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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후5:14-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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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나를 위해 살지 말고 예수를 위해 살자
본문: 고린도후서 5: 14- 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마요네즈와피클 그리고 케첩 등으로 전 세계를 석권한 하인츠 식품 회사의 창시자 헨리 존 하인츠는 1919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 자신의 어머니인 애너 마거레타 하인츠를 위해 예배당을 건립하라는 유언을 자식들에게 남겼습니다. 이에 하인츠의 자녀들은 5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피츠버그 대학 캠퍼스 내에 자신들의 부친과 할머니를 위한 대예배당을 완공하고, 그 이름을 ‘하인츠 기념 예배당’이라고 붙였습니다. 그 이후, 그림처럼 아름다운 그 예배당은 피츠버그의 상징물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당을 직접 찾아가 그 어느 곳을 둘러보아도, 심지어는 교회 안내서에서까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볼 길은 없습니다. 물론 거기에도 목사가 있고 주일마다 예배가 드려지고 있지만, 어느 모로 보아도 그 예배당은 이름 그대로 주님과는 전혀 무관한 오직 하인츠의 예배당일 따름입니다. 하인츠 예배당은 오늘날의 교회가 주님의 교회이기보다는 세상에서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의 교회가 되어 있는 현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 중심의 사고에서 주님 중심으로, 세상을 압도하는 논리에서 영원의 논리로 사고의 축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속적 사고방식이나 자기 과신의 부인 없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있을 수 없습니다. 진리의 좁은 문을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세속적 사고의 넓은 문을 포기했음을 뜻합니다. 바로 여기로부터 그리스도인의 순결과 거룩이 샘솟는 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입으로는 예수님을 주(主)라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주인 노릇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종은 자기 마음대로 살지 않고 주인의 뜻대로 삽니다.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6:46) 내가 삶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 24)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자존심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입니다. 사람들에게 금전적인 어려움, 육체적인 고통보다 더욱 더 힘든 일이 있다면 자존심이 상할 때일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자기를 부인하라! 자존심을 내려놔라”
우리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며 사신 모델이십니다. 사람들은 주님을 향하여 손가락질하고 침을 뱉고, 빰을 때리는 온갖 능욕과 멸시를 했지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으시며 털깎는 자 앞에 있는 양과 같이 침묵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며 십자가를 지고 살 때 다른 사람들은 알아주지 않아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다 보시고 들으시고 아시므로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며 무소부재하신 영광의 하나님이시고 모든 복의 근원아신 하나님, 영원한 사랑의 하나님이며, 은밀한 중에 보시고, 은밀한 중에 갚아주시는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이 하나님 사역의 원리입니다. 광야 학교에 입학한 사람은 누구나 자기 부인의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 무시가 아니며, 지나친 자기 비하도 아닙니다.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멸시도 아닙니다. 자기 부인은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인식하면서 자기를 부인합니다. 그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 대한 분명한 ‘자아인식’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14:9)”고 하시며 자신이 곧 하나님이신 것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앞에 두고서는 주님은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침묵으로 일관하셨습니다. 죽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불법 재판 앞에서는 어땠습니까? “네가 그리스도냐?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 앞에서 주님은 그들이 책잡으려는 것을 뻔히 아시면서도 긍정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때로 침묵과 긍정으로 ‘예수님 자신이 곧 그리스도요 만왕의 왕이라는 사실’을 결코 숨기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스스로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여기에 우리 주님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자신이 곧 하나님이시면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자기를 낮추시며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자원해서 십자가를 지셨던 것입니다(빌2:7-8). 여기에 ‘자기 부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으로서 자기를 부인하신 예수님, 그것만이 하나님의 구속의 사업을 완성하는 일이었기에 죽기까지 자기를 쳐서 부인하신 것입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를 부인하는 일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 존재의 가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자기를 부인해야 할 때 그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모세는 자기 존재에 대한 가치를 잘 알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애굽 궁중의 40년 생활에서 모든 학술을 다 익혔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잘 훈련받은 유능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학문에 통달했고, 지도력을 습득하기까지 철저히 자기를 훈련하고 절제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일을 해야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40세 되었을 때의 생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행7:25)”.
모세는 애굽 사람을 죽인 후에 자기 동족 이스라엘이 그의 숨은 애국심을 알아주기를 내심 기대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모세가 이미 40세에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 사명에 대한 인식이 분명히 있었음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기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부인하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부인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것이 하나님 사역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광야에서 자기를 부인하는 훈련을 받아야 했습니다. 모세는 광야에서 자기 증오가 아닌 자기 부인을 함으로써 자기 성취나 자기실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고 실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8:3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허물과 죗값을 치르기 위해 대신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남을 위한 자기희생입니다. 남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자기가 수치를, 남을 평안하게 하기 위해 자기가 고난을, 남을 살리기 위해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서 어두운 밤하늘에 빛난 별과 같은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보내는 곳에서 천국의 비밀을 가르치며 복음을 전파하며 병든 자를 고치는 일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희생하는 자들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남을 해롭게 하는 십자가의 원수인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십자가를 져야 부활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좇는 길은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데서부터 출발합니다. 자기 부인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김남준 목사는 자기 부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기 깨어짐이란 신자 안에 있는 부패한 자기 사랑이 파괴되는 것을 의미 하는데, 이는 죄에 대한 사랑과 거기에 기반을 둔 자기 의에 대한 신뢰가 깨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거듭난다는 것은 세상이 옷 입혀준 옛사람의 모든 가치와 기준, 습관과 형식에서 벗어나 본래 창조된 목적에 따라 하나님의 의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반드시 자기부인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나 부정이 아닌 세상의 가치관이나 욕심으로 물든 거짓된 자아를 부인하고 오직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의의 길을 갈 것을 결단해야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쫓아가는 길, 이것이 진리의 길이요, 하나님께로 가는 영원한 생명길입니다.
