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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딱딱딱!˝
˝딱따구리가 아니면 크낙새가 틀림없어.˝
하더니만 왕눈이는 쏜살 같이 뒷산으로 치뛰기 시작했다.
넘어지고 자빠지며 나무 찍는 소리를 더듬어 숲 속으로 들어간 왕눈이는 아름드리 밤나무 위에서 즐겁게 노닐고 있는 크낙새 한 쌍을 발견했다.
´저것이 그림으로만 보던 크낙새로구나.´
왕눈이는 신기한 보물처럼 크낙새의 요모조모를 뜯어보며 조금씩 흥분하고 있었다.
´이마,도가머리,뺨부분은 붉은 빛이고 몸빛은 검은 빛인데 머리 색깔이 다르구나.그러고 보니 검은 머리가 암컷이고 붉은 머리는 수컷이구나.송곳처럼 길쭉하고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부리는 머리보다도 더 길구나.진짜 왕부리로구나.저걸로 나무를 사정없이 찍어 대니 마을까지 구멍 뚫는 소리가 크게 들리지.´
왕눈이는 눈이 유달리 커서 붙여진 자기 별명의 돌림을 따서 크낙새를 왕부리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봐야지.´
하고 생각하며 왕눈이는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지만 어느새 인기척을 듣고 왕부리는 가지 위로 높이 날아 올라갔다.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이 두려워서 번식기인 4월에서 6월까지는 집부근 잡목림으로 내려와 둥지를 틀기 때문에 겁쟁이라 부른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나서 왕눈이는 쓴 웃음을 지나가는 바람 속에 실었다.
짝짓기 놀이를 방해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냥 돌아가려다 펑! 뚫려 있는 주먹만한 구멍에 눈길이 머물자 왕눈이는 금방 생각을 바꿨다.
굴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슬그머니 치밀어 오르자 왕눈이는 상큼상큼 걸어가서 늙은 밤나무 밑동을 콩콩 울려 본 다음 옹이를 골라 밟으며 나무를 타고 올랐다.
화가 단단히 난 왕부리 부부는 자기 집을 지키려고 전투 비행기처럼 무섭게 왕눈이를 공격해 왔다.
˝찾아온 손님에게 집구경좀 시켜주면 어디가 덧나니˝
하고 빈정거리며 왕눈이는 밤나무 줄기를 꺾어 방패로 삼고 야무지게 버티어 내며 구멍 근처까지 가서 허리를 쑥 뽑아 굴 속을 들여다보았다.캄캄하기만 했다.
오른쪽 팔뚝을 집어넣고 이리저리 휘저어 보았으나 손끝에 닿는 것이 없었다.
˝세 개의 구멍이 한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걸 보니 비상시에 도망가기 위해 만든 탈출구인가보지.˝
왕눈이는 왕부리의 지혜에 감탄을 하며 발끝으로 버틴 채 손을 더 깊숙이 찔러 넣었다.
톱밥같이 부드러운 나무 부스러기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새알 네 개가 까끌까끌 만져졌다.따뜻한 털내음이 손끝을 타고 코 끝에 묻어 왔다.
새알에 손을 대자 왕부리 부부는 죽을 둥 살 둥 목숨을 걸고 덤벼들었다.
금방 왕눈이의 손등에 생채기가 생기고 빨간 피가 흘렀다.
˝누가 알을 어쩌니.어떻든 너희들을 화나게 해서 미안하다.내가 새알들을 잘 보살펴 줄 테니 우리 의형제 맺기로 하자.내가 너희들의 형이 되어 줄게.˝
일방적으로 그렇게 약속을 해 놓은 후 왕눈이는 새알을 깨고 나올 고 앙증스런 새끼가 보고 싶어서 매일 같이 뒷동산엘 오르내렸다.
처음에는 왕부리 부부가 조심조심 피해 다녔지만 적이 아니란 걸 알게 되자 왕눈이의 휘파람 소리가 나면 산 아래까지 마중을 나와서
˝딱딱딱! 크낙,크나악!˝
하고 날카로운 발톱을 앞뒤로 두 개씩 나무 속에 단단히 박고 연신 쪼아대며 뚫린 구멍 속에 갈고리 같이 생긴 긴 혀를 집어넣어 벌레를 찔러 먹고는 빳빳한 꽁지로 몸을 떠받치고 나무를 나선형으로 오르며 왕눈이에게 재주를 보여 주었다.
그럭저럭 왕눈이와 왕부리 사이가 거리낌없이 가까와오던 어느 날.
왕부리 부부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왕눈이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새끼가 나오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언뜻 스치자 왕눈이는 시험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헐레벌떡 뒷동산에 올랐다.
밤나무 위를 쳐다보던 왕눈이의 두 눈이 삽시간에 왕방울만해졌다.
