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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6:31-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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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목적이 이끄는 삶
2010년 8월 28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6:31-34
오늘 설교 제목을 보고 어느 책이 생각나는 분들이 있을 것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 미국 새들백 교회 릭 워렌 목사가 쓴 책이다. 미국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책이라고 할 정도로 베스트셀러이고, 이 책을 토대로 한 성경공부 교재와 교회 부흥 전략까지 나왔을 정도다.
이 제목을 그대로 따온 이유는 그 책의 어떤 내용을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본문의 내용이 그 책 제목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즉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방향과 결과가 전혀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이끄는 무언가가 있다. 그것을 동기라고도 할 수 있고 목표, 목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을 일전에 한번 소개한 적이 있는 치유목회상담원을 섬기고 있는 정태기 목사의 경우는‘마음의 운전사’라고 정의한다. 내 안에 운전사가 있는데 그 운전사가 이끄는 대로 내 인생이 이끌려간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냥 사는 것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니까 사는 것이지 하고 말하는데 그냥 사는 것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운전사가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문제는 내 안에 있는 운전사, 내 마음의 운전사가 누구냐, 그 상태가 어떠냐에 따라 내 인생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정태기 목사는 내 마음의 운전사를 자아상으로 정의한다. 나의 자아상이 손상돼있고 찌그러져있으면 그 못난 자아가 나의 인생을 못나게 이끌고, 나의 자아상이 건강하고 행복하면 그 행복한 자아가 나를 행복하게 이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행복한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 있는 운전사, 내 자아가 건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 자아를 치유하고 건강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상처 나고 못난 자아가 치료되고 회복되고 건강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정태기 목사의 이 말에 100% 동의한다. 정태기 목사도 경험했던 것처럼 나 역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인해 내 못나고 상처난 자아가 치유되었고 회복되었고 다듬어졌고 그래서 건강해졌고 더 건강해지고 있다. 그래서 행복하고, 내 안이 행복하니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정태기 교수가 말하고 있는 건강한 내 마음의 운전사는 다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난 나다. 나를 사랑하사 자기의 외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난 나다.
은혜 없이는 내 마음의 운전사가 치료될 수 없다. 용서해주시고 품어주시고 안아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나야만 내 마음의 운전사가 치료될 수 있고, 나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닿아야지만 모나고 삐뚤빼뚤하고 찌그러진 내 마음의 운전사가 다듬어질 수 있다. 나를 온 우주보다도 귀하게 보시고 나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야지만 외롭고 고집 세고 삐딱하고 못된 내 마음의 운전사가 건강해질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이 은혜가 우리에게 너무나 필요하다. 은혜 없으면 인생은 인생이 아니다. 이 땅에 태어나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하고 이후에도 날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진정한 평화도 누릴 수 없다. 은혜 없이는 나 자신이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감격을 누릴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건강하게 하고 우리에게 평화를 주고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의 방향도 달라지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도 달라진다.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주인자리에서 내려오게 한다. 그 전까지는 내가 나의 주인이었다. 못나고 고집 세고 탐욕스럽고 음란하고 외롭고 삐딱하고 삐뚤빼뚤한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나를 주인자리에서 내려오게 한다. 그래서 거듭난 사람은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라고, 나의 왕이시라고 그렇게 고백한다. 저절로 그런 고백이 나오게 된다. 나의 왕이시며 나의 주인이신 예수님, 나를 다스려 달라고 저절로 고백하고 소원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은혜다.
예수 믿은 후에 여전히 내가 주인 되어 내 멋대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지 않는 삶을 산다면, 그것은 지금 은혜의 위기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예전의 모습처럼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살고 있다면 지금 은혜의 위기다. 나에게서 예수 믿기 전의 모습, 옛사람의 모습이 자꾸 나타난다면 지금 은혜의 위기다.
