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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7: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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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기도의 초점
2010년 9월 18일(토)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7:7-11
오늘 본문, 특히 7-8절은 아주 유명한 말씀이다. 동시에 오해를 많이 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그 이해에 있어 폭이 좁은 경우도 많다.
오늘 본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기도의 응답으로 이해하고 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그러면 반드시 응답해주신다는 것이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요점을 놓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말씀은 기도의 초점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시다. 우리가 기도하는 데 있어서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저 단순히 무언가를 얻기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기도를 하고 있는가, 아니면 기도의 보다 본질적인 목적에 초점을 맞추고 기도하고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기도의 초점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 중에 첫째를 오늘 보고 두 번째는 다음 주에 보려고 한다.
그 첫째는, 우리에게 필요한 요구에 초점을 맞추는 기도가 아닌 아버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기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기도를 하라는 것이다.
9-11절을 보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여기서 세상의 아버지, 즉 인간인 아버지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비교하고 있다. 이 둘이 비교의 대상이 되는가? 그것도 좋은 아버지가 아니라 악한 아버지다. 이 둘은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비교의 대상이 안 되는 것을 비교의 자리로 올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느 한쪽을 확실하게 강조하기 위해서다. 악한 아버지와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을 비교함으로서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강조하기 위함이다.
세상의 악한 아버지도 자기 자식이 떡(빵)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주지 않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며 분명하고 확실하게 강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강조하고 있는가? 당신의 자녀들을 크신 사랑과 자비로 돌보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강조하고 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바로 앞장에 있는 내용을 기억해야 한다. 본문은 산상수훈의 한 부분으로 전후 문맥과 연결이 된다. 따라서 전후 문맥을 살피면서 그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따로 뚝 떼어서 보면 은혜는 될지 몰라도 제대로 된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앞장을 보자. 예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셨는가? 6:31-33을 보자.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런 것 구하는 것은 이방인들이나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꽃도 입히시는데 너희는 그 무엇보다 소중하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본문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6장의 말씀과 연결해서 보면 우리의 구하는 것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의 문제에만 국한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본문에 떡과 생선이 나오는데, 이것은 우리의 삶의 필요한 것들을 상징합니다. 떡과 생선의 차원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구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주기도문에서도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의 초점이 그저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의 문제에만 그 초점이 맞추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의 기도의 초점이 우리의 생활의 욕구와 필요에만 맞추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디에 우리의 기도의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가? 6장에서는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신다고 했다.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당신의 자녀들을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실 선물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욕구가 있고 삶에 있어 필요가 있다. 그것이 우리의 기도의 동기가 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삶에 문제가 있고 필요가 있기에 기도하게 된다. 또한 우리 자신에게는 욕구가 있다. 그래서 기도하게 된다. 그것 가지고 기도하라. 그러나 기도는 성장해야 한다. 성숙해져야 한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계속해서 우리의 욕구와 삶의 필요와 문제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도가 아니고 기도가 병들 수 있다.
제임스 프래트라는 사람이 기도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했다. 주관적인 기도가 있고 객관적인 기도가 있다는 것이다.
주관적인 기도는 자기 자신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래서 기도의 내용을 보면 자기의 이기적인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들이고, 그러다 보니 하나님을 수단으로 생각하는 경향을 갖게 된다. 마태복음 6:33 강해를 할 때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주인 되어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구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의 나라와 나의 의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이 이 모든 것을 더해주셔야만 하는 상황이 되고, 하나님은 목적이 아닌 수단이 되고 만다.
기도는 내 뜻을 아뢰는 것으로 시작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것이다. 그러나 주관적인 기도에는 이러한 순복이 없다. 기도를 통해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충돌을 하게 된다. 그때 갈등을 경험하게 되는데, 주관적인 기도는 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 합리화와 변명을 통해 외면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자기 임의대로 결정짓게 되는 오류에 빠진다.
이런 기도는 한 시간, 두 시간 몇 시간을 해도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가 형성되지 못하고 그 사람의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더 이기적이고 편협하고 고집 센 사람이 될 수 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여전히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처럼 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객관적인 기도는 기도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는 기도이다. 기도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다 보니 내 뜻을 아뢰어도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내 뜻과 하나님의 뜻이 부딪힐 때 기꺼이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복하는 순종이 나타나게 된다.
더불어 기도의 초점이 하나님께 맞추어져 있으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찬양하고 집중하게 된다. 지금 당장 나에게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의 삶의 문제가 있지만 기도하면서 내가 바라보는 것은 삶의 문제가 아니라 나를 행한 하나님의 크신 자비와 사랑이다. 나의 삶을 잘 아시고 나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바로 여기에서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가 단순히 우리의 욕구와 삶의 문제와 필요에만 초점이 맞추어진 기도를 한다면 그 기도의 응답의 여부와 결과에 따라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게 되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도 굳건해지지 못하게 된다. 내 간구를 들어주시면 좋은 하나님이고 아니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신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리고 내가 급할 때만 찾는 하나님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 그것 원하시는 것 아니다.
