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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둡게 내려앉은 밤하늘이 하얀 보름달을 반쯤 먹어버린 어느 날 밤, 홍당무는 오줌이 마려워 자리에서 일어나 마당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깜짝 놀란 홍당무는 도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무서워서 꼼짝도 할 수 없었습니다.
등을 한껏 구부린 채 무슨 일인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삐그덕 하며 뒷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반쯤 열려진 뒷문 밖 배나무 밭에는 희미한 달빛이 잠자는 흙들을 어루만져주고 있을 뿐, 사람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 소리였나?´
홍당무는 중얼거리며 오줌을 누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별아, 별아!˝
다음 날 아침 할아버지가 흥분된 목소리로 홍당무를 불렀습니다.
˝별아,어서 일어나! 간밤에 우리 집에 손님이 왔구나.˝
홍당무는 어젯밤 일이 생각나서 잠옷을 입은 채 허둥지둥 마당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할아버지, 어젯밤에 그, 그, 그 도둑이 들어오는 소, 소리를 들었어요.˝
˝도둑이 아니란다. 저기 좀 보렴.˝
할아버지는 연장통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며 배나무 밭을 가리켰습니다.
눈부시게 하얀 배꽃들이 몽실몽실 피어 있는 배나무 밭 중간쯤에 원숭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 하, 할아버지. 저, 저게 뭐예요?˝
˝글쎄 말이다. 어젯밤에 우리 집에 왔다가 저렇게 된 모양인데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곧 풀어줄 테니...˝
홍당무가 배나무 가까이 다가가자 원숭이는 긴 팔을 뻗쳐 올리며 더욱 큰소리로 꺅꺅거렸습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원숭이는 자유로운 몸이 아니었습니다. 목에 채워져 있는 목걸이가 배나무 가지에 엉켜 혼자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옳지. 여기 있구나.˝
마땅한 연장을 찾았는지 할아버지는 원숭이 목에 채워져 있던 목걸이를 쉽게 끊어주었습니다. 원숭이는 살겠다는 듯 큰 입을 귀밑으로 올리며 꺅꺅거렸습니다.
˝그런데 하, 하, 할아버지 웬 워, 원숭이예요?˝
˝글세 잘 모르겠구나. 동물원에서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고... 부잣집에서는 원숭이도 키우고, 도마뱀 같은 것도 키운다고 하더라만, 혹시 우리 과수원 밑에 새로 지은 그 별장 주인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원숭이를 두 팔로 안은 할아버지는 원숭이 머리와 목을 번갈아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저도 해, 해볼래요.˝
홍당무는 할아버지를 졸라 원숭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원숭이도 홍당무가 싫지 않은지 졸린 아이처럼 얌전하게 홍당무의 가슴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허허, 이 녀석, 별이 네가 좋은가 보구나. 도망치려 하지도 않고 너한테 푹 안겨 잠이라도 잘 모양이니 말이다.˝
˝하, 하, 할아버지 이 원숭이 우, 우리가 길러요.˝
˝곧 주인이 찾으러 올 거다. 금방이라도 주인이 나타나면 돌려줘야 하니까 별이 네가 잘 데리고 있어라. 할애비는 밭에 갔다 오마.˝
할아버지는 친구 없이 혼자 지내는 홍당무가 안쓰러웠는지 홍당무에게 원숭이를 맡기고 집을 나섰습니다.
사실 홍당무의 진짜 이름은 김 별입니다. 하지만 수줍음이 너무 많아 얼굴이 자주 빨개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별이라는 이름보다 별명을 더 즐겨 부릅니다.
별이를 맡아 키우고 있는 할아버지는 걱정이 많습니다. 별이 부모님이 별이를 맡기고 중국으로 장사하러 떠날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할아버지랑 같이 지내기 시작한 후로 별이가 갑자기 말을 더듬게 된 겁니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매사에 자신감마저 잃어버린 것 같아 할아버지는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게다가 별이는 홍당무라고 놀려대는 동네 개구쟁이 녀석들 때문에 통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홍당무에게 오늘은 친구가 생긴 셈입니다.
홍당무는 원숭이와 어떻게 놀아야 할지 한참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원숭이는 사람들과 어떻게 노는지를 잘 아는 것 같았습니다.
하얀 얼굴에 긴 팔을 가지고 있는 원숭이는 울룩불룩 뻗어 있는 배나무 가지 위를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며 홍당무의 시선을 자기에게 집중시키는 듯 하더니 이내 배꽃을 따서 홍당무에게 던졌습니다. 홍당무가 웃으면서 떨어진 배꽃을 줍자 원숭이는 배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빙그르르 돌며 ´까악까악´ 같이 웃었습니다.
