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고슈는 마을 극단의 첼로 켜는 연주자였습니다. 하지만 실력이 별로라는 평판이 나 있었죠. 솔직히 별로인 정도가 아니라 동료 연주자들 가운데 가장 형편없었기 때문에 지휘자들한테 늘 꾸지람을 들었답니다.
오후에 다들 연습실에 둘러앉아, 이번 마을 음악회에서 연주할 제6 교향곡을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트럼펫이 열심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은 두 줄기 바람처럼 울고 있고요.
클라리넷도 보-보 하고 거들어 줍니다.
고슈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접시만하게 뜨고는 열심히 악보를 들여다보며 첼로를 켜고 있었습니다.
느닷없이 지휘자가 손뼉을 짝 쳤습니다. 다들 연주를 멈추고 조용해졌습니다. 지휘자가 호통을 쳤습니다.
˝첼로가 늦었잖아. 띠리리, 띠리리, 여기서부터 다시, 자!˝
모두들 조금 앞으로 돌아가 다시 연주했습니다. 고슈는 얼굴이 벌개져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방금 지적당한 곳을 간신히 넘어갔습니다. 휴우 하고 안심하면서 다음 부분을 연주하고 있는데, 지휘자가 다시 손뼉을 짝 쳤습니다.
˝첼로, 줄이 안 맞잖아! 정말 미치겠군. 이봐, 내가 자네한테 도레미파까지 가르쳐 줘야겠나?˝
사람들은 멋쩍은 듯 괜히 자기 악보를 들여다보거나 악기를 만지작거렸습니다. 고슈는 허둥지둥 첼로 줄을 맞추었습니다. 사실은 고슈도 잘못했지만, 첼로가 워낙 고물이었던 것입니다.
˝앞 소절부터 다시. 자!˝
다시 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고슈도 입을 앙다물고 열심히 첼로를 켰습니다.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연주가 이어졌습니다. 마음을 푹 놓고 있는데, 지휘자가 또다시 손뼉을 짝 쳤습니다. ´또야!´하고 고슈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슈는 아까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괜히 악보를 들여다보며 뭔가 생각하는 척했습니다.
˝그럼, 바로 다음 부분부터. 자!˝
´자!´하고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별안간 지휘자가 발을 쿵쿵 구르며 호통쳤습니다.
˝안 돼! 도대체 엉망진창이야, 엉망진창! 이 부분은 곡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이렇게 거칠고 매끄럽지 못해서야 되겠나! 이봐, 연주회는 이제 열흘밖에 남지 않았어. 음악을 한다는 우리가 대장장이나 설탕 가게 일꾼들보다 못하다면, 도대체 우리 체면이 뭐가 되겠나? 그리고 고슈, 자넨 정말 문제야! 표정이 아예 없어. 분노고 기쁨이고 하나도 표현하지 못하잖아! 게다가 다른 악기와 호흡이 전혀 안 맞는단 말일세. 항상 자네 혼자 신발끈을 질질 끌며 뒤꽁무니를 따라오는 것 같다구. 그러면 곤란해. 제발 좀 잘해 줘. 우리 ´샛별 음악단´이 자네 하나 때문에 나쁜 평가를 받는다면, 다른 사람들한테 미안하지 않겠나? 자, 오늘 연습은 여기서 마치고, 이따가 여섯 시 정각에 극장 대기실로 오게.˝
연주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담뱃불을 붙이거나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고슈는 허름한 상자 같은 첼로를 껴안고 벽 쪽으로 돌아앉아, 입을 비죽이며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방금 전에 연습한 부분을 처음부터 조용히 다시 연주했습니다.
그 날 밤 느지막이, 고슈는 커다란 검은 짐을 둘러메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이라고 해 보았자, 마을 변두리 강가에 있는 무너진 물방앗간일 뿐입니다.
고슈는 이 물방앗간에 혼자 살면서, 아침나절에는 방앗간 주위의 작은 텃밭에서 토마토 가지를 자르거나 양배추 벌레를 잡다가 오후가 되면 극장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고슈는 집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검을 짐을 풀었습니다. 낮에 지휘자에게 함께 야단맞던, 그 거칠고 무딘 첼로였습니다. 고슈는 첼로를 마룻바닥에 살며시 내려놓고는, 갑자기 선반에서 컵을 꺼내 양동이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나서 의자에 앉아, 낮에 연습한 곡을 호랑이처럼 힘차게 켜기 시작했습니다. 악보를 넘기면서 켜다가는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 다시 켜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지잉지잉 열심히 연주했습니다.
밤은 벌써 이슥해졌습니다. 이제 고슈는 자기가 첼로를 켜고 있는지조차 헷갈렸습니다. 얼굴은 새빨개지고 눈에는 핏발이 선 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요.
그 때 누군가가 뒷문을 톡톡 두드렸습니다.
˝호슈냐?˝
고슈는 멍하니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지금까지 대여섯 번쯤 마주친 커다란 얼룩고양이였습니다.
얼룩고양이는 고슈의 밭에서 딴 설익은 토마토를 끙끙대며 들고 와 고슈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아이고, 힘들어라. 이거 나르는 것도 제법 힘드네.˝
˝뭐라고?˝
고슈가 묻자, 얼룩고양이가 말했습니다.
˝이거 선물이에요. 드세요.˝
그 순간 고슈는 낮부터 꾹꾹 눌러 왔던 울화통을 한꺼번에 터뜨렸습니다.
˝누가 너한테 토마토 가져 오랬어? 네까짓 녀석이 가져온 걸 내가 먹을 것 같아? 게다가 그 토마토는 우리 밭에서 난 거잖아. 뭐야, 아직 익지도 않은 것을 따다니! 지금까지 토마토 줄기를 갉아먹고 망쳐 놓은 녀석이 바로 너지? 썩 꺼져, 이놈의 고양이야!˝
그러자 고양이는 어깨를 둥글게 말아 구부리고는 실눈을 뜨고 싱글거리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화내시면 몸에 안 좋아요. 그보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해 주시면 어때요. 들어 드릴 테니까.˝
˝건방진 녀석! 감히 고양이 주제에.˝
철로 연주자는 화가 나서 이놈의 고양이를 어떻게 혼내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자요, 부담 갖지 마시고 어서요! 저는 선생님의 음악을 듣지 않으면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답니다.˝
˝저, 저, 저, 건방진 녀석 같으니!˝
고슈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지휘자처럼 발을 쿵쿵 구르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좋아, 켜 주마.˝
고슈는 무슨 속셈인지 문을 잠그고 창문도 몽땅 닫고는 불까지 껐습니다. 그러자 음력 스무 날을 넘긴 달빛이 방안으로 고요히 흘러 들어왔습니다.
˝뭘 들려 달라고?˝
˝트로이메라이요. 낭만파 음악가 슈만이 작곡한.˝
고양이는 입가를 핥고는 짐짓 점잖게 말했습니다.
˝그래, 토로이메라이가 이런 거냐?˝
첼로 연주자는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손수건을 쭉 찢어서 자기 귀를 틀어막았습니다. 그리고는 폭풍 같은 기세로 ´인도의 호랑이 사냥´이라는 곡을 켜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는 고개를 갸웃하고 한동안 귀를 기울이다가, 갑자기 눈을 깜박거리더니 문 쪽으로 홱 물러섰습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쿵! 하고 문으로 몸을 날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는 ´아뿔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구나.´ 하는 듯이 허둥대며 눈과 이마에서 불꽃을 파박파박 내뿜었습니다. 수염과 코에서도 불꽃이 번쩍 번쩍 튀었습니다. 고양이는 금방이라도 재채기를 할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종종걸음치기 시작했습니다. 고슈는 아주 재미가 붙어서 점점 신나게 첼로를 켰습니다.