은혜의 위기, 지금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메말라 있다는 것이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도 돈도 실적도 성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다.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내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지 말이다. 은혜의 수면 아래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덮어야 한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교회를 다니면서도 내가 주인 되어 살고 있고 하나님이 주인 되시는 삶을 살고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은혜의 위기임을 기억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그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왜 우리는 자주 은혜의 위기를 경험하는가? 하나님의 은혜는 늘 나를 향해 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의 은혜는 변함이 없다. 문제는 나다. 예수님 영접하고 나서는 내 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그런데 이 사랑이 더 자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더 풍성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주님처럼 한결같아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너무나 쉽게 기분과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려고 하라. 하나님을 더 사랑하려고 하라. 거기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다. 그 하나님의 은혜가 나를 주인자리에서 내려오게 한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려는 그 사모함과 그 마음이 나를 내 인생의 주인자리에서 내려오게 한다.
결국 내 인생의 주인은 둘 중 하나다. 나 자신이던가 주님이시다. 나 자신이 주인 될 때와 주님이 주인 되실 때 내 인생의 방향은 달라지고 목적도 달라진다. 주님께서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실 때는 오늘 본문처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삶의 방향과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나 자신이 내 인생의 주인일 때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문제가 내 인생의 방향이고 목적이 된다.
그것을 달리 말하면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구하는’ 삶이 된다. 내가 왕이 되는 나라는 뻔하다. 오로지 관심은 나의 안녕과 부귀영화다. 기본적으로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되어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더 가져야 하고 더 누려야 하고 더 높아져야 하고 더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나의 왕국이 부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구하는 삶에는 나의 욕심과 죄성이 삶을 이끈다. 그래서 나의 죄성과 욕심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게 된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직분을 맡아서 봉사를 한다고 해도, 여전히 주님이 아닌 내가 나의 주인이 되면 내 인생의 방향과 목적은 달라지지 않는다. 여전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의 차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여전히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구하는 삶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니 더 고약해진다.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구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더해주셔야 한다. ‘내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나에게 더해주시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가 주인이 되어버리면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구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더해주셔야 하는 것이 되고 만다.
하나님은 그저 나의 안녕과 부귀영화를 위해 존재하게 된다. 용서의 하나님을 나의 잘못된 마음과 삶을 적당히 눈감아 주는 하나님으로 만들고, 나의 그릇된 행동과 삶도 적당히 넘어가시는 타협하는 하나님으로 만들어버린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되고 만다. 예수 믿기 전보다 더 고약해졌다.
표현이 너무 과격한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자신을 돌아보고 주변을 돌아보라.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예수 믿지 않는다면 모를까,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이 인생의 주인 되어서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구하고 있지 않은가?
요즘 보면 성공에 열광한다. 흔히 말하는 기독교인의 성공이다. 대통령이 되고 장관이 되고 대사가 되고 대기업의 CEO가 되고 유명인사가 되는 것에 열광한다. 이것을 성공이라 하고 그 성공에 열광하고 부러워하고 목말라 한다.
이것이 정말 성공일까? 세상적인 기준으로는 성공이겠지만 예수 믿는 우리의 기준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무엇을 위한 성공인가? 누가 주인된 성공인가? 이 질문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대통령이 되고 장관, 대사, CEO가 되고 유명인사가 되어도 내가 주인 되어 나의 왕국과 나의 의를 구한 삶이라면 그것은 성공이 아니다. 더 고약해진다. 그러한 위치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거나 정반대인 경우가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굳이 들지 않아도 알 것이다.
성공에 맹목적으로 열광하지 말라. 너무 부러워하지 말고 목말라하지 말라.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추구해야 할 성공은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이다. 내가 아닌 주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 되셔서 그분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는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의 성공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성공이다.
성공의 가치관이 달라져야 한다. 생각을 바꾸고 기준을 바꾸라. 세상은 많이 가지고 더 높아지고 강해지는 것이 성공이라 하지만 그리스도인의 성공은 더 많이 나누어주는 것이고 더 낮아져 섬기는 것이고 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약해지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공이다.
