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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3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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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sermon/704187 |
인자가 오리라!
눅 12:35-40, 성령강림절후 제12주,
2013년 8월11일
35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36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 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37 주인이 와서 깨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인이 띠를 띠고 그 종들을 자리에 앉히고 나아와 수종들리라 헬, 기대어 누워 있는지라 38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39 너희도 아는 바니 집 주인이 만일 도둑이 어느 때에 이를 줄 알았더라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40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유랑 공동체처럼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많은 걸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야말로 좋은 스승, 즉 존경할만한 랍비였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알아듣기도 하고 알아듣지 못하기도 했고, 어떤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에 듣고 이해하지 못한 것들도 마음에 새겨놓았다가 먼 훗날 어떤 계기가 되어 글로 기록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복음서에 남아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그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정신을 차리고 살라는 의미로 눅 12:35절에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고 충고하셨습니다. 이 짧은 문장에 세 가지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허리에 띠를 띠라는 것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큰 천을 몸에 둘둘 감는 식으로 옷을 입었습니다. 움직일 때는 불편합니다. 그래서 허리에 끈을 매야 합니다. 둘째는 등불을 켜는 것입니다. 밤에 올 손님을 맞이할 준비입니다. 셋째는 서 있는 것입니다. 서 있다는 것은 곧 움직일 준비를 한다는 뜻입니다. 이 충고는 허리에 띠를 띠고 지팡이를 들고 서서 무교병과 쓴나물을 급하게 먹어야만 했던 출애굽 명령과 비슷합니다.
예수님은 뭔가를 다급하게 준비해야 할 이유를 제자들에게 비유로 설명합니다. 제자들은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문을 열어주려고 기다리는 하인과 같습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혼인을 밤에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신랑은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와야 합니다. 신랑이 언제 집으로 돌아올지 몰라서 신랑 집에서는 밤새도록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비유가 계속됩니다. 37절에 따르면 주인이 집으로 돌아와서 하인들이 깨어 있는 것을 보면 하인들에게 복이 있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주인이 오히려 하인을 섬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인을 위해서 갈아입을 옷을 마련하고, 씻을 물을 준비하고, 먹을 음식을 만드는 겁니다. 주인이 하인을 이렇게 섬긴다는 것은 파격적인 일입니다. 더구나 지금 주인은 먼 여행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피곤하기도 합니다. 이 비유는 사람들이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어떤 사건이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39절에서는 도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둑이 언제 도둑질 해 갈지 알면 방비책을 세울 수 있지만 그걸 모르니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혼인집에 갔던 주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거와 비슷하다는 뜻입니다.
이 비유가 말하려는 핵심은 40절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본문의 시작과 끝이 잘 연결됩니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바로 인자가 언제 올지 모르니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씀에 부응하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인자와 예수
여기까지는 이해하는데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이 가능합니다. 오늘 본문이 말하듯이 예수님이 공생애 중에 자신의 재림에 대해서 직접 말씀하신 걸까요? 예수님은 사실 자신의 십자가 처형도 처음에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운명이 가시화되었을 때 그것을 면케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드렸다는 사실을 보면 이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재림까지 언급하셨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누가복음 기자는 독자들이 그렇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가가 뭔가를 착각한 것은 아닐까요?
뭘 그렇게 복잡하게 따지냐, 성경이 묘사하고 있는 그대로 믿으면 되지, 하고 생각할 분들도 계실 겁니다. 예, 그렇게 믿고 싶은 분들은 믿어도 됩니다. 우리는 지금 성경과 기독교 신앙을 의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말하는 실체를 알고 싶어서 이런 질문을 하는 겁니다. 그 실체 안으로 들어가는 게 살아있는 영성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질문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자신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다 예상하셨고, 더 나가서 재림까지 예상하신 걸까요? 그의 운명은 그렇게 프로그래밍 된 걸까요? 그래서 그것을 공생애 중에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걸까요?
