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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3: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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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3.12.16 http://www.john316.or.kr |
마태복음(6) 알곡 성도가 되는 길
(마3:1-12)
사람에게 가장 지적인 만족감을 주는 진리는 역설의 진리이고 가장 큰 기쁨을 주는 삶은 역전의 삶입니다. 최고 작품 인생은 대개 부서진 삶의 터전 위에서 세워집니다. 곡식은 부서져 가루가 되어야 빵이 되고 음식물은 입에서 부서져야 영양분이 됩니다. 그처럼 작품 인생이 되려면 먼저 부서지는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부서짐의 강도가 성숙의 정도입니다.
곡식은 도리깨질을 통해 알곡이 되듯이 인생도 도리깨질을 통해 알곡 인생이 됩니다. 고난은 내일의 작품인생을 위해 더 부서지고 깨지고 죽는 과정입니다. 대장장이가 달궈진 쇠를 때려 강력한 연철을 만들듯이 고난은 강력한 연철 인생을 만드는 하나님의 도구입니다. 왜 하나님은 사랑하는 성도에게 고난의 시련을 겪게 하고 수치를 당하게 하십니까? 죽어야 살고 버려야 얻고 깨져야 세워지고 부서져야 작품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했습니다(고전 15:31). 하루만 죽고 한번만 죽으면 사도 바울이 되지 못합니다. 날마다 죽어야 평안도 얻고 사는 길도 열립니다. 왜 삶이 고단해집니까? 날마다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왜 미움과 혈기와 불평과 원망과 열등감과 좌절감이 생깁니까? 덜 죽었기 때문입니다. 잘 죽는 길이 잘 사는 길입니다.
시련 중에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잘 죽으면 고목에서 꽃이 피고 반석에서 샘물이 터집니다. 시련은 껍질과 형식을 깨뜨리는 도구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에서 형식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내용이 담깁니다. 그러나 형식에 너무 얽매이면 안 됩니다. 그처럼 껍질이 있어야 알곡이 보호를 받기에 열매가 익을 때까지는 껍질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수확 후에 껍질은 버려지기 때문에 계속 껍질 인생으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됩니다.
토사구팽이란 한자성어가 있습니다. “토끼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다.”는 말입니다. 그 한자성어에서 사냥개의 모습이 바로 껍질 인생의 모습입니다. 김정은이 권력을 잡기까지는 장성택이란 껍질이 필요했지만 권력을 잡자 곧 장성택을 잡아 죽였습니다. 그처럼 아무리 충성스럽게 껍질이 알곡을 보호했어도 결국 껍질은 버려질 운명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면서 껍질 인생이 되지 말고 알곡 인생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 알곡 성도가 되는 길 >
교회에서도 껍질 역할을 하다가 열매를 수확한 후에 안타깝게 버려지는 껍질 교인도 있습니다. 그런 아픔이 없도록 예수님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신 것입니다. 껍질 군중교인으로 있으면 나중에 남는 것이 없지만 알곡 동역교인으로 있으면 나중에 남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므로 방패막이 역할만 하고 버려질 운명이 되지 않도록 늘 알곡 성도가 되려고 해야 합니다. 알곡 성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회개로 천국을 예비하십시오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구약시대의 가장 큰 자라고 하셨습니다(마 11:11). 죽은 자를 살리고 하늘의 불을 끌어내리는 능력자도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요? 그가 예수님의 길을 예비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말라기 선지자 후 400년간 지속되던 구약의 암흑시대를 뚫고 등장한 위대한 선지자로 예수님보다 약 6개월 먼저 태어났고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한 예수님처럼 30세쯤에 회개를 선포하는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모세 율법에 의하면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공식 나이가 30세인데(민 4:3), 아마 그 전통을 따른 것으로 여겨집니다.
