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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7: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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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무엇을 위해?
2010년 9월 25일(토) 추수감사주일, 텔아비브 욥바교회
본문: 마태복음 7:7-11
지난주에 이어 오늘도 이 본문을 가지고 말씀을 나눈다. 먼저 지난주 말씀을 기억해보자.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는 이 말씀은 매우 유명한 말씀인데, 동시에 본문에 대해 잘못 이해하거나 그 이해의 폭이 좁은 경우가 많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면 반드시 응답해주시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 말씀의 요점은 그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고 했다. 그것이 무엇인가? 기도의 초점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기도의 초점을 어디에 맞추어야 하는가를 말씀하시고 있다.
기도의 초점은 두 개로 볼 수 있는데, 그 첫째를 지난주에 말씀드렸다. 무엇인가? 그것을 이해하려면 전후문맥을 살펴봐야 하는데, 그 앞 장과 연결되어 있기에 앞장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본문을 이해해야 한다.
6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것을 본문과 연결하면 우리가 기도할 때 그 초점이 우리의 삶의 필요와 요구에만 초점이 맞추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욕구와 삶의 문제와 필요 때문에 기도하게 되지만, 그것에만 우리의 초점이 맞추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아빠 손에 들려있는 선물만 바라보는 것과 똑같다.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이스라엘로 자주 출장 오시는 집사님이 있다. 실명을 거론하지 않아도 누군지 아실 것이다. 아이들이 하도 닌텐도 게임기를 사달라고 해서 사주었단다. 그랬더니 그전에는 아빠가 이스라엘 간다고 하면 서운해 하면서 아빠에게 매달리기도 하고 그랬는데, 닌텐도를 사 준 후에는 아빠를 쳐다보지도 않는단다. 닌텐도 하면서 아빠 다녀오세요 그런 식이란다.
사실 우리가 많은 경우 그러지 않은가? 하나님 보다는 하나님 손에 들려 있는 선물에 우리의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그런 기도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성품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면서 세상의 악한 아버지와 하나님 아버지를 비교하셨는데, 이 둘은 비교 대상이 안되지만 그럼에도 비교의 선상에 올려놓은 까닭은 무엇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강조하기 위함이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어떤 분이신가? 당신의 자녀들에게 무엇이 있어야 하는지를 아시고, 들의 꽃을 입히시고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하나님이시며, 당신의 자녀들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러한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추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라는 것이다. 그래야만 기도가 성장하고 성숙해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아시고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은 그 기준이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많은 경우는 우리의 기도는 그 기준과 초점이 나 자신이다. 나의 욕구와 욕심인 경우가 많고 내 삶의 문제와 필요가 기도의 기준과 초점이 된다. 이런 경우는 내가 생각하고 내가 원하는 것을 주셔야만 한다. 그래서 응답해주시면 좋은 하나님, 아니면 실망하고 낙심한다.
기도의 기준과 초점은 하나님이시다. 즉 이 말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나에게 필요한 것이 내가 생각할 때 나에게 필요한 것과 다를 수 있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 내게 좋은 것과 내가 생각하는 좋은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 더 옳을까?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나에 대해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정말 필요한 것, 내게 좋은 것을 그분의 때에 주신다.
이러한 자세로 기도의 기준과 초점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맞출 때 우리의 기도는 성숙해진다. 내 뜻을 가지고 아뢰지만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때는 기꺼이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에 초점을 맞추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게 된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된다. 그것이 내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힘이 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다는 것이다.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의 관계 형성에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기도가 바로 이것이다. 기도는 이방인들이 하는 것처럼 그저 자신의 소원을 비는 행위가 아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수단으로 삼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분은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명하신 이유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형성시켜 가라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도 그런 이유로 말씀하신 것이다.
