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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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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위치의 줄리안과 함께 하루를 묵상하며 살아봅시다.
John Kirvan이 편집한 시리즈 [위대한 영성 교사들과 더불어 30일]의 줄리안 편을 번역합니다.
하루에 한 편씩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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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잘 되리라
[노르위치의 줄리안과 함께 하루를]
제1일
[밝아오는 아침에]
그리고 하느님은 내 손바닥 안에 작은 물건 하나를 보여주셨다.
공처럼 둥글고 콩알보다 크지 않은, 이것이 무엇일까? 생각하며 들여다보는 내게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그게 창조의 모든 것이다.”
나는 그 자그마한 물건이 어떻게 부서져서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남아있을 것인지, 의아스러웠다.
그러는 내게 다시 하느님이 말씀하셨다.
“그것은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남는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나는 알았다, 모든 사물이 하느님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그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창조되지 않은 하느님을 사랑 안에서 모실 수 있기까지 우리는
온갖 피조물의 하찮음과 공허함을 깨달아 알 필요가 있다.
전지전능하시고 은혜로우신 하느님 아닌,
우리를 채워줄 수 없는 하찮은 것들 안에서 안식을 찾는 한, 우리 가슴은 결코 쉬지 못하리라.
그분이 우리의 참된 안식이다.
우리에게 알려지고 싶은 그분은 당신 안에서 쉬는 우리를 기뻐하신다.
그분 아닌 누구도 우리를 채워줄 수 없다.
그런즉 창조된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여의기까지 우리 영혼은 도무지 쉴 수가 없다.
모든 것의 모든 것인 하느님을 위하여 온갖 집착을 버릴 때 비로소 우리는 영혼의 안식을 즐길 수 있다.
[온종일]
하느님 아닌 누구도 우리를 채워줄 수 없다.
[하루를 마감하며]
콩알 하나를 마음으로 그려보자.
오늘 하루 그대가 겪은 일들 가운데 이 콩알처럼 작고 하찮은 일들이 있었던가?
이 작은 사물 안에서 보여주시는 그대를 향한 하느님의 관심과 사랑을 느껴보라.
어떤 사소한 사물들이 오늘 그대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하게 훼방하던가?
오늘하루 그대는 하느님 안에서의 안식을 언제, 어떻게, 경험했는가?
[밤 기도]
좋으신 하느님, 저에게 당신 자신을 주십시오.
당신 한분만으로 저에게 충분하옵고
당신께 옹근 예배를 드리는 것 말고는 따로 구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 아닌 다른 무엇을 구한다면 저는 끝없이 결핍할 것이요,
오직 당신 안에서 제가 모든 것을 소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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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일
[밝아오는 아침에]
우리 몸이 옷을 입고 살이 피부로 감싸이고 뼈가 살로 덮이고 심장이 몸 중앙에 자리하듯이
그렇게 정수리에서 발톱까지 우리 육과 영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입었다.
하지만 이 은유가 아무래도 모자란 것은 그 모든 것들이 닳아서 소멸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선하심은 영원히 지속되고 우리 살보다 더 우리와 가깝다.
우리 영혼이 당신한테 힘껏 매달리고 당신의 선하심을 잃지 말기를 우리의 애인이신 그분은 바라신다.
우리를 지으신 이가 얼마나 달콤하고 부드럽고 애틋하게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그 어떤 피조물도 상상 못한다.
그런즉, 그분의 은혜와 도움으로 묵상 속에서 영혼의 안식에 들어가자.
선하신 주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높고 초연하고 한결같은 사랑, 그 측량 못할 참사랑을 경탄(驚歎)하자.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이신 그분께 우리 소원을 말씀드릴 수 있으리라, 오직 하느님을 찾는 것이 우리의 뜻이기에.
충만한 지복(至福) 속에서 그분을 온전히 모실 수 있게 되기까지 우리는 소원과 갈망을 멈출 수 없다.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를 지으신 분을 바라보는 눈길이,
자신의 하찮음을 깨우쳐 알게 하고 경외와 겸손과 충만한 이웃 사랑으로 우리를 가득 채워준다.
[온종일]
그렇게 정수리에서 발톱까지 우리 육과 영은 하느님의 선하심을 입었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그대의 가장 소박한 욕구는 무엇이었나?
거기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껴보았는가?
그대의 소박한 욕구를 기억하고 하느님의 현존과 사랑을 지금 느껴보라.
오늘 그대는 언제 어떻게 하느님의 선하심으로 감싸인 그대를 느꼈는가?
잠시 묵상하자.
하느님이 그대에게 밀착(密着)되어 있으니 그대도 하느님께 밀착될 수 있다.
[밤 기도]
온유하신 하느님, 저를 당신 품에 안아주소서.
미천한 저에게 베푸시는 당신 사랑을 보여주시고
돌이켜 그 사랑으로 저를 감화하소서.
그리하여 당신 홀로 제 의지, 제 사랑, 제 기쁨의 모든 것이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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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일
[밝아오는 아침에]
우리 영혼이 눈을 돌려 당신과 당신의 빛나는 세상 바라보기를
우리 주께서 바라심은 그것이 너무나 좋기 때문이다.
달콤한 위안으로 충만한 주님의 심판 또한 우리 영혼을 안식으로 데려간다.
그런즉 우리는 자신의 눈먼 행실을 꼼꼼하게 따지는 일에서
돌이켜, 조건 없이 기뻐하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자.
우리 눈에는 잘한 일도 있고 잘못한 일도 있지만 하느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기 때문이요,
모든 것을 하느님이 만드셨기에 이루어진 일마다 어쨌거나 그분이 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대단한 행실이든 사소한 행실이든 결국은 잘 된 일이니
모두가 처음부터 정해진 하느님의 섭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다.
하느님 말고는 아무도 행하지 아니한다.
그분은 어떤 이유로도 당신 뜻을 바꾸지 아니하시고 앞으로도 바꾸지 않으실 것이다.
창조된 것들 가운데 그 어느 것 하나 처음부터 그분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없다.
첫 물건이 창조되기 전에 벌써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잡았고
모든 것이 충분히 선한 까닭에 어느 하나 그분 설계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 삼위께서는 당신이 하신 모든 일로 온전히 기뻐하신다.
보라, 내가 하느님이다.
보라, 내가 모든 것 안에 있다.
보라, 내가 모든 일을 완성하리라.
보라, 나는 내가 한 일에서 내 손을 거두지 않는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창조한 목적으로 데려가는 일에 결코 실패하지 아니하리라.
보라, 시간이 있기 전에 내가 그것들을 나의 힘과 지혜와 사랑으로 만들었다.
그런즉 무엇이 어떻게 잘못될 수 있겠느냐?
[온종일]
보라, 나는 내가 한 일에서 내 손을 거두지 않는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그대가 겪은 일 가운데 가장 볼품없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는가?
그 일이 하느님의 보살핌 안에서 마침내 훌륭하게 마무리되는 것을 상상해보자.
그대에게 한때 실패작이라고 생각된 일이 있는가?
그것으로 하느님이 선한 열매 빚으셨음을 이제 알 수 있겠는가?
오늘 그대는 무엇에 실패하였는가?
그것을 하느님께 드리는 기도의 소재로 삼자.
이왕 일어난 일이니 그것으로 위안을 주십사고 하느님께 빌어보자.
이 명상 가운데 편히 쉬면서 너무 심하게 자신을 닦달하지 말라.
하느님께서 그대를 위로하게 해드려라.
[밤 기도]
지극히 놀라운 사랑이시여.
당신이 하느님인줄 알게 저를 깨우치소서.
당신이 어떻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 안에 계시며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당신이 하시는 일이요,
그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실 것임을 믿게 하소서.
시간이 있기 전에 우리를 위하여 세우신 당신 목적으로
저와 모든 피조물을 마침내 인도하소서.
우리를 지으실 때의 그 힘과 지혜와 사랑으로
당신께서 이 모든 일을 끝내 완성하실 것임을 믿습니다.
당신 안에 있는 그 어느 것도 망실되지 않을 것임을
우리로 하여금 더욱 깊이 확신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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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일
[밝아오는 아침에]
주님은 내가 전에 품었던 당신께 향한 열망을 상기시켜주셨다.
나는 내 길에 있는 것이 죄밖에 없음을 알았고 나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그러함을 알았다.
만일 거기에 죄가 없었다면, 우리 모두 죄 없이 태어난 처음 때처럼 주님께 순결하고 친근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는 내가 알아야 할 것들을 환상으로 보여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죄는 있을 만해서 있는 것.
하지만, 모든 것이 선으로 돌아가리라.
모두가 잘 되고,
모든 일이 잘 되리라.”
‘죄’라는 한 마디 말로 하느님은 내게 온갖 좋지 않은 것, 모든 피조물의 아픔과 슬픔,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를 구원하느라 겪어야 했던 당신의 수치와 희생을 보여주셨다.
스승 예수의 뒤를 따르는 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아픔과 슬픔을 견뎌야 했고
마침내 온전히 순결해지기까지 계속 견뎌야 하리라.
나는 죄 그 자체를 보지 못했다.
그것에 실체가 없고, 그것이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이 가져다준 고통으로 인하여 우리는 그것이 거기 있음을 알 수 있을 따름이요
그 고통조차도 잠시 있다가 사라진다.
게다가 우리는 그 아픔을 겪는 동안에도 우리 주님의 아픔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다.
온유한 사랑으로 우리를 위로하시며 그분은 말씀하신다.
“진실로 죄가 이 모든 아픔을 가져왔지만 그러나 모두가 잘 되리라.”
그분 음성에서 나는 조금도 나무람을 듣지 못했거니와,
죄 많은 몸으로 꾸중을 듣지 않았는데 우리가 어찌 하느님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온종일]
죄는 있을 만해서 있는 것.
하지만 모두가 잘 되리라.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그대는 그대와 하느님의 관계를 가로막는 무슨 죄를 보았는가?
줄리안의 깨달음을 좇아서, 그것이 어떻게 좋은 결과를 빚게 될는지 상상해보자.
전쟁이나 공해 따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범죄를 생각해보라.
그것들이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우리를 하느님께로 가까이 가게 할 것인가?
그것들이 어떻게 우리의 위태로운 상황을 알아차리게 하고 결국 하느님께로 돌아가도록 도움을 줄 것인가?
그대의 죄와 실패 또한 실체가 없다.
없는 것을 누가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밤 기도]
우리를 위로하시는 하느님.
저의 잘한 일과 덕행뿐 아니라, 제가 선택한 잘못된 길과 결함을 통해서도,
당신이 어떻게 제 삶을 이끌어 오셨는지 보여주소서.
부정과 어둠의 한복판에서도 우리를 붙잡으시고
다정하게 고향집으로 데려가시는 당신의 사랑을 우리로 하여금 소망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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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일
[밝아오는 아침에]
그리고 나는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우리에게 내리시는 그리스도의 자비를 보았다.
전에도 그랬듯이 내 마음은 그리스도의 고통으로 말미암아 슬프고 아렸다.
그리하여 나는,
하느님의 종들 곧 그분의 사랑과 구원을 받은 내 이웃들을 동정하는 마음에 이끌려 움직이게 되었다.
