 돈 먹기식 아닙니까? 좀 과한 표현인지 모르지만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금식뿐만 아니라 십일조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얼마 십일조를 하니까 더 많은 십일조를 하게 하시더라, 그러니 십일조 하라는 것이지요. 그럼 십일조 적어지면 안할 겁니까?

  무슨 보상을 받기 위해 해서는 안 됩니다. 순수해야 합니다. 하나님에게서 무언가를 얻어내기 위해서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건 복음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하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의 어떤 행위에 따라 하나님이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만일 이런 마음으로 금식을 한다면 무엇과 같은지 아십니까? 자식이 컴퓨터 안사주면 밥 안 먹어 하고 문 닫고 40일 동안 안 나오겠다는 것과 같습니다. 배 째라는 거죠. 그래서 부모가 문 앞에 노트북을 갖다 놨다, 이것이 응답받은 것입니까?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아주 수준 낮은 겁니다. 아빠, 엄마 이러이러해서 주세요, 그래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좀 그러니까 조금 더 기다려주렴, 제가 용돈을 좀 모았는데 부족해요, 그러나 아빠가 보태주세요... 뭐 그래야지 항상 문 닫고 들어가서 굶는 관계라면 그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입니까? 아빠가 주긴 주지요. 그러나 정상적인 관계는 아닙니다. 무슨 문제가 있다, 그럼 금식해 봐, 그럼 들어주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금식은 언제 하는가? 16절 말씀을 뒤집어 읽으면 됩니다. 슬픈 일이 생겼을 때, 얼굴을 흉하게 하는 일이 생겼을 때 하는 것입니다. 내 삶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슬픈 기색이 되고 얼굴이 흉하게 될 때 그때 금식하라는 겁니다. 정말 인생의 큰 문제가 생겼을 때는 음식 제대로 못 먹습니다. 안 넘어갑니다. 그때는 남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머리가 엉망이 되고 얼굴색이 흉하게 됩니다. 그때 금식하라는 겁니다.

  이때 중요한 것이 바로 카바나, 방향성이라는 겁니다. 단순히 이 문제를 해결 받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무언가를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께 집중하는 방향성을 가지고 금식하라는 것입니다. 금식은 음식을 끊는 것입니다. 먹는 것은 내 생명과 연관된 문제입니다. 그것을 끊는다는 것은 내 생명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존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에게는 그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만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육으로는 할 수 없으니 육에게 생명을 주는 음식을 끊으며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는 것입니다. 살고 죽는 것이 주님께 달려 있으니 내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긍휼만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금식을 하는 이유는 나의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이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금식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식의 카바나, 방향성입니다.

  금식의 카바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소망입니다.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이 결단과 고백을 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왜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철저히 종의 몸을 입고 순종하러 오셨습니다. 그래서 먼저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탄의 시험을 통과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40일 금식 했더니 사탄을 이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집중한 금식이 있었기에 사탄을 대적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40일 금식을 하고 40일 금식 몇 번을 해도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는 금식,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붙잡고 하나님만이 내 소망이라는 이 결단이 없는 금식이라면 오히려 사탄에게 걸려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보지 않습니까? 장기 금식했다가 이상해지는 사람들 있잖아요. 이단 사이비 교주들이 자랑하는 40일 금식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금식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금식은 음식을 끊는다는 것인데, 사람에게 있어 가장 강한 본능이 먹는 것입니다. 식욕이 가장 강합니다. 우선 먹어야 합니다. 배부르고 나야 다른 것을 합니다. 먹는 것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지만 그만큼 즐거운 것이 또한 먹는 것입니다. 먹으면서 먹을 것을 이야기하면서 즐거워하는 것이 우리 아닙니까? 이 먹는 즐거움이 큽니다.

  그런데 그것을 끊는다는 것은 내 인생의 즐거움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것을 고백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금식을 할 때는 이 세상을 즐기는 낙이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금식이라는 것은 세상의 즐거움을 쫓지 않고 만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의 만족이고 나의 기쁨이며 소망이라는 고백이 바로 금식입니다.

