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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0:9-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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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3.9.16 주일 http://sungamch.net |
소크라테스와 예수
마10:9-10
우선 오늘 설교는 ‘견유학파’가 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낯선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 오시기 전 400년 경 그리스의 아테네에 살던 인물입니다. 그는 ‘무엇인가가 옳으려면 그것을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 여럿이어야 한다’는 이론을 펼친 분입니다. 이것이 후대의 민주주의의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 지중해 세게 즉, 예수님의 선교가 준비되던 이스라엘과 고린도의 그 주변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포기 한다든가,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산다든가 하는 생각은 바보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처럼 악착같이 벌어서 개처럼 사는 게 인생의 참다운 가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 풍조와 다른 삶의 이론을 말하는 이가 소크라테스였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쾌락으로부터는 초연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듯한 인간이 되려면 말입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그냥 살아서는 안 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욕망에서 자유로워 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혜는 덕과 같은 것인데, 이 덕이나 지혜는 욕망이 부재(혹은 자유)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철학과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견유학파’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에는 관심을 덜 갖고(자유하고)덕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데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죠. 여러분이 들어 보셨음 직한 사람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입니다. 그가 바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이어받은 견유학파입니다.
사실 그보다 더 견유학파로서 대표되는 사람은 안티스테네스라는 사람인데 세상에는 디오게네스가 더 알려졌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아테네에 살면서 스스로 개라고 불릴 만큼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소유방식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삶을 산 것입니다. 그는 최소한 생필품인 두벌 옷과 지팡이, 그리고 전대만을 지니고 살았던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 중에 개의 일화나 알렉산더 대왕과의 대화는 아주 유명합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저는 한 마리의 개에 불과 하오니 두벌 옷과 전대, 그리고 지팡이만을 가지고 다닌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이런 인물 중에는 교육학자로 유명한 장자크 루소가 있습니다.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교육철학을 설파한 분입니다. 이른바 자연철학의 루소도 소크라테스로부터 기인하는 견유학파의 한 갈래인 것입니다. ‘犬儒’란 ‘예절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외적인 사물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만큼 준비 공부를 했으니 오늘 해야 할 설교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눈치 빠른 혼을 가진 이들은 이미 제가 앞에서 말씀을 드릴 때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이어보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살았다는, 두벌 옷과 전대와 지팡이만으로 사는 삶을 살았던 견유학파와 예수님의 초기 삶과 그의 제자들의 언동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순회철학자들이었던 것처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이란 당시로서는 ‘새로운 사상’이니만큼 ‘뉴 필로소피’였던 것이고, 그런 사상과 행동을 돌아다니면서 세상에 보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초기에 그의 제자들을 여러 지방으로 보내면서 그때까지 지중해를 중심으로 전파되던 소크라테스의 철학 즉, 견유자적인 복장과 채비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게 두벌 옷과, 전대, 신발 한 켤레, 지팡이 정도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예수님 오시기 이전 400년 전부터 세상을 바꾸는 힘은 인간의 욕망과, 세속적인 탐욕의 물질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덕과 지혜에서 비롯되며, 인간이 덕과 지혜를 얻어 세상을 바꾸고 인간이 달라지려면 물질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 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퍼뜨렸습니다. 그런데 400년이 지난 팔레스타인의 청년 예수가 전하는 복음과 그 방식도 소크라테스의 그것에서 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방식도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성서에 등장 하는 인물 중에 예수만이 아닙니다. 엘리야, 엘리사, 세례요한 같은 이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거의 디오게네스 수준으로 복장을 갖추고 간편하게 살면서 진리를 추구한 사람들입니다. 최소한의 생계만을 소유하고 그 나머지는 자유로운 존재들이지 않았습니까?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사명에만 집중했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 흔적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 철학자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루소, 엘리야, 엘리사, 세례요한과 초대교회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와 그를 따르던 모든 이들의 정신과 삶의 방향과 태도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시대정신의 연장선상에서 간편하고 소박한 차림새로 선교 여행을 떠났던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두벌 옷과, 전대 하나와, 지팡이 뿐이냐는 여러분의 궁금증에 대한 답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견유학파스러운 양식은 선교사명 혹은 복음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것이며, 예수가 지시하는 가르침을 집중하여 성취하려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이래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고, 이런 마음가짐이라야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이걸 한 마디로 말하면 ‘청빈한 삶’입니다.