하나님께 기도의 초점을 맞추라.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추라. 좋으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과 은혜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도를 드리라.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아시며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적합한 때에 주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잘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적합한 때에 주신다. 그것이 때로는 내가 원하고 구했던 것과 정반대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고 가장 좋은 것이다. 그 예가 누구인가? 사도 바울이다.
고린도후서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 몸에 육체의 가시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육체의 가시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육체의 질병을 뜻하는 말이다. 가장 유력한 설은 사도 바울에게 간질이나 안질이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라. 주의 복음을 전하고 많은 교회를 세운 사도가 간질이나 안질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안질의 경우는 그렇다 치고 간질병의 경우 매우 고민스럽고 부끄러울 수 있는 병이다. 사역을 하다가 말씀을 전하다가 갑자기 거품을 물고 쓰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병을 놓고 사도 바울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를 했을까? 게다가 예수님께서는 간질병 앓고 있던 사람들도 많이 고쳐주셨으니 더욱 간절히 기도했다. 더불어 그에게는 병을 고치는 치유의 은사도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응답은 무엇이었는가? ‘그래, 네 병을 고쳐주마’였나?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바울은 병의 치유를 간구했지만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였다. 즉 이 말은 그 병도 나의 은혜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 병 가지고 평생을 살라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가? 만일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자신이나 가족의 병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는데 그렇지 않음으로 인해 시험에 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사람들을 종종 보아왔다. 여러분이라면 이러한 주님의 응답에 무어라 반응하겠는가?
그런데 사도 바울은 거절과도 같은 주님의 이러한 응답에 대해 감사함으로 받고 있다. 왤까? 서운하지 않았을까? 시험에 들지 않았을까? 아니었다. 정말 감사함으로 받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까닭은 그의 기도의 초점이 주님에게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을 다메섹 도상에서 만나주시고 구원하여 주셨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의 사도로 삼아 주신 주님께 그의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의 사역도 그러했고 그의 기도도 유일한 초점은 주님 예수 그리스도셨고 그분의 교회와 복음이었다. 예수님만이 자기 몸에서 드러나기를 원했던 사람이었다.
비록 자신의 육체의 가시가 너무나도 갈급하고 중요한 문제였지만 그의 기도의 초점이 주님께 맞추어져 있기에 그는 그렇게 응답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순복하며 감사를 드릴 수 있었다. 9절에 보면 크게 기뻐하며 이를 자랑했다고 한다.
그가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고린도후서 12장 서두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바울은 엄청난 환상과 계시를 받았다. 세 번째 하늘, 하나님께서 계신 보좌인데 이곳에 이끌려 주님의 계시를 받은 사람이었다.
원래 이 사람은 인간적으로 참 잘난 사람이었다. 유대인 중에 유대인이요,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인이며, 당시 최고의 랍비 중 하나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한 랍비였고, 로마 시민권을 가진 상류층이었고 헬라 철학에 능통했고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 로마어까지 능숙하게 구사했던 사람이었다.
게다가 영력까지도 탁월했다. 그의 사역과 그의 편지들을 보라. 얼마나 깊이 있는 영성을 보여주며 능력 있는 사역을 행했으며 얼마나 많은 영적 은사를 가지고 있었는지. 그런 그가 엄청난 환상과 계시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그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가지고 있던 육체의 가시, 질병이었을까? 아니다. 교만이다. 교만해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 그 위험성이 너무 컸다. 자칫 자기가 잘나서 하는 일로 생각하고 자기가 주인 되고 자기가 하나님 될 위험성이 그에게 있었다. 자칫하면 그 자신이 교주가 되어서 바울교를 만들 수 있는 위험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바울은 주의 복음을 전하고 주의 나라를 확장하는 자가 아니라 주의 복음을 빙자하여 자기의 왕국을 세워나가는 사람이 되어서 주님을 훼방하는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을 아신 주님께서는 그에게 거절과도 같은 응답을 주신 것이다. 네가 세 번씩이나 나에게 간구했던 육체의 가시도 나의 은혜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 하셨다. 무슨 말인가? “바울, 너의 약함을 통해 나의 능력이 나타나게 된다.” 그 뜻이다.
주님의 능력은 인간의 강함을 통해서 나타나지 않는다. 인간의 잘남을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 아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주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우리의 못남을 통해 주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이를 고백하고 자신의 못나고 무능함을 고백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딱딱하면 안 된다. 너무 잘나면 안 된다. 말랑말랑해지고 부들부들해지고 좀 못난 모습을 보여야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좋다.
