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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35-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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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3.12.23 http://www.john316.or.kr |
주님을 기다리는 4대 자세
눅12:35-40
1961년 봄, 4.19혁명 후 사람들의 불안 심리를 틈타 사이비 종말론이 기승을 부렸습니다. 그때 한 시골교회의 전도사가 산 기도를 열심히 하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도 영혼의 병자들이 꽤 많습니다. 더욱 큰 문제는 그런 병자들이 교주처럼 행동하며 많은 사람들을 같이 병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 병자 전도사의 체험담입니다. 그가 산에서 기도할 때 밤에 갑자기 앞이 환해지면서 예수님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아무개 전도사야.” 그가 “말씀하소서!”라고 하자 예수님이 말했습니다. “네게 하늘의 비밀을 전해주겠노라.” 그 전도사가 말했습니다. “주님! 감사해요. 알려주실 비밀이 뭔가요?” 그러자 예수님의 모습을 한 사탄이 환상 중에 말했습니다. “올해 8월 15일에 내가 너희 마을 뒷산으로 재림할 테니 너는 교인들을 잘 준비시켜 나를 맞아라.”
그쯤 되면 신학을 제대로 한 사람은 금방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했을 텐데 그 전도사는 마음속에 큰 자부심을 가지고 하산했습니다. 그리고 봄에 씨를 뿌리려는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8월 15일에 예수님이 우리 마을 뒷산으로 재림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씨를 뿌리려고 하지 말고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세요.” 그러면서 재산을 다 팔아 바치게 하고 집집마다 돌면서 밭 갈던 소를 한 마리씩 잡아먹으며 잔치를 벌였습니다.
마침내 8월 15일이 가까워지면서 그 일주일 전에 온 교인들은 하얀 한복으로 갈아입고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다 마을 뒷산에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렇게 열렬히 기도하고 찬송하며 일주일을 보냈지만 8월 15일 아침이 되어도 예수님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믿음 부족 때문인 줄 알고 더 열렬히 기도하고 찬송했습니다.
그때 한 교인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기도 중에 휴거가 일어나면 믿음이 부족한 사람은 홀로 떨어질지 모르니 칡넝쿨로 모두 허리를 엮읍시다.” 그래서 칡넝쿨로 굴비처럼 허리를 엮어서 같이 휴거되도록 조치한 후 함께 기도하고 손뼉 치며 찬송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자정까지도 예수님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예수님도 바쁘시면 하루쯤 연기할 수 있지.”라고 스스로 위로하며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 후 열흘이 지나도록 예수님의 재림이 없자 교인들이 속은 줄 알고 점차 적개심을 가졌습니다. 상황이 심각함을 깨닫고 그 전도사가 말했습니다. “여러분! 어제 하나님이 새로 주신 계시에 의하면 며칠 전 예수님이 재림하다가 여러분들의 죄가 발견되고 믿음이 부족해서 화가 나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그러자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 말에 더 이상 속지 않고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그때 그 전도사를 추종한 몇몇 사람들이 수도권으로 올라와 시한부 종말론의 한 계보를 형성하다가 지금은 크게 성장했습니다.
어느 시대든지 시한부 종말론 장사꾼은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병자에게 속아 같이 병든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 곳을 주의하라고 하면 어떤 병자들은 “성령의 역사를 막지 말라!”고 합니다.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를 막으려는 것이 아니라 병을 막으려는 것입니다. 잘못된 열성 및 영성으로 자기 맘대로 계시하는 것을 다 성령의 역사로 알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성령의 이름을 팔거나 망령되어 일컫는 것은 오히려 제지하는 것이 진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는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갈 5:22-23). 성령의 제일 앞문은 사랑입니다. 성육신의 사랑을 외면하면서 신비한 신앙행위를 내세우고 교주를 우상화하는 것은 결코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또한 성령의 제일 뒷문은 절제입니다. 어느 시대든지 치우친 극단주의로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극단주의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성령의 열매인 절제로 뒷문을 잘 단속하게 하신 것입니다.