기도하라. 기도하지 않는 것은 교만이고 불순종의 죄다. 기도하라. 기도하되 그 기준과 초점이 나 자신과 나의 삶의 문제와 필요가 아닌 하나님과 하나님의 성품이 되게 하라. 내 삶의 문제를 놓고 기도할 때에도 바라보는 초점은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이다. 그렇게 기도하는 가운데 좋은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될 것이고 하나님과 더욱 친밀해지는 은혜가 임할 것이다.
오늘은 기도의 두 번째 초점에 대한 것인데, 오늘 본문을 다시 보자. 7절이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여기서 무언가가 생략되어 있다. 문장을 형성하려면 주어 목적어 서술어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무엇이 생략되어 있는가? 명령형이니까 주어는 너희가 된다. 서술어도 있다. 무엇이 없는가? 목적어다.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무엇을 두드려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어가 없다. 우리 성경에는 문을 두드리라로 번역되어 있어서 문이 목적어가 아니냐고 할 지 모르나 원어 성경에는 그냥 두드리라로 되어 있다.
왜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을까? 이미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 전에 무엇을 찾고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두드려야 하는지에 대해 언급하셨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한 경우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일까? 6장 33절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이것이 바로 본문에 생략되어 있는 목적어다. 이 목적어를 놓고 읽어보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제 좀 분명해지지 않는가?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대상은 단순히 나의 욕심과 내 삶의 문제와 필요를 뛰어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다. 이것을 우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문제와 필요 역시 하나님의 나라와 의라는 틀 안에서 구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가? 이미 여러 번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특징은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다. 하나님의 주권과 통치가 인정되고 이루어지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고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그분의 주권과 통치에 순종하고 그분의 인격과 삶을 닮아가고 그분께서 꿈꾸신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하셨는데, 우리가 그러한 기도와 그러한 삶을 살려면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고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6장 33절 강해 때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나의 왕이고 주인인 사람은 아무리 교회를 다녀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잠시는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속적으로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러니 늘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여전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의 문제다. 내 욕구와 삶의 문제와 필요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토록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나의 왕이시며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가?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고백은 이러하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의 고백이다.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도마의 고백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사도 바울의 고백이다.
예수님을 만난 이들은 한결같이 무엇을 고백하고 있는가? 예수님이 나의 주님, 주인이시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예수님의 주인 되시고 왕 되심을 고백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의 삶에서도 예수님의 주님 되시고 왕 되심을 인정하는 삶을 살았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의 모습이다.
누가 나의 주인이냐에 따라 구하는 것이 달라진다. 삶의 목적도 달라지고 방향도 달라진다. 내가 주인이던가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던가 둘 중에 하나다. 돈이 주인 되고 탐욕이 주인 되고 성공이 주인 되고 권력이 주인 되고 쾌락이 주인 되고 세상의 것들이 주인 되는 것은 다 내가 주인 될 때 나타나는 증상들이다. 교회를 다녀도 여전히 내가 주인 되면 삶의 방향과 내용과 목적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예수를 믿음은 단순히 내 죄를 용서 받고 구원받아 천국 가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 나의 왕이심을 인정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진정한 예수 믿음이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왕으로 인정한 사람들은 예수님께 인생을 걸었다. 그들이 구한 것은 예수님이었다. 예수님을 더 알기를 구했고, 예수님을 더 닮기를 원했고, 예수님처럼 살아가기를 원했고, 예수님이 왕 되시는 나라를 꿈꾸며 그 나라를 구했다. 모든 것을 예수님께 걸었다.
예수님은 나의 모든 것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 하나님의 본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거셨다. 그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나를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나를 위해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거셨다는 것은 내가 그분에게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말이다. 믿는가? 그분의 눈에는 나는 온 우주보다 귀하다. 때로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주님의 눈에는 나는 그분의 생명을 걸만한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걸만한 가치가 없겠는가? 성부 하나님과 하나 되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시고, 창조 때에 말씀으로 계시면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세상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으로서의 모든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가지신 분이신데, 왜 우리의 모든 것을 걸만한 가치가 없겠는가?
