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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돌아온 지선이 얼굴이 심상치 않습니다. 책가방을 던지자마자 엄마에게 쏘아댑니다.
˝더 이상 못 기다려. 당장 수술해 달라구. 오늘도 애들이 지나가면서 수군거렸단 말야.˝
지선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마 중앙에 손가락으로 눌린 듯한 자국이 있습니다.
핏줄이 뭉친 혈관종이라고 합니다.
˝육 학년까지만 기다려 보재두.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커 가면서 엷어지고 없어지기도 한다구.˝
˝없어지긴커녕 만날 똑같잖아.˝
˝엄마가 수술해 주기 싫어서 그런 것 아니잖니. 어느 땐 기다림이 약이 되기도 하니까 좀 더 기다려 보자는 거야.˝
˝엄만 내 마음 몰라. 내가 아니라서, 당해 보지 않아서 모른다구. 엉엉엉.˝
지선이는 집을 뛰쳐나갑니다.
밤 10시가 넘을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가 여기 저기 전화를 해 봐도 지선이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엄마 아빠의 불안은 커져 갑니다.
˝12시가 넘었는데도 안 들어오는 것 보면 무슨 일이 난 게 틀림없어요. 어서 신고해요.˝
아빠가 전화기 버튼을 누를 때입니다. 열린 현관문 앞에 지선이가 서 있습니다. 많이 울어 퉁퉁 부은 얼굴입니다. 뛰쳐나간 엄마가 지선이를 와락 끌어안습니다.
˝지금까지 뭐하고 다닌 거야? 어디 있었어?˝
눈물 범벅인 엄마가 잡아흔드는 데도 지선이는 몸을 맡긴 채 아무 말이 없습니다.
엄마는 안 먹는다는 지선이를 달래 겨우겨우 밥을 먹입니다.
지선이를 따라들어가 침대에 나란히 눕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얘기를 시작합니다.
어릴 때부터 흰머리 난 애가 있었어. 정확히 언제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는지는 몰라. 하여튼 초등학교 5학년 때 걘 백발이 성성했어.
당연히 놀림감이 되고 말았지. 애들은 걜 이름 대신 ´흰머리 원숭이´로 불렀어. 그때 아이들은 좀 이상하다 싶으면 ´원숭이´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흰머리 원숭이´는 흰머리가 난, 이상한 애란 뜻이야.
길 가는 언니 오빠들도 놀리긴 마찬가지였어.
˝쟤 머리에 서리 앉은 것 좀 봐. 아주 하얗잖아. 혹시 지난 밤 바깥 잠자리 한 거 아냐?˝
˝맞아. 노숙한 게 틀림없어.˝
공부 시간에 선생님이 분단 사이를 오갈 때도 걔는 안절부절못했어.
´혹시 내 흰머릴 보려고 일부러 뒤로 가신 건 아닐까. 맞아, 지금 내 머릴 보고 있을 거야.´
뒤가 켕겨 쭈뼛거리기 일쑤였지. 그러다 보니 선생님한테 산만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어.
˝왜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 있지 못하는 거니, 응?˝
뒤쪽 아이들이 희희덕거리면 걘 제 흰머릴 놀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만큼 뒷모습에 자신이 없었어. 이상하게도 흰머리는 뒤쪽에만 났거든.
동네 어른들도 흰머리를 눈감아 주지 않았어. 염려 반 흥미 반으로 입방아를 찧어댔지.
˝어린애가 왜 저래? 무슨 큰 병은 아닌지 몰라.˝
˝혹시 돌연변이 아닐까. 쟤네 식구 중에서도 쟤만 저렇잖아.˝
그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상처가 되는 줄도 모르고 어른들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어.
˝돌연변이, 돌연변이 ….˝
계속 되뇌이며 걘 집으로 내달렸어.
숨을 헐떡이며 서둘러 찾아본 사전엔 이렇게 쓰여 있었어.
〔돌연변이 - 어버이에게 없던 새로운 유전 물질이 돌연히 자손에게 나타나는 것.〕
알 듯 모를 듯 정확하진 않았지만 무슨 말인가는 대충 감이 잡혔어.
