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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구름이 이야기하였습니다.
골 깊은 산 속에 작은 암자가 하나있었지. 푸른 바다 가운데 떠있는 한 점 바위섬처럼 숲과 산바람에 둘러싸여 있는 이 암자에는 눈이 큰 스님이 한 분 살고 계셨는데 나는 때때로 이 조용한 암자가 좋아서 지붕 위를 맴돌며 한참씩 쉬어가곤 하였어.
스님은 일찍 일어나셔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린 다음, 혼자서 나무하고 밭 매고 밥 짓는 틈틈이 염불을 외시지. 어떤 날은 스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염불소리만 바깥으로 흘러 나오기도 해.
그러면 스님의 낭랑한 염불은 새소리, 솔바람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데 간혹 다람쥐들이 귀를 세우고 듣는 걸 볼 적도있지.
때로 스님은 빨랫감을 가지고 개울가로 나와서 빨래를 하다말고 물끄러미 흘러 가는 개울물에 눈을 준 채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마냥 앉아 있기도 해. 그러다 일어나실 때 보면 스님의 눈빛은 물빛보다도 더욱 맑아 있곤 하는데, 아마도 스님께선 쉬지 않고 흘러 가는 물에서 어떤 새로운 것을 깨닫지 않았나 나는 그렇게 짐작하지.
그런데 지난 늦가을이었다.
낙엽이 어찌나 많이 밤새 내렸는지 산속의 길도 묻혀버린 어느날이었지. 장에 갔다 오시던 스님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문득 발을 멈추셨지. 무슨 일일까, 발이라도 씻으시려나 했더니 그게 아니더군.
스님은 개울 한쪽 귀퉁이에서 파란 융단 같은 이끼를 쓰고 다소곳이 엎드려 있는 작은 돌 하나를 집어드시는 것이었어. 그리곤 마치 사람한테 이르시듯 조용조용히 말씀하셨지.
『올해는 무우껍질이 두터운 걸로 봐서 동장군이 제법 기승을 부릴 것 같으이. 그렇게 되면 이 이끼도 얼어 죽지 않겠는가. 그래서 내가 묵고 있는 거처로 데려가려고 하네. 이해들 해주겠지.그렇다면 서로 작별의 인사를 나누게나.』개울가의 마른 풀잎들이 서걱이었지. 바위를 도는 물줄기는 돌돌거렸고. 작은 물고기가 한 마리 물위로 반짝하고 뛰었어. 마치 돌아서 가는 스님을 배웅하기나 하는 것처럼.
삭풍이 부는 겨울이 오는가 했더니 눈을 못이긴 소나무 가지가 더러 부러지면서 겨울은 차츰 깊어져 갔어.
나는 이즈음 어쩌다 암자를 지날 때면 스님이 묶고 계시는 방 미닫이를 찬찬히 살펴보곤 했지.
그럴 때면 미닫이에 스님의 오롯한 그림자가 비치고 그 곁에는 이끼가 얹혀 살아가는 소반의 그림자가 따라 있곤 했어. 이 얼마나 든든한 안부인지.
어느덧 겨울이 물러가고 움이 터오르는 봄이 되었어. 얼음 풀려 흐르는 물소리가 개울에서 제법 커지고 진달래 꽃빛이 서서히 산을 덮어
가는 봄날의 오후였지. 나는 이날 무심히 이 골산골짜기의 개울물에 내 몸을 비춰 보며 놀고 있는데 발소리 하나가 가까이 다가왔어.
아, 바로 그 눈이 크고 키가 큰 스님이었어. 스님이 두 손으로 소중히 싸안고 온 것은, 그래 맞아. 그 이끼가 덮인 돌덩어리 였지. 이끼는 그
동안 잘 지낸 모양이야. 아주 새파래.
스님은 징검다리를 건너서 개울 귀퉁이로 내려왔지. 바로 그 자리는 이끼의 돌덩어리가 박혀있던 곳이었어.
거기에 예전 모습 그대로 돌을 놓으면서 스님은 말씀 하셨어.
『자, 약속대로 자네들의 친구들을 다시 데려왔네. 반갑겠지. 아암 그렇고 말고.이제부터는 사이좋게들 지내게나. 그리고 자넨 다시 자신
의 힘으로 살아가야 하네. 자기의 삶을 남에게 평생 의지해 살면 뿌리가 썩어 버리는 법이야. 아마 가뭄이 들거나 큰물이 질 때도 있을 테
니 힘은 들겠지. 그러나 그런 어려움쯤은 견뎌야 하네. 그래야 살아간다는 보람이 생기는 걸세. 자, 그럼 잘 있게. 궁금하고 보고 싶으면 간
혹 올께.』
스님은 왔던 길을 되짚어 갔지.어깨가 보이다가 등이 보이다가 나중에 가사자락 마저도 산수유 꽃가지 속으로 묻혀 버렸지.
나는 이 아름다움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높은 산 위로 올라갔어. *
제일제당 사외보 [생활속의이야기] 1988년 1월호에서
http://www.cjlife.co.kr/lifestory/search/1988_01/story.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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