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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창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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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14.1.19 여의도순복음교회 주일설교 |
“그런데 뱀은 야훼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중략)…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세기 3장 1∼7절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온 세상의 진정한 주인
‘죄’란 스스로 주인 돼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것
주님께 모두 내려놓고 맡기면 평안과 기쁨 누려
태초에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동산의 실과는 다 먹되 선악을 아는 실과는 분명히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악과는 바로 스스로 주인이 되게 하는 과실입니다. 선하다는 것은 좋다는 의미이고 악하다는 것은 나쁘다는 것인데 바로 그 과일 즉, 선악과를 따먹으면 좋다와 나쁘다를 결정하는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하나님만이 이 우주의 절대 주인이요 맞설 자가 없어야 되는데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주인 노릇을 하게 되면 자신들을 창조한 하나님하고 다퉈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주인이고 아담도 주인이면 서로에게 권리를 양도하지 않기 위해 싸움이 붙게 됩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마귀가 하와를 꾀어 낼 때 “네가 이 과일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선악을 분별하게 되고 진정한 주인이 된다”고 유혹하였고 그 말에 하와가 넘어가고 만 것입니다.
주인이 된다는 것은 우주를 창조하여 소유한 권리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절대 주권자이며 모든 세상만물의 좋고 나쁜 것을 그만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피조물이요 소유물들은 그저 그 주인에게 순종하고 나쁜 것은 버려야 됩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처럼 자기들이 주인이 돼서 누가 뭐래도 자신들 스스로 좋은 대로 행하고 나쁜 일은 하지 않겠다고 욕심을 부려 하나님과 다투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 앞에서 주인이 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주인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살아야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해 자기 멋대로 행하면 굉장한 불행을 당하게 됩니다.
1. 자기가 주인이 된 삶
하나님이 없다하는 무신론자들이나 눈에 보이는 물질만을 우선시하는 유물론자들은 자기 스스로 주인노릇 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인본주의적이며 무신론적인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신도 없고 주인도 없다. 바로 우리가 주인이며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산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타락한 사람은 이미 부패하기 시작해서 그 마음에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의 종이요, 이생의 자랑의 종이 돼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사탄의 종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용하려 하실 때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신발을 벗으라고 하십니다. 신발은 행위의 주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또 신발은 소유의 주권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앞에 나올 때 언제나 신발을 벗으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행위와 소유의 주권을 하나님께 내려놓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주인이 된 사람은 절대로 그 주권을 벗지 않습니다. 자기 스스로 신발신고 걸어 다닙니다. 그것은 자기 행위를 자기 마음대로 하고 자기 소유를 지켜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겠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세상에 자기가 주인이 된 삶은 사실은 자신이 주인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마귀가 배후에서 언제나 붙잡고 조종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도 자기 스스로가 먹은 것이 아닙니다. 배후에 마귀가 조종을 해서 먹도록 유혹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하루에도 수십번씩 마귀의 속삭임을 듣습니다. 예수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마귀는 매일 우리 곁에서 속삭입니다. 때로는 성령께서도 직접 말씀하실 때도 있지만 마귀도 속삭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혜롭게 그 목소리를 분별해야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음성인가? 아니면 사탄이 말하는 것인가?’ 지혜롭게 분별해서 주님의 말씀이면 순종하고 사탄의 말이면 대적하여 물리쳐야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 6절로 7절은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고 기록합니다. 하와가 따먹고 난 다음에 가만히 있으면 좋았을 텐데 그 남편인 아담까지 꾀어 가지고 먹으라고 하니 남편이 따라 먹었습니다. 마귀에 꼬임에 빠지면 우리 스스로 주인 된 것 같지만 마귀에 종이 되는 것이요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주인이 되면 우리의 모든 생활에 책임을 져주시는 것입니다. 주인에게는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입니다. 주인은 일용할 양식과 의복을 얻는 것, 편안히 잘 살게 하는 것, 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돌봐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자신에게 속한 일, 문제, 짐 등에 전적으로 책임져야 되고 환경적으로 다가오는 복과 저주도 주인이 책임져야 됩니다.
