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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4시간의 여행 끝에 다섯시가 가까워질 무렵 군산에 도착하니 심신이 아주 탈진해 버린 느낌이었다.
지난 한 주일 동안은 서해안 말단의 작은 섬 말도에서 아주 멋진 시간을 보냈었다.
그 곳의 작은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형제. 이 전도사의 초청으로 격려차, 관광차 들렀었던 것이다.
생각하면 꿈결같은 한 주간이었다.
말할 수 없이 감미로웠던 겨울 바다의 유혹, 그리고 사랑, 흐느끼는 파도의 애절한 속삭임, 밤에 걸었던 바닷가의 모래사장, 멀리 아련하게 깜박거렸던 등대 불빛의 포근함이라니...
나는 걷다가 무릎을 꿇었었다. 마음을 열러 신비의 심연에 들어가면 바로 그리스도의 임재, 주는 그곳에 계셨다...
하지만 이제 환은 끝나고 나는 현실에 돌아와 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시외버스 터미널로 가서 서울가는 표를 끊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어 집으로 가야만 하는 것이다. 나의 집으로...
나는 갑자기 몸서리를 쳤다. 그래, 집으로 가야 한다. 나의 십자가, 나의 지옥을 향해서, 나는 가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주체하며 택시를 잡았다.
뒷좌석의 등받이에 고개를 젖힌 채 널브러져 있노라니까 무엇인가 재촉하는 듯한 음성이 귓전에 부딪혀 왔다.
눈을 떠 보니 운전사가 어디로 가느냐고 묻는 모양이다. 터미널 쪽이다 싶은 방향을 대충 가리키곤 다시 눈을 감았다.
택시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찬 바람 속에서 긴장했던 몸이 차 안의 따스한 공기에 나른하게 풀리면서 기분좋게 졸음이 밀려 들어왔다.
****
나는 어릴 적 부터 사랑이나 애정과는 상관없는 가정의 분위기에서 자라왔다.
어린 시절, 내가 유일하게 부러워한 아이들이 있다면 그것을 고아들 이었다.
그들은 자유로우며, 부모로부터 어떠한 시련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되는 공포를 어린 시절에 맛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제 아비와 꼭 닮았다.”는 끔직한 욕설을 듣지 않을 것이다. 사실, 그 말은 우리 형제들에게 있어서 너무나 심한 모욕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모두 성격이 비교적 유순한 편이었으나, 이 말에는 정말 극심한 분노를 느꼈다.
그에 대한 적개심은 오랫동안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던 감정이어서 도대체 그 출발이 어디서부터인지,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도 잘 알 수 없었다. 하여튼 나는 미움이나 원망에 대해서 익숙해져 있었고, 그러한 감정은 내 어린 시절의 정서의 대부분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성격이 심히 사납고 포악했으며 뭔가를 때려부수거나 화를 내는 것을 즐겼다. 나도 가끔 엑스트라로 등장하기는 했었지만 그의 스파링 파트너는 주로 어머니였는데, 목사님의 딸로서 아버지에게 시집을 온 뒤로도 신앙생활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그녀가 술과 여자로 흥청거리며 사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알고, 사명감까지 느끼고 있었던 그에게 있어서 좋은 공격대상이 되었던 것을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머니가 새벽기도를 나가다 붙잡혀서 끓는 물로 세례를 받게 되었다든가, 분명한 이유를 알 수 없는 구타, 유리 조각으로 찌르기, 등의 원색적인 장면을 자주 볼수가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 후 작전을 바꾸셨다.
생각해 보니 자기 마누라가 골병이 들어 누워있게 된다는 것이 자신에게 별로 유익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고, 전투는 상대의 무저항으로 인하여 항상 일방적인 초반 KO 승으로 끝나기 때문에 그것은 그에게 별다른 성취감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사춘기가 되었을 즈음에서는 그가 완력을 구사하는 것을 자주는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손발보다는 살기등등한 눈빛과 벽력같은 고함만을 주로 사용했고 때려 부수거나 걷어차는 것들도 밥상이라든가, 항아리 정도로서, 별로 비싼 것들은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집안 분위기는 상당히 부드러워지게 되었다.