새끼는커녕 구렁이가 입맛을 다시며 새둥지에서 유유히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쁜 녀석,새알을 건드리고도 네가 살성 싶으냐!˝
분노의 불꽃이 활활 당겨지는 순간 왕눈이는 머리통 만한 돌을 집어들고 구렁이를 향해 힘껏 던졌다.몸뚱이에 정통으로 맞았다.그러나 구렁이는 한 번 꿈틀하더니만 고개를 치켜들고 달려와 왕눈이의 발뒤꿈치를 순식간에 물어 버렸다.
엉겁결에 왕눈이도 구렁이의 목을 손아귀에 집어넣고 사정없이 비틀었다.
구렁이도 왕눈이의 몸을 서리 서리 감고 꼭꼭 조여 왔다.
왕눈이는 어금니를 꽉꽉 물고 있는 힘을 다 쏟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잠시 맴돌다 이윽고 승패가 가려졌다.
구렁이가 감았던 몸을 먼저 풀며 맥을 놓았다.그제야 왕눈이는 핏줄을 타고 온 몸으로 퍼지는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독이 없는 뱀이라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다리가 뻐근하게 굳어지는 것만 같아서 움직이기가 조금 불편했다.그러나 왕눈이는 울지 않고 거뜬히 일어나서 두 손을 툭툭 털다가
´뱀은 통째로 먹이를 삼킨다고 했지.´
하는 생각이 들자 왕눈이는 부랴부랴 손톱으로 구렁이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여느땐 뱀만 보면 징그럽다고 도망가던 왕눈이였지만 웬일인지 그 날 따라 용감하기만 했다.
숱한 고생을 하며 껍질을 벗기긴 했으나 새끼 모습이 다 갖춰진 새알들은 모두 터져서 둥지에 다시 넣을 수 없게 되었다.
왕눈이의 큰 두 눈에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또르르 굴러 내렸다.
왕눈이를 놀라게 한 끔직한 사건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구렁이가 침입한 바로 그 다음 날 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토담벽을 타고 오른 햇살이 미루나무 가지 끝에서 감빛 노을을 뱉아낼 즈음에
˝크낙! 크나악!˝
하고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왕부리의 비명 소리가 마을을 가득 덮었다.
´울음 소리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데......´
하고 생각하며 왕눈이는 창밖으로 목을 길게 뽑고 사방을 두리번거려 왕부리를 찾아내고는 커다란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왕부리의 불안한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끔씩 수리봉을 넘어오는 난추니와 익더귀에게 들킬까 봐 나무 사이로 낮게만 날던 왕부리가 마을까지 다급하게 내려온걸 보면 굉장히 큰 일이 벌어졌을 거라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쫓기는 듯한 저 목청이 아무래도 걸린단 말이야.´
왕구슬 같은 두 눈을 반짝거리며 형사처럼 골몰하던 왕눈이의 가슴 속에 무엇인가 꿈틀 집히는 게 있었다.
점심 때쯤이었다.
마을 앞에서 놀고 있는데 콧수염을 기른 어떤 대머리 아저씨가 승용차를 타고 와 왕눈이에게 물었다.
˝이 마을에 딱따구리나 크낙새 같은 희귀조도 있니?˝
˝그럼요. 뒷동산 밤나무에 크낙새가 알을 낳았는데 뱀이 훔쳐먹었어요.˝
하고 왕눈이는 하얀 이를 내보이며 신나게 말해 주었었다.그 때까지만 해도 왕눈이는 그 아저씨가 동물학자인 줄만 알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밀렵꾼임이 틀림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낚시 가방 같은걸 메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 속에 사냥총이 들어 있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섬뜩하고 분통이 터져서 배길 수가 없었다.
왕눈이는 두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입술에 대고 미루나무 가지 위를 향해 크게 소리쳐 물었다.
˝밀렵꾼이 너희들에게 총질을 했니?˝
˝크낙! 크낙!˝
날개를 파닥이며 더욱 요란하게 울어대기만 하는 왕부리의 울음소리는 맥박 보다가도 더 빠른 속도로 왕눈이의 가슴에 와 닿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가봐야 되겠어.조금전 공기총 소리 같은 것이 분명 들린 것 같았어.저것은 수컷인데 그렇다면 암컷에게 무슨 일이......´
왕눈이는 발끝을 곧추 세우고 벽에 걸린 윗도리를 내려 입었다.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억누르며 왕눈이는 뒷동산으로 치뛰었다.
왕눈이가 왕부리를 앞세우고 뒷동산에 올랐을 때 아름드리 밤나무 밑에는 왕부리의 보드라운 깃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천연기념물에게 총질을 하다니.그깟 천원 때문에 내가......´
양심에 가책을 느낀 왕눈이는 밀렵꾼 아저씨가 준 천원짜리 지폐를 주머니에서 꺼내 발기발기 찢어 버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꼭 잡아내고 말겠어.´
왕눈이는 입술을 잘근 물고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콧수염 대머리 아저씨의 얼굴을 또렷이 새겨 두었다.
