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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스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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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1장 1절-4절.
1절-4절: 바사 왕 고레스 원년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의 입으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시려고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시매 저가 온 나라에 공포도 하고 조서도 내려 가로되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참 신이시라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유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거기 있는 여호와의 전을 건축하라 너희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무릇 그 남아 있는 백성이 어느 곳에 우거하였든지 그곳 사람들이 마땅히 은과 금과 기타 물건과 짐승으로 도와주고 그 외에도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예물을 즐거이 드릴찌니라 하였더라.
이 말씀은 역사적인 사건이니 역사계시라고 합니다. 또한 인간의 유형적인 활동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또 형용계시라, 형식계시라 그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계약을 선포하신 계약성입니다.
경주 불국사는 내게 대해서 우상은 아닙니다. 예수 믿는 자기에게 대해서는 우상은 아닙니다. 암자마다 있는 부처는 나와 상관이 없습니다. 우상은 남의 앞이 아닌 내 앞에 우상을 두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그랬지요? 때로는 예배당이 우상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면 죄이니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가게 합니다. 1차 2차 3차 이렇게 포로로 잡혀가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인간으로부터 영광 받으실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영광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입혀서, 능력도 입혀서, 지혜지식성도 도덕성도 입혀서 하나님께서 계신 그 신령계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누리게 해 주시기 위함이라 그 말이요. 이걸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우상을 섬기면 우상을 닮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을 닮습니다. 우리 인간은 동물의 차원이 아니지요. 모든 것이 동물보다 조금 나은 그런 것도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모형이요, 하나님을 닮을 수 있는 특수한 존재입니다. 짐승 중에 개가 사람을 물어뜯어 죽였다든지 해서 개가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포로로 잡혀가게 하는 그런 일이 있든가 그 말이요. 그런 건 없지요?
인간에게 율법과 계명을 주신 것은 인간의 영을 위해서 주신 것인지, 아니면 육의 보존을 위해서 주신 것인지? 우리 인간은 고통은 나쁘고 행복은 좋습니다. 그런데 ‘부요다. 가난이다’ 하는 건 계명을 잘 지키면 부요자로 만들어주고, 계명을 못 지키면 가난을 주고 이렇게 믿음이 대가로 주시는 것이냐? 그건 아닙니다. 그냥 말로만 하면 인간은 모르니까 하나님께서 경험을 한 번 해보라고 주신 겁니다. 말하자면 고통이라면 ‘그런 고통을 영원히 당하지 않는 자로 살아라’ 하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는 겁니다.
이처럼 행불행을 미리 경험케 해가지고 성도 자기의 믿음을 증진케 하는 겁니다. 증진케 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쓴다 그 말이요. 믿음이 좋기 때문에 부자로 만들어주고 하는 믿음이 대가가 아니라 그 말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육적인 행복과 불행은 믿음의 대가가 아니라 그 말입니다. ‘영원히 불행한 자로 살지 말고 행복한 자로 살아라’ 하는 겁니다.
애굽에서 잘 살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느냐? 바벨론에서 잘 살기 위해서 계명을 지키느냐? 그건 아니잖아요? 재세기간의 목적이 무엇이냐? 무엇을 붙들고 신앙을 지켰느냐? 바벨론에서 70년 동안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해서 포로생활의 그 70년이 점점 짧아지는 게 아닙니다. 그러면 70년 동안에 신앙생활을 못하면 더 길어지느냐? 그것도 아닙니다. 120년, 혹은 70년 하는 이것은 우리의 제세기간의 유효기간을 의미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소경과 절름발이 각종 앓는 자를 왜 보여주면서 또 왜 그렇게 경험케 하느냐? 우리가 여기서 영적 눈이 뜨이지 못하면 안 된다 그 말이요. 영적 면에서 영원히 그런 자로 살지 말라고 경험케 하는 겁니다. ‘재세기간 동안에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라. 하나님을 감염시켜라’ 하는 거지요. 그래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이치를 바로 깨달아서 하나님과 인격적 결합을 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본질과 본성을 입으라는 겁니다.
여기서 이탈이 되어 세상을 사는 목적이 달라지면 자기의 이성이 세상으로 포로 되어 가게 되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계명을 지키면서도 이성은 포로가 되는 겁니다. 무형적 포로.