˝선생님, 이제 됐어요! 됐다구요. 제발 부탁이니, 그만 하세요! 앞으로 다시는 선생님 음악에 참견하지 않을게요.˝
˝조용히 해! 지금부터 호랑이를 붙잡는 부분이야.˝
고양이는 고통에 못 이겨 펄쩍펄쩍 뛰어다니다가는 벽에 찰싹 붙기도 했습니다. 벽에서 몸을 떼면 한동안 그 자리가 파랗게 빛이 났습니다. 마침내 고양이는 고슈의 주위를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고슈도 어지러워져서
˝이제 그만 용서해 주마.˝
하고 겨우 연주를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고양이도 멀쩡한 얼굴로,
˝선생님, 오늘 밤 연주는 좀 이상했어요.˝
하고 대꾸했습니다.
철로 연주자는 다시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잎담배를 꺼내 물고는, 성냥 하나를 들고 물었습니다.
˝어떠냐? 몸은 괜찮아? 혀를 내밀어 봐.˝
고양이는 고슈를 놀리듯 길고 뾰족한 혀를 쏘옥 내밀었습니다.
˝하아, 좀 까칠까칠해졌구나.˝
첼로 연주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고양이 혀에다 성냥을 치익 그어 담뱃불을 붙였습니다. 고양이는 까무러치게 놀라 혀를 풍차처럼 홱홱 돌리며, 문으로 가서 머리를 쿵 박고 비틀비틀 돌아왔다가 또다시 쿵 박고, 비틀비틀 돌아왔다가 또다시 쿵 박고, 비틀비틀 길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고슈는 한참 재미있게 구경하다가,
˝이제 내보내 주마. 다시는 오지 마, 이 멍청한 녀석아.˝
첼로 연주자는 문을 열어 주고, 억새풀 사이를 바람처럼 달려가는 고양이를 바라보면서 싱긋 웃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겨우 마음이 가벼워진 듯 곤히 잠들었습니다.
이튿날 밤에도 고슈는 검은 첼로 꾸러미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신 다음, 지난밤처럼 부지런히 첼로를 켜기 시작했죠. 어느새 열두 시가 지나고, 한 시도 지나고, 두 시도 지났지만, 고슈는 여전히 첼로를 켜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몇 시인지도 알 수 없고 첼로를 켜고 있는지 어떤지도 가물가물할 즈음, 누군가가 천장을 똑똑 두드렸습니다.
˝고양이 너구나. 아직도 혼이 덜 났니?˝
고슈가 소리치자, 갑자기 천장 구멍에서 호도독 소리가 나더니 잿빛 새 한 마리가 내려왔습니다. 마루에 앉은 것을 보니 뻐꾸기였습니다.
˝뭐야, 이젠 새까지 찾아오는군. 무슨 일이지?˝
고슈가 묻자, 뻐꾸기는 새침하게 대답했습니다.
˝음악을 배우고 싶어요.˝
고슈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음악이라고? 네 노래는 기껏해야 뻐꾹, 뻐꾹뿐이잖아.˝
그러자 뻐꾸기는 아주 진지하게
˝네, 그래요. 하지만 그게 어려운 거라구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어렵기는 뭐가 어렵다는 거야. 너희들은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잖아.˝
˝그런데 그게 아렵다구요. 예를 들어 뻐꾹 하고 우는 것과 빠꾹 하고 우는 건 듣기에도 많이 다르잖아요?˝
˝다르긴 뭐가 달라.˝
˝그럼, 당신이 모르는 거예요. 우리 뻐꾸기는 뻐꾹 하고 만 번을 울어도 그 만 번이 저마다 다른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잘 알면 나한테 올 것도 없잖아?˝
˝하지만 저는 도레미파를 정확하게 노래하고 싶어요.˝
˝쳇, 도레미파 좋아하네.˝
˝음, 외국에 나가기 전에 꼭 배워야 해요.˝
˝외국은 무슨 외국!˝
˝선생님, 제발 도레미파를 가르쳐 주세요. 선생님 하시는 대로 따라서 노래할게요.˝
˝에이, 귀찮아. 그럼 딱 세 번만 켜 줄 테니까, 얼른 돌아가야 한다.˝
고슈는 첼로를 집어들고 끼잉끼잉 줄을 맞추고 나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켰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허겁지겁 날개를 파닥였습니다.
˝틀렸어요, 틀렸어! 그게 아니에요.˝
˝까다롭기는. 그럼 네가 해 봐.˝
˝이거예요.˝
뻐꾸기는 몸을 앞으로 수그리고 잠시 자세를 잡더니, ˝뻐꾹.˝하고 울었습니다.
˝뭐야, 그게 도레미파야? 그렇다면 너희들한테는 도레미파나 제6교향곡이나 다 똑같겠군.˝
˝그건 달라요.˝
˝어떻게 다른데?˝
˝어려운 것은, 이걸 많이많이 계속하는 거예요.˝
˝바로 이런 거지?˝
첼로 연주자는 다시 첼로를 쥐고, 뻐꾹뻐꾹뻐꾹뻐꾹 하고 켰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아주 기뻐하며, 뻐꾹뻐꾹뻐꾹 하고 끼여들었습니다. 몸을 잔뜩 수그리고 끝도 없이 소리쳤죠.
고슈는 마침내 손이 아파서,
˝이봐, 이제 그만 하자구.˝
하면서 손을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서운한 듯 눈을 치뜨고는 뻐꾹뻐꾹 하고 소리 높여 울다가 가까스로
˝…… 뻐꾹뻐꾹뻑뻑뻑.˝
하고 그쳤습니다.
고슈는 화가 치밀어서 ˝이봐, 뻐꾸기. 이제 볼일 끝났으면 냉큼 돌아가!˝하고 쏘아붙였습니다.
˝제발 한 번만 더 켜 주세요. 당신 솜씨는 좋긴 하지만, 어딘가 틀린 것 같거든요.˝
˝뭐야, 네가 날 가르치겠다는 거야? 썩 꺼지지 못해!˝
˝제발 딱 한 번만 더 켜 주세요.˝
뻐꾸기는 고개를 까딱까딱 조아렸습니다.
˝그럼 이번이 마지막이다.˝
고슈는 활을 쥐었습니다. 뻐꾸기는 ˝꾹.˝하고 숨을 쉬고는,
˝그럼 되도록 길게 해 주세요.˝
하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못 말리겠군.˝
고슈는 쓴웃음을 지으며 첼로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다시 진지해져서 몸을 숙이고는 ˝뻐꾹뻐꾹뻐꾹.˝하고 아주아주 열심히 소리쳤습니다. 고슈는 처음에는 짜증스러웠지만, 한참 켜다 보니 어쩐지 새의 음이 진짜 도레미파 하고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뻐꾸기가 더 잘하는 것 같았습니다.
˝에이, 이런 멍청한 짓을 계속하다가는 내가 새가 되어 버리겠군.˝
하면서 고슈는 연주를 뚝 그쳤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듯 비틀거리더니, 다시 아까처럼 ˝뻐꾹뻐꾹뻑뻑뻑.˝하고 울음을 그쳤습니다. 그리고는 원망스러운 듯 고슈를 쳐다보며 따졌습니다.
˝왜 그만두는 거예요? 아무리 줏대없는 뻐꾸기라지만, 우리는 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소리친다구요.˝
˝뭐야, 건방지게! 이따위 바보 같은 짓을 언제까지 하란 말이냐? 이제 그만 나가. 봐, 날이 샜잖아.˝
하고 고슈는 창을 가리켰습니다.