또 성경은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5)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눅14: 26)
우리가 주안에서 아름다운 열매를 많이 맺고, 맡은 본분을 다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목숨을 버릴 마음의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
우리 모두 주의 일을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성도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 7- 8)
전 뉴저지주의 상원의원인 드와이트 모로우씨가 뉴욕시를 떠나는 가차를 탔을 때 그는 기차표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그 표를 꼭 찾아야 하는데!"하고 중얼거렸습니다. 옆에서 기다리던 차장이 "모로우씨, 걱정하지 마세요. 표 사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겠습니다. 후에 찾으시게 되면 우편으로 보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모로우씨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어려움은 그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제가 가는 행선지를 알기 위해서 그 기차표를 찾아야만 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목적이 없이 허송세월을 하는 사람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어떤 곳인가, 자신의 현재의 존재가치는 어디에 있는 가? 이를 생각하여 올바른 결론에 도달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즉 먼저 꿈과 이상을 가지고 이것을 이룩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비젼이 없습니다. 뚜렷한 생의 목적이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지 모르고 있기 때문에 하루 하루의 삶을 허무하게 보내고 있습니다. 되는대로 살고 있습니다. 내일이면 막연히 오늘보다 나아지겠지 하며 그날 그날을 덧없이 살고 있습니다. 설혹 목적이 있다 해도 대부분이 내 개인의 부귀영화와 행복을 이루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웃에는 무관심하고 자신만을 위해 곡간을 지으려고 한 어리석은 부자처럼 말입니다.(눅12:16-21) 그러나 이러한 이기적인 목적을 가진 자가 많을수록 사회는 더욱 혼란해지고 죄악은 날로 더해 갑니다. 여러분의 삶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 소원이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름답게 보실 수 있는 소원입니까?
사람의 인격을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그가 처한 처지나 지위에 따라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어떤 목적을 향하여 살고 있고, 그의 평생의 소원이 무엇인가에 달려있습니다. 가령 그의 평생 소원이 그저 잘입고, 잘먹고, 편안히 사는 정도라면 그 사람의 수준은 동물적 인간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심는 대로 거둡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 부터 썩어질 것을 거둡니다.(갈6;7-9)
만약 어떤 교인이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소원을 아뢰는데 항상 자기와 자기 가족의 생계와 건강, 그리고 돈을 벌어 부자되거나 세상 살아갈 것만을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듣지 않으시며, 이러한 육신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롬8:5-8) 하나님께서는 먹을 것, 입을 것, 살 것을 염려하지 말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하셨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앞에 나아가서 기도할 때,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다스리기 위해 지혜를 구하자, 주님은 구하지 아니한 부귀영화까지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돈이 탐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황금은 무엇인가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지 돈 자체가 생의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 명성을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세상에 보람 있는 선한 업적을 남김이 없이 이름이 나는 것만을 바라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귀하고 보람 있는 일을 남겨 놓는 다면 자연히 그 이름이 천추에 빛날 것입니다. 그러나 참다운 생의 결실이 없이 이름을 남길 줄 생각하면 그것은 어리석거나 불행한 사람의 이름에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정과 기분에 사는 사람들이 어찌 쾌락의 단꿈을 싫다 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라지는 쾌락과 순간적인 기분을 위하여 사는 생이 얼마나 속절없고 무의미하다는 것을 우리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습니다.(약4:14) 참된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보다도 참으로 그리운 것이 있습니다. 돈도, 명예도, 쾌락도 다 팔아서 그것만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 싶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람은 무엇 때문에 사는 지를 알게 됩니다. 모든 것을 팔아서 생명을 얻고, 온갖 것을 바쳐서 하나님을 찾고 싶습니다. 크리스천은 예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생을 순화시켜 주시고, 우리의 생에 날개를 가져와 저 푸른 이상의 하늘과 꿈과 자유와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실 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14:6)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을 떠나서 아무도 하나님께 갈 수 없습니다. 목사도 장로도 선생도 돈도 명예와 권세도 예수님 없이 우리를 죽음의 길에서 구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많은 교인들이 빈 항아리와 같이 내용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피곤하고 생의 무거운 짐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그것은 그들의 삶 속에 진정으로 예수님을 모시고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입으로는 예수님을 주로 시인합니다. 그러나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하여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지 않습니다.
참된 크리스천들의 삶의 목적과 사명은, 많은 사람을 옳은 길, 의로운 길로 인도하고(단12:3),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죽겠다는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막8:35, 행20:24)
오늘 이 시간 나의 평생의 소원이 과연 무엇인가? 평상시 나의 주된 행동과 소원이 하나님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며 살고 있는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 기도: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나의 몸과 마음을 드리오니 주여 받아 주셔서 세상 살아 갈 동안 찬송하게 합소서. 나의 물질과 정성 드리오니 주여 받아 주셔서 하늘 나라 위하여 주님 뜻대로 쓰소서. 나의 재능. 시간 모두 드리오니 주여 받아 주셔서 주의 복음 위해 쓰소서. 오직 주님만 바라보며 많은 사람을 의의 길, 옳은 길로 인도하는 사명을 다할 수 있도록 건강과 지혜와 힘을 주시고 늘 보호해 주시고 인도해주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갈릴리공동체)
* 갈릴리 공동체 카페 주소 : http://cafe.daum.net/Galileecommunity
(http://blog.naver.com/allcome , http://blog.naver.com/jfoc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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