언젠가 다시 게임이 시작되었을 때, 우리 형제들은 다락으로 대피해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이 드라마가 언제 쯤 끝날 것인가에 대해서 내기를 걸었을 때, 내가 45분을 주장해서 내기에 이겼던 것은 정말 멋진 추억이었지만, 이것은 금ㄴ큼 아버지의 기질이 많이 부드러워진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였던 것이다.
그가 그처럼 어머니를 미워하는 것은 어머니가 교회에 가 있는 시간이 너무 많다든가, 돈을 벌어오지 않는다든가, 하는 이유에서였는데,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두 사람의 성격이 너무나 극적으로 대조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는 심히 요란한 사람이었고, 어머니는 아주 조용한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항상 자신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인가에 대하여 말하며 입에 개거품을 무는 반면에 어머니는 언제나 자신을 나타내기를 싫어했다.
아버지가 돈을 마구 써대는 반면에 어머니는 자신을 위해서는 동전 한 개도 쓰지를 않았다. 토큰 한 개를 아끼고 헌금하기 위해서 교회까지 먼 얼음판의 길을 가다가 넘어져 허리를 다쳐 한 달 동안 누워 있었던 것이 바로 작년의 일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싸움을 밥 먹듯이 하고, 또 금박 잊어버리는 소위 “뒷끝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어머니는 그처럼 함부로 행동하는 것을 싫어했다.
아버지는 필요하면 언제나 거리낌 없이 남에게 돈을 빌어쓰고, 곧 잊어버리지만 어머니는 굶어 죽어도 남에게 손을 내미는 성격이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돈을 빌어 오라고 집에서 내쫓긴 그녀가 부엌에 들어가서 문을 걸어잠그고 흐느껴 울던 그 심정을 나는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니는 자주 우리 형제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가르치고, 예배를 드렸다. 적어도 그것이 그녀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의 유일한 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그녀를 위로하고 용기를 줄 만큼 성숙해 있지를 못했다.
나는 비뚤어지고, 반항하는 마음으로만 충만해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이 싫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포악함도, 어머니의 청승도, 나는 모든 것이 증오스럽고 끔찍했으며 그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싶을 뿐이었다.
길고도 지루했던 예배를 드리다가, 어머니의 기도가 시작되어 그녀의 눈물이 성경책을 적시기 시작할 무렵이면 나는 살그머니 집을 빠져나와, 어둡고 우중충한 길을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나는 군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수없이 시도했던 자살,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나를 위해 쉬지 않고 흘리시던 어머니의 눈물, 우연히 잠을 깨어보면 내 이마 위로 한 방울, 두 방울씩 떨어지던 어머니의 눈물의 기도가 나를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였던 것이다.
내가 예수를 안 뒤, 나의 모든 생각과 삶은 바뀌었다. 나는 내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과 감정과 삶의 전체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내가 아직 그에게 바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는 뿌리 깊은 증오- 아버지에 대한 증오였다.
****
운전사가 나를 흔들어 깨웠다.
“터미널 입니다. 다 왔어요.”
순간적으로 잠이 들었나 보다. 시계를 보니 불과 10분이 지나 있었으나, 몸은 가뿐해 졌다.
차에서 내리자 상쾌한 대기가 온 몸의 피부를 다시 일깨우는 것이 느껴지며, 새로운 용기가 치솟았다. 어서 빨리 집으로 가야지. 그 동안에 밀렸던 공부와 인도하던 성경공부 모임의 회원들의 상태도 점검해 봐야 하니까.
대합실에 들어가 보니 사람들이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매표소에서 다섯시 반 표를 끊고 나서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별로 시장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30분쯤을 어정거리고 있어야 한다.
