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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눈길을 걷는 소년

창작동화 김문기............... 조회 수 1203 추천 수 0 2005.04.19 14:52:28
.........
눈보라 휘몰아치는 가난한 산동네 언덕길을 한 소년이 올라가고 있습니다.
가을 잠바를 두 개 껴입은 소년은 맨 손을 호호 불며, 틈틈히 발을 구르며 걷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추위만 타는 게 아니었습니다.
무심히 오가는 사람들은 소년의 오른쪽 가슴에 따뜻한 불씨가 숨겨져 있는 줄 미처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소년은 인제 막 신문 배달을 끝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언덕길을 조심조심 밟았습니다.
그런데 소년은 늘 한 손으로 오른쪽 가슴을 웅켜쥐고 있었는데, 속주머니에 든 저금통장을 잡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거센 눈보라가 얼굴을 때려도 소년의 입가에선 쉽게 녹아 내렸고 소년의 오른쪽 가슴이 참으로 훈훈했습니다.
소년은 이윽고 판자로 얼기설기 지어진 문간방 앞에 도착했습니다.
˝민숙아!˝
소년이 부르자 창호지 문이 열리며 민숙이가 해쓱한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어머, 눈사람이 찾아왔네. 오빠, 춥지? 어서 들어 와.˝
민숙이는 얼른 빗자루를 들고 소년의 머리와 옷에 묻어있는 눈을 털어 냈습니다.
소년이 운동화를 벗자 그것을 얼른 연탄불 옆에 세워 놓았습니다.
그리고 렌지의 불을 켜고 찌개를 올려 놓았습니다.
소년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으며 방안으로 들어섰습니다.
˝형! 오늘이 월급날이지?˝
이불을 덥고 있던 막내 민일이가 톡 튀어나오는 말을 했습니다.
소년은 민일이의 엉덩이를 툭 치며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였습니다.
˝녀석! 내 월급날을 계속 기억하고 있네.˝
˝오늘만 기다렸는 걸.˝
소년은 민일이에게서 뒤돌아 선 채 오른쪽 가슴을 만져 보았습니다.
저금통장의 두툼함을 다시금 확인한 소년은 이윽고 주머니에 들어있던 껌 두 통을 꺼냈습니다.
˝자, 받아. 월급날 기념이야.˝
민숙이는 아무 말 없이 껌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민일이가 문제였습니다.
˝애개개. 겨우 껌이야. 맛있는 거 없어?˝
철부지 민일이는 혀를 내밀며 울쌍을 짓는 것입니다.
˝받아. 이 녀석아!˝
˝그 동안 김치하고 콩나물하고만 밥 먹었는데, 오늘은 맛있는 거 사 줘야지.˝
소년은 사실, 눈치 빠르게 어른처럼 되어버린 민숙이보다 매사에 철없이 굴기만 하는 민일이가 더 좋아 보였습니다.
부모도 없이 살고 있기에,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살기에, 민일이의 그 철없는 태도는 여덟 살 나이로 보아 무척이나 다행스러운 일이었고 가난한 단칸방에 그나마 생기를 불러일으키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소년은 눈물을 찔끔 흘린 후 저금통장을 꺼내 민일이 눈앞에 내밀었습니다.
˝봐라.˝
˝어, 만 원짜리가……. 이게 몇 개야? 아홉이고……. 통장에 찍힌 것이 구십만 원이면……. 모두 구십구 만원?˝
인제 2학년 짜리 민일이지만 돈 계산이 빨랐습니다.
민숙이도 놀란 눈으로 달려들어 만원권 지폐와 저금통장 액수를 살폈습니다.
˝오빠, 오늘은 민일이에게 과자라도 사 주자.˝
민숙이가 올려다 보며 말했으나 소년은 지폐와 저금통장을 얼른 뺏아
다시 속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고개를 가로 저었습니다.
˝안돼.˝
˝왜?˝
˝난 백만 원을 꼭 모으기로 결심했다고 말했잖아.
백만 원을 모은다는 것은 우리들의 한 가지 소망을 이루는 것이니까.
그 때까지는……. 너희들이 아무리 떼를 써도 쓸 수 없는 돈이야.˝
소년은 동생들에게 미안한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냉정하게도 얼굴을 돌려 버렸습니다. 그리고 방문을 열었습니다.
민일이가 얼른 일어나 소년의 옷을 붙잡았습니다.
