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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동화] 할아버지의 조끼

창작동화 최인선............... 조회 수 2191 추천 수 0 2005.05.21 23:36:11
.........
할아버지는 창문을 열었습니다. 산골 아침의 찬바람이 휘잉 하며 몰아쳐 들어왔습니다. 어제보다도 날씨가 훨씬 추워진 듯합니다. 할아버지는 ˝이제 조끼 입을 때가 되었어.˝ 하고 혼잣말을 했습니다. 아침상을 치우고 아랫목에 이불을 깔던 할머니가 창문 쪽을 슬쩍 올려다보았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이렇게 두 분만 이 외딴 동네 외딴 집에 푹 틀어박혀 산 지도 참 오래 되었습니다. 아들 따라 서울이라는 데서도 살아보았지만 할아버지는 역시 이 산골 생활이 마음 편했습니다. 할아버지에게는 털실 조끼가 하나 있었는데, 그것 역시 산골 생활에 딱 어울리는 친구입니다.
감색 실에 검은색이 섞인, 정말 따뜻해 보이는 조끼입니다. 허리춤에 주머니도 달려 있는데, 작년까지만 해도 늘 오른쪽 주머니에는 담배가, 왼쪽 주머니에는 성냥갑이 살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기침이 심해지고부터는 주머니도 텅 비고 말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조끼가 조금 허전해 보였습니다. 사실 이 조끼는 너무 낡아 볼품이 하나도 없었지만 할아버지는 이것을 여전히 아꼈습니다.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마음이 달랐습니다. 이 조끼를 보면 옛날에 고생하던 생각이 나 보기만 해도 궁상스러웠습니다. 얼른 내다 버리고 싶지만 할아버지는 좀처럼 허락을 안 했습니다. 할머니가 가끔 무슨 일로 기분이 상해 있을 때, 그것도 모르고 할아버지가 말을 건네면 할머니는 ˝영감 조끼하고나 상의하시우.˝ 하고 고개를 돌렸습니다. 또 다른 생각이 나 할아버지가 한 번 더 물으면 ˝영감은 어째 점점 그 조끼를 닮아 가우?˝ 하고 엉뚱한 핀잔을 주는 것입니다.
할아버지는 바람이 좀 차갑다 싶으면 이 조끼부터 찾았습니다. 이것을 입어야 또 한겨울을 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할아버지는 할머니더러 조끼를 꺼내 놓으라고 이르고는 다시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아직 10월인데 올해는 유난히 추위가 빠른가 봅니다. 뒷산 꼭대기에 벌써 첫눈이 내려앉아 할아버지 머리처럼 희끗희끗합니다. 김장 배추를 심어 놓은 밭에는 조그만 꿩이 한 마리 놀러 와 있었습니다. 꿩은 밭고랑을 따라 죽 내달리다 다시 뒤돌아 산 쪽을 쳐다보곤 합니다. 할아버지는 꿩을 본 게 반가웠습니다.
˝저놈은 춥지도 않나?˝
오늘따라 왠지 몸이 무거웠습니다. 할아버지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어느 해 봄부터 앓고 계시던 어머니는 뒷산에 첫눈이 내려앉자 밭일하는 아들이 걱정이 되어 이 조끼를 뜨기 시작하셨습니다. 식구 모두 말렸지만 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밤이 늦도록 어두운 눈을 가늘게 찡그리며 뜨개질 바늘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어요. 그로부터 며칠 후에 어머니는 머리맡에 이 조끼를 남겨 두고 숨을 거두셨습니다. 오늘따라 그 일이 바로 어제 일인 듯 눈에 선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조끼를 입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찬 아침 공기가 이마를 써늘하게 했습니다. 마른 기침도 나왔습니다. 집 뒤를 돌아 밭을 보러 가는데 어디서 무슨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아휴, 추워!˝
분명 아이 말소리였습니다.
이 곳은 동네에서도 한참 외딴 곳이라 어떤 때는 사람 구경도 하기 힘든데 아이라니? 할아버지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슬슬 걸음을 옮겼습니다. 혹시 손주녀석이 온 건 아닐까 하고요. 괜한 기대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설레었습니다. 말소리가 좀더 또렷이 들렸습니다.
˝에이, 나오지 말걸! 추워 죽겠네. 배도 고프고.˝
싸리 울타리를 다 돌아가니 조그만 사내아이가 보였습니다. 알록달록한 황금색 스웨터에 검은 털신을 신었지만 그래도 추운지 발을 동동거리고 있었습니다. 얼굴이 하얗게 질린 듯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조용히 아이를 불렀습니다.
˝아가! 거기서 뭐 하고 있니?˝
˝아,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아이는 할아버지를 보고 몹시 놀란 표정입니다. 새까만 눈이 동그랗게 열립니다.
˝어디 사는 아이지?˝
이렇게 물으며 아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이가 혼자 추운 데 있는 것이 안돼 보였습니다. 아이가 무어라고 대답하는 것도 듣지 않고 방으로 아이를 끌고 들어왔습니다. 몸 좀 녹이고 가라고요. 나이 어린 겨울 손님이었습니다. 따뜻한 아랫목을 아이에게 내주고 뭐 입에 넣어줄 게 없나 하고 방을 둘러보았습니다. 찐 고구마가 눈에 띄어 할아버지는 그것을 집어 왔습니다.