냄비우동을 시키고 나서 일간 스포츠를 뒤적이고 있다보니 식사가 나왔다.
냄비뚜껑을 여니 보글보글 끓으면서 맵싸~ 한 냄새를 풍기는 것이 갑자기 식욕이 동하는 것이다. 젓가락을 잡은 채로 눈을 감고 감사기도를 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뭔가 강력한 충격이 몸에 부딪히는 것을 느꼈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았으나 어떤 사건이 내게 벌어졌는지는 순간적으로 잘 포착되지 않았다.
내 눈에 띈 것은 방금 식탁 위에서 보글보글 끓으면서 식욕을 자극하던 냄비가 국수가락과 뜨거운 물을 나의 허벅지 부분에 흘려놓고 바닥에 폭삭 엎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뜨거운 물이 쏟아진 오른쪽 허벅지 부분이 화상을 입었는지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옆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어떤 아가씨가 안색이 창백해져서 어쩔 줄을 몰라 하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내 옆을 지나가다가 나의 냄비우동 그릇을 팔꿈치로 쳐서 땅바닥에 떨어뜨려 버린 것이다.
우리 아버지와 같은 족속은 어디에나 있군. 그렇게 생각하며 겁을 먹고 있는 아가씨를 흘끗 쳐다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님으로부터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을 배웠다.
또한 나는 어머니에게서 어떤 상황이든지 당황하거나 흥분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 그녀는 의식이 끝나면, 항상 우선 피를 닦고, 그 다음 머리를 빗었다. 그리고는 걸레를 가지고 방을 닦거나 깨진 것을 치우는 것이 순서였다.
뒷주머니에 있는 손수건을 꺼내서 얼굴에 묻은 것을 닦은 다음, 양복에 묻어있는 음식 찌꺼기를 조심스럽게 닦아내고, 휴지로 테이블을 대충 닦으니까 일단 정리는 된 것 같았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이제 이십분 밖에 없었고 식사는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우선 차를 타기 전에 바지를 갈아 입어야 한다. 이대로 나가다가 젖어 있는 부분이 얼어버리면 곤란하니까.
아직도 선 채로 얼어붙어 있는 그녀에게 살짝 웃음을 보내고 식사값을 지불하고 밖으로 나오려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가볍게 어깨를 두드리는 것이다. 돌아다 보니 그녀였다. 그녀는 더듬더듬, 애를 쓰며 말을 붙였다.
“저어... 다친 데는 없으세요? 정말... 너무 죄송해서... 어쩌면 좋을지...”
나는 그녀를 자세히 쳐다 보았다. 나이는 스물 일곱, 여덟쯤 키가 크고 깡마른 편에 검은색 바바리를 걸친 그녀는 지성적이나 우울질 형으로서 감정표현이 별로 없으며 사교성이 부족해서 공상이나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한번 화나면 골치 아프기 때문에 신경을 써서 대해주어야 하는 족속인데, 의외로 우수에 잠긴, 접근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묘한 매력을 던져주는 아가씨였다.
‘아름답구나’ 이상하게도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
“괜찮습니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죠. 참 좋은 취미를 가지셨군요.”
그리고는 돌아서서 가려고 하는데, 그녀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제가 세탁비와 식대는 드려야지요. 그리고 약국에라도 가 보셔야 할텐데...”
“걱정 안해도 괜찮아요. 이 정도면 견딜만 하니까.”
그려는 이제 안정을 되찾은 듯 총명해 보이는 눈매가 잔잔한 빛을 띄고 나를 올려다 보고 있었다.
“참 이상한 분이시군요. 그런데, 정말 화가 안나셨어요?”
조금 귀찮은 아가씨로군. 이럴때는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하는가.
나는 잠시 망설여 졌다. 그러나 조용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보고 무언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저도 질문을 하나 하지요.”
