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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욥29:1-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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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2013.12.30 http://www.john316.or.kr |
인생을 복되게 하는 3대 길
(욥기 29장 1-25절)
살다 보면 가끔 인생의 큰 풍랑을 만납니다. 배는 출발시켰는데 항구는 보이지 않고 깊은 바다 한 복판에서 풍랑 중에 시달리다 보면 수시로 믿음보다 큰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순간에 성령님이 임하시고 말씀이 임하면 다시 두려움보다 큰 믿음이 생기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습니다. 마음의 풍랑의 잔잔해지면 조만간 환경의 풍랑도 잔잔해집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풍랑을 허락하신 이유는 풍랑 중에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체험하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함께 있다면 추운 겨울에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힘들 때도 묘한 행복감이 있습니다. 그때 사랑도 온전해집니다. 그러므로 힘들고 어렵고 실패하고 자존심이 뭉개지고 마음의 상처를 크게 받아도 사랑의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고 내일의 희망을 잃지 마십시오. 계속되는 고난 중에도 믿음을 잃지 않는 것은 잠깐의 순교보다 오히려 더욱 깊은 믿음입니다. 그런 순교자적인 믿음에는 반드시 큰 보상이 있습니다.
성도는 망해도 망한 것이 아니고 실패해도 실패한 것이 아니고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다음 단계가 있고 내일이 있는 존재입니다. 믿음이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가 없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녀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의 풍랑을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과 기도와 지혜와 창조성과 땀과 노력으로 인생의 풍랑을 대비하십시오. 그러면 얼마든지 풍랑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죽어주신 사랑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풍랑 이후에 주어질 멋진 축복의 세계를 꿈꾸십시오. 인생의 풍랑은 일시적인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그 풍랑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더 빨리 더 좋은 목적지로 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풍랑을 타고 즐기십시오. 어떻게 풍랑을 즐깁니까? 믿음을 준비하고 마음을 준비하고 땀을 준비하면 풍랑을 즐기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해집니다.
의인도 고난을 당합니다. 선행을 해도 고난을 당합니다. 더 나아가 잘 믿고 최고의 헌신을 해도 고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고난의 풍랑은 성도를 가장 성도답게 만들고 때가 되면 바다 건너편 항구에서 축복의 선물을 가득 안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하나님을 기쁘게 만나 뵙게 될 것입니다. 그처럼 풍랑 속에서도 믿음과 희망을 잃지 말고 계속 전진하라는 것이 성경 욥기가 가르쳐주는 핵심 메시지입니다.
< 인생을 복되게 하는 3대 길 >
욥은 동방의 의인이면서 재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극심한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욥의 세 친구인 엘리바스, 빌닷, 소발이 위로하러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위로가 점차 변론으로 변하면서 욥의 세 친구는 욥을 무섭게 정죄했고 욥도 무섭게 반론을 펼쳤습니다. 그런 논쟁 후에 욥이 최후의 변론을 하는데 본문은 그 변론의 일부분입니다. 이 고백을 통해 인생을 복되게 하는 가장 기본적인 3가지 길을 발견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하나님을 사랑하십시오
욥은 마지막 변론을 통해 과거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복을 누렸던 때가 다시 오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1-2절). 과거에 어떤 축복이 있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보호가 있었습니다. 욥은 과거의 좋았던 세월들을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시던 때’라고 했습니다(2절).
둘째, 하나님의 인도가 있었습니다. 욥은 과거에 하나님이 등불이 되셔서 그의 머리 위에 비침으로 그 등불의 빛을 힘입어 암흑에서도 걸을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3절). 즉 하나님이 어두운 길에서 안내자와 인도자가 되어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셋째, 건강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욥은 외적인 번성뿐만 아니라 원기 왕성했고 그의 장막도 하나님이 특별히 구별해 보호하셨다고 고백합니다(4절).
넷째, 영향력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욥은 자녀들과 젊은이들에 의해 둘러싸여 있었습니다(5절) 욥의 복된 삶이 사람들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면 가장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그를 통해 교회와 가정도 화목해집니다.
다섯째, 물질의 축복이 있었습니다. 과거에 욥은 젖으로 자기 발자취를 씻고 바위에서 기름이 철철 흘러나올 정도로 젖과 기름이 넘쳤습니다(6절). 이 표현은 욥이 환난 전에 얼마나 부유했는지를 잘 나타냅니다. 신실한 믿음은 물질적인 축복의 가능성도 높입니다.
