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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구원자다!

예레미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273 추천 수 0 2014.02.11 08:21:34
.........
성경본문 : 렘31:7-14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2014년 1월5일 http://dabia.net/xe/sermon/73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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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구원자다!

렘31:7-14, 성탄절후 둘째 주일,

 

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8 보라 나는 그들을 북쪽 땅에서 인도하며 땅 끝에서부터 모으리라 그들 중에는 맹인과 다리 저는 사람과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함께 있으며 큰 무리를 이루어 이 곳으로 돌아오리라 9 그들이 울며 돌아오리니 나의 인도함을 받고 간구할 때에 내가 그들을 넘어지지 아니하고 물 있는 계곡의 곧은 길로 가게 하리라 나는 이스라엘의 아버지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 10 이방들이여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먼 섬에 전파하여 이르기를 이스라엘을 흩으신 자가 그를 모으시고 목자가 그 양 떼에게 행함 같이 그를 지키시리로다 11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 12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13 그 때에 처녀는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청년과 노인은 함께 즐거워하리니 내가 그들의 슬픔을 돌려서 즐겁게 하며 그들을 위로하여 그들의 근심으로부터 기쁨을 얻게 할 것임이라 14 내가 기름으로 제사장들의 마음을 흡족하게 하며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시간 여행이 가능할까요? 21세기에 사는 우리가 5세기의 삼국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이론적으로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한 이유가 여러 가지입니다. 가장 결정적인 것은 빛보다 빠른 비행체를 만들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생각을 통해서는 지금도 시간 여행이 가능합니다. 5백 년 전, 또는 천 년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공부하면 됩니다. 그게 역사공부입니다. 역사공부를 통해서 옛날로 돌아갈 수도 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을 읽을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도 역사에 대한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인 구약을 읽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뜻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읽은 구약성경 중의 하나가 오늘 설교 본문인 예레미야입니다. 이제부터 예레미야 시대로 시간여행을 떠나겠습니다.

이 여행을 하려면 2천6백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활동한 시대가 기원전 7세기였으니까요. 렘 31:7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구절에서 당시 상황을 어느 정도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여러 민족의 앞에 서서 야곱을 위하여 기뻐 외치라. 너희는 전파하며 찬양하며 말하라. 여호와여,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소서 하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라는 표현에서, 이스라엘은 북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아들인 르호보암 시대에 남과 북으로 분단되었습니다. 북쪽을 이스라엘이라 부르고, 남쪽을 유다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은 기원전 721년경에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많은 이들이 포로로 잡혀 가거나 여러 곳으로 흩어졌고, 그 지역에는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이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소수의 남은 자가 된 겁니다.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처량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남쪽 유다는 아직 멸망하지는 않았습니다만 위기는 그치지 않았습니다. 요시아 왕이 개혁운동을 펼치다가 전사한 뒤로 개혁운동은 더 이상 진도를 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는 열강들이 헤게모니를 잡기 위해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는 중입니다.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구원하신다는 겁니다. 그 구원을 8,9절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여기서 남은 자들은 흩어진 이들입니다. 북쪽 땅과 땅 끝에 흩어져 있습니다. 그들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지 상상이 갑니다. 이씨조선이 끝날 무렵 우리 선조들도 일제치하를 거치면서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으로 흩어진 것과 비슷합니다. 그들 중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조국으로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오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그 남은 자들을 불러 모아 구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맹인, 다리 저는 사람, 잉태한 여인과 해산하는 여인’이 포함됩니다. 이런 분들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통해서만 생존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정이 딱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감격해서 ‘울며 돌아올’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돌아올 때 넘어지지 않게 하고 ‘물 있는 계곡’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물은 생존의 필수품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생존을 지켜주어 고국, 고향, 시온으로 돌아오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불러 모아 구원하시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이고,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장자이기 때문입니다(9b절).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불러 모아 지키고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10-14절에서 다시 한 번 더 이방인들에게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 즉 온 세계에 분명하게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그 내용은 앞 단락의 것과 비슷합니다. 남은 자의 구원이 어떤 상태인지가 12절에 시적인 문장으로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와서 시온의 높은 곳에서 찬송하며 여호와의 복 곧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과 어린 양의 떼와 소의 떼를 얻고 크게 기뻐하리라 그 심령은 물 댄 동산 같겠고 다시는 근심이 없으리로다 할지어다.