그녀의 더욱 의아해하는 표정을 보면서 나는 쿨룩! 하고 헛기침을 했다.
“아가씨께서 참으로 존경하고 사랑하는 어떤 분이 있다고, 그리고 그분의 삶과 인격을 본받고 싶은 분이 계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정말 어처구니 없도록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전혀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감사했으며, 상대를 위해서 축복을 했다면, 그분을 존경하는 아가씨도 사소한 작은 일에 화를 내거나 불평을 할 수는 없지 않을까요?”
나는 천천히 말을 했으나, 아가씨는 난데없는 엉뚱한 말에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데도 얼떨결에 대답했다.
“네. 그야 그렇지요.”
“저도 그렇습니다.”
짧게 대답하고 가볍게 목례를 한 후 화장실 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막 들어가려고 하는데, 그녀가 계속 종종걸음으로 따라 오더니 나의 팔을 잡고 다급한 목소리로 묻는 것이었다.
“그게 도대체 무슨 소리세요? 그분이 누구예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나는 상대방에게 호기심만 제공해 준 모양이었다.
“그분이 누구신지 알고 싶으십니까?”
나는 빙긋이 웃었다.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해왔다. 그리고 지금은 자연스러운 좋은 기회이다.
그래, 이 여자는 생명에 굶주려 있다. 그늘진 얼굴이 그녀의 삶에 대한 절망과 회의를 증거한다. 하긴 시커먼 옷에 저따위 표정을 짓고 좋은 생각을 할 리가 없지. 혹시 아나, 지금 자살할 곳이라도 물색 중인지. 그렇다면 내가 피곤하거나 시간이 부족한 것이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나는 마음을 바꾸었다.
“아가씨는 지금 어디로 가시는 길이죠?”
“서울행 버스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어요. 집이 서울이거든요.”
“아 그러세요. 차시간은?”
“여섯시예요.”
그렇다면 나보다 삼십분이 늦는군.
“그래요. 나도 지금 서울에 올라가는 길인데 다섯시 반 차예요. 어떻게 할까요. 아가씨와 차 한잔 나누고 싶은 기분도 드는데...”
그녀는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더니 결심한 듯 말했다.
“지금 매표소로 가면, 차 시간을 바꿀 수 있을까요?”
“물론, 바꿔줄 겁니다.”
“그러면 저도 다섯시 반 차로 바꿔 가지고 오겠어요.”
그리곤 살짝 미소를 띄우더니 매표소 쪽으로 걸어갔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는 자동판매기에서 커피를 두 잔 뽑아가지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녀는 벌써 버스의 맨 뒷자리의 창가 쪽에 앉아 있었다. 나는 다가가서 조심스럽게 커피르 ㄹ건네고,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출발하고 조금 시간이 흘렀는데도,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잘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녀도 그저 묵묵히 있을 뿐이어서 우리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지금, 직장에 다니고 계신 중인가요?”
한참만에 내가 침묵을 깨뜨렸다. 그녀는 가만히 있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군산에 아는 분이 계신가보죠?”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그냥 여행을 하고 있었나보죠? 여행을 좋아하시는 모양이군요.”
이번에는 고개를 흔들지 않고 갸우뚱 하고 있더니 갑자기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마치 취조를 받는 것 같군요.”
이러한 명랑성은 미처 기대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심 즐거워하면서 시비를 걸었다.
“물론 취조를 받고 있는 겁니다. 아가씨는 죄가 많은 사람이니까‘
그러자 아가씨는 재미있다는 듯이 눈을 반짝거렸다.
“그래요? 왜 내가 죄가 많은 사람이죠?”
이쯤에서 정식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책의 제목을 읽기 전에 책의 내용을 읽는 경우가 있나요?”
“음... 별로 없지요.”
“그래요. 그럼 아가씨의 제목은?”
그녀는 한번 더 실소를 터뜨리더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김 주연이라고 해요.”
