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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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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6:7-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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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2013.9.29 주일 http://sungamch.net |
신발의 흙을 털 때 입니다.
막6:7-13
어떤 목사가 심방을 가서 성경말씀으로 권면을 했습니다. 아마, 신앙생활을 좀 똑바로 하라고 했나 봅니다. 그랬더니 그 교우가 목사의 설교를 마땅치 않게 여기면서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러자 목사가 그 집에서 나올 때 신발의 흙을 탁탁 털면서 “에이,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우리교회 교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자녀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교회 안 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했습니다.
여러분!
상상이 됩니까? 왜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동안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불편하게도 오늘 성경말씀과 제게 예로 들은 ‘어느 목사의 심방후기’는 다르지 않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발에 묻은 흙 또는 먼지를 털어낸다는 것은 일종의 절교입니다. 결별입니다. 사도행전 13:51을 보세요.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 일행을 박해합니다. 그때 그들은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너희와는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평소 마시는 컵에는 약2만 5천개의 먼지 알갱이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신문을 한 장 넘길 때에는 15만개의 먼지 입자를 마신다는 겁니다. 과학이 이토록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흙먼지는 인간의 삶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의 죄나 허물이 발이나 신발에 붙어 있다고 믿는 게 구약시대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왕상2:5). 유대인들은 이방인 지역을 여행하고 팔레스타인 국경을 넘을 때는 그 경계선에서 발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버리곤 했습니다. 더 이상 이방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방인 땅에서 자란 식물도 갖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식물에 묻어서 흙이 들어옴으로 거룩한 땅에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의 집이나 성을 나와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렸다는 것은 이제부터 그들을 확실한 이방인으로 여긴다는 의미가 있는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대상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평화의 복음을 거부했으므로 이제 이 집이나 성은 하나님의 평화와는 무관한 영역이라는 정결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특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지난주일 밤에 이 원고를 쓰는데 신문사의 어떤 이가 안부 전화를 해서는 자신이 대통령의 직속위원회중에 하나인 ‘문화융성위원회’에 강원도 몫의 위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 많은 대통령의 위원회에 위원이 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닌데, 만약 대통령의 특사라면 그 위엄과 역할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는 곧 왕의 권한을 갖고 파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왕의 특사가 전하는 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상관을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집에서 묻은 먼지를 툴툴 떨면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기 전까지 일평생 걷는 길이를 누가 재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지구 둘레(2200년 전에 에라토스테네스 39,600km였다. 실제로는 40,077km이다)의 21/2에 해당하는 약 10만 5천 킬로미터를 걷는다고 합니다. 요즘이야 태어나면서부터 유모차 타고 그 다음에는 자동차를 타다가 장의차를 타고 무덤으로 가는 세상이니 그렇게 많이 걷고 살지는 않을 테지만, 1세기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은 걸어 다녀야 했으니 그 발과, 그 발을 감싼 신발의 몰골이 어땠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나라는 사막의 뜨거운 벌판이 대부분입니다. 신발이래야 우리가 샌들이라고 부르는 되다만 모양새입니다. 성지 순례를 가서 시내산을 오를 때 낙타를 끄는 그들의 발을 보면 여전히 샌달과 진배없는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다 샌달을 신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문화는 그 사람이 신발을 신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그가 자유민인지 노예인지를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자유민은 샌달을 신고 다녔고 노에는 맨발로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루타코스는 ‘맨발은 노예의 비천함의 표시’라고 했습니다. 신발은 정치적인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자신과 자신의 후계자 외에는 누구도 붉은색 장화를 신지 못하게 했습니다. 네로 황제는 두 번 째 부인 포페아 사바나가 순금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었다는 이유로, 은으로 만든 자신의 구둣발로 그녀를 차서 죽였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샌들은 정치적인 권력이나 신분의 의미를 넘어서서 종교적인 정결의 상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발에서 흙먼지만을 터는 게 아닙니다. 이방인 지역을 지나 팔레스타인으로 넘어 올 때 샌들의 흙먼지를 터는 것은 이방인 지역을 통과 했지만 그는 자신의 거룩함을 유지하겠다는 것이고, 그렇게 흙먼지를 털어냄으로 이방인과 자신을 구별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지 내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의 선교 파송 이야기에서 먼지를 털어버린다는 의미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고 평화의기원마저 거부하는 이들은 모두 이방인으로 여긴다는 말씀인 것이고, 나는 결코 이방인의 자리에 있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있어, ‘누가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냐?’ 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는 정말 예수의 사람이 맞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이방인이냐? 한 때 그것으로 성도와 세상 사람으로 구분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이제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의 구별이 별로 없는 그런 세상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의 삶의 가치와 삶의 방향 삶의 내용이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과 그렇게 별반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 교회에 나오느냐 아니냐로 ‘크리스챤’과 ‘비 크리스챤’을 나누는 일은 무의미 해졌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냐 아니냐는 오직, 전도자들이 전하고 가르쳤던 ‘하나님의 나라사람으로서의 방식에 삶의 가치와 방향을 맞추고 사느냐 아니냐’ 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세상에 전한 복음의 원형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이미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의식이나 생각과 가치관과 함께 사는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너의 생각, 세상 사람이 사는 생각과 삶의 방식을 그리스도의 생각과 방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렇게 바꾸기를 거절하면 그는 이방인이고, 바꾸겠다고 받아 들여 새로운 가치로 사는 사람들은 성결 된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고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막6:8-19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 열둘을 짝 지워 세상으로 내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면 마치 군대의 장관이 부하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장면과 흡사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파렝게일렌’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스승이 학생을 가르칠 때’ ‘황제가 명령을 내릴 때’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하명하듯이 하는 겁니다.
