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23:33-43 |
---|---|
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sermon/721825 |
그리스도 논쟁
눅23:33-43, 창조절 열셋째 주일,
2013년11월24일
33 해골이라 하는 곳에 이르러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두 행악자도 그렇게 하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35 백성은 서서 구경하는데 관리들은 비웃어 이르되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하고 36 군인들도 희롱하면서 나아와 신 포도주를 주며 37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 하더라 38 그의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있더라 39 달린 행악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하되 40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41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42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하니 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은 창조절 열셋째 주일이면서 교회력 마지막 주일입니다. 교회력은 성탄절 4주 전 주일인 대림절 첫 주일로 시작해서 그 다음 해 대림절 전 주일까지 이어집니다. 다음 주일부터 새로운 대림절이 시작됩니다. 오늘 제3 독서인 눅 23:33-43절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동안 일어났던 이야기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주로 부활절 전 사순절이나 고난주간에 읽히는 구절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교회력 마지막 주일에 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맞춤합니다. 그 사건이 기독교 신앙에서 핵심 중의 핵심이며, 초기 공동체의 영적 실존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강력한 도전이 되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본문에서 다른 공관복음 기자, 그리고 요한복음 기자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는 장면과 거기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로마 총독 빌라도에 의해서 십자가형을 선고받고 자신이 달려야 할 십자가 형틀을 어깨에 지고 빌라도 관저에서 처형 장소인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갔습니다. 중간에 성지 순례 차 예루살렘을 방문한 구레네 사람인 시몬이 예수님 대신 십자가 틀을 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체력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처형이 집행될 골고다 언덕은 ‘해골’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렸습니다. 끔찍한 장소였습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로마 형법의 절차에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예수님의 오른쪽과 왼쪽에도 각각 다른 두 사람이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세 사람이 한 날 한 시에 십자가에 처형당한 셈입니다. 사형수는 중요 부분만 가리고 옷을 다 벗겨야 합니다. 대못에 박힌 손바닥은 죄수의 하중에 의해서 조금씩 찢어집니다.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죄수들은 그런 상태에서 밤낮없이 일주일이나 보름씩 매달린 채 서서히 죽어갔습니다. 거기 모였던 사람들은 너무 끔찍스러운 장면에 모골이 송연했을 겁니다.
오늘 본문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빈정대거나 조롱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세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1) 관리들은 비웃으면 이렇게 말했습니다(눅 23:35).
저가 남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하나님이 택하신 자 그리스도이면 자신도 구원할지어다.
이 관리들은 유대교 지도자들도 추정됩니다. 2) 두 번째는 로마 군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예수님에게 신포도주를 주었습니다. 신포도주는 사형수의 고통을 조금 줄여줍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유대인의 왕이면 네가 너를 구원하라.”(눅 23:37) 3) 세 번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당한 두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 본문은 행악자라고 말하지만 반(反)로마 혁명가로 보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세 종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한 태도는 거의 비슷합니다. 관리들은 비웃었고, 군인들은 조롱했고, 행악자는 비방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향해서 ‘당신이 그리스도인지 아닌지 확증을 보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광야에서 기도하실 때 마귀에게 받는 세 가지 시험을(눅 4장) 연상시키는 내용입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세 종류의 사람들은 기독교가 맞서야 했던 세력들을 대표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당시만이 아니라 그 이후로 이런 세력들과 투쟁했습니다. 유대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증거가 없다고 말합니다. 세상이 여전히 불의하고, 악이 오히려 선을 억압하고, 무죄한 이들의 고난도 그치지 않고, 알 수 없는 불행도 그치지 않습니다. 얼마 전 필리핀을 강타한 태풍으로 인해 5,6천 명이 죽거나 실종되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재앙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한다면 이런 불행이 반복될 수 없는 게 아니냐, 하고 유대교 지도자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질문합니다. 일리 있는 반론입니다.
군인으로 대표되는 로마 정권은 경제, 정치, 군사적인 차원에서의 구원을 주장합니다. 유대인의 왕이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는 것입니다. 인간을 실제로 정치 경제적인 차원에서 구해내지 못하면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당시 왕들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구원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왕들은 바로 신이었습니다. 요즘은 민주시대이지만 이런 생각들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정치권력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기도 하긴 합니다. 그러나 속성상 정치권력은 교만합니다. 그들이 보기에 십자가에 달린 예수는 남의 구원은 둘째 치고 자기도 구원하지 못하는 인물에 불과합니다.
