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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국제신문] 우리 이모는 4학년 -

신춘문예 정란희............... 조회 수 1761 추천 수 0 2005.02.24 23:5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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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국제 신춘문예 당선동화

나는 바지 주머니 속에 오른손을 넣었습니다. 손에 동전의 오돌도돌한 무늬가 만져졌습니다. 나는 손가락을 움직여 또 다른 동전을 찾았습니다. 똑같은 크기의 동전 두 개가 손 안에 쏙 들어 왔습니다.이번에는 왼손을 또다른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습니다. 호박만한 풍선을 불 수 있는 풍선껌이 세 개나 들어 있습니다.
나는 신이 나서 걷다가 뚝 멈춰 섰습니다. 그리고는 `풍년 닭집´이란 양철 간판 아래, 빠꼼히 열린 유리문을 들여다 보았습니다.
어머니는 작두처럼 큰 칼로 생닭을 손질하고 계셨습니다. 어머니의 얼굴에서는 송글송글 열린 땀방울이 미끄럼을 탔습니다.
어머니가 처음 닭집을 차리셨을 때, 나는 냉장고에 누워 있는 닭들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머리가 잘린 채 누워 있는 발가벗은 닭을 보면 으스스 소름이 끼쳤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눈에 익어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뱃속을 훤히 내 보인 채 누워있는 닭을 봐도, 핏물이 밴 것같은 불그스름한 닭살을 봐도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슈퍼마켓 아저씨가 풍선껌을 만지는 것과 어머니가 닭을 만지는 것이 똑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나는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우리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문한아, 더운데 어딜 그렇게 다니니?˝
어머니는 지난 번처럼 내가 더위를 먹을까 봐 걱정이 되시나 봅니다.
˝저기…….˝
나는 풍선껌을 사러 슈퍼마켓에 다녀왔다는 말을 하지 못 하고, 말끝을 흐리며 우물쭈물했습니다.
˝이모랑 놀고 있어라. 엄마는 바쁘니까.˝
˝네.˝
나는 가겟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모는 엎드려 방학 숙제를 하고 있었습니다.
˝문한아, 덥지? 이리 와. 선풍기 앞으로…….˝
이모는 내게 자리를 비켜주며 말했습니다. 그러자 나는 이모에게 손을 불쑥 내밀었습니다.
˝이모. 자, 풍선껌.˝
이모는 나의 손과 눈을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그것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렇게 풍선껌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작년부터였을 겁니다. 또렷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머니가 가게를 시작하는 바람에, 나 혼자 있는 시간이 늘어나던 때부터이지요.
내가 하릴없이 마을을 서성일 때면 풍선껌은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나는 달공달공 껌을 씹었습니다. 그리고 이모를 보며 `후우´ 풍선을 불었습니다. 내가 입김을 불어 넣을수록 내 입술에 매달린 풍선은 점점 커졌습니다. 귤만 했던 것이 사과만 해지고, 잘하면 내 얼굴만 하게도 키울 수 있습니다.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분 풍선을 타고 하늘을 날아 봤으면…….
새파란 바다를 발 아래로 두고, 수박 색깔의 산에게 손짓하면서 바람 따라 가는 나…….
금방 비눗방울처럼 톡 터져 사라지는 꿈이지만 나는 이런 상상들이 즐겁습니다.
이모는 온 힘을 다해 풍선을 불고 있는 나를 보고 빙긋 웃었습니다.

이모네 집은 우리집에서 기차를 타고 여섯 시간 쯤 가야 되는 곳에 있습니다.
이모는 초등학교 4학년이어서 나와는 4살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요. 그리고 이모는 `정희´, `막내둥이´말고도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외할머니가 쉰 살에 낳았다 해서 `쉰둥이´, 늘그막에 낳았다고 해서 `늦둥이´.
하지만 나는 이런 이름들보다 `막내 이모´가 제일 좋습니다.
막내 이모는 8남매의 막내라서 맏딸인 우리 어머니와는 스무 살이나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 어머니와 이모가 함께 나가면 사람들은 어머니와 딸 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모는 나에게 누나처럼 잘 해줍니다. 그래서 나는 이모가 하늘만큼 땅만큼 좋습니다.

