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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스2:61-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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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 목사 |
참고 : | 2000년대 설교 |
2장 61절-70절.
61절-70절: 제사장 중에는 하바야 자손과 학고스 자손과 바르실래 자손이니 바르실래는 길르앗 사람 바르실래의 딸 중에 하나로 아내를 삼고 바르실래의 이름으로 이름한 자라 이 사람들이 보계 중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도 얻지 못한 고로 저희를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하고 방백이 저희에게 명하여 우림과 둠밈을 가진 제사장이 일어나기 전에는 지성물을 먹지 말라 하였느니라 온 회중의 합계가 사만 이천 삼백 육십명이요 그 외에 노비가 칠천 삼백 삼십 칠명이요 노래하는 남녀가 이백명이요 말이 칠백 삼십 륙이요 노새가 이백 사십 오요 약대가 사백 삼십 오요 나귀가 육천 칠백 이십이었더라 어떤 족장들이 예루살렘 여호와의 전 터에 이르러 하나님의 전을 그곳에 다시 건축하려고 예물을 즐거이 드리되 역량대로 역사하는 곳간에 드리니 금이 육만 일천 다릭이요 은이 오천 마네요 제사장의 옷이 일백 벌이었더라 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백성 몇과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과 느디님 사람들이 그 본성들에 거하고 이스라엘 무리도 그 본성들에 거하였느니라.
우리 인간이 스스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어째서 자기 자신이 만물의 영장이냐’ 하는 면에서 바로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자기의 가치성, 자기의 목적성, 자기의 영원성에 대해서 바로 아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를 못합니다.
‘인간이 어째서 만물의 영장이냐’ 하는 여기에 대해서 인간은 영과 육의 결합체로 되어 있고, 또 그 안에 인격성과 도덕성을 가졌기 때문에 만물의 영장이라고 그렇게 많이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아는 사람도 실은 많지를 못하지요. ‘나는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물이다’ 하는 신령계와 물질계를 창조하신 그 창조주의 대 선택의 목적물임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못하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한 이치를 모르면 인간을 모르고, 인간을 모르면 자기를 모르고, 자기를 모른다고 하면 만물 앞에 수치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가치성을 모르면 인간을 안다고 해 보았댔자 그것은 인간의 고깃덩어리밖에 모르는 겁니다.
우리가 성경을 알게 되면 자기를 아주 똑똑히 알게 돼요. ‘나는 몇 푼어치 안 되는 자로 알았는데 성경을 알고 보니까 나는 하나님의 제 1 선택의 목적물이구나. 이 나를 위해서 제 2의 목적물이 있고, 제 3의 목적물이 있구나’ 하고 구원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성품도 알게 되고, 구원을 알게 되면 영생이 뭔지 알게 됩니다. 구원을 모르면 성품도 모르고 인간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이 하나님의 대 선택의 목적물임을 알게 되면 자기 자신을 연구하게 되고, 자기를 알면 알수록 이 지구 땅덩어리를 알게 되고, 역사를 알게 되고, 나아가서 하나님을 연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인간 내가 복잡한 것이로구나. 이렇게 지구가 복잡하구나. 이렇게 우주가 또 복잡하구나’ 그걸 알게 된다 그 말이요.
지구의 예를 들면 나무의 색깔들을 인간이 입히려고 한다면 한 사람이 한 평생을 칠을 한다면 지구의 나무에 색깔들을 다 칠을 할 수 있겠느냐? 못한다. 열 명이면 할 수 있겠느냐? 못한다. 천 명이면 할 수 있겠느냐? 못한다. 안 되는 거지요. 불가능이지요.
우리 인간들은 돈을 벌려고 부지런히 일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예수님을 죽을 때까지 믿을 터인데 뭐 그렇게 어렵게 믿느냐? 아주 쉽게 믿어야지’ 그렇게들 생각을 한다 그 말이요. 예수 믿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이것은, 성화구원을 입어나가는 이것은 온 지구 위의 나무를 찾아다니면서 푸른 색깔을 입히는 것보다 더 많고, 풀의 색깔을 입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인데 그 말이요.
천당 못 갈까봐 염려 걱정하는 사람은 천당 갈만큼 예수 믿어놓으면 되겠지요? 우리 인간은 죗값을 지불할 능력도 없고, 아무 힘도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효력적으로 죄 사멸이 됐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내가 알지 못할 때에 예수님께서 지불을 했습니다.