얼빠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던 왕눈이는 자기가 어둠 속으로 조금씩 빠져들고 있다는 걸 알고 갈팡질팡 산에서 내리뛰기 시작했다.
가끔씩 마을까지 내려와 해꼬지를 하는 늑대나 여우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왕부리도 숲 속이 무서웠던지 왕눈이를 뒤따라왔다.
˝왕부리야,내 손으로 밀렵꾼을 잡아 죄값을 치르게 할 테니 너는 염려 말고 돌아가 있어?˝
하고 조용히 타일러 보았지만 왕부리는
˝크낙,크나악˝
하고 슬프게 울며 왕눈이의 가슴을 따갑게 찔러대기만 할 뿐 고집을 꺾지 않았다.
허겁지겁 집에 도착한 왕눈이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팔소매로 훔치며 다시 한 번
˝어서 숲 속으로 돌아가?˝
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그래도 왕부리는 하얀 배를 창틀에 찰싹 붙이고 창문을 자꾸만 톡톡 쪼아대며 보챘다.
˝산 속이 무서워서 그러니? 그러나 여긴 네가 살 곳이 못돼˝
왕눈이가 또 살살 달래보았지만 왕부리는 끝까지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결국 마음 약한 왕눈이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네 맘대로 해라.그렇지만 불편하다고 날 원망하지는 말아라˝
하며 왕눈이가 창문을 열어주자 왕부리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까닥하고 방 안으로 날아들어와 책상 위에 앉았다.
그 날부터 왕부리는 왕눈이네 식구가 되었다.
아내와 자식들을 한꺼번에 빼앗긴 왕부리는 좀처럼 바깥 세상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으므로 왕눈이는 매일 같이 산에 올라가 썩은 나무를 날라 오는 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렇게 아무 일없이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지내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났으니 아빠의 전근으로 말미암아 왕눈이네가 서울로 떠나게 된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왕눈이는 두 눈이 퉁퉁 부어오르도록 슬피 울며 왕부리와 작별 인사를 했다.
˝왕부리야,이제 우리는 헤어져야 해. 어떤 일이 있어도 밀렵꾼은 내가 꼭 잡고 말테니 너는 아무 걱정 말고 다시 산 속으로 가서 새 보금자리를 꾸미도록 해라.부디 행복하게 살아 다오.˝
왕눈이는 목이 메여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왕부리에게 뽀뽀를 한 뒤 하늘 높이 던졌다.그러나 왕부리는 날개짓을 하며 마당을 몇 바퀴 돌다가 이내 이삿짐을 실은 화물차를 뒤따라왔다.
˝따라오면 안 돼! 어서 숲 속으로 돌아가!˝
하고 몇 번은 소리쳤지만 그것은 왕눈이의 진짜 속마음은 아니었다.
(2)
왕눈이도 왕부리도 도시 생활은 익숙지가 못했다.
왕부리의 배를 채워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골치 아픈 문제거리였다.새모이를 사다 주어 보았지만 입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동물원에나 기증하거라.˝
보기가 딱했던지 엄마가 그렇게 권하셨지만 왕눈이는 되려 엄마에게
˝무슨 말씀이세요.왕부리는 내 동생이란 말이어요.˝
하고 짜증을 부렸다.
˝짐승이 어째서 네 동생이냐?˝
˝짐승도 사람과 똑 같은 동물이란 말예요.˝
˝그럼,네 동생을 굶겨 죽일 셈이냐?˝
˝......˝
왕눈이는 엄마에게 대꾸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서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배가 고파서 죽은 것처럼 축 쳐져 있는 왕부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엄마 말대로 해야 되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빠가 낚시를 가려고 낚시 가방을 챙기고 있는 사이에 왕부리는 미끼로 사 온 벌레가 들어 있는 유리병을 깨고 그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벌레를 꺼내 먹고 있었다.
˝어 이 녀석 봐라!˝
아빠는 꾸짖기보다는 대견스러워서 껄껄 웃으며 말씀하셨다.
˝진작 그럴 것이지.이젠 함께 살 수 있게 되었구나.˝
하며 왕눈이는 기쁜 마음으로 왕부리를 품 속에 꼬옥 안아 주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이 올 때까지 왕눈이와 왕부리는 시골티를 벗어 가며 그럭저럭 행복한 나날을 보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왕눈이는 벌레 사 오는걸 깜빡 잊고 말았다.그것도 모르고 왕부리는 빈 유리병을 자꾸만 쪼아댔다.그 순간 왕눈이의 머리 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이거야! 왕부리에게 훈련을 시켜야 되겠어.˝
하고 왕눈이는 무릎을 쳤다.그리고 그 즉시 훈련은 시작되었다.
하얀 눈이 펄펄 내리는 겨울이 왔을 때 왕부리는 배가 고프면 작은 힘으로 유리병을 톡톡 쪼아 먹이를 달라고 칭얼거릴 줄 알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왕눈이는 벌레를 입 속에 쏘옥 쏙 넣어 주었다.
