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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수평선으로 가는 꽃게

창작동화 박윤규............... 조회 수 1494 추천 수 0 2005.02.28 23:40:42
.........
1
어느 바닷가에 조그만 갯바위 섬이 있었습니다. 거기는 썰물이 빠지면 뭍이 되고, 밀물이 차면 섬이 되는 곳이었습니다.
갯바위에는 성게, 말미잘, 불가사리 들이 다닥다닥 붙어 살았습니다. 바위 틈과 구멍은 바닷가재와 꽃게 들의 보금자리였습니다.
그 섬에 눈이 새벽별처럼 초롱초롱한 어린 꽃게가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린 꽃게는왼쪽 집게발이 너무 커서 비틀비틀하다가 곧잘 넘어졌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른 게들은 ´짝짝이´라고 놀렸습니다.
외톨이 어린 꽃게는 늘 수평선만 바라보았습니다.
수평선은 세상을 하늘과 바다 두 쪽으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그 위로 해와 달이 뜨고, 별들이 떠올라 반짝거렸습니다. 그럴 때마다 꽃게는 누구든지 수평선에 다다르면 별이 된다는 전설을 생각하곤 하였습니다.
˝수평선 너머엔 누가 살길래 아침마다 저토록 빨간 해를 밀어올리나요?˝
어느 날 아침, 어린 꽃게가 나이 많은 말미잘에게 물었습니다.
˝수평선 너머엔 세상을 만든 대장장이가 산단다.˝
˝대장장이가 뭔데요?˝
˝아득한 옛날에 하늘과 땅과 바다를 만드신 분이야. 그리고 날마다 해와 달과 별을 새로 만들어 매달지. 요즘도 불을 피우고, 풀무질을 하고, 망치질을 하신단다. 그래서 아침마다 수평선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낮에는 구름이 뭉게뭉게 피는 거야.˝
말미잘이 거진 백 개나 되는 촉수를 흔들며 대답했습니다.
˝우와! 그럼, 갯바위 섬도 그 대장장이가 만들었나요?˝
꽃게가 자루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고 말했습니다.
˝물론이지. 갯바위 섬뿐만 아니라, 너와 나도 그 분이 만드셨단다.˝
어린 꽃게는 눈을 감았습니다. 대장장이가 왜 하필 발을 짝짝이로 만들어 주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대장장이를 보셨어요?˝
˝세상을 만든 대장장이는 너무 커서 볼 수가 없단다. 발등은 바다 밑에 있고, 머리는 구름 위로 솟아 있거든. 게다가 그 분이 망치질을 하면 ´우르릉 꽝꽝´ 천둥이 울리고, 번쩍번쩍 번갯빛이 터지지. 그러니 무서워서 가까이 갈 수가 없단다.˝
말미잘이 은근히 겁을 주었습니다.
그래도 꽃게는 꼭 수평선에 가리라 다짐했습니다. 별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장장이를 만나 따질 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2

