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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마5:27-3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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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 참고 : | http://www.john316.or.kr |
산상수훈(13)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의 재해석
(마5:27-32)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공동체 중의 하나가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통해 마음과 생각이 변화되면 삶도 변화되고 건강도 회복되며 병을 이길 강한 면역력도 얻습니다. 교회가 그런 변화와 치유의 능력을 계속 가지려면 인간적인 계산이 없어야 합니다. 교회에서는 계나 다단계를 하면 절대 안 됩니다. 또한 교회를 사업과 인맥 확장의 장이나 이성과 또래 만남의 장으로 활용해도 안 됩니다. 계산적인 마음으로 교회를 찾으면 자신도 불행해지고 공동체도 무너집니다. 교회는 순결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민수기 25장을 보면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 있을 때 몇 남자가 매혹적인 모압 여인들과 은밀한 재미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 재미에 빠진 백성의 수령들을 잡아 태양을 향해 목매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시므리란 시므온 지파의 한 족장이 회중이 보는 앞에서 뻔뻔스럽게 고스비란 예쁜 미디안 여인을 자기 처소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자 제사장 아론의 손자인 비느하스가 의분을 가지고 긴 창으로 음란을 행하는 두 남녀를 단번에 찔러 죽였습니다. 그 모습을 하나님이 시원해 하시면서 전염병을 그치게 하셨습니다.
그때 하루에 죽은 사람이 고린도전서 10장 8절에는 2만 3천명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날 후에 죽은 사람까지 포함해서 민수기 25장 9절에는 2만 4천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며칠 사이에 2만 여명이 음란죄로 죽은 것입니다. 이 장면은 공동체 내의 음란죄를 하나님이 얼마나 단호하게 처리하는지 잘 보여줍니다.
어느 날,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선교할 때 고린도 교회의 음행 소식이 들렸습니다. 고린도는 음란이 성행한 항구도시였지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말처럼 그곳에 가장 큰 신약교회가 섰습니다. 그 고린도 교회에서 한 중직이 아버지의 아내를 취한 것입니다(고전 5:1). 물론 그 여자는 죽은 아버지의 첩이었습니다. 그래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 중직이 힘과 물질이 있어서 그 상황을 방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은 “왜 그런 자를 그냥 두고 음란의 누룩을 물리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음란을 누룩으로 표현한 것은 그만큼 독성이 잘 퍼진다는 뜻입니다. 음란의 누룩이 퍼지면 개인도 망하고 가정도 망하고 사회도 망합니다. 역사상 수많은 제국들도 바로 음란죄의 만연으로 무너졌습니다.
초대 교회 때 유대인들은 유월절이 다가오면 집안을 깨끗이 청소해서 묵은 누룩을 없애고 일주일간 누룩 없는 떡을 먹었습니다. 그 의식을 상기시키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음란의 누룩을 제거하도록 그 중직을 교회에서 쫓아내라고 했습니다. 악인은 멀리하며 사랑해야 비록 그의 몸은 멸해도 그의 영혼은 구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징계의 목적은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고 징계 받는 당사자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처럼 음란의 누룩이 퍼지지 않도록 영혼과 가정과 교회를 힘써 지켜가야 합니다.
< 예수님이 재해석한 7계명의 교훈 >
구약 시대에 하나님은 음란의 누룩이 퍼지지 않도록 “간음하지 말라!”는 십계명의 제 7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계명은 히브리 문화 및 문헌을 보면 “순결하라!”는 의미보다는 “남의 아내를 범하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그 7계명을 재해석하며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도 ‘마음에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27-28절).
이 예수님의 말씀을 평생 온전히 지키려면 결국 눈을 빼버려야 합니다. 실제로 교부 오리겐은 음욕을 없애겠다고 스스로 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자에게도 음욕이 작게나마 있고 또한 음욕이 줄면서 명예욕은 커지는 부작용도 많습니다. 만약 눈을 빼내는 식으로 음란 문제가 해결된다면 음란한 생각은 머리에서 나오니까 머리도 잘라내야 합니다. 결국 본문 29-30절에 있는 눈을 빼버리고 손을 찍어 내버리라는 말씀은 실제로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단호하게 죄를 멀리하라는 비유적인 말씀입니다.
