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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부르심 앞에서

디모데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785 추천 수 0 2013.12.20 23: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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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딤후1:1-1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sermon/71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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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룩한 부르심 앞에서

딤후1:1-14, 창조절 여섯째 주일,

2014년10월6일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3 내가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니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이 있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8 그러므로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12 이로 말미암아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내가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그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오늘 제2독서로 읽은 딤후 1:1, 2절에는 이 편지의 발신자와 수신자의 이름이 나옵니다. 발신자는 바울이고 수신자는 디모데입니다. 딤전 1:1, 2절의 내용도 거의 비슷합니다. 디모데전서와 후서는 연로한 바울이 젊은 디모데에게 쓴 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과 디모데는 각별한 사이입니다. 바울이 한창 전도 여행을 다닐 때 디모데가 수행하기도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바울은 디모데의 가정환경까지 자세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디모데는 외할머니인 로이스와 어머니인 유니게의 신앙 전통을 이어 받았다는 겁니다. 6절에 따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안수를 베풀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목사 안수를 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을 돕던 후배나 제자들이 많았지만 그중에서도 디모데를 향한 바울의 관심은 유별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편지를 쓴 이유는 디모데에게 목회를 가르치기 위한 것입니다. 젊은이는 아무래도 신앙의 깊이나 목회 경험이 부족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소명, 즉 부르심에 대해서 말합니다. 목회자로서 소명의식이 흔들리면 목회가 제대로 될 리가 없습니다. 소명의식이라는 게 늘 선명하고 뜨겁게 유지되는 것도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다가도 이런저런 일을 만나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마다 소명의식을 다잡는 일이 필요합니다. 보통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과 비슷합니다. 바울이 볼 때 디모데에게 이런 자극이 필요했습니다. 디모데의 소명의식이 흔들린다는 소문이 들렸을지도 모르고, 디모데가 솔직하게 터놓고 그런 하소연을 바울에게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자세한 사정은 우리가 모릅니다만 바울이 디모데에게 소명의식을 다시 불러일으키려 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습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바울은 하나님이 자기와 디모데를 소명으로 부르셨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바울은 그 소명을 11절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합니다. 선포자, 사도, 교사로 부름을 받았다는 겁니다.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서 회심했습니다. 그리고 평생 교회 지도자로 살았습니다. 소명의식이 투철했습니다. 소명은 성서의 핵심 주제입니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모두 이 소명을 경험했습니다.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를 비롯해서 모든 선지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소명에 순종했습니다. 신약성서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두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원칙적으로 예수님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겁니다.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 하늘로부터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 마가복음 기자가 소명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소명 이후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에 전념하셨습니다.