세례 요한은 구약성경의 요하난과 같은 이름으로 신약성경에 요한이란 이름이 4명 이상 있기에 특별히 ‘세례’란 명칭을 이름 앞에 붙인 것입니다. 그는 유대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푼 구약 최후의 선지자였습니다. 당시 유대 광야는 보통 사람이 살기 힘든 지역으로서 주로 극단 종파들이 거기서 거주했는데, 그 대표적인 종파가 엣세네파였기에 세례 요한도 엣세네파 출신이란 견해도 있습니다.
그 광야에서 세례 요한이 외쳤습니다(2절).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천국은 ‘지상천국’ 외에 ‘마음의 천국’이란 개념도 있지만 보통 ‘하나님의 통치가 이뤄지는 곳’을 천국이라고 할 수 있고 ‘최고의 축복과 행복’의 의미가 함축된 표현이기도 합니다. 그처럼 천국의 축복과 행복을 얻으려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회개란 말입니다.
세례 요한의 사명은 이사야 40장 3절의 말씀에 예언된 대로 광야에서 회개를 외침으로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사명’이었습니다(3절). 그 회개의 메시지를 듣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사람들이 나아와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았습니다(5-6절). 400년 동안 영적 기갈과 절망 속에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마치 단비 같았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 자신들의 죄를 털어놓고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당시 유다 사회에는 3대 종파가 있었습니다. ‘명분에서 기득권을 가진 종교적 좌파’인 바리새파와 ‘자리에서 기득권을 가진 종교적 우파’인 사두개파와 ‘극단적인 영성파’인 엣세네파입니다. 그 중에 많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사람들이 도대체 세례 요한이 어떻게 하나 보려고 왔습니다. 그들에게 세례 요한이 말했습니다(7절).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왜 그렇게 심한 욕을 했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관찰하고 평가하려고 온 그들의 구경꾼적인 자세 때문이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은혜 받으러 나오지 않고 구경하러 나오는 것입니다. 그처럼 구경꾼의 자세를 가지고 나오자 세례 요한이 분노하며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며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부은 것입니다.
뱀으로부터 비롯된 원죄의 역사에 치를 떠는 유대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란 욕은 가장 심한 욕입니다. 그렇게 욕하면서 그런 구경꾼적인 신앙을 가지면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7절). 실제로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멸망당하면서 세례 요한의 예언대로 되었지만 결국 궁극적인 심판은 종말의 날에 이뤄질 것입니다. 지금 종말의 날이 점차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더욱 구경꾼적인 신앙을 버리고 참된 회개로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는 알곡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2. 좋은 영향력을 남기십시오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임박한 심판을 피하려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8절). 외식적인 태도를 버리고 진심으로 회개하라는 말입니다. 그런 진실한 회개 없이 아브라함을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9절). 당시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말은 ‘선민’이란 뜻이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가졌는데 회개의 열매 없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사실만 내세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처럼 열매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으면 찍혀 불에 던져진다고 했습니다(10절). 하루 빨리 열매 맺는 삶을 추구하라는 말입니다. 열매 맺는 삶이란 어떤 삶을 말할까요? 씨를 통해 번식하는 삶을 뜻합니다. 그처럼 성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생명력과 좋은 영향력이 남아야 합니다. 축복은 추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생명력과 좋은 영향력을 남기면 축복은 대개 따라옵니다.
저희 기독교 선교연맹에는 전 세계에 약 6만 교회가 있습니다. 그 중에 미국에는 약 100개의 한인 이민교회들이 모인 한인 지역회가 있는데 그 지역회 감독은 큰 문제가 없으면 4년 중임제로 8년에 한번 선출됩니다. 그때 스스로 그 자리를 원하는 목사님도 있고 반대로 자꾸만 사양해도 남들이 그 자리로 앉히는 목사님도 있습니다. 그러면 대개 후자 목사님이 감독이 됩니다. 평소에 좋은 영향력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좋은 영향력을 남기면 대개 사람도 따르고 축복도 따라옵니다.
