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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은망덕(背恩忘德)

요한복음 빛의 사자............... 조회 수 2008 추천 수 0 2014.01.19 14: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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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3:27-30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배은망덕(背恩忘德)

 

본문: 요13: 27- 30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자가 없고 어떤 이들은 유다가 돈궤를 맡았으므로 명절에 우리가 쓸 물건을 사라 하시는지 혹은 가난한 자들에게 무엇을 주라 하시는 줄로 생각하더라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마음이 착한 늙은 부부의 집에 젊은 식모가 새로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 젊은 식모는 행실이 좋지 못해 이웃에 사는 젊은이와 눈이 맞았습니다. 몇 달이 지나자 그녀의 몸에 아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안 노부부는 식모를 나무라지도 않고, 다행히 어린애가 없어 애태우던 터라 친절히 식모를 위로하면서, ‘조금도 걱정 말아. 어린애를 나면 우리가 양자로 삼을 테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윽고 달이 차서 식모는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노부부는 출산 비용을 전부 부담했고, 출생한 아이를 양자로 삼는 수속을 밟았습니다. 그런데 수개월이 지나자 식모는 또 다시 몸이 무거워졌습니다. 이때도 친절한 노부부는 “어린애가 하나뿐이면 쓸쓸해 할 꺼야. 동생이 있는 편이 좋아.”하고서, 두 번째 아이도 양자를 삼았습니다. 식모에겐 같은 일이 세 번 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마음 좋은 노부부는 이때도 그다지 화내지 않고 출생한 아이를 또 다시 양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은(大恩)을 받은 젊은 식모는 산후의 몸이 회복되자마자, 노부부의 집에서 나가겠다고 말합니다. 깜짝 놀란 노부부가, “대관절 어떤 불만이 있어서 나간다는 거지?” 하고 물으니까, 그 식모는 태연히 하는 말이 “이렇게 아이 많은 집에서 식모살이 할 수는 없어요”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딤전5:8)

 

몇 년 전에 개봉한 <친구>라는 영화는 같이 죽고 같이 살자고 맹세했던 친구들이 뒤틀린 성장과정을 겪으면서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리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어릴 적 물놀이를 하며 뛰놀던 친구가 원수가 되고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는 모습을 표현해내어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인간관계는 믿음의 관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인간관계는 믿음의 관계가 아닙니다. 그렇게 친했던 친구도 배신을 하고, 그렇게 믿었던 직원이 돈을 떼먹고, 심지어 자식이 부모를 배반하고 고발하거나, 심하면 부모까지 죽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인간관계를 믿음의 관계로 잘못 오인한 데서 오는데, 믿음의 대상으로 사귀지 말고 사랑의 대상으로 대해야 될 것입니다. 믿음의 대상으로 여기면 그 믿음을 받을만한 그릇이 안 되는 이들에게는 부작용이 초래됩니다. 배신, 배은망덕, 그럴 수가, 있을 수 없는 일 등의 단어가 당사자의 가슴에 한으로 맺힙니다. 그러므로 모든 관계를 사랑의 관계로 풀면 풀리는데 그 사랑은 죽기까지 용서하는 사랑이어야 합니다. 자신이 죽으면서 끝까지 배신자를 포옹하는 사랑, 그 사랑을 실행하는 사람은 세상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배반을 한 자들의 몇 가지 예와 배반한 자들의 결과를 살펴봅시다.

 

1. 흑인 병사의 배은망덕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오에겐 자부로의 작품 「사육」은 한 명의 흑인 병사를 짐승처럼 사육하는 일에 종사하는 소년이 체험한 비극을 소재로 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때 소년은 도시에서 떨어진 산 마을의 공동 창고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소년이 살고 있는 마을에 커다란 비행기가 떨어졌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곧 수색에 나섰고, 저녁 무렵 비행복을 입은 흑인 병사 한 명을 끌고 왔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멧돼지 덫으로 쓰이는 쇠사슬로 흑인 병사의 양쪽 발목을 묶고 지하 창고에 가두고는 짐승처럼 사육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년은 멧돼지 덫에 묶여진 흑인 병사의 살갗이 벗겨져 염증이 생긴 것을 보고 덫을 풀어 주었습니다. 소년의 도움으로 흑인 병사는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시청에서 흑인 병사를 끌고 오라는 지시가 내려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낌새를 알아차린 흑인 병사는 지레 겁을 먹고 당황하여 자기에게 자유를 주고 먹을 것을 주었던 소년을 인질로 잡아서 난동을 벌이는 반역을 하였습니다. 결국 흑인 병사는 소년의 아버지 손에 죽고 말았습니다.