´한 마디로 미운 오리새끼라는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하고 있는 거야.´
그 뒤부턴 걘 ´넌 주워온 애야´라는 오빠들 말이 장난으로 들리지 않았어.
´분명 난 주워왔을 거야. 흰머리만 봐도 그렇고 얼굴도 못 생겼잖아. 가족들과 닮은 점도 하나 없어. 난 안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 ….´
걔의 단 하나의 희망은 안동네 큰 새암가에 있었어. 희망의 요정은 큰 새암 바로 옆에 사는 아주머니였어. 요정치고는 너무 덩치가 큰 아줌마 요정이었지. 아주머니는 사람들이 걔 머리에 대해 왈가왈부 할라치면 자리를 박차고 나와 고함치듯 말했어.
˝왜들 그려. 저건 흰머리가 아니고 새치라니까. 정확히 알고 말을 해야지. 저거 없어져. 나이 먹어서 생긴 흰머리는 없어지지 않지만 어린애한테 생긴 새치는 없어진다니까. 예전에 내 동생이 그랬어. 어릴 때 아주 하얬다니까.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흔적도 없는 거여.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까맣더라구.˝
흰머리로 놀림을 당해 외롭거나 울적할 때마다 걘 동네 큰 새암가를 얼쩡거렸어. 희망의 요정이 나타나길 고대하면서 말야.
기다리면 없어진다는 희망의 말을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었던 거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천 번 만 번이라도 듣고 싶은 말이었거든.
그 맘을 알아챘는지 아주머니는 걔가 눈에 띌 때마다 반복했어. 주문을 외듯이 말야.
˝없어져. 기다리면 없어진다니까.˝
하지만 멀리 있는 희망만을 믿고 살 순 없었어. 날이 갈수록 머리는 하얘졌고 놀림은 더욱 심해졌거든.
˝더 이상 안 되겠다. 염색을 해야지 안 되겠어.˝
울고 들어오는 날이 많자 엄마가 먼저 손을 들었어.
염색을 하니까 정말 감쪽 같았어. 사실 다른 아이들보다 더 검었거든. 자연히 흰머리 원숭이라는 별명도 꼬리를 감췄지.
염색하면서부터는 뒤쪽에 앉은 애들이 키득거려도, 선생님과 한 덩어리가 되어 폭소를 터뜨려도 아무렇지 않았어. 뒷모습에 자신이 있었거든.
근데 문제가 생겼어. 염색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눈이 침침해지는 거야.
˝염색물이 눈에 들어간 거야. 아무리 조심한다해도 헹구면서 눈에 들어갈 수가 있거든. 그래 눈이 나빠진 거라구.˝
엄마는 진단을 내렸어. 당연히 엄마는 눈을 위해 좋은 약이 나올 때까지 염색을 그만 하자고 했지. 하지만 걘 펄펄 뛰었어.
˝그렇게 살 수 없어. 예전처럼 또 놀림감이나 될 순 없다고.˝
˝이러다 아예 눈이 안 보이면 어떡하려구. 세상에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게 또 있다든?˝
˝엄만 직접 당해 보지 않아서 몰라. 봉사가 된다해도 할 수 없어. 난 염색을 계속할 거야.˝
칠판 글씨가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어느 날부턴 거의 보이지 않았어. 걘 칠판 보는 걸 포기하고 짝궁 노트를 베껴써야 했어.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어. 선생님은 칠판에 쓴 내용을 설명하고 문제를 풀게 할 때가 많았거든. 특히 수학 시간엔 그럴 때가 많았어. 당연히 그때마다 걘 문제를 풀 수 없었고 선생님한테 꾸중을 들었어. 안 보였으니까 말야.
안경을 써야 했어. 안경의 돗수는 염색 횟수에 비례해 높아만 갔어. 얼마 가지 않아 수많은 나이테가 빙글빙글 돌아나오는 두꺼운 안경을 걸쳐야 했지.
애들이 다시 쑤근대기 시작했어. 안경 쓴 돼지, 돼지 박사 … 등 새로운 별명이 뭉텅이로 생겨났어. 걘 살까지 쪘었거든.
상상을 해 봐. 뚱뚱한 얘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두꺼운 안경 낀 모습을 말야.