자, 이제 우리도 우리 스스로에게 ‘내가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교인인가’를 묻는 신발의 흙을 털어야합니다. ‘회개한 사람의 삶’을 사는가 살지 않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다른가 다르지 않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신발의 흙을 터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에, 세상속으로 들어가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를 영접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영접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그대로 주저앉아 눌러 살지 말고 신발의 흙을 털고 선언하며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실천, 자기 스스로의 신발에서 흙을 터는 일과, 그래서 명백히 자신의 예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일과, 아직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일과, 회개하지 않는 세상에 그대로 눌러 앉아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죄로부터 떠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배받아야 하는 존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고, 세상을 향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살이’ 즉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입니다. 그것은 신발의 흙을 털어 버리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부디 여러분의 신발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자신과 세상과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자리에 서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막6:7-13
어떤 목사가 심방을 가서 성경말씀으로 권면을 했습니다. 아마, 신앙생활을 좀 똑바로 하라고 했나 봅니다. 그랬더니 그 교우가 목사의 설교를 마땅치 않게 여기면서 불쾌하게 여겼습니다. 그러자 목사가 그 집에서 나올 때 신발의 흙을 탁탁 털면서 “에이, 당신은 이제 더 이상 우리교회 교인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자녀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당신은 교회 안 다니는 사람과 같습니다.” 했습니다.
여러분!
상상이 됩니까? 왜 상상이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동안 이 본문을 어떻게 이해하셨습니까? 불편하게도 오늘 성경말씀과 제게 예로 들은 ‘어느 목사의 심방후기’는 다르지 않습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 발에 묻은 흙 또는 먼지를 털어낸다는 것은 일종의 절교입니다. 결별입니다. 사도행전 13:51을 보세요.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전도할 때 유대인들을 선동하여 바울 일행을 박해합니다. 그때 그들은 ‘발의 티끌을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너희와는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평소 마시는 컵에는 약2만 5천개의 먼지 알갱이가 들어 있다고 합니다. 신문을 한 장 넘길 때에는 15만개의 먼지 입자를 마신다는 겁니다. 과학이 이토록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도 흙먼지는 인간의 삶에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의 죄나 허물이 발이나 신발에 붙어 있다고 믿는 게 구약시대 사람들의 생각이었습니다(왕상2:5). 유대인들은 이방인 지역을 여행하고 팔레스타인 국경을 넘을 때는 그 경계선에서 발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 버리곤 했습니다. 더 이상 이방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표시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이방인 땅에서 자란 식물도 갖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식물에 묻어서 흙이 들어옴으로 거룩한 땅에 더러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받아 들이지 않는 유대인들의 집이나 성을 나와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버렸다는 것은 이제부터 그들을 확실한 이방인으로 여긴다는 의미가 있는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대상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평화의 복음을 거부했으므로 이제 이 집이나 성은 하나님의 평화와는 무관한 영역이라는 정결의 표시이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그리스도의 특사로 파견되었습니다. 지난주일 밤에 이 원고를 쓰는데 신문사의 어떤 이가 안부 전화를 해서는 자신이 대통령의 직속위원회중에 하나인 ‘문화융성위원회’에 강원도 몫의 위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 많은 대통령의 위원회에 위원이 되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닌데, 만약 대통령의 특사라면 그 위엄과 역할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는 곧 왕의 권한을 갖고 파견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왕의 특사가 전하는 바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상관을 두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집에서 묻은 먼지를 툴툴 떨면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죽기 전까지 일평생 걷는 길이를 누가 재어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지구 둘레(2200년 전에 에라토스테네스 39,600km였다. 실제로는 40,077km이다)의 21/2에 해당하는 약 10만 5천 킬로미터를 걷는다고 합니다. 요즘이야 태어나면서부터 유모차 타고 그 다음에는 자동차를 타다가 장의차를 타고 무덤으로 가는 세상이니 그렇게 많이 걷고 살지는 않을 테지만, 1세기 예수님 당시의 제자들은 걸어 다녀야 했으니 그 발과, 그 발을 감싼 신발의 몰골이 어땠는지는 짐작이 가고도 남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의 나라는 사막의 뜨거운 벌판이 대부분입니다. 신발이래야 우리가 샌들이라고 부르는 되다만 모양새입니다. 