홍당무는 원숭이가 금방 좋아졌습니다. 목을 옭아매는 목걸이도 채우지 않았는데 도망칠 생각도 안 하고 자기와 놀아주는 원숭이가 마치 친구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났지만 원숭이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홍당무는 원숭이 주인이 영영 나타나지 않기를 빌었습니다.
원숭이는 홍당무의 훌륭한 말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홍당무가 말을 많이 더듬어도 지루해 하지 않고 끝까지 듣고 있다가 홍당무 얘기가 끝나면 재미있었다는 듯 긴 팔을 머리 위로 뻗쳐 올려 손뼉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시장에 내려온 홍당무는 돼지 저금통을 털어 온 돈으로 원숭이가 먹을 만한 것들을 샀습니다. 시장 사람들도 홍당무가 데리고 다니는 원숭이가 귀여워서인지 한번씩 원숭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홍당무야,그 원숭이 어디서 난 거냐?˝
우유를 사러 가게에 들어가자 주인 아주머니는 신기한 듯 원숭이를 찬찬히 살펴보며 홍당무에게 물었습니다.
˝우, 우, 우리 집에 놀러 온 소, 손님이에요.˝
˝손님?˝
˝네, 우, 우리 집에 혼자 차, 찾아왔어요. 이, 이, 이제 내 친구예요.˝
˝홍당무는 좋겠구나. 친구가 생겨서... 호호호.˝
가게 아주머니는 한참을 웃었습니다., 얼굴이 빨개지면서 더듬거리는 홍당무 모습이 우스워서인지 아니면 꺅꺅거리는 원숭이 모습이 재미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자기 별명을 부르며 호들갑스럽게 웃는 아주머니 때문에 홍당무는 다시 시무룩해졌습니다.
홍당무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까지 더듬는 자기 모습이 싫었습니다.
웬일인지 친구들하고 얘기하거나 같이 놀 때는 집에서 할아버지와 얘기 할 때보다 더 많이 더듬게 됩니다.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거울을 보며 연습도 해 보고, 동화책을 큰소리로 읽어 보기도 했지만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나더러 마, 말더듬이 홍당무라고 놀려. 왜 그, 그, 그런지 모르겠어. 내 이름은 김 별인데 아무도 내,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난 네가 나처럼 마, 마, 말을 더듬어도 되니까 말을 할 수 있는 사,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 그래서 내 이름도 불러주고 내 친한 치, 치,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단 말이야.˝
홍당무는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 원숭이를 내려놓으면 힘없이 말했습니다.
원숭이는 홍당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홍당무가 손에 쥐어준 바나나를 반이나 베어 먹고서는 기우뚱기우뚱거리며 언덕길을 올라갔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언덕 위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는지 긴 나뭇가지를 허리춤에 찬 동네 아이들이 검은 그림자를 앞세우며 원숭이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중에서 대장 노릇이라도 한 모양인지 어린 참나무 잎으로 모자를 만들어 쓴 아이가 두 손으로 원숭이를 잡아 올렸습니다.
˝이게 웬 원숭이냐? 얘들아, 이 원숭이 좀 봐!˝
대장 아이는 발버둥치는 원숭이를 와락 끌어안더니 제 친구들을 향해 목청을 높이며 말했습니다.
˝얘들아! 이 원숭이는 적들의 첩자일 거다. 우리 포로로 만들자!˝
˝우와, 우리 대장 만세다. 만세!˝
대장 아이의 외침에 멋모르는 동네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원숭이를 에워쌌습니다.
홍당무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평소에 자기를 놀려대던 그 짓궂은 아이들이 이제 자기의 원숭이를 괴롭히려 하는 것이 아닙니까? 홍당무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쑥스럽거나 창피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원숭이를 지켜줘야 하겠다는 생각이 울컥 솟았기 때문입니다.
홍당무는 원숭이를 낚아챈 그 대장 아이를 향해 냅다 소리쳤습니다.
˝야! 그, 그, 그 원숭이 내, 내려놔. 내 워, 워, 원숭이란 말이야.˝
동네 아이들은 홍당무의 등장이 의외라는 듯 언덕 위에서 홍당무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말했습니다.
˝오호, 홍당무였구나. 어째서 이게 네 원숭이란 말이야? 혼자 뒤뚱거리며 가는 걸 내가 잡았단 말이야.˝
˝아, 아니야. 그, 그 원숭이는 내 치, 친구란 말이야!˝
˝친구! 원숭이랑 친구란 말이야? 얘들아, 이 말더듬이 홍당무가 원숭이랑 친구란다. 우하핫...˝
대장 아이는 진짜 자기가 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웃음 소리까지 장군 흉내를 내며 홍당무를 놀려댔습니다.