˝형, 어디 가? 과자 사러 가는 거야?˝
˝아니. 나 혼자 좀 다녀올 데가 있어서 말야.˝
˝어딘데?˝
소년은 그러나 그 말에는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연탄불에 잠시 손을 녹이고는 채 마르지도 않은 운동화를 다시 신고 끈을 동여맸습니다. 문 밖으로 나갔습 니다.
밤이 되었건만 눈보라가 하얗게 휘날리고 있었기에 사방이 대낮처럼
트여 보였습니다.
˝민숙아, 민일이하고 그냥 잠자고 있어.˝
˝찌게 끓고 있는데…….˝
소년은 그러나 찌개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민숙이의 등을 다독여 주고는 언덕길을 천천히 내려갔습니다.
˝오빠, 가지 마!˝
민숙이가 뒤에서 소리치다시피 했습니다.
소년은 그 말을 듣고 뒤돌아 서서 민숙이를 지그시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안되겠다 싶어 민숙이에게 다가갔습니다.
˝내가 어디 가는 줄 알고 가지 말라 하는 거니?˝
˝이 밤중에 대체 어딜 가려는 거야? 괜히 이상해.˝
˝뭐가?˝
˝그냥. 별 이유도 없이. 오빠가…….˝
민숙이는 오늘따라 불길한 예감이 드는 모양이었습니다.
눈보라치는 밤중에, 집에 들어오자마자, 밥도 먹지 않고, 어딘가로 가는 오빠의 행동이야말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고 그래서 가지 말라고 소리쳤던 것입니다.
민숙이의 눈이 붉게 젖었습니다.
소년은 다시 민숙이의 등을 다독여 주었습니다.
˝걱정마. 별 일 아니지만…….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곳이 있어서 그래.˝
소년은 민숙이의 다음 말을 기다리질 않고 다시 언덕길을 내려갔습니다.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몸이 오들오들 떨렸습니다. 눈보라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지만, 소년은 힘있게 걸었습니다.
이윽고 변두리 마을을 빠져 나와 얼어붙은 시냇물을 건넜습니다.
˝꼭 가 봐야겠어. 내가 어찌 내일을 기다려.˝
소년은 혼자말을 내며 곧장 주차장 쪽으로 갔습니다.
잠시 서서 버스가 오길 기다리던 소년은 그러나 마음을 바꾸어 시내 쪽으로 걸었습니다.
소년에겐 차비 200원이 너무 아까운 돈이었습니다.
신문 배달 봉급을 9만원 받고 동생들에게 껌 두 통만을 내밀 정도로 소년의 결심은 대단한 것입니다.
이를 악물고 돈을 아껴야 했기에 추운 겨울 밤길을 힘겹게나마 걸어야 했습니다.
한 밤중이 되서야 소년은 시내에 도착했습니다. 발이 얼어붙는 듯했고 손이 펴 지질 않았으나 소년은 굳세게 걷기만 했습니다.
소년은 시내에서도 한참 떨어진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눈보라를 너무 많이 맞았기 때문에 소년은 마치 눈사람처럼 변해 있었습니다.
이윽고 소년은 건널목을 하나 건넜고 빨간 벽돌로 된 이층 양옥집을 유심히 바라 보았습니다. 넓은 정원이 있는 집이었습니다.
´바로 저 집일 거야.´
소년은 그 집 담벼락에 기대어 안을 살폈습니다.
방안의 불빛이 따스하게 새어 나오고 있었지만 참으로 오래도록 인기척이 없었습니다.
기다림에 지친 소년은 싸늘한 담벼락에 기대어 ´정말 이 집이 맞나?´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시내에 살고 있는 한 아저씨가 손짓으로 가르쳐 주며,
˝바로 저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거든. 분명해.˝
하고 말해준 그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집안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소년은 집안을 유심히 살펴 보았습니다.
한 아주머니가 방을 나와 은행나무쪽으로 가는게 보였습니다.
소년은 기회다 싶어, 눈뭉치를 만들어 마당으로 휙 던졌습니다.
또 하나를 던졌습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이윽고 대문쪽으로 걸어오는 것입니다.
˝대문 밖에……. 누구세요?˝
아주머니의 그 목소리를 소년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고 영영 잊혀지지 않을까 가슴 졸이던 바로 그 목소리였습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러 오밤중 눈길을 굳세게 걸어온 소년이었습니다.