소명, 즉 부르심은 구약이나 신약, 또는 지난 교회 역사에서만 있었던 게 아니라 오늘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교회에서는 보통 목사나 선교사 등으로 소명을 받았다고 말들을 합니다. 또는 교회의 봉사를 소명으로 여기기도 합니다. 성가대, 주일학교 교사, 운영위원 등등입니다. 그런 것들이 두루두루 소명과 연결되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나 개신교적 전통에서는 성직이나 교회 업무만이 아니라 모든 세속 직업도 원칙으로 소명입니다. 마틴 루터는 그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독일어로 직업을 Beruf라고 합니다. 베루푸는 berufen이라는 동사에서 왔습니다. berufen은 ‘직무를 주다.’라는 뜻입니다. 루터에 의하면 성직과 세속직의 구별 없이 모든 직업은 하나님으로부터 직무를 받은 것입니다. 루터 성경은 오늘 본문의 ‘부르심’을 ‘베루펜’이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직업은 소명입니다.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공장 노동자, 영업사원, 의사, 운전사, 카페 사장 등등, 모든 Beruf는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왜 우리의 직업이, 그리고 이를 통해서 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일까요? 그리고 그런 소명의식이 분명하게 느껴지시나요? 그게 아니라 직업은 그냥 먹고 사는 수단일 뿐이라고 여겨지시나요? 오늘처럼 연봉으로만 직업이 평가되는 세상에서 살다보니 직업의 소명의식을 느끼기 힘들 겁니다. 그건 안타까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이 소명은 구원과 결탁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9절의 앞부분을 다시 보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부르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를 부르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구원과 소명은 같은 차원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사건입니다. 구원받았다는 말과 부르심을 받았다는 말을 똑같은 의미로 생각하면 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직업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 선포되어야 할 자리입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우리가 아무 것도 허투루 처리할 수 없겠지요. 구원을 생각하는 사람이 노골적으로 남을 속일 수가 있을까요? 남을 파괴할 수 있을까요? 남을 이용하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바울은 소명을 거룩하다고 표현했습니다. 거룩하다는 헬라어 ‘하기오스’는 구별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직업 자체를 세상의 관점과 구별해서 본다는 뜻입니다. 세상의 기준은 이해타산에 있겠지만 복음의 기준은 그것과 다릅니다. 그게 뭔지는 여러분이 아십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혹은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에 의해서 이루어진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본문이 그걸 정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은 좀 복잡해서 그 의미가 확 닿지가 않는데, 제가 그 문장의 기본 골격을 개인적으로 풀어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와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는 이 은혜는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은 우리가 흔히 듣기 때문에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알고 보면 아주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창 18, 19장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알고 하나님과 담판을 짓습니다. 왜 의인들까지도 죽이려 하느냐, 의인 50명을 보고 나머지 사람까지 용서해 주면 안 되겠는가? 하나님은 의인 50명만 있으면 다 용서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50명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점점 숫자를 줄여서 묻다가 마지막으로 열 명까지 내려옵니다. 그곳에는 10명의 의인도 없었습니다. 만약 10명의 의인이 있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렇다면 소돔에 사는 수천, 수만 명이 목숨을 건졌을 겁니다. 그 사람들은 은혜를 받은 겁니다. 예수님은 바로 없었으나 있었으면 놀라운 일이 벌어졌을 소돔의 의인 열 명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10절에서 예수님 덕분으로 우리가 죽음을 극복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실감이 가나요? 실감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겠지요.


이 사실에 실감이 가는 사람은 소명이 무언지를 알게 됩니다. 소명이 왜 거룩한지를 알게 됩니다. 여기 판사와 같은 전문 법조인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자신의 직업을 은혜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전문가라는 자부심이야 없을 수 없겠으나 그의 영혼에는 그것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훨씬 크게 작용합니다. 이것을 아주 실제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능력, 업적, 우리의 지식이라는 건 따지고 보면 보잘 것 없습니다. 때에 따라서는 거꾸로 알 때도 많고, 우리의 의지가 아무리 선해도 결과적으로 큰 잘못을 행할 때도 많습니다. 저도 신학공부의 깊이가 약간이나마 깊어지고 목회의 연륜이 늘어날수록 하나님과 그의 일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다는 사실만 더 분명해집니다. 자신의 직업을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에 비해서 자신의 일이나 능력이 얼마나 보잘 것 없는지를 뼈저리게 인식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럴 때 그 사람은 자기와 자기의 행위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 자유가 곧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떤 태도로 세상을 살지는 제가 설명할 필요도 없이 분명합니다.


변호사, 교수, 의사, 고위관리 등과 같은 전문가 집단은 먹고 사는 게 넉넉하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사회적으로 낮은 직업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지 않느냐, 하는 반론이 가능합니다. 매일 시장 좌판을 벌여놓고 수고해도 입에 풀칠하기 쉽지 않고, OECD 국가 중에서 주간 노동시간이 가장 많은 나라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현장 노동자로 사는 사람들로서는 소명이다, 은혜다 하는 게 사치스러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꾸 손해만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노동으로 자기 인생이 혹사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하는 일 자체가 은혜와는 상관없어 보입니다. 가능한 피하고 싶은 일입니다. 이건 사회경제적 차원에 속하기 때문에 제가 이 자리에서 더 이상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런 어려운 상황마저도 하나님의 은혜를 폐기하지 못한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연봉 1억을 받는 사람의 삶이 비열해질 수도 있고, 2천만 원 받는 사람이 거룩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삶은 신비롭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쪽의 사람이 되고 싶으신가요?