행악자로 묘사된 세 번째 사람의 논리도 명확합니다. 그는 반로마 혁명에 앞장 선 애국자였습니다. 우리로 말하면 안중근 의사와 비슷합니다. 그에게 구원은 유대민족의 해방이었습니다. 민중이 주인 되는 세상입니다. 그는 로마를 몰아내기 위해서 무력투쟁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살신성인의 결기로 투쟁하다가 체포되어 십자가에 처형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과는 동병상련의 신세입니다. 그가 볼 때 예수님은 로마가 지배하는 이런 구조적인 악을 제거할 수 없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그래서 오른뺨을 치는 자에게 왼뺨을 대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은 비현실적이었습니다. 그런 식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에게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이런 악한 구조로부터 우리를 구원해보라고 처절한 심정으로 외친 겁니다.
이들의 주장을 관통하는 논리는 힘으로 세상을 새롭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말하는 정의로운 세상도 힘이 있어야만 가능합니다. 로마는 군사력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정치 이데올로기입니다. 유대민족의 혁명가들이 원하는 것도 무력으로 로마를, 기득권자를 몰아내는 것입니다. 각각 다 옳은 주장입니다. 그래서 그런 일에 자기 인생을 거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이런 주장들 앞에서 왜 예수님이 그리스도인지를, 즉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라는 사실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대답해야만 했습니다. 이것은 초기 기독교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이 세상의 여러 단체, 사상, 학문들이 기독교와 구원 문제에서 다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의 신자유주의 경제 이데올로기는 분명히 21세기 유사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세태 속에서 오늘 우리는 초기 기독교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님만이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다시 초기 기독교의 상황으로 돌아갑시다. 유대교 지도자, 로마, 사회 혁명가들이 수긍할만한 대답을 기독교가 제시하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본문에서 조롱받고 있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린 처지였습니다. 십자가에 달린 자를 그리스도, 즉 메시야로 믿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이 예수님 옆에서 함께 십자가에 달린 사람에게 붙인 칭호인 행악자라는 단어가 사실은 예수님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명패에 쓰인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은 행악자라는 호칭과 다를 게 없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의 왕을 사칭하고 민중들을 호도하면서 국법을 어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반국가사범입니다. 이런 사람을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에게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입니다.
당시의 이런 상황을 바울은 고전 1:23절에서 정확하게 짚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유대인들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울이 그것만 말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은 받은 사람에게는 바로 그 십자가의 예수님이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두 세계가 충돌합니다. 한쪽은 유대 종교와 로마 정치입니다. 일종의 종교권력이요, 정치권력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무의미한 것으로 재단했습니다. 다른 한쪽은 초기 기독교입니다. 그들은 십자가를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로 인식하고 믿었습니다. 누가 옳을까요? 그리고 왜 옳을까요? 옳은 근거가 무엇인가요?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겁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근본이 취약합니다. 상식적으로는 기독교 신앙을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이에 비해서 불교는 상당히 합리적인 종교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불성을 발견하라고 가르칩니다. 부처님은 그걸 먼저 깨달은 선각자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치유 종교로서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 잘 나가는 국민 멘토라는 분들이 대개 스님이라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에서도 그런 치유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심지어 치유 목회라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경배와 찬양 유의 집회도 근본적으로는 이런 치유를 지향합니다. 은혜롭게 찬양을 부르면 내면의 상처들이 치유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그런 현상들은 우리에게 도움이 되긴 하나 기독교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기독교는 오히려 역설적입니다. 몸이 아프면 그걸 그대로 안고 사는 것이 훨씬 더 기독교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마음이 불안하면 거기서 억지로 벗어나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안고 살면 됩니다. 정 힘들면 적당하게 의료의 도움을 받으면 됩니다. 기독교는 의료과학과 경쟁하지 않습니다. 바울 같이 뛰어났던 영성가이며 선교사이고 신학자였던 사람도 자신의 난치병의 치유를 위해서 두 번 정도만 기도하고 그만 두었습니다. 병을 통해서 더 깊은 영적 경험을 했습니다.