서울 강남에 잘못된 은사주의를 비판하는 한 장로교 목사님이 있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그분을 성령의 은사를 인정하지 않고 성령의 역사를 막는 목사라고 비판했습니다. 저도 그분의 책을 여러 권 읽었는데 그분은 성령의 은사를 인정했습니다. 다만 성령의 은사를 내세워 미혹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병자들은 자기 계시를 막으면 성령의 역사를 막는다고 합니다. 결국 자기가 성령인 셈입니다. 건강한 신앙을 위해서는 ‘전진’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제지’도 필요합니다. 인생에서 액셀만큼 브레이크도 중요합니다.
얼마 전, 밤늦게 강남에서 분당으로 고속국도를 타고 오는데 너무 졸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도로 앞에서 어떤 환영이 나타나 손을 흔들고 제 차를 막았습니다. 순식간에 지나쳤지만 소름이 오싹 끼치면서 졸음이 확 깼습니다. 그리고 몇 초 후에 앞에 시커먼 물체가 3차선 고속국도 중간에 떡 서 있었는데 고장 난 차였습니다. 시속 100킬로로 달리고 있어서 갑자기 설 수도 없었고 핸들을 너무 틀면 차가 전복될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고 최소한 적게 틀어서 간신히 몇 십 센티 차이로 앞차를 피했습니다.
저도 아직도 졸 때 갑자기 앞에 나타나 손을 흔들어 제 차를 막은 그 환영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후에 한 가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가끔 성령님이 어떤 일에 대해 “속도를 줄여라! 그 길로 가지 말라!”고 손을 흔들어 막을 때도 있는데 그때는 그 막는 제지의 손길이 축복의 손길이란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전진’으로도 나타나지만 ‘제지’ 및 ‘절제’로도 나타납니다. 가장 위험한 차는 브레이크가 파열된 차입니다.
성도는 열심히 일하면서도 때로는 잘 놀 줄도 알아야 합니다. 노는 것을 정죄하는 사회는 브레이크 없는 불행한 사회가 되고 노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는 성도는 브레이크 없는 불행한 성도가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는 열심히 전진하면서도 때로는 가만히 서서 하나님의 최적의 때를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대림절은 주님의 강림을 기다리면서 동시에 기다리는 성품을 훈련하고 기다림의 축복을 배우는 절기로 삼아야 합니다.
< 주님을 기다리는 자세 >
1969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사무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희극 ‘고도를 기다리며(Waiting for Godot)’는 인간 상태에 대한 유명한 풍자극입니다. 극중의 유일한 소품은 하나님이 없음을 상징하는 죽은 나무입니다. 그 극은 암시합니다. “메시야가 온다는 믿음은 인간을 왜소하게 만든다. 인간은 하나님이란 죽은 조형물 없이 자기 의미를 창조해야 한다. 그 동안 사람은 속았다. 고도(God,하나님)는 오지 않는다. 하나님이 온다는 기대를 포기해야 실망도 없다.” 그런 암시를 통해 베케트는 기다림의 축복을 말살하려고 합니다.
그처럼 요새 많은 교인들도 의심과 절망 속에 주님에 대한 기다림을 포기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즐겨도 그리스도는 외면합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주님의 재림과 임재와 축복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이 없는 것은 가장 불행한 일입니다. 기다림과 기대가 있어야 희망도 넘치게 됩니다. 이제 어떤 경우에도 주님의 재림과 임재와 축복에 대한 기다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기다릴 때 어떻게 기다려야 합니까?
1. 준비하며 기다리십시오
본문 35-36절 말씀을 보십시오.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으라/ 너희는 마치 그 주인이 혼인집에서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과 같이 되라.”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밤에 열렸기에 혼인집에서 돌아올 때는 대개 한밤입니다. 그때 충성스런 종들은 아무리 한밤이라도 주인이 돌아와 문을 두드리면 곧 열어주려고 준비하며 기다립니다.
그처럼 주님을 기다릴 때는 그냥 멍하게 하늘만 바라보고 기다리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지도록 길도 찾고 노력하고 준비하면서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준비하는 삶’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준비하는 삶이 없는 은혜는 은혜의 의미를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일하고 준비하며 기다릴 때 하나님은 삶의 의미와 보람과 행복도 주시고 축복과 건강도 주십니다.