홍당무는 원숭이와 자기를 괴롭히는 동네 아이들을 혼내주고 싶었습니다. 원숭이를 내놓으라고 다시 한 번 큰소리로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홍당무는 무릎을 꿇고 불쌍하게 사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얘들아, 그, 그 워, 원숭이 돌려줘. 하, 하, 할아버지께서 진짜 주,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내, 내가 잘 데, 데리고 있으라고 하, 하셨단 말이야. 응? 얘들아, 원숭이 돌려줘.˝
˝그것 봐, 네 것도 아니면서 뭘 그래? 얘들아 우리 본부로 가자!˝
대장 아이의 명령을 받은 아이들은 불쌍하게 발버둥치는 원숭이를 걸쳐 메고서 언덕을 올라 갔습니다.
아이들 어깨에 거꾸로 매달려 홍당무를 보는 원숭이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습니다., 홍당무는 원숭이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용기 없는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하얀 솜사탕처럼 몽실모실 피어 올랐던 언덕 위의 배꽃들도 홍당무를 꾸짖으며 호르륵 호르륵 길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넌 말더듬이 홍당무에다 용기 없는 겁쟁이야.´
홍당무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자신을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안 돼! 저 녀석들이 원숭이를 데리고 가면 계속 괴롭히고 먹이도 제대로 안 줄 거야. 저 원숭이는 내 친군데.´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용기를 낸 홍당무는 주먹을 불끈 쥐고 대장 아이를 뒤쫓아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용기 없고 비겁한 홍당무로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좋은 친구가 돼 주었던 원숭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야! 내 원숭이 돌려줘.˝
˝왜 이래, 홍당무! 너 정신 있는 거야? 너 우리가 무섭지도 않아?˝
대장 아이는 어깨를 잔뜩 세우며 홍당무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원숭이는 내 친구란 말이야. 왜 내 원숭이를 강제로 뺏어가냐 말이야. 어서 돌려줘!˝
˝말더듬이홍당무가 웬일로 큰소리야? 게다가 이제는 말도 더듬지 않잖아!˝
대장 아이를 위해 만세를 불렀던 아이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이 슬그머니 대장 아이에게 귀띔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원숭이를 구하기 위해 용기 있게 대장 아이 앞에 선 홍당무는 더 이상 말더듬이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어서 돌려달란 말이야. 내 말 안 들려!˝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대장 아이에게 달려든 홍당무는 다시 한 번 소리쳤습니다.
˝야! 홍당무 왜 이래? 우리 전쟁 놀이 하는데 포로로 잡힌 거란 말이야. 어서 방해하지 말고 비켜!˝
홍당무의 갑작스러운 거친 행동에 대장 아이도 놀랐지만 대장 체면에 고분고분 내어 줄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원숭이 돌려주기 전에는 절대로 이 앞을 못 지나갈 거야.˝
홍당무는 양팔을 벌려 언덕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저리 비키라니까!˝
대장 아이도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한 손으로 원숭이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 홍당무를 밀어냈습니다.
바로 그 때 원숭이가 대장 아이의 품에서 빠져 나와 길 옆의 배나무 가지에 매달렸습니다.
홍당무는 재빨리 원숭이를 낚아채 언덕을 뛰어 올라갔습니다. 매일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이었기에 동네 아이들을 따돌리기는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야, 홍당무 거기 서! 거기 서란 말이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리둥절해진 동네 아이들은 홍당무를 열심히 뒤쫓아갔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산그림자가 숨겨줬는지 아니면 배나무들이 숨겨줬는지 홍당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홍당무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원숭이를 위해 용기있는 행동을 한 자기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게다가 대장 아이에게 큰소리칠 때 더듬지 않았던 사실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원숭이도 그런 홍당무가 자랑스럽다는 듯 동그란 눈을 꿈벅이며 홍당무의 얼굴을 계속 비벼댔습니다.
홍당무와 원숭이는 어느새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원숭이는 홍당무에게 많은 즐거움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새하얗던 배꽃이 흐드득 떨어지던 그 날 밤, 홍당무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습니다.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누구세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할아버지는 마당에 들어서는 안경 쓴 아주머니와 예쁜 여자아이를 보며 불안한 듯 물었습니다.
