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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인생을 건축하는 법

마태복음 이한규 목사............... 조회 수 2158 추천 수 0 2013.11.24 22:4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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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마7:24-29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좋은 인생을 건축하는 법

(마태복음 7장 24-29절)

 

< 좋은 인생을 건축하는 법 >

 집을 지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기초입니다. 신앙생활에서도 기초가 중요합니다. 신앙 건축은 집 건축과 유사합니다. 집이 필수품이듯이 신앙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종교는 있는 게 좋아! 교회에 나가면 마음이 편해져! 주일에 예배드리고 골프 치면 공도 잘 맞아!” 그처럼 신앙생활을 가벼운 취미로 하지 말고 절대가치로 여기고 하십시오. 사람은 병들고 죽는 존재기에 신앙 문제는 인생의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심지어는 무신론자도 신과 종교의 필요성을 무의식중에 노출할 때가 많습니다.

 오래 전에 미국 무신론협회 회장이 공립학교에서의 기도 금지 소송을 냈습니다. 그 재판에서 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이기자 너무 좋아서 법정에서 소리쳤습니다. “오 마이 갓(Oh! My God!)” 그때 뉴스에 이렇게 보도되었습니다. “무신론자가 승리에 대한 감사를 하나님께 돌렸다!” 무신론자들이 신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도 버릴 수 없는 신 의식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없으면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무신론도 문제이지만 운명론도 문제입니다. 운명론자들은 삶이 운명적으로 다 결정되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결정된 운명에 집착해서 삶이 수동적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성도는 미래의 약속이 너무 뚜렷하기에 예정설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예정설의 예정은 “미래가 결정되었다!”는 의미보다는 “미래가 약속되었다!”는 의미가 큽니다. 믿음생활은 하나님의 약속을 기초로 삼아 매일의 삶을 능동적으로 건축하는 것입니다.

 미신적인 운명론과 기독교의 예정론은 다릅니다. 운명론은 “이미 미래가 결정되었기에 발버둥치지 말라!”는 말이고 예정론은 “미래의 승리가 약속되었기에 삶을 멋있게 건축해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집을 다 지어서 주시기보다는 집을 건축할 수 있는 자재와 기회를 주십니다. 그 자재와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면 누구나 멋진 인생의 집을 건축할 수 있습니다. 좋은 인생의 집을 건축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가능성의 사고를 가지십시오

 본문 말씀은 지상 최대의 설교인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결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시작하면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누구든지”라고 말씀했습니다(24절). 누구든지 자기가 하기에 따라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암시입니다. 축복의 가능성에는 운명이나 성별의 차별도 없고, 집안환경이나 자라온 배경이나 나이에 따른 차별도 없습니다. 지금부터라도 준비하면 누구든지 복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축복의 희망과 인물 되는 비전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좌절하거나 불평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복된 삶의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계속 이렇게 고백하며 사십시오. “예수님이 ‘누구든지’라고 했다. 그 ‘누구든지’에는 나와 내 자녀도 포함될 수 있다. 결코 포기하지 말자! 지금부터 다시 시작해보자!”

 누구에게나 축복의 가능성이 있듯이 불행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어느 순간에 눈물 골짜기를 통과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열심히 그물을 내렸는데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새벽을 맞이할 때도 있고 사랑하는 사람과 눈물로 이별해야 하는 상황이 생길 때도 있습니다. 인생에는 그런 불행의 가능성이 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불행의 가능성 속에서도 잡초 속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듯이 행복을 찾아나가며 사는 것입니다. 그 행복의 클로버가 작은 것 같아도 남과 비교하지 말고 감사하십시오. 부러워하면 지는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하는 사람이 가장 부요하고 성숙한 사람입니다. 현재 모습이 잡석과 같아도 감사와 믿음 훈련을 통해 지속적으로 자신을 다듬으면 점점 대리석과 같은 복된 존재가 될 것입니다.

2.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사십시오

 누구든지 축복 가능성은 있지만 누구나 다 축복받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축복받습니까? 본문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이 말씀에서 ‘나의 이 말’이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뜻합니다. 즉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지금 강단과 TV에서 홍수처럼 흘러나오는 말씀 중에는 산상수훈의 원리와는 전혀 동떨어진 기복주의를 조장하는 말씀들도 많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복 받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낫습니다. 예수 이름으로 사탄이 물러갑니다.” 그런 말에는 산상수훈의 원리나 향기가 느껴지지 않고 넓은 문으로 가도록 조장하는 느낌만 납니다. 하나님을 목적으로 삼고 잘 믿으면 복을 받는다는 믿음은 필요하지만 복을 목적으로 삼고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하는 기복주의는 복을 가져다주기는커녕 오히려 고난을 가져다줍니다.