그분이 하나님의 본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만으로도 우리의 모든 것을 걸만한 가치가 있는데, 그분이 그분의 모든 것을 나를 위해 거시지 않았는가? 그래서 내가 죄용서 받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아닌가? 그런 그 분에게 내 모든 것을 걸만한 가치가 있단 말이다. 아니 그 이상을 걸만한 가치가 있으시다.
예수님을 믿는가? 그렇다면 당신의 모든 것을 그분께 걸라. 예수님이 나의 인생의 주인이시고 왕이심을 정말로 인정하는 삶을 살아가라. 그저 구원받아 천국 가는 얕은 믿음에 머물지 말라. 내 인생 모든 것 다 예수님께 걸고 살아가라. 그러면서 구하고 찾고 두드리란 말이다. 그럴 때 당신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얻어지고 찾아지고 열려지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얻어지고 찾아지고 열릴 것 같은가? 예를 들어 내가 직장에서 일을 한다. 직장인에게 중요한 것은 실적이다. 오죽하면 실적이 인격이라고까지 할까. 참 서글픈 현실이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둘 중 하나다. 하나는 실적이 목표가 되어서 그것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경우다. 그래도 교회 다니는 사람은 실적 좋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열심히 일한다. 이것만 해도 사실 괜찮은 신앙인이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은 어떨까? 실적이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목적이다. 예수님이 주인 되고 왕이심을 인정하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삶을 살아간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 즉 공의를 구하는 삶을 추구한다. 이 말은 비즈니스의 현장에서도, 거래를 하고 계약을 하고 돈을 버는 구체적인 자리에서도 예수님이 주인 되고 왕이심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공의를 구한다는 것이다. 출근 전에 그렇게 기도하고 계약하기 전에 그리 기도를 하고 장사하기 전에 그리 기도한단 말이다.
그리고 실제적으로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 옳지 않은 방법, 부당한 방법, 잘못된 방법, 속이는 방법으로 거래하지 않고 그렇게 장사하지 않고 그렇게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을 하는 구체적인 현장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서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럴 때 어떨 것 같은가? 잘 될 것 같은가, 망할 것 같은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일하면 망한다고 생각한다. 왜? 우리 사회가 정직하지 못하고 깨끗하지 못하거든. 부정한 거래와 뒷거래, 뇌물과 편법을 써야 되거든. 그렇게 배워왔거든. 그러다보니 어떻게 되는가? 교회를 다녀도 믿음 따로 생활 따로가 된다. 크리스천이 많아지고 교회가 많아져도 세상은 그리 밝아지고 깨끗해지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실제적인 삶의 현장에서도 예수님의 주권과 통치를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보라.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조금만 기도하고 생각해 보면 안다. 그렇게 살아보라. 단언하건데 안 망한다. 못 믿는가?
당장은 망하는 것 같을지 모른다. 어려움에 처할지도 모른다. 손해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코 망하지 않는다. 왠 줄 아는가? 하나님이 그냥 놔두시지 않는다. 직장에서, 사회에서,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몸부림치는 사람, 하나님께서 망하도록 그냥 놔두시지 않는단 말이다.
소금 장로라고 불리는 장로 한 분이 있다. 김수웅 장로다. 그분의 삶과 간증을 담은 책이 나왔는데 읽어보기를 권한다. ‘소금 장로 김수웅’
이분이 왜 소금 장로인가 하면 염전사업을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금을 파는 소금 장로지만 실제로 세상에서 소금과 같은 삶을 살고 있기에 소금 장로로 불리고 있다.
처음에 사업을 할 때 많은 시련과 역경이 있었다. 사기꾼에서 사기를 당해 감당하기 힘든 시련으로 인해 정신병원에 보내지기 했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김수웅 장로를 만나주셨고 회복시켜주셨다. 그 후 김수웅 장로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었다.