음욕 문제를 해결하려면 보는 것도 주의하고 가는 곳도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는 겁쟁이가 되면 안 되지만 음란 문제에서만은 겁쟁이처럼 그 유혹의 자리를 도망쳐 나와야 합니다. 유혹과 용감히 맞서겠다고 유혹의 자리로 가는 것은 만용입니다. 그처럼 음욕문제를 잘 처리해야 하지만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이 재해석한 제 7계명은 음욕 문제를 극복하라는 것 이상의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재해석한 7계명에 내포된 이면의 교훈은 무엇일까요?
1. 편견을 버리라는 교훈
이 세상에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면 이미 간음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평생 떳떳할 남자는 한 명도 없습니다. 결국 이 말씀은 자기 의를 자랑하지 말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 남보다 나은 것이 있으면 그것으로 나와 남을 가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장벽으로 가르지 않고 장벽을 가로질러 사셨습니다. 참된 성도는 가르는 편견의 장벽을 깨고 가로지르는 축복의 대로를 만들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의를 자랑하는 삶’과 일란성쌍둥이와 같은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편견을 가지는 삶’입니다. 왜 예수님은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면 빼어 내버리라!”고 했을까요? 남자들을 다 애꾸로 만들려고 그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이 지닌 깊은 의미는 편견의 눈으로 남을 바라보는 광어족이 되지 말라는 뜻입니다. 즉 눈이 극단적으로 한쪽에 몰려 있는 광어처럼 한쪽 면만 보고 편견에 사로잡혀 살지 말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쉽게 규정하는 것은 사람을 쉽게 부정하는 것입니다. 피상적으로 몇 마디 얘기만 듣고 어떤 사람을 규정했다가 실제로 그를 만나본 후에 자신의 못난 편견을 부정할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남을 쉽게 규정하지 마십시오. 그가 그렇게 할 만한 남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부터 나쁠 수도 있지만 설 자리를 잃거나 제 자리를 못 찾아서 나빠질 때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편견을 버리려고 노력하십시오. 편견은 공동체의 발전과 자기 축복을 저해하는 제일 요소입니다.
왜 느헤미야가 복된 인물이 되었습니까? 편견이 없는 세계민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자기 민족을 사랑했지만 편협한 민족주의자처럼 바사 왕을 원수로 여기지 않고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타협이 아닌 성경적인 축복의 원리입니다. 요셉도 애굽에서 바로의 신임을 얻어 바로를 자기편으로 만들었습니다. 다니엘이 이방인의 3대 제국에서 총리를 지낼 수 있었던 것도 편협한 민족주의적 사고가 아닌 세계민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편견을 깨야 나도 살고 남도 살고 나라와 국가도 살릴 수 있습니다.
일전에 미국에 1년 반 살았던 한 한국인이 미국을 신랄하게 비난한 책을 썼습니다. 1년 반 동안 뭘 제대로 알겠습니까? 장사꾼들이 만들어낸 일부 문화와 어떤 단면만 보고 미국의 도덕성을 저질로 여긴다면 큰 오해입니다. 제가 졸업한 신학교가 있던 곳은 뉴욕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30마일 떨어진 나약(Nyack)이란 약 2만 명이 사는 소도시였습니다. 그 도시 안에 술집이 작은 맥줏집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면 단위의 읍내만 나가도 술집 천지였습니다. 그런 모습으로 미국의 도덕성을 쉽게 폄하한다면 맞지 않는 얘기입니다.