“주연씨요... 참 좋은 이름이군요. 그런데 지구에서 사신지는 얼마나 되셨는지요?”
그녀는 피식 웃었으나 껍질을 잘 벗으려 하지 않았다.
"전 스물다섯부터 제 나이를 잊어버렸어요.“
“아, 그렇습니까. 참 안됐군요. 그럼 나이를 잊으신지 몇 년이나 지나셨지요?”
이번에는 한참동안 웃음을 터뜨리더니 결국 저항을 포기했는지 스물 아홉이라고 했다.
“저는 유 진하라고 합니다. 나이는 설흔 둘.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무드와 낭만을 좋아하는 편이지요. 서해의 바다가 미친 듯이 나를 부르고 있기에 한 주일 쯤 다녀오는 길입니다. 그녀와 나는 지금 깊은 사랑에 빠져있는 중이예요.”
그녀는 미소를 지었다.
“행복하시겠군요.”
“겨울 바다의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나를 매료시키는지... 그녀의 손길은, 파도는, 수없이 나를 어루만지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참 재미있어요. 너무 그가 수고하는 것 같아 나도 더러 외치기도 하고 노래도 부릅니다. 내 노래를 듣는 친구가 말리지요. ‘야, 이 친구야 그만 둬. 바다도 괴롭다고’ 그러면 나도 소리칩니다. ‘이 녀석아, 걱정하지 마라. 저놈은 내 노래를 좋아하고 있다구.”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장난기 어린 음성으로 물어보았다.
“노래를 잘 못부르시나보죠?”
나도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더군요.”
그리곤 말을 이었다.
“제가 아주 예전에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르면 옆집에 사는 아가씨들은 이를 갈았습니다. 그래서 어쩌다 아침에 눈이 마주치면, 출근하기에 바쁜, 그 바쁜 상황에서도 5분을 쏘아보고는 갔으니까요.”
그녀가 소리높여 웃었으므로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
“그녀는 그것이 충분히 시간을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믿었던 겁니다.”
“상상이 되는군요.”
“제가 열심히 노래하면 우리 어머니는 조용히 말씀하시지요. ‘얘야, 제발 남은 여생을 편안히 보내게 해다오! 가로.”
간신히 웃음을 멈춘 그녀는 계속 흥미를 가지고 내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말을 하는 것 보다는 듣는 편을 좋아하는 모양이다. 할 수 없이 혼자서 떠들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어렸을 때에는 참, 사람들과 섞이는 데에 서툴렀지요. 그래서 늘 혼자서 서성거리곤 했었는데 제가 참 즐겨했던 구경이 어떤 대머리 청년이 바둑을 두는 모습이었어요. 그는 항상 바둑을 두면서 흥얼거리고 있었지요. 그 사람은 누구일까. 아 만나 보고 싶네. 그 사람은 누구일까...”
“그 사람이 아까 미스터 유~ 이렇게 불러도 되나요?”
“이왕이면 진하형제라고 불러주시는 것이 좋겠어요.”
“그래요? 진하형제. 네. 그 사람이 아까 진하씨가 이야기한 그 분과 같은 사람인가요?”
“네. 맞아요. 하지만, 나도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이 얼마되지 않았어요. 나는 그 때 그 다음의 가사가 결국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매일 그 바둑 구경을 하려고 거리에 나갔지요. 하지만 결국 모르고 말았어요. 그 청년이 아는 구절은 그것이 전부였으니까.”
나는 다 식어버린 커피를 한 모금 들이마셨다. 어떤 음성이 내게 말해주더군요. 내가 바로 그분이다. 내가 바로 그 사람이야 라고.“
“바다 속에서요?”
“글쎄요. 바다속인지, 내 마음속인지 아니, 좀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는 그리스도였지요. 그는 내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그녀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납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당신은 크리스챤이군요?”
“네, 그래요.”