김수웅 장로가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건 후에 일어난 일이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부모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아버지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강직한 성품이었고 어머니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말로 설득해서는 도저히 예수 믿을 사람들이 아니었다. 김수웅 장로는 부모님의 구원을 위해 100일간 작정기도를 정말 간절하게 드렸고, 100일이 다 되기 전에 확실한 응답을 받았다. 도저히 예수 믿을 것 같지 않았던 부모님이 예수 믿게 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자신이 부모님께 한 최고의 효도라고 말한다.
예수님에게 모든 것을 건 사람은 가족의 구원을 위해서 구하게 된다. 나 역시 21살 때 예수님 뜨겁게 만난 후 구한 것이 아버지의 구원이었다. 날마다는 아니었지만 7년 동안 부르짖었고, 그 결과 아버지가 예수님 믿게 되어 6년 동안 신앙생활 잘 하시다가 천국 가셨다.
아직 가족이 예수 믿지 않고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한다, 언젠가는 믿겠지 한다, 이건 정말 무책임한 행동이다. 예수는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 아니다. 정말 생사가 달린 문제다. 가족의 구원을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그것이 가정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출발점이다. 말씀하시지 않는가? 구하는 자는 받을 것이요 찾는 자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자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가족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의 모습이다.
김수웅 장로가 하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건 후에 일어난 두 번째 변화는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는 것이다. 김수웅 장로가 갑작스레 예배를 인도해야할 일이 생겼는데, 이를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였을 때 이런 말씀을 주셨다고 한다.
“축복은 나의 영, 곧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다. 축복은 물질도 포함하지만 이보다 더 큰 것이 영적 능력과 권세다. 여기에 감사와 은혜, 사랑과 기쁨, 평안이 충만해지는 것이 진정한 복이다. 땅의 것보다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것이 복이다.”
그 후부터 김수웅 장로는 물질의 복보다 영적인 복을 사모하고 땅의 것보다 하늘의 것을 사모하는 믿음을 갖고 살게 되었고, 실제로 하나님께서 영적인 능력과 권세도 주셨고 물질의 복과 영적의 복을 풍성하게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거는 사람은 땅의 것을 초월하게 된다. 물질에 연연하지 않게 된다. 물질의 복보다 영적인 복이 훨씬 더 귀하고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 그래서 영적인 복, 하늘의 복을 구하는 사람이 된다. 그런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영적 능력과 권세다. 세상에서 살아가지만 영적 능력과 권세 있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다.
김수웅 장로에게 일어난 세 번째 변화는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하여 큰 비전을 품고 믿음으로 간구하는 것이었다. 그전에는 그저 사업에 성공해서 돈을 버는 것이 목표였지만, 예수님 만난 후 자신의 모든 것 예수님께 건 후로 생긴 비전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구했다는 것이다. 염전 10만평을 달라고 말이다. 부자 되려고? 아니다.
평신도 전도자로서 바울처럼 세계를 교구 삼아 방방곡곡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기를 결단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염전 10만평을 구했고 그대로 응답받았다. 그리고 그의 비전대로 그 수익금으로 수많은 교회를 세우고, 신학교에 기부를 하고, 복음 전도에 힘을 쓰고,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을 구제 하는 일에 쓰고 있다. 돈 잘 쓰고 있다. 지금은 CBMC, 국제실업인선교회 한국지부 회장으로 섬기면서 비즈니스로 세계선교를 하는 중책을 맡고 있다.
단순히 실적이 좋게 해달라고, 성공하게 해달라고, 돈 많이 벌게 해달라고, 출세하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이방인이 구하는 것이다.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걸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성공을 구하란 말이다. 성공이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목표로 삼아 구하라는 것이다.
김수웅 장로처럼 자신을 구원하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걸고 그것이 사업이든 공직이든 학업이든 목회든 선교든 자녀를 키우는 일이든 예수님께 모든 것 걸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말씀 그대로 주실 것이고 찾게 할 것이고 열어주실 것이다.