그것은 이 세상이 바람에 펄럭이는 넝마조각처럼 비통, 분노, 저주로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우리 주님이 당신 백성의 괴로움을 넘어
다시 연민과 동정으로 기뻐하실 수 있는지를 나는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하였다.
그분은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시려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마다에게 선물을 주신다.
그분 눈에는 그 선물들이 아무 흠 없는 것들이지만
우리는 그것들 때문에 세상에서 비난받고 거절당한다.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영광으로 바뀌고 당신 고통에서 오는 힘으로 마침내 은혜를 입게 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되기를 예수님은 바라신다.
우리는 힘든 일을 홀로 외롭게 견디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된 몸이다.
그분 안에 우리 존재의 바탕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안다, 영문도 모르고 겪는 우리의 시련이 그분의 고난과 아픔에 견주면 아무것도 아님을.
이 진실을 제대로 알 때 비로소 우리는 괴로워 부르짖는 일을 그만둘 수 있으리라.
우리 아픔은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들이지만
그분의 사랑이 언제나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진실을 알게 되리라.
당신 크신 호의로 그분은 결코 우리를 꾸짖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동정과 연민을 품고서
흠이 없는 자녀를 바라보듯이 우리를 바라보신다.
[온종일]
당신 크신 호의로 그분은 결코 우리를 꾸짖지 아니하신다.
[하루를 마감하며]
그리스도의 수난을 마음에 떠올리고, 오늘 그대가 겪은 아픔을 거기에 연결해보라.
둘이 손잡고 이 세상을 치유하는 모습을 그려보아라.
그대의 동정심이 가서 미치는, 지금 아파하는 이들이 있는가?
그들을 마음으로 불러내어,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대의 아픔에 연결시켜라.
오늘 그대가 저지른 허물이 있는가?
있거든, 그것이 그리스도의 눈에 아무것도 아님을 생각하여라.
그리고 그것을 놓아버리자.
그리스도의 수난 속으로 그것을 떨어뜨리자.
[밤 기도]
지극히 너그러우신 주님.
저의 죄와 허물과 아픔을 당신의 수난에 곁들이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세상의 편견과 거절을 견디고
그것들이 결국 치유될 것임을 깨달아 알게 하소서.
우리가 겪는 모든 아픔이 마침내 우리의 영예와 이익으로 바뀌고
당신의 축복과 기쁨 안에서 절정에 이를 것임을 믿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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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일
[밝아오는 아침에]
하느님은 우리가 안정과 평화에 감싸이기를 바라신다.
그때에만 그리스도의 목마름이 해갈될 것이다.
우리를 향한 사랑의 간절함, 이것이 그분의 목마름이다.
그 사랑은 우리가 당신의 기쁨과 영원한 행복으로 온전히 수렴되는 마지막 날까지 이어지리라.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지복(至福)으로 통합되기를 갈망하신다.
우리가 아직 그분께 충분히 녹아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는 인성이면서 신성이시다.
신성이기에 그분은 더없는 행복이시요, 처음부터 그러했으니 끝까지 그러하실 것이다.
이 행복은 늘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다.
신성이면서 동시에 인성이므로, 그분은 우리를 지극한 행복으로 데려가고자 고통 속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당신 몸으로 그 일을 치르며 오히려 기뻐하셨다.
그분이 내게 이르셨다.
“너를 위하여 겪는 고통이 내게 기쁨과 영원한 행복을 안겨준다.”
이것이 당신 일에서 얻는 그분의 만족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머리시다. 그러므로 영광스럽게 빛나는 그분을 아무도 이길 수 없다.
아울러 그분은 우리를 지체로 한 몸이기에 아직은 어두운 구석도 있고 누구에게 질 수도 있다.
십자가 위에서 겪었던 목마름을 그분은 지금도 호소하신다.
마지막 영혼이 당신과 합일될 때까지 계속 목말라하실 것이다.
그분이 이토록 우리를 갈망하시기에 우리 또한 목마르게 그분을 갈망한다.
이와 같은 목마름 없이는 누구도 지복에 이를 수 없다.
동정심이 그러하듯이, 이 목마름은 하느님의 영원한 선(善)에서 솟아난다.
그러기에 그분은 우리를 동정하시고 우리를 온전히 소유하려 하신다.
그러나 시간이 무르익기까지는 그분의 지혜와 사랑은 결코 종말이 오게 하지 않을 것이다.
[온종일]
그분이 이토록 우리를 갈망하시기에 우리 또한 목마르게 그분을 갈망한다.
이와 같은 목마름 없이는 누구도 지복에 이를 수 없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그대는 온전함에 대한 갈망이 느껴지는 그런 때가 있었는가?
그 갈망을, 그대를 향한 하느님의 갈망에 결부시킬 수 있었는가?
오늘 그대에게 평화와 안식의 순간들이 있었는가?
있었다면, 잠시 그 순간을 회상하며 음미해보자.
그렇게 회상하면서, 그 순간들이 더욱 평화롭게 느껴지는지 살펴보아라.
나아가, 다가올 미래에 그대가 얼마나 더 평화로울 수 있겠는지 상상해보아라.
편히 쉬면서 잠시 명상을 계속 즐겨라.
[밤 기도]
사랑하올 주님, 오늘 저에게 약속하신 평화와 안식을 흘끗 볼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를 향한 당신의 갈망을 알고,
돌이켜 저 또한 다른 어떤 것보다 당신을 갈망하게 하소서.
저의 슬픔 속에서, 당신이 저와 함께 슬퍼하시고
우리 함께 온전히 행복할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믿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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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밝아오는 아침에]
우리의 좋으신 주님이 말씀하셨다, 모든 일이 다 잘 되리라고.
당신께서 크고 고상한 일 뿐 아니라 작고 단순한 일에도 똑같이 관심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기를 그분은 바라신다.
지극히 작은 일도 그분께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임을 우리는 마땅히 알아야 한다.
우리 눈에 너무나 악하고 해로워 보여서 도무지 거기서 무슨 선한 결과를 얻을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일들이 세상에는 많이 있다.
그것들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애통하는 동안, 우리는 하느님의 깊고 놀라운 지혜의 품에 쉴 수가 없다.
이성이 너무 약하고 무지하고 눈이 멀어서 우리는 성 삼위의 능력과 선하심을 보지 못한다.
그래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모든 일이 다 잘 되는 것을 네가 직접 보게 되리라고.
그것은 그분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
“믿음으로 굳게 서서 받아들여라.
마침내 네가 옹근 기쁨을 알게 되리라, 내가 한 가지 행위를 이루는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보다 못한 피조물은 누구도 그 일이 언제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모른다.
그분의 행위가 완성되기까지 그것은 베일에 싸여 있으리라.
그래도 그분은 우리가 이를 알아서 우리 영혼이 당신 사랑에 오롯이 굴복하고
하느님 안에서 누릴 참된 기쁨을 가로막는 온갖 장애를 무시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신다.
[온종일]
지극히 작은 일도 그분께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의 주문(呪文)을 망각하고서 그대가 잊혀졌다고 생각되는 때가 오늘 있었는가?
아침에 읽은 구절을 다시 읽어보고, 어떻게 하느님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붙잡고 계시는지, 생각해보자.
오늘 그대에게 쓸모없고 생산적이지도 못한 것으로 여겨진,
거기서 아무 좋은 것도 얻지 못하리라는 느낌이 여전한 그런 일들이 있는가?
있거든 이제 그것들을 하느님 앞에 가져다 놓아라.
하느님께서 그것의 숨은 가치를 그대에게 일깨워주시리라.
별로 좋지 않고 오히려 나쁘다고 생각된 그대의 과거가 있는가?
그것이 그대의 영적 여정에 하나의 디딤돌이었음을 이제는 알겠는가?
[밤 기도]
주님, 어느 것 하나 잊지 아니하시는 당신의 지혜를 믿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당신 안에서, 모든 것이 드러나며 모든 일이 다 잘 되리라는 것을 확신하고,
제 삶에 일어나는 일들을 조용히 받아들이게 힘을 주십시오.
제 근심걱정을 당신께 내어드리고, 그로써 제 영혼이 당신 사랑 안에서 평화로이 안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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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일
[밝아오는 아침에]
이것은 영원 전부터 우리 주 하느님이 계획하셨고
당신 가슴에 보물로 감추어두셨고
당신 혼자서만 알고 계시는 위대한 행위다.
이 행위로 그분이 모든 것을 좋게 만드실 것이다.
복되신 성삼위께서 없음으로부터 만물을 지어내셨듯이
동일한 성삼위께서 장차 잘못된 모든 것을 좋게 만드실 것이다.
이를 알고 나는 어안이 벙벙했거니와,
우리 믿음은 하느님 말씀을 바탕으로 삼고
누구든지 그 말씀을 믿는 자는 온전하게 보존되리라.
거룩한 교리는 우리에게 말한다, 수많은 피조물이 멸망을 당하리라고.
그 가르침이 진실이라면 모두가 잘 되는 일이 어찌 가능하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나에게 주어진 답은 한 마디뿐이었다.
“너희에게 불가능이 내게는 가능이다.
내가 모든 것에서 나의 말을 영예롭게 하고
내가 모든 것을 좋게 만들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하느님 은혜로, 믿음을 굳게 하라는 가르침을 받았고
모든 것이 바뀌어 좋게 되리라는 확신을 품게 되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주님이 완성하실 위대한 행위요,
이 행위로 그분은 당신 말씀을 옹글게 지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모든 좋지 못한 것들이 마침내 다 좋게 되리라.
[온종일]
너희에게 불가능이 내게는 가능이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그대에게 불가능해 보이는 일이 있었는가?
지금 그것을 하느님께로 가져와서 그분 지혜에 맡겨드려라.
오늘, 그대가 무엇을 해보고 싶었는데 그 일이 되리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은 때가 있었는가?
그 상황에서 오늘의 주문을 기억했는가?
아니면 그런 것이 있는 줄을 까맣게 잊었던가?
자신을 심판하지 말라.
비난도 말고 후회도 말고 그대가 어떻게 했는지를 그냥 바라만 보아라.
그대가 그 순간에 어찌 대처했는지를 눈여겨보아라.
[밤 기도]
사랑하올 주님.
주님의 계획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고
모든 일에서 당신 말씀을 지켜주시니 고맙습니다.
저로 하여금, 당신 말씀을 신뢰하고
제가 감당 못할 것들을 놓아버리게 도와주소서.
모든 불가능한 것을 당신께 내어맡기고
당신이 저에게 가져다주신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더 많이 즐길 수 있는 믿음을 갖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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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일
[밝아오는 아침에]
죄는 사람의 영혼을 치는 날카로운 채찍이다.
이 채찍이 남자와 여자 몸에 떨어지면 스스로 보기에도 꼴사나운 모습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성령이 그를 잡아 참회케 하고 자기-절망을 하느님의 자비로 돌려놓기까지
스스로 지옥에 떨어져 마땅한 자라고 생각하게 한다.
그때 성령께서 그의 상처를 치료하시고 영혼을 소생시켜 생명으로 돌아가게 하신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하여 버림받고 잊혀졌다 여길 때
진실로 우리 주님은 당신 사랑과 보살핌으로 우리를 지켜주신다.
