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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햇살이 오늘도 변함없이 싱그런 아침을 열어주었습니다.
빛을 받은 모든 물체들은 일제히 기다렸다는 듯 제각기 보람된 일들을 시작했습니다.
병원 한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잔디밭에서도 그런 움직임이 있었답니다.
그 곳은 시내 쪽을 보고 서 있는 커다란 병원 건물 한 편에 자리한 등나무 밑의 작은 정원이었는데, 보라색의 등꽃이 실바람에 통통거리는 모습이 마치 보라색의 손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밤새 내린 이슬이 햇살에 밀려 뿌리로 스며들자 무수한 잔디 잎들이 생명수를 마신 듯 힘껏 두 손을 뻗치고 기지개를 켜며 속살거리고 있었고 이름모를 꽃들이 다투 듯 피어나 방긋이 웃으며 서로 인사말을 나누었습니다.
이제 막 꽃받침을 사방으로 밀쳐내며 노란 머리를 드러낸 민들레가 말했습니다.
"어머! 정말 눈부셔. 세상은 너무도 아름답네. 찬란한 햇빛, 향기롭고 귀여운 등꽃. 저 건물은 참으로 커다랗고 튼실해 보여. 그런데 이건 뭐람. 길고 뾰족하잖아. 아이, 따거!"
옆에서 구부정한 허리에 꽃잎이 하얀 솜처럼 변해 버려 잠시 후면 홀씨로 날려가 버릴 늙은 민들레가 아는 체 하며 귓속말을 했습니다.
"저건 잔디라고 해. 사람들의 엉덩이 밑에 깔려 흙으로부터 옷을 보호해 주는 일 말고는 어데고 쓸모가 없단다. 보렴, 방금 네 뺨을 콕콕 찌른 것도 잔디의 시새움이란다."
이 때, 어린 민들레와 늙은 민들레의 속삭임을 엿듣고 있던 잔디가 발끈하며 소리쳤습니다.
"아니,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있어요? 우린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땅 밑을 파고들어 어떤 황폐한 땅 속의 물길도 잡을 수 있답니다. 그 물을 길어 올려 연녹색의, 가늘지만 비수와도 같이 싱싱하고 뾰족한 잎사귀를 수 만개씩 피워내 회색의 도시에 희망을 주고 있지요. 튜립처럼 아름답거나 장미처럼 향기롭지도 않은 당신들이 정말 쓸모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군요. 흥!"
잔디는 한껏 토라져 얼굴까지 파랗게 질려 있었습니다.
늙은 민들레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가뜩이나 구부정한 허리를 잔뜩 더 구부렸지만 어린 민들레는 눈인사를 하며 말했습니다.
"그렇군요. 정말 당신들은 대단하네요. 그렇게 뽀송뽀송한 솜털로 몸이 둘러 쌓여 있으면서도 부리와도 같은 날카로움을 지녔군요. 거기에 비하면 저흰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것 같아요. 튜립의 아름다움도, 장미의 향기도 없으니 누가 거들떠나 보겠어요......"
잔디는 자신이 너무 화를 내는 바람에 어린 민들레의 가슴에 상처를 준 것 같아 더듬거리며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그렇지가 않아요. 사실 당신들은 저희보다 놀라워요. 튜립이나 장미는 저희 틈새에서 살 수가 없잖아요? 뿌리조차 제대로 내릴 수 없지요. 정원사들이 정원에 그들을 심으려고 할 때는 넓고 깊은 원형의 구덩이를 파서 저희들이 그들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도록 해 놓은 후 심지요. 저희가 침범이라도 해서 수분을 죄다 빨아들일라치면 그들은 시들시들 앓다가 죽어버리지요. 하지만 당신들은 어떤가요? 저희가 당신들의 뿌리 내림을 방해하고 물을 한 방울도 내주지 않으려고 버텨도 아무말없이, 저희에게 어떤 피해도 주지 않으면서 꽃을 피우고, 홀씨를 날려 조용히 어디엔가, 또 누구에겐가 희망을 주러 떠나잖아요? 미안해요, 말주변이 없어서......"
잔디는 자신이 너무 떠들어 댄 것 같아 살짝 얼굴을 붉혔고 늙은 민들레는 떨어져 나가려는 홀씨를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아이, 예뻐!"하는 탄성과 함께 고사리 같은 어린아이의 손이 어린 민들레를 잽싸게 꺾어 들어 한 묶음이나 되는 다른 이름모를 풀꽃들 사이에 가지런히 누이는 것이었습니다.
잔디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다가 늙은 민들레에게 말했습니다.
"보세요! 어린 민들레는 이제 병실 창가에 꽂혀 아픈 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게 되었어요. 그렇지요?"
잔디가 대답없는 늙은 민들레 쪽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 빈 줄기만 남겨 놓은 채 잔잔한 바람결을 따라 하얀 미소를 지으며 그는 홀씨로 날려가고 있었습니다.
아름답지도, 향기도 없는 꽃을 단 며칠간 피우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아무런 불평도 없이 바람에 묻혀 사라져 가는 민들레를 향하여 잔디는 눈이 시리도록 발돋움을 하며 손을 흔들어 주었습니다. *
출처/ 한은희 홈페이지 http://bh.knu.ac.kr/~eh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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