그런데 지난 날 기독교는 이 청빈을 잃었습니다. 교회도 더 이상 청빈을 가르치지 않으며, 누구도 청빈하게 살려고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패하다가 부패하다가 망한 게 중세의 교회였습니다. 청빈을 잃으면 교회도, 신앙도, 신앙하는 사람들도 모두 부패하게 됩니다. 이 ‘청빈’이란 세속적인 욕망 즉 물질에 탐착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는 마음과 태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 청빈을 거부하고 탐욕을 선택했습니다. ‘두벌 옷, 전대하나, 지팡이’를 버린 것입니다. 그릇된 자세로 길을 떠났으며,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입니다. 실패입니다.
그러면 중세는 어떻게 무너져가는 신앙을 회복했을까요?
그렇습니다. 베네딕투스와 성프란체스코 같은 수도원 운동입니다. 다시 ‘청빈’으로 돌아가는 삶을 선택하는 신앙인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저자거리에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들은 아예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리고 ‘청빈’ ‘순명’ ‘정절’을 실천정신으로 삼고 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두벌 옷, 전대하나, 지팡이’만으로 신앙생활을 바꾼 것입니다. 소멸되던 중세의 신앙이 여기서 살아났습니다.
20년 내에 한국기독교 인구도 절반으로 줄어들고, 지금 우리세대가 끝나면 누구도 교회에 나올 세대가 없다고 진단합니다. 연일 방송과 신문에는 목사와 교회의 타락과 비리가 보도됩니다. 영성이고, 성공이고, 거룩이고 뭐고 다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뭐가 옳고 그른지 분간을 하지도 못할 만큼 혼탁합니다. 교회를 나가는 게 오히려 위험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선택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도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종교는 정치판이거나 시장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덕도 없고 진리도 없으며 지혜도 없습니다. 아니 그런 것을 구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각자 가지가 필요한 욕망들을 무수하게 구하고 구합니다.
그런 시점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다시 듣게 됩니다.
“믿음과 인생길을 떠나라. 두벌 옷과, 전대 하나와, 지팡이만 갖고 가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모세에게 하셨던 음성을 다시 들었습니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두벌 옷’만으로 살라거나 ‘신발을 벗고 맨발로 살라’는 말씀은 모두 동의이어입니다. 다른 말이지만 같은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가난의 상징입니다, 청빈입니다. 탐욕의 거부입니다. 지팡이는 무장의 해제입니다. 평화의 상징입니다. 그렇다고 물질적인 무관심이거나, 무소유를 통한 개인의 평화만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청빈하게 살면서, 세상에 물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가르침과 우주의 질서에 순명하면서 싸웠습니다. 구조와, 악과, 악한 행실의 사람들과 겨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가치 전환과 삶의 방식을 바꿀 것을 호소했습니다. 이게 그들의 복음전도였으며, 전도방식이었고, 자신들을 향한 실천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요구, 권리, 욕구 등을 포기한채 말로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실존적인 결단을 통해 새로운 질서 즉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며 그것을 앞당기려고 수고한 이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특히 추석을 지내면서 기름기로 거북해진 우리의 몸처럼,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우리들 기독교의 기름기를 빼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 열려있는 그리스도의 삶의 표지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두벌 옷, 전대하나, 지팡이’만을 가진 기독교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욕망으로 기름져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우리 믿음의 몸을 걱정해야 할 때입니다.