잠시 침묵이 스치고 지나갔다. 밖은 이제 지척을 분별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워졌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버스가 달리고 있는 소리만이 적막을 깨뜨릴 뿐,
“나는 주연씨의 마음이 어떠한지, 문제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알고있는 것은, 내게 예수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처럼, 주연자매에게도 그 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자매가 여행을 좋아하지만, 언제든 차가 목적지에 도착하면, 내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때 올아갈 고향이 없다면, 그 얼마나 비극적인 일이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있어서 나는 그녀의 표정을 잘 읽을 수가 없었다. 하여튼 나는 그녀에게 이야기 했다. 삶의 진정한 의미와 방향,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놀라운 자유와 안식을.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에 그녀는 입을 열었다.
“진하 형제가 음식점에서 가졌던 태도를 이제 조금 알 것 같군요. 그래요. 지금 이야기하고 있는 말씀은 이해가 가는 것 같아요. 정말 나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맡긴다는 것...”
그녀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그의 삶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하셨죠? 그러면, 그렇다면...”
“이럴 때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어떻게 하나요. 도저히,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을 당했을 때, 그리고 평생을 생각해도 그 한이 사라지지 않을 때에는..”
나는 드디어 문제의 핵심에 접어든 것을 알고, 바짝 긴장이 되었다. 이 위기를 넘기지 않으면 안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창밖을 한참 쳐다보고 있다가, 기도하는 심정으로 나는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국민학교 3학년이었을 때, 나는 집에서 가까운 교회의 어린이 주일학교에 다니고 있었지요. 그날은 교회의 수요일 예배 시간이었습니다....”
나는 커피를 담았던 빈 종이컵을 꾸겨서 쓰레기통에 집어 넣었다.
“그런데 설교시간에 전도사님이 이런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철수가 연못가에서 놀다가 구슬을 빠뜨렸는데, 어떻게 하면 이 구슬을 찾을 수 있을까요?’ 라고 주연자매 찾을 수 있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듣고 있기는 듣고 있는 모야이었다.
“아무도 거기에 대답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어떤 아이가 맨 뒤에서 대답하더군요. ‘전도사님, 먼저 연못이 조용해질 때까지 기다려요.’ 라고”
그녀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사실 아무도 연못이 흐트러져 있을 때에 그 구슬의 위치를 발견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기다려야 합니다. 시간이 흐르면 연못은 잔잔해지기 마련이니까.”
잠시 숨을 돌리고 나는 말을 이어갔다.
“나는 그 전도사님이 왜 그런 질문을 하셨는지, 지금은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이상하게 그 이야기는 잊혀지지 않더군요. 충분히 잔잔해질 때까지 기다려라...”
“....”
“우리의 마음은 마치 연못과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구슬이 떨어지고,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일고, 흙탕물이 일어나기도 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갑자기 흑! 하고 흐느꼈기 때문에 말이 중단되었다. 어떻게 위로할 바를 몰라 살며시 그녀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는데, 그러다보니 대사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음.. 아무튼, 사람은 누구나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지요. 자매는 먼저 구슬을 꺼내기 전에 충분히 쉬셔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품속에서 충분히 잔잔해질 때까지... 그리고 나서 시간이 흐르고, 상처가 아물면, 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겠지요.”
나의 대답이 그녀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나는 알 수 가 없었다. 그녀는 도대체 누구에게 고통을 당했을까? 실연? 사기? 강간? 그것은 그렇게 엄청난 고통이었을까? 수많은 의문이 마음 속에서 솟구쳤으나, 물어볼 만한 상황이 못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꺾어버리고 깊은 생각에 잠겨 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버스는 휴게실에 도착했다. 나는 밖으로 나와서 우동을 두 그릇을 사다가 버스에 가지고 올라왔으나 그녀는 가볍게 미소를 지을 뿐 쳐다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녀는 버스가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머리가 아픈 양 매만지기도 했고, 가끔 지루한 듯이 얼굴을 찌푸리고 시계를 보기도 하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잠을 청하는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그 모습이 너무도 애처롭게 느껴졌다. 그녀가 잠이 들 수 있도록 작은 실내등을 꺼 주었더니, 그녀는 살작 눈을 뜨고는 살포시 웃었다.