하나님께서는 많이 나누어주는 자에게 더 많은 것을 맡기신다. 높아질수록 더 낮아져 섬기는 사람에게 더 많은 사람들을 붙여주신다. 강해질수록 하나님 앞에 약해지는 사람을 하나님은 높이신다. 사람들 앞에서도 자신의 힘을 남용하지 않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으로 사용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높이신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공이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 ‘이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는 의미다. 이 말씀의 의미를 잘 보라. 이 모든 것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의 문제, 즉 우리의 생존에 관한 필요만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모든 축복을 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모든 것’을 그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에 관한 것으로 이해하는데 그렇지 않다. 생존에 필요한 것을 포함한 모든 축복이다. 그 축복이 무엇인가?
더 많이 섬길 수 있는 복이다. 가장 큰 복은 주님 닮은 복, 주님 닮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을 주시는 복이다. 이것이 최고의 복이다. 그 외에 그것이 물질의 복일수도 있고 중요한 위치에 오르게 되는 복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물질의 복을 좋아하니, 그것에 대해 말하면, 이것은 단순히 물질의 복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이고 섬김을 위한 복이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물질의 복을 잘못 말해왔다. 누구를 위한 물질의 복인가? 나다. 나와 나의 가족을 위한 물질의 복이다. 그렇게 말해왔고 그렇게 구하고 있다. 그런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물질의 복이 고작 나와 나의 가족을 위한 것인가? 아니다.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과 바알이나 맘몬이나 불당이나 성황당에서 비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하나님을 맘몬으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시는 물질의 복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위한 복이다. 섬김을 위한 복이다. 하나님 나라는 섬김의 나라다. 예수께서는 섬기기 위해 오셨고 우리 역시 섬김을 위해 부르셨다.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섬김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그의 의’의 ‘뜻’이 아니라 ‘공의’다. 히브리어로 하면 쩨데카다. 쩨데카를 구제라는 말로 쓰는데 왜 그런지 전에 말씀드렸었다. 부한 자와 가난한 자로 나누어진 이 불공평한 세상을 구제를 통해 공평하게 만드는 것이 쩨데카다.
이 쩨데카라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은 불공평한 세상을 평등하게 만들기 원하시고 우리는 쩨데카, 구제를 통해 불공평한 세상을 고치는 ‘티쿤 하올람’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물질을 나누어주는 구제를 통해 이웃사랑을 실천하라 명하셨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 명하시는 내용이다.
무엇을 위한 물질의 복인가? 누구를 위한 물질의 복인가? 하나님 나라를 위한 복이다. 섬김을 위한 복이다. 이웃사랑을 위한 복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의 복을 그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허비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방탕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고, 이웃사랑을 위해 쓰라. 하나님께 드릴 것 마땅히 드려라. 이웃을 섬기는데 쓰라. 내가 누릴 수 있는 것보다 조금 불편해지라. 사랑의 섬김은 수고다. 불편함 없이, 수고 없이, 희생 없이 어찌 사랑의 섬김을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들의 올바른 물질관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복을 주신다. 하나님이 주인 되어서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들은 높아질수록 더 낮아져야 하고 그렇게 된다.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붙여주신다. 왜?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기면서 그들에게 선한 영향력, 영적 영향력, 도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라고! 이것이 바로 리더십이다.
많은 사람들이 리더는 대장이 되는 것이 생각하는데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리더십은 대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높아지는 것이 아니다. 낮아지는 것이고 섬기는 것이다. 높아질수록 낮아져서 섬기는 것이다. 거기에서 영향력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약한 자를 하나님은 강하게 하신다. 사람들 앞에서 힘을 남용하지 않는 자를 하나님은 높이신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통해서 더욱 더 당신의 나라와 의를 구하게 하신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통해서 영광 받으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복, ‘이 모든 것’에 포함되는 복이다.
이 복을 받고 싶지 않은가? 여러분 자신도 그렇고 우리 자녀들이 이러한 복을 받는 사람들이 되길 원하지 않는가? 이 복을 받은 인생이 진정으로 성공한 인생이고 우리가 부러워하고 갈망해야할 성공이다. 이제 더 이상 맹목적이고 세상적이고 이기적인 성공관을 버리라.