축복을 좀먹고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악의 축인 편견의 동굴을 잘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간음한 여자를 돌로 치려고 둘러싼 대중에게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말씀하자 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간음죄를 뚜렷하게 목격하고도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고 했을 때 다 잠잠했는데 뚜렷한 죄도 아닌 편견으로 무수한 사람에게 돌을 던진다면 얼마나 무서운 죄입니까? 자기 의에 사로잡혀 그런 죄에 빠지지 말라는 의미에서 예수님은 오른 눈이 실족하게 하면 빼어 내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은혜와 축복을 정말로 원하면 편견을 버리는 훈련을 끊임없이 하십시오. 편견의 습관을 버리기 힘들면 의도적으로 좋은 편견을 습관화시키십시오. 자세히 보면 사랑도 일종의 편견이지만 위대한 편견입니다. 사랑만 들어가면 사람들이 다 좋게 보입니다. 사랑은 연인과 함께 걷는 청계천을 쎄느 강변처럼 보이게 만듭니다. 그런 위대한 편견을 가지십시오. 잘못된 편견은 불행의 예고편이지만 위대한 편견은 행복의 예고편입니다.
2. 여성을 존중하라는 교훈
모세 율법은 아내를 버릴 때 이혼 증서를 써주라고 했습니다(31절). 그 율법은 원래 여인의 인권 보장을 위해 아내를 쉽게 버리지 말라는 의도로 제정되었지만 점차 남자의 편리한 도구로 역이용되어 이혼 증서 한 장 딸랑 써주고 아무런 위자료나 사후보장책도 없이 아내를 쉽게 버리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그런 폐단을 막으려고 바리새인 중 보수적인 샴마이 학파는 이혼은 부정과 율법의 위반 때만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반면에 진보적인 힐렐 학파는 한 쪽에서 이혼 의사를 보이면 이혼을 허락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힐렐 학파보다 샴마이 학파의 교훈에 더 가깝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샴마이 학파보다 더 여성의 인격과 권리를 옹호한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이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는 것과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것을 다 간음죄라고 한 것은 자세히 보면 여성을 함부로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간음하지 말라는 7계명을 재해석한 예수님의 말씀은 여성 존중 사상이 깊이 투영된 말씀입니다.
요새 여성들의 권익이 점차 향상되고 있습니다. 그 일을 이루는데 여권운동가들의 공헌도 있었지만 더욱 큰 공헌 주체는 ‘복음’과 ‘전쟁 없는 평화'입니다. 전쟁이 없으면 자연히 여권은 신장됩니다. 그러다가 큰 전쟁이나 내란이 생기면 무서운 전쟁 폭력으로 여권은 그때부터 다시 무섭게 추락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 다시는 전쟁이 없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전쟁보다 더 없어져야 할 것은 사람들의 이중 잣대입니다.
어느 날, 동정녀 마리아를 깊이 경외한 성 버나드가 교회의 마리아 상 앞에서 무릎 꿇고 존경의 눈길로 마리아 상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그의 눈에 착시 현상이 생겨 마치 마리아 상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자 성 버나드는 자기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마리아 상을 향해 “조용히!”라고 외치면서 무의식적으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자는 교회에서 말하면 안 된다!” 얼마나 안타까운 이중 잣대입니까?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둘러싼 대중에게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했습니다. 그 말씀도 간음한 여자는 끌고 오면서 상대 남자는 도망치게 놔둔 군중들의 이중 잣대를 질책한 말씀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은 여권을 매우 중시하셨고 여성을 위해 헌신하셨습니다. 그래서 복음이 더욱 소중한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뜻과 삶을 따라 여성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버림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함부로 버리지 말고 존중해주라는 것이 예수님이 재해석하신 7계명에 담긴 깊은 교훈입니다.
3. 이혼을 주의하라는 교훈
본문 32절에서 예수님이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이라고 하신 말씀은 “음행한 이유가 있다면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말씀도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준거 틀로 삼으면 기독교에서도 이혼은 제한적으로 허락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당시에 남편들이 음행해서 아내를 버리기보다는 다른 이유로 아내를 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말씀은 아내를 이유 없이 혹은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내세워 쉽게 버리지 말라는 뜻이 내포된 말씀입니다.
