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민8:1-4 |
---|---|
설교자 : | 신윤식 목사 |
참고 : | 은석교회 http://onlycross.net |
10강.
민8:1-4
일곱 등잔
97.4.20
여러분이 잘 아시는 얘기를 하나 하고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소경 세사람이 코끼리를 보게 되었습니다. 눈으로는 보지 못하는지라 각기 손으로 만져보고 나서 각자 코끼리에 대해서 얘기를 합니다. 첫째 소경은 코끼리의 다리를 만졌습니다. 그 소경이 하는 말이 "코끼리는 굵은 통나무 같이 생겼다"고 말합니다. 둘째 소경은 코끼리의 코를 만졌습니다. 그는 "아니다 코끼리는 가늘고 긴 막대기처럼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코끼리의 귀를 만져본 셋째 소경이 "아니다 코끼리는 부채같이 납작하게 생겼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생각을 하게 됩니까? 저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소경이 자신은 볼 수 없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단지 손으로 만진 일부를 가지고 마치 전체를 다 본 것처럼 우기고 있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세 소경의 잘못은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들은 어쩌면 소경들의 잘못 안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우리는 눈앞에 성경을 펴놓았습니다. 성경을 하나의 거대한 코끼리라고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코끼리의 전체를 보고 나서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다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마 전체를 보고 있는 자라면 소경들과 같은 말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있습니다. 창세기만 보고 나서 하나님의 뜻은 이렇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요한계시록만 보고 나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다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전체를 보고 전체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런 분이시다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만약 소경들이 자신은 보지 못한 자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 채 자기가 만진 일부의 것을 가지고 코끼리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평생을 살다 죽는다면 그 사람은 결국 코끼리는 알지 못하고 죽는 것이 됩니다. 다만 잘못된 코끼리를 코끼리의 전부로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코끼리의 모습이 전부인 것인 줄로만 알다가 죽는 것입니다.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고 소경과 코끼리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잘 아실 것입니다. 우리는 다 보지 못한 자입니다. 소경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소경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소경입니다. 우린 아무도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은 성령이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나는 소경된 자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과, 자신의 판단과, 자신의 지식가지고 성경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판단은 항상 전체를 보지 못한 소경이 코끼리의 일부를 만져보고 그것을 코끼리의 전부인 것으로 여기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일부를 가지고 말하는 자와 전체를 보고 말하는 자의 이야기가 다를 것은 자명한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진심으로 코끼리의 전체에 대해서 알고자 하는 소경이라면 자신의 소경 됨을 인정하고 자신의 판단을 다 버린 채 전체를 본 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저는 지금 '나는 전체를 보는 사람이고 여러분들은 일부밖에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니까 내 말을 들으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소경이었던 자고, 여러분도 소경이었던 자였습니다. 그런 우리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보게된 자가 되었습니다. 보게 되었다는 것은 성경을 전부 환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인가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인간의 죄에 대해서 우리 안에서 고발하고 계시기 때문에 남들은 볼 수 없는 인간의 죄를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수시로 옛사람이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을 통해서 죄를 고발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하는 자가, 다시 말해서 코끼리에 대해서 말한다는 자가 소경이어서 코끼리의 일부만 가지고 전부인 것으로 말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국 같이 잘못된 길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하는 일은 성경의 전체를 가지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여러분에게 정직하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들에게 소경 되었을 때 잘못 알고 있던 일부분을 버리지 않고 있다면 결국 전체를 말하는 자와 부딪히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성경 전체를 환하게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제가 여러분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는 적어도 일부만 보고 판단한 차원이 아니라 성경의 전체에서 계시하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전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여기에 대한 판단은 여러분 스스로가 하실 문제입니다. 다만 간곡히 부탁드리는 것은 일부를 가지고 전부를 거부하는 잘못은 범하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행여 일부분을 가지고 잘못 판단한 것을 성경에서 계시한 하나님으로, 그리스도로 잘못 알고 평생을 사시다가 세상을 떠나는 잘못이 여러분들에게 발생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는 인생의 일부만 보지 말고 전부를 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세상이 멸망당하는 계시록까지 있습니다. 성경의 마지막은 결국 심판입니다.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도 심판입니다. 전부를 보고 살아라는 것은 마지막 심판까지 내다보고 살아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 것을 보면 전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보고 그 일부에 치우쳐서 살아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현재 주어지는 축복에 매달리게 됩니다. 