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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5:35-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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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2013.12.8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행복한 가정(10) 역경을 극복하는 가정
마가복음 5:35-43
어떤 목사님이 결혼식 주례를 가는데 시간이 늦었답니다. 80Km 구간이지만 시간을 맞추기 위해 120㎞로 차를 몰다가 교통 경찰관에게 걸렸답니다. “결혼식 주례 시간 때문이라고 한 번 보아달라고 했답니다.” 그러나 경찰관은 보아 주지 않고 범칙금을 물게 했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옆에 보니까 차들이 자신보다 더 쌩쌩 달리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억울해 경찰관에게 말했답니다. “아니!!! 다른 차들도다 속도위반인데 왜 나만 잡아요?" 그 때 경찰관이 물었답니다. “목사님 낚시 해봤어요?” “낚시요?....... 물론이죠!!” 그러자 태연한 얼굴로 경찰관이 "그럼 목사님은 낚시터에 있는 물고기를 몽땅 다 잡아요?". “걸린 고기만 억울한 겨”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는 과속으로, 때로는 실수도, 때로는 능력부족으로, 때로는 이유도 모르고 원치 않는 일을 만날 수 있습니다. 수능 시험을 보았는데 원하지 않는 시험 점수가 나올 수도 있고, 자녀를 결혼시켰는데 이혼의 위기를 만날 수도 있고, 사업을 하였는데 부도의 위기를 당할 수도 있고, 취업을 하였는데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할 역경이 만날 수 있고, 아직은 살날이 더 기대되는 나이인데 질병으로 죽음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이럴 때 그 역경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사람이 있고 그 역경 앞에 스스로 포기하고 무너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공부를 잘 하는 한 여학생이 수능 시험이 끝난 날 수능 가채점 결과에 실망하고 스스로 목숨을 거뒀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평소 성적이 상위권이었는데 원하는 점수가 나오지 않자 괴로워하며 유서에 "먼저 가는 게 죄송하다. 과분한 사랑에 감사드린다"고 적었다고 합니다. 대입수학능력시험이 있기 전날은 재수 중이던 한 여학생이 아파트에서 투신해 숨졌다고 합니다. 이 여학생은 “엄마와 언니에게 미안하다. 사랑한다. 그동안 고마웠다. 친구들도 고맙고 미안하다. 아빠에게 한번도 자랑스러운 딸이 못돼서 미안하다”는 등의 내용의 유서를 남겼다고 합니다. 자신에게 다가온 역경을 극복하기 못하고 죽음으로 인생을 끝내 버린 것입니다.
역경지수(AQ)란 말이 있습니다. 미국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가 폴 스톨츠 박사가 만든 말로 21세기는 IQ나 EQ보다 AQ(Adversity Quotient)가 높은 사람이 성공하는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수많은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여 목표를 성취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가던 길을 가지 못하게 하고, 하던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역경을 만나면 사람은 세 가지로 반응한다고 말합니다. 등반에 비유하여 3가지 타입을 말하는데 첫째는 쿼터(Quitter 포기하는 사람)로 힘든 문제나 역경이 다가오면 도망가거나 포기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의 60-70%를 차지하는 캠퍼(Camper 안주하는 사람)로 역경 앞에서 뚜렷한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현상유지 정도로 적당히 안주하는 사람입니다. 셋째는 클라이머(Climber 정복하는 사람)로 시련이 다가올 때 자신의 모든 능력과 지혜를 동원하여 기어코 정복하고 마는 사람입니다. 클라이머는 자신만 역경을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을 격려하고 북돋우면서 함께 정복한다고 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역경이 다가 올 때 역경을 정복하는 가정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우리 신앙인은 가정에 어떤 역경이 다가와도 믿음으로 정복하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수시로 다가오는 역경을 정복하며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겠습니까?