지금 상황에서 이 예수님의 말씀을 확대 적용하면 이혼을 쉽게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힘들면 이혼까지 했을지 그 심정은 이해됩니다. 사실상 이혼자 중 절반 이상은 피해자입니다. 이혼자는 비이혼자보다 ‘더 아픈 사람’이지 ‘더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래도 이혼을 쉽게 하도록 합리화하는 논리에는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요새 이혼을 합리화하는 많은 논리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이런 논리들입니다. “자녀들이 자주 싸우는 부모와 함께 살기보다 이혼의 상처를 겪어도 마음 편하게 살게 하는 것이 낫다! 하나님도 불행한 결혼을 계속 유지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실 것이다! 이혼이 잘못인 줄은 알지만 하나님이 용서해주시고 합력해 선을 이뤄주실 것이다!” 물론 다른 허물처럼 이혼의 허물도 얼마든지 용서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와 용서를 전제로 죄와 허물과 이혼 등을 편하게 생각하면 그 은혜는 결국 값싼 은혜가 됩니다.
주변을 보면 이혼했어도 그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져서 당대와 후대가 더 복된 길로 가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또한 사람과는 이혼했지만 마치 하나님과 결혼한 것처럼 이혼 후에 더 하나님의 큰일을 감당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좋은 면만 생각해서 이혼을 편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결혼과 사랑을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닌 진지한 역사로 여기며 최대한 인내한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4. 사랑을 품고 살라는 교훈
예수님이 제 7계명을 재해석한 말씀은 고도의 순결을 강조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순결하게 살려고 최대한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성도들이 순결의 참된 실체를 오해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성의 교감을 추구하는 것 자체를 불결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죄’의 반대개념은 ‘여자를 안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품고 여자를 보는 것’입니다. 즉 결혼이란 범주 안에서 이성의 교감을 추구하는 것은 더러운 것이 아니라 거룩한 것입니다.
성욕 자체는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과 기쁨과 번성을 위해 이성을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순결하게 살겠다고 혼자 지내지만 혼자 살면서 그 문제로 고뇌하며 더 큰 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고독함과 외로움은 순결함의 대안이 아닙니다. 잘못된 음욕 추구는 나쁜 것이지만 정당한 이성 추구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총론 말씀이 나옵니다. 그 말씀에서 하나님은 6일째 최종적으로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 1:27) 그 창조한 것을 보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하셨습니다(창 1:31). 그리고 창세기 2장에는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것에 대한 구체적인 각론이 묘사되어 있는데 그 묘사를 보면 창조 6일째에 “보시기에 심히 좋다!”는 하나님의 만족이 있기 전에 보시기에 좋지 않았던 상황이 있었습니다.
창세기 2장 1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아담만 창조되고 하와는 없었을 때입니다. 그때는 아담이 죄를 짓기 전이었기에 하나님과 일대일의 관계도 아주 깊었을 때였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그 상황을 “좋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나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친밀하게 교제할 수 있었던 아담에게도 좋지 않은 부족한 점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때 아담이 자신의 믿음 부족으로 그 상황을 부족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부족하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와를 지어주셨고 그때서야 비로소 하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으셨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성을 추구하는 것은 절대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섭리와 사명 때문에 혼자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성을 멀리하고 혼자 사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는 순결한 삶이고 이성을 추구하고 결혼하는 것은 하나님이 덜 기뻐하는 덜 순결한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어느 날, 한 미혼 자매가 목사님을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을 사랑해요. 그런데 요새 외롭고 허전하면서 자꾸만 이성에 대한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때 헛된 영성주의자들은 아주 메스껍고 도식적인 말을 합니다. “자매! 더 하나님께 매달려! 그러면 외로움이 없어질 거야.” 그래서 더 하나님께 매달렸지만 외로움과 허전함이 여전하면서 더 죄책감과 회의가 생겼습니다. 그런 유사한 경험으로 고민하는 청년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고민을 들으면 이렇게 말해주어야 합니다. “자매! 그 고민을 충분히 이해해. 사람은 이성이 없으면 부족함을 느끼도록 만들어졌어. 하나님도 혼자 사는 것을 좋게 보시지 않아. 이성에 대한 생각이 자꾸 든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 이성을 향한 생각은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생각이야! 이제 좋은 배우자를 달라고 열심히 기도하고 찾아봐.”