자기는 이성이 해방이 돼야 합니다. 자기가 무엇에게 포로 되어 있느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못 살면 포로가 되는 겁니다. 무형적인 자기의 이성이 무형적인 그 무엇에게 포로가 돼 버린다 그 말이요.
구약성경에 이집트 나오지요? 애굽. 여러분들의 역사책에도 나오는데, 이집트의 그 피라밋을 누가 만들었느냐 그 말이요. 애굽에 포로 된 이스라엘 사람들이 노예생활 하면서 만들었단 말이요.
포로들은 왕의 일만 하고 자기의 일은 하지를 못합니다. 자기 일을 못 해. 남의 일만 해. 해서 안 될 일을 하는 것이 포로요, 자기에게 영원히 유익되게 하지 못하는 일을 하는 것이 포로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자기의 할 일이 뭡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입는 것. 이게 자기의 일이요. 그런데 이 일을 하지 않고 딴 일만 계속 하고 있어.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못 입어. 자기의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의 성품 못 입는 것에다 걸어놓고 하는 것이 남의 일이야. 그건 자기의 일 같으나 남의 일이야. 세상일이야. 어째서 그게 남의 일이냐? 세상이 시키는 일을 하고 있어. 사는 목적관이 그렇다 그 말이요.
우리의 목적관은 뭐지요? 세상의 일을 하는 그거는 방편이고 우리의 목적은 그 방편을 이용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잡 입는 거. 그건 자기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성품은 안 입고 방편적인 그 일을 목적적으로 하는 이건 남의 일이야. 애굽이 시키는 일이야. 그건 누가 하는 거냐? 그건 포로가 하는 일이야. 그러니까 자기가 포로 되었다 그 말이요.
지금은 그걸 잘 모를 겁니다. 자기가 포로된 것을 몰라요. 그러나 죽음의 선을 넘어가면 그때서야 알게 됩니다. 그러나 영의 눈이 밝으면 지금도 알 수가 있지요. 영의 눈이 어두우면 그 때 가서 알게 되는데 그 때는 이미 늦은 겁니다. 후회 막급하게 되지요.
자기의 포로생활을 미리 발견을 하고 공연히 헛일 하지를 말아라. 그래서 이스라엘의 포로생활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 한 것을 보여준다 그 말이요. 현재적 우리보고 ‘공연히 헛일하지 말아라. 포로가 되어가지고, 세상에 붙잡혀 가지고 공연히 헛일 하지 말아라’ 하고 이스라엘의 그 포로를 우리 눈에 계시적으로 역사계시로써 보여준다 그 말이요.
역사계시는 또 한 편 뭘 보여주느냐? 이스라엘이 민족적 전체적으로는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있으나 개인적으로는 자유 할 수가 있습니다. 다니엘이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에스겔 에스라 느헤미야 등은 신앙적으로는 자유 할 수 있었지요?
인간이란 인간은 모두 죄에 포로가 되었으나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지공법에 의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가 됐습니다. ‘이제 이런 너는 외적으로는 포로이나 내적으로는 자유 할 수 있는 자니 너는 내적 포로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자로 살아라’ 그 말이요. 성화구원에 속하는 거지요? 내적에서 포로로 되지 말고 자유 한 자로 살아라.
이스라엘 전체로 보면 이스라엘은 바벨론에서 포로입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전체 면에서 보면 다니엘도 포로입니다. 그러나 영적 신앙 면에서 보면 다니엘의 개체는 자유란 말이요. 그렇지요? 그게 보여지느냐 말이요. 이게 신앙으로 보는 눈입니다.
우상의 음식을 물려가지고 나온 음식을 다니엘보고 먹으라고 하는 것은 바벨론 왕 네 자유이다. 그러나 그것을 먹고 안 먹고 하는 것은 다니엘 내 자유이다. 그렇지요? 우상보고 절하라고 하는 것은 네 자유이나 절 안 하는 것은 내 자유다. 풀무불 속에 집어넣는 것은 네 자유이나 풀무불에 타고 안 타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유이다. 사자굴 속에 넣는 것은 너의 자유이나 먹히게 하거나 안 먹히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자유이다.
‘바벨론이 네 앞에 절을 할 만큼 성도야, 너는 자유자로 살아라.’ 다니엘은 이 이치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벨론이 다니엘 앞에 절을 할 만큼, 느부갓네살 왕이 다니엘 앞에 넙죽이 절을 할 만큼 다니엘은 그렇게 살았다 그 말이요. 그 이치를 잡고 살았다 그 말이요. 미래적 예비적 영감으로 살았습니다.