1. 우리는 역경이 다가 올 때 포기하지 말고 예수님이 역경을 순경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으로 믿고 예수님 만나 문제를 해결 받아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역경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회당장이 나옵니다. 회당장은 회당을 관리하는 관리입니다. 건물을 관리하며, 예배 순서의 작성 및 질서 유지, 심지어 재판과 같은 사무 등을 관할하던 장로 출신의 지도자였습니다(눅 4:13 ; 8:41 ; 행 18:8,17). 아마 바리새인이었을 것입니다. 이 직책은 당시 회중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인물에게 주어졌다고 합니다. 이 직책을 가진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적당한 부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회적인 신분도 보장된 사람입니다. 당시 유대교에서 종교적인 덕망도 있어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뭐 부족한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가정에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찾아 왔습니다. 하나 밖에 없는 12살 딸아이가 병에 걸려 죽게 되었습니다. 역경은 예고 없이 찾아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사고를 당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질병으로 입원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회사가 잘못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퇴출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자녀가 가출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정에 문제가 생깁니다. 이럴 때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그 상황을 절망의 기회가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는 기회를 삼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회당장이 딸의 문제가 아니면 예수님께 찾아 갔겠습니까? 그 당시 그는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 사람입니다. 경제적으로도 부족함이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입니다. 아주 양심적이고 도덕적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인간적으로 당시 어떤 분입니까? 목수의 아들입니다. 직업이 존경할 만한 분이 아닙니다. 랍비를 통하여 교육받은 사람도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된 사람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나이가 들어서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딸 문제가 아니면 일평생 예수님께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12살 된 외딸이 병들었기 때문에(눅8:42), 자신의 생명처럼 귀중한 딸이 역경을 만났기 때문에, 가정에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역경이 찾아왔기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 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가 있고 위기가 찾아오고 어려움이 있을 때 주님을 만나는 기회로 활용해야 합니다. 지금 가정을 불행하게 하는 역경이 있습니까? 그것으로 원망하고 불평하며 더 불행한 가정을 만들지 말고 그 문제를 가지고 문제의 답을 가지고 계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역경이 다가오면 역경을 기회로 바꾸어야 합니다. 역경을 바꾸면 경력이 됩니다. 자살을 뒤집으면 살자가 됩니다. 역경도 또 다른 옷을 입은 축복의 도구입니다. 금광석은 용광로에 들어갔다 올 때 가치 있는 금으로 탄생합니다. 전쟁이 영웅을 만들고, 경제적 위기가 부자를 만들고, 역경을 통해 참 신앙은 증명되는 것입니다. 역경을 통해 사울이 예수님을 만나 바울이 된 것입니다. 게바가 역경을 통해 예수님을 만나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역경을 경력으로 만들려면 세 가지 담을 넘어야 합니다.
첫 번째 담이 합리주의라는 벽입니다.
야이로가 예수님을 어떻게 만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자신의 가정의 역경을 해결할 분은 오직 예수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자신을 최대한 낮추고 상대방을 최대한 높이는 행위입니다. 자신의 딸을 위하여 자신의 지위나 체면, 명예를 염두해 두지 않았습니다. 자존심, 위신 체면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못합니다. 아마 예수님보다 많았을 것입니다. 당시 지위도 높습니다. 아마 학력도 높았을 것입니다. 경제적 능력도 좋았을 것입니다. 어떻게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그렇게 합니까? 동양인은 본시 체면에 살고 체면에 죽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지위나 체면, 명예 등 예수님을 만나는 걸림돌을 다 버려 버립니다. 합리주의 산을 넘는 것입니다. 당시 관습이나 합리는 초월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경험주의의 벽입니다.
23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간곡히 구하였습니다. 진솔하게 자신의 문제를 간절하게 아뢰었습니다. 한 두 번에 그친 것이 아니고 여러 번 반복해서 예수님께 간청했다는 말입니다. 딸의 목숨을 생각하여 필사적으로 매달렸다는 것입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믿은 것입니다.
셋째는 과학주의의 벽입니다. 손만 얹으면 고침을 받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과학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고백입니다. 수술을 하든지, 약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손만 얹으면 나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갔습니다.
영동 그리스도의 교회 담임이며 한양대 교수인 이강평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은 어릴 때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중학교를 중퇴하고 중국집 배달원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으로 예수님을 만나 진실한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꿈이 생겼답니다. 그의 꿈은 목사와 박사가 되는 것이었답니다. 사람들은 소년이 자신의 꿈을 말할 때마다 비웃었답니다. 어느 날 그는 우연히 배구실력을 인정받아 운동선수로 중학교에 편입했답니다. 그리곤 학업에 정진하여 한양대에 진학했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 유학시험에 응시했으나 번번이 낙방했답니다. 여섯 번을 낙방하였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노력했답니다. 드디어 일곱번째에 합격해 유학길에 올랐답니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에겐 작은 성경과 7달러가 전부였답니다. 낯선 환경을 극복하고 하루 20시간씩 공부한 그는 미국에서 목사와 한국 최초의 체육학박사라는 소원을 성취했답니다.