여섯째,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과거에 욥은 사람들의 주목 대상이 되고 욥이 나타나면 따로 특별석을 만들 정도로 존경받았습니다(7절). 또한 그때는 욥이 나타나면 젊은이들은 경외하는 마음으로 길을 비켜서며 자신을 숨겼고 노인들도 존경심을 가지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8절). 그리고 유지들도 말을 삼가려고 입을 가렸고 지도자들조차 말소리를 낮추려고 혀를 입천장에 붙일 정도로 욥에게 최상의 존경심을 표했습니다(9-10절).
옛날에 왕정시대 때는 왕 앞에서 말이 많으면 목이 날아갔습니다. 그때의 침묵은 왕 한 사람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숨죽이며 산 강요된 침묵이었습니다. 지금은 적절하게 자기표현을 하는 것이 흠이 되지 않는 자기 PR 시대지만 고대에는 침묵과 존경이 비례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귀족들조차 입을 다물 정도로 큰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그처럼 고난 전에 욥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고 건강과 권세와 물질의 축복도 받고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까지 받았습니다. 그런 축복을 우리도 얼마든지 누릴 수 있습니다. 그 축복을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복을 받고 고난 전의 욥처럼 축복의 가능성도 현저하게 높아질 것입니다.
2. 이웃을 사랑하십시오
복된 인생은 하나님과의 수직관계도 좋지만 사람과의 수평관계도 좋습니다. 욥이 고난 전에 그토록 복된 존재가 된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이웃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욥의 선행 얘기를 듣고 욥의 축복을 빌어주었고 또한 욥의 선행을 보면서 욥을 위대한 부자라고 칭송하며 증언했습니다(11절). 그런 축복과 칭송을 받은 것은 욥이 부르짖는 빈민과 도와줄 자 없는 고아를 건졌기 때문입니다(12절). 또한 그때는 망한 자들도 욥을 위해 복을 빌어주었고 어렵게 살던 과부도 욥의 도움으로 살 희망을 찾고 기뻐 노래했습니다(13절).
더 나아가 욥이 존경받게 된 것은 베풀 줄 아는 부자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의를 옷처럼 입고 정의를 겉옷이나 모자처럼 삼을 정도로 정의가 몸에 배였기 때문입니다(14절). 언뜻 생각하면 정의와 사랑은 반대 개념 같지만 결국 정의와 사랑은 한 지점에서 만납니다. 즉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 결국은 가장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당시에 욥은 사람 취급도 못 받던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의 편이 되어주었습니다(15절). 약자의 편을 드는 것은 큰 의미의 정의입니다. 물론 원칙적으로는 부자나 힘 있는 자의 편도 들지 말고 가난한 자나 힘없는 자의 편도 들지 말고 오직 정의의 편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 원칙을 인식한 상태에서 약자를 더 도우려는 것은 일종의 큰 의미의 정의입니다. 왜냐하면 그냥 두면 힘없는 사람은 힘 있는 사람에게 대개 일방적으로 당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욥은 빈궁한 자를 살펴주는 아버지 역할까지 했고 무명인과 외지인과 이방인이 억울한 누명을 쓰지 않도록 그들의 재판까지 살펴줄 정도로 사랑과 긍휼이 넘쳤습니다(16절). 그래도 때로는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는 강한 모습도 있었습니다(17절). 온유함과 유약함은 다릅니다. 왜 성도들은 유약함을 벗고 강한 힘을 갖춰야 합니까? 강자들의 횡포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싱으로 단련해 엄청난 싸움 실력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실력을 힘을 가지고 횡포를 부리는 사람에게만 드러냈고 여성에게는 한없이 부드럽고 매너 있게 행동했습니다. 그것이 진짜 강한 것입니다. 성도는 힘 있는 자의 횡포를 막기 위한 사명 때문에 힘을 길러야 하고 물질을 남용하는 사람들의 횡포를 막기 위한 사명 때문에 물질적인 능력도 추구해야 합니다.