동쪽 하늘이 아련한 은빛으로 물들고, 시꺼먼 구름이 북쪽으로 둥둥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해님이 떠오를 때까지만이라도요. 딱 한 번만. 잠깐이면 돼요.˝
뻐꾸기는 다시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시끄러워. 잘난 척하기는! 이 멍텅구리 새야, 썩 꺼지지 않으면 털을 뽑아서 아침밥으로 먹어 버리겠다.˝
고슈는 발을 쿵 굴렀습니다. 뻐꾸기는 깜짝 놀라 창으로 푸드득 날아갔지만 유리창에 머리를 꽝 부딪고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휴, 유리창에. 이 바보.˝
고슈는 얼른 일어나 창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이 창문은 아무 때고 쓱 열리는 창문이 아니었습니다. 고슈가 창틀을 붙잡고 덜컹덜컹 흔들어 대는 사이에, 뻐꾸기는 다시 한 번 날아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리창에 세차게 부딪혀 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보니까 부리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곧 열어 줄 테니까, 좀 기다려.˝
고슈가 겨우 6센티미터쯤 창문을 열었을 때, 뻐꾸기는 다시 일어나 이번에는 기어이 나가고야 말겠다는 듯이 창너머 동쪽 하늘을 지그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푸드득 날아올랐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심하게 유리창에 부딪쳤습니다. 뻐꾸기는 바닥에 떨어진 채 한동안 꼼짝도 못했습니다.
고슈는 뻐꾸기를 붙잡아 창으로 날려보내 주려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별안간 눈을 번쩍 뜨고 잽싸게 피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유리창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고슈는 엉겁결에 창문을 걷어찼습니다. 유리 두세 장이 와장창 깨지고, 창틀이 통째로 나가떨어졌습니다.
그 텅 빈 창 너머로 뻐꾸기는 화살처럼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끝없이 날아가 곧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고슈는 잠시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밖을 내다보다가, 그대로 쓰러지듯 방구석에 엎어져 곤히 잠들었습니다.
다음날에도 고슈는 밤늦도록 첼로를 켜다가 지쳐서 물을 한 컵 마셨습니다. 그 때 또다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오늘밤에는 누가 찾아오더라도 어젯밤의 뻐꾸기처럼 겁을 줘서 일찌감치 쫓아 보내야지, 마음먹고 컵을 든 채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빠끔 열리더니 아기 너구리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고슈는 문을 좀더 열어 두고 발을 쿵 구르며,
˝요 너구리 녀석! 너는 너구리 된장국이라는 걸 아느냐?˝
하고 소리쳤습니다. 아기 너구리는 멍한 얼굴로 바닥에 다소곳이 앉아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이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더니,
˝너구리 된장국, 나 몰라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고슈는 그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지만,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그럼 가르쳐 주마. 너구리 된장국이란 너 같은 너구리를 양배추와 소금을 넣어 푹푹 삶아서 내가 먹을 수 있게 만든 거다.˝
하고 말했습니다. 아기 너구리는 다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하지만 우리 아빠가요, 고슈 씨는 하나도 안 무서운 분이니까 가서 배우라고 했는걸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고슈도 마침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뭘 배우라고 했는데? 나는 바쁘단다. 그리고 졸려.˝
아기 너구리는 갑자기 기운이 나는 듯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나는 작은북을 맡고 있거든요. 아빠가 첼로 소리에 맞춰 보고 오랬어요.˝
˝작은북이 어디 있다고 그러니?˝
˝여기요.˝
아기 너구리는 등뒤에서 나무때기 두 개를 고슈 앞에 내밀었습니다.
˝그걸로 뭘 어쩌겠다고?˝
˝아저씨, ´유쾌한 마차꾼´을 연주해 주세요.˝
˝유쾌한 마차꾼? 그건 재즈냐?˝
˝예, 이게 악보예요.˝
아기 너구리는 다시 등뒤에서 악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고슈는 악보를 받아 쥐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흐음, 이상한 곡인걸. 좋아, 켜 주지. 너는 작은북을 치겠다고?˝
고슈는 아기 너구리가 어떻게 하나 싶어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면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기 너구리는 나무때기로 첼로의 아래 부분을 통통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첼로를 켜면서도 고슈는 이거 재미있구먼 하고 생각했답니다.
연주가 끝나자, 아기 너구리는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겨우 생각났다는 듯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두 번째 줄을 켤 때 이상하게 늦어요. 어쩐지 내가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들리거든요.˝
고슈는 깜짝 놀랐습니다. 확실히 그 줄은 어제부터 아무리 빨리 켜도 한 박자쯤 더디게 소리가 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 그럴지도 몰라. 이 첼로는 고물이거든.˝
하고 고슈는 우울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너구리는 안 됐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습니다.
˝어디가 안 좋은 걸까. 한 번 더 켜 주실래요?˝
˝좋아. 켜고말고.˝
고슈는 첼로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아기 너구리는 아까처럼 첼로의 아래 부분을 통통 두드리며 이따금 첼로에 귀를 바짝 갖다 댔습니다. 그리고 곡이 끝났을 무렵, 동쪽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 왔습니다.
˝아, 날이 밝았네. 정말 고마웠어요.˝
아기 너구리는 부리나케 악보와 나무때기를 등에 지고 테이프로 단단히 붙이고는, 절을 두어 번 하더니 휭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고슈는 얼이 빠져서 깨어진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쐬고 있다가, 마을 극장으로 가기 전에 기운을 차리려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밤에도 고슈는 밤새 첼로를 켜다가 새벽녘에 악기를 쥔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또다시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렸습니다.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한 소리였지만 고슈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들어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문틈으로 들어온 것은 들쥐였습니다. 들쥐는 아주 조그만 아기 쥐를 데리고 고슈 앞으로 쫄랑쫄랑 걸어왔습니다. 아기 들쥐는 겨우 지우개만했기 때문에 고슈는 무심결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들쥐는 무엇 때문에 웃나 싶어서 두리번거리며 고슈 앞에 서더니, 푸른 밤톨 하나를 놓고 꾸벅 절을 했습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몹시 아파요. 부디 자비를 베풀어 낫게 해 주십시오.˝
˝내가 무슨 의사인 줄 알아?˝
고슈는 불끈해서 퉁명스레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엄마 들쥐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있다가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건 거짓말이죠. 선생님은 날마다 모두의 병을 말끔히 고쳐 주셨잖아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선생님 덕분에 토끼 어머니의 병도 나았고, 너구리네 아버지 병도 나았고, 짓궂은 수리부엉이까지 나았어요. 그런데 우리 애 병은 고쳐 주시지 않겠다니, 너무 매정하시군요.˝
˝이봐, 이봐, 그건 오해야. 나는 수리부엉이의 병을 고쳐 준 적이 없어. 물론 아기 너구리는 어젯밤에 악사 시늉을 하긴 했지만. 하하하.˝
고슈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기 들쥐를 내려다보며 웃었습니다. 그러자 엄마 들쥐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 불쌍한 우리 아기! 병에 걸리려면 좀더 일찍 걸릴 것이지. 방금 전까지 그렇게 첼로를 지잉지잉 켜더니, 우리 애가 병에 걸리자마자 소리를 딱 멈추고 이렇게 부탁하는데도 안 된다니!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고슈는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뭐라고, 내가 첼로를 켜서 수리부엉이하고 토끼 병이 나았다고?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들쥐는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말했습니다.