모든 인류가 죄의 족쇄에 채워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갈 수 없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끝까지 믿지 못하고 환경에 지레 겁먹고 당황하여 예수님을 배반한다면, 그것은 곧 반역입니다. 그 반역의 결과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사1:20)

 

2. 가룟 유다의 배반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좇았고 그분을 사랑하는 듯 보였습니다. 유다는 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곁에 남았고, 다른 제자들이 떠날 때도 떠나지 않았습니다(요6:66). 그는 귀신을 쫓아냈고 병자를 고쳤고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세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어 보내시며”(눅 9:1-2). 열한 제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유다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유다의 동기는 처음부터 옳지 않았습니다. 그는 이기적인 삶을 끝내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 "여차여차히 할 테니 내게" 얼마를 주려느냐”(마 26:15)라는 말에 그의 성품이 잘 나타납니다. 그는 이득을 위해 거짓말을 했고, 예수님 사역을 위한 돈궤에서 돈을 착복했습니다. 불명예스런 일은 그 외에도 많았습니다. 그는 3년 반을 예수님과 함께 지내고도 그분을 전혀 몰랐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유다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들은 사역을 위해 희생하고 전파하고 성령의 은사를 따라 봉사하지만 그분을 친밀히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모든 수고는 이기적 동기에서 싹튼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르지만, 그들의 최고 권세의 자리에 그분을 놓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이 자기 마음의 욕심과 상충되지 않을 때만 순종합니다. 하나님 뜻이 자기 욕심과 다른 방향으로 나가면 그들은 자기의 길을 택합니다. 내 마음이 좇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이 그것을 점검할 때입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를 제자로 부르셨고, 그가 회개할 기회를 여러 번 제공했으나, 그는 기회를 놓치고 실패합니다.

원수 마귀들은 어둠 속에서 음직입니다. 밤중에 원수가 몰래 와서 좋은 텃밭에 가라지를 덧 뿌립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마13: 24, 25)

 

본문 말씀에도 보면 유다가 어두운 밤에 일을 행했습니다.(요13:30)

"열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눅22:3-6)

 

유다는 후회했으나 회개하지는 아니했습니다. 결국은 그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

“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마27:3-5)

반면에 베드로도 밤에 군병들이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다가 한 여종의 말에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했으나, 새벽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통곡하였고, 마침내 후회하는 것을 넘어 회개의 자리로 돌아와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3. 데마,그 비극적인 종말의 사람

고린도후서 13장 5절에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가 믿음이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 했습니다. 신앙인들에게는 수시로 신앙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에는 신앙생활에 대해 시작과 나중의 관계에 있어서 세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처음과 나중이 같은 자가 있는가 하면 처음보다 나중이 못한 자가 있고 처음보다 나중이 나은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 10절에 나오는 데마라고 하는 사람은 시작은 좋았지만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마음이 변해 버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데마를 통한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데마는 시작은 좋았지만 나중에는 낙오자가 되었습니다. 데마는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바울의 전도로 주님을 알게 됐습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는 바울에게 상당히 적극적으로 협조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로마 감옥에 수감되는 그때까지 바울 곁을 떠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빌레몬서 1장 24절에서 바울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고 하며 데마를 ‘나의 동역자’로 칭했습니다.