위로 드려야 할 때 드릴 줄 알고, 옆으로 나눠야 할 때 나눌 줄 알고, 아래로 베풀어야 할 때 베풀 줄 아는 ‘드나베의 삶’은 영혼의 강자 및 복된 인생이 되는 핵심요소입니다. 왜 인물이 되어야 합니까? 강자로부터 약자를 보호하고 자신의 영향력을 통해 꾸준히 선교와 나눔을 선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욥은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욥은 하나님과의 수직관계에도 탁월했지만 이웃과의 수평관계에도 탁월했습니다. 이웃 사랑은 예배와 기도만큼 중요합니다. 그처럼 이웃 사랑을 실천할 때 복된 인생이 펼쳐집니다.
3. 자기를 다스리십시오
욥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점점 자기가 자기를 인정하고 자기가 자기를 존경하는 교만함이 생겼습니다. 복된 인생이 되려면 복을 넘치게 받는 것만 잘해서는 안 됩니다. 복 받고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자기를 잘 다스리는 것까지 잘해야 합니다.
본문 18절 이하의 욥의 고백을 보면 욥의 교만해진 마음들이 엿보입니다. 욥은 자기가 선한 일을 많이 했으니까 죽을 때는 가정에서 편안히 죽고 오래 장수할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18절). 또한 자신을 뿌리 깊은 나무로 묘사하며 건조할 때도 자신의 뿌리는 물로 잘 뻗어나가고 자신의 가지에는 새벽이슬이 넘칠 것이라고 여겼습니다(19절).
또한 자신의 영광은 계속 커지고 화살로 표현된 자녀의 축복도 끊이지 않았다고 여겼습니다(20절). 또한 자신의 말이 공동체에 희망을 주고 남들을 침묵하게 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다고 했습니다(21절). 그런 말들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는 우쭐함이 느껴집니다. 왜 예수님은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선행을 남에게 감추라는 뜻도 있지만 선행을 스스로 잘 잊으라는 뜻도 있습니다. 공로의식은 교만을 부르고 결국 고난을 부릅니다.
욥의 우쭐한 말은 계속됩니다. 당시에 어떤 논쟁이 있을 때 욥이 어떤 말을 하면 그 말이 거의 결론처럼 되어 논쟁이 끝날 정도로 영향력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비를 기다리듯이 욥의 말을 기다렸고 욥의 말이 떨어지면 봄비를 맞이하듯이 입을 벌려 그 말을 받들었습니다(22-23절). 그때 욥의 기분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문제는 그런 권세를 맛보면 자기를 잘 다스리던 사람조차 교만의 수렁에 빠질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욥은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며 사람들이 의지력을 잃고 우울해졌을 때 자신이 미소하면 그들의 얼굴빛에 생기가 살아났다고 했습니다(24절). 결국 욥은 사람의 길을 선택해주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었고 으뜸 자리에 앉아 마치 군대 중에 있는 왕처럼 행세했고 애곡하는 자에게 큰 위로를 주는 존재로 여겨졌습니다(25절).
이 고백들을 보면 욥이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을 받고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받으면서 점차 마음이 높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왜 하나님이 욥에게 시련을 허용하셨는지를 비로소 깨닫습니다. 성도는 하나님도 사랑하고 이웃도 사랑해야 하지만 자신도 잘 다스려야 합니다. 즉 복된 성도가 되려면 하나님과의 대신관계도 좋아야 하고 이웃과의 대인관계도 좋아야 하고 자기와의 대아관계도 좋아야 합니다.
이름이 높아질 때 마음까지 높아지면 하나님이 반드시 낮추십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침묵 훈련입니다. 욥은 극심한 고난을 겪지만 결국 욥기 42장을 보면 이전보다 2배의 축복을 받습니다. 그 축복 전에 욥은 욥기 38-41장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침묵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을 믿고 잠잠하게 있는 법을 배우면 자기를 다스리는 능력도 커지고 그와 더불어 환경을 극복하는 능력도 커집니다.
< 믿음이 주는 평안의 능력 >
환경에 대처하는 3종류의 인간형이 있습니다. 첫째, 종속형 인간입니다. 종속형 인간은 환경에 잘 동화되어 환경을 따라 온도계처럼 삽니다. 남이 한 대로 자기도 합니다. 남이 미워하면 자기도 미워합니다. 그처럼 자기 존재가 없고 다수에 잘 휘둘리며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을 잘합니다. 그래서 환경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없습니다.