서울에 한 신실한 여자 집사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몸이 이상해서 병원에 갔더니 간암이었습니다. 두 달 남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낙심되었지만 곧 정신을 차렸습니다. 남은 두 달을 어떻게 살지 곰곰이 생각하다가 먼저 재산부터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헌신해야지!”라고 하면서도 한 번도 제대로 헌신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재산의 일부를 잘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또한 처녀 때 은혜 받고 선교사가 된다고 했는데 결혼 후 바쁘게 살다가 그 다짐을 잊었습니다. 그래서 후방에서 ‘보내는 선교사’가 되겠다고 했는데 그 다짐도 제대로 이행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고 재산의 일부를 또 잘라서 선교헌금을 보냈습니다. 또한 매일 성경을 읽으며 아이들에게 유서처럼 매일의 묵상을 썼고 미웠던 사람에 대한 미움을 털고 화해할 사람을 찾아가 화해했고 평소에 전도하고 싶었던 사람을 찾아가 전도했습니다. 그렇게 2달이 지나면서 죽을 날이 가까이 되었는데 오히려 몸에 힘이 났습니다.
2달 후 어느 날, 검진 후 의사 선생님이 난처한 듯이 말했습니다. “손님! 죄송합니다. 지난번의 간암 진단은 오진 같습니다. 암 덩어리가 안 보입니다.” 그때 세상이 달라 보였고 하나님의 은혜가 달콤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사이에 병이 나았을 수도 있고 오진일 수도 있었지만 오진이라도 전혀 원망스럽지 않았습니다. 누가 물었습니다. “집사님! 오진으로 돈을 많이 써서 억울하지 않나요?” 그분은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제게는 지난 두 달처럼 보람 있고 행복했던 때는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종말의식을 가지고 주님 만날 준비를 하며 열심히 살면 건강도 얻고 지경도 넓혀지고 축복도 받습니다. 게다가 언제 주님이 와도 “주님! 기다렸습니다.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라고 하며 기쁘게 주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이제 주님을 기다릴 때 최선을 다해 준비하며 기다리십시오. 신기루와 비전의 차이는 “계획과 준비가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계획과 준비가 없이 비전만 가지면 돈키호테가 됩니다. 비전 있는 사람이란 큰 비전을 가지면서도 그 비전을 이루려고 구체적인 방법도 찾고 준비도 하는 사람입니다.
2. 인내하며 기다리십시오
고대에 주인이 혼인집에 갔다가 밤늦게 오면 종이 깨어 있다가 문을 열어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주인은 종들이 그렇게 깨어 있었다고 그 늦은 밤에 허리에 띠를 띠고 종들을 자리에 앉힌 후에 거꾸로 섬겨주었습니다(37절). 실제로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결국 이 장면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깨어 있는 성도들을 크게 칭찬하시고 상급을 주실 것이란 비유의 말씀입니다.
본문 38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인이 혹 이경에나 혹 삼경에 이르러서도 종들이 그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당시 밤은 사경으로 구분되었습니다. 1경은 저녁 6-9시, 2경은 저녁 9-12시, 3경은 밤 0-3시, 4경은 새벽 3-6시입니다. 그런데 자정이 넘은 3경까지 깨어 주인을 기다리는 종을 보면 주인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영적인 의미에서 이경과 삼경은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힘든 때를 뜻합니다. 그때도 현실 이면에서 주님이 승리를 위한 작업을 하심을 믿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1982년 10월 어느 날, 위스콘신에서 벌어진 한 풋볼 경기에서 위스콘신 대학이 미시간 대학에 크게 지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6만 명의 관중은 전혀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뻐하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그곳에서 70마일 떨어진 곳에서 같은 시간에 벌어진 메이저리그 야구 월드 시리즈 3차전 경기에서 밀워키 브루어스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이기고 있다는 소식을 휴대용 라디오로 듣고 기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눈앞의 게임에서는 크게 지고 있어도 눈에 보이지 않는 더 큰 게임에서는 승리하는 삶이 바로 성도의 삶입니다.