˝네, 저희는 저 아래 새로 지은 별장에 얼마 전부터 내려와 있는 사람인데요. 우리가 기르던 원숭이가 이곳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왔습니다. 우리 아이가 데리고 놀던 원숭이인데 며칠 전에 잃어버렸거든요. 아까 시장에 갔었는데 가게 아주머니가 이 댁에 한 번 가보라고 해서...˝
안경 쓴 아주머니는 할아버지가 잘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차근차근 말했습니다.
˝아, 그랬지요. 요 며칠 전에 우리 배나무 밭에 들어왔다가 목걸이가 가지에 엉켜 꼼짝없이 우리 집에 있게 됐지요. 얘, 별아! 원숭이 주인이 오셨구나. 어서 나와 보렴.˝
홍당무는 원숭이를 돌려주기 싫어 도망치려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주머니 치마를 꼭 잡고 원숭이 찾기만 기다리는 여자아이 때문이었지요.
멀뚱거리며 자기를 쳐다보는 원숭이에게 짧은 입맞춤을 한 홍당무는 아무 말 없이 아주머니에게 원숭이를 안겨 주었습니다.
˝옳아! 네가 홍당무였구나. 우리 원숭이 잘 데리고 있어 줘서 고맙다. 예림아, 미미 여기 있다.˝
아주머니는 원숭이를 곧바로 여자아이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여자아이는 원숭이를 쓰다듬으며 반가워했습니다.
˝우리 미미 돌려줘서 고마워. 내일 서울 올라갈 때까지 미미를 못 찾을까 봐 걱정했었는데 정말 고마워.˝
˝아니야, 내, 내가 고마워. 정말 좋은 원숭이더라. 아프지 않게 잘 키워 줘.˝
홍당무는 며칠 동안 정이 들어버린 원숭이와 헤어지게 되어 정말 슬펐습니다.
˝잘 가! 이름이 미미였구나. 네 이름을 몰라서 한 번도 불러주지 못했는데. 고마웠어. 미미야! 네 덕분에 이제 나, 나도 씩씩해졌는데 이제 헤어지게 되는구나. 안녕!˝
˝정말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미미는 진짜 주인을 만난 걸 아는지 꼼짝도 안 하고 여자아이 품에 안겨 홍당무를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홍당무는 원숭이도 자기와의 이별을 슬퍼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까맣게 영근 포도알 같던 눈동자에 하얀 배꽃을 닮은 눈물이 내려앉아 있었거든요. 물론 홍당무 혼자만 보았을 겁니다.
아주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온 할아버지는 홍당무를 마당으로 불러냈습니다.
˝별아, 그런데 아까 너 얘기할 때 말이다. 말을 거의 더듬지 않더구나. 너도 알고 있냐?˝
˝네, 할아버지. 아까 시장에 갔다가 지, 집으로 오는 길에...˝
홍당무는 자기도 신기하다는 듯 동네 아이들을 만났던 일을 할아버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원숭이를 그냥 내버려둘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원숭이를 구해주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어 덩치 큰 대장 아이에게 대들어 원숭이와 같이 도망쳤다는 얘기와 함께, 큰소리로 자신 있게 얘기하니까 말도 더듬지 않게 되고 자신감이 생기더란 얘기까지 할아버지에게 자랑처럼 늘어놓았습니다.
˝그랬었구나! 우리 별이가 씩씩해진 것 같아 이 할애비도 기분이 좋구나.˝
˝네, 할아버지 저, 저 자신 있어요. 얼굴이 빨갛게 놀려도 이제부턴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예요. 말도 더듬지 않을 거구요. 정말 자신 있어요.˝
힘주어 말하는 홍당무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났습니다.
홍당무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미미와의 추억은 하루하루 새롭게 차 오르는 달처럼 홍당무에게 항상 새로운 용기를 줄 겁니다.
달 그림자 밑에 숨어 있던 별들이 밤하늘에 자기들만의 별자리를 만들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홍당무도 잃어버렸던 자기의 별을 찾기 위해 더욱 씩씩한 하루하루를 보낼 겁니다. (*)
등을 한껏 구부린 채 무슨 일인가 일어나길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삐그덕 하며 뒷문이 열렸습니다. 그러나 반쯤 열려진 뒷문 밖 배나무 밭에는 희미한 달빛이 잠자는 흙들을 어루만져주고 있을 뿐, 사람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바람 소리였나?´
홍당무는 중얼거리며 오줌을 누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별아, 별아!˝
다음 날 아침 할아버지가 흥분된 목소리로 홍당무를 불렀습니다.
˝별아,어서 일어나! 간밤에 우리 집에 손님이 왔구나.˝
홍당무는 어젯밤 일이 생각나서 잠옷을 입은 채 허둥지둥 마당으로 뛰어 나왔습니다.