썰물이 빠져 나가자, 멀리까지 까만 갯벌이 드러났습니다.
어린 꽃게는 달음박질을 시작했습니다. 집게발은 몸통 위로 치켜들고, 여덟 개의 작은 발을 부지런히 놀렸습니다.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짝짝이가 달리기를 하네.˝
˝얼씨구 절씨구, 제법인데.˝
˝저것 봐. 기어코 넘어지잖아. 하하하하...!˝
다른 게들이 뒤뚱거리는 어린 꽃게를 놀려댔습니다.
어린 꽃게는 연거푸 넘어졌지만 달음박질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수평선을 바라보고 나아갈 뿐이었습니다.
모랫벌을 지나고, 질척한 뻘밭도 절반이나 지났습니다. 그래도 수평선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습니다.
˝아저씨, 수평선은 왜 처음처럼 먼 곳에 있나요?˝
갯벌 구멍에서 민둥 머리를 내민 문어에게 꽃게가 물었습니다.
˝거기는 갈 수 없는 곳이라서 그렇단다.˝
˝빤히 보이는데 왜 갈 수가 없죠?˝
문어는 긴 다리로 대머리를 긁적거리다가 대답했습니다.
˝수평선 너머에는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가 있거든. 거기는 구름이 태어나는 구름의 고향이야. 위험하니 아예 거기 갈 생각일랑 말아라.˝
˝저는 꼭 가고 말 거예요.˝
˝무슨 중요한 볼 일이라도 있니?˝
˝예. 세상을 만든 대장장이한테 짝짝이 발을 고쳐 달래려고요.˝
꽃게는 유난히 큰 왼쪽 집게발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자 문어는 길쭉한 코를 벌름거리면서 ´껄껄껄´ 웃었습니다.
˝그건 네가 어려서 모르고 하는 소리야. 어른이 되면 집게발이 큰 만큼 더 힘이 세고 용감해질 거야. 어쩌면 수평선을 건너가 별이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 짝짝이 발을 고맙게 여기고 그만 돌아가거라.˝
꽃게는 문어의 말을 듣지 않고 다시 수평선을 향해 뛰어갔습니다. 별이 되는 건 나중이고, 짝짝이 발을 고쳐서 놀림받지 않는 게 더 급했습니다.
하지만 꽃게는 곧 갯바위 섬으로 돌아와야만 했습니다. 먼바다로 놀러갔던 바다가 밀물이 되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어린 꽃게에게는 아직 거센 밀물 파도를 이겨낼 힘이 없었던 겁니다.

3

밀물과 썰물이 갯바위 섬을 쓰다듬으며 수없이 오고갔습니다. 초승달이 보름달이 되고, 보름달이 다시 그믐달이 되기를 몇번이나 되풀이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는 사이, 꽃게는 부쩍부쩍 자랐습니다. 갯바위 섬에서 가장 크고 튼튼한 집게발을 가진 젊은 꽃게가 된 것입니다. 이제 누구도 그를 ´짝짝이´라고 놀리지 못했습니다.
˝수평선에 가면 새와 물고기의 먹이가 되지 않아도 됩니다. 또 영원히 빛나는 별이 될 수 있다고 했어요. 여러분, 나와 함께 수평선으로 갑시다!˝
젊은 꽃게가 힘주어 말했습니다.
˝안 돼. 수평선은 갈 수 없는 곳이야. 예전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수평선으로 떠났지만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어. 갯바위 섬이 가장 평화롭고 안전한 곳이란다.˝
말미잘이 말렸습니다.
그러나 젊은 꽃게는 어릴 적부터 품어 온 마음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새들도 배들도 모두 수평선을 향해 가잖아요. 우리도 갈 수 있어요!˝
젊은 꽃게가 앞장서서 달렸습니다.
˝좋아 나도 갈게.˝
바닷가재가 따라 나섰습니다. 농게도 뒤를 따랐습니다. 머뭇거리던 많은 젊은 게들도 우루루 나섰습니다. 그들은 탐험대를 만들어 갯바위 섬을 떠났습니다.
탐험대의 걸음은 힘찼습니다. 밀물이 들어오면 뻘 속에 숨고, 썰물이 빠질 때면 물살에 몸을 싣고 나아갔습니다. 뻘밭을 다 지나고, 바다 밑 언덕과 골짜기를 넘고 또 넘었습니다. 탐험대는 모두 별이 될 수 있다는 희망으로 한껏 부풀어 있었습니다.