걘 더 이상 큰 새암가를 서성이지도, 아줌마 요정의 말을 믿지도 않았어.
´날 위로해 주려고 그런 거야. 불쌍하니까 혼자라도 내 편이 되어 주려고 그런 것 뿐이라구. 나아지는 기미가 없잖아. 난 언제까지나 이렇게 염색하면서 살 수밖에 없을 거야. 이러다 눈은 봉사가 될 거고.´
한없이 절망으로 기울고 있었어.
그런데 머릿속에서 변화가 있었던 거야. 거짓말처럼 흰머리가 검은 머리카락으로 변해 가고 있었거든.
사실 변화를 눈치채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 흰머리가 눈에 띈다 싶으면 바로 바로 염색을 했거든. 놀림감이 될 게 두려워서 말야.
어쨌든 염색 횟수가 눈에 띄게 줄고 있었어.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엔 새치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니까. 하늘이 내린 입학 선물임에 틀림없었어.
사실 걘 중학교 다닐 일을 무척 걱정하고 있었어. 영리한 시내 애들이 한눈에 알아채고 염색했다고 놀릴까 봐서 말야.
그때만 해도 젊은 사람이 염색한다는 건 떳떳한 일이 아니었거든. 물 들인 사람이 지나가면, 맥주로 감았다느니 술집에 다닌다느니 하면서 손가락질을 할 정도였거든.
염색 횟수가 줄자 침침하던 눈도 차차 맑아졌어. 나중엔 안경까지 벗어던질 수 있었다니까. 기적이 일어난 듯 안경없이도 칠판 글씨가 또렷하게 들어왔거든.
안과 의사에게 가서 따져물었어. 그렇게 안 좋던 눈이 왜 이렇게 잘 보이는 거냐고. 크게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야.
˝염색 횟수가 줄어 눈이 좋아지는 측면도 있지만, 과도한 스트레스가 없어지자 눈이 원상태로 회복된 것 같아. 그러니까 그동안 눈이 갑자기 안 보인 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 스트레스가 큰 작용을 한 게 틀림없어.˝
걘 의사 선생님 앞에서 펑펑 울고 말았어. 그동안 놀림으로 당한 설움이 한꺼번에 복받혀 올라왔거든.
흰머리가 없어졌을 때 제일 기뻐하신 분도 큰 새암가 요정이었어. 덩치가 남다르게 크다는 그 아줌마 요정 말야.
˝거 봐. 내 말이 딱 들어맞았지? 우리 동생이 그랬다니까 그러네. 아휴, 네 머리가 검어지니까 내 속이 다 시원하다 시원해. 십 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간 것 같다니까.˝
아주머닌 볼 때마다 같은 말을 했어.
´그나저나 그 많던 흰머리가 어디로 간 거지? 어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제 머리 속에서 일어난 변화지만 걘 이해할 수 없었어. 어린애 머리가 새하얗게 세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하얗던 흰머리가 감쪽같이 없어진 것도 이해할 수 없었거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단어를 찾느라 국어사전을 뒤적이던 걔 눈에 우연찮게 ´백발증´이란 게 들어온 거야.
[백발증 - 나이에 어울리지 아니하게 일찍 백발이 되는 증세.]
그 옆에는, 허옇게 센 머리털이 검은 머리털로 변하는 ´백발환흑´이라는 낱말도 있었어.
´어린 내가 이 두 가질 다 앓았던 거구나.´
그제야 걘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었어.
˝엄마, 근데 얘기를 하면서 왜 자꾸 눈물을 흘려요? 혹시 엄마가 흰머리 원숭이 아녜요?˝
엄마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입니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참고 기다릴게요. 엄마처럼 저도 씻은 듯이 나을 지 모르니까요.˝
지선이는 엄마 눈물을 손으로 훔칩니다. 엄마는 어린애가 된 듯 지선이에게 얼굴을 맡긴 채 눈물 젖은 눈으로 웃습니다.
˝엄마,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나는 거 몰라요?˝
˝더 이상 못 기다려. 당장 수술해 달라구. 오늘도 애들이 지나가면서 수군거렸단 말야.˝
지선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마 중앙에 손가락으로 눌린 듯한 자국이 있습니다.