˝할아버지, 어젯밤에 그, 그, 그 도둑이 들어오는 소, 소리를 들었어요.˝
˝도둑이 아니란다. 저기 좀 보렴.˝
할아버지는 연장통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며 배나무 밭을 가리켰습니다.
눈부시게 하얀 배꽃들이 몽실몽실 피어 있는 배나무 밭 중간쯤에 원숭이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 하, 할아버지. 저, 저게 뭐예요?˝
˝글쎄 말이다. 어젯밤에 우리 집에 왔다가 저렇게 된 모양인데 잠깐만 기다려라. 내가 곧 풀어줄 테니...˝
홍당무가 배나무 가까이 다가가자 원숭이는 긴 팔을 뻗쳐 올리며 더욱 큰소리로 꺅꺅거렸습니다.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니 원숭이는 자유로운 몸이 아니었습니다. 목에 채워져 있는 목걸이가 배나무 가지에 엉켜 혼자 힘으로는 빠져 나올 수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옳지. 여기 있구나.˝
마땅한 연장을 찾았는지 할아버지는 원숭이 목에 채워져 있던 목걸이를 쉽게 끊어주었습니다. 원숭이는 살겠다는 듯 큰 입을 귀밑으로 올리며 꺅꺅거렸습니다.
˝그런데 하, 하, 할아버지 웬 워, 원숭이예요?˝
˝글세 잘 모르겠구나. 동물원에서 여기까지 왔을 리는 없고... 부잣집에서는 원숭이도 키우고, 도마뱀 같은 것도 키운다고 하더라만, 혹시 우리 과수원 밑에 새로 지은 그 별장 주인 것인지도 모르겠구나.˝
원숭이를 두 팔로 안은 할아버지는 원숭이 머리와 목을 번갈아 어루만지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할아버지, 저도 해, 해볼래요.˝
홍당무는 할아버지를 졸라 원숭이를 품에 안았습니다. 원숭이도 홍당무가 싫지 않은지 졸린 아이처럼 얌전하게 홍당무의 가슴에 몸을 기대었습니다.
˝허허, 이 녀석, 별이 네가 좋은가 보구나. 도망치려 하지도 않고 너한테 푹 안겨 잠이라도 잘 모양이니 말이다.˝
˝하, 하, 할아버지 이 원숭이 우, 우리가 길러요.˝
˝곧 주인이 찾으러 올 거다. 금방이라도 주인이 나타나면 돌려줘야 하니까 별이 네가 잘 데리고 있어라. 할애비는 밭에 갔다 오마.˝
할아버지는 친구 없이 혼자 지내는 홍당무가 안쓰러웠는지 홍당무에게 원숭이를 맡기고 집을 나섰습니다.
사실 홍당무의 진짜 이름은 김 별입니다. 하지만 수줍음이 너무 많아 얼굴이 자주 빨개지기 때문에 사람들은 별이라는 이름보다 별명을 더 즐겨 부릅니다.
별이를 맡아 키우고 있는 할아버지는 걱정이 많습니다. 별이 부모님이 별이를 맡기고 중국으로 장사하러 떠날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할아버지랑 같이 지내기 시작한 후로 별이가 갑자기 말을 더듬게 된 겁니다. 부모님과 떨어져 지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아서인지 매사에 자신감마저 잃어버린 것 같아 할아버지는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게다가 별이는 홍당무라고 놀려대는 동네 개구쟁이 녀석들 때문에 통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홍당무에게 오늘은 친구가 생긴 셈입니다.
홍당무는 원숭이와 어떻게 놀아야 할지 한참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원숭이는 사람들과 어떻게 노는지를 잘 아는 것 같았습니다.
하얀 얼굴에 긴 팔을 가지고 있는 원숭이는 울룩불룩 뻗어 있는 배나무 가지 위를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며 홍당무의 시선을 자기에게 집중시키는 듯 하더니 이내 배꽃을 따서 홍당무에게 던졌습니다. 홍당무가 웃으면서 떨어진 배꽃을 줍자 원숭이는 배나무 꼭대기에 올라가 빙그르르 돌며 ´까악까악´ 같이 웃었습니다.
홍당무는 원숭이가 금방 좋아졌습니다. 목을 옭아매는 목걸이도 채우지 않았는데 도망칠 생각도 안 하고 자기와 놀아주는 원숭이가 마치 친구처럼 느껴졌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났지만 원숭이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홍당무는 원숭이 주인이 영영 나타나지 않기를 빌었습니다.