 

또 골로새서 4장 14절에서는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고 했는데 두 구절을 비교해 볼 때 두 가지 차이점이 드러납니다. 빌레몬서에는 누가보다도 데마라는 이름이 먼저 나오는데 골로새서에서는 데마의 이름이 뒤로 가고 누가의 이름이 앞에 옵니다. 또한 빌레몬서에서는 데마에게 바울의 동역자라는 참으로 영광스러운 호칭을 붙이고 있는데 골로새서에서는 데마에 대한 아무런 설명 없이 그냥 이름만 기록돼 있습니다. 누가에게는 ‘사랑을 받는 의원’이라는 특별한 호칭을 붙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사람의 위치나 역량에 따라서 이름의 순서를 정하고 있는데 데마의 이름이 빌레몬서에서는 누가보다 앞서다가 골로새서에 가서는 누가보다 뒤에 나오는 것은 그가 영적으로 병들고 퇴보했다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본문에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말년은 감옥 생활로 비참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동역자들이 떠났습니다(딤후 1:15, 4:16). 그러나 바울은 그 사람들이 믿음이 타락해 떠났다거나 그들이 세상으로 돌아갔다는 기록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데마에 대해서는 세상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자기 곁을 떠났다고 기록했습니다. 데마는 분명히 실패한 것입니다. 누가와 데마를 놓고 비교할 때 처음에는 데마가 앞섰으나 결국은 누가가 승리했고 데마는 중간에 이탈했습니다. 데마는 왜 낙오자가 되었습니까.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라는 말씀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의 신앙이 현세적인 복만 추구하는 기복적인 신앙이었기 때문입니다. 데마는 예수 믿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매우 적극적인 신앙을 가졌습니다. 바울이 감옥에 갔을 때도 따라갔을 정도로 적극성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데마는 불행히도 예수로 인해 좋은 것이 올 때만 그렇게 열심히 따랐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로 인해 나쁜 것이 올 때는 무조건 그 자리를 회피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의 행복과 자랑과 그 모든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 밑바닥에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있다면 끝까지 주님을 따라가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젠가는 더 사랑하는 쪽으로 돌아선다는 말입니다. 세상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끝까지 주님을 따를 것이지만 데마처럼 하나님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도중 하차해 실패자가 되는 것입니다.

쾌락과 부귀 영화와 이 세상의 권력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는 잘 살지 모르지만 영원한 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립니다. 데마 같은 실패자가 되지 말고 영원한 저 나라에서 면류관을 얻을 때까지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전진함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데마처럼 이 세상을 사랑하여 하나님을 떠난 자의 결과는 버림받아 지옥불에 던지웁니다.(요15:6)

"도를 배반하는 자는 엄한 징계를 받을 것이요 견책을 싫어하는 자는 죽을 것이니라"(잠51:10)

"오늘날 너희가 돌이켜 여호와를 좇지 않고자 하느냐 너희가 오늘날 여호와를 배역하면 내일은 그가 이스라엘 온 회중에게 진노하시리라" (수22:18)

 

4. 사슴과 포도덩굴

이솝우화에 나온 얘기입니다. 아기 사슴이 사냥꾼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힘을 다해 도망쳤지만 아직 너무 어린 아기 사슴은 더 이상 사냥꾼을 피할 힘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지? 혼자 멀리 가지 말라는 엄마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사슴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마침 그곳에 무성하게 우거진 포도덩굴이 있었습니다. 제법 가지도 넓고, 잎이 무성하게 우거진 포도덩굴이었으므로 그 속에 숨으면 사냥꾼의 눈에 띄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사슴이 그 포도덩굴에 몸을 숨기자 잠시 후 사냥꾼이 숨을 헐떡이며 달려왔습니다. 사냥꾼이 지나가자 숨어 있던 사슴은 "휴우, 살았다"하며 크게 한숨을 쉬었습니다. 사슴은 이제 안심해도 좋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배가 고파졌습니다. "포도덩굴이 참 무성하구나!" 사슴은 씩 웃더니 자기를 숨겨 주었던 포도덩굴의 잎사귀를 마구 따먹기 시작했습니다. 포도나무 잎사귀들은 아파서 괴로워했지만 사슴은 아랑곳하지 않고 잎사귀들을 배불리 따먹었습니다. 그때 방금 지나갔던 사냥꾼이 되돌아오고 있었습니다. "참 이상하군 분명히 이쪽으로 갔는데..." 주위를 살피던 사냥꾼은 바람도 불지 않는데 포도덩굴이 흔들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각사각'하고 잎사귀 먹는 소리까지 들렸습니다. "옳지, 그 사슴이 저기에 숨어 있구나." 사냥꾼은 살그머니 다가와 사슴을 잡았습니다. 그때서야 사슴은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내가 생명의 은인을 저버려서 신이 나를 벌주시는구나!" 화장실 갈 적 마음과 나온 뒤의 마음이 다르듯이 자신이 아쉬울 때는 손을 내밀다가 그 순간이 지나면 은혜를 잊는 사람은 반드시 벌을 받습니다. 가룟 유다나 예수님께 고침 받은 아홉 명의 문둥병 환자처럼 은혜를 잊은 자(눅17:12-19)가 아닌지 나 자신을 돌아봅시다.