우리가 그런 대접을 받아 마땅한 존재이긴 하지만,
그 사랑이 너무 황송하여 겸손히 엎드릴 때 하느님은 당신 은총으로 우리를 높이 들어올리신다.
참회는 우리를 순결케 하고, 연민은 우리를 준비시키고,
하느님 향한 목마름은 우리를 값진 존재로 만든다.
그렇게, 우리의 모든 수치가 기쁨과 영광으로 바뀌는 것이다.
비록 당신 피조물들이 자주 넘어지고 추락한다 해도
그로써 희망을 잃고 좌절하는 것을 자애로우신 우리 주님은 원치 아니하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잘못은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분 사랑을 막지 못한다.
평화와 사랑이 항상 우리 안에 거하며, 우리 안에 살아서 역사한다.
단지 우리가 불행하게도 그 평화와 사랑 안에 상존하지 못하는 것일 뿐.
[온종일]
우리의 잘못은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분 사랑을 막지 못한다.
[하루를 마감하며]
지난날 그대는 그대의 고통과 자기 허물에 대한 깨달음이
남들에 대한 연민으로 그대를 열어준 적이 있는가?
있거든 지금 그 순간을 기억에서 불러내어 회상해보자.
오늘, 그대 안에 평화와 사랑이 조금도 있지 않은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때가 있었는가?
비록 그대가 알지 못해도,
하느님의 평화와 사랑이 한시도 그대를 떠난 적이 없음을 기억하면서, 다시 그 순간을 회상해보자.
[밤 기도]
자애로우신 주님.
우리의 실수, 죄, 나약함을 스스로 알아차리고,
그것들을 이용하여 우리를 잘되게 하시며
그것들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께로 더 가까이 당겨주시는
주님을 믿어 의지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참회가 우리를 순결케 하고
연민이 우리를 준비시키고
당신 향한 목마름이 우리를 값진 존재로 만들게 하소서.
우리 안에서 평화와 사랑을 전혀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 평화와 사랑이 우리 안에 살아 역사하심을 기억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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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일
[밝아오는 아침에]
하느님은 우리가 기도에 대하여 알기를 바라신다.
첫째, 우리는 누구를 통해서 어떻게 기도가 시작되는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분은 내게 이르셨다. “내가 그 원천이다.”
둘째, 우리는 어떻게 드리는 기도가 가장 잘 드리는 기도인지 알아야 한다.
하느님 뜻에 우리 뜻을 기꺼이 일치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셋째, 그분은 우리가 기도의 결실에 대하여 알기를 바라신다.
모든 일에서 주님과 하나 되어 그분을 닮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하느님은 우리의 기도와 신뢰의 폭이 넓기를 바라신다.
만일 우리가 기도하는 만큼 그분을 신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 아니요
우리 길에 스스로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까닭은 하느님이 기도의 원천이심을 우리가 몰라서다.
우리가 기도드릴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분이 사랑으로 베푸신 은총의 선물이다.
그분이 먼저 우리에게 자비와 은총을 내리셨기에 우리가 자비와 은총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간혹 우리는 오랜 시간 기도했지만 아무 응답도 듣지 못한 듯한 때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도를 망설여서는 아니 된다.
좀더 적절한 때에 좀더 많은 은혜, 많은 선물을 받기 위하여 기다릴 것을 하느님은 우리에게 바라신다.
나아가, 우리를 당신한테로 당기시는 하느님을 경험하는 그만큼 우리도 그분께로 가까이 가기를 기도해야 한다.
이 둘 가운데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만일 우리가 기도하면서, 일하시는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는 낙심하고 좌절하여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지 못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일하시는 하느님을 알면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해야 할 임무를 다하지 않는 것이다.
일하시는 하느님을 알고 그분께 기도하는 것이 하느님을 예배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는 것이다.
그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스스로 아무 한 일이 없다고 생각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자비와 은총을 구할 때 우리에게 결핍된 모든 것을 그분 안에서 찾게 되리라.
[온종일]
당신이 제 기도의 원천입니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그대는 하느님이나 다른 누구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겠다고 느껴지는 그런 때가 있었는가?
혹은 옹근 신뢰의 결핍이 느껴지는 때가 있었는가?
그대가 무슨 일을 하면서 일하게 하신 분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고 상상해보자.
그것이 그대의 경험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주겠는가?
거기서 기도가 흘러나오는 샘으로 잠시 하느님을 묵상하자.
기도가 샘에서 솟아나와 그대 속으로 흘러들었다가 다시 샘으로 돌아가는 영상(映像)을 그려보아라.
다음에 기도할 때, 이 짧은 영상으로 기도를 시작할 수 있으리라.
그것을 기도로 들어가는 문으로 활용하여라.
[밤 기도]
주님, 저에게 기도와 함께, 온전히 당신 신뢰하는 길을 가르쳐주십시오.
당신이 언제나 저와 함께 하심을 확신케 하시고
모든 피조물과 저를 위하여 세우신 당신의 계획에 만족하는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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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일
[밝아오는 아침에]
죽을 수밖에 없는 이번 생을 거치는 동안, 선하신 주님은 자비의 방식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신다.
나는 오로지 사람한테서만 분노를 보았거니와,
그러는 우리를 하느님이 용서하시는 것은 그 분노가 평화와 사랑에 대한 거역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분노는 우리 능력, 지혜, 선함의 결핍에서 생겨난다.
따라서 그 원인은 하느님 아닌 우리 안에 있다.
우리의 죄와 절망이 격한 분노를 일으키고 평화와 사랑을 끊임없이 거스르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랑 안에서 우리를 지키는 것이 자비의 일이고 그 자비의 바탕은 사랑이신 하느님이다.
자비가 관용, 동정, 온유로 사랑 안에서 역사하고 우리를 지켜주며 모든 것을 좋게 바꿔놓는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자비는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고 그러다가 드디어 추락하는 것까지 허락하신다.
갈 곳 없는 바닥에 떨어지면 우리는 죽는다.
생명이신 하느님을 더 이상 보고 느끼지 못할 때, 그때 우리는 틀림없이 죽는다.
우리 잘못은 참담하고
우리 추락은 부끄럽고
우리 죽음은 비통하다.
그래도, 사랑의 연민어린 눈은 우리를 등지지 않고 자비의 실천 또한 멈출 줄을 모른다.
[온종일]
사랑의 연민어린 눈은 우리를 등지지 않는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하루, 특히 분노의 순간들이 있었는지 되돌아보아라.
화를 낸 것에 대하여 자신을 비난하지 말라.
그대 능력과 지혜와 선함의 결핍이 분노를 폭발시킨 건 아닌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아라.
그 분노의 순간들을 하느님의 자비 앞에 가져다 놓고,
그분의 자비가 그 순간들을 어루만지게 해드려라.
억지로 치유를 강제할 것 없다.
하느님의 자비로 하여금 그대 분노의 순간들을 만지게만 하여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일어나지 않든지, 그대로 두자.
그렇게 해보는 것 말고, 다른 어떤 목적도 따로 세우지 말라.
[밤 기도]
사랑이신 아버지, 저의 모든 허물과 특히 저의 분노를 당신께 가져옵니다.
저의 분노가 참담한 실수, 부끄러운 추락, 비통한 죽음으로 연결되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이 죽음 속에서도, 당신의 자비가 끊임없이 저를 지켜주시며
저를 거역하면서까지, 모든 것을 좋게 만들어주실 줄로 제가 믿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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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일
[밝아오는 아침에]
그리고 나는 환상 가운데 보았다,
하느님은 아예 화를 내실 수 없는 분이기에 우리를 용서하실 수도 없다는 것을.
모든 생명이 사랑에 뿌리를 내렸고, 사랑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분노와 친교는 타고난 반대편.
하느님은 우리의 화를 덜어주고 풀어주시며 그로써 우리를 겸손하게 길들이신다.
그분은 사랑하고 겸손하고 온유하신 분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의 반응이 분노와 정반대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분의 평화와 사랑 안에 거할 때까지 우리는 안전하고 복된 존재가 되지 못할 것이다.
구원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느님을 우리의 순수한 평화로 붙잡았다.
우리가 불안하여 허둥지둥할 때 그분은 우리를 지켜주시고 우리를 안식으로 이끌고자 계속 일하신다.
하지만 우리가 이웃과 함께 하느님으로 만족하고 그분의 평화와 사랑으로 충만해지기까지
우리는 이 평화를 경험하지 못하리라, 불만이 우리의 온갖 근심과 재난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 예수는 우리한테서 근심과 재난을 거두시고 그것들을 높은 데로 끌어 올리시어
사람이 생각하고 혀로 말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달콤한 즐거움으로 바꿔놓으신다.
우리가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면 거기서 옹근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바뀐 그것들을 보게 되리라.
[온종일]
모든 생명이 사랑에 뿌리를 내렸고, 사랑 없이는 살 수가 없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경험한 평화의 순간들을 회상하며
상상 속에서 그것들을 펼쳐보자.
그 평화가 하느님 안에서 맛보는 안식이었음을 알라.
반대인 충돌의 순간들도 기억할 수 있는가?
거기서 어떤 일들이 전개되었는가?
그것들이 곤경과 재난으로 이어졌는가?
아니면 다른 무슨 결과를 빚었는가?
그대를 반대하는 이들에게 어떻게 하였는가?
그대 자신을 심판하지 말라.
그냥, 그대가 어떻게 행동하고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바라만 보라.
[밤 기도]
사랑이신 하느님, 끝없는 우애로 저를 참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저를 참아주게 도와주십시오.
저를 반대하는 자들을, 당신의 사랑과 평화로 가까이 가게 하는 자들로 보게 해주십시오.
불안하여 갈팡질팡하는 저와 함께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 불안이 당신 안에서 진정한 아름다움과 끝없는 사랑으로 바뀔 것임을 제가 아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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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일
[밝아오는 아침에]
당신의 사랑하는 피조물, 아담이 추락할 때 하느님 아버지의 동정과 연민이 그와 함께 하였다.
당신과 동등한 사랑스런 아들에게 아버지의 기쁨과 행복이 함께 있었다.
온 세상을 감싸고도는 그 얼굴의 자비로운 눈길이 아담을 따라 지옥까지 내려갔다.
그칠 줄 모르는 아버지의 동정심은 아담을 영원한 죽음에서 건져냈다.
마침내 하늘로 들어올려질 때까지, 같은 자비와 동정이 우리와 함께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생에 눈이 멀어 아버지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
친절하신 하느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사람 모습으로 보여주신다.
하지만 우리가 아버지를 피조물들 가운데 하나로 알아서는 아니 됨을 나는 보았다.
그분이 황폐한 벌거숭이 땅에 앉아계심은 우리 영혼을 당신 거처로 삼으셨다는 뜻이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사람의 영혼이 그분을 가장 기쁘시게 해드린다.
슬픔과 고통 속으로 추락했을 때 우리는 그 고상한 직책에 어울리지 못했다.
그런데도 친절하신 아버지는 다른 데 거처를 마련하려 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당신의 사랑하는 아드님이 그 엄청난 수고로
당신 거처인 우리 영혼의 고상한 아름다움을 회복할 때까지
땅 위에 앉아 새로워진 인간을 기다리신다.