원숭이는 홍당무의 훌륭한 말동무가 되어 주었습니다. 홍당무가 말을 많이 더듬어도 지루해 하지 않고 끝까지 듣고 있다가 홍당무 얘기가 끝나면 재미있었다는 듯 긴 팔을 머리 위로 뻗쳐 올려 손뼉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시장에 내려온 홍당무는 돼지 저금통을 털어 온 돈으로 원숭이가 먹을 만한 것들을 샀습니다. 시장 사람들도 홍당무가 데리고 다니는 원숭이가 귀여워서인지 한번씩 원숭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홍당무야,그 원숭이 어디서 난 거냐?˝
우유를 사러 가게에 들어가자 주인 아주머니는 신기한 듯 원숭이를 찬찬히 살펴보며 홍당무에게 물었습니다.
˝우, 우, 우리 집에 놀러 온 소, 손님이에요.˝
˝손님?˝
˝네, 우, 우리 집에 혼자 차, 찾아왔어요. 이, 이, 이제 내 친구예요.˝
˝홍당무는 좋겠구나. 친구가 생겨서... 호호호.˝
가게 아주머니는 한참을 웃었습니다., 얼굴이 빨개지면서 더듬거리는 홍당무 모습이 우스워서인지 아니면 꺅꺅거리는 원숭이 모습이 재미있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자기 별명을 부르며 호들갑스럽게 웃는 아주머니 때문에 홍당무는 다시 시무룩해졌습니다.
홍당무는 얼굴이 빨개지고 말까지 더듬는 자기 모습이 싫었습니다.
웬일인지 친구들하고 얘기하거나 같이 놀 때는 집에서 할아버지와 얘기 할 때보다 더 많이 더듬게 됩니다. 말을 더듬지 않으려고 거울을 보며 연습도 해 보고, 동화책을 큰소리로 읽어 보기도 했지만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이 나더러 마, 말더듬이 홍당무라고 놀려. 왜 그, 그, 그런지 모르겠어. 내 이름은 김 별인데 아무도 내, 내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난 네가 나처럼 마, 마, 말을 더듬어도 되니까 말을 할 수 있는 사,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그, 그래서 내 이름도 불러주고 내 친한 치, 치, 친구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단 말이야.˝
홍당무는 집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에 원숭이를 내려놓으면 힘없이 말했습니다.
원숭이는 홍당무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홍당무가 손에 쥐어준 바나나를 반이나 베어 먹고서는 기우뚱기우뚱거리며 언덕길을 올라갔습니다.
그 때였습니다.
언덕 위에서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는지 긴 나뭇가지를 허리춤에 찬 동네 아이들이 검은 그림자를 앞세우며 원숭이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중에서 대장 노릇이라도 한 모양인지 어린 참나무 잎으로 모자를 만들어 쓴 아이가 두 손으로 원숭이를 잡아 올렸습니다.
˝이게 웬 원숭이냐? 얘들아, 이 원숭이 좀 봐!˝
대장 아이는 발버둥치는 원숭이를 와락 끌어안더니 제 친구들을 향해 목청을 높이며 말했습니다.
˝얘들아! 이 원숭이는 적들의 첩자일 거다. 우리 포로로 만들자!˝
˝우와, 우리 대장 만세다. 만세!˝
대장 아이의 외침에 멋모르는 동네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원숭이를 에워쌌습니다.
홍당무는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평소에 자기를 놀려대던 그 짓궂은 아이들이 이제 자기의 원숭이를 괴롭히려 하는 것이 아닙니까? 홍당무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습니다. 쑥스럽거나 창피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원숭이를 지켜줘야 하겠다는 생각이 울컥 솟았기 때문입니다.
홍당무는 원숭이를 낚아챈 그 대장 아이를 향해 냅다 소리쳤습니다.
˝야! 그, 그, 그 원숭이 내, 내려놔. 내 워, 워, 원숭이란 말이야.˝
동네 아이들은 홍당무의 등장이 의외라는 듯 언덕 위에서 홍당무를 내려다보며 비웃듯 말했습니다.
˝오호, 홍당무였구나. 어째서 이게 네 원숭이란 말이야? 혼자 뒤뚱거리며 가는 걸 내가 잡았단 말이야.˝
˝아, 아니야. 그, 그 원숭이는 내 치, 친구란 말이야!˝
˝친구! 원숭이랑 친구란 말이야? 얘들아, 이 말더듬이 홍당무가 원숭이랑 친구란다. 우하핫...˝
대장 아이는 진짜 자기가 장군이라도 된 것처럼 웃음 소리까지 장군 흉내를 내며 홍당무를 놀려댔습니다.