이성을 추구하는 마음은 불결한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그 사실을 외면하고 어떤 광어족 자매는 의기양양하게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만 사랑해요. 하나님이 저의 전부니까 저는 남자에게 관심이 없어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을 더 좋아해줄 줄 알지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더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성을 자랑하는 그런 어투도 싫어하시지만 혼자 사는 모습을 좋게 보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안 좋다고 하는데 자신은 좋다니까 얼마나 안타까운 오해입니까?
그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얘야! 나를 전부로 알고 사모하는 것은 고맙지만 나는 네가 좋은 남자를 만나 서로 교감하며 살기를 원한단다.” 딸이 아빠가 좋다고 결혼도 안 하고 아빠와 있으려고 하면 어느 아빠가 좋겠습니까? 아빠는 자기 딸이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자기만 바라보며 살겠다면 다 좋아하지만 오직 자녀를 가장 사랑하는 부모만은 자녀가 자신을 바라보기보다 이성과 교감하며 사는 모습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에 제일 가까운 사랑입니다.
< 참된 사랑을 흘려보내십시오 >
이제 “하나님은 나의 전부!”라고 하며 사십시오. 그러나 “나는 하나님만 있으면 남편이 없어도 살아요! 아내가 없어도 살아요!”라고 하지는 마십시오. 어르신들은 그렇게 말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지혜롭게 잘 깨우쳐 주십시오. 배우자와 교감을 이루며 배우자를 사랑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이 가장 보시기에 좋은 삶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본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삶은 결국 하나님만 바라보는 삶이 아닙니다.
창조 6일째 날이 끝났을 때 아담과 하와는 벗은 상태였지만 부끄러워하지 않고 상대에게 큰 매력을 느끼며 본성상 하나가 되려는 마음을 가졌고 하나님은 그것을 좋게 보셨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은 결혼이란 범주 안에서 남녀가 하나가 되는 모습을 가장 보기 좋게 여기시고 그런 교감을 통해 흘러나오는 진국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십니다. 왜 요새 황혼 이혼이 늘고 있습니까? 과거 세대가 이성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가지고 남녀 간에 펼쳐져 할 동등한 사랑의 교감을 배우지 못한 후유증입니다.
이제 음욕을 품고 이성을 보지 말고 사랑을 품고 이성을 보십시오. 그리고 결혼한 상태라면 이렇게 다짐하십시오. “배우자로부터 배우자! 배우자를 사랑의 제일 실천 대상으로 삼자!” 이성을 사모하는 마음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결혼이란 범주 안에서 이성의 교감을 가지는 것도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을 벗어난 과도한 성적 욕망은 최대한 피해야 합니다. 요새 성적인 해방을 추구한다면서 성적인 일탈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말세의 징조입니다. 말세에 생기는 가장 큰 2가지 병은 정신병과 성병입니다.
기쁨과 안식을 주는 적절한 즐거움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나친 육적인 쾌락은 기쁨과 안식 대신 고통과 심판을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음란의 누룩을 주의하십시오. 그러나 가정과 결혼이란 범주 안에서 사랑의 교감은 많이 나누십시오. 그런 사랑에 대한 기대를 포기하지 말고 계속 기도하고 추구해서 가정에서 형성된 사랑의 맑은 물을 사회로 흘려보내도록 이번 한 주간도 힘써보십시오. 그처럼 깨끗하고 바른 모습으로 사랑을 추구하고 사랑의 확산에 공헌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는데 초석이 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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