큰 영향력을 남기되 무엇보다 구원받은 생명을 많이 남기십시오. 그래서 전도가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은 ‘내 안의 예수님’을 다른 영혼에 심는 것입니다. 결국 전도란 교회에 데려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나눠주고 보여주며 상대의 마음에 감동과 영향력을 끼치는 삶이 진짜 전도입니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교회로 데려오는 전도’에만 너무 치중하고 ‘영향력을 끼치는 전도’를 소홀히 해서 부작용도 많았습니다.
생명은 나눔과 남김이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생명의 씨를 많이 남기는 성도가 되십시오. ‘많은 성도’보다 ‘알곡성도’가 더 중요합니다. 교회에 “많은 사람이 있느냐?”보다 “어떤 사람이 있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생산 능력이 있는 인물이 되십시오. 그래서 세상의 어두움을 탓하지만 말고 예수님의 생명을 번식시키는데 최선을 다하십시오. 부족한 점이 많아도 생명의 번식을 잘하는 성도가 하나님께 큰 기쁨을 드리는 알곡 성도입니다.
3. 성공할수록 겸손해지십시오
당시 세례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습니다(4절). 낙타 가죽이 아닌 낙타털로 짠 투박한 털옷은 백성들의 죄에 대한 슬픔을 표현하려고 선지자들이 주로 입었던 옷이었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은 가난한 하층민들의 음식인 메뚜기와 야생꿀 석청을 먹으면서 회개와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그처럼 세례 요한의 절제하는 모습을 사람들은 위대하게 봤지만 정작 세례 요한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지극히 낮췄습니다. 본문 1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이 말씀은 세례요한의 겸손과 예수님의 위대성을 동시에 잘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당시에 노예는 주인의 신을 들고 다니며 필요할 때 바꿔 신게 했습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위해 그런 천한 일을 해도 자신에게는 오히려 영광이 된다고 할 정도로 예수님을 높여드렸습니다.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높였지만 정작 세례 요한은 예수님 앞에서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여긴 것입니다. 그처럼 어떤 사람이 알곡 성도인지 알려면 그에게 알찬 삶의 내용과 더불어 겸손한 태도가 있는지를 보면 됩니다.
겸손이란 자기를 숨긴다는 의미보다는 자기를 있는 그대로 알리며 진실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의바르고 인사성 밝고 대인관계가 좋은 것도 겸손이지만 진짜 겸손은 시기와 비판과 상처과 절망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있는 사람’도 겸손해야 하지만 ‘없는 사람’도 겸손해야 합니다. 즉 힘들어도 불평과 남 탓을 하지 않고 남이 잘되는 모습을 봐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 것이 오늘날 더욱 필요한 겸손입니다.
겸손하면 여러 가지로 삶에 큰 유익이 됩니다. 인맥사회에서 한 사람의 출세에 큰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배우자의 겸손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리 봐도 성공요소가 많지 않은데 크게 성공합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대개 배우자가 겸손합니다. 그러면 그때 탄성이 나옵니다. “저 사람은 배우자의 겸손과 친절과 기도 덕을 톡톡히 보는구나!” 겸손한 배우자 때문에 사랑 받고 인정받고 성공한 사람이 한둘이 아닙니다.
또한 겸손하면 한 번 시작한 일을 꾸준히 감당하는 인내도 생깁니다. 어려운 일도 잘 버티고 감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능력과 재주와 지혜가 있어서 잘 버티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기에 잘 버티는 것입니다. 축복은 잘 버틸 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좋은 일을 할 때 아무리 어려운 일을 만나도 절대 이렇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왜 이 고생을 하나! 그만두고 싶다.” 물론 잘못된 길은 빨리 끝내야 합니다. 또한 이단 공동체는 빨리 떠나는 것이 상책이고 자기 인생의 사명을 매몰시키는 장소도 역시 빨리 떠나는 것이 상책입니다.