초보 훈련을 성공리에 마친 왕부리는 상급 훈련을 시작하였다.
그림 솜씨가 뛰어난 왕눈이는 금세 밀렵꾼 아저씨의 초상화를 그려 유리병에 붙였다.밀렵꾼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의 초상화도 여러 장 군데군데 섞어 놓았다.
˝왕부리야,어서 대머리 밀렵꾼을 찾아보아라?˝
하는 왕눈이의 명령을 듣기라도 했는지 왕부리는 실로폰을 두들기듯 방안에 가득찬 유리병 사이를 누비며 즐거운 연주를 시작했다.
˝야,이 녀석아.벌써 밀렵꾼의 얼굴을 잊었단 말이냐! 혼좀 나 보겠어!˝
이렇게 구박하는 때가 훨씬 많아서
´역시 넌 안되겠구나´
하고 포기하려고 한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인내심을 갖고 왕눈이는 거듭 노력했다.
귀여운 마음을 감추고 가끔씩 가벼운 매를 주었더니 차차 깨달음이 빨라졌다.
그 이듬해 여름이 되어서야 왕부리는 콧수염의 대머리 밀렵꾼 아저씨를 쉽게 찾아내게 되었으므로 왕눈이는 왕부리에게 형사 출동 명령을 내렸다.
˝왕부리야,너를 날아다니는 형사로 임명한다.어서 대머리 밀렵꾼을 찾아내거라˝
그 명령을 알아들었는지 왕부리는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다짐을 하듯 왕눈이에게 고개짓을 한 다음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아갔다.
왕부리는 금방 서울 시민들의 눈에 띄게 되었고 마침내는 텔레비전 카메라에 잡혀 전국에 생중계 되었다.
오랜 만에 날개를 쓰게 되어서 잘 움직여지질 않았는지 왕부리는 자주 쉬어 가며 서울 시내를 헤맸다.
날개도 아프고 허기도 져서 왕부리는 잠시 쉴 곳을 찾아보았다.
마음에 쏙 드는 호화 양옥 3층집 베란다 위에서 피곤한 날개를 접었다.
안을 기웃거리다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로 깜짝 놀랜 왕부리는 응접실 구석의 고목 위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갔다.
˝여보,당신이 살아 있었단 말이오.˝
왕부리의 목소리는 많이 떨리고 있었다.
˝......˝
그러나 아내는 석고상처럼 여전히 앉아 있기만 할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섬뜩한 생각이 들자 왕부리는 주춤 물러서며 찬찬히 아내의 요모조모를 뜯어보았다.
아내는 살아 있는 것처럼 고스란히 죽어 있었다.내장대신 솜뭉치를 넣어 다시 꿰맸으므로 따스한 체온은커녕 싸늘한 감촉만이 느껴졌고 사랑스런 향기대신 코를 찌르는 방부제 냄새만 그득 풍겨 올 뿐이었다.
˝여보,누가 당신을 이렇게......˝
왕부리는 아내의 날개죽지 속에 부리를 묻고 비벼대며 슬피 울었다.그리고는 분함을 참을 길이 없어 발톱을 세우고 집안을 미친 듯이 날며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마구 쪼아댔다.순식간에 값비싼 도자기들이 산산조각이 나서 거실에 흩어졌다.
˝우당탕! 쨍그랑!˝
하는 소리에 코를 벌름거리며 낮잠을 자고 있던 주인이 거실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웬 녀석이 남의 집에 맘대로 들어와서 단잠을 깨우는 거야!˝
왕부리는 그가 콧수염의 대머리임을 즉시 알아보고 오래 전에 고향 뒷산에서 만난 적이 있는 밀렵꾼이란 걸 기억해 냈다.
˝크낙새가 제발로 들어오다니!˝
대머리 콧수염 밀렵꾼은 싱글벙글거리며 사냥총에 탄알을 넣었다.그러나 사냥총의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왕부리의 공격이 먼저였다.
왕부리는 밀렵꾼이 쓰러질 때까지 쉬지 않고 쪼아댔다.
텔레비전 카메라를 따라온 경찰에 의해 밀렵꾼은 쇠고랑을 차게 되었고 왕부리는 박제된 아내를 데리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 후 어느 누구도 왕부리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
˝딱딱딱!˝
˝딱따구리가 아니면 크낙새가 틀림없어.˝
하더니만 왕눈이는 쏜살 같이 뒷산으로 치뛰기 시작했다.
넘어지고 자빠지며 나무 찍는 소리를 더듬어 숲 속으로 들어간 왕눈이는 아름드리 밤나무 위에서 즐겁게 노닐고 있는 크낙새 한 쌍을 발견했다.
´저것이 그림으로만 보던 크낙새로구나.´
왕눈이는 신기한 보물처럼 크낙새의 요모조모를 뜯어보며 조금씩 흥분하고 있었다.