정치인과 참된 리더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정치인은 앞에서는 사탕발린 말을 하지만 뒤에서는 대개 권력과 돈을 따라 움직입니다. 반면에 참된 리더는 앞에서는 사탕발린 말을 잘 못하지만 따르는 영혼을 돕고 힘을 주려고 무던히 애를 씁니다. 그렇다고 물질을 대줄 수도 없고 사람에게 청탁을 다닐 수도 없기에 결국 앞에서는 찬란한 꿈과 비전을 도전하고 뒤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요새 경제가 어려워지고 취직대란이 벌어지면서 부모들도 자기 인맥을 최대한 동원해 자녀의 길을 열어주려고 암중으로 치열하게 같이 뜁니다. 저도 첫 딸이 패션과 뷰티 세계에서 멘토로 삼고 배울 그 분야의 마이스터(명인)를 찾아주려고 열심히 작업하는데 그 사실을 딸이 알았다가 안 되면 실망하니까 구체적인 진전이 있을 때까지는 딸이 모르게 소리 없이 작업합니다. 사람도 그렇게 암중으로 작업하는데 하나님이 암중으로 작업하지 않겠습니까? 인내하고 기다리면 언젠가 하나님이 작업해 만들어놓으신 최상의 현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3. 믿음으로 기다리십시오
예수님 당시의 도둑들은 당시 흔했던 흙벽돌집을 뚫고 불시에 도둑질하러 들어올 때가 많았습니다. 만약 도둑이 어느 때 집을 뚫고 들어올 줄 알면 주인이 그 벽을 뚫지 못하게 방비했을 것입니다(39절). 그처럼 늘 준비하고 있어야 전혀 예상치 못한 때 주님이 오셔도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40절). 예수님은 재림 날짜를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그때가 늦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님 오실 것이라는 믿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믿음을 잃고 예수님 당시에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메시아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안 되겠다! 우리 손으로 나라를 회복시키자!”고 하며 테러로 문제해결을 시도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로 셀롯인들(Zealots)입니다. 그들의 목적은 좋았지만 방법은 좋지 않았기에 결국 잘못된 환경은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이 소멸되었습니다.
왜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배반했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불신으로 인한 조급함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능력으로 빨리 로마 제국을 뒤엎기를 원했기에 예수님을 붙잡히게 하면 예수님이 크신 능력을 행하시면서 혁명이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고 또한 최종 승리를 믿고 넉넉한 마음으로 기다려야 합니다.
공중그네 곡예사들은 곡예를 할 때 ‘나는 사람(flyer)’는 철저히 나는 일만 하고 ‘잡는 사람(catcher)’은 철저히 잡는 일만 합니다. 그때 ‘나는 사람’은 나는 순간 그네에서 손을 떼고 몸을 공중으로 던지면서 회전합니다. 그 다음에 그가 할 일은 오직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날면서 자기가 ‘잡는 사람’을 잡으려고 하지 말고 그저 ‘잡는 사람’의 강한 손을 굳게 믿고 마음을 비우고 기다리는 일입니다.
마음을 비우고 우리를 잡아주실 하나님을 굳게 믿고 하나님의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십시오. 기다림이 길어진다고 성급하게 다른 결정을 내리면 결국 손해만 봅니다. 반면에 참기 힘들 때 참으면 최하의 결과가 본전입니다. 거 나아가 참기 힘들 때 참고 감사까지 하면 앞날에 예비될 그의 축복은 생각을 초월하게 되고 그를 통해 환경도 변하고 인물이 나오는 역사도 조만간 나타날 것입니다.
4. 선교하며 기다리십시오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주님은 마지막 때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어 온 세상에 전파될 때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란 말씀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재림과 가장 깊은 관련이 있는 일은 선교하는 일입니다.