그 옛날 포로로 잡히기 전에 이스라엘이 버린 그 하나님을 다니엘은 바벨론에서 독차지 하고 살았지요. 하나님을 독차지하고 살아. 이스라엘 전체가 보편적인 하나님으로 삼고 살고 있을 때 특수한 사건에서 다니엘은 하나님을 독차지 했습니다. 밧모섬의 요한도 그랬지요. 그 다니엘과 사도요한을 누가 정복하겠느냐? 아무도 정복 못 합니다.
포로가 왜 되느냐? 우상을 섬기면 포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보다도 무엇에다 더 마음을 두고 사느냐 그 말이요. 그건 포로예요. 그건 포로가 된 거예요. 포로 된 자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그거는 헛일입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세상은 아담의 원죄에 의해서 전부는 포로가 됐어요. 그러나 다니엘은 포로이면서 포로가 아닌 자로 살았습니다. 온 세상은 포로이지만 나는 포로가 아닌 자로 살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요? 온 세상은 포로로 살아도 나는 포로로 안 살 수가 있다 그 말이요. 하나님의 말씀에 자원적 자유자로 살면 포로 된 세상에서 자유자로 살 수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전부 다 죄에 포로로 살지만 나는 죄에 포로로 살지 않을 수가 있다 그 말이요.
포로에서 노예로 살다보니 활동에 소유에 자유가 없이 살게 되고, 그 다음에 분산정책이 나오게 됩니다. 흩어버린단 말이요.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해서 흩어버린다. 포로로 살면 노예지요. 노예로 살면 세상의 명령을 들어. 세상의 명령을 들으면 활동의 자유가 없어지고 소유의 자유가 없어져. 그 다음에 이제 포로기 때문에 코가 꿰어져서 세상이 원하는 대로 분산시켜 버려. 이걸 영의 눈을 가지고 볼 줄 알아야 돼요.
노예로 있으니까 이제 주인의 대우가 좋아지고 기쁘고 즐겁게 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요. 세상 따라서 살게 되면 세상이 좋아하고 생활의 대우가 좋아지고 즐겁습니다. 이럴 때에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 성전 짓기에 고역이 많을 테니까 여기서 농지개발을 하고 산업을 발달시키고 바벨론 건설 확장을 하고 살자’ 하는 그런 사람이 수두룩하게 생겨나게 되지요. 옛날에 바벨론에서 그런 사람들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포로로 잡혀오기 전에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자는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제 70년이 다가오니까 ‘70년이 차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간다’ 한단 말이요. 선지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사람은 늘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언제 70년이 되나? 언제 70년이 되나’ 하며 학수고대하고 있다. 이런 사람은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사람이다.
그래서 같은 이스라엘 민족인데도, 같은 혈통인데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두 종류로 나누어지는 겁니다. 세상에 포로 된 자는 ‘바벨론 건설 확장을 하자’ 하며 고향에 갈 생각을 않는 자가 있고, 선지자의 말은 귀담아 들은 사람은 ‘고향으로 가자’ 이렇게 나누어지더라 그 말이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을 귀담아 들은 사람들은, 그리고 바벨론에서 출생을 했다고 하더라도 부모를 통해 선지자의 예언을 전해들은 자들은 바벨론 총각에게 시집가지 않고, 바벨론 처녀에게 장가가지 않습니다. 깡다구가 있다 그 말이요. 비록 영토도 빼앗기고 주권도 빼앗기고 생명을 뺏기는 한이 있더라도 유대인의 긍지, 히브리인의 신앙사상, 아브라함이 그 신앙사상, 시온주의 사상이 들어있다 그 말이요. 뼈가 있다 그 말이요. 정신에 뼈가 있어.
이 세상에 신령계와 물질계를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 부르는 그런 민족이 어디 있느냐 그 말이요. 시온주의 사상, 히브리 신앙사상을 가진 그 민족이 아니더냐? 어느 민족이 전지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민족이 있더냐 그 말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향으로 돌아갈 때에는 내 몸속에 숨은 재산이 값이 있다. 그러니 아무리 내가 바벨론에 살고 있어도 바벨론의 부요관을 가질 수가 없다. 내 정신 사상이 바벨론으로 동화될 수가 없다. 동요될 수가 없다. 설령 바벨론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귀국령이 내리면 세상 것은 다 버리고 간다’ 이런 정신으로 바벨론에서 살아야 하는 겁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아, 너희들 고향으로 다 돌아가거라’ 하는 고레스의 귀국령이 내려졌을 때 다 버리고 갔잖아요?