소년은 얼른 대문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손으로 제 가슴을 지긋이 누르고는 용기를 내어 말했습니다.
˝엄마!˝
소년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였습니다.
하얗게 쏟아져 내리는 눈을 한꺼번에 녹여버릴 듯 뜨거운 울음을 ´엄마!´하고 토해냈습니다.
대문 쪽으로 나오던 아주머니는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자꾸 멈칫거리며 소년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습니다.
˝엄마, 민우가 왔어요.˝
소년이 또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주머니는 무엇엔가 얻어맞은 듯 우뚝서 버렸고 멍한 시선을 주었습니다.
이윽고 아주머니는 소년에게 다가왔습니다.
˝네가 어찌……. 민우가 어떻게 여길……. 이 에미가 그 동안 죽을 죄를 지었는데…….˝
아주머니 아니, 소년의 엄마는 쓰러질 듯 대문 기둥에 몸을 기대고는 두손으로 얼굴을 와락 가렸습니다.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고 있었고 큰 죄로 인해 스스 로 몸부림치는 듯 했습니다.
소년은 엄마에게 다가가 와락 껴안았습니다. 그리고 소년도 엄마도 울음을 터 뜨렸습니다.
˝엄마! 엄마! 얼마나 보고 싶었다구요.˝
˝그래 민우야. 이 에미를 실컷 욕해 다오.˝
소년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들어 엄마의 얼굴을 살펴 보았습니다.
너무나 그리운 엄마였고 너무나 야속한 엄마이기도 했습니다.
˝엄마, 그냥 찾아온 거예요.˝
˝여우 낯짝도 유분수지, 내가 어찌 네 얼굴을 마주 하겠니…….˝
˝그냥 이렇게 만나면 되잖아요. 저는 더 이상 엄마를 원망하지 않기로 했어요.˝
˝그래 고맙구나. …….민일이는 잘 크고?˝
˝예. 제가 잘 키우고 있어요.˝
˝민숙이는 학교에 다니고?˝
˝예.˝
˝이 에미가 너희들에게 너무 큰 죄를 지었구나. 장작불에 태워 죽여도 시원찮을 년이다. 흐흐흐.˝
엄마는 몸을 흔들며 또 다시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엄마, 울지 말아요.˝
소년은 엄마 어깨의 눈을 쓸어 내렸습니다. 호호 불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엄마를 다시 와락 껴안았습니다. 소년이 11살 때, 어린 삼남매를 남겨두고 엄마가 훌쩍 집을 나간 후 처음 안아 보는 엄마의 품인데, 소년에겐 너무나 따스했습니다.
그동안 엄마를 원망하며 살았던 일 쯤은 이미 눈 녹듯 사라져 버렸습니다.
˝너 많이 컸구나. 그런데 여길 어떻게 알았니?˝
˝그 동안 신문 배달을 하면서 엄마를 찾으러 다녔어요.
지금껏 5년이 흘렀나봐요.
그런데 오늘 점심 나절, 시내에 살고 있는 한 아저씨가 엄마를 발견했다며 저에게 알려 주시잖아요. 고마운 아저씨예요. 저에게 엄마있는 곳을 가르쳐 주셨으니……. 그래서……. 이 밤중에……. 엄마가 너무보고 싶어 찾아온 거예요.˝
소년이 엄마를 찾아오게 된 사연을 말하고 있을 때, 그런데 집안에서 문이 와락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누가 나오나 봐요.˝
˝…….˝
소년은 엄마의 품에서 좀 떨어져서 대문 사이로 집안을 살폈습니다.
그런데 한 우락부락한 아저씨가 방을 나오며 소리치는 것입니다.
˝무슨 소리야, 대체! 우는 소리가 들렸는데…….˝
엄마는 대꾸를 않고 소년과 집안의 아저씨를 번갈아 쳐다보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어디론지 숨고 싶은 모양이었습니다.
이윽고 아저씨는 신을 신고 담배를 피워 물고는 대문을 향해 걸어왔습니다.
˝무슨 울음소리가 들리던데…….˝
대문밖으로 나온 아저씨는 엄마와 소년을 발견하고는 의아해 했습니다.
˝넌 누구야?˝
아저씨가 손가락을 내밀며 소년에게 물어왔습니다.