[온종일]
그 얼굴의 자비로운 눈길이 온 세상을 감싸고돈다.
[하루를 마감하며]
하느님은 사람 모습으로 우리에게 당신을 드러내신다.
오늘, 그대가 만난 사람들 안에서 하느님을 느낀 적이 있는가?
황폐한 불모의 땅에 앉아,
그리스도께서 당신 거처인 우리 영혼 회복하기를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그려보아라.
마음에 그 모습을 그리며 잠시 그대로 있어라.
이 유배지에서 하느님의 동경, 열정, 사랑을 함께 느껴보자.
그것이 인류와 특히 당신을 위한 하느님의 무궁한 사랑을 드러내게 하여라.
[밤 기도]
가장 가까운 친구, 하느님.
저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을 몸으로 느끼게 도와주십시오.
인간의 영혼에서 유배당하신 당신 모습이
저를 감동하여, 제 안에 계시는 당신을 갈망하게 하소서.
그 힘든 수고로 당신 거처인 제 영혼을
고결한 아름다움의 장소로 회복하신 아드님 예수께 감사드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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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일
[밝아오는 아침에]
세상에서 우리 인생은 선과 악의 기묘한 혼합으로 이루어진다.
우리 안에는 부활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죄인 아담의 비참한 재앙이 함께 있다.
비록 죽어가는 몸이긴 하지만, 그리스도의 보호 아래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입어 구원의 희망에 되살아난다.
한편, 아담의 추락에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죄가 보태어져서 눈멀고 빛 잃은 우리는 어디서도 위로받을 데가 없다.
하지만 깊은 중심에서 우리가 그분의 자비를 바라는 것은 진실로 그것이 우리 안에 역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하신 하느님이 깨달음의 눈을 열어주시어, 하느님이 주신 능력에 따라 더 보기도 하고 덜 보기도 한다.
그래서 한 쪽으로 올라갔다가 다른 쪽으로 떨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동요의 어지러움이 너무 심하여 자기가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를 좀처럼 알지 못한다.
이 얼마나 기묘한 동요의 어지러움인가?
게다가 그것이 일생 동안 지속된다!
그래도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당신을 우리가 믿고 의지하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세 가지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늘에서는 위로 오르시며 우리를 당신과 함께 끌어올리신다.
땅에서는 날마다 우리를 인도하신다.
그리고 가장 깊은 중심에 머무르시며 그분은 끊임없이 우리를 안내하고 지켜주신다.
그리스도께서 한결같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아는, 여기에 우리의 위로가 있다.
이를 알기에 우리는 결코 아픔과 재앙으로 떨어지지 않고 다시 한번 당신의 현존하심을 얼핏 엿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온종일]
하느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신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그대는 행복과 불행이 묘하게 섞여있음을 경험하였는가?
했으면 지금 그 경험을 회상해보아라.
오늘 그런 경험이 없다면, 최근에 그런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보자.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지만, 그게 인생이다.
그 경험 속에서, 모든 것이 진실로 하느님 수중에 있음을 믿음으로 느껴보아라.
오늘, 줄리안이 말하는 어둠과 눈 멈을 경험했다면, 지금 그것을 떠올려보자.
그때 그대는 하느님을 기다릴 수 있었는가?
혹시 그 사건을 지금 다시 머리로 그려볼 수 있는가?
그려지면, 그 중심에 하느님을 기다리는 그대를 앉혀두어라.
[밤 기도]
보호자, 예수님.
제 불평과 아픔과 고민을 들어주소서.
이 어둠 속에서 당신을 저에게 보여주시고
갈수록 당신을 더욱 바라고 더욱 믿게 하소서.
어지럽고 캄캄한 중에도 거기 계시는 당신을 느끼고 알게 도와주소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이 유쾌하지 않은 선과 악의 혼합이
저를 위한 마지막 선(善)으로 작용함을 확신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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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일
[밝아오는 아침에]
우리 영은 하느님이 몸소 지으신 것이다.
창조된 무엇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다.
우리 몸을 지으실 때 하느님은 땅의 흙을 취하셨다.
흙은 땅의 온갖 속성들이 섞인 물질이요, 그것을 가지고서 하느님이 우리 몸을 만드셨다.
하지만 우리 영을 지으실 때에는 아무것도 취하지 않으셨다.
그냥, 우리 영을 창조하셨다.
창조된 모든 것이 저를 만드신 분, 자연의 본질이자 창조되지 않으신 하느님께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아무것도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
바로 이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 영은 온전히 보존된다.
영원한 사랑 안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이끌고 지켜주시니 우리는 결코 잃어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 영이 살아있음을 우리가 알기를 하느님은 바라신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고 생각하고 찬미하는 한, 이 생명이 영원토록 이어질 것임을
그분은 선하신 은총으로 우리에게 보장해주신다.
이렇게 영원히 살도록 지음 받았기에 우리는,
시간이 비롯되기 전부터 하느님의 값진 보배로 사랑받으며 그 품에 안겨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우리가 알기를 바라신다,
창조된 것들 가운데 인류가 으뜸이요 그리스도의 복되신 영이 완전한 인간의 모델인 것을.
여기에 하나 더 보태어, 그분은 우리가 알기를 바라신다,
우리의 사랑받는 영들이 참으로 정교하고 강하게 그리스도와 엮어져 있는 까닭에
결국 하느님과 결합되어 영원히 거룩하다는 것을.
[온종일]
아무것도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하루 살면서, 하느님의 인도와 보호를 받았다는 느낌이 든 순간들이 있는가?
당시에도 그런 느낌이었는가?
지금도 그런 느낌인가?
하루를 돌이켜보며, 그대의 오늘 하루가 하느님의 온전하신 사랑에 묻혀있음을 보아라.
그런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느껴지던 특별한 순간들도 그 안에 포함시켜라.
줄리안의 말에 용기를 얻어, 지금 그 정황을 다시 머리로 그려보자.
[밤 기도]
사랑이신 하느님.
저를 존재하게 하시고 당신 사랑으로 붙잡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제가 얼마나 값지게 당신과 하나로 엮어져 있는지를
몸으로 느끼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당신과 저를 하나로 묶어주는 사랑의 매듭을 알아차리고
담대히 당신 뜻을 좇아서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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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일
[밝아오는 아침에]
인류에 대한 당신의 크신 사랑 때문에 하느님은, 그리스도와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자를 차별 없이 사랑하신다.
그리스도의 복되신 영이 가장 높은 영광 가운데 계심을 믿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복되신 그리스도의 영이 머물러 계시는 바로 그곳에 구원받을 모든 영들이 또한 함께 있음을.
그러니 우리 모두, 하느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을 크게 기뻐하자.
한 걸음 나아가, 우리가 하느님 안에 있음 또한 기뻐하자.
우리 영은 하느님이 쉬시는 터로 지음 받았고 창조되지 않으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영 또한 쉼을 얻는다.
우리를 지으신 분, 하느님이 우리 영 안에 쉬심을 중심으로 아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일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위대한 일은, 지음 받은 우리 영들이 하느님 안에 쉬는 줄을 아는 것이다.
바로 그 본체(substance),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우리인 우리다!
나는 하느님과 우리의 본체 사이에서 아무 다름을 보지 못하였다.
모든 것이, 말하자면, 하느님이었다.
그래도, 우리 본체가 하느님 안에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느님은 하느님이시고,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는 피조물인 것이다.
[온종일]
우리 영은 하느님의 쉼터로 지음 받았다.
[하루를 마감하며]
줄리안은 말한다, “하느님이 우리 영 안에 거하신다.”고.
그리고 다시, “우리 영이 하느님 안에 거한다.”고.
이 두 마디를 염두에 두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오늘 하루를 돌이켜보아라.
그대는 오늘 무엇을 경험하였는가?
하느님은 그리스도와 가장 보잘 것 없는 자를 구분하지 않으신다.
다시 한번 오늘을 회상하며, 그대와 함께 있던 사람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똑같은 사랑에 붙잡혀 있었음을 기억하여라.
특히 그대 눈에 보잘 것 없어 보이던 자들,
그대의 사랑과 동정심의 울타리 안에 쉽게 들어오지 못한 자들,
그들에게 눈길을 모아 자세히 보아라.
[밤 기도]
사랑이신 주님.
저를 가까이하시는 당신 안에서 제가 기뻐합니다.
우리 사이에 놓여있는 모든 장애물을 치워주십시오.
당신을 제 가슴 속으로 환영하오니 거기서 편히 쉬옵소서.
그리고 우리의 사랑과 친밀함 속에
다른 모든 피조물이 함께 있음을 저로 하여금 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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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일
[밝아오는 아침에]
나는 분명히 보았다, 제 영을 알기보다 하느님을 알기가 더 빠르고 쉬운 것을.
그것이 너무 깊이 하느님께 박혀 있고 또 한없이 소중하기에
먼저 우리와 하나이신 창조주 하느님을 알기 전에는 우리 영을 알기를 바랄 수 없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 영보다 더 우리와 가까우시다.
하느님은 우리가 서 있는 바탕이시요 우리의 본질과 감각을 하나로 엮어 떨어지지 않게 하는 방편이시다.
우리 영은 참된 안식으로 하느님 안에 거하고
참된 힘으로 하느님 안에 서고 영원한 사랑으로 하느님 안에 뿌리 내린다.
우리 자신의 영을 알고 그것과 교제코자 한다면 그것을 감싸고 있는 하느님 품에서 그것을 찾아야 한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하느님 안으로 깊숙이 인도되어
거기서 우리 자신의 영을 진실로 알게 되기까지는
우리의 동경과 갈망에 슬픔이 따른다는 사실을.
우리 주님은, 당신 죽음의 은총과 자비를 통하여,
우리를 지으시고 구원하신 바로 그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 당신의 고결한 깊이 속으로 데려가신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히 알기까지 결코 하느님을 알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관통하여 우리 감각이 본질의 차원에까지 들어 올려질 때,
자비와 은총으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련들을 통해서 풍요로워질 때,
비로소 우리 영은 그 꽃을 활짝 피워낼 것이다.
[온종일]
하느님은 우리 영보다 더 우리와 가까우시다.
[하루를 마감하며]
그대 존재의 신비를 잠시 묵상하여라.
줄리안은 말한다, 하느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자기 영을 알 수 없다고.
하느님을 그대 존재의 참 바탕으로 아는 것이 어떻게 그대의 자아상(self-image)을 바꿔놓을 것인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남들한테서 그리고 하느님한테서 동떨어진 존재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느님을 우리 영이 서 있는 바탕으로 본 줄리안의 환상을 잠시 묵상하자.
하느님은 우리보다 더 우리와 가까운 분이시다.
이 앎이 그대의 모습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밤 기도]
너그러우신 하느님.
제 존재의 바탕이 되소서.
제가 과연 참된 안식으로 당신 안에 거하고
참된 힘으로 당신 안에 서고
영원한 사랑으로 당신 안에 뿌리내릴 수 있을까요?