 

성경에 나타난 배신자로는 (1) 들릴라가 삼손을 배신하였고(삿16:17,18) (2) 세바가 다윗을 배반하고 반역을 꾀했다가 죽임을 당했으며(삼하20: 1-22) (3)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을 했다가 죽임을 당했으며 (삼하15: 1- 12) (4) 욥의 아내가 하나님과 욥을 배반하였으며(욥2:9) (5)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바울을 배신(딤후1:15)한 것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은혜를 저버리고,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는 심판을 받게 됩니다.(살후2:11,12)

"여호와를 배반하고 좇지 아니한 자와 여호와를 찾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한 자를 멸절하리라"(습1:6)

 

5. 백리해와 아내

중국야사에 백리해란 사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옛날에 가난한 선비의 생활이란 한없이 고달팠습니다. 날마다 가난한 생활의 연속이었습니다. 백리해는 초년에 배고픈 창자를 움켜지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그의 부인은 씨암탉을 잡아서 땔감이 없어 문빗장을 깍아 불을 피워 닭을 삶아 남편에게 주고는 그 가난함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 도망을 쳤습니다. 버림받은 남편 백리해는 선비출신이라 달리 배운 것도 없어 그야말로 굶기를 밥먹듯이 하면서 과거 준비만 했습니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더니 마침내 그는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 소문이 고향에도 퍼지게 되었고 심지어는 도망간 부인도 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백리해가 어느 고을로 행차를 한다는 소문이 났습니다. 그때 백리해의 옛 부인이 그 소식을 듣고 거문고를 들고 가서 백래해가 지나가는 노방에 앉아 거문고를 뜯으며 옛날을 회상하는 노래를 부르며 호소했습니다.

"문빗장 깍아 내어 씨암탉을 삶아준 일 그 옛날 수고를 그대는 잊었는가? 손잡고 영화의 길을 함께 간들 어떠하리"

애처로운 애원의 노래였습니다. 그러나 백리해는 걸음을 멈추는 듯 하더니 그냥 지나갔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것도 어떤 때는 힘든 일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도 쉽고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한번 신앙을 가졌으면 끝까지 지켜야지 힘들고 고단하다고 포기하면 안될 일입니다. 친구와의 의리도 끝까지 지켜야 합니다. 주님께 드리는 충성도 끝까지 가야지 중간에 변절하면 그것은 충성이 아닙니다. 언약을 배반한 자는 그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겔16:59, 갈6:7)

 

6. 부엉이의 은혜를 저버린 소경의 이기심

아주 먼 옛날, 앞을 못 보는 남자가 한 명 살고 있었습니다. "한 번이라도 좋으니 눈을 뜰 수만 있다면..." 이것이 그 소경의 소원이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은 부엉이 한 마리가 어느 날 밤 소경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말하였습니다. "아저씨, 난 아저씨의 소문을 듣고 아저씨를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찾아왔어요. 나는 밤에만 활동하니까 낮에는 눈이 필요 없거든요. 그러니까 낮 동안에는 내 눈을 빌려 드릴께요. 그러나 밤에는 꼭 돌려 주셔야 돼요"