´이마,도가머리,뺨부분은 붉은 빛이고 몸빛은 검은 빛인데 머리 색깔이 다르구나.그러고 보니 검은 머리가 암컷이고 붉은 머리는 수컷이구나.송곳처럼 길쭉하고 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부리는 머리보다도 더 길구나.진짜 왕부리로구나.저걸로 나무를 사정없이 찍어 대니 마을까지 구멍 뚫는 소리가 크게 들리지.´
왕눈이는 눈이 유달리 커서 붙여진 자기 별명의 돌림을 따서 크낙새를 왕부리라고 이름 지어 주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봐야지.´
하고 생각하며 왕눈이는 살금살금 발걸음을 옮겼지만 어느새 인기척을 듣고 왕부리는 가지 위로 높이 날아 올라갔다.
외적으로부터의 침입이 두려워서 번식기인 4월에서 6월까지는 집부근 잡목림으로 내려와 둥지를 틀기 때문에 겁쟁이라 부른다는 선생님의 말씀이 갑자기 생각나서 왕눈이는 쓴 웃음을 지나가는 바람 속에 실었다.
짝짓기 놀이를 방해하고 싶지가 않아서 그냥 돌아가려다 펑! 뚫려 있는 주먹만한 구멍에 눈길이 머물자 왕눈이는 금방 생각을 바꿨다.
굴 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슬그머니 치밀어 오르자 왕눈이는 상큼상큼 걸어가서 늙은 밤나무 밑동을 콩콩 울려 본 다음 옹이를 골라 밟으며 나무를 타고 올랐다.
화가 단단히 난 왕부리 부부는 자기 집을 지키려고 전투 비행기처럼 무섭게 왕눈이를 공격해 왔다.
˝찾아온 손님에게 집구경좀 시켜주면 어디가 덧나니˝
하고 빈정거리며 왕눈이는 밤나무 줄기를 꺾어 방패로 삼고 야무지게 버티어 내며 구멍 근처까지 가서 허리를 쑥 뽑아 굴 속을 들여다보았다.캄캄하기만 했다.
오른쪽 팔뚝을 집어넣고 이리저리 휘저어 보았으나 손끝에 닿는 것이 없었다.
˝세 개의 구멍이 한 통로로 연결되어 있는걸 보니 비상시에 도망가기 위해 만든 탈출구인가보지.˝
왕눈이는 왕부리의 지혜에 감탄을 하며 발끝으로 버틴 채 손을 더 깊숙이 찔러 넣었다.
톱밥같이 부드러운 나무 부스러기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새알 네 개가 까끌까끌 만져졌다.따뜻한 털내음이 손끝을 타고 코 끝에 묻어 왔다.
새알에 손을 대자 왕부리 부부는 죽을 둥 살 둥 목숨을 걸고 덤벼들었다.
금방 왕눈이의 손등에 생채기가 생기고 빨간 피가 흘렀다.
˝누가 알을 어쩌니.어떻든 너희들을 화나게 해서 미안하다.내가 새알들을 잘 보살펴 줄 테니 우리 의형제 맺기로 하자.내가 너희들의 형이 되어 줄게.˝
일방적으로 그렇게 약속을 해 놓은 후 왕눈이는 새알을 깨고 나올 고 앙증스런 새끼가 보고 싶어서 매일 같이 뒷동산엘 오르내렸다.
처음에는 왕부리 부부가 조심조심 피해 다녔지만 적이 아니란 걸 알게 되자 왕눈이의 휘파람 소리가 나면 산 아래까지 마중을 나와서
˝딱딱딱! 크낙,크나악!˝
하고 날카로운 발톱을 앞뒤로 두 개씩 나무 속에 단단히 박고 연신 쪼아대며 뚫린 구멍 속에 갈고리 같이 생긴 긴 혀를 집어넣어 벌레를 찔러 먹고는 빳빳한 꽁지로 몸을 떠받치고 나무를 나선형으로 오르며 왕눈이에게 재주를 보여 주었다.
그럭저럭 왕눈이와 왕부리 사이가 거리낌없이 가까와오던 어느 날.
왕부리 부부의 요란한 울음소리가 왕눈이의 가슴을 찢어 놓았다.
´새끼가 나오고 있는 걸까?´
그런 생각이 언뜻 스치자 왕눈이는 시험 공부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헐레벌떡 뒷동산에 올랐다.
밤나무 위를 쳐다보던 왕눈이의 두 눈이 삽시간에 왕방울만해졌다.
새끼는커녕 구렁이가 입맛을 다시며 새둥지에서 유유히 미끄러져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쁜 녀석,새알을 건드리고도 네가 살성 싶으냐!˝
분노의 불꽃이 활활 당겨지는 순간 왕눈이는 머리통 만한 돌을 집어들고 구렁이를 향해 힘껏 던졌다.몸뚱이에 정통으로 맞았다.그러나 구렁이는 한 번 꿈틀하더니만 고개를 치켜들고 달려와 왕눈이의 발뒤꿈치를 순식간에 물어 버렸다.