하늘을 나는 새들은 크게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날개의 힘으로 나는 새와 바람의 힘으로 나는 새들입니다. 참새나 메추리 같은 새들은 날개의 힘으로 나는 새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을 날 때, 얼마나 빠르고 분주하게 날개짓을 하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수고하고 힘쓰지만, 결국 지쳐서 멀리 그리고 높이 날지는 못합니다. 그런가 하면 바람의 힘으로 나는 새들이 있습니다. 독수리나 갈매기들이 그렇습니다. 이러한 새들은 날개를 쭈욱 펴고, 바람과 기류를 따라 높이 그리고 멀리 날아갑니다. 예수님 만나 예수님께 맡기고 살면 역경이 경력이 되는 역사가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는 역경이 다가 올 때 포기하지 말고 예수님이 역경을 순경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으로 믿고 예수님 만나 문제를 해결 받아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2. 우리는 역경이 다가 올 때 회의를 극복하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 간절히 간구하였는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24절을 보십시오. 자신의 요청대로 예수님이 자신의 집으로 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딸을 고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3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회당장 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딸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끝났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망도 기대도 다 살아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요구하는 것은 예수님을 괴롭히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상식으로는 병든 자는 고칠 수 있으나 죽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제 절망입니다. 이제 끝입니다. 이제 어찌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신앙적 회의에 빠지게 됩니다. 무신론자들이 하는 회의는 절망적 회의입니다.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물음에 회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회의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회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적 개입에 대한 회의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간절히 간구하였는데 왜 내 딸이 죽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겸손이 매달렸는데, 그렇게도 몸부림쳤는데 왜 딸이 죽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혈루증 여인을 고쳐주시면서 지체하지 않았다면 얼마든지 내 딸을 고쳐 주실 수 있었을 텐데 왜 지체하여 내 딸을 죽였느냐고 감정적으로 대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역경을 만나 쉽게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회의적 신앙을 극복하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는 세 가지 강을 건너가야 합니다.
첫째는 사람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이 죽은 것을 보고 끝이라고 절망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39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회의적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음으로 게임이 끝난 것이 아니라 휴식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침이 되면 눈을 뜨고 일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둘째는 역경을 끝으로 보지 않고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보고 어떻게 반응합니까? 울며 통곡하며 심하게 떠들며 부르짖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끝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절망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잠자고 있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끝이라고 생각하면 야이로도 회의적 신앙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역경을 과정으로 받아들이면 회의적 신앙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들 때 때때로 역경을 사용하십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40년 동안의 역경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인신매매가 되었습니다. 억울하게 성추행범으로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자신을 죽이려는 장인에게 쫓겨다닙니다. 친구에게 아들에게 배신을 당합니다. 기름부음을 받고 왕이 되기까지는 20여년 동안 수많은 역경을 만났습니다. 흥미있는 실험이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스키너는 50명을 두 집단으로 나눈 후 A집단은 편하고 안락한 환경을 조성해주었고 B집단에게는 불편하고 부족한 환경을 조성해주었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6개월의 일상생활을 하게 한 후 마인드와 능력을 측정한 결과 의미 있는 데이터가 나왔답니다. A집단은 처음보다 5점이 떨어졌고 B집단은 8점이 상승하였던 것입니다. 이 결과가 말해주는 것은 좋은 조건보다는 불리한 조건에서 단련받은 사람의 성공확률이 더 높다는 것입니다. 1960년대 초반 스탠포드대학 생물학자로 버트 샤폴스키는 막 태어난 일부 쥐들을 21일 동안 매일 작은 우리 속에 15분 정도 격리를 시켰답니다. 그리고 15분 뒤에 다시 어미에게 보내주었고 이를 격리 경험을 겪지 않은 다른 쥐들과 비교해 보았답니다. 실험결과 일시적 격리 현상을 경험했던 쥐들은 성장하면서 더 모험적이고 더 용감했으며 스트레스에 덜 민감하게 자라났답니다. 그에 비해 분리경험이 전혀 없는 쥐들의 경우에는 성장하면서 스트레스에 민감하여 자주 놀라는 일이 있었답니다. 