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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동아일보] 아지랭이로 짠 비단 -이슬기

신춘문예 이슬기............... 조회 수 2042 추천 수 0 2004.04.19 23:27:50
.........
[동아일보 신춘]

해님은 일곱 개의 주머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겨우내 빛가루를 차곡차곡 채워 넣고 소중히 여기던 주머니였습니다.
겨울 바람이 긴 꼬리를 거두어 어디론가 슬며시 사라진 어느 날이었습니다.
해님은 주머니를 열어 그 속에 채워 넣었던 빛깔을 꺼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따스했어요.
˝자, 이젠 모두들 땅 나라로 날아가거라. 가서 좋은 일 많이 해야 한 다.˝
해님은 빙그레 웃으면서 제일 먼저 빨간 주머니를 풀었습니다.
빨간 빛가루가 소복하게 담겨 있었습니다. 티 한 점 없는 새빨간 빛가루가 소담스러웠습니다.
˝어떤 일을 할래?˝
˝제일 먼저 꽃나무로 가겠어요. 제 빛깔이 너무 빨갛쟎아요? 그래서 봄비에 저를 섞어 진달래 복숭아꽃을 연분홍으로 물들이겠어요.˝
˝그래 잘 날아가거라. 가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라.˝
해님은 빨간 빛가루의 말이 대견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거꾸로 들고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빨간 빛가루를 쏟아 놓았습니다.
빨간 빛가루들이 풀풀 날아 내렸습니다.
다음에 해님은 주황빛 주머니를 풀었습니다. 주머니 속에는 주황빛 가루들이 하나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넌 어디로 날아가고 싶니?˝
˝전 집집마다 잠자고 있는 아이들에게로 날아가겠어요. 그리고 아기 볼에 뽀뽀를 해 주겠어요. 그러면 아기들 볼이 발그레하게 피어나겠지요.˝
˝그래 참 좋은 생각을 했구나. 땅 나라에서 자라고 있는 아기들에게 골고루 예쁜 빛깔을 나누어 주도록 해라.˝
˝예.˝
해님은 주황빛 주머니도 거꾸로 들고 툭툭 털었습니다.
주황빛 가루들이 사르르 사르르 날아 흩어집니다.
해님은 이어 노란 주머니 뚜껑을 열었습니다.
노란 빛가루는 불빛처럼 눈이 부시고 환했습니다.
˝저는 개나리 나무에 노란 꽃초롱을 달고 싶어요. 아니 그렇게 할래요. 그리고 장다리 밭으로도 날아가겠어요. 제 빛을 원하는 나비 나래에도 빛깔을 나누어 주겠어요.˝
노란 빛가루가 또박또박 말했습니다.
˝그래 네 할 일도 많겠다. 네가 내려 앉으면 온 세상이 환하게 밝아지겠구나.˝
해님이 활짝 웃으면서 주머니를 거꾸로 들고 흔들었습니다.
눈부시게 노란 빛들이 살랑살랑 춤을 추듯이 흘러 내려갔습니다.
다음으로 해님이 집어든 주머니는 초록빛 주머니였습니다.
주머니 끈을 풀자 가득 들어 있던 초록빛 가루 가운데 마음이 급한 가루들이 팔랑팔랑 날아 나왔습니다.
˝원 녀석들 이렇게도 급한가?˝
˝그럼요, 해님. 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게 얼마나 답답했다고요.˝
˝예, 빨리 날아 내려가서 겨우내 찬 바람에 시달린 나무들에게 옷을 입혀 주어야 해요.˝
초록빛 가루들이 잎새처럼 작은 입을 오물거리면서 떠들었습니다.
˝염려마라.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다 보내 줄 테니... 그런데 성질 급하게 서둘다가 잘못을 저지를라.˝
˝네?˝
˝이를테면 엉뚱하게도 물 속으로 뛰어 든다든가...˝
˝에이, 해님도. 일부러 그러시는군요. 우리는 나무 마디마다 있는 잎눈에 앉을 거여요. 거기서 새로 돋아나는 잎눈을 모두 초록빛으로 물들일 거여요.˝
해님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일부러 그래 본 거다. 날아가거라. 어서 날아가.˝
해님은 초록빛 주머니도 훌훌 쏟았습니다.
파란 색 주머니 차례가 되었습니다.
하늘처럼 말간 파란 빛가루가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자, 너도 어서 가야지. 너는 무슨 일을 해야 되노?˝
˝저는 해님, 우리 하늘 나라에 남아서 하늘을 파랗게 칠하겠어요.˝
파란 빛가루가 조심스럽게 말을 했습니다.