에베소 2장 5절에 보면 얻은 구원이 있지요? 이 얻은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다. 예수 믿은 후에 믿고 보니까 그 사실을 알겠더라 그 말이요. 그래서 이 구원은 인간 자기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므로 자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기본구원이 그렇다 그 말이요.
그러면 기본구원을 얻은 자가 또 죄를 지으면 구원을 받아야 되느냐? 죄를 지으면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은 그 구원을 빼앗아 가는 게 아니냐? 조금 죄를 지으면 놓아두고 많이 지으면 빼앗아 가느냐? 기본구원은 그렇지를 않지요.
우리의 기본구원은 하나님의 단독적인 역사요 단회적이요 찰나적이요 순간적이요 주권적인 역사이기 때문에 이 구원을 한 번 얻은 자는 에베소 2장 10절에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입니다. 이 구원은 천국 가는 구원, 천국시민이 되는 구원입니다.
이것을 영생이라고 하는데 이 영생이라고 하는 말속에는 영원히 죽지 않는 천국의 생활이 들어있고, 인간이 입어야 할 성화구원도 들어있습니다. 영생이라는 말속에는 기본구원도 들어있고 성화구원도 들어있다 그 말이요. 단순히 기본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령계 영원계 영생계가 무한하듯이 물질계에서 이 땅에서 이 지구 땅덩어리 위에 있는 동안에 우리가 입고 가야 할 구원은 무한입니다. 이루고 가야 할 성화구원이 무한입니다.
자기가 갈 천국을 바로 아는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요, 모르면 믿음이 없다 그 말이요. 신령계의 무한성을 알았더라면 자기가 입고 가야 할 실력도 무한이라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신령계에 가서 누리고 느끼고 할 하나님의 능력을 무한히 입어야 할 자기입니다.
우리가 입은 구원이 많겠습니까, 입을 구원이 많겠습니까? 입어야 할 구원이 많다 그 말이요. 기본구원을 얻었으면 이제 죽어도 천국은 들어갑니다. 문제는 그 천국에 들어가서 실력적으로 누려야 할 그 실력이 문제란 말이요. 그 실력을 이 땅에서 닦아놓아야 된다 그 말이지요.
천국 가고 안 가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영원 전에 다 정해놓았습니다. 디도서 1장 2절에 있어요. 우리는 그런 걱정할 필요가 없고, 내가 갈 천국은 무한한 천국이다. 하나님이 무한한 고로 내가 입고 가야 할 구원도 무한이다. 실력적으로 입고 갈 것, 능력적으로 입고 갈 것, 하나님의 도덕성으로 만들어 갈 그 구원이 무한이라 그 말이요. 무한이기 때문에 예수 믿어서 몇 가지만 배워가서는 안 된다 그 말이요. 누릴 것이 무한이요, 활동이 무한이요, 활용할 것이 무한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실력을 닦고 가야 된다 그 말이요.
우리가 영원한 곳에 그 곳에 가서 먹을 것은 몇 가지나 될까? 상상을 해 보면 재미있겠지요?
그런데 우리 인간이 참 안타까운 것은 이 지구 땅 위에 사는 것을 자기의 실상처럼 느끼고 있단 말이요. 인간 자기는 언젠가고 무덤으로 들어가는데, 죽는데 ‘이 땅에 존재하는 그 기간 동안이 꿈의 세계로구나’ 하는 그걸 별로 못 느끼고 마치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이 세계를 실상적인 세계로 느낀단 말이요. 그러니까 ‘천국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 나이다. 실상적인 그 세계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 나이다’ 하는 그 면에서는 별로 못 느낀단 말이요. 그러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가?
이 땅에 사는 것은 꿈의 세계요, 세상사람들은 꿈을 꾸는 겁니다. 일하고 장사하고 먹고 마시고 하는 이게 전부다 꿈꾸는 거요. 그러면 언제 꿈을 깨느냐? 죽음의 선을 탁 넘었을 때는 실상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꿈의 세계라. 꿈을 깨면 실상이라.
