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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샘터상 동화당선작] 장승과 도라지꽃

신춘문예 남연화............... 조회 수 2495 추천 수 0 2005.11.10 17:36:58
.........
"우철아…우철아."
우철이는 눈을 번쩍 떴습니다. 분명히 엄마 소리였습니다. 얼른 몸을 일으켜 방안을 둘러보았지만 아무도 없었습니다. 격자 나무살이 붙은 창호지 문에 달빛 그림자가 너울댔습니다. 언뜻 엄마의 모습 같았습니다. 우철이는 부리나케 일어나 방문을 열어젖히고 툇마루로 나갔습니다. 마당을 가로질러 이어놓은 빨래줄에 엄마의 치마가 너울너울 흔들렸습니다. 바람과 함께 엄마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졌습니다. 바람은 나뭇잎새를 끌고 다녔습니다. 나뭇잎새는 마당을 한 바퀴 돌고서 대문 밖으로 멀어져 갔습니다.
우철이는 잠이 덜 깬 부스스한 얼굴로 툇마루를 가로질러 안방으로 다가갔습니다. 문을 빼꼼이 열고 방안을 둘러보았습니다. 방안에 아버지와 누나, 그리고 친척 아저씨가 등을 보이고 앉아서 울고 있었습니다. 우철이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갔습니다. 그곳에는 하얀 옥양목으로 덮인 엄마가 누워있었습니다. 며칠째 병원에 입원해 계셨던 엄마가 돌아오셨나 봅니다.
'엄마가 이불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있으면 얼마나 답답할까.' 우철이는 옥양목을 걷어내려 했습니다. 그때 누나가 다가와 우철이의 팔을 잡았습니다. 우철이는 누나의 얼굴을 빤히 보았습니다. 퉁퉁 부은 두 눈에 눈물이 말갛게 고여있었습니다. 누나의 눈물이 또르르 떨어졌습니다. 누나는 우철이를 품에 안고 더 크게흐느꼈습니다.
"우철아…엄마가…돌아가셨어."
엄마는 오랫동안 병을 앓았습니다. 볕 좋은 날, 엄마는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툇마루까지 나와 앉아 우철이를 기다렸습니다. 대문 열린 집안에 자그마한 엄마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우철이는 길가에 오롯이 피어난 도라지꽃 한 송이를 꺾어 들고 고샅길부터 달음질쳤습니다. 엄마의 얼굴이 눈에 가득 찰 때까지 뛰었습니다. 우철이는 마당까지 들어와 팔을 활짝 벌리고 해맑게 웃고 있는 엄마의 품에 안겼습니다. 하얗게 메마른 엄마의 볼은 우철이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냈습니다.
"엄마, 이 꽃이 도라지꽃 맞죠?"
"그래 그래, 내 새끼."
  엄마는 수줍은 듯 꽃을 받아보곤 향을 맡았습니다.
"엄마가 도라지꽃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니?"
"저번에 엄마 따라 장에 갈 때요. 길가에 핀 보라색 꽃보고 참 예쁘다고 하셨잖아요."
엄마의 품에선 향기가 납니다. 짭짜름한 땀 냄새에 도라지꽃 향도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우철이…몇 살이지? 아아, 열 살이구나."
엄마는 계속 우철이의 나이만 세었습니다.
"우철이 스무 살 땐 어떨까, 서른 살 땐 어떨까, 마흔 살 땐…."
엄마는 끝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우철이의 뺨과 맞닿은 엄마의 뺨엔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물줄기가 흘러내렸습니다. 우철이는 품에서 빠져나와 엄마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엄마는 얼른 고개를 돌렸지만 우철이는 보았습니다. 햇빛에 반짝이는 엄마의 눈물을 말입니다.
"우철아. 이제 열 살이나 됐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울면 안 된다."
"엄마는 지금 울면서?"
엄마는 소매 춤으로 눈물을 닦으면서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내 아들은 엄마처럼 울면 안 된다."