제가 신앙적인 원칙을 말씀드리긴 했으나, 현실적으로 삶이 고달파 질 때 소명의식이 흔들리기 마련입니다. 소명의식을 낭만적으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바울도 그 사실을 정확하게 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디모데에게 편지를 쓴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소명을 받아 열심히 일했으나 원하지 않는 고난도 함께 따라왔습니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혔습니다. 디모데에게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랐습니다. 그가 목회하던 교회에 이단들도 나타나고 그를 욕하는 사람들도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고난을 피하라고가 아니라 오히려 그걸 각오하라고 8절에서 이렇게 이릅니다.

 
너는 내가 우리 주를 증언함과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바울과 디모데가 당한 고난을 오늘 우리는 직접 받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난과는 전혀 상관없는 시대를 사는 것 같습니다. 교회 다닌다고 해서 직접적으로 당하는 불이익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 전체를 확대해서 보면 고난은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어쩔 수 없는 불행이 예고 없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합니다. 조기 은퇴, 파산, 교통사고, 장애 아이 출산, 이혼 등등, 언제 어느 때 찾아올지 모릅니다. 실제 직장생활에서도 어려움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을 입시 지옥에 빠뜨리는 이런 교육제도에 맞서서 전인교육을 추구하려면 적지 않는 고난을 당할 겁니다. 여기 젊은 목회자가 있다고 합시다. 기복주의와 문자주의, 교회성장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건강한 목회를 지향하려면 적지 않는 불이익, 또는 어려움을 당할 겁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오늘날 우리에게 고난은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저는 오늘 바울의 이 권면이 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지금 제가 무슨 고난을 당하고 있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없습니다. 힘들게 생각되는 일도 없습니다. 목회를 너무 열심히 하다가 건강을 잃은 것도 아니고, 재정적으로 쪼들리는 것도 아니고, 구약의 선지자들처럼 정의를 외치다가 박해를 받는 것도 아니고, 루터처럼 교황청의 잘못을 지적하다가 종교재판을 받은 일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삶을 축복받은 거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저는 소명의식이 투철하지 못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저의 주변에 동료나 후배 목사들 중에는 그런 고난을 몸으로 당하는 이들도 적지 않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 성소자자들, 장기수들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을 다 쓰기도 합니다. 그런 일을 하다보면 정부 측과도 마찰을 빚기도 합니다. 경제적으로도 늘 힘들어합니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바울의 충고 앞에서 저는 늘 부끄러워합니다.


저의 경우를 말씀드린 이유는 여러분도 저와 똑같이 이런 문제로 고민하라는 게 아닙니다. 모두가 처한 형편은 다릅니다. 바울이 처한 형편을 우리가 그대로 따라갈 수도 없고, 따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당시는 기독교 신앙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우리는 그들과 전혀 다른 시대에 삽니다. 그것도 우리의 선택은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그들과 다르게 살아갈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같은 시대를 살지만 각자 처한 삶의 형편도 다릅니다. 고난이 없는 사람도 있고, 고난을 당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 똑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각자의 형편과 분량대로 받아들이고 사는 게 최선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각각 삶의 모양과 방식은 다르지만 우리가 소명을 받았다는 사실에서는 똑같습니다. 우리의 삶은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에게나 모두 똑같이 거룩한 소명에 해당됩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것은 직업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우리 인생, 삶 자체가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습니다. 그래서 부러워하지도 않고 잘난 체 하지도 않습니다. 차이가 있다면 소명을 인식하는 사람이 있고,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어느 쪽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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