 

예레미야가 내다본 세상은 정말 놀랍습니다. 이사야 선지자 못지않은 영적 상상력이 눈에 보입니다. 모두가 풍요롭게 살고 근심 없이 사는 세상입니다. 완전한 복지가 실현된 세상입니다. 13절에도 비슷한 내용이 반복됩니다. 처녀들이 춤추며 즐거워하겠고 노인은 함께 즐거워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슬픔이 즐거움으로 변하게 됩니다. 근심이 변해서 기쁨이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4절에서는 ‘내 복으로 내 백성을 만족하게 하리라.’고 선포했습니다. 예레미야가 본문에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는 분명합니다. 여호와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다, 여호와야말로 참된 구원자라는 사실입니다.

 

어떤 분들은 예레미야의 이런 선포를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당시는 양떼와 소떼를 얻고 크게 기뻐할만한 상황이 아닙니다. 북이스라엘은 그야말로 패전국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남유다도 별로 기대할 만하지 못했습니다. 주변의 강대국은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유다 사람들을 먹잇감 정도로 여길 뿐이었습니다. 예레미야는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무모해 보이는 말씀을 선포한 것일까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여기에 합당한 근거가 될까요? 이는 마치 북한이 곧 일류 국가가 될 거라는 말과 비슷한 정도로 근거가 빈약해보입니다.

 

우리는 이런 고백과 선포가 예레미야의 고유한 영적 통찰이며, 그의 믿음이고, 그가 경험한 신탁이었기에 얼마나 객관적인 근거가 있냐, 하고 질문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음의 질문이 더 합당합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역사에서 성취되었을까요? 그 답은 여러분이 이미 잘 아십니다.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있은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남유다도 바벨론에 의해서 패망했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절이 50 여년 이상 흐른 뒤에 유다가 바벨론으로부터 해방을 받기는 했으나 그들의 운명은 여전히 혹독했습니다. 근심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만족이 없었습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은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만이 아니라, 그리고 유대인들의 역사에서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게 참으로 이상합니다. 모두가 바라는 역사의 목표인데 그게 성취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 그럴까요? 쉽게 생각해보십시오. 양떼와 소떼가 늘어나면 서로 사이좋게 나누면서 평화롭게 사는 게 아니라 서로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서 다툽니다. 앗시리아와 바벨론이 힘을 잃으면 뭔가 세상이 완전히 달라질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래서 소외된 이들까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으려니 기대했지만 또 다른 세력이 나타나서 죽기 살기로 싸울 뿐입니다. 그걸 우리는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가 나타나고, 로마가 나타나고, 스페인, 영국, 독일, 일본, 중국, 미국 등이 나타나서 구약시대의 앗시리아와 바벨론이 보였던 패권을 그대로 행사합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그런 패권을 쥐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기업체와 학교들끼리도 끝없이 싸웁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이 실존적으로 죄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일까요? 답답합니다. 어쨌든지 예레미야의 꿈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게 이뤄질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예레미야의 선포는 우리에게 무의미할까요? 성경으로서의 권위는 없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선지자들이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기에 잘못 본 부분이 있지만 근본에서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하게 말했습니다. 남은 자를 구원하는 분이라고 말입니다. 흩어진 자를 모으고 구원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원하시되 그들보다 강한 자의 손에서 속량하셨으니...”라는 말은 옳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방식과 때만은 예레미야가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레미야가 선포한 여호와의 구원이 예레미야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순간에,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취입니다. 양떼와 소떼를 늘려주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그와의 일치되는 방식입니다. 모든 장애를 한꺼번에 고치는 방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 참여하는 방식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만이 궁극적으로 구원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어떤 분들에게는 이런 기독교 신앙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겁니다. 기독교가 너무 개인주의로 떨어졌다고 비판합니다. 기복주의에 떨어졌다는 뜻입니다. 일리 있는 비판입니다. 그런 비판을 들을만한 요소가 우리에게 적지 않습니다. 미국과 한국교회의 신앙은 사적인 차원으로 떨어진 게 분명합니다. 예수 잘 믿어서 복 받아서 행복하게 사는 것을 기독교 신앙이라고 여깁니다. 그래서 공적인 영역은 뒤로 미뤄집니다. 세상이 아무리 불의해도 교회만 잘 나오면 되는 것으로 여깁니다. 또 어떤 사람은 교회가 사회혁명의 선봉자가 되어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빈익빈부익부의 왜곡된 질서를 맞서 싸워야 한다는, 즉 사회구원이 우선적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주로 남미의 해방신학과 한국의 민중신학에서 나옵니다. 그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으나 극단적으로 그쪽에 치우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신자들 개개인이 서 있는 자리에서 각자 능력만큼 행하면 됩니다. 교회가 전체적으로 거기에 매달릴 수는 없습니다. 사회혁명이 잘못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는 참된 만족이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되지 못했다는 것도 이런 뜻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복만 추구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혁명에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 사건에 몰입하는 것입니다. 그 사건을 경험하는 게 신앙의 시작이자 마지막입니다. 엄격하게 말해서 기독교인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는가, 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건 각자가 선택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소박한 행복을 추구할 사람들은 그렇게 하시고, 사회운동을 하실 분들은 그렇게 하시고, 예술에 심취할 분들은 그렇게 사십시오. 예수 사건을 경험한 깊이만큼 그 삶의 자리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우선적인 것은 예수를 통한 구원 경험입니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에게 집중했습니다. 오늘 제2 독서인 엡 1:3-14절에서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합니다. 3절을 읽겠습니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삶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풀리지 않아도 찬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힘들기도 하고 짜증이 날 때도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찬송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예레미야가 내다본 양떼와 소떼가 없어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바로 그 사실을 예수의 운명에서 경험했습니다. 삶의 어떤 조건이나 사회적 신분에 상관없이 찬송할 수 있기에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지도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런 인식과 경험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리 진실하게 세상을 산다고 하더라도 예레미야의 영성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옳지만 궁극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정의감에 불타긴 하지만 참된 기쁨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령한 복을 인식하고 경험했습니다.