핏줄이 뭉친 혈관종이라고 합니다.
˝육 학년까지만 기다려 보재두. 의사 선생님이 그랬잖아. 커 가면서 엷어지고 없어지기도 한다구.˝
˝없어지긴커녕 만날 똑같잖아.˝
˝엄마가 수술해 주기 싫어서 그런 것 아니잖니. 어느 땐 기다림이 약이 되기도 하니까 좀 더 기다려 보자는 거야.˝
˝엄만 내 마음 몰라. 내가 아니라서, 당해 보지 않아서 모른다구. 엉엉엉.˝
지선이는 집을 뛰쳐나갑니다.
밤 10시가 넘을 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엄마 아빠가 여기 저기 전화를 해 봐도 지선이 행방을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엄마 아빠의 불안은 커져 갑니다.
˝12시가 넘었는데도 안 들어오는 것 보면 무슨 일이 난 게 틀림없어요. 어서 신고해요.˝
아빠가 전화기 버튼을 누를 때입니다. 열린 현관문 앞에 지선이가 서 있습니다. 많이 울어 퉁퉁 부은 얼굴입니다. 뛰쳐나간 엄마가 지선이를 와락 끌어안습니다.
˝지금까지 뭐하고 다닌 거야? 어디 있었어?˝
눈물 범벅인 엄마가 잡아흔드는 데도 지선이는 몸을 맡긴 채 아무 말이 없습니다.
엄마는 안 먹는다는 지선이를 달래 겨우겨우 밥을 먹입니다.
지선이를 따라들어가 침대에 나란히 눕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얘기를 시작합니다.
어릴 때부터 흰머리 난 애가 있었어. 정확히 언제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는지는 몰라. 하여튼 초등학교 5학년 때 걘 백발이 성성했어.
당연히 놀림감이 되고 말았지. 애들은 걜 이름 대신 ´흰머리 원숭이´로 불렀어. 그때 아이들은 좀 이상하다 싶으면 ´원숭이´라고 했거든. 그러니까 ´흰머리 원숭이´는 흰머리가 난, 이상한 애란 뜻이야.
길 가는 언니 오빠들도 놀리긴 마찬가지였어.
˝쟤 머리에 서리 앉은 것 좀 봐. 아주 하얗잖아. 혹시 지난 밤 바깥 잠자리 한 거 아냐?˝
˝맞아. 노숙한 게 틀림없어.˝
공부 시간에 선생님이 분단 사이를 오갈 때도 걔는 안절부절못했어.
´혹시 내 흰머릴 보려고 일부러 뒤로 가신 건 아닐까. 맞아, 지금 내 머릴 보고 있을 거야.´
뒤가 켕겨 쭈뼛거리기 일쑤였지. 그러다 보니 선생님한테 산만하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어.
˝왜 의자에 반듯하게 앉아 있지 못하는 거니, 응?˝
뒤쪽 아이들이 희희덕거리면 걘 제 흰머릴 놀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 그만큼 뒷모습에 자신이 없었어. 이상하게도 흰머리는 뒤쪽에만 났거든.
동네 어른들도 흰머리를 눈감아 주지 않았어. 염려 반 흥미 반으로 입방아를 찧어댔지.
˝어린애가 왜 저래? 무슨 큰 병은 아닌지 몰라.˝
˝혹시 돌연변이 아닐까. 쟤네 식구 중에서도 쟤만 저렇잖아.˝
그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상처가 되는 줄도 모르고 어른들은 하고 싶은 말을 다 했어.
˝돌연변이, 돌연변이 ….˝
계속 되뇌이며 걘 집으로 내달렸어.
숨을 헐떡이며 서둘러 찾아본 사전엔 이렇게 쓰여 있었어.
〔돌연변이 - 어버이에게 없던 새로운 유전 물질이 돌연히 자손에게 나타나는 것.〕
알 듯 모를 듯 정확하진 않았지만 무슨 말인가는 대충 감이 잡혔어.
´한 마디로 미운 오리새끼라는 말을 이렇게 어렵게 하고 있는 거야.´
그 뒤부턴 걘 ´넌 주워온 애야´라는 오빠들 말이 장난으로 들리지 않았어.