˝네, 이 근처 사는 동물들은 병에 걸리면 다들 선생님네 마루 밑에 들어가 병을 치료한답니다.˝
˝그럼 낫는단 말이야?˝
˝네. 온몸의 피가 잘 통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금방 나은 경우도 있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 나은 경우도 있죠.˝
˝오호라, 그래? 내 첼로 소리가 웅웅 울리면 마치 안마를 해주듯이 너희들의 병을 고쳐 준단 말이지? 좋아, 알았어. 해 보지.˝
고슈는 줄을 끼이끼이 맞추고 나서, 아기 들쥐를 첼로 구멍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저도 함께 들어가겠어요. 병원에서는 다들 그렇게 하니까요.˝
엄마 들쥐는 부득부득 첼로에 매달렸습니다.
˝너도 들어가겠다고?˝
첼로 연주자는 엄마 들쥐를 첼로 구멍 속에 집어넣어 주려고 했지만, 얼굴이 반밖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얘야, 괜찮니? 엄마가 가르쳐 준 대로, 떨어질 때 발을 모아서 잘 떨어졌어?˝
˝네, 잘 떨어졌어요.˝
아기 들쥐는 첼로 안에서 모기처럼 가느다란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괜찮구먼. 그러니까 우는 소리 하지 마.˝
고슈는 엄마 들쥐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활을 들고 광시곡 같은 것을 지잉지잉 가앙가앙 연주했습니다. 엄마 들쥐가 자못 걱정스럽게 듣고 있다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이제 됐어요. 아이를 꺼내 주세요.˝
˝뭐야, 이걸로 끝이야?˝
고슈는 첼로를 앞으로 기울여 구멍 앞에 손을 대고 기다렸습니다. 곧 아기 들쥐가 나왔습니다. 고슈는 잠자코 들쥐를 내려 주었습니다.
˝어떠니? 기분은 좋아?˝
아기 들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꼭 감은 채 바들바들 떨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나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엄마 들쥐도 덩달아 뛰어다니다가, 고슈에게 연거푸 절을 하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열 번쯤 되뇌었습니다.
고슈는 왠지 들쥐가 사랑스러워져서,
˝얘, 너희들 빵은 먹니?˝
하고 물었습니다.
들쥐는 깜짝 놀라서 힐끔힐끔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습니다.
˝아니오. 저어, 빵이란 건 밀가루를 반죽하거나 얇게 펴서 만든 거죠? 부드럽게 부풀어 있어 맛있기는 하지만, 저희는 이 집 선반에는 얼씬거린 적도 없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고 어떻게 그것을 가져갈 수 있겠어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냐. 그냥 먹느냐고 물어 본 거야. 그럼 먹는 거지? 잠깐 기다려. 배 아픈 아이한테 줄 테니까.˝
고슈는 첼로를 바닥에 내려놓고, 선반에서 빵을 한 웅큼 뜯어 들쥐 앞에 놓았습니다.
그러자 들쥐는 꼭 바보처럼 울다가 웃다가 절을 하다가는, 빵 조각을 소중히 물고 아기를 앞장세워 밖으로 나갔습니다.
˝휴우, 들쥐와 이야기하는 것도 꽤 고단하군.˝
고슈는 침대에 풀썩 쓰러져 쿨쿨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엿새째 밤이 되었습니다. 샛별 음악단 사람들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저마다 악기를 들고 극장 무대 뒤에 있는 대기실로 줄줄이 퇴장했습니다. 제6교향곡 연주를 훌륭히 마친 것입니다. 청중석에서는 아직도 박수소리가 폭풍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지휘자는 박수 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연주자들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답니다. 연주자들은 담뱃불을 붙이거나 악기를 상자에 넣고 있었죠.
시간이 지날수록 박수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큼직한 하얀 리본을 가슴에 단 사회자가 대기실로 들어왔습니다.
˝앙코르를 해 달라는데, 짧은 곡이라도 좋으니 한 곡 들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지휘자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습니다.
˝안 됩니다. 이런 대연주 뒤에는 어떤 곡을 연주해도 우린 성에 차지 않습니다.˝
˝그럼 지휘자님께서 잠깐 나오셔서 인사라도 해 주십시오.˝
˝안 돼요. 이봐, 고슈. 자네가 나가서 한 곡 연주하게.˝
˝제가요?˝
고슈는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그래, 자네 말야. 고슈.˝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불쑥 고개를 쳐들고 말했습니다.
˝자아, 나가 보게.˝
지휘자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고슈한테 첼로를 떠안기면서 문을 열고 무대로 떠밀렸습니다. 고슈가 낡은 첼로를 안고 쭈뼛쭈뼛 무대로 나오자, 사람들은
´드디어 나왔다´
하고 한결 요란스레 박수를 쳤습니다. 와아 하고 고함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바보 만들어도 되는 거야? 좋아, 두고 보자. 인도의 호랑이 사냥을 켜 줄 테다.´
고슈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무대 한가운데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예전에 고양이가 찾아왔을 때처럼 성난 코끼리 같은 기세로 호랑이 사냥을 연주했습니다. 청중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고슈는 거침없이 첼로를 켰습니다. 고양이가 괴로워서 불꽃을 팍팍 튀기던 부분도 지났습니다. 문에 몸을 쿵쿵 부딪히던 부분도 지났습니다.
곡이 끝나자, 고슈는 청중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치 그 때의 고양이처럼 잽싸게 첼로를 안고 대기실로 물러났습니다. 그러자 대기실에서는 지휘자를 비롯한 모든 동료들이 불이라도 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죽인 채 앉아 있었습니다. 고슈는 ´에라 모르겠다´하는 마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성큼성큼 지나 맞은편 긴 의자에 앉아 다리를 척 꼬았습니다.
그 순간 모두들 고슈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딱히 비웃는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이상한 밤이야.´
하고 고슈는 생각했습니다. 그 때 지휘자가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고슈, 잘했어. 뭐, 그저 그런 곡인데도 모두들 아주 진지하게 듣고 있었네. 불과 며칠 사이에 아주 좋아졌어. 열흘 전에 비하면 꼭 젖먹이와 병사 같군.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 안 그런가, 고슈?˝
동료들도 너나없이 다가와
˝잘했어.˝
하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응, 이것도 다 몸이 건강한 덕분이야. 보통 사람이라면 죽었을 걸세.˝
그 날 밤 느지막이, 고슈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죠. 그러고 나서 창을 활짝 열고 언젠가 뻐꾸기가 날아갔던 먼 하늘을 바라보며,
˝아, 뻐꾸기야. 그 때는 미안했어. 나는 화를 낸 게 아니었단다.˝
하고 말했답니다. (*)
오후에 다들 연습실에 둘러앉아, 이번 마을 음악회에서 연주할 제6 교향곡을 연습하고 있었습니다.
트럼펫이 열심히 노래하고 있습니다.
바이올린은 두 줄기 바람처럼 울고 있고요.
클라리넷도 보-보 하고 거들어 줍니다.
고슈는 입을 꾹 다물고 눈을 접시만하게 뜨고는 열심히 악보를 들여다보며 첼로를 켜고 있었습니다.
느닷없이 지휘자가 손뼉을 짝 쳤습니다. 다들 연주를 멈추고 조용해졌습니다. 지휘자가 호통을 쳤습니다.
˝첼로가 늦었잖아. 띠리리, 띠리리, 여기서부터 다시, 자!˝
모두들 조금 앞으로 돌아가 다시 연주했습니다. 고슈는 얼굴이 벌개져서 땀을 뻘뻘 흘리며, 방금 지적당한 곳을 간신히 넘어갔습니다. 휴우 하고 안심하면서 다음 부분을 연주하고 있는데, 지휘자가 다시 손뼉을 짝 쳤습니다.