반면에 분명히 좋은 길이라면 어렵다는 이유 때문만으로는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잘 버티는 것이 능력이고 축복의 산실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차원과 등급이 높아지려면 한계 껍질을 깨야 하는 어려운 인내의 순간을 만납니다. 그때 포기하면 다시 뭔가를 새로 시작하면서 시간을 낭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한계 껍질을 깰 때까지 잘 버틸 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잘 버팁니까? 겸손한 알곡 성도가 잘 버티고 결국은 승리합니다.
요한복음 19장 30절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처럼 일을 시작했거든 예수님처럼 다 이루려고 하고 십자가의 고난 중에도 “다 이루었다!”는 말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말씀도 잘 배워야 하지만 끝까지 선한 목적을 향해 중단 없이 달려갔던 예수님의 삶도 잘 배워야 합니다. 포기는 항상 빠른 것입니다. 조금 더 버텨 보십시오. 그러면 조만간 축복의 때가 반드시 올 것입니다.
4. 고난 중에 더 감사하십시오
세례 요한은 메시아가 오셔서 어떤 일을 하신다고 했습니까? 본문 12절 말씀을 보십시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키는 풍력을 이용해 알곡을 분리해내는 소쿠리입니다. 결국 알곡과 쭉정이는 키질을 하고 바람이 불 때 구별됩니다. 그때 밖으로 날아가 버리는 인생은 쭉정이 인생이고 주인 품 안으로 더 파고드는 인생은 알곡인생입니다.
왜 하나님이 가끔 기도제목을 주십니까? 한 단계 더 은혜 안으로 들어오라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어떤 사람은 문제가 생길 때마다 거창하게 금식기도를 하는 대신 그저 주일예배 때 단순히 한 줄 앞으로 앉았습니다. 다음에 문제가 생기면 또 한 줄 앞으로 앉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제일 앞자리에 앉게 되었고 그 교회의 핵심 이너써클이 되면서 크게 축복 받고 장로까지 되었습니다. 직분 욕심은 가지지 마십시오. 욕심이 병을 부르고 화를 부릅니다. 그러나 충성하다가 어떤 직분을 받게 되면 순종하고 감당하십시오.
사람은 가만히 두면 대개 은혜의 자리에서 뒤로 밀립니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이 문제와 기도제목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을 때마다 더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십시오. 살다 보면 문제와 역경은 끊임없이 찾아오지만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도 끊임없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문제를 믿음을 키우는 기회로 활용하십시오. 위대한 믿음이 위대한 사람과 위대한 역사를 만듭니다. 성도는 결코 최종적인 의미에서 패배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패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생기는 한 가지 아픔은 최종 승리를 위한 하나의 디딤돌입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인내하십시오. 고난을 잘 이겨내면 한 차원 더 축복과 성숙으로 나가게 됩니다. 세상에서는 ‘빽’이 있어야 진급하지만 성도는 고난을 통해 영적으로 진급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도 좀 더 가벼운 짐을 지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보다 좀 더 강한 어깨와 등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큰 문제를 큰 믿음으로 극복하면 큰 축복이 다가올 것입니다.
살다 보면 큰 문제보다 더 힘든 문제가 있습니다. 머피의 법칙처럼 문제가 연속해서 다가올 때입니다. 그러면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탄식이 나옵니다. “하나님! 왜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빨리 이 시련이 끝나게 하소서!” 그러나 시련을 끝내실 최적의 때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이 사랑하는 성도에게 수치와 시련을 겪게 하시는 것은 더 크고 놀라운 축복을 주시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문제가 계속되어도 믿음을 잃지 않고 더 감사하고 더 비전을 굳게 잡으십시오. 그러면 때가 되어 반드시 반전의 역사가 나타날 것입니다.