우철이는 덜컥 겁이 났습니다. 울지 말라는 엄마는 울고 계셨기에 겁이 났습니다. 이젠 우철이가 울어도 엄마가 달래줄 것 같지 않아 겁이 났습니다. 어쩌면 엄마가 우철이를 달래주지도 못할 머나먼 곳으로 가실지 모르기에 겁이 났습니다. 그 날 밤에 우철이 꿈에는 엄마가 꽃밭을 지나 다리를 건너 구름 너머로 멀리멀리 가는 꿈을 꾸었습니다. 동네 아저씨들이 누런 삼베옷에 갓을 쓰고 꽃상여를 짊어졌습니다. 알록달록한 꽃상여 속에 엄마를 싣고 어기야디야 황천가를 불렀습니다. 타박타박 따라가는 우철이의 얼굴엔 그늘이 져있습니다. 엄마가 죽은 것일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음이란 게 뭔지 떠올릴 수 없었습니다.
'죽는다는 건 옆에 없는 것일까?''죽음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일까?'
언젠가부터 동네 어른이 우철이를 볼 때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씀하셨습니다.
"우철아 .엄마가 옆에 없더라도 꿋꿋하게 살아야 한다."
분명 엄마가 옆에 없더라도. 라고 했습니다. 엄마가 옆에 없던 적은 많았습니다. 지난 번 외가댁 제사에 가서 하루 묵고 오신 것처럼. 장터에 나가 오이여 호박이며 내다 팔고 늦게 오시는 것처럼. 친척 병문안 가서 늦으시는 것처럼. 몇 달째 병원에 누워 계셨을 때도 엄마는 우철이 곁에 없었습니다. 우철이는 고개를 휘휘 젓습니다.
몇 개월 전 강아지 복실이가 쥐약을 먹고 죽었습니다. 그때 우철이는 학교에서 돌아올 때 늘 왕왕대며 반겨주던 복실이가 안보인다는 게 슬펐습니다. 우철이는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복실이는 그냥 하루 이틀 볼 수 없는 게 아니었습니다. 일 년이 지나도 십 년이 지나도 복실이는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개울 건너 먼 산을 넘고 동네방네 찾아도 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죽음은 영원히 옆에 없고 눈에 안 보이는 것일까?'
우철이는 명치에 뭉툭한 돌이 걸려 있는 것 같습니다. 머릿속은 검은 구름이 덮인 듯 아득했고 발은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처럼 무거웠습니다.
우철이는 엄마가 없는 휑한 집이 싫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놓고 마을 어귀를 달렸습니다. 언덕에 핀 들꽃도 예쁘지 않았습니다. 눈물이 한 줄기 볼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우철아, 울면 안 된다.'
우철이는 언덕 아래로 뛰어내려갔습니다. 풀섶을 헤치고 도랑을 건너고 비탈길을 뛰었습니다. 개울에서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렸습니다. 바닥에 봉긋 솟은 돌부리가 보였습니다. 우철이는 분명 건너뛰었다고 생각했는데 넘어졌습니다. 무릎에서 몽글몽글 피가 솟습니다.'괜찮아. 이 정도는...엄마를 못 보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냐.' 우철이는 눈물을 삼키고 벌떡 일어났습니다. 또 뛰었습니다.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엄마, 우철이 지금은 울지만 괜찮을 거예요. 정말 괜찮을 거에요.'
개울가까지 뛰어내려오니 발목이 시큰거리고 발바닥이 쓰라렸습니다. 우철이는 무거운 다리를 절뚝이며 냇가 자갈밭에 앉았습니다. 무릎을 세워 넘어진 곳을 보니 맺힌 피가 다 말라붙었습니다. 바지가 찢겨 나가고 살점이 떨어졌지만 예전처럼 엉엉 울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을 엄마가 보셨다면 기특해 하셨을 겁니다.
우철이는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았습니다. 그래도 우철이는 자꾸만 눈물이 나려고 합니다. 집에 들어가 세수하면서 딱 한 번만 마음껏 울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발길을 돌리려던 참이었습니다. 문득 눈에 띄는 것이 있었습니다. 장승이었습니다. 눈은 두꺼비 눈처럼 불룩 튀어나오고 코는 송편을 턱 붙여놓은 것 같이 두루뭉실했습니다. 이는 먼지가 다 들어갈 듯 성긴 데다가 입은 웃는지 우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턱 밑의 수염은 아이들이 참숯을 몇 개 칠해놓은 것 같이 우스꽝스러웠습니다. 언젠가 이 앞을 지나며 엄마가 말했습니다.