성지 순례를 가서 시내산을 오를 때 낙타를 끄는 그들의 발을 보면 여전히 샌달과 진배없는 신발을 신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당시의 모든 사람들이 다 샌달을 신고 다니는 것은 아닙니다. 고대 그리스문화는 그 사람이 신발을 신고 있는지 아닌지를 보면 그가 자유민인지 노예인지를 구별할 수 있었습니다. 당연히 자유민은 샌달을 신고 다녔고 노에는 맨발로 다녀야 했습니다. 그리스의 철학자 플루타코스는 ‘맨발은 노예의 비천함의 표시’라고 했습니다. 신발은 정치적인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로마의 황제 아우렐리우스는 자신과 자신의 후계자 외에는 누구도 붉은색 장화를 신지 못하게 했습니다. 네로 황제는 두 번 째 부인 포페아 사바나가 순금으로 신발을 만들어 신었다는 이유로, 은으로 만든 자신의 구둣발로 그녀를 차서 죽였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샌들은 정치적인 권력이나 신분의 의미를 넘어서서 종교적인 정결의 상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신발에서 흙먼지만을 터는 게 아닙니다. 이방인 지역을 지나 팔레스타인으로 넘어 올 때 샌들의 흙먼지를 터는 것은 이방인 지역을 통과 했지만 그는 자신의 거룩함을 유지하겠다는 것이고, 그렇게 흙먼지를 털어냄으로 이방인과 자신을 구별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자지 내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외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서에 나오는 제자들의 선교 파송 이야기에서 먼지를 털어버린다는 의미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고 평화의기원마저 거부하는 이들은 모두 이방인으로 여긴다는 말씀인 것이고, 나는 결코 이방인의 자리에 있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있어, ‘누가 그리스도인이고 누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냐?’ 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는 정말 예수의 사람이 맞냐?’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고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이방인이냐? 한 때 그것으로 성도와 세상 사람으로 구분을 했습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이제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나 다니지 않는 사람의 구별이 별로 없는 그런 세상입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의 삶의 가치와 삶의 방향 삶의 내용이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과 그렇게 별반 차이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단지 교회에 나오느냐 아니냐로 ‘크리스챤’과 ‘비 크리스챤’을 나누는 일은 무의미 해졌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냐 아니냐는 오직, 전도자들이 전하고 가르쳤던 ‘하나님의 나라사람으로서의 방식에 삶의 가치와 방향을 맞추고 사느냐 아니냐’ 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세상에 전한 복음의 원형은 무엇입니까?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이 회개는 이미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의식이나 생각과 가치관과 함께 사는 방식을 바꾸는 것입니다. 너의 생각, 세상 사람이 사는 생각과 삶의 방식을 그리스도의 생각과 방식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입니다. 이렇게 바꾸기를 거절하면 그는 이방인이고, 바꾸겠다고 받아 들여 새로운 가치로 사는 사람들은 성결 된 사람 즉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기원하는 것이고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막6:8-19에 보면, 예수님이 제자 열둘을 짝 지워 세상으로 내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보면 마치 군대의 장관이 부하들을 전쟁터로 내보내는 장면과 흡사합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파렝게일렌’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스승이 학생을 가르칠 때’ ‘황제가 명령을 내릴 때’사용하는 언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선교를 하명하듯이 하는 겁니다.
자, 이제 우리도 우리 스스로에게 ‘내가 과연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교인인가’를 묻는 신발의 흙을 털어야합니다. ‘회개한 사람의 삶’을 사는가 살지 않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세상과 나는 다른가 다르지 않는가를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기 신발의 흙을 터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에, 세상속으로 들어가 세상으로 하여금 우리를 영접하게 해야 합니다. 만약 영접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그대로 주저앉아 눌러 살지 말고 신발의 흙을 털고 선언하며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실천, 자기 스스로의 신발에서 흙을 터는 일과, 그래서 명백히 자신의 예수 사람으로서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일과, 아직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는 일과, 회개하지 않는 세상에 그대로 눌러 앉아 그들과 함께 살고 있는 죄로부터 떠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세상에 지배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배받아야 하는 존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지배를 받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하고, 세상을 향해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외쳐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살이’ 즉 ‘그리스도인으로 살기’입니다. 그것은 신발의 흙을 털어 버리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부디 여러분의 신발에 묻은 흙먼지를 털고 자신과 세상과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자리에 서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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