이러한 복들은 덤으로 주시는 복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에게 먹고 사는 생존의 필요뿐만 아니라 앞서 말한 그러한 복들을 덤으로 주신다는 것이다. 이 말은 저절로 따라온다는 말이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 때 이러한 삶의 필요와 복들이 저절로 따라온다는 말이다.
반대로 나 자신이 주인 되어서 나의 왕국과 나의 의를 구할 때는 정반대다. ‘이 모든 것들’이 내 인생의 목적이 되어버리고 만다. 오로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의 문제가 나의 인생의 목적이다. 공부하는 이유도 그렇고 취업하는 이유도 그렇고 일하는 이유도 이 문제다. 여기서 벗어나질 못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중요하지만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 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이렇게 살아갈 때 무언가를 얻을 수는 있다. 돈도 벌고 출세도 하고 나름대로 성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누릴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나의 왕국 나의 의를 위한 것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 다른 의미들을 부여한다. 가족을 위해서, 자기계발을 위해서, 사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국민을 위해서. 그럴까? 내가 나의 주인이 되는 한 그럴듯한 명분을 붙여도 결국은 나의 왕국과 나의 의를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한 성공은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는다. 그 성공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지도 않고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또한 나 자신이 주인 되어서 나의 왕국의 나의 의를 구할 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염려와 집착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오로지 나의 왕국과 나의 의를 구할 때는 이 염려와 집착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늘 염려다. 어려서는 부모에게서 떨어질까 염려하고, 나이가 들면서 공부에 대한 염려, 이성 친구에 대한 염려, 외모에 대한 염려, 진학에 대한 염려, 취업에 대한 염려, 결혼, 자녀, 경제문제, 노후문제, 건강 문제... 이 염려는 끊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아닌 하나님이 주인 되셔서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사는 사람은 염려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시다. 뭐가 두려운가? 지난번에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만 믿으면 된다. 하나님을 믿기에 하나님만 두려워하면 된다. 하나님을 믿기에 세상이 두렵지 않고 사람이 두렵지 않고 사탄도 두렵지 않다. 하나님을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염려하지 않는다.
지난주에 염려는 마치 안개와 같다고 했다. 어느 지역을 30미터로 덮을 수 있는 안개를 물로 바꾸면 겨우 물 한 컵에 불과하다고 말이다. 염려가 이와 같은데, 이러한 안개를 걷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그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해서 시내 광야에 있을 때 한 지파에 한 명씩 해서 가나안 땅에 정탐꾼을 보냈다. 가나안 땅을 두루 정탐한 후에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는 그 땅이 진정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지만 그 땅의 거민들은 장대하고 그들의 성읍들은 견고하다는 것이었다. 여기까지는 모두가 같았다.
그런데 그 다음 반응은 전혀 달라진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은 우리는 메뚜기 같고 그들의 성읍은 워낙 견고해서 우리가 결코 점령하지 못한다는 것이었고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우리가 광야에서 죽게 되었다고 통곡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의 염려와 두려움대로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들은 다르게 말한다.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민 14:9)
그들이라고 가나안 땅의 장대한 거민들과 견고한 성읍들을 보고 위압감을 느끼지 않았겠는가? 똑같이 느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이 있었다. 그러기에 똑같이 정탐해서 똑같은 것을 보았지만 믿음의 차이가 이처럼 전혀 다른 결과를 보인 것이다.
왜 이런 반응이 나타났는가? 다른 것 아니다. 믿음의 차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햇빛과 같다. 안개를 거두어내는 것은 햇빛이다. 아무리 두터운 안개도 햇빛이 비추면 이내 사라지고 만다. 열두 명이 똑 같이 가나안 땅을 정탐했지만 열 명에게는 믿음이 없었다. 그러니 염려와 두려움의 안개가 낄 수밖에. 우리의 마음과 삶에는 염려할만하고 두려워할만한 일들이나 상황은 늘 있다. 그것이 삶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태도를 보이는가 하는 것이다. 염려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안개에 갇혀 갈팡질팡, 안절부절못하며 마치 망한 것처럼 그러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기에 그 믿음의 햇빛으로 염려와 두려움의 안개를 걷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다. 하나님을 믿으라.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라. 그 믿음의 햇빛이 염려와 두려움의 안개를 걷어낼 것이다.