우리가 지난밤에 꿈을 꾸었으면 아침에 눈을 뜨고 깨어보면 허망하단 말이지요. 그렇지요? 참 허망해요. 그런 것처럼 이 세상은 꿈의 세계요 꿈이 활동인데, 그런데 사람들은 실상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꿈의 세계 안에서 깨면 없어질 헛꿈을 꾸고 있다 그 말이요. 얼마나 안타까우냐 그 말이요. 실상세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헛노력하고 헛고생하고 헛소망을 품고 산다 그 말이요. 허망하다 그 말이요, 죽음의 선을 넘어갈 때는 허망한 것뿐인데, 아침에 꿈을 깨듯이 허망한 것뿐인데 그렇다 그 말이요.
우리 모두는 성도 하나 하나가 모두다 실상세계의 실력배양을 해야 할 겁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 안을 보면 교회에서 외식운동을 하느라고 야단이란 말이요. ‘어떻게 하면 연보를 더 많이 내게 하느냐? 어떻게 하면 교인수를 더 늘리느냐? 어떻게 하면 건물을 더 크게 짓고 가느냐?’ 뭐 이런 위주로 예수 믿는 거. 이게 다 헛꿈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입어야 할 구원이, 내 속에서 성장해야 할 구원이 이 세상 지구 위의 산과 나무와 풀에 색칠을 할 것보다 더 많다 그 말이요. 무한이라 그 말이요. 그런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입을 구원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그 말이요. 예수 믿고 완전한 자가 된 것처럼, 성경을 더 깨달을 것이 없는 것처럼 살고 있다 그 말이요.
입을 구원의 이치를 안다면 우리 인간이 흥청거릴 새가 없을 거라 그 말이요. 평생을 입어도 못 입어질 구원인데 언제 놀 새가 있느냐 그 말이지요.
성경에 보니까 에스라서 첫 장서부터 나오지요. ‘그 백성 된 자는 예루살렘 고향으로 가라.’ 자기가 나았다고 해서 다 자기 따라 가지더냐 그 말이지요. 또 자기가 다 데리고 갈 수 있느냐 그 말이요. 성경에 보니까 오직 시온주의로 감염된 자만 가더라 그 말이요. 세상 바벨론에 물이 든 자는 안 가고 못 가더라 그 말이요. 고향으로 못 가더라 그 말이지요.
바벨론에서 물 먹고, 바벨론에서 자랐고, 바벨론에서 배우고 했지만 자기의 정신 사상이 무슨 주의로 자기를 감염시키고, 무엇을 주었느냐 그 말이요. 시온주의 히브리사상 천국백성의 정신으로 감염을 시켰느냐 그 말이요. 성화구원으로 시켰느냐 그 말이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활을 입힐 때에는 우리에게서 빠져나갈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이력이 많고 사역이 많아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 가지고 가지 못할 이력과 사역이 상당히 많을 거다. 주님의 것으로 닮지 못한 것은 다 빠져나가는 거니까.
내 자체 내에 마찰과 대립이 없는 그 자로, 그 실상적인 나로 만들어야 할 텐데, 부지런히 탈색을 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염색을 해야 할 나인데 외식으로 살 새가 없는데 그 말이요. 외식은 가견적인 것으로 자기 속에 자꾸 채워 넣는 것. 쉽게 말하면 세상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채워 넣는 건 다 못 가지고 가요.
자기가 입지 못한 구원은 못 가져갑니다. 성화구원이 안 됐기 때문에. 이건 부활할 때에 정확하게 계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 보면 ‘어느 자손은 몇 명이요, 어느 자손은 몇 명이요’ 하고 아주 정확하게 계수가 된단 말이요. 자기 활동에서, 자기 사용에서, 자기의 느낌에서 정확하게 드러난다 그 말이요.
남을 미워하는 것이 자기인가, 남인가? 자기 속에서 자기가 그렇다 그 말이지요. 내가 남을 미워하는 것은 남이 아닌 바로 자기지요. ‘저 자가 나를 미워하기 때문에’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 속에서 미워하는 그게 남이 아니고 자기라 그 말이요. 이것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입어야 하는 건데 그 말이요.
못 입혀진 것은 사건을 등용시켜서 보여주기도 하고 가르쳐 주기도 합니다. ‘네 속에 이런 것이 들어있다’ 하고. 구원을 못 입었으면 즉, 성화구원이 안 된 것은, 주님으로 입지 못한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입힐 때 자기로부터 싹 다 달아난다 그 말이요.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 믿은 효력이 없다 그 말이요. 예수 믿은 효력이 정확하게 계산이 돼야 되겠는데 싹 빠져나갔다 그 말이요. 거짓이라 그 말이요. 세상 것이라 그 말이요. 계수가 안 된다 그 말이요. 계산이 안 된다 그 말이요. 하늘나라 고향으로 들어가는 계수가 안 된다 그 말이요.