신학자요 설교가인 존 스토트(J. Stott)는 자신의 책 『죄와 구원』에서 “죄는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것이 바로 죄고, 구원은 하나님이 사람을 대신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또한 많은 성경학자들은 말하기를 “죄는 스스로 해보겠다는 독립 선언서이고, 믿음은 주님께 순종하겠다는 의존 선언서이다”라고 주장합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독립하여 하나님과 똑같은 존재로 살겠다고 주장하는 것이 ‘죄’이며 반대로 스스로 모든 권리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라가는 것은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2. 자기 본위적으로 살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삶
자기의 꿈과 소망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그러한 신앙도 있습니다. 또한 철학적이고 학문적으로 믿고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그저 성경을 읽고 지식적이고 학문적으로 깨달을 뿐이지 실제 행동으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참된 신앙이란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내어맡기고 살든지 죽든지, 흥하든지 망하든지, 성하든지 쇠하든지 불퇴진의 믿음으로 뛰어들어 행하는 것입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을 하지 아니하면 칠배나 뜨겁게한 불구덩이 속에 던져 넣겠다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재판하는 자리에서도 “지금이라도 느부갓네살을 닮은 형상에 절을 하면 살려 주겠거니와 절을 안하면 불꽃 가운데 던지겠다”는 제안까지 받았습니다. 바로 이런 순간이야 말로 결정적이고 실천적인 신앙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 믿는 우리는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대로 절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느부갓네살 왕이 명령하니 군인들이 그들을 붙잡아서 불속에 던졌는데 그들과 함께 하는 네 번째 사람이 나타나 그들을 그 뜨거운 풀무불에서 지켜 주었고 손잡고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습니다. 넷째 사람은 ‘인자’ 즉 ‘하나님의 아들’과 같았다고 했으니 바로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그들은 결국 살아서 나왔습니다.
이처럼 참된 신앙이란 실제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가짜 신앙은 행동하지 않고 말로만 하고 형식으로만 하는 것입니다. 행동이란 아브라함같이 자신의 아들인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고 할 때 데리고 나가서 각을 떠서 불로 태워 제물로 삼으려고 했던 것처럼 실제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참되고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의 기독교가 세계적으로 높이 칭찬을 받고 한국교회를 배우겠다고 외국인들이 많이 찾아오는 것은 우리 한국의 성도들이 행동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새벽 기도, 철야기도, 산기도, 금식기도, 작정기도 이 모든 것이 바로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주일에 이렇게 교회에 모여 실제로 예배드리는 것도 행동하는 신앙이며 십일조 드리는 것도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형식적이고 지식적인 신앙은 희생적이며 행동하는 신앙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기도와 간구를 통해 하나님을 체험하고 하나님 앞에 살아있는 신앙의 증거가 있어야 됩니다. 살아 꿈틀거리는 증거가 없으면 참된 신앙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작은 것도 행동하면 살아 역사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 왔을 때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하기를 “우리 차라리 애굽에 항복하자. 애굽이 저 군대를 동원해서 우리를 잡으러 오는데 우리는 무장도 없고 무기도 없은즉 잡히면 다 죽는다. 항복하자”고 했습니다. 그때 모세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는 “너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는 것을 보라! 오늘 우리가 보는 이 애굽 사람을 다시는 영원히 보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싸우신다”고 외치며 홍해로 전진했습니다. 이처럼 300만 이스라엘 백성을 거느리고도 두려움 없이 하나님만을 의지해서 목숨을 걸고 믿으며 전진하는 것, 이것이 바로 행동하는 신앙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실제로 도와주셔서 홍해가 갈라지고 300만명의 유대인들이 모두 건너갔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마음속에 즐거움을 얻고 평안을 얻고 행복을 얻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당연히 너무나 좋고 행복한 것입니다. 거기에 플러스 알해서 우리의 문제가 해결돼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작은 문제는 작은 문제대로 큰 문제는 큰 문제대로 해결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마음에 큰 평안과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고 나가면 응답이 우리의 앞마당 즉 우리의 앞에서 이뤄집니다. 구만리장천 멀리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었으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실제로 살아있는 체험을 해야지 이론적이고 학문적으로만 하나님을 믿어서는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하나님을 모든 것의 주인으로 섬기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는 삶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고 완전히 주님만을 따라서 사는 것이 바로 진실한 신앙생활입니다. 이것은 온유하고 겸손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멍에를 걸머지고 따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같이 예수님의 죽음을 우리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그 예수님 십자가를 걸머지고 따라가면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되고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안에 채워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1장 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예수께로 와서 예수님의 멍에 밑으로 들어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밭을 갈기 위해 소나 말에 멍에를 지울 때 그 새끼를 훈련시키기 위해 그 어미에 밑에 넣어 함께 밭을 갈게 합니다. 즉 송아지나 망아지는 그 어미의 멍에 밑에 들어가고 사람이 “이랴∼ 이랴∼” 하면 어미가 그 멍에를 끌어 밭을 갑니다. 