염려와 관련해서 내가 좋아하는 말이 '티테디오스'라고 하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초대교회 당시 성도들이 즐겨 사용했던 별명이었는데, ‘염려로부터 자유로운 사람, 해방된 사람’이란 뜻이다. '티테디오스 베드로', '티테디오스 도마' 이런 식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서로를 불렀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이 편했던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핍박을 받았다. 모든 재산을 빼앗겼고, 지하 무덤인 카타콤에 숨어 지내야만 했고, 순교까지 당했던 사람들이었다. 염려할 것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세상적인 시각에서 보면 염려투성이였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염려에서 자유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을까? 믿음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그 믿음과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염려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능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멋있지 않은가? "티테디오스 리" 여러분 역시 하나님께 대한 온전한 믿음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가운데 모든 염려로부터 자유하고 해방된 사람, 티테디오스들이 되길 축복한다.
집착도 마찬가지다. 내가 주인 될 때는 당연히 집착이 생긴다. 내 것이라 생각하니까 말이다. 집착은 사람을 참 힘들게 하고 고통을 준다. 이 집착은 늘 염려하고 평화가 없다. 물질에 대한 집착도 그렇고 사람에 대한 집착도 마찬가지다.
특히 자녀에 대해서 그러하다.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에 묶여 산다. 집착이다. 사랑하기에 집착하겠지만, 사랑과 집착은 다르다. 집착은 상대방의 목을 쥔다. 힘들게 한다. 자신도 힘들어진다. 실망하고 좌절하고 분노하게 된다. 사랑하되 집착은 버려야 한다. 내 자식 내 것 아니다. 늘 비우라. 이것이 쉽지 않다. 나 역시 부모의 입장이라 이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그 훈련을 해야 한다.
우리 부부는 종종 이 이야기를 한다. 얘네들 우리 자식 아니라고 말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하나님의 사람들로 잘 키워달라고 맡겨주신 이들이 바로 자녀들이다. 우리 아이들의 주인은 우리 부부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이것 확인하고 기억해야 한다. 사랑하고 잘 키우되 집착에서는 벗어나야 한다. 안 그러면 나중에 커서 결혼을 해서도 집착하게 된다. 그래서 발생하는 문제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이것은 한 예지만 모든 것이 그러하다. 내가 주인될 때 집착이 생기고 여기서 벗어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인이 될 때, 정말 내가 그것을 인정하는 삶을 살 때는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나님을 주인 삼아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함으로 염려와 집착에서 벗어나길 바란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내 인생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나의 목적이 될 때 그것이 내 인생을 행복한 인생으로, 성공하는 인생으로, 복된 인생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으로 이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 되는 것이다.
목적이 잘못되면 내 인생도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 된다. 오늘 본문과 연결해서 볼 수 있는 말씀이 요한3서 2절 말씀이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는 것이 아니다. 네 영혼이 잘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뒤의 것에 관심을 갖기만 순서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영혼이 잘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주인으로 삼으라. 그분을 알고 그분의 경외하고 그분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을 인생의 목적이 되게 하라. 그것이 당신의 영혼을 잘 되게 할 것이다. 당신의 영혼을 치유하고 자유롭게 하고 풍요롭고 하게 평화롭고 행복하게 할 것이다. 당신의 영혼이 잘 되면 범사에 잘 되고 강건케 되는 복은 덤으로 따라온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과 같은 의미 아닌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내가 주인 자리에서 내려와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인이요 왕으로 삼고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때 내 영혼이 잘 되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게 되는 ‘이 모든 것’의 복이 덤으로 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마치면서 여러분들에게 매우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이 질문에 스스로 답해보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의 주인은 누구인가?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가? 내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무엇이 내 인생을 이끌고 있는가? 나 자신인가 하나님이신가? 나의 나라와 나의 의인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인가? 내 영혼이 잘 되는 것이 나의 우선순위인가? 그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는 것이 우선순위인가?
같이 찬양하며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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