이 땅에서 나그네 생활하는 동안에 그것을 주업으로 자기가 해야 하는 건데 그 면에서는 입어야 할 자기인지, 안 입어야 할 자기인지 그걸 모른 채 세상성으로 산다면 이 세상에서 몇 십 년이나 살까요? 며칠이나 살까요? 이건 자기도 모르는데 참 자기를 실상화 시키지 못하고 거짓적인 자기로 잔뜩 입혀놓으면 다 빠져나간다.
그런데 자기가 사욕이 많으면 그것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영적이며 사상적이며 정신적이며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성분을 깨닫지를 못 해. 자기 속에 사욕이 많기 때문에, 세상성이 많기 때문에.
오늘 우리 위에서 하나님의 무비카메라가 우리도 모르게 돌아가면서 우리가 마음먹은 거, 활동한 거를 찍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속도로에 무비카메라를 설치해 놓은 것을 볼 수가 있지요. 그 자연계시로 보여주는 거거든요. 운전수는 신나게 지정된 속도를 넘고 막 달리지요. 그런데 무비카메라가 그걸 딱 찍어버리지요. 나중에 벌금이 나오지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무비카메라가 내 위에서 하나님의 성품이 얼마나 입혀졌는지, 세상성으로 빠져나갈 것으로 입혀졌는지 내 마음을 찍고, 내 활동을 찍고 있다는 것을 아느냐? 이걸 우리는 알아야 할 거란 말이요. 느껴져야 할 거란 말이요.
‘우리 인간은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 성화구원을 무한히 입고 가야 할 자기이다.’ 이 이치만 안다면 ‘하라, 마라’ 가르칠 필요가 없지요. 모르면 ‘하라, 마라’ 명령이 가고,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몽둥이가 가고. 못 깨달으면 사건이 와서 두들겨 패고. 참 얼마나 미련한지?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에,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무슨 꿈을 꾸느냐? 세상에서 사라질 헛된 꿈을 꾸지 말고 실상적인 꿈을 꾸자. 그 실상적인 꿈은 실상에서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꿈도 실상도 같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그거는 참 꿈이라. 성화구원을 이루어 가는 것.
우리는 언제까지 존재하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그러한 구원을 입고 갈 우리들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으면서 손해 볼 자로 믿지 말자 그 말이요. 사역과 이력을 헛되게 해서 부활의 권능을 입을 때 싹 다 빠져 달아나지 않도록 하자 그 말이요.
내가 예수 믿고 활동하고 생각하고 한 그 모든 것은 정확하게 성화구원적으로 계산이 돼서 백성들이 따라오듯이 나 따라서 내 뒤를 정확하게 계산되게 돼 있다 그 말이요. 언젠가 어느 땐가 분명히 그 백성 된 자는 고향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이 있을 거라 그 말이요.
기도 올립시다.
사랑 많으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버지, 이 진리의 말씀 이 생명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있는 말씀이요, 이 살아있는 말씀이 우리 속에서 역사가 되면 하나님의 성품을 무한히 입어가는 성화구원의 역사가 분명히 되는 것으로 믿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저희들이 이 지구상에 몇 살까지 살아있을 런지는 모르지만 그 날까지 예수 믿는 이 믿음 가지고, 진리이치 진리지식 가지고 모든 언행 활동 사고방식 전부는 하나님의 성품을 입어가는 쪽으로 천국에 계산을 하고 천국에 소원 목적을 두고 이해타산을 따지고 그렇게 바로 살아갈 수 있는 저희들 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오늘도 지금도 하나님의 무비카메라는 우리 위에서 우리의 활동,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마음을 다 찍고 있는 것을 봅니다. 아버지 하나님, 말씀 깨달음이 소원이 되고, 말씀대로 바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 소원 목적이 우리 속에서 약동을 해서 이것이 나를 이끌어 가는 역사가 되어서 잠깐 동안에 꿈꾸는 나그네 생활 하는 동안에 실상적인 꿈을 꾸고 실상세계에서 나타날 그 역사를 이 땅에서 하고 갈 수 있도록 저희들을 꼭 붙잡아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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