4

사흘이면 다다를 듯 보이던 수평선은 멀고도 멀었습니다. 다가가면 다가가는 만큼 수평선은 뒤로 물러나는 것만 같았습니다.
용감하게 모험에 나섰던 친구들은 얼마 안 가 하나 둘씩 떨어져 나갔습니다. 갯바위 섬이 그리워 울면서 돌아간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더러는 혹돔과 아구에게 쫓기다가 잡아먹히기도 했습니다.
꽃게는 친구가 더 필요했습니다.
˝우리와 같이 수평선에 가지 않을래?˝
모래를 헤치고 나온 가리비에게 꽃게가 물었습니다.
˝수평선이 뭐야?˝
별 이상한 녀석도 다 있다는 투로 가리비가 되물었습니다.
˝아니, 수평선도 모른단 말이야?˝
꽃게는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가리비가 한심스러웠습니다.
˝나는 그런 거 몰라. 아는 게 많으면 골치만 아프잖아.˝
가리비는 부채 같은 조가비를 꾹 닫았습니다. 그리고 몸을 몇 번 퉁기더니 모래 속으로 쏙 들어가버렸습니다.
탐험대는 다시 수평선을 향해 나아갔습니다.
바다 밑 산을 지나는 동안 친구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바닷가재와 농게만이 대장인 꽃게를 따를 뿐이었습니다.
단풍처럼 울것불것한 산호초가 많은 곳에 이르렀습니다. 알록달록한 물고기들이 붐비는 매우 아름다운 바다 속 마을이었습니다.
˝못 보던 녀석들이구나. 어디 가는 길이니?˝
바다 밑바닥에서 누군가가 느릿느릿한 말투로 물었습니다.
˝우리는 수평선으로 간단다. 같이 갈래?˝
꽃게가 대답했습니다.
바위 뒤에서 비웃는 듯한 물거품이 뽀르르 올라왔습니다. 그러더니 알록달록한 줄무늬를 가진 예쁜 산호뱀이 나왔습니다.
˝멍청한 녀석들 같으니. 먹을 수 없는 건 다 헛것이야. 속임수란 말이야. 수평선 따위는 없어.˝
산호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비아냥거렸습니다.
˝거짓말 마. 그렇다면 어떻게 아침마다 수평선 위로 빨간 해가 떠오르고, 또 밤이면 별들이 줄지어 앉아 소근거릴 수 있겠니?˝
꽃게가 발끈하여 소리쳤습니다.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란 말이지. 수평선이 없다고 생각해 봐. 쓸데없이 고생하지 않아도 되잖아? 그냥 먹을 것 많은 여기서 편히 살지 그래?˝
꽃게가 뭐라고 대꾸하려 하자, 농게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산호뱀 말이 맞아. 수평선 따위야 없다고 생각하니 정말 아무것도 아냐. 괜히 헛고생만 했어. 난 여기서 편하게 살래.˝
농게가 툴툴거리며 산호뱀 옆으로 갔습니다. 머뭇머뭇 눈치를 보던 바닷가재도 슬며시 농게를 따랐습니다.
˝좋을 대로 해. 어차피 마지막 선택은 자신의 몫이니까.˝
맨 처음처럼, 꽃게는 홀로 수평선을 향해 떠났습니다.

5

바다 밑 골짜기와 산을 몇 개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이제 늙어버린 꽃게의 발은 닳아서 너덜너덜해졌습니다. 너무 큰 왼쪽 집게발 때문에 몹시 뒤뚱거리기도 했습니다. 마치 ´짝짝이´로 놀림받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습니다.
˝해파리 아가씨, 나랑 같이 수평선에 안 가련?˝
물결따라 너울너울 춤추는 해파리를 보고 꽃게가 말했습니다. 너무나 외롭고 힘들어 혼자서는 더 못 갈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아무 쓸모없는 무럼해파리예요. 질긴 비닐 같다며 어부들도 잡지 않아요. 저 같은 게 수평선에 가 봐야 뭘 하겠어요?˝
˝수평선에 가서 세상을 만든 대장장이를 만나렴. 그래서 쓸모 있는 해파리로 바꾸어 달라고 해.˝
무럼해파리는 여전히 술에 취한 듯 흐느적거렸습니다.
˝싫어요. 나를 바꾼다는 게 무서워요. 심심하고 외롭기는 하지만, 그냥 물길 따라 춤이나 추며 살래요.˝
˝그럼 나를 물 위로 좀 올려주겠니?˝
늙은 꽃게가 간신히 몸을 가누며 부탁했습니다.
무럼해파리는 늙은 꽃게를 부드럽게 감싸안았습니다. 그리고 줄줄이 늘어진 촉수를 저어 물 위로 솟구쳐 올랐습니다.
˝아, 아직도 그대로구나!˝
수평선은 여전히 아득한 곳에서 바다와 하늘을 가름하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도 그랬고, 젊은 시절에도 그랬고, 늙은 지금도 수평선은 조금도 가까워지지 않았습니다. 꽃게는 이제 걸어갈 기운조차 없었습니다. 하지만 꿈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도요새야, 나 좀 태워주겠니?˝
꽃게는 때마침 지나가는 노랑발도요새에게 부탁했습니다.
˝좋아요. 꽃게를 태우고 얼마나 빨리 나는지 시험해 보는 것도 재미있겠네요.˝
꽃게를 태운 노랑발도요새는 쉬지 않고 날갯짓을 했습니다.
˝도요새야, 넌 왜 이렇게 바쁘게 날아 다니니? 너도 수평선으로 가니?˝
˝아뇨. 우린 목적지가 없어요. 얼마나 빨리 나느냐만 중요하거든요. 그래서 남들은 우리를 ´나그네 새´라고 부르지요.˝
노랑발도요새는 빨리 날기 시합이라도 하는 듯했습니다. 휙휙, 바람을 가르며 구름을 따라잡고, 갈매기와 바다제비도 앞질렀습니다. 금방이라도 수평선에 다다를 것만 같았습니다.