엉겁결에 왕눈이도 구렁이의 목을 손아귀에 집어넣고 사정없이 비틀었다.
구렁이도 왕눈이의 몸을 서리 서리 감고 꼭꼭 조여 왔다.
왕눈이는 어금니를 꽉꽉 물고 있는 힘을 다 쏟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잠시 맴돌다 이윽고 승패가 가려졌다.
구렁이가 감았던 몸을 먼저 풀며 맥을 놓았다.그제야 왕눈이는 핏줄을 타고 온 몸으로 퍼지는 아픔을 느낄 수 있었다.
독이 없는 뱀이라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다리가 뻐근하게 굳어지는 것만 같아서 움직이기가 조금 불편했다.그러나 왕눈이는 울지 않고 거뜬히 일어나서 두 손을 툭툭 털다가
´뱀은 통째로 먹이를 삼킨다고 했지.´
하는 생각이 들자 왕눈이는 부랴부랴 손톱으로 구렁이의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여느땐 뱀만 보면 징그럽다고 도망가던 왕눈이였지만 웬일인지 그 날 따라 용감하기만 했다.
숱한 고생을 하며 껍질을 벗기긴 했으나 새끼 모습이 다 갖춰진 새알들은 모두 터져서 둥지에 다시 넣을 수 없게 되었다.
왕눈이의 큰 두 눈에 그렁그렁 고여 있던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또르르 굴러 내렸다.
왕눈이를 놀라게 한 끔직한 사건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구렁이가 침입한 바로 그 다음 날 더 엄청난 일이 벌어졌다.
토담벽을 타고 오른 햇살이 미루나무 가지 끝에서 감빛 노을을 뱉아낼 즈음에
˝크낙! 크나악!˝
하고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왕부리의 비명 소리가 마을을 가득 덮었다.
´울음 소리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데......´
하고 생각하며 왕눈이는 창밖으로 목을 길게 뽑고 사방을 두리번거려 왕부리를 찾아내고는 커다란 두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왕부리의 불안한 움직임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가끔씩 수리봉을 넘어오는 난추니와 익더귀에게 들킬까 봐 나무 사이로 낮게만 날던 왕부리가 마을까지 다급하게 내려온걸 보면 굉장히 큰 일이 벌어졌을 거라는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걸까? 쫓기는 듯한 저 목청이 아무래도 걸린단 말이야.´
왕구슬 같은 두 눈을 반짝거리며 형사처럼 골몰하던 왕눈이의 가슴 속에 무엇인가 꿈틀 집히는 게 있었다.
점심 때쯤이었다.
마을 앞에서 놀고 있는데 콧수염을 기른 어떤 대머리 아저씨가 승용차를 타고 와 왕눈이에게 물었다.
˝이 마을에 딱따구리나 크낙새 같은 희귀조도 있니?˝
˝그럼요. 뒷동산 밤나무에 크낙새가 알을 낳았는데 뱀이 훔쳐먹었어요.˝
하고 왕눈이는 하얀 이를 내보이며 신나게 말해 주었었다.그 때까지만 해도 왕눈이는 그 아저씨가 동물학자인 줄만 알고 있었다.그런데 지금 곰곰이 생각해 보니 밀렵꾼임이 틀림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낚시 가방 같은걸 메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 속에 사냥총이 들어 있었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하니 가슴이 섬뜩하고 분통이 터져서 배길 수가 없었다.
왕눈이는 두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입술에 대고 미루나무 가지 위를 향해 크게 소리쳐 물었다.
˝밀렵꾼이 너희들에게 총질을 했니?˝
˝크낙! 크낙!˝
날개를 파닥이며 더욱 요란하게 울어대기만 하는 왕부리의 울음소리는 맥박 보다가도 더 빠른 속도로 왕눈이의 가슴에 와 닿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가봐야 되겠어.조금전 공기총 소리 같은 것이 분명 들린 것 같았어.저것은 수컷인데 그렇다면 암컷에게 무슨 일이......´
왕눈이는 발끝을 곧추 세우고 벽에 걸린 윗도리를 내려 입었다.
방망이질치는 가슴을 억누르며 왕눈이는 뒷동산으로 치뛰었다.
왕눈이가 왕부리를 앞세우고 뒷동산에 올랐을 때 아름드리 밤나무 밑에는 왕부리의 보드라운 깃털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천연기념물에게 총질을 하다니.그깟 천원 때문에 내가......´
양심에 가책을 느낀 왕눈이는 밀렵꾼 아저씨가 준 천원짜리 지폐를 주머니에서 꺼내 발기발기 찢어 버렸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내가 꼭 잡아내고 말겠어.´
왕눈이는 입술을 잘근 물고 두 주먹을 부르르 떨며 콧수염 대머리 아저씨의 얼굴을 또렷이 새겨 두었다.