지금 자기의 일이 잘되기만 원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찾아도 자기의 일을 도와주는 하나님을 찾게 되고, 성경을 봐도 꼭 그런 식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열왕기하 4장에서 엘리사가 과부를 도와준 이야기를 가지고 '여러분, 과부는 엘리사의 말에 순종하고 그릇을 빌어 왔을 때 하나님은 그 그릇에 기름을 가득 채워주셨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고 나올 때 하나님은 여러분의 그릇에 축복이 차고 넘치도록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어느 날 새벽 기독교 방송에서 모 목사가 설교한 내용임) 이러한 얘기밖에 나올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인생이 잘되는 것만 바라는 좁은 시각으로 신앙생활하기 때문에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게 되고 결국 심판은 잊어버리고 세상과 똑같이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전부를 바라보십시오. 현재만 바라보시지 말고 미래까지 같이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세상의 어려움에 실족하지 않고 그리스도안에서 굳건히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도 성경 전체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법궤를 모시는 지성소 밖의 성소에 대한 내용입니다. 출 25:23-40절과 37:10-29절을 보면 성소에 대한 규례를 볼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성소에는 진설병 상과 등잔과 향단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오늘 본문은 등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등잔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불을 꺼지지 않게 해야 했습니다(레 24:1-5). 즉 날마다 계속해서 빛을 비추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등잔의 맞은편에는 진설병 상이 있습니다. 그 진설병 상위에는 떡 12개가 있습니다(출 40:22-25, 레 24:5-6). 그리고 등잔은 진설병 위의 12개의 떡을 비추었던 것입니다. 중단되지 않고 날마다 계속해서 비춰져야 했던 빛입니다. 본문 2절의 "등을 켤 때에는 일곱 등잔을 등대 앞으로 비취게 할지리라"는 말씀을 보면 등잔은 맞은편을 비추도록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설병 상위의 12개의 떡을 비추도록 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성소의 구조를 상상하실 수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은 등잔이 12개의 떡을 비추고 있는 의미입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등잔의 개수입니다. 본문에 보면 일곱 등잔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일곱 등잔이라는 것은 등잔이 일곱 개라는 뜻이 아니라 불을 켤 수 있는 등잔이 가운데 한가지와 좌우 세 가지씩 나오게 한 등대라는 뜻입니다. 4절에 보면 등잔을 금을 쳐서 만들었다고 되어 있고, 출 25:31-36절에 보면 더욱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쳐서 만들었다는 것은 따로 따로 만들어서 갖다 붙인 것이 아니라 망치로 쳐서 일곱 등잔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여러분이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일곱이라는 숫자의 의미입니다. 성경에 일곱이라는 숫자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창 2:2절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시던 일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치매 그 지으시던 일이 다하므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일곱이란 어떤 의미입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하신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창조되었고, 세상이 보존되는 것도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에 의해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이 일곱이란 숫자의 의미입니다. 이해되십니까? 그리고 등잔 맞은 편에 있는 12개의 떡은 이스라엘 12지파를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정리하면 일곱 등잔이 맞은편의 12개의 떡을 비추고 있는 모습은 어떤 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힘으로 보존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이 말씀을 대하는 우리는 어떠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습니까? 등대의 불빛이 항상 꺼지지 않고 이스라엘을 비추고 있는 것 같이 하나님의 빛이 쉬지 않고 우리를 비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숨쉬고 있고, 살아가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보호하심 때문입니다. 결코 우리들의 힘으로 우리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세상을 살아가는 줄 착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생명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차이점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을 돕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까지 여러분이 나아오게 된 것은 우리는 부족하고 약하지만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이 우리를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믿습니까? 우리는 등잔 맞은 편에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빛을 내는 것이 아니라 빛을 받아서 살아갈 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아마 여러분의 마음속에 알 수 없는 불만과 거부감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돕고 있고, 전능하신 힘으로 보호하고 계신다면 왜 나의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수없이 눈물로 기도했는데도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안계신 것이 아니냐는 낙심에 빠져보신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일부를 보고 제멋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왜 하나님은 나의 어려움을 도와주지 않으시냐'는 원망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껏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가르치면서 일부를 보고 제멋대로 판단한 하나님을 가르쳐 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신다. 어려울 때 믿음으로 기도해라 그러면 하나님이 해결해 주신다'는 것을 목이 터져라고 외쳐왔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기도해도 어려움이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기도가 부족하다느니, 믿음이 약하다느니, 다른 모르는 죄가 있다느니 하면서 말도 되지 않는 말로서 변명을 해왔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소경이 자기가 만진 일부를 가지고 제멋대로 상상한 하나님입니다.