 부자가 가장 환멸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을 노리고 친해지려고 접근하는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부모조차도 자식이 돈을 노리고 효도하면 싫은 법입니다. 그처럼 자신을 순수하게 좋아하지 않고 무엇인가 유익을 얻는 이용대상으로 삼으면 누구나 싫어합니다. 왜 기복주의자는 복에 그토록 집착해도 복을 받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이용해 복을 얻으려는 불순한 마음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이 원하는 복을 얻지 못하면 원망도 잘하고 시험도 잘 듭니다. 그런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이 복을 주고 싶겠습니까?

 가을이면 어떤 교회는 <수험생을 위한 40일 특별새벽기도회>를 합니다. 저도 한때 했었지만 요즘은 안 합니다. 그런 집회가 신앙을 크게 왜곡시킬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입시기도를 하면서 실력 이상의 점수를 얻기를 기대합니다. 기대치가 올라가니까 점수가 평소 실력보다 약간만 잘 나오고 실력 정도만 나와도 실망합니다. 게다가 점수가 못 나오면 시험에 들어서 ‘시험을 위한 기도’가 ‘시험에 드는 기도’가 될 때가 많습니다.

 물론 이렇게 바르게 기도하면 됩니다. “하나님! 제 자녀가 최선을 다해 시험을 준비하고 시험 때문에 믿음생활이 후퇴하지 않게 하소서! 시험 전날에는 편안한 잠을 주시고 시험 당일에는 평안을 주셔서 제 실력을 발휘하게 하소서! 그러나 시험결과가 나빠도 인생이 한 번의 시험으로 다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알고 결코 실망하지 않게 하소서!” 그러나 입시기도회에서 누가 그렇게 기도합니까? 대부분 기적적으로 점수가 잘 나오기를 기도합니다.

 입시에서 확률적으로 5% 정도는 기대 이상으로 점수가 잘 나오고 20% 정도는 기대치에 가깝게 나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대개 실력보다 더 높은 점수를 기대하기에 그 기대치에 못 미치는 사람이 80%는 됩니다. 그들은 시험을 못 쳤다고 여기니까 결국 <수험생을 위한 특별기도회>는 대략 80%를 시험 들게 하는 기도회가 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입시철에는 교회에서 오히려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한국의 입시과열 현상이 진정되어 참된 복이 무엇인지 깨닫게 하시고 우리 교인들이 시험으로 시험 들지 않게 하소서!”

 기복주의는 복을 더 못 받게 만듭니다. 합격에 집착하면 더 합격하지 못하고 치유에 집착하면 더 치유 받지 못합니다. 반면에 합격과 치유를 잊을 정도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뜻에 집중하면 오히려 합격과 치유의 은혜를 더 입습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산상팔복을 비롯해서 거의 모든 말씀이 “십자가를 지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그런 말씀을 듣고 행할 때 건강하고 복된 인생의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3. 시험을 믿음으로 극복하십시오

 기복주의자와 참된 신자는 어떻게 구분됩니까? 둘의 겉모습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본문 앞 22절 말씀을 보면 기복주의자가 더 “주여! 주여!” 하고, 더 선지자처럼 행동하고, 더 귀신을 쫓아내는 행위를 하고 더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사람들을 불의하게 보시고 물리치십니다(23절). 하나님은 외적인 능력 과시를 아주 싫어하십니다. 결국 기복주의자의 능력 집회에 가는 것은 가장 복을 못 받는 길입니다.

 기적적이고 화려한 신앙열매는 적어도 신앙의 기초만은 바로 세우십시오. 기적 중심적인 신앙은 기적을 더 멀어지게 합니다. 혹시 기적을 체험해도 그 다음에 영혼을 망칩니다. 사탄도 기적을 줄 수 있습니다. 사탄은 기적으로 예수님까지 유혹했습니다. 그것이 기적 중심적인 신앙의 위험성을 잘 말해줍니다. 더 나아가 기적에 집착하면 영혼이 심각하게 망가집니다.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기복주의에 빠지지 않고 죽는 것이 훨씬 유익입니다.