6

이윽고 늙은 꽃게는 바다를 다 건넜습니다. 하지만 거기는 수평선이 아니라 건너편 바닷가 모랫벌이었습니다.
˝항상 이래요. 나도 수없이 수평선을 향해 날갯짓을 했어요. 하지만 언제나 건너편 바닷가에 다다를 뿐이었어요.˝
노랑발도요새가 꽃게를 내려놓고 머리를 까닥거리며 말했습니다.
꽃게는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았습니다.
˝당신은 바보예요. 수평선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구요!˝
´까르륵´ 비웃음을 던지고, 노랑발도요새는 휙 날아가 버렸습니다.
늙은 꽃게는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왜 있지도 않은 수평선을 보이게 해 놓았는지, 세상을 만든 대장장이가 원망스러웠습니다.
˝꽃게야, 울지 말아라.˝
그때 어디선가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지친 꽃게는 게슴츠레한 자루눈을 내밀고 주위를 살폈습니다. 그러다가 모래 구덩이에 알을 낳고 있는 커다란 거북을 발견했습니다. 늙은 꽃게보다도 훨씬 오래 산 장수거북이었습니다.
˝장수거북님, 나는 속았나 봐요. 어디에도 수평선은 없어요.˝
꽃게는 발이 다 꺾어진 듯 힘없이 주저앉으며 말했습니다.
˝그렇지 않아. 뒤를 돌아보렴.˝
앞만 보고 달려온 꽃게는 처음으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하늘과 바다는 노을빛으로 물드는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수평선은 거기에도 아득히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 어느 새 내가 수평선을 건너 왔구나!˝
늙은 꽃게는 어릴 때처럼 집게발을 치켜들고 수평선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동안 겪었던 많은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수평선 너머에 있을 갯바위 섬이 그립기도 했습니다.
수평선이 황금빛을 띠었습니다. 하늘도 바다도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빛났습니다. 그리고 해당화가 지듯이, 붉은 해가 천천히 수평선 너머로 잠겨 들었습니다.
어느새 하늘은 별들을 여기 저기 매달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꽃게야, 내 아이들이 알을 깨고 나오면 네 이야기를 들려주마. 그러면 우리 아이들도 수평선을 건너가서 용감한 꽃게 이야기를 전해 줄 거야.˝
알을 다 낳은 장수거북이 모래로 구덩이를 덮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꽃게는 그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깃털처럼 가벼워진 몸뚱이가 하늘로 떠오르는 걸 느끼며 눈을 감았기 때문입니다. 꽃게의 귀에는 세상을 만든 대장장이의 망치소리가
점점 크게 들려왔습니다.
수평선 위에 새로 태어난 별 하나가 반짝이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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