둘째, 항거형 인간입니다. 항거형 인간은 권위를 자주 거스르면서 항거로 자기 존재를 확인합니다. 그래서 “예!”라고 잘 하지 못하고 “아니요!”란 말과 태도를 통해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고 느낍니다. 그처럼 항거로 자기 존재를 확증하려고 하면 자신에게 축복이 오는 상황도 거부하게 되면서 축복을 스스로 차버릴 때가 많습니다.
셋째, 극복형 인간입니다. 극복형 인간은 환경에 동화되지 않고 온도계가 아닌 온도조절기처럼 삽니다. 그래서 잘 나간다고 교만하지도 않고 반대로 못 나간다고 비굴하지도 않습니다. 또한 시끄러운 자리에서도 마음의 고요함을 잃지 않고 옆에서 누가 크게 기도해도 전혀 영향 받지 않고 자기 기도에 집중을 잘합니다. 그처럼 자기를 잘 극복하는 사람을 통해 내일의 창조적인 역사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은 극복형 인간의 최대 모델이셨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배를 타고 가실 때 큰 광풍이 불고 큰 물결이 일어나 배가 큰 위험에 빠졌습니다(막 4장). 그때 제자들이 배 끝에서 주무시던 주님을 다급히 깨웠습니다. “예수님!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봐주세요.” 예수님이 일어나 바람을 꾸짖고 바다에게 말했습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 순간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지자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에 두려울 정도로 놀라면서 말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분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그때 제자들은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하는 능력에 놀랐지만 사실상 그 능력보다 더욱 위대한 능력은 풍랑 중에도 고요하게 주무시는 능력입니다. 풍랑 중에 잠자는 능력이 풍랑을 잠재우는 능력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조용한 곳에서 고요하기는 쉽지만 시끄러운 곳에서 고요한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결국 진짜 위대성은 산 위가 아닌 산 아래에 있을 때 나타나고 교회 안에서가 아닌 교회 밖에서 나타나고 편안할 때가 아닌 시련 중에 나타납니다.
메가톤, 메가바이트란 단어들에 있는 메가(mega)란 말은 ‘아주 크다’란 뜻의 헬라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풍랑 중에 주무신 사건에는 메가란 어원을 가진 세 단어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탄 배에 ‘큰 광풍(메갈레 아네무, μεγαλη ανεμου)’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그 광풍을 꾸짖자 ‘큰 잔잔함(갈레네 메갈레, γαληνη μεγαλη)’이 임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큰 두려움(포본 메간, φοβον μεγαν)’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신기하게도 세상 풍랑이 두렵지 않게 되면서 깊은 평안이 임합니다.
어떤 사람은 비행기 타고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 한숨도 못 잡니다. 조종사와 비행기를 잘 믿지 못하고 또한 “떨어지면 떨어지리라! 죽으면 죽으리라!”는 태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인생의 가장 큰 문제는 힘든 환경 문제나 격동하는 사회 문제 이전에 믿음의 문제입니다. 참된 믿음은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만듭니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평안을 잃지 마십시오. 오늘날 신앙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풍랑 속에서 고요할 줄 아는 믿음의 능력입니다.
어느 날, 인천에서 목회할 때 한 집사님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분은 ‘기도꾼’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기도를 많이 했는데 대뜸 와서 자기는 기도 중독자처럼 생활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분이 기도하러 다닐 때 친정어머니는 “제발 가정을 좀 지키라!”고 했지만 그녀는 그 말을 외면했습니다. 그때 그분이 다니던 교회에서는 목회자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여러분! 희락을 영을 받으세요! 은사를 받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마세요.” 그러자 성도들도 서로 말했습니다. “집사님! 계시 받았어요? 은사 받았어요? 은사를 받지 않았으면 설거지하면 안돼요.”
원래 그 목회자는 그렇게 심한 은사주의자가 아니었는데 어느 날 자기를 신 사도라고 주장하는 어떤 강사의 집회에 갔다 온 후부터 그 강사가 가르친 대로 ‘희락의 영’을 받으라고 교인들에게 다그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성도들은 희락의 영을 받았다고 하면서 기도할 때 꺅꺅 하고 늑대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소름이 오싹 끼친다고 하니까 그 목회자가 말했습니다. “집사님! 그것은 희락의 영이 임해서 마귀가 도망치며 내는 소리에요.”