잊지 마십시오. 기독교의 중심은 내면 치유도 아니고, 병든 몸의 치유도 아니고, 심리 안정도 아니고, 기복은 더더욱 아니고, 도덕재무장 운동이 아니라 예수라는 인격체와의 관계에 놓여 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예수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마음 수련을 하라거나 율법을 지키라고 말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라고 말합니다. 예수를 본받는 게 아니라 믿는 겁니다. 문제는 예수를 믿기가 힘들다는 겁니다. 쉽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긴 합니다. 뭘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다. 십자가에 처형당한 이를 그리스도로 믿는 것은 우리의 종교적 본성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아포리아, 즉 당혹스런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받은 이를 그리스도로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들이 처한 딜레마였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이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다는 신학적 인식이 그것입니다. 당시에 아무도 생각할 수 없었던 차원을 생각한 겁니다. 이는 마치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넘어온 것처럼 삶의 근본적인 파괴였던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바로 삶의 근본적인 회복이었다고 말니다. 죽음이 오히려 생명이라고 말입니다. 초기 기독교를 시작으로 지난 2천년 동안 기독교는 바로 이 사실에 근거해서 역사에 살아남았습니다. 만약 이 사실이 부정된다면 기독교는 역사에서 사라질 겁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조롱받았듯이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무시당하고 말 겁니다. 과연 기독교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요?
저는 지금 여러분들에게 기독교의 미래가 확실하지 않다거나 토대가 부실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진리이기에 잠시 어려움을 겪을지는 몰라도 토대가 흔들리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오늘의 교회가 오늘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상황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당신이 그리스도라면 당장 십자가에서 내려오고, 사람들을 모든 불행으로부터 구해내라는 도전 앞에서 진리 논쟁을 벌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논쟁, 즉 구원 논쟁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해서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 명의 비난에 대해서 일절 답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문제는 답을 들어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관심이 다른 데 있는 사람들의 귀는 막혀 있기 마련입니다. 본문에서 네 번째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린 두 사람 중의 다른 하나입니다. 그는 자기 동료를 책망하면서 자기를 구원해 달라고 예수님께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43b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구원 논쟁, 즉 그리스도 논쟁에서 이 말씀이 우리의 대답입니다. 이런 말을 잘못 들으면 사이비 교주의 발언처럼 들립니다. 이 말씀은 많은 걸 그 안에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건들과 십자가와 부활 경험이 다 포함됩니다. 여기서 낙원은 생명이 완성된 어떤 세계를 가리키는 메타포, 즉 은유입니다. 그 생명의 완성을 직접적인 말로 표현할 수 없어서 낙원이라는 메타포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건 단순히 문학적인 수사가 아닙니다. 생명의 현실(reality)을 담고 있습니다. 그 현실이 손에 잡히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어떤 기독교인들이 자꾸 다른데 한눈을 팝니다. 뭔가 구체적인 것을 잡으려고 합니다. 낙원은 그런 것을 훨씬 뛰어넘는 세계입니다. 하나님만이 종말에 우리에게 허락하실 생명의 세계입니다. 그걸 우리는 지금 약속으로 받아들일 뿐이지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종말이 와야 확연하게 드러날 일을 지금 어떻게 실증적으로 증명해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신실하신 예수님의 약속으로 충분합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약속만으로는 어딘가 여전히 허전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돈, 자존심, 가족관계, 민족, 자기의 업적을 통해서만 삶을 생각하도록 세상으로부터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좋든 아니든 선입견에 불과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시고 약속한 생명은 그런 선입견에 제한받지 않습니다. 이 사실에 눈을 떠야만 기독교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며, 그럴 때 십자가에 처형당했던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의 실체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바로 기독교 신앙입니다. 그것을 인식하고 믿는다면 그는 예수님과 함께 이미 낙원에 들어간 사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천 년 전 여러 종류의 사람들에게 조롱받던 예수님이 처한 상황을 오늘 우리도 살아내야 합니다. 그런 걸 느끼지 못한다면 아직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오지 못한 겁니다. 이 상황을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기독교 진리가 허물어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또는 더 많은 사람에게 행복한 조건을 제공해줄 수 있다는 방식으로, 예컨대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된다는 식으로 경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전혀 다른 차원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약속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생명을 보십시오. 그 생명의 세계가 낙원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