여름방학이 되자마자 이모는 우리집에 왔습니다. 그리고는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함께 술래잡기도 하고, 소꿉장난도 하고, 공기놀이도 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이나 된 이모가, 나와 놀아주어 무척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는 아껴두었던 풍선껌을 이모에게 건네준 겁니다.나는 이모와 함께했던 공부도, 놀이도 좋았지만 특히 이모가 더 좋았던 적이 있습니다. 친구와 싸웠을 때입니다.
나는 준호와 놀다가 아주 작은 일로 기분이 나빴습니다. 준호가 내지른 말 때문입니다.
˝너, 우리 형한테 이른다 우리 형은 고등학생이야. ˝
나는 툭하면 형 자랑을 하는 준호가 얄미웠습니다. 그래서 끝까지 입씨름을 하였습니다. 동네 아이들이 빙 둘러서서 우리를 지켜보았습니다. 그 때 나는 퍼뜩 우리 집에 와 있는 이모가 생각났습니다. 이 때다 싶어 나는 준호를 향해소리쳤습니다..
˝너, 이모 있어?˝
느닷없는 나의 말에 준호는 어리둥절했습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어깨를 쫙펴고 자랑스럽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모 있어. 우리 이모는 4학년이야.˝
나를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의 눈이 해질녘 달맞이꽃처럼 벌어졌습니다. 그러더니 웃음보따리를 풀어 헤쳤습니다.
˝난 또 뭐라구.˝
˝꼬마 이모네. 헤헤헤…˝
˝문한아. 우리 이모는 서른 살이야, 서른 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한참동안 이어졌습니다. 나는 무안해서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눈물도 왈칵 쏟아지려 했습니다. 하지만 싸울 때 눈물을 보이면 지는 거라서, 눈에 꼭 힘을 주어 참았습니다.
그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아끌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모였습니다. 이모는 내 손을 잡고 걸어가다가 속삭였습니다.
˝문한아, 내가 대학생 되면 쟤네들 혼내줄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고마운 이모에게 마지막 남은 풍선껌을 내밀었습니다. 이모는 풍선껌을 받아 들더니, 빨래를 걷어 오겠다며 나갔습니다.

나는 아무도 없는 가게에 서서 텅 빈 바지주머니를 만지작거렸습니다. 왠지 마음이 허전했습니다. 달콤하고 향기로운 풍선껌 생각이 자꾸 났습니다.
나는 닭 선반 위를 쳐다보았습니다. 네모난 금고가 보였습니다. 돈을 꺼내고 싶다는 생각이 슬금슬금 고개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젠 안 돼´하며 고개를 저었습니다. 어머니의 화난 얼굴이 생각나서입니다.
나는 금고를 보지 않으려고 유리문 쪽으로 갔습니다. 마침 잠자리채를 든 아이가 껌풍선을 불며 지나갔습니다.
나는 다시 금고를 쳐다보았습니다. 많은 동전들 중에서 한두 개 쯤은 없어져도 어머니가 모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얼른 나무 의자를 끌어와 선반아래 놓고,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올라섰습니다. 쿵쿵쿵 심장이 방망이질을 해댔습니다. 하지만 나는 숨도 크게 쉬지 않고 금고 안으로 손을 뻗었습니다.
그 때 `드르륵´ 유리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나는 너무 놀라 훌쩍 뛰어내리려다가 앞으로 고꾸라졌습니다.
˝아이쿠…. ˝
˝문한아 안 다쳤어?˝
이모는 마른 빨래를 아무렇게나 내던지고는 나에게로 왔습니다.
˝응? 으응.˝
나는 겨우 일어나 두 손을 털며 엉거주춤 마루에 앉았습니다. 무릎이 몹시 아프긴 했지만 걱정이 먼저 되었습니다.
`이모가 봤을까? 아니야, 못 봤을 거야.´
나는 여름방학 내내 이모와 함께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가게 일로 바쁘기도 했지만 나는 이모가 좋았습니다. 내가 어머니 몰래 가게 금고에서 동전을 꺼내어 풍선껌을 사먹을 때만 빼놓고, 우리는 늘 함께 있었습니다.
우리가 다정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무척 대견해 하셨습니다.