다음 날 아침 소경이 깨어보니 환한 세상이 그의 눈에 보였습니다. 소경은 뛸 듯이 기뻐하며 눈을 빌려준 부엉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부엉이와 생활하며 낮에는 소경이, 밤에는 부엉이가 눈을 달고 먹이를 찾았습니다. 이렇게 며칠이 지나자 소경의 마음에 은근히 욕심이 생겨났습니다. "부엉이와 눈을 함께 쓰는 바보가 어디 있담"

소경은 부엉이가 잠든 낮에 먼 곳으로 도망쳤습니다. 그리고 밤하늘의 별을 보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눈이 희미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를 않았습니다. 소경은 다시 더듬거리며 부엉이가 있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왜 나를 버리고 도망을 가셨어요. 난 밤에 먹이를 찾지 못해서 굶고 있었 어요. 그러니까 내 눈도 기운을 잃은 것이에요" 가엾은 부엉이는 이 말을 마치고는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소경은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며 엉엉 울었지 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은혜를 저버리고 나 혼자만의 욕심을 가지고 살겠다는 이기주의는 인류 최대의 재앙입니다.

"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니이다."(시10:3)

 

7. 늑대와 학

어느 날 늑대가 저녁을 너무 빨리 먹다가 뼈를 삼켜 버렸다. 그 뼈가 목에 걸려 빼려고 노력을 했으나 헛수고였다. 그때 학이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여보 친구, 내 목에 뼈가 걸려 있는데 자네의 긴 목으로 내 목구멍의 뼈를 뽑아 줄 수 없을까? 그러면 그 사례는 톡톡히 치르지!" "어디 봅시다." 학은 머리를 늑대의 입 안 사나운 이빨 속으로 집어넣고, 주둥이를 쑥 내밀어서 뼈를 뽑아 내었다. "옳지 됐어, 시원한데." 늑대는 걸린 뼈를 뽑고 나니 이제 살 것만 같았습니다.

"그럼 늑대 씨 사례비를 주십시오. 나는 가겠습니다."

"무엇이 어째? 사례비를 달라고? 너의 머리가 나의 입안에 들어왔을 때 내가 깨물어서 토막을 내지 않은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라고, 넌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거야."

교만한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여 전능자를 배반합니다.(욥15:25) 그러나 교만한 자의 결국은 저주를 받고(시119:21, 렘17:5,6) 멸망하게 됩니다.(잠16:18)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1:31)

 

8. 매국노 이완용

조선왕조 말기 우리네 대부분이 깊은 역사의 잠을 자고 있을 때 유달리 일찍 세상을 향하여 눈을 뜬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벌써 영어를 배웠던 사람으로써 미국이 우리와 가까이 지낼 때 친미파의 주동인물이 되었고, 세상이 변하여 러시아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어느새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친러파의 중심인물이 되더니, 노일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이번엔 유창한 일어를 앞세워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이어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한 사람입니다. 그 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갈 때였습니다. 그는 서슴없이 일본인이 되어 그 나라 귀족으로 둔갑했고 마침내 후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았습니다. 바로 이완용(1858-1926)이라는 사람의 얘기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우리들 어느 누구도 그를 생의 승리자라고 말하지 않고 매국노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방향 설정이 잘못된 것이요 생을 통틀어 결산할 때 결단코 승리의 팡파르를 울릴 수 없는 일생을 살았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이완용처럼 국가와 민족을 배신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습니다.(왕하8:22, 왕하24:20)

6. 25 때 우리를 도와준 미국의 은혜를 잊지 말고 배반하지 말아야 합니다.

 