˝첼로, 줄이 안 맞잖아! 정말 미치겠군. 이봐, 내가 자네한테 도레미파까지 가르쳐 줘야겠나?˝
사람들은 멋쩍은 듯 괜히 자기 악보를 들여다보거나 악기를 만지작거렸습니다. 고슈는 허둥지둥 첼로 줄을 맞추었습니다. 사실은 고슈도 잘못했지만, 첼로가 워낙 고물이었던 것입니다.
˝앞 소절부터 다시. 자!˝
다시 연주가 시작되었습니다. 고슈도 입을 앙다물고 열심히 첼로를 켰습니다. 이번에는 꽤 오랫동안 연주가 이어졌습니다. 마음을 푹 놓고 있는데, 지휘자가 또다시 손뼉을 짝 쳤습니다. ´또야!´하고 고슈는 가슴이 철렁했지만, 다행히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고슈는 아까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괜히 악보를 들여다보며 뭔가 생각하는 척했습니다.
˝그럼, 바로 다음 부분부터. 자!˝
´자!´하고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별안간 지휘자가 발을 쿵쿵 구르며 호통쳤습니다.
˝안 돼! 도대체 엉망진창이야, 엉망진창! 이 부분은 곡의 심장이나 마찬가지야. 그런데 이렇게 거칠고 매끄럽지 못해서야 되겠나! 이봐, 연주회는 이제 열흘밖에 남지 않았어. 음악을 한다는 우리가 대장장이나 설탕 가게 일꾼들보다 못하다면, 도대체 우리 체면이 뭐가 되겠나? 그리고 고슈, 자넨 정말 문제야! 표정이 아예 없어. 분노고 기쁨이고 하나도 표현하지 못하잖아! 게다가 다른 악기와 호흡이 전혀 안 맞는단 말일세. 항상 자네 혼자 신발끈을 질질 끌며 뒤꽁무니를 따라오는 것 같다구. 그러면 곤란해. 제발 좀 잘해 줘. 우리 ´샛별 음악단´이 자네 하나 때문에 나쁜 평가를 받는다면, 다른 사람들한테 미안하지 않겠나? 자, 오늘 연습은 여기서 마치고, 이따가 여섯 시 정각에 극장 대기실로 오게.˝
연주자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고 담뱃불을 붙이거나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고슈는 허름한 상자 같은 첼로를 껴안고 벽 쪽으로 돌아앉아, 입을 비죽이며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하지만 곧 정신을 가다듬고 방금 전에 연습한 부분을 처음부터 조용히 다시 연주했습니다.
그 날 밤 느지막이, 고슈는 커다란 검은 짐을 둘러메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이라고 해 보았자, 마을 변두리 강가에 있는 무너진 물방앗간일 뿐입니다.
고슈는 이 물방앗간에 혼자 살면서, 아침나절에는 방앗간 주위의 작은 텃밭에서 토마토 가지를 자르거나 양배추 벌레를 잡다가 오후가 되면 극장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고슈는 집 안으로 들어가 불을 켜고 검을 짐을 풀었습니다. 낮에 지휘자에게 함께 야단맞던, 그 거칠고 무딘 첼로였습니다. 고슈는 첼로를 마룻바닥에 살며시 내려놓고는, 갑자기 선반에서 컵을 꺼내 양동이의 물을 벌컥벌컥 마셨습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한 번 흔들고 나서 의자에 앉아, 낮에 연습한 곡을 호랑이처럼 힘차게 켜기 시작했습니다. 악보를 넘기면서 켜다가는 곰곰이 생각하고 나서 다시 켜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지잉지잉 열심히 연주했습니다.
밤은 벌써 이슥해졌습니다. 이제 고슈는 자기가 첼로를 켜고 있는지조차 헷갈렸습니다. 얼굴은 새빨개지고 눈에는 핏발이 선 게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요.
그 때 누군가가 뒷문을 톡톡 두드렸습니다.
˝호슈냐?˝
고슈는 멍하니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지금까지 대여섯 번쯤 마주친 커다란 얼룩고양이였습니다.
얼룩고양이는 고슈의 밭에서 딴 설익은 토마토를 끙끙대며 들고 와 고슈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아이고, 힘들어라. 이거 나르는 것도 제법 힘드네.˝
˝뭐라고?˝
고슈가 묻자, 얼룩고양이가 말했습니다.
˝이거 선물이에요. 드세요.˝
그 순간 고슈는 낮부터 꾹꾹 눌러 왔던 울화통을 한꺼번에 터뜨렸습니다.
˝누가 너한테 토마토 가져 오랬어? 네까짓 녀석이 가져온 걸 내가 먹을 것 같아? 게다가 그 토마토는 우리 밭에서 난 거잖아. 뭐야, 아직 익지도 않은 것을 따다니! 지금까지 토마토 줄기를 갉아먹고 망쳐 놓은 녀석이 바로 너지? 썩 꺼져, 이놈의 고양이야!˝
그러자 고양이는 어깨를 둥글게 말아 구부리고는 실눈을 뜨고 싱글거리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렇게 화내시면 몸에 안 좋아요. 그보다 슈만의 트로이메라이를 연주해 주시면 어때요. 들어 드릴 테니까.˝
˝건방진 녀석! 감히 고양이 주제에.˝
철로 연주자는 화가 나서 이놈의 고양이를 어떻게 혼내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자요, 부담 갖지 마시고 어서요! 저는 선생님의 음악을 듣지 않으면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답니다.˝
˝저, 저, 저, 건방진 녀석 같으니!˝
고슈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지휘자처럼 발을 쿵쿵 구르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꾸었습니다.
˝좋아, 켜 주마.˝
고슈는 무슨 속셈인지 문을 잠그고 창문도 몽땅 닫고는 불까지 껐습니다. 그러자 음력 스무 날을 넘긴 달빛이 방안으로 고요히 흘러 들어왔습니다.
˝뭘 들려 달라고?˝
˝트로이메라이요. 낭만파 음악가 슈만이 작곡한.˝
고양이는 입가를 핥고는 짐짓 점잖게 말했습니다.
˝그래, 토로이메라이가 이런 거냐?˝
첼로 연주자는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손수건을 쭉 찢어서 자기 귀를 틀어막았습니다. 그리고는 폭풍 같은 기세로 ´인도의 호랑이 사냥´이라는 곡을 켜기 시작했습니다.
고양이는 고개를 갸웃하고 한동안 귀를 기울이다가, 갑자기 눈을 깜박거리더니 문 쪽으로 홱 물러섰습니다. 그리고는 느닷없이 쿵! 하고 문으로 몸을 날렸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는 ´아뿔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구나.´ 하는 듯이 허둥대며 눈과 이마에서 불꽃을 파박파박 내뿜었습니다. 수염과 코에서도 불꽃이 번쩍 번쩍 튀었습니다. 고양이는 금방이라도 재채기를 할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도저히 못 견디겠는지 종종걸음치기 시작했습니다. 고슈는 아주 재미가 붙어서 점점 신나게 첼로를 켰습니다.
˝선생님, 이제 됐어요! 됐다구요. 제발 부탁이니, 그만 하세요! 앞으로 다시는 선생님 음악에 참견하지 않을게요.˝
˝조용히 해! 지금부터 호랑이를 붙잡는 부분이야.˝
고양이는 고통에 못 이겨 펄쩍펄쩍 뛰어다니다가는 벽에 찰싹 붙기도 했습니다. 벽에서 몸을 떼면 한동안 그 자리가 파랗게 빛이 났습니다. 마침내 고양이는 고슈의 주위를 풍차처럼 빙글빙글 돌았습니다.