 

우리를 찬송하게 만드는 신령한 복, 예레미야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할까요?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는 분들은 이미 알고 있으니 설명이 필요 없고, 모르는 분은 설명을 들어도 알 수 없으니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것은 설명으로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신령한 복 자체는, 즉 구원 경험은 설명할 수 없고 손가락으로 지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전하는 게 좋겠습니다. 눅 15:11-32절에는 소위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그 내용은 여러분이 잘 아십니다. 탕자인 둘째 아들은 아버지 품을 떠났다가 고생 끝에 아버지를 기억해냅니다. 그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신령한 복이었습니다. 그의 모든 잘못까지 덮어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범생이었던 큰 아들은 아버지의 그런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설명해줘도 모릅니다. 그는 동생을 위한 잔치가 열리는 동안 불평만 했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모든 차이를, 모든 이데올로기를, 모든 시시비비를 덮어주는 아버지의 사랑에서 구원을 보았습니다. 선만이 아니라 악까지 구원하는 사랑입니다. 그 사랑의 극치가 예수 사건이었습니다. 이게 너무 막연한가요? 그렇게 보일 수도 있을 겁니다. 뭔가 화끈한 것으로 경험되지 못할 수 있을 테니까요. 그래서 오늘 제3 독서인 요 1:9-11절은 세상을 비추는 빛이 왔으나 사람들이 그 빛을 알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오늘 꽤나 먼 시대를 시간 여행하듯이 돌아왔습니다. 예레미야 시대로부터 초기 기독교 시대를 거쳐 이제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예레미야는 여호와가 구원자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보았습니다. 여기까지만 생각하면서 살아도 하나님께서 기특하게 여기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머물 수 없습니다. 한걸음 더 나가야 합니다. 예레미야가 본 여호와의 구원은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죽음으로 근본이 훼손된 우리가, 그래서 죽는 순간까지 방황할 수밖에 없는 우리가 돌아갈 하나님의 아들, 즉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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