결국 남편이 견디다 못해 “나는 죽어도 그런 교회는 안 다니겠다.”고 해서 그분도 고민하다가 한 감리교회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그 감리교회 목사님이 너무 자존심이 상하는 말을 했습니다. “집사님! 기도를 많이 한다는 사람들은 자기주장이 세서 늘 문제를 만들어요.” 마치 자기에게 한 말 같아서 너무 자존심이 상했지만 냉정을 찾고 자가진단을 하자 그 말이 맞는 것 같았습니다. 자기도 기도한다면서 가족을 힘들게 한 일들이 죽 떠오른 것입니다.
그 전에 다니던 교회의 목요 집회에 갔다가 자정쯤 집에 오면 초등학생인 아이가 혼자 라면을 끓여 먹고 냄비와 함께 엎어져 자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집에 전화해 보고 자신이 없으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잠든 아이의 모습을 보고 안쓰러워서 “다음에는 그 집회에 가지 말자!”고 다짐했지만 그러면 희락의 영이 오지 않을 것이란 두려움 때문에 다음 주 목요일이 되면 또 그 집회에 가서 ‘희락의 영’을 받는 기도를 했습니다.
그렇게 그 집회에서는 희락의 영을 받았다면서 때로는 깔깔거리며 웃고 때로는 늑대 소리를 내면서 기도했지만 집에 와서는 아이가 삐뚤어지게 행동한다고 심하게 삿대질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잘못을 지적하는 남편도 사탄 취급을 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습니다. “당신처럼 믿으면 나는 죽어도 안 믿겠소!” 그런 말을 들어도 당시에는 전혀 찔림이 없었습니다. 그처럼 기도한다면서 남편과 아이를 괴롭힌 것이 너무 미안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도 가끔 집회에 데려갔는데 희락의 영을 받았다고 꺅꺅 소리를 내는 장면을 보고 집에 돌아오면 아이가 뭔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늘 무서운 악몽을 꿨습니다. 그래서 아이에게 그런 집회장면을 계속 보게 하면 정상적인 삶이 어려워지고 정신이 돌 것 같아서 그 다음부터는 자기만 집회에 다녔고 가끔 아이가 영적인 현상에 대해 물으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너는 공부에나 신경을 써라.”
결국 고민 끝에 교회를 옮겼는데 교회를 옮긴 후 처음 한 달은 너무 고통스럽고 마음이 힘들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도 중에 환상을 봤는데 제 어린 딸 은혜가 환상 중에 일어서서 그 집사님을 향해 이렇게 선포했다고 합니다. “집사님! 눈을 들어 하나님만 바라보세요. 하나님이 집사님을 도와주실 거예요.” 그 꼬맹이의 환상으로 마음의 평안을 찾았다고 하면서 그 환상이 너무 생생했고 그 환상 후에 깊은 평안을 되찾은 체험이 너무 분명해서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그때가 은혜가 4살 때였는데 제가 그분에게 앞으로는 그런 환상을 좇아 살지 말고 말씀을 좇아 살라고 하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해주었습니다. “집사님! 이제까지 너무 바쁘게 달리셨어요. 이제는 성경을 많이 보고 경건서적도 폭넓게 읽으면서 말씀 안에서 고요함과 평안을 찾으세요.” 가끔 보면 환상에는 크게 감동하면서 성경 말씀은 밋밋하게 보고 감동을 잘 안하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단순하고 밋밋하지만 성경 말씀에 깊이 감동할 줄 아는 성도에게 깊은 평안도 임하게 됩니다.
성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믿음이 주는 평안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풍랑 중에 제자들에게 하신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떤 환상보다도 귀에 생생하게 들려야 합니다. “아무개야! 왜 그렇게 무서워하느냐? 어찌 믿음이 없느냐?” 그 음성을 늘 깊이 새겨들으며 풍랑 중에도 평안을 잃지 않는 믿음의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의 칭찬도 받고 이웃에게도 도전과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이제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금년에 힘들었던 시간들을 과거로 흘려보내고 깊은 평안 중에 새로운 한 해를 믿음과 희망과 땀으로 준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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