당신을 더욱 밝히 저에게 보여주시어
제 본성을 좀더 잘 알고
제 본성에 어울리는 행동을 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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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일
[밝아오는 아침에]
하느님은 우리의 본질을 고상하고 풍요롭게 지으시어 언제든지 당신 뜻 안에서 당신 영광을 위해 일하게 하셨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우리 모두 그분의 사랑하는 피조물로서 언제 어디서나 그분이 기뻐하실 일을 하고 있음을.
그리고 또 나는 보았다, 우리 영이 우리 몸에 스며들 때 함께 주어진 그분의 풍요로움과 고상함 때문에 그럴 수 있음을.
이 합일을 통해서 우리는 육감(sensuality)을 지니게 되었다.
본질상 우리는 아무 부족함이 없지만 육감(肉感)으로는 실패하였다.
그래도 하느님은 자비와 은총으로 우리 실패를 좋게 바꾸시어
당신의 선하심으로부터 그것이 우리 안으로 흘러들게 하실 것이다.
나는 보았다,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당신이 하신 일과 장차 이루실 일을 모두 알고 계셨음을.
그분은 사랑으로 인류를 창조하셨고 사랑으로 인간의 본성을 채우셨다.
믿음은 그 다음으로 우리가 받은 선물이고 믿음에서 모든 축복이 흘러나오는데,
우리 본질이 우리 영혼에 부여한 풍요에서 믿음이 샘솟는다.
자비와 풍요를 통해 일하시는 하느님의 선(善)이 믿음을 우리 안에 심고 우리를 믿음 안에 심으신다.
믿음에서 모든 선한 것들이 흘러나오고 그것들로 우리는 인도되고 구원받는다.
하느님의 선하심이 우리 본질에서 끌어내는 덕행들은 자비로 일하시고 은총으로 회복하시는 성령의 선물이다.
이 덕행과 선물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보물이다.
동정녀 자궁에서 당신을 인간과 하나로 만드실 때 하느님은 우리의 육감도 취하셨다.
당신을 모든 사람과 하나로 만드시는 그리스도는 온전한 사람이시다.
[온종일]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그분이 기뻐하실 일을 하고 있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그대는 언제 하느님의 사랑을 느꼈는가?
그대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더욱 민감하도록 그 느낌이 도움을 주었는가?
그대 자신의 육감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늘, 그대의 감각을 통하여 어떻게 하느님을 경험하였는가?
그대의 하느님 찾기가 형체 없는 것들에 제한되어 있지는 않는가?
그대는 어떻게 하느님을 찾을 수 있겠는가?
감촉? 냄새? 맛? 들음? 봄?
[밤 기도]
한결같으신 하느님.
당신은 저보다 더 저와 가까우십니다.
당신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에서 당신의 기쁨을 느끼게 도와주십시오.
자비와 은총으로 저를 수술하시어 모든 부족함을 채워주시고
당신의 선(善)을 제 안으로 흘러넘치게 부으소서.
어떻게 당신이 제 영혼을 들어올리시고 당신 안에 온전히 삼켜
사랑으로 영원히 하나 되게 하셨는지, 보여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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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일
[밝아오는 아침에]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으로 축복받은 몸이다.
하지만 그 반대를 경험하지 않았더라면 그것이 얼마나 선(善)한 것인지를 몰랐으리라.
선에 반하여 악이 일어나도록 허용되었기 때문에 자비와 은총이 악에 반하여 일어나서 그것을 선으로 바꾸었다.
악에 반하여 선을 세우신 예수는 우리 어머니시다.
바로 이 모성과 그에 따른 보호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우리는 그분에게 빚진 몸이다.
하느님이 분명한 아버지이신 것처럼 그렇게 분명히 하느님은 우리 어머니시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달콤한 말씀으로 일러주신다.
“나는 아버지의 힘이요 선(善)이다.
나는 어머니의 지혜다.
나는 빛이요, 은혜요, 사랑스런 사랑이요, 삼위일체요, 일체의 통합이다.
나는 온갖 피조물의 타고난 선(善)이요 내가 너를 사랑으로 당기고, 내가 너에게 갈망을 준다.
나는 모든 욕망의 끝없는 충족이다.”
우리를 지으신 예수는 본성으로 우리의 참 어머니시다.
또한 그분은 은총으로도 우리의 어머니시다.
창조된 우리 본성을 스스로 취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사랑스런 행실과 다정한 보살핌을 그분 안에서 우리는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머니 하느님을 알아보는 세 가지 길을 안다.
첫째, 하느님을 통하여 지음 받은 우리 존재.
둘째,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본성이 교육을 받고 그로써 시작되는 은총의 모성(母性).
셋째, 하느님한테서 흘러나와,
그 길이와 넓이와 높이와 깊이가 영원히 지속되는 동일한 자비로 만물을 감싸주는 어머니 손길.
바로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인 것이다.
[온종일]
내가 너를 사랑으로 당기고, 내가 너에게 갈망을 준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그대는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였는가?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 그대는 어떻게 아버지 하느님을 경험했는가?
어머니이신 하느님을 어떻게 만나 뵈었는가?
하느님을 어머니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하느님과 그대의 관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다줄 것인가?
[밤 기도]
사랑하올 하느님.
아버지의 힘이자 어머니의 지혜요,
온갖 복된 사랑이요, 삼위일체요, 일체의 통합인 빛과 은총이시여,
저로 하여금 당신을 갈망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할 수 있게 하시고
모든 참된 욕망의 충족이신 당신을 찾도록 영감을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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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일
[밝아오는 아침에]
더없이 사랑스럽고 더없이 자연스러운 어머니의 보살핌은 우리에게 더없이 친밀하고 더없이 믿음직하다.
분명코 그것은 우리가 아는 가장 진실한 보살핌이다.
그리고 그 보살핌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우리 주 예수시다.
우리는 안다, 고통과 죽음을 무릅쓰고 육신의 어머니들이 우리를 낳는다는 것을.
하지만 우리의 참 어머니는 무엇을 하시는가?
오직 그분만이 기쁨과 영생을 위해 우리를 잉태하신다.
그리하여 날카로운 가시에 찔리는 고통의 때가 익기까지 그분은 당신 안에 사랑과 아픔을 간직하셨다.
그러고 마침내 죽으셨다.
그러나 그 모든 일이 지나가고 우리가 영원한 행복을 누릴 때에도 그분의 사랑은 아직 채워지지 아니한다.
놀라운 사랑의 말씀을 듣고서 나는 이를 알았다.
“더 많은 고통을 내가 겪어야 한다면, 얼마든지 겪으리라.”
그분은 다시 죽을 수 없게 되셨지만 그러나 그 사실이 당신 뜻을 가로막진 못한다.
우리를 향한 어머니로서의 사랑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어떻게든지 먹여 살리려고 하신다.
육신의 어머니는 자기 젖으로 아이를 먹이지만 어머니 예수는 당신 자신으로,
복된 성사 안에서 정성으로 우리를 먹여 기르시니, 이는 값을 매길 수 없는 영생의 양식이다.
그리고 온갖 성사를 통하여 그분은 자비와 은총으로 우리 여정을 함께 하신다.
육신의 어머니는 자기 가슴으로 아이를 안아주지만
어머니 예수는 당신 옆구리 상처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 가슴으로 인도하시고,
거기서 우리는 하느님과 하늘의 기쁨을 훔쳐보며 영원한 행복을 누린다.
[온종일]
어머니 예수는 당신 자신으로 우리를 먹이신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그대는 어떻게 어머니 하느님을 경험하였는가?
예수의 수난을 줄리안은 해산하는 어머니의 산통(産痛)으로 본다.
오늘 그대를 낳기 위하여 하느님은 어떤 고통을 겪으셨는가?
오늘 예수는 어떻게 그대를 먹이셨는가?
그대가 오늘 그리스도의 양식을
다른 방식으로 다른 장소에서 받아먹었는지, 돌이켜보아라.
[밤 기도]
깊은 사랑의 어머니.
저를 다시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당신을 저의 일용양식으로 주셔서 고맙습니다.
섬김을 통하여 건강한 생명으로,
말씀을 통하여 힘과 은혜로,
거룩한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선(善)하심으로,
당신은 저를 먹여 기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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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일
[밝아오는 아침에]
가끔 어머니는 아이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서는 고생을 하게 내버려둔다.
아이 자신을 위해서다.
하지만 어머니는 아이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진짜로 위험한 일이 일어나게 버려두지는 않는다.
땅의 어머니들은 아이가 자기 눈앞에서 죽어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아야 할 경우가 있지만,
하늘 어머니 예수님은 당신 자녀들의 파멸을 결단코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분 홀로 전지전능하시고 조건 없는 사랑으로 만인을 사랑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허물과 비열함이 깨우쳐질 때마다 너무나 부끄럽고 겁이 나서 어찌 할 바를 모른다.
그래도 참을성 많은 우리 어머니는 우리가 도망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럴 때마다, 우리가 아이처럼 행동하기를 그분은 바라신다.
무슨 일로 겁이 났을 때 아이는 어머니한테로 힘껏 달려간다.
그럴 수 없는 처지면, 도와달라고 어머니를 소리쳐 부른다.
우리 모두 아이처럼 낮아져서 어머니를 부르자.
“죄송해요, 어머니.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어요.
어머니의 도움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비록 즉석에서 안도감을 느낄 순 없더라도, 자비로운 어머니 예수님이 우리를 돌봐주심을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얼마 동안 고통과 눈물이 우리의 유익을 위해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때가 되기까지,
우리로 하여금 아프게 울도록 내버려두신다.
크신 자비와 연민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어머니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는 아이처럼 되기를 그분은 우리에게 바라신다.
어머니 예수님의 손길은 끊임없이 우리를 감싸고 보호하신다.
우리 주님은, 오로지 환자의 안전을 위할 따름인 착한 마음의 간호사 같다.
[온종일]
그분은 우리가 아이처럼 행동하기를 바라신다.
[하루를 마감하며]
아침에 읽은 글이 그대에게 무슨 느낌을 주었는가?
저항감을 안겨주었는가?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는가?
아니면, 위로가 되었는가?
다시 들어보아라,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어린아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오늘 그대는 어머니 하느님한테로 달려간 때가 있었는가?
그런 적이 전에는 있었는가?
그대 지난 생애를 돌이켜보아라.
당시에는 미처 몰랐지만, 돌아보니 그때가 그대에게
성숙을 위한 기회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런 때가 있는가?
[밤 기도]
어머니 예수님.
당신은 자녀인 우리의 파멸을 결단코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언제나 제 곁에 계시며 저를 도우시는 당신을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당신의 자비와 은총이 언제나 저를 지켜주시고,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마침내 저를 위한 선(善)으로 바뀔 것임을 믿게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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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일
[밝아오는 아침에]
참되신 어머니 예수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의 전능하심과 성령의 선하신 다스리심과
모든 것을 미리 아시는 창조되지 않은 지혜에 존재의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
인간의 본성을 스스로 취하신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셨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우리를 영생으로 데려가신 것이다.
그 순간부터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분은,
어머니의 사랑이 아이의 욕구를 알뜰하게 채워주듯이 우리를 먹여 기르고 보살펴주신다.
우리 영들이 보기에, 그리고 당신 스스로 보시기에도, 하늘 어머니야말로 아름답고 다정한 분이시다.