인생의 전체를 바라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현재만 바라보고 살지 말고 마지막까지 같이 바라보고 인생을 살아가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인생이란 현재 풍족한 삶을 사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심판을 바라보고 산다면 마지막 심판때에 영혼이 잘되는 것에 모든 목적을 두고 살아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금의 일만 잘되게 도와주신다면 나는 하나님을 더 잘 믿을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생각입니다. 믿음은 우리 생각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렇게 할 수 있을 것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믿음이 유지되어지는 것이라면 베드로는 무엇 때문에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또 사실 현재 자기의 인생에만 관심을 두고 매달려 있는 것 자체부터가 이미 하나님께는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의 영혼이 잘되게 하시는 것이지 육신이 잘되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천국으로 보내시기 위해서 일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일하시지 결코 멸망을 부추기는 일은 하지 않으실 것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시각과 우리의 시각의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보고 계십니다. 마지막 심판까지 보시고 우리를 돕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 마지막은 보지 못하고 현재만 바라보면서 현재가 잘되기만 소원하고 살아갑니다. 이것이 인간의 잘못된 인생관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돕지 않으신다고 느껴집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여러분의 구원과 상관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어려움을 쉬지 않고 주신다고 생각합니까? 어려움과 고통 속에 계속 빠뜨리신다고 생각합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 그 일을 통해서 뭔가 구원의 일을 하시고자 하시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어려움과 고통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심판과 멸망의 고통은 영원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식으로 구원의 일을 하십니까? 어려움과 고통에 빠지게 하시고, 때로는 생계수단까지 빼앗아 가시고, 먹고사는 일까지 힘들게 하시면서 무엇을 가르치십니까? 전에는 내가 먹고 입고 아이들 가르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되어지는 것인줄 알았고, 하나님도 자기 일이 더 잘되어지기를 바래서 찾았는데 그것이 잘못이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이 있고 없고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아는 것이 곧 내 생명이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이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하나님은 여러분을 어려움으로, 고통으로 몰아가시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인생의 일부만 보면서 세상을 살아가기 때문에 어려움 자체를 거부하면서 어려움이 있으면 무조건 하나님께 해결해달라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서 어려움을 주셨다면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는 기도에 응답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관심사가 무엇이고, 어떤 식으로 일하시는가를 여러분이 잘 안다면 환난 속에서 구하는 기도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단지 해결해 달라는 기도는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막연하게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라고 하면서 한숨만 쉬고 있지도 않습니다. 환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기도할 수 있게 되어집니다.
성경을 통해서 그 예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시편 13편을 보면 오랜 환난 가운데서 하나님께 기도한 다윗의 시가 나옵니다. 여기 보면 다윗은 오랜 환난 때문에 지쳤다거나 하나님을 원망한다는 내용이 없습니다. 환난 속에서 다윗이 두려워하는 것은 환난 때문에 자신이 사망의 잠에 빠져드는 것입니다. 즉 환난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눈이 가려져 버리는 것을 두려워 한 것입니다. 그래서 눈을 밝혀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3절). 두 번째는 원수가 스스로 승리했다고 자축할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이 요동함으로서 그것이 자신의 대적에게 기쁨이 될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4절). 결국 다윗은 환난을 피하거나 벗어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다윗은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갔고, 또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환난도 결국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오랜 환난 속에서도 그의 기도는 자기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위한 기도를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생의 전체를 보고 사는 자의 기도입니다.
일곱 등잔이 맞은 편의 12개의 떡을 비추는 것은 단지 우리의 육신의 일을 하나님이 도우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쉬지 않고 일하시고 도우시는 하나님을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요 1:4절에 보면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말씀합니다. 구약의 성소 안에서 12개의 떡을 비취던 일곱 등잔의 빛이 이제는 빛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비추고 계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빛은 곧 생명이라고 말씀합니다. 결국 일곱 등잔의 빛은 우리를 생명 되신 그리스도안에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잘 가르쳐주고 있는 것임을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할 것은 빛되신 그리스도를 알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아는 새사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생명을 위해서라면 이 땅의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있는 자가 되는 것을 원해야 합니다. 이런 인간되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눈이 이러한 하나님을 보게 될 때 비로소 범사에 감사하는 자로서 세상을 살게 될 것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