어떤 사람은 종말에 관한 말씀에 집착하고 깊이 연구까지 합니다. 심지어는 출처도 불분명하고 후세의 위작 가능성이 큰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까지 끌어들여 불안해하는 헛된 종말 운명론자가 됩니다. 아직도 1970년대 종말론 버전을 가지고 종말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사탄에게 붙잡히고 이단에 빠지는 것입니다. 너무 종말주의에 빠지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나의 가설에 불과한 ‘종말에 대해 정확히 아는 일’보다 ‘종말을 잘 준비하는 일’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선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하신 가장 마지막 말씀도 “성령을 받으면 땅 끝까지 선교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행 1:7-8). 성령 충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땅 끝까지 선교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을 이루려고 최전방에서 선교사님들이 선교할 때 그분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 선교 사명에 같이 동참해야 합니다. 우리가 보내는 기도와 물질이 오지 영혼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려고 애쓰는 선교사님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도구가 된다고 생각하면 그 일처럼 기쁘고 복된 일이 어디에 있습니까?
저의 신학교 동기이자 목사 안수 동기인 몽골의 임병철 선교사님은 1993년 괌 아래 축(Chuuk)이란 남태평양의 작은 섬으로 선교를 떠났습니다. 1년에 2백일 이상이 섭씨 36도가 넘고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냉장고도 없는 지역에서 3년 반 동안 원주민들에게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가 심장에 이상이 생기고 몸이 크게 망가져서 1996년 뉴욕으로 철수했습니다. 그리고 요양하면서 뉴욕에서 가장 부촌인 롱아일랜드에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교회가 어느 정도 성장해서 몸은 편해졌습니다. 그러나 몸이 편해질수록 오지 영혼들이 계속 생각났습니다. 결국 2003년에 나이 50에 다 되어서 다시 몽골로 들어갔습니다. 1차 선교 때는 가장 더운 축(Chuuk)으로 가고 2차 선교 때는 가장 추운 몽골로 가는 그런 선교열정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런 열정을 우리도 공유해야 합니다.
선교사님들을 볼 때마다 가장 안타까운 일은 자녀 문제입니다. 자신은 사명을 받아 선교하는 것이지만 자녀들은 입장이 다릅니다. 좋은 아파트에 살다가 부모가 사명 받았다면서 갑자기 시골의 초가집에 가서 살면 어느 자녀가 좋아하겠습니까? 어떤 선교사 사모님은 처음 선교지에 가서 문화 및 자녀 문제로 매일 2년을 울었습니다. 그만큼 선교지의 삶은 힘든 삶입니다. 그래도 그 길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런 선교사님들을 위해 후방에서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며 그분들의 외로움과 고통을 덜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19세기 말 흑암 중에 살던 우리나라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라 두 선교사님이 찾아와 주님의 사랑을 전하며 교회와 병원과 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만큼 앞선 나라가 된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성육신 하셨습니까? 죄악 많은 이 세상에서 영혼을 구하려고 일종의 선교사로 오신 것입니다. 그런 성육신의 사랑을 품고 우리도 늘 선교의 사명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최상의 준비이고 또한 주님의 재림 전에 현실 속에서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선교는 해외선교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동정이 아닌 정당한 명목으로 ‘없는 사람’과 물질을 나누는 것도 선교입니다. 문서선교도 중요한 선교입니다. 성경의 작은 일부분인 베드로전후서가 로마의 거대한 베드로성당보다 더 위대한 것입니다. 그 사실은 문서선교의 중요성을 잘 말해줍니다. 또한 요새 교회의 공룡화로 인한 부작용을 염려해서 사명감을 가지고 스스로 분립해 작은 교회로 가서 기쁘게 섬기는 것도 큰 의미의 선교입니다. 다수의 품에 안기면 속물이 되기 쉽지만 소수를 품에 안으면 하나님이 인물의 꿈을 이뤄주실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마지막 명령인 선교를 위해서라면 마음과 정성과 시간과 물질을 아끼지 마십시오. 인생은 참 짧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시면 곧 천국에 가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어엿하게 설 수 있도록 선교에 대해서는 항상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최대한 선교할 수 있는 능력을 구하십시오. 그 능력을 키우려고 이번 한 주간도 자신의 일터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생길 때마다 힘써 선교에 동참해서 주님을 만날 때 기쁨으로 만나고 그 전에도 늘 주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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