˝아, 아닙니다.˝
˝대체 우리 집 앞에 왜 왔냐구?˝
아저씨의 다그침에 소년은 몸이 더럭 떨렸습니다.
말을 까닥 잘못했다가는 얻어 맞을게 뻔했고 그보다 더 큰 봉변을 당할 것도 같았습니다.
더욱이 엄마를 곤경에 빠뜨릴 수 없다고 생각한 소년은, 주춤 물러서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 니다.
˝저 아주머니 손등에 상처가 났다고 해서요. 그래서…….˝
˝뭐, 상처?˝
아저씨는 엄마에게 시선을 돌렸습니다.
엄마는 겁이 났는지 몸을 움추리다가는 대문 기둥을 짚고 있던 손을 꺼내 보였습니다.
˝여보, 제 손등에 상처가…….˝
엄마의 손등엔 정말 상처가 나 있었고 빨갛게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소년은 좀 떨어진 곳에서 엄마 손등의 상처를 유심히 보았습니다.
눈송이가 그 상처에 내리며 빨갛게 녹고 있었습니다.
소년의 가슴을 물들이며 빨갛게 흘러내리는 그 피!
아저씨는 인제 이해를 하겠다는 듯 엄마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엄마가 몇 번 되돌아 보는 듯 했으나 아저씨의 눈치를 더 많이 살펴야 하는 처지임을 소년은 알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눈 덮힌 길을 걸었습니다.
그토록 그리던 엄마를 만났으니 이젠 집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밤이 너무 깊었는지 길거리에는 사람들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눈보라만 쌩쌩거리며 소년의 앞을 오갈 뿐이었습니다.
시내 길을 걷고 있던 소년은 포장마차를 발견했습니다.
맛있는 라면 국물이 김을 모락모락 내고 있을 그 포장마차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 간절했으나, 소년은 오른쪽 가슴의 저금통장을 꼭 웅켜쥐었습니다.
´안돼. 이 돈은…….´
또 다른 길에서 포장마차를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저금통장 안에 있던 만원권 지폐를 살짝 꺼냈습니다.
그러자 소년의 눈앞에 금방 우동 한 그릇이 놓여진 기분이었고 포장마차 아주머니와 정답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뜨뜻한 국물 더 먹을래?˝
˝고맙습니다. 아주머니 때문에 저는 오늘 배 터지게 먹게 되었네요.˝
소년은 그러나 얼른 시선을 아래로 내리고, 너무나 춥고 배고픈 겨울 밤길을 걷고 있을 뿐입니다.
문득, 손에 만원권 지폐가 들려 있음을 알아채고는 얼른 속 주머니에 다시 넣었습니다.
´안돼. 이 돈은 민숙이와 민일이의 소망을 꼭 이룰 돈이야. 나는 꼭 백만원을 모아야 해.´
소년은 거듭 다짐을 했습니다. 한참 후, 시내 길을 거이 다 빠져 나왔을 때 쯤 한 국수집이 눈에 띄었습니다. 소년은 도둑고양이처럼 유리문 사이로 그 안을 살펴 보았습니다. 아저씨들 몇이 국수를 맛있게 먹고 있었고, 얼굴이 둥글넓적한 아주머니가 방 일을 하고 있는게 보였습니다.
소년은 다시 지폐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중얼거렸습니다.
˝안에 들어가 국수를 사 먹으면서……. 저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그래, 엄마에 대해 말해 주어야지. 우리 엄마 손등에 상처가 나 피가 흘렀다구. 나 때문에 우리 엄마가 피를 흘렸다구……. 그 피가 내 가슴을 자꾸만 울렁이게 한다구…….˝
소년은 그러나 이를 악물고 지폐를 다시 속주머니 저금통장 사이에 끼어 놓았습니다. 부모없이 크고 있는 민숙이와 민일이의 모습이 너무나 불쌍하게 느껴졌고, 애써 백만원을 모아 그 동생들을 위해 요긴하게 써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소년은 밤 깊은 변두리 길을 걸었습니다. 20리의 먼 겨울 눈길이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일찍이 교통사고로 숨진 아빠가 길 한 옆에 서 있는 것입니다.