아이들이 나면서부터 겸손하고 온유하듯이 하늘 어머니의 사랑스런 자녀들도 귀엽고 아름답다.
천성으로 아이는 어머니 사랑에 실망하지 않는다.
또한 천성으로 자기를 신뢰하지도 않는다.
어머니는 본능으로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도 본능으로 어머니를 사랑한다.
이 아름다운 성품과 기질이 우리의 하늘 어머니를 기쁘시게 해드린다.
자애로우신 어머니가 우리를 아버지의 지복(至福)으로 들어올리실 때까지
이 생에서는 연약하고 무지하고 무능한 아이가 가장 높은 경지에 있다.
바야흐로 아버지의 지복에 들어갈 때 거기서 우리는 다음의 달콤한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되리라.
“모두가 잘 되리라.
모든 일이 다 잘 되는 것을 네 눈으로 보게 되리라.”
[온종일]
이 생에서는 연약하고 무능한 아이가 가장 높은 경지에 있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어머니 하느님은 어떻게 그대를 먹이고 기르셨는가?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쉬울까?
어려울까?
만족하는 삶?
자기를 낮추는 삶?
오늘 그대는 어머니 하느님을 얼마나 의존할 수 있었는가?
어떻게 하면 그분을 더욱 의존할 수 있을까?
[밤 기도]
사랑이신 어머니.
아이 같이 당신 품에 안겨 쉴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소서.
저로 하여금, 행복을 위하여 당신한테 의존하고
안녕을 위하여 당신께로 달려가게 하소서.
당신이 저를 아버지의 지복으로 마침내 들어올리시리라는 것을 알고
저의 무능력을 절감하며 당신 품에 안겨 기뻐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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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일
[밝아오는 아침에]
그러고 나서 좋으신 하느님은 내 영의 눈을 열어 내 가슴 속에 있는 나의 영을 보여주셨다.
한없이 넓게 펼쳐있는 내 영을 나는 보았다.
그것은 복되신 하늘나라를 닮기도 하였다.
그 중심에 멋지고 크신 우리 주님이 환한 영광을 입고 앉아 계시는 놀라운 도성이었다.
마땅한 평화와 안식 속에서 그분은 우리 영들 안에 당신 거처를 마련하시고,
바로 그 자리에서 창조된 모든 것을 다스리신다.
그분은 몸소 우리 안에 마련하신 당신의 영원한 처소를 언제까지나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하느님이 우리 영들을 창조하면서 그 안에 당신의 기쁨을 두셨음을 보여준다.
다른 모든 피조물이 경이로운 모습으로 만들어졌듯이
하느님과 아드님과 성령님께서는 우리 영들도 그런 모습이기를 바라신다.
그리하여 나는 마침내 알았다, 우리 영들이 저보다 낮은 수준의 것들 안에서는 결코 안식할 수 없음을.
그리고 그것이 모든 피조물을 넘어 제 속으로 들어올려질 때
그 눈길이 오직 하느님께만 고정되는 까닭에 다른 무엇에서도 만족을 얻을 수 없으리라는 것을.
하느님은 우리 안에 거하는 창조주시요, 사람 영혼 속에 하느님의 참된 거처가 있다.
[온종일]
하느님은 몸소 우리 안에 당신의 영원한 거처를 마련하신다.
[하루를 마감하며]
무엇이 오늘 그대 영혼을 하느님께로 들어올렸는가?
그대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낀 순간들이 오늘 있었는가?
그분의 현존을 느끼지 못한 때는 있었는가?
오늘 그대 안에서 하느님의 기쁨을 어떻게 경험했는가?
[밤 기도]
주 예수님.
제 영을 당신 거처로 삼으시니 영광입니다.
제 안에 있는 당신의 기쁨을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이웃을 향한 저의 행동이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사랑을 거울처럼 되비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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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일
[밝아오는 아침에]
하느님은 내 영의 눈을 열어주시고 내 가슴 속에 있는 나의 영을 보여주셨다.
그것은 영원한 세계만큼 넓고 복된 영역이었다.
그 영의 도성에서 가장 환하게 빛나는 가장 큰 빛은 하느님의 영광스런 사랑이다.
피조물 가운데 피조물인 사람 안에서 기뻐하시는 하느님 말고
우리가 어디에서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겠는가?
같은 환상 가운데 나는 또 보았다, 복되신 성삼위께서
우리 영을 이토록 좋게, 아름답게, 고상하게 만들지 않으셨다면
하느님도 우리가 만든 것들에 기뻐하고 만족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몸소 우리를 이토록 아름답고 이토록 선하고 이토록 값지게 만드셨기에
우리 영이 창조한 것들 안에서 한없이 기뻐하신다.
성삼위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그 허무한 고통에서 하느님 안의 기쁨으로 들어 올려지기를 바라신다.
이 즐거운 계시에는 끝이 없다.
하느님은 우리가 아직 땅에 있을 때에도 당신 안에서 안식하기를 바라신다.
하느님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그분을 닮게 된다.
그리고 은총을 통하여 그분과 평화 안에서 하나로 된다.
앉은 자세가 그 자리에 영원히 든든히 거하심을 뜻하기에 좌정하신 하느님을 뵙고 나는 특별히 기뻤다.
하느님은 이 모든 것을 보여주신 분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당신이심을 내게 확인시켜주셨다.
[온종일]
하느님을 깊이 묵상할 때 우리는 그분을 닮게 된다.
[하루를 마감하며]
시간을 내어 얼마 동안 주님 안에서 휴식을 취하여라.
그대 가슴 속에 앉아계신 예수님 모습을 그려보고
거기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감각을 알아차려라.
[밤 기도]
은혜로우신 주님.
당신이 저에게서 취하시는 기쁨을 보여주시니 고맙습니다.
저를 당신의 거처로 삼으신 바로 그 사실이 저에겐 더없이 큰 기쁨입니다.
당신을 생각하는 저의 깊은 묵상이 저로 하여금 당신을 닮아가고
당신의 영광스런 창조세계에서 더 많은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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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일
[밝아오는 아침에]
하느님은 내게 두 가지 영적 질병을 보여주셨다.
하나는 영의 맹목이고 다른 하나는 육의 게으름이다.
우리를 이 병에 걸리지 않게 하려고 주님은
어떻게 당신이 고난을 견디셨으며,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에,
그 고통 가운데서 오히려 기뻐하셨는지를 보여주셨다.
기쁘고 슬기롭게 고난을 견딜 수 있는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대개 고통이 우리를 짓누르는 것은 사랑에 대한 우리의 무지 탓이다.
우리는 지난날을 걱정하고 이미 저지른 일에 대한 죄의식으로 괴로워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가 사랑을 통해서 모든 것을 보고 그리하여 범사에 기뻐하기를 바라신다.
전능하신 하느님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이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음을 모른다.
이 무지야말로 하느님의 연인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이다.
죄를 미워할 때조차 죄에 대한 두려움을 속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더 이상 위로받을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고 스스로 좌절하여 절망에 빠져드는 것이다.
게다가, 이 공포를 우리는 겸손으로 착각한다.
이 착각이야말로 지독한 맹목이요 어리석음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의 한결같은 사랑을 확신하고 그 안에서 크게 기뻐하기를 바라신다.
그분은 당신 사랑의 힘과 지혜를 우리 수준까지 끌어내리신다.
우리가 회심할 때 하느님은 너그러이 우리 죄를 잊어주신다.
그런즉 우리도 우리 죄를 잊고서 그것이 안겨주는 죄의식과 함께 근심걱정 등지고 떠나기를 하느님은 바라신다.
[온종일]
우리가 우리 죄 용서하기를 하느님은 바라신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그대는 사랑 안에서 기쁨을 발견하였는가?
오늘, 그대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을 어떻게 경험하였는가?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용서해주신 그대의 모자람, 잘못, 허물에 대하여 잠시 묵상하여라.
[밤 기도]
주 예수님.
당신 사랑 안에서 제가 기뻐합니다.
그 사랑에 대한 저의 믿음을 키우시어
모든 두려움과 절망을 떨쳐버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으로 인하여,
그 무엇도 우리 사이에 끼어들 수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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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6일
[밝아오는 아침에]
하느님이 우리를 온전하게 돌보시는 것을 나는 보았다.
또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셋 있는데 그것들이 우리를 사랑으로 목마르게 한다는 것도 나는 보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첫째는 사랑 자체다.
그 다음은 사랑의 그리움(langui shing)이요 나머지 하나는 사랑의 연민(compassion)이다.
사랑의 연민은 궁핍한 시절에 우리를 보호하고 사랑의 그리움은 우리를 하늘로 끌어당긴다.
우리 모두가 당신께로 끌어당겨지기를 하느님은 목마르게 바라신다.
바로 그 목마름이 당신의 거룩한 자들을 지복(至福)으로 당긴다.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끊임없이 당기고 들여 마시는데도, 그런데도 하느님은 여전히 목말라하시고 그리워하신다.
나는 또 하느님이 세 가지 방식으로 염원하시는데 그 모든 염원에 동일한 목적이 있음을 보았다.
첫째, 그분은 우리가 당신을 더욱 잘 알고 사랑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가르치고자 하신다.
둘째, 그분은 우리가 당신의 지복을 남들과 나누어 그들도 고통에서 벗어나 하늘로 들어올려지기를 바라신다.
셋째, 그분은 우리가 마지막 날에 누릴 영원한 행복으로 지금 여기에서도 충만하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마지막 날에 구원받은 이들에게서 모든 아픔과 괴로움이 사라지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리고 이미 하늘에 있는 이들이 맛보는 것과 같은 행복을 우리가 받게 될 뿐 아니라,
그와 동일한 새로운 행복을 지금 여기에서도 얻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보았다.
그 행복은 하느님한테서 흘러나와 우리를 가득 채울 것이다.
[온종일]
우리 모두가 당신께로 끌어당겨지기를 하느님은 목마르게 바라신다.
[하루를 마감하며]
그대를 그리워하는 하느님을 상상으로 그려보아라.
그 사랑의 애절한 동경을 느낄 수 있는가?
오늘 그대는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을 언제 느꼈는가?
그대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생각이
오늘 힘든 일을 겪는 동안 그대에게 어떤 도움을 주었는가?
[밤 기도]
자애로우신 주님.
제 속에서 당신이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저에게 가르쳐주소서.
저로 하여금 당신 사랑을 끊임없이 느낄 수 있게 하소서.
이 몸을 슬픔에서 끌어내어,
제게 부으시는 당신의 크신 사랑을 아는 행복으로 데려가소서.
그리고 만나는 모든 이들과 당신의 사랑을 나누게 저를 도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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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일
[밝아오는 아침에]
하느님이 말씀하신다.
“지나치게 너 자신을 책망하지 마라.
네가 겪는 고통과 재난이 네 잘못 탓이라고 생각하지 마라.”
네가 무엇을 하든지, 고통은 너를 따를 것이다.
세상은 감옥이고 인생은 고행(苦行)이다.
하지만 그 고행이 헛된 것은 아니니 우리는 벌써 치유의 기쁨을 누리고 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인도하여 옹근 기쁨으로 데려가시는, 이것이 치유다.