홍당무는 원숭이와 자기를 괴롭히는 동네 아이들을 혼내주고 싶었습니다. 원숭이를 내놓으라고 다시 한 번 큰소리로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홍당무는 무릎을 꿇고 불쌍하게 사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얘들아, 그, 그 워, 원숭이 돌려줘. 하, 하, 할아버지께서 진짜 주, 주인이 나타날 때까지 내, 내가 잘 데, 데리고 있으라고 하, 하셨단 말이야. 응? 얘들아, 원숭이 돌려줘.˝
˝그것 봐, 네 것도 아니면서 뭘 그래? 얘들아 우리 본부로 가자!˝
대장 아이의 명령을 받은 아이들은 불쌍하게 발버둥치는 원숭이를 걸쳐 메고서 언덕을 올라 갔습니다.
아이들 어깨에 거꾸로 매달려 홍당무를 보는 원숭이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습니다., 홍당무는 원숭이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용기 없는 자신을 원망하는 것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하얀 솜사탕처럼 몽실모실 피어 올랐던 언덕 위의 배꽃들도 홍당무를 꾸짖으며 호르륵 호르륵 길바닥에 떨어졌습니다.
´넌 말더듬이 홍당무에다 용기 없는 겁쟁이야.´
홍당무는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자신을 원망했는지 모릅니다.
´안 돼! 저 녀석들이 원숭이를 데리고 가면 계속 괴롭히고 먹이도 제대로 안 줄 거야. 저 원숭이는 내 친군데.´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용기를 낸 홍당무는 주먹을 불끈 쥐고 대장 아이를 뒤쫓아갔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용기 없고 비겁한 홍당무로 남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좋은 친구가 돼 주었던 원숭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야! 내 원숭이 돌려줘.˝
˝왜 이래, 홍당무! 너 정신 있는 거야? 너 우리가 무섭지도 않아?˝
대장 아이는 어깨를 잔뜩 세우며 홍당무를 노려보았습니다.
˝그 원숭이는 내 친구란 말이야. 왜 내 원숭이를 강제로 뺏어가냐 말이야. 어서 돌려줘!˝
˝말더듬이홍당무가 웬일로 큰소리야? 게다가 이제는 말도 더듬지 않잖아!˝
대장 아이를 위해 만세를 불렀던 아이가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듯이 슬그머니 대장 아이에게 귀띔해 주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원숭이를 구하기 위해 용기 있게 대장 아이 앞에 선 홍당무는 더 이상 말더듬이 겁쟁이가 아니었습니다.
˝어서 돌려달란 말이야. 내 말 안 들려!˝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대장 아이에게 달려든 홍당무는 다시 한 번 소리쳤습니다.
˝야! 홍당무 왜 이래? 우리 전쟁 놀이 하는데 포로로 잡힌 거란 말이야. 어서 방해하지 말고 비켜!˝
홍당무의 갑작스러운 거친 행동에 대장 아이도 놀랐지만 대장 체면에 고분고분 내어 줄 수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원숭이 돌려주기 전에는 절대로 이 앞을 못 지나갈 거야.˝
홍당무는 양팔을 벌려 언덕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저리 비키라니까!˝
대장 아이도 더 이상은 못 참겠다는 듯 한 손으로 원숭이를 감싸 안고 다른 한 손으로 홍당무를 밀어냈습니다.
바로 그 때 원숭이가 대장 아이의 품에서 빠져 나와 길 옆의 배나무 가지에 매달렸습니다.
홍당무는 재빨리 원숭이를 낚아채 언덕을 뛰어 올라갔습니다. 매일 오르락내리락하는 길이었기에 동네 아이들을 따돌리기는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야, 홍당무 거기 서! 거기 서란 말이야.˝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어리둥절해진 동네 아이들은 홍당무를 열심히 뒤쫓아갔지만 헛수고였습니다. 산그림자가 숨겨줬는지 아니면 배나무들이 숨겨줬는지 홍당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홍당무는 너무나 기뻤습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원숭이를 위해 용기있는 행동을 한 자기 자신이 너무나 자랑스러웠습니다. 게다가 대장 아이에게 큰소리칠 때 더듬지 않았던 사실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원숭이도 그런 홍당무가 자랑스럽다는 듯 동그란 눈을 꿈벅이며 홍당무의 얼굴을 계속 비벼댔습니다.