˝너, 고구마 잘 먹지?˝
몸이 좀 풀리자 아이는 고구마를 집어먹으며 자기 놀던 얘기를 할아버지에게 하나씩 풀어 놓았습니다. 산딸기를 하도 먹어 이빨이 빨갛게 물들었던 일, 급하게 뛰다가 꽃을 밟았더니 꽃이 자기한테 침을 뱉더라는 것, 친구들과 언덕에서 구르기 시합을 했던 일, 그래서 엄마에게 야단맞은 일…… 신이 나 떠드는데 한없이 이어질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도 아이에게 옛날 귀신 얘기, 도깨비 얘기를 한보따리 들려주었습니다. 아이는 그런 얘기를 처음 듣는지 무섭다고 했습니다.
아이와 얘기를 나누면서 할아버지는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이 아이처럼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던 어릴 적 생각이 가물가물했습니다. 아이가 집에 가야겠다고 일어섰을 때는 정말이지 그 아이를 붙잡고 싶었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에게 아까 길을 잃어버려 할아버지 집까지 오게 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고는 장군바위가 어느 쪽에 있는지 물었습니다. 장군바위 넘어서가 바로 아이의 집이랍니다.
할아버지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습니다. 아이가 여간 귀엽고 똑똑한 게 아닙니다. 아이는 새까만 눈을 반짝이며 할아버지에게 작별 인사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제가 본 어른들 중에서 가장 친절하신 분이세요.˝
아이의 목소리가 맑게 울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빙긋이 웃으며 아이를 내려다보다가
˝어린 손님을 그냥 보내면 이 할아버지가 마음이 안 좋지.˝
하고는 아이를 잠깐 기다리게 했습니다. 그러고는 헛간에서 조그만 자루에 고구마를 하나 가득 담아왔습니다. 아이는 다시 오들오들 떨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할아버지는 자신의 조끼를 벗어 아이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아이는 할아버지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었습니다. 춥기도 했지만, 할아버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습니다.
˝조끼를 입으니까 하나도 안 추워요. 내일 꼭 갖다드릴게요. 이 감나무에 걸어 놓으면 되지요?˝
아이는 이렇게 약속을 하고는 고구마 자루를 어깨에 메고 싸리문을 나섰습니다. 아이가 한번 돌아보자 할아버지는 어서 가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아이는 배추밭을 지나 산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새가 깡총깡총 뛰는 걸음새였습니다. 걸을 때마다 휘파람소리 같은 것이 났습니다. 아이가 휘파람을 부는 걸까요? 알 수 없습니다. 그 사이, 아이의 모습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할아버지는 아이의 모습을 찾아보려고 안경을 올려썼다 내려썼다했지만 자꾸 앞이 뿌옇게 흐려집니다. 그만 섭섭한 마음이 들어 돌아서려는데 어느새 할머니가 옆에 와 있었습니다.
˝추운데 왜 그러구 섰수?˝
할아버지는 대답 대신 뒷산을 바라보았습니다. 꼭 다른 세상을 보는 듯한 눈이었습니다. 할머니는 순간 섬뜩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조끼가 없어진 것을 알고 장난처럼 할아버지를 툭 쳤습니다.
˝영감, 조끼는 어쨌수? 내다 버렸수?˝
그 때서야 할아버지는 어린애 같은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를 돌아다봅니다.
˝내다 버린 게 아니라 어떤 아이에게 빌려 주었어.˝
말을 마친 할아버지는 껄껄 웃었습니다.
˝에이, 농담 마슈. 이 산골에 무슨 아이가 있다고.˝
할머니도 따라 웃었습니다. 꼭 눈이 올 것 같은 날씨였습니다.
그 날 저녁, 할아버지는 밥을 드시고 일찍 자리에 누웠습니다. 그러고는 그대로 잠이 드는 것처럼 눈을 감았습니다. 창밖으로 눈이 소리없이 쌓여 가는데 할아버지의 눈은 깊은 곳으로 자꾸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곳에 꿩을 쫓아다니며 한 아이가 뛰어놀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하얗게 흩날리는 눈을 맞으며 꿩도 아이도 즐거워합니다. 어느덧 세상은 하얘지고 꿩도, 아이의 발자국도 하얘져갔습니다.
할머니는 새벽녘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을 알았습니다. 할아버지 얼굴에 전날의 미소가 어려 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것이 할머니의 슬픈 마음을 위로해주었습니다.
˝이 양반은 마지막 가실 때도 그 조끼를 닮으셨군.˝
할머니는 이렇게 혼잣말을 했습니다. 문득 할아버지의 조끼가 보고 싶었습니다.
그 다음다음 날인가였습니다. 며칠째 싸리문을 흔들어 대던 바람도 잠잠했습니다. 할머니는 서울에서 온 아들과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할아버지를 뒷산 야트막한 곳에 묻고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싸리문을 열고 마당으로 들어오는데 감나무 가지에 뭔가 걸려 있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할머니는 가만가만 다가가 그것을 벗겨 들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조끼가 분명했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손을 호호 불면서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할머니만 마당에 혼자 남아 조끼를 흔들어 눈을 털어냈습니다. 손에 뭐가 묻어나는 듯해 속을 뒤집어 보니까 새 깃털이 여기저기 박혀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깃털 하나를 빼내어 눈에 가까이 대보았습니다.
˝………˝
할머니는 무슨 영문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눈이 시리도록 하얀 들판에 검은 점 하나가 왔다갔다하는 게 보였습니다. 멀리서도 그것이 꿩이란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조끼를 든 채 자신도 모르게 꿩에게 다가갔습니다. 꿩은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처럼 그 자리를 콩콩거리며 맴돌았습니다. 할머니가 가까이 다가오자 꿩은 할머니 쪽을 한번 바라보더니 푸드득 눈밭을 치면서 날아올랐습니다. 뒷산 장군바위 쪽으로 멀리멀리 사라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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