마10:9-10
우선 오늘 설교는 ‘견유학파’가 뭔지를 설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낯선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 이름을 들어 보셨을 겁니다. 이 사람은 예수님 오시기 전 400년 경 그리스의 아테네에 살던 인물입니다. 그는 ‘무엇인가가 옳으려면 그것을 옳다고 여기는 사람이 여럿이어야 한다’는 이론을 펼친 분입니다. 이것이 후대의 민주주의의 시초가 되는 것입니다. 당시 고대 지중해 세게 즉, 예수님의 선교가 준비되던 이스라엘과 고린도의 그 주변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포기 한다든가, 자발적으로 가난하게 산다든가 하는 생각은 바보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은 요즘 사람들처럼 악착같이 벌어서 개처럼 사는 게 인생의 참다운 가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세상 풍조와 다른 삶의 이론을 말하는 이가 소크라테스였습니다. 그는 세속적인 쾌락으로부터는 초연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듯한 인간이 되려면 말입니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그냥 살아서는 안 되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세속적인 욕망에서 자유로워 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지혜는 덕과 같은 것인데, 이 덕이나 지혜는 욕망이 부재(혹은 자유)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철학과 삶의 양식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견유학파’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돈이나 명예에는 관심을 덜 갖고(자유하고)덕과 지혜로운 사람이 되는데 관심을 두고 사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죠. 여러분이 들어 보셨음 직한 사람 중에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디오게네스라는 철학자입니다. 그가 바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이어받은 견유학파입니다.
사실 그보다 더 견유학파로서 대표되는 사람은 안티스테네스라는 사람인데 세상에는 디오게네스가 더 알려졌습니다. 디오게네스는 아테네에 살면서 스스로 개라고 불릴 만큼 거지처럼 살았습니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소유방식을 넘어서는 초월적인 삶을 산 것입니다. 그는 최소한 생필품인 두벌 옷과 지팡이, 그리고 전대만을 지니고 살았던 최초의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삶 중에 개의 일화나 알렉산더 대왕과의 대화는 아주 유명합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저는 한 마리의 개에 불과 하오니 두벌 옷과 전대, 그리고 지팡이만을 가지고 다닌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이런 인물 중에는 교육학자로 유명한 장자크 루소가 있습니다.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교육철학을 설파한 분입니다. 이른바 자연철학의 루소도 소크라테스로부터 기인하는 견유학파의 한 갈래인 것입니다. ‘犬儒’란 ‘예절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외적인 사물에 매달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이만큼 준비 공부를 했으니 오늘 해야 할 설교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눈치 빠른 혼을 가진 이들은 이미 제가 앞에서 말씀을 드릴 때 소크라테스와 예수를,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이어보는 생각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살았다는, 두벌 옷과 전대와 지팡이만으로 사는 삶을 살았던 견유학파와 예수님의 초기 삶과 그의 제자들의 언동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순회철학자들이었던 것처럼,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합니다. 복음이란 당시로서는 ‘새로운 사상’이니만큼 ‘뉴 필로소피’였던 것이고, 그런 사상과 행동을 돌아다니면서 세상에 보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초기에 그의 제자들을 여러 지방으로 보내면서 그때까지 지중해를 중심으로 전파되던 소크라테스의 철학 즉, 견유자적인 복장과 채비로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게 두벌 옷과, 전대, 신발 한 켤레, 지팡이 정도입니다.
소크라테스가 예수님 오시기 이전 400년 전부터 세상을 바꾸는 힘은 인간의 욕망과, 세속적인 탐욕의 물질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덕과 지혜에서 비롯되며, 인간이 덕과 지혜를 얻어 세상을 바꾸고 인간이 달라지려면 물질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 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퍼뜨렸습니다. 그런데 400년이 지난 팔레스타인의 청년 예수가 전하는 복음과 그 방식도 소크라테스의 그것에서 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방식도 닮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비단 성서에 등장 하는 인물 중에 예수만이 아닙니다. 엘리야, 엘리사, 세례요한 같은 이들이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그들은 거의 디오게네스 수준으로 복장을 갖추고 간편하게 살면서 진리를 추구한 사람들입니다. 최소한의 생계만을 소유하고 그 나머지는 자유로운 존재들이지 않았습니까?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사명에만 집중했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 흔적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스며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 철학자 소크라테스, 디오게네스, 루소, 엘리야, 엘리사, 세례요한과 초대교회의 제자들 그리고 예수와 그를 따르던 모든 이들의 정신과 삶의 방향과 태도가 숨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시대정신의 연장선상에서 간편하고 소박한 차림새로 선교 여행을 떠났던 것입니다. 왜 하필이면 두벌 옷과, 전대 하나와, 지팡이 뿐이냐는 여러분의 궁금증에 대한 답이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견유학파스러운 양식은 선교사명 혹은 복음만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것이며, 예수가 지시하는 가르침을 집중하여 성취하려는데 그 뜻이 있습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이래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되는 것이고, 이런 마음가짐이라야만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겠기 때문입니다. 이걸 한 마디로 말하면 ‘청빈한 삶’입니다.