 사탄은 능력과 물질과 다수로 영혼을 유혹합니다. 그러므로 외형적인 것에 신앙의 기초를 두면 유혹하기도 쉽고 유혹받기도 쉽게 되면서 부실영혼이 양산됩니다. “아멘!”을 잘하고 “주여! 주여!”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다 좋은 신앙은 아닙니다. 또한 기적과 능력이 많이 나타난다고 좋은 신앙도 아닙니다. 진짜 신앙은 비바람이 불 때 판명됩니다. 고난의 비바람이 불 때 “믿어도 똑같네!”하고 믿음을 포기하면 그 믿음은 기복적인 모래성 믿음이지만 그때도 예배와 감사를 잃지 않고 믿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반드시 참된 복을 받을 것입니다.

 사실 ‘반석 위의 집’과 ‘모래 위의 집’의 차이에 관한 본문 말씀은 신자와 불신자의 차이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24절에서 “나를 믿는 자는”이라고 하지 않고 26절에서 “나를 믿지 않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본문 말씀은 순종하는 자와 불순종하는 자의 차이에 관한 말씀도 아닙니다. 주님은 24절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이라고 하지 않고 26절에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말씀은 산상수훈의 말씀대로 사는 ‘복된 신자’와 그렇지 않은 ‘기복 신자’의 차이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4절에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셨고 26절에서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본문 25절과 27절 말씀을 보면 ‘복된 신자’와 ‘기복 신자’에게 주어지는 고난을 표현할 때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친다.”는 표현이 조사 하나까지도 같습니다. 즉 복된 신자와 기복 신자에게 주어지는 시련의 가능성은 같다는 뜻입니다.

 그처럼 시련의 가능성은 같지만 시련에 대한 반응과 결과에서 큰 차이가 납니다. 복된 신자는 25절 말씀처럼 ‘부딛치되’로 끝나지만 기복 신자는 27절 말씀처럼 ‘부딪치매’로 끝납니다. 즉 복된 신자는 고난의 비바람이 인생의 집에 부딪쳐도 그 집이 무너지지 않아서 마치 고난이 적은 것처럼 보이고 반면에 기복 신자는 고난의 비바람이 인생의 집에 부딪치니까 그 집이 무너지면서 마치 고난이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살다 보면 잘 믿어도 실패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은 야구경기와 유사합니다. 야구는 1년에 약 150게임을 하는데 아무리 잘하는 팀도 대략 50번 정도는 패배하고 아무리 탁월한 투수도 난타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처럼 신실한 성도도 가끔 패배의 순간을 겪지만 중요한 것은 패배의 순간에 낙심하지 않고 그때 하나님을 꼭 붙잡고 시험을 믿음으로 잘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시험을 잘 극복할 때 좋은 인생이 건축됩니다.

4. 영적인 탁월성을 가지십시오

 건축할 때 설계를 잘해야 돈도 덜 들고 더 튼튼하고 아름다운 집을 지을 수 있습니다. 그처럼 인생 건축에도 좋은 설계도가 필요합니다. 그 설계도는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설계도가 좋아도 시공자가 좋지 못하면 좋은 집을 건축할 수 없습니다. 좋은 시공자가 되려면 2가지가 필요합니다. ‘설계대로 하는 정직함’과 ‘설계대로 할 수 있는 실력’입니다. 정직하지 않게 싼 재료를 써서 부실시공을 하면 부실건축물이 됩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해도 실력이 없으면 역시 좋은 집을 건축할 수 없습니다.

 인생 건축에서도 2가지를 잘해야 합니다. 먼저 말씀을 따라 정직하게 삶을 건축해야 합니다. 대충 편한 대로 하고, 보이는 부분만 그럴듯하게 하고, 땀 흘림 없이 복에만 집착하면 부실인생이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정직하게 살아도 실력이 없으면 좋은 인생을 건축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탁월성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치자 무리들이 그 말씀에 놀랐습니다(28-29절). 그 말씀이 서기관과 같지 않고 권세 있는 자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말에 권세가 있으려면 탁월성이 있어야 합니다. 언제 탁월성이 생깁니까?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그런 삶이 축적되어 지혜와 탁월성이 생깁니다. 특히 십자가를 지려고 하면 영적인 탁월성이 생깁니다. 결국 ‘미신적인 신기한 능력’이 탁월성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능력’이 탁월성입니다.