어미는 목에 잔뜩 힘을 주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멍에를 끌어 밭을 가는데 새끼들은 그저 멀뚱멀뚱 그냥 따라만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멍에 밑에 우리의 짐을 다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이제 예수 죽음이 우리 죽음이며 예수 고난이 우리의 고난입니다. 이제 상상해 봅시다. 상상이 위대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스스로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과 함께 부활한 것을 상상해 봅시다. 주님과 함께 죽고 함께 부활했으니 예수 죽음은 우리 죽음, 예수 부활은 우리 부활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상상을 통해 예수님과 더불어 죽은 우리를 상상하고 예수님과 더불어 부활한 우리를 상상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영적이며 실제적인 체험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찬송가의 가사처럼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 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라는 고백이 이제 우리의 고백이 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세상 모든 고통과 괴로움은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간 곳 없어진 것을 상상하고 구속한 그리스도의 은혜가 그 자리에 들어온 것을 상상해야 되는 것입니다. 복된 상상으로 가득찬 이러한 우리의 마음이 반드시 하나님과 우리를 연결하는 도구가 됩니다. 4차원의 영성 즉, 하나님의 역사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상상과 생각에 하나님께서 들어와서 우리의 짐을 걸머지고 축복해주는 것을 생각해야 됩니다. 상상하고 생각하면 또한 그것이 이뤄져서 우리에게 큰 축복이 되는 바라봄의 법칙으로 꿈을 꿔야 하고 그것을 재산목록으로 믿고 입술로 몇 천번이고 반복해서 고백하고 또 고백하면 성경에 기록된 것 이상의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소유가 됩니다.
시편 37편 5절은 “네 길을 야훼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우리의 상상 속에서 기도로 내 길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모두 던져버립시다. 그렇게 하다보면 우리가 해방된 모습을 꿈꿀 수가 있고 그것을 바라보고 믿고 입으로 시인하면 기적이 일어나게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보고, 믿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고, 믿고, 말하는 것을 우리 스스로 삶속에서 실천해야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잠언 16장 3절은 “너의 행사를 야훼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고 기록하였으며 베드로전서 5장 7절은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68편 19절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이제 한번 눈을 감아 보십시오. 그리고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의 짐을 주님이 짊어지는 것을 한번 생각하고 상상해 보십시오. 이와 같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우리가 할 것은 오직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모두 내게 맡기라”고 하신대로 행했으니 그 다음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시고 친히 역사해 주십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은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은 아주 시시한 것부터 시작해서 대단히 굉장한 것까지 다 채워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오직 할 것은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감사하고 기다리면 하나님의 기적이 다가옵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이 이뤄지는 것을 생각하고 상상하고 바라보며 믿고 입술로 고백하고 기다리기만 하면 그대로 이뤄집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사야 30장 18절은 “그러나 야훼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야훼는 정의의 하나님이심이라 그를 기다리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을 믿고 마음에 평안을 가지는 신앙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마음에 평안을 가져야 되는 것입니다.
시편 68편 19절은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은 날마다 오늘도 내일도 우리의 짐을 대신 져주시고 그리고 모레도 져주시고 글피도 그리고 그 다음날도 져주십니다. 그러므로 시편 55편 22절은 “네 짐을 야훼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라고 기록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잘 믿으면 주님께서 우리를 천당으로 데려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 희생을 통해 마귀의 꼬임에 넘어가 아담이 가져다준 우리의 모든 저주를 다 청산해 버립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믿음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질병과 허물, 저주와 가난, 그리고 고통의 저주,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짐들 아닙니까? 그러나 다 주님께 맡기면 주님께서 맡아 주장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된 사람은 아직도 선악과의 저주를 입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주인이니까 자기에게 다가온 모든 저주도 모두 짊어져야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기 자신을 맡기고 주님이 자신의 주인이 된 사람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짐을 대신 지신 예수님의 공로로 더 이상 짊어질 짐이 없습니다. 온전히 평안하고 기쁘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니 오늘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 더 이상 어떤 짐도 짊어지고 가지 마십시오. 모두 십자가에 맡기고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자신의 주인 되고자 했던 아담과 하와의 교만 때문에 죄와 죽음과 저주의 책임까지 모두 지게 된 우리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인이시니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도 없으며 어떤 수고하고 무거운 짐도 없음을 고백합니다. 언제나 주님 앞에 모두 내어 맡기고 날마다 승리하며 사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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