"몇 십 년 전에 이곳에 장승이 있었단다. 나라에서 마을을 발전시키고 미신을 없앤다고 장승을 없애라고 했지. 그런데 얼마 전에 동네에 물난리가 난 뒤에 종이네 할아버지께서 다시 만드셨어. 이제 장승은 우리 동네를 지켜줄 거야. 우철이도 장승한테 소원을 빌어보렴. 꼭  들어주실 거야."
우철이는 마을 어귀에 있는 장승을 늘 지나쳐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소원을 빌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우스운 얼굴이 소원을 들어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엄마가 병을 앓고부터는  달랐습니다. 장승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습니다. 못 생긴 장승의 얼굴이 금실 복 주머니에서 사탕을 하나씩 꺼내주던 할아버지의 너털웃음처럼 인자하다고 믿어 보았습니다.
"엄마를 살려주세요. 꼭 엄마를 살려주세요."
만약 들어주면 아이들이 장승에게 돌팔매질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들어준다면 제일 좋아하는 인절미를 송두리째 바치고 넙죽 절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들어준다면 물구나무를 선 채로 노래를 부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승은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역시 장승은 못 생긴 바보라고 우철이는 생각했습니다. 우철이는 길바닥에서 굵은 차돌을 집었습니다. 손아귀에 힘을 주었습니다.
"우철아…."
우철이는 소리가 나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습니다. 장승이 서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때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우철이는 팔등으로 부신 눈을 가렸습니다.
"우철아, 엄마야"
우철이는 팔을 얼른 치웠습니다. 엄마는 무지개 다리 위에 서 있었습니다. 우철이는 냉큼 무지개 다리 위로 뛰어올라 엄마의 허리를 꼭 껴안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무지개 다리는 미끄럼틀로 변하더니 엄마와 우철이를 태우고 쭉쭉 뻗어나갔습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자 넓은 꽃밭이 보였습니다. 미끄럼틀은 우철이와 엄마를 바닥에 사뿐 내려놓고 사라졌습니다. 그곳은 파스텔 빛 솜사탕 구름이 뭉게뭉게 떠있고 예쁜 종달새가 포롱포롱 날아다녔습니다. 우철이가 한참 정신 없이 둘러보는 사이 엄마는 꽃밭 한 귀퉁이에서 씨앗을 심고 있었습니다.
"엄마, 뭐하세요?" "응, 엄마 꽃밭이야. 우철이가 착한 마음 가지고 착한 일 하면서 열심히 살 때마다 엄마 밭에는 꽃이 핀단다. 우철이가 씩씩하고 착해지면 엄만 이 꽃밭에 꽃을 가득 키울 수 있어." "꽃이 가득 피면 어떻게 돼요?" "영원히 웃을 수 있지." "가득 안 피면요" "날마다 울어야 돼. 엄마가 울보 되는 거 좋아?" "아뇨, 웃는 게 좋아요." "그럼, 엄마 웃게 해줄 거니?"
우철이는 고개를 끄떡였습니다.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우철이가 착하고 씩씩해지면 엄마의 꽃밭에 꽃이 가득 피고, 엄마가 웃고 있으면 우철이도 즐거울 것 같았습니다.우철이는 환하게 웃었습니다. 엄마의 밭에서 싹이 돋고 줄기가 나오더니 금세 꽃몽우리가 맺히고 꽃이 한 송이 피어올랐습니다.
"우철아. 도라지꽃이 피었네." "정말 꽃이 피었네요." "것 봐. 울지 않고 씩씩하니까 엄마 밭에 꽃이 피지?" "네! 엄마!"
사방에서 빛이 퍼져왔습니다. 우철이는 눈을 감았습니다. 갑자기 종달새 소리가 멈췄습니다. 우철이는 실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엄마가 서 있던 자리엔 장승이 서 있었습니다. 우철이는 풀밭에서 부스스 일어났습니다. 깜빡 잠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우철이는 발딱 일어나 장승 얼굴에 흠집이 났는지 살폈습니다. 다행히 흠집이 없었습니다. 돌을 던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철아! 우철아!" 저 멀리 아버지와 누나가 부르는 소리가 들립니다.
"장승님! 조금 심술부리는 건 괜찮죠?"
장승을 한 번 쳐다보고 우철이는 아버지와 누나가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사라락…"
장승 아래 풀밭, 도라지 꽃망울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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