즉, 삶에 있어서 적절한 좌절과 자신의 능력에 맞는 스트레스를 경험한다는 것은 역경극복의 힘을 기르는 필수요소라는 것입니다. 비바람과 눈보라 맞고 자란 들풀이 온실에서 자란 꽃보다 생명력이 강합니다. 생명에게 불편함이 없는 좋은 환경이란 독과 같은 것입니다. 식물은 가물고 바람이 불어야 그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려 더 큰 비바람과 가뭄에도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미국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프랭클린 루스벨트,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전신화상을 입고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졌지만 사랑의 전도자가 된 이지선 양, 시각장애인이지만 한국인으로 미 행정부 고위 인사가 된 강영우 박사 등은 역경을 과정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들은 그 역경 가운데서도 회의를 넘으서는 믿음으로 역경을 극복하고 행복한 가정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미국의 대통령이었던 투루먼은 서른 여덟 살이던 1922년에 많은 빚을 지고, 일자리를 찾지 못한 실업자였습니다. 죠지 워싱턴은 그가 치룬 전쟁 중에서 2/3는 패배했습니다. 발명가 에디슨은 너무나 공부를 못해서 선생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자퇴할 것을 종용했다고 하며, 영국의 영웅 처칠수상은 소학교 졸업까지 지친아들의 특수반에 속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거기에서 포기했다면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롬 5:3-4)” 역경을 과정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셋째는 어떤 비웃음이 있다하여도 지속적인 믿음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잔다고 하자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40절을 보십시오. 비웃습니다. 마른 고목나무에서 어떻게 꽃이 피겠냐는 것입니다. 파지 않은 우물에서 어떻게 물이 나오겠냐는 것입니다. 마른하늘에 어떻게 비가 오겠냐는 것입니다. 끝이 난 집안인데 어떻게 회복되겠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고칠 수 없는 질병에 걸렸는데 어떻게 다시 살 수 있겠냐는 것입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기업인데 어떻게 기업이 다시 회복되겠는 것입니다. 어렵고 힘든 교회인데 어떻게 그 교회가 부흥하겠냐는 것입니다. 이성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3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는 것입니다. 현재형으로 흔들리지 말고 네가 처음 내게 가졌던 믿음을 지금도그대로 굳게 간직하라는 말입니다. 지속적인 믿음으로 회의를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오늘 우리 성도님과 저에게 들려주시는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길 바랍니다. 역경 가운데 있습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실제적으로 개입하여 역경을 순경으로 만들어 줄 것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3. 우리는 역경을 정복하여 절망하고 비웃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는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역경을 정복하라고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역경을 정복하고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첫째는 우리가 먼저 역경을 정복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은 비웃는 자들을 어떻게 합니까? 40절을 보십시오. 내어보내 버립니다. 강제로 추방합니다. 그리고 믿음의 사람 제자들 셋을 대리고 들어 가십니다.(37) 아이의 부모가 있는 앞에서 어떻게 하십니까? 죽은 딸의 손을 잡고 “달리달굼”하십니다. 히브리어 표기로 “탈리타 쿰”입니다. “탈리타”는 소녀야라는 말이고 “쿰”은 일어나라는 말입니다. 지금 그 소녀는 죽을 사람이 아닙니다. 80대 노인이 아닙니다. 한참 자라야 할 아이이고 이 세상에 할 일이 많은 젊은이입니다. 12살 소녀와 죽음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 말입니다. 일어나야 합니다. 죽음을 이기고 일어서야 합니다. 병을 이기고 일어서야 합니다.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일어서야 합니다. 어떤 고난이 온다고 할지라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될 인생입니다.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가정도 일어서고, 교회도 일어서고, 직장도 일어서고, 기업도 일어서고, 사업터도 일어서고, 자녀도 일어서고, 나라도 일어서야 합니다. 지금 잠잘 때가 아닙니다. 관속에 누워 있을 때가 아닙니다. 우리는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과거 로뎀나무 아래 지쳐서 쓰러져 회의적 신앙에 사로잡힌 엘리야에게 천사를 시켜서 떡과 물을 주시며 "일어나 먹으라" 고 하셨습니다.(왕상19:5절) 주님의 일을 하다가 영적 기갈과 곤비함으로 힘을 잃은 사람들이 생수의 떡을 먹고 일어서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여 말씀을 전하다 지쳐 있는 이사야에게 하나님은 "일어나 빛을 발하라" 고 말씀하십니다.(이사야 60:1절)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고 하였습니다.(요한복음 5:8) 해도 해도 안 된다고 절망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으로 기도하러 가다가 미문 앞에 앉아 구걸하는 앉은뱅이에게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3:6절)
예수를 10년 20년 믿었어도, 교회를 수십년 다녔어도 잡아끌어야 끌려오고 업어다 놓아야 하는 앉은뱅이와 같은 신앙에서 일어나십시오. 구걸하는 신앙에서 주는 신앙으로 일어서십시오.
예수님께서 잡히시던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과 같이 기도하려고 했으나 제자들은 모두 잠이 들고 홀로 피와 같은 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시고 마지막 군병들이 잡으려고 올 때 제자들을 깨우시며 "일어나라 함께 가자"라고 하셨습니다.(마태복음 26:46절) 역경 앞에 망설이지 말고 사명 붙들고 주님과 함께 걸어가야 합니다.