그런데 지난 날 기독교는 이 청빈을 잃었습니다. 교회도 더 이상 청빈을 가르치지 않으며, 누구도 청빈하게 살려고 교회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패하다가 부패하다가 망한 게 중세의 교회였습니다. 청빈을 잃으면 교회도, 신앙도, 신앙하는 사람들도 모두 부패하게 됩니다. 이 ‘청빈’이란 세속적인 욕망 즉 물질에 탐착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 하는 마음과 태도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 청빈을 거부하고 탐욕을 선택했습니다. ‘두벌 옷, 전대하나, 지팡이’를 버린 것입니다. 그릇된 자세로 길을 떠났으며, 그렇기 때문에 복음의 영향력이 사라진 것입니다. 실패입니다.
그러면 중세는 어떻게 무너져가는 신앙을 회복했을까요?
그렇습니다. 베네딕투스와 성프란체스코 같은 수도원 운동입니다. 다시 ‘청빈’으로 돌아가는 삶을 선택하는 신앙인들이 등장한 것입니다. 저자거리에서는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들은 아예 세상을 등졌습니다. 그리고 ‘청빈’ ‘순명’ ‘정절’을 실천정신으로 삼고 살기 시작했습니다. 다시 ‘두벌 옷, 전대하나, 지팡이’만으로 신앙생활을 바꾼 것입니다. 소멸되던 중세의 신앙이 여기서 살아났습니다.
20년 내에 한국기독교 인구도 절반으로 줄어들고, 지금 우리세대가 끝나면 누구도 교회에 나올 세대가 없다고 진단합니다. 연일 방송과 신문에는 목사와 교회의 타락과 비리가 보도됩니다. 영성이고, 성공이고, 거룩이고 뭐고 다 휩쓸려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뭐가 옳고 그른지 분간을 하지도 못할 만큼 혼탁합니다. 교회를 나가는 게 오히려 위험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교회를 선택하는 일만큼 어려운 일도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제 종교는 정치판이거나 시장판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덕도 없고 진리도 없으며 지혜도 없습니다. 아니 그런 것을 구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각자 가지가 필요한 욕망들을 무수하게 구하고 구합니다.
그런 시점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을 다시 듣게 됩니다.
“믿음과 인생길을 떠나라. 두벌 옷과, 전대 하나와, 지팡이만 갖고 가라!”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모세에게 하셨던 음성을 다시 들었습니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두벌 옷’만으로 살라거나 ‘신발을 벗고 맨발로 살라’는 말씀은 모두 동의이어입니다. 다른 말이지만 같은 뜻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모두 가난의 상징입니다, 청빈입니다. 탐욕의 거부입니다. 지팡이는 무장의 해제입니다. 평화의 상징입니다. 그렇다고 물질적인 무관심이거나, 무소유를 통한 개인의 평화만을 추구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들은 청빈하게 살면서, 세상에 물들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가르침과 우주의 질서에 순명하면서 싸웠습니다. 구조와, 악과, 악한 행실의 사람들과 겨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가치 전환과 삶의 방식을 바꿀 것을 호소했습니다. 이게 그들의 복음전도였으며, 전도방식이었고, 자신들을 향한 실천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의 요구, 권리, 욕구 등을 포기한채 말로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실존적인 결단을 통해 새로운 질서 즉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며 그것을 앞당기려고 수고한 이들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특히 추석을 지내면서 기름기로 거북해진 우리의 몸처럼,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우리들 기독교의 기름기를 빼는 것,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만을 위해 열려있는 그리스도의 삶의 표지를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두벌 옷, 전대하나, 지팡이’만을 가진 기독교를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욕망으로 기름져 비대해질 대로 비대해진 우리 믿음의 몸을 걱정해야 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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