´분명 난 주워왔을 거야. 흰머리만 봐도 그렇고 얼굴도 못 생겼잖아. 가족들과 닮은 점도 하나 없어. 난 안 태어났어야 하는 건데. ….´
걔의 단 하나의 희망은 안동네 큰 새암가에 있었어. 희망의 요정은 큰 새암 바로 옆에 사는 아주머니였어. 요정치고는 너무 덩치가 큰 아줌마 요정이었지. 아주머니는 사람들이 걔 머리에 대해 왈가왈부 할라치면 자리를 박차고 나와 고함치듯 말했어.
˝왜들 그려. 저건 흰머리가 아니고 새치라니까. 정확히 알고 말을 해야지. 저거 없어져. 나이 먹어서 생긴 흰머리는 없어지지 않지만 어린애한테 생긴 새치는 없어진다니까. 예전에 내 동생이 그랬어. 어릴 때 아주 하얬다니까.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흔적도 없는 거여.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까맣더라구.˝
흰머리로 놀림을 당해 외롭거나 울적할 때마다 걘 동네 큰 새암가를 얼쩡거렸어. 희망의 요정이 나타나길 고대하면서 말야.
기다리면 없어진다는 희망의 말을 한 번이라도 더 듣고 싶었던 거지.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 천 번 만 번이라도 듣고 싶은 말이었거든.
그 맘을 알아챘는지 아주머니는 걔가 눈에 띌 때마다 반복했어. 주문을 외듯이 말야.
˝없어져. 기다리면 없어진다니까.˝
하지만 멀리 있는 희망만을 믿고 살 순 없었어. 날이 갈수록 머리는 하얘졌고 놀림은 더욱 심해졌거든.
˝더 이상 안 되겠다. 염색을 해야지 안 되겠어.˝
울고 들어오는 날이 많자 엄마가 먼저 손을 들었어.
염색을 하니까 정말 감쪽 같았어. 사실 다른 아이들보다 더 검었거든. 자연히 흰머리 원숭이라는 별명도 꼬리를 감췄지.
염색하면서부터는 뒤쪽에 앉은 애들이 키득거려도, 선생님과 한 덩어리가 되어 폭소를 터뜨려도 아무렇지 않았어. 뒷모습에 자신이 있었거든.
근데 문제가 생겼어. 염색하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눈이 침침해지는 거야.
˝염색물이 눈에 들어간 거야. 아무리 조심한다해도 헹구면서 눈에 들어갈 수가 있거든. 그래 눈이 나빠진 거라구.˝
엄마는 진단을 내렸어. 당연히 엄마는 눈을 위해 좋은 약이 나올 때까지 염색을 그만 하자고 했지. 하지만 걘 펄펄 뛰었어.
˝그렇게 살 수 없어. 예전처럼 또 놀림감이나 될 순 없다고.˝
˝이러다 아예 눈이 안 보이면 어떡하려구. 세상에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게 또 있다든?˝
˝엄만 직접 당해 보지 않아서 몰라. 봉사가 된다해도 할 수 없어. 난 염색을 계속할 거야.˝
칠판 글씨가 희미해지는가 싶더니 어느 날부턴 거의 보이지 않았어. 걘 칠판 보는 걸 포기하고 짝궁 노트를 베껴써야 했어.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어. 선생님은 칠판에 쓴 내용을 설명하고 문제를 풀게 할 때가 많았거든. 특히 수학 시간엔 그럴 때가 많았어. 당연히 그때마다 걘 문제를 풀 수 없었고 선생님한테 꾸중을 들었어. 안 보였으니까 말야.
안경을 써야 했어. 안경의 돗수는 염색 횟수에 비례해 높아만 갔어. 얼마 가지 않아 수많은 나이테가 빙글빙글 돌아나오는 두꺼운 안경을 걸쳐야 했지.
애들이 다시 쑤근대기 시작했어. 안경 쓴 돼지, 돼지 박사 … 등 새로운 별명이 뭉텅이로 생겨났어. 걘 살까지 쪘었거든.
상상을 해 봐. 뚱뚱한 얘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두꺼운 안경 낀 모습을 말야.