오늘 본문의 결론에 해당되는 40절에 특별한 단어가 나옵니다. ‘인자’가 그것입니다. 아무도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인자는 한자로 사람 인(人)자에 아들 자(子)자로 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son of men)이라는 뜻입니다. 이상한 단어지요? 남자는 모두 사람의 아들이고 여자는 모두 사람의 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부모의 자식들입니다. 누가가 이처럼 당연한 이야기를 언급하는 이유를 알려면 인자 개념이 어디서 왔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인자는 묵시문학의 용어로서 마지막 세상 심판을 감당할 어떤 이를 가리킵니다. 인자는 단순히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이라기보다는 심판자라는 의미가 강합니다. 인자가 온다는 것은 곧 세상이 심판받을 때가 온다는 것이며, 동시에 심판을 통해서 생명이 완성될 순간이 온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는 묵시사상이 한창 꽃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인자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복음서에는 그런 단서들이 종종 나옵니다. 예수님은 눅 21:20절 이하에서 세상의 마지막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끔찍한 현상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은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에서 인자의 오심을 하나님 나라와 같은 것으로 설명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온 줄을 알라.”(눅 21:31) 예수님은 인자 개념과 하나님 나라 개념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재물과 하나님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거나 세상살이에 대한 염려를 거두고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만 구하라는 말씀이 그런 생각에서 나왔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인자가 와서 세상을 심판하고 생명을 완성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을 기다리셨고, 거기에 자신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제자들도 예수님에게서 그런 말씀을 들었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과 다른 추종자들은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예수님이 선포한 인자의 도래를 예수님의 재림으로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깨달음이 그들에게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제 인자가 올 것이라는 말과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이라는 말을 혼용해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자가 올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예수님 당신의 재림에 대한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선포하게 되었습니다.(눅 12:8-10 참조) 예수님은 스스로 재림할 것이라고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제자들에 의해서 직접 말씀하신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기독교 신앙이라는 게 원래부터 확실했던 게 아니라 제자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가, 하는 의심, 또는 궁금증이 생길 겁니다. 그것에 대해서 걱정할 게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류 구원을 컴퓨터 프로그램처럼 실행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다이내믹한 역사 안에서 당신의 섭리를 펼쳐나가십니다. 그것의 정점이 바로 예수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게 될 겁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을 세상 마지막 때 와서 생명 심판을 행할 묵시사상의 ‘인자’라고 인식하고 믿게 된 것일까요? 이것은 다음의 질문과 똑같은 겁니다. 제자들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했을까요? 무엇을 근거로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역사 안에서 살았던 30대 초반의 한 젊은 유대인을, 당시 사람들이 누구나 멸시했던 십자가에 처형당했던 그를 그리스도로 믿은 것일까요? 이 질문은 기독교의 유래에 속하며, 동시에 기독교의 운명에 속합니다.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바로 기독교의 존재 근거이며 이유입니다. 우리 개별 신자들이 신앙생활을 계속해야 할 근거이며 이유입니다. 그 대답이 분명하지 않다면 기독교 신앙은 모래 위에 세운 집이 되고 맙니다. 이 사실이 궁금해져야만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 대답을 여러분은 이미 아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이 극복되는 절대적인 생명을 경험했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그것을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설교는 결국 부활에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아니면 기독교가 존재할 이유를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 착하게 살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다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건 틀린 말입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건 더더욱 아닙니다. 그런 것에 대한 관심은 내려놓으십시오. 죽음이 극복되는 절대적인 생명인 부활만이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입니다.
그런 부활 생명이 무엇인지 손에 잘 잡히지 않는다고 생각할 분들도 계실 겁니다. 평생을 다 살아도 그것은 손에 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건 우리 손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보 험회사 직원들이 말하는 노후설계도 아닙니다. 천국을 갔다 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묘사하는 그런 풍경도 아닙니다. 우리는 그 생명을 적극적으로(positive)가 아니라 부정적으로(negative)만 겨우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상상할 수 있는 최상의 삶을 말해보십시오. 천년만년 죽지 않고 건강하게 사는 건가요? 사업이 번창해서 돈 좀 벌고, 원 없이 돈을 쓰는 걸까요? 자녀들이 출세하는 걸까요?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배우자로 만나는 걸까요? 부활 생명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뛰어넘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여러분이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은 애벌레라는 전제조건 아래 놓인 것입니다. 애벌레의 조건이 아무리 뛰어나도 나비의 삶을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애벌레와 나비 사이에는 불연속성이 있습니다. 부활 생명은 전혀 새로운 생명 조건으로 변화되는 창조 사건과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그 경험에 근거해서 인자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오실 때를, 즉 생명 완성의 때를 기다렸습니다.
재림의 지연
그런데 누가복음 공동체는 곤란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예수 재림의 지연이 그것입니다. 누가복음 공동체만이 아니라 전체 기독교에 해당되는 상황입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우리가 기다리고 있지만 2천년이 지났는데도 그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엔 이게 절실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생존해 있을 때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까지 생각했는데 재림이 일어나지 않은 겁니다. 더구나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고 부활을 경험한 제자들도 죽어가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다 죽으면 예수 신앙이 점점 흐릿해질 수도 있습니다. 재림의 지연으로 인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기독교 신앙에 회의를 품었을 겁니다. 누가는 당황하고 있을 기독교인들을 향해서 예수님의 재림은 혼인집에 갔다가 부지불식중에 돌아올 주인이나 주인 몰래 집안에 침입할 도둑과 같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재림의 때는 우리가 알 수 없으니 정신 단단히 차리고 준비를 게을리 하지 말라고 말입니다.
재림 지연의 진짜 이유가 무엇일까요? 지금 세상 돌아가는 것이나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면 하루라도 빨리 인자, 즉 예수님이 재림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절대적인 생명이 완성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이상 인간과 세상에 불행과 재앙이 없었으면 합니다. 재림 지연의 이유는 아무도 모릅니다. 재림이 실행되면 그때서야 알게 될 것입니다. 궁극적인 사건은 피조물인 인간 인식의 한계 너머에 있기 때문에 이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절대 생명으로 경험한 제자들의 그 경험을 참된 것으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생명의 길을 허락하셨다는 제자들의 그 인식과 통찰과 경험과 믿음을 그대로 이어받습니다. 그걸 우리는 선택했습니다. 그런 믿음에 우리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정적인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오늘 본문에서 누가복음 기자가 말하듯이 인자가 오실 것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이 필요할까요? 단 하나의 대답은 없습니다. 근원적으로는 인자가 오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 자체가 바로 준비입니다. 그것을 잊지 않는 사람은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게 무엇인지를 저절로 알게 됩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인다고 하지 않습니까. 잊지 마십시오. 우리 모두에게 죽음이 득달같이 달려오듯이 인자가 오십니다. 여러분이 생각하지 않은 때에 절대적인 생명이 가까이 옵니다. 아니, 이미 우리 앞에 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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