고슈도 어지러워져서
˝이제 그만 용서해 주마.˝
하고 겨우 연주를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고양이도 멀쩡한 얼굴로,
˝선생님, 오늘 밤 연주는 좀 이상했어요.˝
하고 대꾸했습니다.
철로 연주자는 다시 울화통이 치밀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잎담배를 꺼내 물고는, 성냥 하나를 들고 물었습니다.
˝어떠냐? 몸은 괜찮아? 혀를 내밀어 봐.˝
고양이는 고슈를 놀리듯 길고 뾰족한 혀를 쏘옥 내밀었습니다.
˝하아, 좀 까칠까칠해졌구나.˝
첼로 연주자는 그렇게 말하면서, 갑자기 고양이 혀에다 성냥을 치익 그어 담뱃불을 붙였습니다. 고양이는 까무러치게 놀라 혀를 풍차처럼 홱홱 돌리며, 문으로 가서 머리를 쿵 박고 비틀비틀 돌아왔다가 또다시 쿵 박고, 비틀비틀 돌아왔다가 또다시 쿵 박고, 비틀비틀 길을 찾으려고 애썼습니다.
고슈는 한참 재미있게 구경하다가,
˝이제 내보내 주마. 다시는 오지 마, 이 멍청한 녀석아.˝
첼로 연주자는 문을 열어 주고, 억새풀 사이를 바람처럼 달려가는 고양이를 바라보면서 싱긋 웃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겨우 마음이 가벼워진 듯 곤히 잠들었습니다.
이튿날 밤에도 고슈는 검은 첼로 꾸러미를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신 다음, 지난밤처럼 부지런히 첼로를 켜기 시작했죠. 어느새 열두 시가 지나고, 한 시도 지나고, 두 시도 지났지만, 고슈는 여전히 첼로를 켜고 있었습니다. 이제는 몇 시인지도 알 수 없고 첼로를 켜고 있는지 어떤지도 가물가물할 즈음, 누군가가 천장을 똑똑 두드렸습니다.
˝고양이 너구나. 아직도 혼이 덜 났니?˝
고슈가 소리치자, 갑자기 천장 구멍에서 호도독 소리가 나더니 잿빛 새 한 마리가 내려왔습니다. 마루에 앉은 것을 보니 뻐꾸기였습니다.
˝뭐야, 이젠 새까지 찾아오는군. 무슨 일이지?˝
고슈가 묻자, 뻐꾸기는 새침하게 대답했습니다.
˝음악을 배우고 싶어요.˝
고슈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음악이라고? 네 노래는 기껏해야 뻐꾹, 뻐꾹뿐이잖아.˝
그러자 뻐꾸기는 아주 진지하게
˝네, 그래요. 하지만 그게 어려운 거라구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어렵기는 뭐가 어렵다는 거야. 너희들은 귀가 따갑도록 울어대잖아.˝
˝그런데 그게 아렵다구요. 예를 들어 뻐꾹 하고 우는 것과 빠꾹 하고 우는 건 듣기에도 많이 다르잖아요?˝
˝다르긴 뭐가 달라.˝
˝그럼, 당신이 모르는 거예요. 우리 뻐꾸기는 뻐꾹 하고 만 번을 울어도 그 만 번이 저마다 다른걸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렇게 잘 알면 나한테 올 것도 없잖아?˝
˝하지만 저는 도레미파를 정확하게 노래하고 싶어요.˝
˝쳇, 도레미파 좋아하네.˝
˝음, 외국에 나가기 전에 꼭 배워야 해요.˝
˝외국은 무슨 외국!˝
˝선생님, 제발 도레미파를 가르쳐 주세요. 선생님 하시는 대로 따라서 노래할게요.˝
˝에이, 귀찮아. 그럼 딱 세 번만 켜 줄 테니까, 얼른 돌아가야 한다.˝
고슈는 첼로를 집어들고 끼잉끼잉 줄을 맞추고 나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켰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허겁지겁 날개를 파닥였습니다.
˝틀렸어요, 틀렸어! 그게 아니에요.˝
˝까다롭기는. 그럼 네가 해 봐.˝
˝이거예요.˝
뻐꾸기는 몸을 앞으로 수그리고 잠시 자세를 잡더니, ˝뻐꾹.˝하고 울었습니다.
˝뭐야, 그게 도레미파야? 그렇다면 너희들한테는 도레미파나 제6교향곡이나 다 똑같겠군.˝
˝그건 달라요.˝
˝어떻게 다른데?˝
˝어려운 것은, 이걸 많이많이 계속하는 거예요.˝
˝바로 이런 거지?˝
첼로 연주자는 다시 첼로를 쥐고, 뻐꾹뻐꾹뻐꾹뻐꾹 하고 켰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아주 기뻐하며, 뻐꾹뻐꾹뻐꾹 하고 끼여들었습니다. 몸을 잔뜩 수그리고 끝도 없이 소리쳤죠.
고슈는 마침내 손이 아파서,
˝이봐, 이제 그만 하자구.˝
하면서 손을 멈추었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서운한 듯 눈을 치뜨고는 뻐꾹뻐꾹 하고 소리 높여 울다가 가까스로
˝…… 뻐꾹뻐꾹뻑뻑뻑.˝
하고 그쳤습니다.
고슈는 화가 치밀어서 ˝이봐, 뻐꾸기. 이제 볼일 끝났으면 냉큼 돌아가!˝하고 쏘아붙였습니다.
˝제발 한 번만 더 켜 주세요. 당신 솜씨는 좋긴 하지만, 어딘가 틀린 것 같거든요.˝
˝뭐야, 네가 날 가르치겠다는 거야? 썩 꺼지지 못해!˝
˝제발 딱 한 번만 더 켜 주세요.˝
뻐꾸기는 고개를 까딱까딱 조아렸습니다.
˝그럼 이번이 마지막이다.˝
고슈는 활을 쥐었습니다. 뻐꾸기는 ˝꾹.˝하고 숨을 쉬고는,
˝그럼 되도록 길게 해 주세요.˝
하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못 말리겠군.˝
고슈는 쓴웃음을 지으며 첼로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다시 진지해져서 몸을 숙이고는 ˝뻐꾹뻐꾹뻐꾹.˝하고 아주아주 열심히 소리쳤습니다. 고슈는 처음에는 짜증스러웠지만, 한참 켜다 보니 어쩐지 새의 음이 진짜 도레미파 하고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뻐꾸기가 더 잘하는 것 같았습니다.
˝에이, 이런 멍청한 짓을 계속하다가는 내가 새가 되어 버리겠군.˝
하면서 고슈는 연주를 뚝 그쳤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은 듯 비틀거리더니, 다시 아까처럼 ˝뻐꾹뻐꾹뻑뻑뻑.˝하고 울음을 그쳤습니다. 그리고는 원망스러운 듯 고슈를 쳐다보며 따졌습니다.
˝왜 그만두는 거예요? 아무리 줏대없는 뻐꾸기라지만, 우리는 목에서 피가 나올 때까지 소리친다구요.˝
˝뭐야, 건방지게! 이따위 바보 같은 짓을 언제까지 하란 말이냐? 이제 그만 나가. 봐, 날이 샜잖아.˝
하고 고슈는 창을 가리켰습니다.
동쪽 하늘이 아련한 은빛으로 물들고, 시꺼먼 구름이 북쪽으로 둥둥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해님이 떠오를 때까지만이라도요. 딱 한 번만. 잠깐이면 돼요.˝
뻐꾸기는 다시 고개를 조아렸습니다.