지금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느님이 장차 우리에게 더없는 복이 되어주실 것임을 아는 데 무한한 기쁨이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길이시고, 참 사랑 안에서 우리의 운명이시며 우리 몸을 의지할 도피처시다.
그러니 주님께로 날아가 위로를 받자.
그분을 만져서 깨끗해지고 그분께 매달려 모든 위험에서 안전해지자.
예절바르신(courteous) 주님은 우리가 당신과 스스럼없기를 바라신다.
그것은 우리가 가슴으로 생각하고 영혼으로 바라는 바다.
하지만, 함부로 굴다가 우리 예절을 잊는 일은 없도록 하자.
하느님은 다정하면서도 그만큼 예절에 엄숙한 분이시다.
실로 그분은 예의범절 그 자체시다.
그리고 그분은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이 만사에 당신을 닮고
참된 구원이요 지극한 기쁨이신 우리 주님을 완벽하게 닮기를 바라신다.
[온종일]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이것이 치유다.
[하루를 마감하며]
하느님이 그대와 함께 계심을 아는 지식이
오늘 그대에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가?
그 사실을 까맣게 잊은 때가 오늘 있었는가?
그렇다면, 지금 그 때를 회상하면서,
하느님이 그대와 함께 계신다는 생각으로 그 상황을 다시 그려보아라.
어떤 변화가 느껴지는가?
힘들었지만 유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어려운 일들이 오늘 그대에게 있었는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그대에게 과연 도움을 주는가?
[밤 기도]
예절바르신 주님.
오늘 하루 당신의 현존하심에 감사드립니다.
모든 것이 저를 당신께로 인도하고
당신은 저를 지복으로 인도하여
거기서 큰 기쁨을 누리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도록 도와주소서.
저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을 이웃과 나누게 하시며,
당신의 자애로우심이 어떻게 저를 들어올리시는지를 저들이 알고
제 안에서 만물에 베푸시는 당신의 사랑을 느끼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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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일
[밝아오는 아침에]
하느님은 우리가 네 가지 진실에 대하여 알기를 바라신다.
첫째, 그분은 우리 생명과 존재의 바탕이시다.
둘째, 그분은 우리가 죄를 짓고 사나운 적들에 포위되어 있을 때,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지도 모르고 적에게 공격의 기회를 주어 위기를 자초할 때, 당신의 능력과 자비로 우리를 보호하신다.
셋째, 그분은 우리가 잘못된 길로 갈 때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일깨워주신다.
넷째, 무엇보다도 하느님은 우리가 당신께로 돌아와,
당신이 우리와 하나이듯이 우리도 당신과 하나 되기를 바라시는 까닭에,
화를 내거나 등을 돌리지 않고 끝까지 참으며 기다리신다.
통찰과 은총을 통하여 우리는 자기 죄를 깨닫는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우리를 해치거나 절망으로 몰아넣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초라한 지식을 통하여, 하느님한테서 오지 않는 것들로부터 우리가 추려지겠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예수님은 우리를 완전히 치료하시고 당신과 우리를 하나로 만드실 것이다.
당신이 마련하실 이 대역전과 치유를 주님은 미리 내다보셨고,
그래서 위대한 성인들이 나와 함께 자신들의 죄와 부족함을 알게 되었고
하느님의 백성 가운데 가장 작은 내가 위대한 성인들과 함께 위로받을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은 무한 사랑으로 우리를 하나 되게 하신다.
[온종일]
우리는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지도 모른다.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그대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경험하였는가?
하느님의 보호하심을 느꼈는가?
하느님의 치유는?
하느님의 친절은?
오늘 그대의 죄짓기 쉬운 약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는가?
자신의 부족함을 경험하였는가?
그렇다면, 그것들을 기도로 하느님께 바쳐라.
[밤 기도]
사랑하올 주님.
제 존재의 바탕이요 희망으로 저와 함께 계셔주소서.
잘못하여 나쁜 길로 빠질 때 저를 지켜주소서.
넘어질 때 저를 일으켜 세우시고
저의 부족을 스스로 알게 도와주시며
오직 당신께로 돌아가 위안을 얻도록 가르쳐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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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일
[밝아오는 아침에]
우리는 잠시 동안의 덧없는 인생에서 끝없는 날(endless day)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인도를 받는다.
그 빛으로, 우리 어머니 그리스도와 함께 성령님이 우리를 지휘하신다.
하느님은 섭리에 따라 당신 빛을 우리에게 비추시어 캄캄한 밤중에 길을 찾게 하신다.
그 빛이 우리를 살아있게 한다.
어둠 속에서 우리의 아픔과 슬픔은 비롯되지만, 우리가 빛을 믿고 당신의 자비와 은총에 감사하면서
지혜와 힘을 받아 빛 속을 걷고 있기에 하느님은 절망 속에서도 우리 곁에 계신다.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님을 통하여 빛나는 하느님, 그분이 바로 빛 자체이신 까닭에,
슬픔의 끝에서 눈이 열리면, 마침내 우리가 온 세상을 가득 채우는 그 빛을 밝히 보게 될 것이다.
이 빛이 곧 사랑이요,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하느님의 지혜가 그것을 나누어 준다.
그 빛이 아직은 지복의 날을 볼 수 있을 만큼 밝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한테서 아주 감추어져 있는 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안에서 제대로 살 수 있고 하느님의 영광을 입으려고 애쓰는, 바로 그 빛이다.
그런즉, 믿음과 소망이 우리를 사랑으로 인도하면 마침내 모두 것이 사랑으로 되리라.
[온종일]
마침내 모든 것이 사랑으로 되리라.
[하루를 마감하며]
오늘, 그대의 삶에 믿음의 빛이 언제 비추었는가?
그때 즉시 그것을 알아차렸는가?
돌이켜보아라.
그대가 모르게 빛이 비추어진 때는 있었는가?
오늘, 어디에서 그분의 사랑이 그대에게 나타났는가?
그대는 어떻게 하느님 사랑을 경험하였는가?
어떻게 하느님의 사랑을 남들에게 보여주었는가?
[밤 기도]
자애로우신 주님.
하루가 저물고 밤이 드리워집니다.
어둠 속에서 당신의 빛을 발견하게 도와주소서.
당신의 현존하시는 사랑에 깨어있도록 일깨워주소서.
저를 믿음으로, 믿음에서 소망으로 이끄시고,
모든 것이 당신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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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일
[밝아오는 아침에]
어둠 속에 있는 우리에게는 ‘믿음’이 영원한 날(eternal day)이요 하느님의 빛인 것을, 나는 보았고 알았다.
자애로운 사랑인 이 빛을 하느님의 지혜가 우리에게 나누어 준다.
지금 우리가 지복(至福)의 날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이 크게 이상할 것 없다.
우리는 지금 빛 속에서 제대로 살고 있으며 오히려 하느님이 그로 인하여 고마워하실 만하다.
“네 섬김과 수고가 고맙다.”고 그분이 말씀하실 때, 나는 이 비밀을 알았다.
그 말씀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의아했다.
하지만, 이 생에서 저지른 온갖 어리석음과 맹목에도 불구하고,
자애로우신 하느님은 우리를 돌보시고 우리 영혼을 통해 이루신 당신의 일을 기뻐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지혜와 진실 안에서 그분을 믿고
그분 안에서 그분과 함께 기뻐함으로써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다.
찬양과 감사로 영원히 하느님과 하나 될 몸인 우리는 실로 창세전부터 그분의 사랑과 인정을 받아왔다.
이 한결같은 사랑으로 그분은 우리를 지으셨고 같은 사랑으로,
행복을 앗아갈 모든 상처에서 우리를 지키고 구원하신다.
그리하여 마지막 날 하느님을 얼굴과 얼굴로 마주 뵐 때
우리는 자애로우신 하느님을 알게 될 것이고, 지금은 감추어져 있는 모든 신비들이 드러나리라.
그러면 더 이상 아무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 것이다.
“주님, 일이 그리 되지만 않았으면 모두가 잘 됐을 텐데요.”
오히려 우리는 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리라.
“복되신 이름의 주님!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옳고 좋습니다.
모든 일이 창세전에 세우신 당신의 계획에 따라서 일어난 것임을 이제 우리가 알겠습니다.”
[온종일]
모든 일이 창세전에 세우신 당신의 계획에 따라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루를 마감하며]
그대가 살면서 경험한 믿음의 행위를 돌이켜보아라.
그것이 어떻게 보이는가?
그것이 그대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그것이 그대의 생활방식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가?
오늘, 그대의 행복을 위한 하느님의 관심을 경험하였는가?
그것을 모른 채 지나가거나 심지어 그것에 절망한 때를 기억할 수 있겠는가?
오늘 아침에 읽은 글의 마지막 몇 줄을 다시 읽어보고 잠시 그것들을 묵상하며 앉아 있어라.
어느 한 줄 또는 한 단어가 마음에 와 닿으면 계속 음미해보아라.
평안하게 쉬면서, 줄리안의 마지막 말이 주는 희망을 즐겨라.
[밤 기도]
주님, 우리를 향하신 당신의 선한 계획을 더욱 믿고 더욱 신뢰하게 하소서.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결국 저에게 가장 좋은 일로 마감될 것을 굳게 믿고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선하심을 찬미하도록 도와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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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한 마디
이 책은 영적 교사들의 지혜로 들어가는 문, 그대의 영적 오솔길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려고 만들어진 것이다.
노르위치의 줄리안을 더욱 깊고 가깝게 따르고 싶은, ‘하느님을 경험한 사람’으로 받아들일 생각이 있다면
그의 저서 ‘계시’(Showings)를 직접 읽고 그 책으로 기도해보기 바란다.
혹시 줄리안의 경험이 그대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되거든,
그대의 영적 여정에 특별한 도움과 가르침을 줄 다른 많은 교사들이 어딘가에 있을 터이니,
그들 가운데서 그대의 스승을 찾으면 그대가 가야 할 길을 바로 찾게 될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하듯이, 우리가 먼저 찾아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찾으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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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위치의 줄리안, 그녀는 누구인가?
우리는 신비주의자 노르위치의 줄리안에 대하여, 그녀가 미치는 큰 영향력에 견주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심지어 줄리안이 그녀의 본명인지 아닌지도 모른다. 그녀가 노르위치 성(城) 안에 있는 줄리안 교회 가까이 살았으므로 그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녀는 14세기 후반에 살았고 영어로 글을 쓴 최초의 여성으로 알려졌다. 시인 초서(Chaucer)와 동시대인인 그녀의 우아하고 명징한 문장은 보물처럼 귀하게 소장되어있다.