“고마워요.”
나도 잠을 청했으나, 여러 가지의 상념들이 수도 없이 뇌리를 스치는 바람에 도무지 잠이 들어지지 않았다.
왜 사람들은 하나 같이 상처를 받으면서 사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이것을 극복해야 할까? 나는 어떻게 이들을 도와줄 수가 있을까? 그리스도 아아 해답은 예수밖에 없는데...
버스는 드디어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짐을 받아들고 바깥으로 나왔다.
이제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 그리곤 각자의 싸움터를 향해서 가지 않으면 안된다. 택시 타는 곳까지 걸어나와서 그녀는 아쉬운 듯이 손을 내밀었다. 나는 힘을 주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셔서 감사해요. 참 좋은 분이군요. 오래 생각이 날 것 같아요.”
힘이 드는지, 그녀는 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정말, 그런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러나, 지금은 안될 것 같아요. 나는...”
그녀는 감정이 격해진 듯 눈물을 글썽거렸다.
“나는 도저히 그 사람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차라리 나 혼자 평생 고통을 당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도저히, 잊을 수가 없어요...”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말을 하려고 하더니 고개를 흔들고, 다시 눈에다 손을 가져갔다. 그런 채로 가만히 서 있더니 다시 웃음을 띄워올렸다.
“고마워요. 안녕히 가세요.”
나는 무엇인가 대답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휙 돌아서더니 저만큼 와 있는 택시를 행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를 붙잡을 수가 없었다. 택시와 함께 떠나는 그녀를 바라보면서 나는 쓰디쓰게 중얼거렸다.
“이것도 환상이군.”
나는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고 지하도 쪽으로 걸어갔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답답하고 납덩어리처럼 무거워지는 것이, 걸음이 잘 떨어지지가 않았다.
서글프게, 허무하게 떠나버린 그녀의 모습, 그런데 왜 그 모습이 내게 이렇게 강력한 충격파를 던지며 나를 심란하게 하고 있을까. 그녀는 왜 용서할 수 없으며, 스스로를 괴롭히고 있을까.
갑자기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섬광과도 같은 깨달음이 나의 뒷통수를 강타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 주연자매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다. 나도 그녀와 똑같다. 나도 그녀와 같이 상처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한참동안이나 우뚝하니 서 있었다. 수 많은 상념들을 정리하려고 노력하며 나는 그 자리에 멍청하게 서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나는 다시 마음의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다시 주안에 있는 평화가 마음 속 깊은 속에서 조용히 흐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성큼성큼 지하도를 걸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양쪽으로 쭈욱 늘어서 있는 쇼핑센타 중의 한 가게에 들어섰다. 넥타이를 하나 사려고 이것 저것 고르고 있는데 여점원 하나가 쪼르르 달려 오더니 상냥하게 말을 건네왔다.
“넥타이를 사실려구요? 선생님이 하실 건가요?”
나는 갑자기 터질 듯이 솟아오르는 기쁨을 억제하지 못해 활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내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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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한 넥타이를 가방에 집어 넣고 가게를 나오다가 나는 급하게 뛰어가는 어떤 여자와 부딪힐 뻔 했다. 넘어질 뻔한 몸을 간신히 가누고 이 무례한 사람을 쳐다보았더니 거기에는 숨이 턱에 닿은 주연자매가 뺨이 빨갛게 되어서 서 있는 것이었다.
“한참을 찾았어요.”
그리고는 숨을 할딱거리며 덧붙였다.
“냄비 우동 값을 물어주어야 하잖아요.”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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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목사님이 대학생 시절에 쓴 소설입니다. 1985년도에 총신학보에 실렸던 글입니다.*
사랑의 영성모임에서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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