  그렇게 금식해 보십시오. 삶의 문제가 있을 때도 금식을 하고, 평탄하고 문제가 없을 때도 금식해 보십시오. 어떠한 때든 오직 하나님께 그 방향을 집중하십시오. 내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문제 앞에서 하나님께만 집중하십시오. 이 땅을 살아가는 힘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금식하십시오. 너무 평탄하여 영적인 감각이 무뎌지는 것 같을 때 금식하십시오. 음식이 주는 즐거움을 끊으면서 나의 즐거움과 소망이 먹는 데 있지 않고, 세상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며 주님만을 바라보며 금식하십시오. 금식은 이 때 하는 것입니다. 단순히 내 목적과 이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리고 금식의 최종적인 방향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관계회복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기도와 금식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응답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과 때에 따라 주어지게 됩니다.

  저는 청년 때 금식기도를 자주 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저는 먹는 즐거움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금식의 카바나가 다소 문제가 있었어요. 제가 청년 때 금식을 한 이유는 다른 것 아니었습니다. 나를 사용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내 인생의 길을 열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금식을 통해 무언가를 얻기 위했던 것 같아요. 물론 금식 기도를 통해 은혜도 받고 신앙이 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금식기도를 한 이유는 다른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응답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정작 기도의 응답은 내가 원하지 않은 금식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복막염 수술과 이어진 장마비 증상으로 거의 40일 동안을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내가 원하지 않은 금식 아닌 금식 때 하나님의 응답이 주어졌습니다. 그 응답이 무엇인지는 이미 신년수련회 때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내가 하나님 앞에 올바른 존재로 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였습니다. 나는 무려 20대 시절 7년 동안을 doing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했습니다. 그래서 금식도 하고 산기도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은 나의 doing이 아니라 나의 being이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 어떤 진로를 택하고 어떤 직업을 가지느냐가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being, 어떤 존재가 되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온전하라'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었습니다.

  그 후 저의 삶의 방향과 목표는 doing이 아니라 being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는 신앙인, 주님 닮아가는 목회자가 되는 것이 저이 삶의 방향이고 목표입니다. 그 이후에도 가끔씩 금식을 하지만 금식의 방향성 역시 하나님 앞에서의 being입니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한 것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길 원하고, 주님을 더 닮아가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구합니다. 물론 내게 능력을 달라고, 이러한 문제가 있는데 긍휼을 베풀어달라고 구하지만 하나님 앞에서의 being이 우선입니다.

  지난 주 형제 한 명이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에 있는 동안 doing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던 친구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알았다며 떠난 형제인데, 우리 부부가 볼 때는 무엇을 해야 할지를 아직 모르는 상태였습니다. 그 형제에게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네가 자장면을 먹던 냉면을 먹던 다 좋아하신다. 너는 자장면을 먹을 것이냐 냉면을 먹을 것이냐에 대해 그토록 고민하며 매어달리지만 하나님의 관심사는 자장면도 냉면도 아니라 너다. 네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서 너와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다. 너의 doing이 아니라 너의 being이 하나님의 관심사다. 하나님 앞에서의 being과의 관계에 집중해라. 너의 being이 제대로 되어야 너의 doing의 문제도 풀린다. 무엇을 하던 네가 좋아하는 일, 만족하는 일을 하되 최우선 순위는 하나님 앞에 어떠한 존재로 서는 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올바른 being이 되는데 집중하라.'

  이 말을 알아들었는지 정말 최종적인 해결을 받았다며 환한 얼굴로 떠났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문제는 방향성입니다. 그리고 바른 방향성은 본질에 대한 바른 이해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본질에 대한 것입니다. 구제의 본질이 무엇인지,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지, 금식의 본질이 무엇인지, 안식일을 지키는 것, 율법을 지키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우쳐 주고 계십니다.

  금식도 결국은 본질의 문제인데, 이 본질이 중요합니다. 이 본질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부터 바른 방향성이 나옵니다. 본질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나 해당됩니다. 목사도 목회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목회의 방향성이 바르게 잡힙니다. 성도들도 신앙생활과 경건, 봉사와 섬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바른 방향성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고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바른 방향성과 목표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본질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 본질에 집중하는 인생이 되십시오. 하나님이 본질입니다.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본질입니다. 먹고 사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가 내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떤 being이 되느냐가 본질입니다. 이 본질에 집중하십시오. 거기에서 바른 방향성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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