후르레스끄라는 성도는 죽도록 매를 맞고 붉게 달아오른 쇠갈고리와 칼로 고문을 당했습니다. 간수들은 굶은 쥐들을 감방에 들여 놓아, 그는 잠을 잘 수도 없었습니다. 그가 눈을 잠시 붙이려고 하면 쥐들이 달려들었기 때문에 쥐들을 쫓아야만 했습니다. 간수들은 그를 2주동안 밤낮으로 세워놓고 동역하는 성도들을 배반하도록 강요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의 14살난 아들을 데려다 그의 앞에서 사정없이 채찍질했습니다. 그는 이 장면을 눈뜨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아들아, 나는 이들에게 말해야 되겠다. 나는 더 이상 차마 볼 수가 없구나." 그러자 그의 아들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버지, 저는 주님을 파는 아버지를 원치 않습니다. 끝까지 견디십시오. 만약 이들이 나를 죽인다면 나는 예수님과 조국을 위하여 죽을 것입니다." 악에 찬 간수들은 소년을 그 자리에서 때려 죽였습니다. 감방벽은 붉은 피로 물들었습니다. 소년은 주님을 찬양하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말세에는 사람들이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합니다.(딤후3:1-4) 요근래 교인들 중에 목사와 장로, 권사... 꼬락서니 보기 싫다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한 사람들입니다.(요일2:19)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좇은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사람보고 다니면 안됩니다. 이 세상에는 실수 없고 온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도 완전하고 이상적인 교회는 없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배반하기 쉬운 때에 우리가 하나님을 배신하지 않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가까이하고(딤후3:15,16, 시편1:2), 진리에 굳게 서서(엡4:13-16), 시험을 인내로 극복하고(눅8:13, 약1:2-12),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엡6:10- 13)

 

우리가 인생을 살다가 보면 때로 어두운 밤을 맞이할 때도 있지만 그 때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말씀과 믿음으로 좁은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내 아들 승진이가 네 살 되던 해 어느 날, 나는 그 아이와 함께 맥도널드에 갔습니다. 아들은 버거, 콜라, 튀김 등 미국 대표 음식을 먹었고, 그 동안 나는 드레싱을 곁들인 따분한 내 샐러드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나는 자제심을 잃고 아이에게 튀김 몇 조각만 달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싫어요!"라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모든 음식들이 일차적으로 어디에서 나온 건지 아이는 몰랐을 리 없습니다. 얼마나 배은망덕하고 얼마나 뻔뻔스럽고 이기적입니까!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쳤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그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때로는 우리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우리에게 주신 것에 대한 보답으로 아주 작은 것을 요구하시는데, 우리의 대답은 "싫어!"입니다.

내 아들의 경우는 그때 아직 네 살이 채 안되었을 때였으므로 더 성장하고 성숙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이제 당신에게 도전을 던집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영역에 있어서 당신의 마음을 검토해보십시오.

 

인간의 삶은 문자 그대로 은혜로 시작하여 은혜로 마칩니다. 부모의 은혜로 세상에 오고, 어머니의 은혜로 아기가 젖을 먹고 옷을 입으며 점점 자라갑니다.

조금 자라게 되면 선생님의 은혜로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혹은 박사학위를 받는데, 모두 과거와 현재의 선배들이 연구하고 남긴 지식과 경험과 기술과 온갖 학문을 은혜로 받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홀로 살지는 못합니다. 이웃의 은혜가 있습니다. 세계평화의 은혜 가운데서만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렇게 일생을 다른 이들의 은혜로 살고 있지만 물고기가 물의 은혜를 모르는 것처럼, 공중의 나는 새가 공기의 은혜를 모르는 것처럼, 이 모든 은혜를 깨닫지 못하고 살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러한 인간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더욱이 인간이 이 세계에서 살 수 있도록 대자연을 준비하여 주시고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여 주시며 날마다 사랑하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사는 자, 그 얼마나 될까요?

“은혜는 물위에 새기고 운수는 돌에 새긴다.”는 옛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실로 준엄한 금언입니다.

그러나 은혜는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 인간의 현실이 아닌가요. 하물며 은혜를 입힌 이에 대하여 반역을 하며 덕을 베푼 이에게 대하여 배신하는 자는 또한 얼마나 될까요? 그러므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103:2)

 

성도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감사하고 어떤 환난과 시험에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충성된 일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살아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겪는 어두운 밤이 유혹의 시간, 배반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 더욱 정금같이 순결해지는 믿음의 시간이 되게 하옵소서. 자신의 유익을 위해 쉽게 배반하고 무섭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주님을 본받아 겸손하게 하시고 충성하게 하옵소서. 끝까지 충성스런 믿음의 사람으로 주님과 교회를 위해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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