< 알곡 성도의 꿈 >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하나님도 같이 아파하십니다. 결국 우리를 사랑하면서도 허락하시는 모든 고난과 시련과 아픔은 우리를 복된 존재로 만들려는 하나님의 소품들입니다. 또한 우리를 아프게 하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이 쓰신 최상의 시나리오에 따라 등장하는 엑스트라입니다. 그런 시련과 대적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나중에는 “아! 하나님이 그래서 그런 시련을 허락하셨고 그런 사람을 내 곁에 두셨구나!”라고 깨달을 때가 옵니다.
때로는 문제해결을 위한 간절한 기도가 아무런 반응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거기에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또한 환경의 변화 전에 자신의 변화를 통해 알곡 성도로 만드시려는 하나님의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할 때도 항상 환경의 변화보다 자신의 변화를 우선적인 기도제목으로 두십시오. 먼저 밥그릇을 깨끗이 씻으면 조만간 그 밥그릇에 밥을 넘치게 담아주시는 역사도 나타날 것입니다.
자신이 변하면 뒤따라 환경도 변화됩니다. 얍복강 기도로 야곱이 먼저 변하자 에서도 변했습니다. 자신이 변하면 문제는 축복의 통로로 변하고 절망은 희망으로 변합니다. 그러므로 문제해결과 소원성취를 위해 철야기도를 하는 만큼 자신이 잘 죽고 변화되는 문제를 위해서도 철야기도를 하십시오.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보면 하나님 앞에 할 말도 없고 기도할 자격도 없지만 그래도 하나님은 신기하게 부족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은혜를 생각하며 먼저 마음속에서 깊은 감사를 회복하십시오.
사실 우리에게 부족한 모습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모습 때문에 안타까워하시고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항상 하나님께 죄송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없고 하나님께 책임을 물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고난은 하나님의 책임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입니다. 결국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 앞에 더 잘 부서지고 엎드리는 일입니다. 그처럼 더 잘 부서지고 엎드릴 때 하나님이 다가오셔서 우리를 일으켜주시고 문제가 해결되게 하시고 가시도 뽑히게 하시고 상처도 아물게 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은 알곡과 쭉정이를 철저히 나누십니다. 성경은 신자는 알곡이고 불신자는 사람은 쭉정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도 중에 쭉정이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쭉정이는 아주 사악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존재입니다. 열매를 맺기까지는 쭉정이도 꼭 필요합니다. 문제는 쭉정이는 열매를 맺을 때까지만 필요한 존재로 있다가 결국은 바람에 날리고 불에 던져진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쉬운 일입니까?
인생 자체가 원래 아쉬움이 많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참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때 좀 그랬을 걸!”이라고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상황에서도 늘 감사한 일이 무엇입니까? 아직도 살아있다는 사실입니다. 살아있기에 알곡 성도의 꿈을 가질 수 있고 언제나 새로운 축복의 기회가 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이제 알곡 성도를 꿈꾸십시오. 더 나아가 신실한 음지의 비전 동역자를 꿈꾸십시오. 과거의 부족했던 모습은 이미 지나간 얘기입니다. 현재의 부족한 모습도 오직 현재의 모습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내일의 삶을 알곡 성도의 삶으로 만들어가는 일입니다. 알곡 성도 한 사람에 의해 공동체의 운명과 성패가 좌우될 때가 많습니다. 큰일을 하는 사역자들을 보면 대개 이면에 누가 있습니까? 한두 사람의 신실한 비전 동역자가 반드시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비전 개척자와 비전 동역자가 협력하면 놀라운 사역 열매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제까지 우리를 한 번도 미워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사랑하실 뿐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제까지 한 번도 우리를 버리신 적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하나님의 품을 떠나고 외면할 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좀 더 쓰임 받는 존재로 잘 준비되길 원하십니다. 그렇게 잘 준비되면 다윗처럼 고난 후에 왕관을 씌워주시고 최적의 시간에 축복의 문도 활짝 열어주실 것입니다. 그때까지 어려움이 있어도 더욱 하나님 품을 찾고 범사에 감사함으로 내일의 큰 축복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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