˝시끄러워. 잘난 척하기는! 이 멍텅구리 새야, 썩 꺼지지 않으면 털을 뽑아서 아침밥으로 먹어 버리겠다.˝
고슈는 발을 쿵 굴렀습니다. 뻐꾸기는 깜짝 놀라 창으로 푸드득 날아갔지만 유리창에 머리를 꽝 부딪고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어휴, 유리창에. 이 바보.˝
고슈는 얼른 일어나 창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원래 이 창문은 아무 때고 쓱 열리는 창문이 아니었습니다. 고슈가 창틀을 붙잡고 덜컹덜컹 흔들어 대는 사이에, 뻐꾸기는 다시 한 번 날아올랐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리창에 세차게 부딪혀 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보니까 부리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곧 열어 줄 테니까, 좀 기다려.˝
고슈가 겨우 6센티미터쯤 창문을 열었을 때, 뻐꾸기는 다시 일어나 이번에는 기어이 나가고야 말겠다는 듯이 창너머 동쪽 하늘을 지그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는 있는 힘을 다해 푸드득 날아올랐습니다. 물론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훨씬 심하게 유리창에 부딪쳤습니다. 뻐꾸기는 바닥에 떨어진 채 한동안 꼼짝도 못했습니다.
고슈는 뻐꾸기를 붙잡아 창으로 날려보내 주려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뻐꾸기는 별안간 눈을 번쩍 뜨고 잽싸게 피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유리창으로 달려들었습니다. 고슈는 엉겁결에 창문을 걷어찼습니다. 유리 두세 장이 와장창 깨지고, 창틀이 통째로 나가떨어졌습니다.
그 텅 빈 창 너머로 뻐꾸기는 화살처럼 날아갔습니다. 그리고 끝없이, 끝없이 날아가 곧 모습을 감추었습니다. 고슈는 잠시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밖을 내다보다가, 그대로 쓰러지듯 방구석에 엎어져 곤히 잠들었습니다.
다음날에도 고슈는 밤늦도록 첼로를 켜다가 지쳐서 물을 한 컵 마셨습니다. 그 때 또다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오늘밤에는 누가 찾아오더라도 어젯밤의 뻐꾸기처럼 겁을 줘서 일찌감치 쫓아 보내야지, 마음먹고 컵을 든 채 기다리고 있는데 문이 빠끔 열리더니 아기 너구리 한 마리가 들어왔습니다. 고슈는 문을 좀더 열어 두고 발을 쿵 구르며,
˝요 너구리 녀석! 너는 너구리 된장국이라는 걸 아느냐?˝
하고 소리쳤습니다. 아기 너구리는 멍한 얼굴로 바닥에 다소곳이 앉아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이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하더니,
˝너구리 된장국, 나 몰라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고슈는 그 얼굴을 보고 저도 모르게 픽 웃음이 나왔지만,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그럼 가르쳐 주마. 너구리 된장국이란 너 같은 너구리를 양배추와 소금을 넣어 푹푹 삶아서 내가 먹을 수 있게 만든 거다.˝
하고 말했습니다. 아기 너구리는 다시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하지만 우리 아빠가요, 고슈 씨는 하나도 안 무서운 분이니까 가서 배우라고 했는걸요.˝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고슈도 마침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뭘 배우라고 했는데? 나는 바쁘단다. 그리고 졸려.˝
아기 너구리는 갑자기 기운이 나는 듯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습니다.
˝나는 작은북을 맡고 있거든요. 아빠가 첼로 소리에 맞춰 보고 오랬어요.˝
˝작은북이 어디 있다고 그러니?˝
˝여기요.˝
아기 너구리는 등뒤에서 나무때기 두 개를 고슈 앞에 내밀었습니다.
˝그걸로 뭘 어쩌겠다고?˝
˝아저씨, ´유쾌한 마차꾼´을 연주해 주세요.˝
˝유쾌한 마차꾼? 그건 재즈냐?˝
˝예, 이게 악보예요.˝
아기 너구리는 다시 등뒤에서 악보 한 장을 내밀었습니다. 고슈는 악보를 받아 쥐고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흐음, 이상한 곡인걸. 좋아, 켜 주지. 너는 작은북을 치겠다고?˝
고슈는 아기 너구리가 어떻게 하나 싶어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면서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기 너구리는 나무때기로 첼로의 아래 부분을 통통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첼로를 켜면서도 고슈는 이거 재미있구먼 하고 생각했답니다.
연주가 끝나자, 아기 너구리는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생각했습니다.
그리고는 겨우 생각났다는 듯 말했습니다.
˝아저씨는 두 번째 줄을 켤 때 이상하게 늦어요. 어쩐지 내가 걸려 넘어지는 것처럼 들리거든요.˝
고슈는 깜짝 놀랐습니다. 확실히 그 줄은 어제부터 아무리 빨리 켜도 한 박자쯤 더디게 소리가 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 그럴지도 몰라. 이 첼로는 고물이거든.˝
하고 고슈는 우울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너구리는 안 됐다는 표정으로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습니다.
˝어디가 안 좋은 걸까. 한 번 더 켜 주실래요?˝
˝좋아. 켜고말고.˝
고슈는 첼로를 켜기 시작했습니다. 아기 너구리는 아까처럼 첼로의 아래 부분을 통통 두드리며 이따금 첼로에 귀를 바짝 갖다 댔습니다. 그리고 곡이 끝났을 무렵, 동쪽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 왔습니다.
˝아, 날이 밝았네. 정말 고마웠어요.˝
아기 너구리는 부리나케 악보와 나무때기를 등에 지고 테이프로 단단히 붙이고는, 절을 두어 번 하더니 휭하니 밖으로 나가 버렸습니다.
고슈는 얼이 빠져서 깨어진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쐬고 있다가, 마을 극장으로 가기 전에 기운을 차리려고 서둘러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다음날 밤에도 고슈는 밤새 첼로를 켜다가 새벽녘에 악기를 쥔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또다시 누군가가 문을 똑똑 두드렸습니다.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한 소리였지만 고슈는 금세 정신을 차리고
˝들어와요.˝
하고 대답했습니다.
문틈으로 들어온 것은 들쥐였습니다. 들쥐는 아주 조그만 아기 쥐를 데리고 고슈 앞으로 쫄랑쫄랑 걸어왔습니다. 아기 들쥐는 겨우 지우개만했기 때문에 고슈는 무심결에 웃음이 나왔습니다. 들쥐는 무엇 때문에 웃나 싶어서 두리번거리며 고슈 앞에 서더니, 푸른 밤톨 하나를 놓고 꾸벅 절을 했습니다.
˝선생님, 우리 아이가 몹시 아파요. 부디 자비를 베풀어 낫게 해 주십시오.˝
˝내가 무슨 의사인 줄 알아?˝
고슈는 불끈해서 퉁명스레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엄마 들쥐는 고개를 숙이고 묵묵히 있다가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선생님, 그건 거짓말이죠. 선생님은 날마다 모두의 병을 말끔히 고쳐 주셨잖아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군.˝
˝선생님 덕분에 토끼 어머니의 병도 나았고, 너구리네 아버지 병도 나았고, 짓궂은 수리부엉이까지 나았어요. 그런데 우리 애 병은 고쳐 주시지 않겠다니, 너무 매정하시군요.˝
˝이봐, 이봐, 그건 오해야. 나는 수리부엉이의 병을 고쳐 준 적이 없어. 물론 아기 너구리는 어젯밤에 악사 시늉을 하긴 했지만. 하하하.˝
고슈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아기 들쥐를 내려다보며 웃었습니다. 그러자 엄마 들쥐가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 불쌍한 우리 아기! 병에 걸리려면 좀더 일찍 걸릴 것이지. 방금 전까지 그렇게 첼로를 지잉지잉 켜더니, 우리 애가 병에 걸리자마자 소리를 딱 멈추고 이렇게 부탁하는데도 안 된다니! 아이고, 불쌍한 내 새끼.˝
고슈는 깜짝 놀라 소리쳤습니다.