이제 고레스가 즉위하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의 말이 생각이 난다 그 말이요. 과거에 이스라엘이 포로로 잡혀오기 전에 선지자가 ‘고레스가 즉위를 하면 이스라엘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그 명령을 할 것이다’ 하는 예언을 미리 해 놨단 말이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70년 동안 포로생활을 하면서 이제 70년이 거의 다가오고, 70년 만에 고레스가 왕이 되니까 ‘아이고, 선지자가 한 말이 진짜로구나. 우리가 고향으로 돌아가겠구나’ 하고 옛날에 선지자가 한 그 말이 생각이 난다 그 말이요.
드디어 귀국령을 딱 내렸을 때에 고레스의 그 명령이 어찌 고레스 왕의 말이라고 생각이 되겠느냐 그 말이요. 말은 고레스 왕이 했지만 그렇게 할 것이라고 그 옛날 선지자가 그 예언을 해 놨단 말이요. 그 선지자의 예언은 하나님이 명령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이지요.
그러니까 실질적으로 고레스의 그 귀국령을 듣자마자 ‘고레스 왕의 명령이다’ 그렇게 듣겠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다’ 라고 듣겠느냐 그 말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누구의 말로 들리겠어요? 하나님이 명령으로 들린다 그 말이요. 이것이 역사입니다. 또 역사계시요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형용계시요 형식계시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걸 보고 내가 현 세상에서 120을 살 런지, 70년을 살 런지 모르지만 우리가 사는 그 기간은 우리의 재세기간이라. 말하자면 바벨론에서 사는 기간이라. 그러면 에스라 선지자의 말을 역사계시로써 귀담아 듣는 자는 분명히 그 어느 날에는 우리 앞에 그 예언이 맞을까요? 확실히 맞을까요?
우리에게 ‘너희 고향으로 돌아가거라’ 하는 귀국령이 어떤 사건으로 내릴지는 몰라요. 천군천사장의 나팔호령으로 울려올지? 그러면 다 버리고 고향에 간단 말이요. 우리 고향에 가는 거라 그 말이요.
우리가 믿음으로 보면, 영적으로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그 신앙을 받았다는 긍지를 가져야 되겠고, 시온주의 사상 즉, 다윗이 예루살렘을 건설하고 하나님의 진리통치를 한 시온주의 사상, 다윗의 그 신앙사상을 우리가 가졌다고 자부를 한다면 애굽 같은 세상, 또는 바벨론 같은 이 세상에서 쉽게 죄악으로 동요 동화되지를 말아야지요.
우리의 사는 목적은 ‘이 바벨론 같은 세상에서 바벨론을 건설하자’ 그건 아니라 그 말이요. 하나님께서 주시는 현실 속에서, 생활권 속에서 우리의 할 일을 하고 가야 된다. 그 나라에 갈 때에 뭘 가지고 가겠느냐 그 말이요. 우리의 속에 영적인 부요성을 갖고 가야 된다. 그래야 만이 우리의 삶이 바른 거다 그 말이요.
기도 올립시다.
감사합니다. 에스라서의 역사계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현 시점에서 하나님이 자녀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어떤 신앙사상을 가지고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것을 우리에게 역사계시로 보여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보통 보면 ‘세상을 어떻게 건설하고 세상에서 어떻게 행복하게 잘 살아볼까’ 그런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그러나 아무리 잘 살아도 아무리 못 살아도 다 버리고 두고 갈 것이니 우리는 그 옛날 바벨론에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았던 목적처럼 살지 말고, 고향을 잊어버린 육적 이스라엘이 바벨론을 건설하면서 사는 그런 정신 빠진 삶으로 살지 말고 다니엘과 사드락 메삭과 아벳느고 느헤미야 에스라 학개 스가랴 여호수아 스룹바벨처럼 저희들도 고향을 그리워하는, 천국을 그리워하는, 그리고 이 세상에 어떤 사건 환경을 주더라도 하나님의 성품의 부요성을 많이 간직하고 갈 수 있는 당신의 복된 자녀들로 삼아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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