˝아빠, 왜 여기 서 계신 거예요?˝
˝민우야, 너를 기다리고 있는 거란다.˝
˝저는 엄마를 만나고 오는 길이에요. 엄마는 지금 다른 집에서 살고 계시지만……. 눈치를 보니, 저희들과 같이 사실 것도 같아요. 아니면, 몰래라도 저희들을 키우실 것도 같아요.˝
˝그래. 그런 소망을 가지려무나.˝
˝그리고 저는 꼭 백만 원을 모을 거예요. 그래서 더 좋은 방으로 이사도 하고 그때는 동생들 용돈도 넉넉히 줄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씩씩하게 크는 네가 고맙구나.˝
˝그런데 아빠! 왜 서 계시기만 한 거예요. 저를 와락 안아주셔야 하잖아요.˝
˝그래. 내 아들 민우를 꼭 안아보자.˝
소년은 아빠에게 다가가 와락 껴안았습니다. 그런데 아빠의 가슴은 얼음짱처럼 차가웠습니다. 소년은 제 가슴으로 아빠 가슴을 따뜻하게 녹여보려고 애를 썼습 니다. 오래도록 껴안고 있으니, 이윽고 길가에 홀로 서 있는 겨울나무의 가슴이 따뜻해지고 있었습니다.
´아, 겨울나무였구나!´
소년은 다시 눈길을 걸었습니다. 몸을 잔뜩 움추리고 이를 악물으나 소년의 발은 이미 꽁꽁 얼어 있었고 얼굴과 손이 너무 시렸습니다.
소년은 새벽녘이 다 되서야 민숙이와 민일이가 있는 작은 문간방 앞에 도착했습니다. 문을 두드렸습니다. 또 두드렸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덜썩 쓰러지고야 말았습니다. 잠에 빠져 있던 민숙이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떴습니다.
˝오빠야, 인제 온 거야!˝
민숙이는 자고 있는 민일이를 흔들어 깨웠습니다. 그런데 창호지 문을 자세히 보니 소년의 손 하나가 쑥 들어와 있었고 저금통장과 만원권 지폐들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오빠!˝
˝형!˝
민숙이와 민일이는 얼른 창호지 문을 열어 제치고 밖을 보았습니다. 소년이 쓰러져 있는 것을 보고 얼른 달려들어 흔들었습니다. 그리고 힘을 다해 소년을 방으로 끌고 들어왔습니다.
˝오빠, 어디 갔다 인제 온 거야? 이 밤중에 어디 갔다 왔냐구?˝
˝…….˝
민숙이는 추위와 배고픔에 너무 지쳐 있는 소년을 아랫목에 뉘이고 수건을 가져와 얼굴과 옷을 닦았습니다. 온몸이 축 젖어있기는 했지만, 그냥 이불을 덮어 주었습니다.
˝누나, 돈 구십구 만원이 그대로 있어. 하나도 안 쓴거야.˝
철없는 민일이는 저금통장과 지폐들을 세어 본 후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민숙이는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습니다. 얼른 밖으로 나가 연탄불을 확 피워놓고는 찌개를 렌지에 올려 놓았습니다. 물이 가득든 양동이도 올려 놓았습니다.
간밤에 스스로 죽은 줄 알았던 소년은 가까스로 눈을 떴습니다. 그러자 민일이 얼굴이 바짝 다가와 있었습니다.
˝형, 어디 갔다 온 거지?˝
소년은 힘겹게나마 대답해야 했습니다.
˝…… 애인 만나고…….˝
˝뭐?˝
민일이는 저금통장과 지폐를 소년의 가슴에 툭 던져놓고는 두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애인? 밤중에? 와, 우리 형 이젠 다 컸다.˝
˝뭐? 후후.˝
˝애인하고 무슨 일 했어?˝
그 말에 소년은 배시시 웃다가 피곤함을 못 이겨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습니다. 간밤의 일은 자기 가슴 속에만 꼭 묻어두겠다고. 당분간, 혹은 몇 년이 될지 모르는 그 기간 동안, 민숙이와 민일이에게 절대말하지 않겠다고. 가슴 속에만 묻어두기 너무 답답하면, 옛 이야기 내용처럼 어느 숲속으로 찾아가 ´엄 마~!´ 하고 불러보겠다고. 그러면 ´엄마~!´하는 메아리가 우렁차게 울려올 거라고.
˝누나, 형 말야. 애인 만나고 왔대잖아.˝
˝떠들지 말고 빨리 세수나 해. 너 숙제 다 했어?˝
소년의 귀에 그런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또 다른 하루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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