 어떤 치유 집회에 가면 예언이 터지고 치유가 일어난다고 하지만 그런 집회 인도자들을 보면 기복주의와 이기주의 냄새가 진하게 풍길 때가 많습니다. 불신자들은 성도가 손들어 찬양하고 예언과 치유를 행하는 것을 보고 존경심을 가지기보다 사랑하고 용서하고 나눌 줄 아는 삶을 보고 존경심을 가집니다. 초대교인들은 기사와 표적이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기 소유를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고 기쁘게 나눴기에 백성들이 그들의 탁월한 삶에 존경심을 표해서 칭찬을 넘어 칭송까지 했습니다(행 2:43-47).

 성실함과 정직함과 책임감이 있는 것도 탁월성이지만 역시 최고의 탁월성은 예수님 닮은 모습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품을 닮는다는 것이지 예수님처럼 전능하게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셨지만 그 능력을 특별한 때만 제한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예수님처럼 감출 줄 아는 것이 진짜 능력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내가 하는 일보다 더 큰일도 하리라!”고 했다고 해서 어떤 기복 신자는 시도 때도 없이 “예수 이름으로!”란 말을 습관적으로 내뱉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남용하며 “예수 이름으로!”라고 명령하지만 그 명령이 전혀 역사를 일으키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처럼 예수님의 이름을 사칭한 후 부도 맞게 해놓고도 전혀 책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면 얼마나 고약한 모습입니까? 진실한 성도는 말 한 마디라도 헛되고 거짓된 말을 하지 않으려고 때로는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그에 비해 얼마나 뻔뻔한 모습이고 얼마나 예수님의 삶과 반대되는 삶입니까?

 변기가 막혔을 때 “예수 이름으로 변기야 뚫려라!”라고 선포하니까 변기가 뚫렸다고 몇 년 동안 주일설교에서 ‘선포하는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그 얘기를 반복하니까 너무 들어주기가 괴롭다는 장로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이름’은 그렇게 남용되어야 할 이름이 아닙니다. 변기가 막혔으면 펌프 사다가 뚫으면 됩니다. 펌프 사다 뚫으면 될 것을 굳이 예수 이름으로 명령해서 변기를 기적적으로 뚫어야 능력이 있는 것입니까?

 한 자칭 20세기의 신 사도가 겨울에 시골에 갔습니다. 그런데 자동차 시동이 안 걸려서 “예수 이름으로 시동아 걸려라!”라고 선포하니까 시동이 걸렸다고 17년 동안 부흥회 때마다 그 얘기를 합니다. 그러면 청중들은 “아멘!” 하고 소리치고 박수를 칩니다. 아마 지금도 부흥회에서 그 얘기를 하고 돌아다닐지 모릅니다. 다급한 상황에서 시동이 안 걸리면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겸손하게 기도하면 됩니다. 그리고 다시 시동을 걸면 하나님이 그때는 기적적으로 시동이 걸리게 해주실 수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작은 은혜들은 수시로 펼쳐지기에 사실 그런 일은 17년 동안 부흥회 때마다 해야 할 대단한 간증거리도 아니고 “예수 이름으로 시동아 걸려라!”고 거창하게 명령하고 선포할 것도 아닙니다. 조용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해도 시동이 안 걸리면 카센터에 끌고 가서 배터리를 바꾸면 됩니다. 그런데 그런 문제들이 생기면 어디서 배운 대로 시도 때도 없이 “예수 이름으로!”를 남발합니다. 그렇게 선포했다가 시동이 안 걸리면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이 어떻게 보겠습니까?

 그렇게 예수님의 이름을 내세웠다가 부도를 맞히고도 지극히 태연한 모습을 보면 “저 사람이 ‘예수님 이름’을 가지고 장난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심정과 체면과 영광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왜 그렇게 “예수 이름으로!”를 남발합니까? 성경에서 예수님이 바람과 바다에게 명령해서 문제를 해결했으니까 자기도 예수님 닮아서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20세기를 휩쓸었던 기복주의 신앙이 물질주의 및 물량주의와 결합해서 그처럼 많은 영혼들을 망치고 신앙수준을 떨어뜨린 것입니다.