며칠 전 무더운 오후, 어머니는 쟁반에 찐고구마를 가득 담아 가지고 가겟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갓 쪄낸 고구마라 김이 모그락모그락 피어올랐습니다.
이모는 뜨거운 고구마를 집더니 두 손으로 호호 불며 껍질을 벗겼습니다. 그리고는 누렇게 속살이 드러난 고구마를 내게 내밀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는 웃으셨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음식가지고 싸우더니, 지금은 철이 들어 다정한 오누이같구나.˝
어머니의 칭찬에 이모는 눈을 살짝 흘기며 말했습니다.
˝내가 언제 문한이랑 싸웠어?˝
˝작년 요맘 때까진 싸웠잖니. 음식 가지고…….˝
˝아니야, 난 그런 적 없어.˝
이모는 야무지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무슨 재미있는 생각이라도 나셨는지 웃음을 터뜨리셨습니다.
˝너 정말 생각 안 나? 그 때 고구마 가지고 싸웠잖아. 마지막 하나 남은 것 서로 먹겠다고. 굉장했잖아.˝
˝언니는…˝
이모는 창피한지 얼굴이 빨개졌습니다.
나는 키득키득 웃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웃으며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문한아, 그 때 이모한테 고구마 뺏겼다고 네가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 줄 아니?˝
그 말에 우리 세 사람은 한바탕 웃었습니다.

8월의 막바지에 접어들었습니다. 방학도 며칠 남지 않아 이모는 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이모가 무안까지 타고 갈 기차표를 사오셨습니다. 어머니의 손에 들린 길쭉하고 네모난 기차표를 보자, 나는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모가 있는 가겟방으로 뛰어갔습니다.
˝이모, 가지마. 나랑 같이 살아.˝
˝겨울방학에 또 올 건데 뭘…˝
˝그래도…….˝
이모는 나의 글썽글썽한 눈을 보고도 마음이 바뀌지 않았습니다.
˝문한아. 우리 엄마는 어떡하구.˝
˝외할머니는 다른 이모랑 살라고 그래.˝
˝다른 언니들은 시집가고, 회사 다녀서 안 돼.˝
˝그럼 외할머니보고 여기로 이사 오라고 해.˝
나는 막무가내로 떼를 쓰며 졸랐습니다. 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모가 무안을 내려가기로 한 날이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하시는 아버지는 이모에게 용돈을 주셨습니다.
˝형부, 여기 올 때 엄마가 주신 용돈 아직 남았어요.˝
외할머니의 가르침대로, 이모는 공짜 돈은 받지 않으려 했지만 아버지는 한사코 주셨습니다.
우리는 아침밥을 일찍 먹고 기차역으로 나갔습니다.
˝정희야. 4시 쯤에 무안역에 도착할 거야. 거기에 어머니가 나와 계신다고 했어.˝
어머니의 말에 이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이모의 눈이 아쉬움으로 일렁였습니다.
어머니는 이모가 기차 안에서 먹을 간식을 사러 가셨습니다. 어머니가 우리에게서 멀어지자 이모는 나의 어깨를 당겼습니다. 그리고는 손나팔을 만들어 나의 귀에 대고 속삭였습니다.
˝문한아, 이제까지 네가 가져간 돈, 언니는 모르거든. 내가 다 채워 놓았어.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그러지 마. 알았지?˝
그 때 내 체온을 재었다면 아마 100도는 되었을 겁니다. 얼굴이 장작불처럼 화끈화끈 달아올랐으니까요. 하지만 나는 이모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나보다 네 살 많은 이모, 누나같은 이모.
이모는 늘 이렇게 나의 네 뼘 높이에서 나를 지켜봐 주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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