비록 바울의 기도는 응답받질 못했으나 그 육체의 가시로 인해 바울은 교만으로 인해 넘어지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연약함을 기억하며 더욱 주님의 능력을 의지하며 끝까지 변질되지 않고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육체의 가시를 제거하지 않으신 것이 은혜인 것이다. 은혜 중에 은혜인 것이다.
내가 구한 것, 내게 정말 다급하고 우선적인 것들을 구했는데 이를 응답하지 않으실 때 낙심하지 말라. 실망하지도 말고 시험에 들거나 하지도 말라. 비록 나의 갈급하고 위급한 문제를 놓고 간구할지라도 기도의 초점은 하나님에게 맞추라.
그분은 나에게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를 아신다. 그리고 좋은 것으로 주시되 가장 적합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주신다.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면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믿음이 생긴다. 그러면 응답의 여부에 따라 나의 믿음이 흔들리거나 하지 않는다. 응답해 주셔도 나는 하나님을 믿으며 응답하지 않으셔도 나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그 믿음에서 감사가 나오고 평안이 나오고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이 나오는 것이다.
나는 약 7년 전에 이스라엘에 왔다. 나이 마흔에 왔는데, 처음 몇 달 동안은 왜 이 때일까 의문이 들었다. 그전 30대 초반, 중반에 이스라엘로 가길 원했으나 그때는 열어주시지 않으셨다. 그러나 나이 마흔에 오게 하셨는데, 아무 것도 없이 아무 보장도 없이 오게 하셨다.
하나님을 믿기에 순종하며 왔지만 늘 내 머릿속에는 왜 이 때일까, 왜 좀 더 젊을 때가 아닐까, 왜 머리 잘 돌아가는 젊을 때 공부를 하게 하시지 않으셨을까, 왜 내게는 재정적인 후원이나 선교사 파송을 받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그러다 얼마 후 깨달았다. 지금이 가장 적절한 때였다는 것이다. 스물여덟 때부터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게 하신 것이 이스라엘 선교를 좀 더 객관적이고 전략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했고, 9년간의 부교역자로서 교회를 섬기게 하심으로 교회의 필요성을 알게 하심으로 어떻게 목회의 준비를 할 것인지를 알게 하셨고, 무엇보다 텔아비브 욥바교회를 담임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때였던 것이다.
한국에서 부교역자로서 경험하면서 청년 사역을 집중적으로 하게 하셨고, 이스라엘 선교에 대한 마음과 비전을 주셨고, 그저 교회 하나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성지에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세워나가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는 때에 이스라엘로 이끄신 것이다. 나의 생각보다 하나님의 생각이 훨씬 옳으며 나의 때보다 하나님의 때가 천만번 옳다.
그러기에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지난 7년 동안 내게는 별다른 재정도 안정적인 후원도 없었고 삶의 어려움도 있었지만 나를 붙드시고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셨다. 7년 동안의 삶 자체가 기적이었고 은혜였다. 그러기에 나의 앞날이 여전히 불투명하고 불확실하지만, 그것이 이스라엘에서의 삶이고 우리의 나그네와 같은 삶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두려움 없이 염려함 없이 하나님만을 믿는다. 너무나 좋으시고 신실하신 나의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분의 생각에 나에게 가장 좋은 것, 가장 필요한 것, 가장 적절한 것, 가장 적절한 때에 허락해주실 것임을 믿는다.
말씀을 정리하자. 오늘 이 말씀은 기도에 대한 말씀이지만 우리의 기도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라는 것이다. 특별히 당신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좋은 것으로 주시는 하나님, 크신 자비와 사랑으로 돌보시는 신실하시고 좋으신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객관적인 기도를 드리라는 것이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과의 관계형성이다. 오늘이 욤 키풀, 대속죄일인데 이 날의 의미는 회개의 금식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 회복이다. 모든 기도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이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고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하나님의 친구가 되는 그런 기도로 성숙해져야 한다.
자기가 주인 되고 자신의 욕구와 뜻에 초점이 맞추어진 주관적인 기도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고 좋으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초점을 맞추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는 기도를 드리길 바란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는 통로가 된다. 그러면 된 것 아닌가? 하나님과 친밀해졌는데 무엇이 문제겠는가? 요한삼서 말씀처럼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케 되는 복이 저절로 오는 것이다.
하나님과 친밀해지는 기도의 시간을 갖으라. 정작 기도의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기도가 서툴러도 좋다. 오래 못해도 좋다. 자신의 기도제목을 가지고 나아가되 하나님께 초점을 두라.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두고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와 은혜에 초점을 두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초점을 두고 사모하고 구하라. 그 사모함 가운데 주의 성령께서 임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친밀함을 나타내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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