이것이 예수 믿는 삶이다. 내가 주인 되어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의 차원에서 뛰어넘는 사람이 되라.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고 하셨는데,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고 무엇을 위해 두드리는가? 다른 것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다. 이것을 구하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라, 이것은 당신에게 모든 것을 거신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삶이다. 여기에 당신의 모든 것을 걸라.
적당히 믿는 것, 적당히 사는 것 이제는 그만 하자. 지금 기독교인들에게 있는 큰 문제 중에 하나가 적당히 믿자는 것이다. 믿기는 하는데 적당히다. 교회는 다니는데 적당히다. 그러니 성장도 없고 변화도 없고 능력도 없다. 그런 사람에게서 어찌 예수 닮은 인격과 삶을 기대할 수 있겠으며, 그런 사람에게서 어찌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0.9곱하기 0.9를 하면 몇이 나오는가? 0.81이다. 여기에 다시 0.9를 곱하면? 0.729가 나온다. 여기서 또 0.9를 곱하면? 0.6561 점점 작아진다. 이렇게 계속해서 0.9를 곱해나가면 결국 얼마의 숫자가 될까? 0이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1에서 약간 모자라는 0.9의 생각이다. 1은 아니지만 그래도 1에 가까운 0.9, 이 정도만 해도 되겠지, 이 정도면 괜찮아, 이 정도까지만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단 말이다. 적당히 믿으려고 한다. 적당히 신앙생활하려고 한다. 말씀도 적당히다. 그러니 어찌 되는가? 0.9로 끝나는가? 점점 나빠진다. 예수는 믿는 것 같고 교회는 다니는 것 같은데 점점 굳어지고 무기력해진다. 세상에서의 삶도 믿지 않는 자와 다를 것이 없다. 결국 0으로 가는 것이다.
이제 0.9의 생각, 0.9의 믿음, 0.9의 생활을 청산하라. 1을 향해 나아가라. 주님 바라보고 도우심을 구하면서 1을 향해 나아갈 때 주님께서 1이 아니라 1.1을 주신다. 1.1을 곱해봐라. 어떻게 되는가? 조금씩이지만 점점 커진다. 그렇게 자라나고 성장하고 변화되는 것이 믿음이다.
정말 예수님을 나의 왕이요 주인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사람에게는 1.1이 아니라 그 이상을 주신다. 그럼 당신도 소금장로 김수웅 장로 같은 사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업도 일으켜 주시고, 높여주시고, 그래서 그 사업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믿음의 사업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왜 김수웅 장로만의 이야기겠는가? 내 이야기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오늘 추수감사예배로 드리는데, 우리의 감사의 내용이 이런 것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나님께서 내 삶에 이런 것 저런 것들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는 것도 좋지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인정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사는 가운데 주신 은혜와 복으로 인해서 감사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물론 여러분들의 삶 가운데 이러한 감사가 있다는 것을 안다. 바라기는 이러한 감사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해지길 축복한다.
나는 여러분들을 사랑한다. 그러기에 여러분들을 보면서 때로는 눈물겹고 때로는 안타깝다. 하나님을 사모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면 참 눈물겹고, 반대로 그렇지 못한 모습을 볼 때는 참으로 안타깝다. 여러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부탁한다. 예수님을 당신의 인생의 주인이요 왕으로 모시고 인정하라. 그리고 나에게 모든 것을 거신 예수님께 당신의 모든 것 걸고, 예수님께서 그토록 우리에게 원하셨던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살아가자.
사업을 하던, 정치를 하던, 공직에 있던, 학문을 하던, 공부를 하던, 가사를 돌보던, 자녀를 양육하던, 목회를 하던, 선교를 하던, 무엇을 하던 그렇게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삶을 살아가자. 그럴 때 우리의 좋으신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과 육의 좋은 것으로 주실 것이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와 의가 확장되고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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