얼빠진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던 왕눈이는 자기가 어둠 속으로 조금씩 빠져들고 있다는 걸 알고 갈팡질팡 산에서 내리뛰기 시작했다.
가끔씩 마을까지 내려와 해꼬지를 하는 늑대나 여우가 나타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었다.
왕부리도 숲 속이 무서웠던지 왕눈이를 뒤따라왔다.
˝왕부리야,내 손으로 밀렵꾼을 잡아 죄값을 치르게 할 테니 너는 염려 말고 돌아가 있어?˝
하고 조용히 타일러 보았지만 왕부리는
˝크낙,크나악˝
하고 슬프게 울며 왕눈이의 가슴을 따갑게 찔러대기만 할 뿐 고집을 꺾지 않았다.
허겁지겁 집에 도착한 왕눈이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팔소매로 훔치며 다시 한 번
˝어서 숲 속으로 돌아가?˝
하고 문을 닫아 버렸다.그래도 왕부리는 하얀 배를 창틀에 찰싹 붙이고 창문을 자꾸만 톡톡 쪼아대며 보챘다.
˝산 속이 무서워서 그러니? 그러나 여긴 네가 살 곳이 못돼˝
왕눈이가 또 살살 달래보았지만 왕부리는 끝까지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결국 마음 약한 왕눈이가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네 맘대로 해라.그렇지만 불편하다고 날 원망하지는 말아라˝
하며 왕눈이가 창문을 열어주자 왕부리는 고맙다는 듯 고개를 까닥하고 방 안으로 날아들어와 책상 위에 앉았다.
그 날부터 왕부리는 왕눈이네 식구가 되었다.
아내와 자식들을 한꺼번에 빼앗긴 왕부리는 좀처럼 바깥 세상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으므로 왕눈이는 매일 같이 산에 올라가 썩은 나무를 날라 오는 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그렇게 아무 일없이 오순도순 정을 나누며 지내던 어느 날.
뜻하지 않은 일이 생겨났으니 아빠의 전근으로 말미암아 왕눈이네가 서울로 떠나게 된 것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왕눈이는 두 눈이 퉁퉁 부어오르도록 슬피 울며 왕부리와 작별 인사를 했다.
˝왕부리야,이제 우리는 헤어져야 해. 어떤 일이 있어도 밀렵꾼은 내가 꼭 잡고 말테니 너는 아무 걱정 말고 다시 산 속으로 가서 새 보금자리를 꾸미도록 해라.부디 행복하게 살아 다오.˝
왕눈이는 목이 메여서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왕부리에게 뽀뽀를 한 뒤 하늘 높이 던졌다.그러나 왕부리는 날개짓을 하며 마당을 몇 바퀴 돌다가 이내 이삿짐을 실은 화물차를 뒤따라왔다.
˝따라오면 안 돼! 어서 숲 속으로 돌아가!˝
하고 몇 번은 소리쳤지만 그것은 왕눈이의 진짜 속마음은 아니었다.
(2)
왕눈이도 왕부리도 도시 생활은 익숙지가 못했다.
왕부리의 배를 채워 주는 것이 무엇보다도 골치 아픈 문제거리였다.새모이를 사다 주어 보았지만 입도 가까이하지 않았다.
˝동물원에나 기증하거라.˝
보기가 딱했던지 엄마가 그렇게 권하셨지만 왕눈이는 되려 엄마에게
˝무슨 말씀이세요.왕부리는 내 동생이란 말이어요.˝
하고 짜증을 부렸다.
˝짐승이 어째서 네 동생이냐?˝
˝짐승도 사람과 똑 같은 동물이란 말예요.˝
˝그럼,네 동생을 굶겨 죽일 셈이냐?˝
˝......˝
왕눈이는 엄마에게 대꾸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해서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배가 고파서 죽은 것처럼 축 쳐져 있는 왕부리의 모습을 바라보며
´엄마 말대로 해야 되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빠가 낚시를 가려고 낚시 가방을 챙기고 있는 사이에 왕부리는 미끼로 사 온 벌레가 들어 있는 유리병을 깨고 그 속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벌레를 꺼내 먹고 있었다.
˝어 이 녀석 봐라!˝
아빠는 꾸짖기보다는 대견스러워서 껄껄 웃으며 말씀하셨다.
˝진작 그럴 것이지.이젠 함께 살 수 있게 되었구나.˝
하며 왕눈이는 기쁜 마음으로 왕부리를 품 속에 꼬옥 안아 주었다.
은행잎이 노랗게 물드는 가을이 올 때까지 왕눈이와 왕부리는 시골티를 벗어 가며 그럭저럭 행복한 나날을 보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왕눈이는 벌레 사 오는걸 깜빡 잊고 말았다.그것도 모르고 왕부리는 빈 유리병을 자꾸만 쪼아댔다.그 순간 왕눈이의 머리 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바로 이거야! 왕부리에게 훈련을 시켜야 되겠어.˝
하고 왕눈이는 무릎을 쳤다.그리고 그 즉시 훈련은 시작되었다.