˝옳거니, 그래야지. 우리 하늘에도 물감을 칠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하늘의 빛깔이 모두 없어질 테니까.˝
˝예.˝
˝그렇지만 너희들도 땅 나라로 날아가고 싶을 텐데? 그리고 땅에서도 네가 있어야 되고...˝
˝그럼 이렇게 하죠. 반은 남아 하늘을 물들이고 반은 땅 나라로 내려가겠어요.˝
˝......˝
파란 빛가루는 잠시 쉬더니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물로 뛰어들겠어요. 산 골짜기에 얼어붙은 얼음을 녹여서 그 흐르는 물을 파랗게 물들이고 강으로 바다로...˝
˝그래.˝
해님은 파란 빛 주머니도 툭툭 털어 빛가루를 쏟았습니다.
빛가루는 훨훨 날아 하늘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또 땅 나라로 팔랑팔랑 날아 내리기도 했습니다.
두 개 남은 주머니 가운데 남빛 주머니도 뚜껑이 열려졌습니다.
남빛 가루들도 해님의 손으로부터 풀려나 땅 나라를 향해 날아갔습니다.
마지막으로 보랏빛 주머니 끈이 풀려졌습니다.
˝자 네가 마지막이다. 오랫동안 기다렸지?˝
˝네.˝
˝너도 날아가 좋은 일을 해야지.˝
˝그럼요. 우린 애들의 꿈 속으로 들어가겠어요. 꿈 속에 들어가 꿈을 곱게 물들여 주겠어요.˝
˝그래, 그것도 참 좋은 생각이다.˝
해님은 마지막 남은 보랏빛 가루들을 한 움큼씩 꺼내 훌훌 뿌렸습니다.
보랏빛 가루들도 모두 날아갔습니다.
하늘은 해님이 뿌려 놓은 빛가루로 가득 찼습니다.
해님은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가루들이 내려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머니마다 들어 있던 티 한 점 없이 고운 빛가루들이 무리져서 날아가는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왔습니다.
빛 주머니를 모두 털어 땅 나라로 날려 보낸 해님은 웬지 허전했습니다.
´내 그 녀석들을 가득가득 채울 때는 꿈도 컸었는데...´
자꾸만 뭔가 잃어버린 것 같았습니다.
´모두들 좋은 일을 하려고 땅 나라로 날아갔는데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노.´
해님은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그러나 생각을 말자고 해도 자꾸만 마음 한 구석이 텅 비어지는 것같았습니다.
주머니 속을 다시 들여다 보았습니다. 텅 빈 주머니가 마음을 더욱 허전하게 했습니다.
´아냐, 이래서는 안 되지. 그래, 무슨 일이든지 하자. 그리고 잊어버리자.´
이렇게 마음먹은 해님은 주머니를 툭툭 털어 가장자리에 남아 있는 빛가루들을 모았습니다. 일곱 개의 주머니에서 다 긁어 모으니까 꽤 많이 모였습니다.
모두 한 곳에 모인 일곱 개의 가루들은 서로 섞여 하얀 빛이 되었습니다.
´옳지, 이것으로는 비단을 짜자.´
해님은 실을 뽑기 시작했습니다. 아지랭이 실이었습니다.
아지랭이 실은 누에고치에서 실이 풀리듯 쉬지 않고 풀려 나왔습니다.
해님은 종일토록 뽑은 실에 미리 마련된 하얀 빛가루로 물을 들였습니다. 그리고는 베를 짰습니다.
짤깍, 짤깍, 짤깍-
해님이 짠 비단은 참으로 아름다운 비단이었습니다.
빨간 빛가루가 봄비와 같이 피워 놓은 연분홍 복사꽃, 살구꽃도 수로 놓였습니다.
주황색이 물들인 불그스름하게 피어나는 아기의 웃음 띤 얼굴, 노란 빛이 물들여 놓은 개나리, 산수유도 무늬가 되었습니다.
제비입처럼 뾰족하게 나온 연초록 잎눈, 싱싱하게 자라는 청보리 이삭, 티 한 점 없는 푸른 하늘, 들판도 수놓였습니다.
방긋이 웃는 얼굴로 쌔근쌔근 자고 있는 아이의 보랏빛 꿈도 수로 놓였습니다.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 왔습니다.
온 세상은 움직이는 비단이었습니다.
해님은 빙그레 웃었습니다.  ⓒ이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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