 그런 기복주의에 휩쓸리면서 20세기에 유난히 대형교회가 많이 생겼지만 영혼의 기초는 옛날보다 더 부실해졌습니다. 예수님은 능력을 최대한 감추려고 했는데 자기는 능력을 최대한 과시하려고 한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그런 기복 신앙에 참된 복을 주시겠습니까? 능력을 나타내려고 하지 말고 먼저 십자가를 지려고 하십시오. 바로 그때 영적인 탁월성이 나타나면서 동시에 진짜 능력과 진짜 치유와 진짜 기적이 나타날 것입니다.

< 십자가를 지려고 하십시오 >

 행함도 중요하지만 어떤 말씀을 듣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기복주의를 조장하는 말은 아예 듣지도 말고 산상수훈의 말씀의 원리를 기억하며 늘 예수님의 삶과 성품을 따라 살겠다고 다짐하십시오. 그렇게 살려면 인생관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십자가 중심으로 재편하고 섬김과 나눔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 닮은 모습이 그를 통해 나타나면서 그를 통해 세상이 변화되고 세상 사람들의 칭송도 받게 될 것입니다. 다수가 모여 뜨거운 예배를 드려도 그 밑바탕 사고가 여전히 기복주의 사고라면 그 숫자는 허무한 숫자일 뿐입니다.

 작년에 몇 만 명 교인을 자랑하는 어떤 교회는 1년 예산이 300억이었습니다. 그러나 선교와 구제로 지출한 재정이 2%인 6억에 불과했습니다. 그 정도는 나눔의 비전을 가진 인물 성도 한 사람만 있어도 감당할 수 있는 재정입니다. 그런 얘기를 들으면 “그렇게 큰 교회가 그렇게 적게 나누나?”란 안타까움보다 “그렇게 큰 교회에 그렇게 인물이 없나?”란 생각이 자연히 들게 됩니다. 얼마나 허무한 숫자 인플레입니까?

 예수님은 많은 무리를 결코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14장 25-27절에서 많은 무리가 함께 갈 때 예수님이 돌이켜 말씀합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및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능력을 좇는 다수의 군중이 되지 말고 십자가를 지는 소수의 제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6장 66절 말씀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몰려든 군중들에게 예수님이 희생의 떡에 관한 말씀을 하자 대부분의 군중들은 그 말씀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떠났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실천하기 싫은 것입니다. 그런 군중들을 예수님은 전혀 붙잡지 않고 제자들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하셨습니다. 기복주의에 빠진 다수의 군중에 속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군중을 물리치시고 소수의 제자를 키우셨습니다.

 이 세상에 가능성이 없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현재의 모습은 연약해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소수의 인물이 되면 그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런 인물들의 손에 한국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이제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저희 가정과 저희 교회가 산상수훈의 말씀의 반석 위에 굳게 서게 하소서. 그래서 십자가를 잘 지고 나눔을 실천함으로 부활의 기적과 변화의 기적을 체험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소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참된 복을 막는 이기주의와 기복주의는 절대적으로 버리십시오. 대신에 고난과 시련이 있어도 예수님 때문에 당당하게 살고 호주머니가 비어가도 믿음의 순결성과 나눔의 열정을 잃지 말고 그때 더 감사하며 십자가를 한 번 더 묵상하고 다짐하십시오. 그처럼 십자가가 없는 부활을 꿈꾸지 말고 십자가를 통한 부활을 꿈꾸며 십자가를 기쁘게 질 줄 아는 참된 제자와 인물이 되어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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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72 여호수아 하나님의 임재 수5:13-15  이동석 목사  2013-11-13 2333
10071 창세기 주님과 동행하기 창5:21-24  한태완 목사  2013-11-13 2914
10070 예레미야 주신 환경에서 배우자 렘19:1-15  최장환 목사  2013-11-13 2362
10069 이사야 하나님의 사랑 사27:1-13  최장환 목사  2013-11-13 2416
10068 사무엘상 오해, 착각하지 마세요 삼상1:13-15  한태완 목사  2013-11-12 2619
10067 마태복음 주님께서 찾으실 때에 마21:18-22  이영화 목사  2013-11-11 2014
10066 마태복음 주께서 다시 오실 때에 마24:23-31  이영화 목사  2013-11-11 2218
10065 디모데후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딤후2:1-7  이영화 목사  2013-11-11 2474
10064 로마서 로마서 8:1을 넘어서라 롬8:1-2  강종수 목사  2013-11-10 2187
10063 에스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스5:1-17  한태완 목사  2013-11-09 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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