둘째는 우리가 일어나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증하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소녀가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울며 소리 지르며 절망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보며 비웃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상황을 보고 어떻게 됩니까?(42) 42절을 보십시오. 크게 놀라고 놀랐습니다. 놀란 정도가 아닙니다. 황홀경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놀랐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38절을 보십시오. 울며 통곡하며 훤화합니다.
40절을 보십시오. 비웃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소녀가 살아나니까 그들은 황홀경에 빠집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고 가정이 변화가 되었을 것입니다. 야이로의 가정처럼 우리가 어떤 역경이 다가와도 믿음을 통하여 죽음의 자리에서 일어나는 주인공들이 되어 세상 사람들에 간증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죽음을 이기고 일어나면, 병을 이기고 일어 나면,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일어나면, 부도를 정복하고 일어나면, 사람들의 시각이 달라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극한 역경 가운데서 우리의 신실한 믿음을 통해 일어나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말합니다. “야 그렇게 힘없던 아이가 그렇게 사회적으로 출세하다니? 초등학교 시절 꼴치만 하더니 야 그애가 어떻게 박사학위를 받았어? 야 그 집안 꼴이 아니더니 어떻게 그렇게 잘되었지? 야 그 공장 망한 줄 알았든데 어떻게 그렇게 잘 나가지? 야 그 아이 시집도 못가고 장가도 못 갈 줄 알았는데 어떻게 그런 좋은 가정 이루었지? 야 그 교회 사람들 힘없는 사람들인데 어떻게 이런 교회 이루었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앉은뱅이와 같은 인생, 중풍병자와도 같은 인생, 소경과도 같은 인생이 변화되면 주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정말 살아계신다고 느끼게 됩니다.
안된다고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손을 잡고 말씀하시면 우리도 얼마든지 한계를 극복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설교가 변변치 못하다는 소리를 듣고 늘 기도를 하였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되지 않았답니다. 어린 아들이 목사님이 늘 주일 예배 전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아빠, 주일날 아침마다 설교하러 나오시기 전에 뭘 기도하시는거예요?" 목사님이 말했답니다. "응 하나님께 늘 좋은 설교말씀을 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단다." 그러자 아들이 갸우뚱거리며... "그래요? 그런데 왜 안 주시는거죠?“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 듣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믿음 가지고 나아가다보면 어느 순간 티핑 포인트가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습니다. 시골에서 잡화점을 경영하다 파산하여 그 빚은 갚는 데 15년이나 걸렸습니다. 결혼생활은 매우 불행했습니다. 하원의원 선거에서 두 번이나 낙선했습니다. 상원의원 선거에서도 두 번이나 낙선했습니다. 그 때 포기했다면 그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가 믿음으로 역경을 극복하여 지금도 얼마나 수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증하고 있습니까? 디즈니랜드를 만든 환상가 디즈니도 수많은 역경을 겪었습니다. 그는 평생 동안 줄기차게 실패와 파산을 겪었고, 40이 넘어서는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신경쇠약에 걸려 자살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고난이나 역경에도 굴복하지 않고 일어나고 또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1995년에는 디즈니랜드와 ABC 방송국 그리고 디즈니 스튜디오를 소유한 거대한 기업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전능하신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1%의 가능성에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생은 도전의 연속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는 순간 도태가 시작됩니다. 자전거는 달리지 않으면 넘어집니다. 예수 안에서 ‘내일은 반드시 더 나을 것이다’라는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훌륭한 리더는 실패와 역경을 먹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역경은 사람을 겸손하게 합니다. 역경은 사람을 지혜롭게 만듭니다. 역경은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역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또 다른 선물입니다. 미국의 네브래스카 주립대학의 사회학 연구팀이 행복한 가정들을 연구해 4가지의 특징을 추려 내었습니다. 첫째는 감사였습니다. 행복한 가정들은 서로에게 고마움을 자주 표현했습니다. 둘째는 협동이었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혼자 고민하기보다는 온가족이 함께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셋째는 수준 높은 가치관이었습니다. 이들 가정은 구성원 모두가 낙관적이었고 불행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마음이 강했습니다. 윤리적인 가치관 역시 매우 높았습니다. 넷째는 발전의 의지였습니다.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에 맞서 나갔습니다. 역경 지수가 높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는 구성원 모두가 쉽게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고 인내하는 것이 핵심인 것입니다. 참 신앙은 역경을 통해 증명되는 것입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3.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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