걘 더 이상 큰 새암가를 서성이지도, 아줌마 요정의 말을 믿지도 않았어.
´날 위로해 주려고 그런 거야. 불쌍하니까 혼자라도 내 편이 되어 주려고 그런 것 뿐이라구. 나아지는 기미가 없잖아. 난 언제까지나 이렇게 염색하면서 살 수밖에 없을 거야. 이러다 눈은 봉사가 될 거고.´
한없이 절망으로 기울고 있었어.
그런데 머릿속에서 변화가 있었던 거야. 거짓말처럼 흰머리가 검은 머리카락으로 변해 가고 있었거든.
사실 변화를 눈치채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어. 흰머리가 눈에 띈다 싶으면 바로 바로 염색을 했거든. 놀림감이 될 게 두려워서 말야.
어쨌든 염색 횟수가 눈에 띄게 줄고 있었어.
중학교에 들어갈 무렵엔 새치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니까. 하늘이 내린 입학 선물임에 틀림없었어.
사실 걘 중학교 다닐 일을 무척 걱정하고 있었어. 영리한 시내 애들이 한눈에 알아채고 염색했다고 놀릴까 봐서 말야.
그때만 해도 젊은 사람이 염색한다는 건 떳떳한 일이 아니었거든. 물 들인 사람이 지나가면, 맥주로 감았다느니 술집에 다닌다느니 하면서 손가락질을 할 정도였거든.
염색 횟수가 줄자 침침하던 눈도 차차 맑아졌어. 나중엔 안경까지 벗어던질 수 있었다니까. 기적이 일어난 듯 안경없이도 칠판 글씨가 또렷하게 들어왔거든.
안과 의사에게 가서 따져물었어. 그렇게 안 좋던 눈이 왜 이렇게 잘 보이는 거냐고. 크게 잘못되기라도 한 것처럼 말야.
˝염색 횟수가 줄어 눈이 좋아지는 측면도 있지만, 과도한 스트레스가 없어지자 눈이 원상태로 회복된 것 같아. 그러니까 그동안 눈이 갑자기 안 보인 건 스트레스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지. 스트레스가 큰 작용을 한 게 틀림없어.˝
걘 의사 선생님 앞에서 펑펑 울고 말았어. 그동안 놀림으로 당한 설움이 한꺼번에 복받혀 올라왔거든.
흰머리가 없어졌을 때 제일 기뻐하신 분도 큰 새암가 요정이었어. 덩치가 남다르게 크다는 그 아줌마 요정 말야.
˝거 봐. 내 말이 딱 들어맞았지? 우리 동생이 그랬다니까 그러네. 아휴, 네 머리가 검어지니까 내 속이 다 시원하다 시원해. 십 년 묵은 체증이 쑤욱 내려간 것 같다니까.˝
아주머닌 볼 때마다 같은 말을 했어.
´그나저나 그 많던 흰머리가 어디로 간 거지? 어쩜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제 머리 속에서 일어난 변화지만 걘 이해할 수 없었어. 어린애 머리가 새하얗게 세는 것도 이해할 수 없지만, 하얗던 흰머리가 감쪽같이 없어진 것도 이해할 수 없었거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 단어를 찾느라 국어사전을 뒤적이던 걔 눈에 우연찮게 ´백발증´이란 게 들어온 거야.
[백발증 - 나이에 어울리지 아니하게 일찍 백발이 되는 증세.]
그 옆에는, 허옇게 센 머리털이 검은 머리털로 변하는 ´백발환흑´이라는 낱말도 있었어.
´어린 내가 이 두 가질 다 앓았던 거구나.´
그제야 걘 그동안 있었던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있었어.
˝엄마, 근데 얘기를 하면서 왜 자꾸 눈물을 흘려요? 혹시 엄마가 흰머리 원숭이 아녜요?˝
엄마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끄덕입니다.
˝죄송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참고 기다릴게요. 엄마처럼 저도 씻은 듯이 나을 지 모르니까요.˝
지선이는 엄마 눈물을 손으로 훔칩니다. 엄마는 어린애가 된 듯 지선이에게 얼굴을 맡긴 채 눈물 젖은 눈으로 웃습니다.
˝엄마, 울다가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나는 거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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