˝뭐라고, 내가 첼로를 켜서 수리부엉이하고 토끼 병이 나았다고?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야?˝
들쥐는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말했습니다.
˝네, 이 근처 사는 동물들은 병에 걸리면 다들 선생님네 마루 밑에 들어가 병을 치료한답니다.˝
˝그럼 낫는단 말이야?˝
˝네. 온몸의 피가 잘 통하고 기분이 좋아져서 금방 나은 경우도 있고, 집으로 돌아간 뒤에 나은 경우도 있죠.˝
˝오호라, 그래? 내 첼로 소리가 웅웅 울리면 마치 안마를 해주듯이 너희들의 병을 고쳐 준단 말이지? 좋아, 알았어. 해 보지.˝
고슈는 줄을 끼이끼이 맞추고 나서, 아기 들쥐를 첼로 구멍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저도 함께 들어가겠어요. 병원에서는 다들 그렇게 하니까요.˝
엄마 들쥐는 부득부득 첼로에 매달렸습니다.
˝너도 들어가겠다고?˝
첼로 연주자는 엄마 들쥐를 첼로 구멍 속에 집어넣어 주려고 했지만, 얼굴이 반밖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얘야, 괜찮니? 엄마가 가르쳐 준 대로, 떨어질 때 발을 모아서 잘 떨어졌어?˝
˝네, 잘 떨어졌어요.˝
아기 들쥐는 첼로 안에서 모기처럼 가느다란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괜찮구먼. 그러니까 우는 소리 하지 마.˝
고슈는 엄마 들쥐를 바닥에 내려놓고는, 활을 들고 광시곡 같은 것을 지잉지잉 가앙가앙 연주했습니다. 엄마 들쥐가 자못 걱정스럽게 듣고 있다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이제 됐어요. 아이를 꺼내 주세요.˝
˝뭐야, 이걸로 끝이야?˝
고슈는 첼로를 앞으로 기울여 구멍 앞에 손을 대고 기다렸습니다. 곧 아기 들쥐가 나왔습니다. 고슈는 잠자코 들쥐를 내려 주었습니다.
˝어떠니? 기분은 좋아?˝
아기 들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눈을 꼭 감은 채 바들바들 떨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아아, 나았다!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엄마 들쥐도 덩달아 뛰어다니다가, 고슈에게 연거푸 절을 하면서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열 번쯤 되뇌었습니다.
고슈는 왠지 들쥐가 사랑스러워져서,
˝얘, 너희들 빵은 먹니?˝
하고 물었습니다.
들쥐는 깜짝 놀라서 힐끔힐끔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습니다.
˝아니오. 저어, 빵이란 건 밀가루를 반죽하거나 얇게 펴서 만든 거죠? 부드럽게 부풀어 있어 맛있기는 하지만, 저희는 이 집 선반에는 얼씬거린 적도 없고, 또 이렇게 신세를 지고 어떻게 그것을 가져갈 수 있겠어요?˝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냐. 그냥 먹느냐고 물어 본 거야. 그럼 먹는 거지? 잠깐 기다려. 배 아픈 아이한테 줄 테니까.˝
고슈는 첼로를 바닥에 내려놓고, 선반에서 빵을 한 웅큼 뜯어 들쥐 앞에 놓았습니다.
그러자 들쥐는 꼭 바보처럼 울다가 웃다가 절을 하다가는, 빵 조각을 소중히 물고 아기를 앞장세워 밖으로 나갔습니다.
˝휴우, 들쥐와 이야기하는 것도 꽤 고단하군.˝
고슈는 침대에 풀썩 쓰러져 쿨쿨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는 엿새째 밤이 되었습니다. 샛별 음악단 사람들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저마다 악기를 들고 극장 무대 뒤에 있는 대기실로 줄줄이 퇴장했습니다. 제6교향곡 연주를 훌륭히 마친 것입니다. 청중석에서는 아직도 박수소리가 폭풍처럼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지휘자는 박수 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연주자들 사이를 어슬렁어슬렁 걸어다니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기쁨으로 가득했답니다. 연주자들은 담뱃불을 붙이거나 악기를 상자에 넣고 있었죠.
시간이 지날수록 박수소리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습니다. 큼직한 하얀 리본을 가슴에 단 사회자가 대기실로 들어왔습니다.
˝앙코르를 해 달라는데, 짧은 곡이라도 좋으니 한 곡 들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그러자 지휘자가 정색을 하고 대답했습니다.
˝안 됩니다. 이런 대연주 뒤에는 어떤 곡을 연주해도 우린 성에 차지 않습니다.˝
˝그럼 지휘자님께서 잠깐 나오셔서 인사라도 해 주십시오.˝
˝안 돼요. 이봐, 고슈. 자네가 나가서 한 곡 연주하게.˝
˝제가요?˝
고슈는 어안이 벙벙해졌습니다.
˝그래, 자네 말야. 고슈.˝
제1바이올린 연주자가 불쑥 고개를 쳐들고 말했습니다.
˝자아, 나가 보게.˝
지휘자가 말했습니다. 그러자 모두들 고슈한테 첼로를 떠안기면서 문을 열고 무대로 떠밀렸습니다. 고슈가 낡은 첼로를 안고 쭈뼛쭈뼛 무대로 나오자, 사람들은
´드디어 나왔다´
하고 한결 요란스레 박수를 쳤습니다. 와아 하고 고함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사람을 이렇게 바보 만들어도 되는 거야? 좋아, 두고 보자. 인도의 호랑이 사냥을 켜 줄 테다.´
고슈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무대 한가운데에 섰습니다.
그리고는 예전에 고양이가 찾아왔을 때처럼 성난 코끼리 같은 기세로 호랑이 사냥을 연주했습니다. 청중은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고슈는 거침없이 첼로를 켰습니다. 고양이가 괴로워서 불꽃을 팍팍 튀기던 부분도 지났습니다. 문에 몸을 쿵쿵 부딪히던 부분도 지났습니다.
곡이 끝나자, 고슈는 청중석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마치 그 때의 고양이처럼 잽싸게 첼로를 안고 대기실로 물러났습니다. 그러자 대기실에서는 지휘자를 비롯한 모든 동료들이 불이라도 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죽인 채 앉아 있었습니다. 고슈는 ´에라 모르겠다´하는 마음으로 사람들 사이를 성큼성큼 지나 맞은편 긴 의자에 앉아 다리를 척 꼬았습니다.
그 순간 모두들 고슈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딱히 비웃는 기색은 엿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이상한 밤이야.´
하고 고슈는 생각했습니다. 그 때 지휘자가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고슈, 잘했어. 뭐, 그저 그런 곡인데도 모두들 아주 진지하게 듣고 있었네. 불과 며칠 사이에 아주 좋아졌어. 열흘 전에 비하면 꼭 젖먹이와 병사 같군.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할 수 있어. 안 그런가, 고슈?˝
동료들도 너나없이 다가와
˝잘했어.˝
하고 칭찬해 주었습니다.
˝응, 이것도 다 몸이 건강한 덕분이야. 보통 사람이라면 죽었을 걸세.˝
그 날 밤 느지막이, 고슈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물을 벌컥벌컥 마셨죠. 그러고 나서 창을 활짝 열고 언젠가 뻐꾸기가 날아갔던 먼 하늘을 바라보며,
˝아, 뻐꾸기야. 그 때는 미안했어. 나는 화를 낸 게 아니었단다.˝
하고 말했답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