하얀 눈이 펄펄 내리는 겨울이 왔을 때 왕부리는 배가 고프면 작은 힘으로 유리병을 톡톡 쪼아 먹이를 달라고 칭얼거릴 줄 알게 되었고 그럴 때마다 왕눈이는 벌레를 입 속에 쏘옥 쏙 넣어 주었다.
초보 훈련을 성공리에 마친 왕부리는 상급 훈련을 시작하였다.
그림 솜씨가 뛰어난 왕눈이는 금세 밀렵꾼 아저씨의 초상화를 그려 유리병에 붙였다.밀렵꾼과 비슷하게 생긴 사람의 초상화도 여러 장 군데군데 섞어 놓았다.
˝왕부리야,어서 대머리 밀렵꾼을 찾아보아라?˝
하는 왕눈이의 명령을 듣기라도 했는지 왕부리는 실로폰을 두들기듯 방안에 가득찬 유리병 사이를 누비며 즐거운 연주를 시작했다.
˝야,이 녀석아.벌써 밀렵꾼의 얼굴을 잊었단 말이냐! 혼좀 나 보겠어!˝
이렇게 구박하는 때가 훨씬 많아서
´역시 넌 안되겠구나´
하고 포기하려고 한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지만 인내심을 갖고 왕눈이는 거듭 노력했다.
귀여운 마음을 감추고 가끔씩 가벼운 매를 주었더니 차차 깨달음이 빨라졌다.
그 이듬해 여름이 되어서야 왕부리는 콧수염의 대머리 밀렵꾼 아저씨를 쉽게 찾아내게 되었으므로 왕눈이는 왕부리에게 형사 출동 명령을 내렸다.
˝왕부리야,너를 날아다니는 형사로 임명한다.어서 대머리 밀렵꾼을 찾아내거라˝
그 명령을 알아들었는지 왕부리는 임무를 완수하겠다는 다짐을 하듯 왕눈이에게 고개짓을 한 다음 푸른 하늘을 마음껏 날아갔다.
왕부리는 금방 서울 시민들의 눈에 띄게 되었고 마침내는 텔레비전 카메라에 잡혀 전국에 생중계 되었다.
오랜 만에 날개를 쓰게 되어서 잘 움직여지질 않았는지 왕부리는 자주 쉬어 가며 서울 시내를 헤맸다.
날개도 아프고 허기도 져서 왕부리는 잠시 쉴 곳을 찾아보았다.
마음에 쏙 드는 호화 양옥 3층집 베란다 위에서 피곤한 날개를 접었다.
안을 기웃거리다 자기 눈을 의심할 정도로 깜짝 놀랜 왕부리는 응접실 구석의 고목 위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날아갔다.
˝여보,당신이 살아 있었단 말이오.˝
왕부리의 목소리는 많이 떨리고 있었다.
˝......˝
그러나 아내는 석고상처럼 여전히 앉아 있기만 할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섬뜩한 생각이 들자 왕부리는 주춤 물러서며 찬찬히 아내의 요모조모를 뜯어보았다.
아내는 살아 있는 것처럼 고스란히 죽어 있었다.내장대신 솜뭉치를 넣어 다시 꿰맸으므로 따스한 체온은커녕 싸늘한 감촉만이 느껴졌고 사랑스런 향기대신 코를 찌르는 방부제 냄새만 그득 풍겨 올 뿐이었다.
˝여보,누가 당신을 이렇게......˝
왕부리는 아내의 날개죽지 속에 부리를 묻고 비벼대며 슬피 울었다.그리고는 분함을 참을 길이 없어 발톱을 세우고 집안을 미친 듯이 날며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마구 쪼아댔다.순식간에 값비싼 도자기들이 산산조각이 나서 거실에 흩어졌다.
˝우당탕! 쨍그랑!˝
하는 소리에 코를 벌름거리며 낮잠을 자고 있던 주인이 거실로 뛰어나오며 소리쳤다.
˝웬 녀석이 남의 집에 맘대로 들어와서 단잠을 깨우는 거야!˝
왕부리는 그가 콧수염의 대머리임을 즉시 알아보고 오래 전에 고향 뒷산에서 만난 적이 있는 밀렵꾼이란 걸 기억해 냈다.
˝크낙새가 제발로 들어오다니!˝
대머리 콧수염 밀렵꾼은 싱글벙글거리며 사냥총에 탄알을 넣었다.그러나 사냥총의 방아쇠를 당기기 전에 왕부리의 공격이 먼저였다.
왕부리는 밀렵꾼이 쓰러질 때까지 쉬지 않고 쪼아댔다.
텔레비전 카메라를 따라온 경찰에 의해 밀렵꾼은 쇠고랑을 차게 되었고 왕부리는 박제된 아내를 데리고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버렸다.
그 후 어느 누구도 왕부리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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