그녀는 두 버전으로 된 한 권의 저술을 남겼는데, ‘Showings’(계시, 보임)라는 이름의 버전은 그녀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환상(Vi sion)과 그에 대한 본인의 견해를 서술한다. 주요 환상을 본 것이 1373년 5월이었고 얼마 뒤에 첫 번째 짧은 버전이 출판되었다. 그 뒤로 이십 년쯤 지나 두 번째 버전이 나왔는데 앞의 것보다 분량이 길다. 이 책에 수록된 인용문들은 대부분 두 번째 버전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여기서 잠시, 줄리안 당시의 세계 형편을 살펴보는 것이 좋겠다. 비록 은둔자였지만 그녀가 전적으로 세상을 떠나서 산 것은 아니었다. 줄리안은 노르위치 성에 있는 교회와 인연이 있는 오두막에 살았다. 현대인이 상상하는 은둔자의 처소는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작은 예배당의 딱딱한 침대와 기도대(prie-dieu)가 겨우 있는 구석방이겠지만, 줄리안은 담장이 있는 정원의 아담한 방에서 살았던 것 같다. 당시 은둔자들은 약간의 사유재산과 가축을 소유할 수 있었고 손님을 치를 수도 있었다. 대부분 시간을 기도와 묵상으로 보낼 수 있을 만큼 단순하게 살았지만, 우리가 상상하듯이 열악한 주거환경은 아니었다.
그녀 집 밖으로 큰길이 지나갔고, 줄리안은 자기를 찾는 바깥사람들에게 영적 지도와 조언을 주기도 했다. 그녀만큼 신성한 경지에 들지는 못했지만 영국 역사상 처음으로 자서전을 남긴 마저리 켐프(Margery Kempe)도 그들 가운데 하나였다. 줄리안은 오두막에 혼자 살지 않았다. 하녀가 있었고 애완동물도 있었던 것 같다.
노르위치는 번잡한 항구였다. 살기 힘든 시절이었다. 전염병이 거푸 도시를 휩쓸었고 질병과 좋지 못한 날씨가 기근을 가져다주었다. 교회 또한 세 교황의 권력다툼으로 난파선처럼 흔들렸다. 백년전쟁(영불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고, 교회 개혁을 부르짖던 존 위클리프와 그 추종자들이 이단으로 몰려 화형에 처해졌다. 그들 가운데 누군가 줄리안의 집 앞으로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는지도 모른다. 줄리안은 비록 담장으로 둘러싸인 오두막에 살았지만 상아탑에 앉아있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배움의 장(場)으로부터 격리된 것도 아니었다. 집에서 길 하나 건너면 오스트리아인 수도원이 있었으므로 그곳을 방문하여 책을 빌려 보거나 수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은 자연스러운 추측이다. 또한 가까운 거리에 여자들의 공동체들도 있었다. 비귄(Beguines)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교회 개혁을 모색하는 여성운동조직이 그들 가운데 하나였을 수도 있다.
줄리안이 환상을 본 것은 하느님께 세 가지 특별한 은혜를 달라고 기도할 무렵이었다. 첫째, 그녀는 특별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분이 받으신 고통을 똑같이 받게 해달라고 청하지는 않았지만, 현장에 있는 한 목격자의 느낌을 그대로 느껴보고 싶었다. 둘째, 그녀는 본인이나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생각할 정도의 극심한 병고를 겪고 싶어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경험을 관통하여, 자기를 온전히 하느님께 내어드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끝으로 그녀는 “참회가 주는 상처, 연민이 주는 상처, 자기 의지로 하느님을 갈망하는 데서 오는 상처,” 이상 세 가지 상처를 몸에 지니고 싶어 했다.
소원들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줄리안은 ‘Showings' 여기저기에서 자신의 질병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환상으로 본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생하고 감명 깊게 묘사한다. 세 가지 상처는 그녀에게 자기가 본 환상을 남들과 나눌 수 있도록 허락한다.
수년 뒤에 자신의 경험들을 회상하면서 줄리안은 더욱 더 그것들을 신뢰할 수 있게 되었고, 거의 성경에 버금가는 텍스트로 활용하게 되었다. 다른 많은 신비주의자들처럼, 직접적인 하느님 체험이 그녀로 하여금 당시의 유행하는 신앙생활 패턴을 바로잡고 기독교 공동체를 예수의 본디 계시(original revelation)에 좀더 일치시키는 노력을 하게 만들었다.
현대의 독자들에게조차 줄리안은 기독교의 일반적 교리에 놀라운 도전을 한 인물로 보일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가 ‘건강하지 않은 영혼’―세상과 하느님을 죄와 심판의 언어로 보는―이라고 부른 범주에 속한 많은 기독교인에 견주어, 줄리안은 ‘건강한 영혼’의 모범이 될 만한 존재다. 그녀에게는 사랑과 기쁨이 하느님 체험의 모든 것이었다. 그대가 천주교인이든 개신교인이든 간에 청교도적 기독교를 배경으로 삼고 보면 줄리안의 말과 생각에서 큰 충격을 받겠지만, 그녀가 천주교 전통에 속한 사람임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치명적 질병은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회심 체험을 안겨주었다. 기독교인의 회심이란 본디 죽음과 부활의 패러다임으로 형상화되는 것이다. 그 경험은 세례로 시작되지만 평생토록 지속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죽음 체험은 지난날의 모든 것에 대하여 죽고 그것들을 떨쳐버리는 것이다. 죽음에서 살아나는 부활은 새로운 시작이고 새로운 시작은 함부로 설치지 않는다. 죽음 체험은 사람으로 하여금 닳아져 없어질 것들로부터 영원한 본질을 가려내게 한다. 생명을 위협하는 병에 걸렸을 때 흔히 사람들은 깊은 회심에 들어간다. 그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잘 안다. 그래서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당장 그것을 실천해야 한다.
오늘의 기독교도 그렇지만, 줄리안 당시의 기독교가 그 가르침에 문제가 없었다고는 누구도 장담하기 어렵다. 기독교인들은 지나치게 자신만만하고 기록된 복음의 문장에 확고해서, 복음의 내용을 해방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그들에게 해방은 부활 뒤에나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줄리안의 하느님 체험은 진실을 바로 보게 해주었다.
먼저 출판한 ‘Showings' 초판에서 그녀는 자기가 본 환상들에 대하여 얼마쯤 자신이 없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십 년 뒤 두 번째 버전을 낼 무렵의 줄리안은 그것들을 성경의 위치로까지 적극적으로 끌어올린다. 하느님이 그것들을 자기에게 직접 보여주셨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하여 맞선 것은 아니다. 다만, 율법과 정의보다 사랑과 구원에 더욱 강조점을 두었을 따름이다.
줄리안이 현대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은 무엇인가? 첫째, 그녀는 가부장(家父長) 하느님을 재고하는 사조(思潮)에 목소리를 보탠다.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어머니 역할을 강조하였고 특히 그것을 예수에게 적용시킨다. 그녀의 그리스도는 당신 가슴(breast)으로 우리를 먹여 기른다. 이런 은유는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면서 여성 이미지―빵 굽는 여인, 잃은 동전을 찾는 여인 등―를 활용한 예수의 전례(前例)와 무관하지 않다. 예수는 나아가 병아리를 품는 암탉에 자신을 견주기도 하였다. 가부장적 기독교는 이런 은유들을 따로 강조하지 않았지만, 줄리안은 ‘여성’을 불가피한 보정(補正)으로 격상시켰다.
하느님의 남성성을 말할 때조차 그녀는 중요한 이미지를 거기에 보탠다. 그리스도의 예의범절(courtesy)을 말한 것이다. 당시에는 예의―왕실(court)에서 처신하는 법―가 무척 중요한 덕목이었다. 하지만 그 덕목을 하느님에게 적용한 것은 오직 줄리안뿐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하느님을 전능의 심판자 또는 무서운 왕으로 본다. 맞다, 하느님은 그런 분이시다. 그러나 이 믿기 어려운 예의범절(incredible courtesy)이 없는 하느님은 독재자들의 독재자로 되고 만다. 예수께서 그런 가설에 동의하지 않으실 것은 분명한 일이다. 하느님이 우리를 존중하시고, 우리의 잘못을 참아주시고, 우리의 자유를 배려하시는 까닭은 그분이 예절바른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예의는 또한 우리를 가까이하시고 우리에게 호소하시는 모습으로 표현된다. 이토록 우리를 걱정하고 배려하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죄’에 대한 줄리안의 가르침 역시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죄를 생각하고 걱정하는 데 기독교가 너무 많은 힘을 쏟고 있어서, 죄(sin)가 은혜(grace)보다 중요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말할 사람은 없겠지만, 죄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면 그들에게는 죄가 은혜보다 더 힘을 쓰는 것이 분명하다.
줄리안에게도 죄는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최후의 현실은 아니다. 그녀는 그것을 체험으로 알고 있다. 계시를 통해서 들은, 어떻게든지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모두가 잘 되리라.”(All will be well)는 음성을 그녀는 자주 기억한다. 나아가 저주받을 자들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과 씨름을 하기도 한다. 저주받을 자들의 존재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손 안에 있고 그분이 모든 것으로 궁극의 선(善)을 이루시리라는 진실을 그녀는 굳게 믿는다.
다시 말하는데, 이는 엄숙한 가톨릭의 가르침이다. 교회가 지옥의 가능성을 말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위해서다. 하느님은 인간의 의지에 반(反)하여 그를 억지로 당신 나라에 끌어들이지 않는다. 또한 어느 누구도 자기 의사에 반하여 사랑의 힘을 부인하도록 강요당하지 않는다.
어쩌면 줄리안의 저술에 나타난 가장 인상적인 이미지는 그 행간에서 읽어야 할 것이다. 그녀는 우리에게 자신을 젖먹이로 생각하라고 권한다. 우리가 자신을 잘 먹여 기르면 수치와 비난의 구렁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젖먹이는 무슨 일이 있을 때 자기를 환영하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껴안아주고 입 맞추고 다시 제 길을 가도록 떠나보내는 어머니한테로 곧장 달려간다. 어른으로서는 자기를 한껏 낮추는 모습이지만, 바로 이 겸손 안에서 하느님의 힘 있는 사랑이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줄리안은 우리에게 기쁨을 선물한다. 기독교에는 아프고 슬픈 얼굴이 많지만 그래도 복음은 복된 소식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셔서 사람의 몸을 취하시고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다. 모든 피조물에서 순간마다 스며 나오는 아름다움과 사랑에 깨어나라! 줄리안은 평생을 오두막에 갇혀 산 은둔자였지만, 그 오두막은 담이 둘러쳐진 정원과 함께 번잡한 길거리로 열려있었다. 창조된 세계와 인간사회를 향한 사랑이 그녀의 작업장을 가득 채웠다. 그녀의 기쁨은 쉽게 전염되며 항상 솟구쳐 흐른다. 이 불안한 시대에 우리는 그녀의 은혜롭고 황홀한 음성에서 많은 혜택을 입는다.
이 책에 실린 글은 ‘Showings’ 두 번째 버전에서 발췌한 것들이다. 그녀가 본 계시들의 내용보다 그에 대한 본인의 해설을 주로 옮겼다. 그런 뜻에서 이 책은 번역이 아니라 풀어 옮긴 것이다. 특히 영성생활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 도움이 될 만한 내용에 초점을 맞추었다. 교회, 교리, 성사들에 대한 언급은 되도록 줄였고, 당시는 세례 받은 기독교인들이 주 독자였겠지만 우리는 사랑과 생명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을 독자에 포함시켰다. 이 책은 한 위대한 신비주의자를 소개하는 입문서다. 이 책을 통하여 노르위치의 줄리안을 더 깊이 더 가까이 사귀는 이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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