홍당무와 원숭이는 어느새 친한 친구가 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원숭이는 홍당무에게 많은 즐거움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새하얗던 배꽃이 흐드득 떨어지던 그 날 밤, 홍당무를 찾아온 손님이 있었습니다.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누구세요?˝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던 할아버지는 마당에 들어서는 안경 쓴 아주머니와 예쁜 여자아이를 보며 불안한 듯 물었습니다.
˝네, 저희는 저 아래 새로 지은 별장에 얼마 전부터 내려와 있는 사람인데요. 우리가 기르던 원숭이가 이곳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왔습니다. 우리 아이가 데리고 놀던 원숭이인데 며칠 전에 잃어버렸거든요. 아까 시장에 갔었는데 가게 아주머니가 이 댁에 한 번 가보라고 해서...˝
안경 쓴 아주머니는 할아버지가 잘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차근차근 말했습니다.
˝아, 그랬지요. 요 며칠 전에 우리 배나무 밭에 들어왔다가 목걸이가 가지에 엉켜 꼼짝없이 우리 집에 있게 됐지요. 얘, 별아! 원숭이 주인이 오셨구나. 어서 나와 보렴.˝
홍당무는 원숭이를 돌려주기 싫어 도망치려 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었습니다. 아주머니 치마를 꼭 잡고 원숭이 찾기만 기다리는 여자아이 때문이었지요.
멀뚱거리며 자기를 쳐다보는 원숭이에게 짧은 입맞춤을 한 홍당무는 아무 말 없이 아주머니에게 원숭이를 안겨 주었습니다.
˝옳아! 네가 홍당무였구나. 우리 원숭이 잘 데리고 있어 줘서 고맙다. 예림아, 미미 여기 있다.˝
아주머니는 원숭이를 곧바로 여자아이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여자아이는 원숭이를 쓰다듬으며 반가워했습니다.
˝우리 미미 돌려줘서 고마워. 내일 서울 올라갈 때까지 미미를 못 찾을까 봐 걱정했었는데 정말 고마워.˝
˝아니야, 내, 내가 고마워. 정말 좋은 원숭이더라. 아프지 않게 잘 키워 줘.˝
홍당무는 며칠 동안 정이 들어버린 원숭이와 헤어지게 되어 정말 슬펐습니다.
˝잘 가! 이름이 미미였구나. 네 이름을 몰라서 한 번도 불러주지 못했는데. 고마웠어. 미미야! 네 덕분에 이제 나, 나도 씩씩해졌는데 이제 헤어지게 되는구나. 안녕!˝
˝정말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미미는 진짜 주인을 만난 걸 아는지 꼼짝도 안 하고 여자아이 품에 안겨 홍당무를 바라보았습니다.
하지만 홍당무는 원숭이도 자기와의 이별을 슬퍼하고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까맣게 영근 포도알 같던 눈동자에 하얀 배꽃을 닮은 눈물이 내려앉아 있었거든요. 물론 홍당무 혼자만 보았을 겁니다.
아주머니를 배웅하고 돌아온 할아버지는 홍당무를 마당으로 불러냈습니다.
˝별아, 그런데 아까 너 얘기할 때 말이다. 말을 거의 더듬지 않더구나. 너도 알고 있냐?˝
˝네, 할아버지. 아까 시장에 갔다가 지, 집으로 오는 길에...˝
홍당무는 자기도 신기하다는 듯 동네 아이들을 만났던 일을 할아버지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서워서 원숭이를 그냥 내버려둘까 망설이기도 했지만 원숭이를 구해주고 싶은 마음에 용기를 내어 덩치 큰 대장 아이에게 대들어 원숭이와 같이 도망쳤다는 얘기와 함께, 큰소리로 자신 있게 얘기하니까 말도 더듬지 않게 되고 자신감이 생기더란 얘기까지 할아버지에게 자랑처럼 늘어놓았습니다.
˝그랬었구나! 우리 별이가 씩씩해진 것 같아 이 할애비도 기분이 좋구나.˝
˝네, 할아버지 저, 저 자신 있어요. 얼굴이 빨갛게 놀려도 이제부턴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예요. 말도 더듬지 않을 거구요. 정말 자신 있어요.˝
힘주어 말하는 홍당무의 얼굴이 달빛을 받아 환하게 빛났습니다.
홍당무의 마음속에 가득 차 있는 미미와의 추억은 하루하루 새롭게 차 오르는 달처럼 홍당무에게 항상 새로운 용기를 줄 겁니다.
달 그림자 밑에 숨어 있던 별들이 밤하늘에 자기들만의 별자리를 만들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홍당무도 잃어버렸던 자기의 별을 찾기 위해 더욱 씩씩한 하루하루를 보낼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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