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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 살이 쪄 있는 자는 성전건축을 하지 못한다.

에스라 궁극이............... 조회 수 1471 추천 수 0 2014.02.28 16: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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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스3:8-13 
설교자 : 김경형 목사 
참고 : 2000년대 설교 

3장 8절-13절.

 

8절-13절: 예루살렘 하나님의 전에 이른지 이년 이월에 스알디엘의 아들 스룹바벨과 요사닥의 아들 예수아와 다른 형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무릇 사로잡혔다가 예루살렘에 돌아온 자들이 역사를 시작하고 이십 세 이상의 레위 사람들을 세워 여호와의 전 역사를 감독하게 하매 이에 예수아와 그 아들들과 그 형제들과 갓미엘과 그 아들들과 유다 자손과 헤나닷 자손과 그 형제 레위 사람들이 일제히 일어나 하나님의 전 공장을 감독하니라 건축자가 여호와의 전 지대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과 족장들 중에 여러 노인은 첫 성전을 보았던고로 이제 이 전 지대 놓임을 보고 대성통곡하며 여러 사람은 기뻐하여 즐거이 부르니 백성의 크게 외치는 소리가 멀리 들리므로 즐거이 부르는 소리와 통곡하는 소리를 백성들이 분변치 못하였느니라.

 

이 성전은 선민이 맨 처음에도 가지고 있었어요. 계시적으로 보면 에덴동산에서도 성전을 가지고 있었다 그 말이요. 그 후에 일정한 곳이 없이 제단성전 생활을 하게 했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탈출해 나가면서부터 초막성전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 성전이라는 성전은 하나님의 시은소요, 인간의 수은소입니다. 시은소라 함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는 곳. 수은소라 함은 선민들이 거기서 은혜를 받는 곳. 그러니까 성전이라 하면 어떤 건물을 자꾸 생각을 하는데 그 생각 이전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곳, 그리고 인간이 은혜를 받는 곳이면 그곳이 바로 성전이라 그 말이요. 지금 그런 면으로 말씀을 드린 겁니다.

 

은혜를 베풀고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그 말의 의미 속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든 불행, 모든 죄, 모든 고통, 모든 심판거리를 성전에 가지고 와서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은 또 영원한 것, 무한한 것을 인간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성전이라 할 때는 그런 의미가 들어있다 그 말이요.

 

또 다른 의미로 보면 성전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과 만나서 인간의 것과 하나님의 것을 교환하는 장소다’ 그렇게 또 보는 겁니다.

 

우리 인간이란 인간은 출생해서부터 타락을 했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은 사망적이요 죄악적이요 심판거리요 영원히 고통거리만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아무리 일반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성전에 나가서 하나님과 바꾸지 않고, 하나님 것을 받지 않고 그냥 이 세상에 살다가 간 자는 필연적으로 죽음 저 편에 가서 고통을 면치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심판의 고통을, 또 지옥의 고통을 면할 길이 없다 그 말입니다. 세상의 성자 중에 손꼽는 공자라도 하나님의 것을 받지 못했으면 죽음의 선을 넘어가서 심판을 받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 고통을 면하게 하려고 성전 또는 회막을 허락한 거라 그 말이요.

 

인간이 죽음의 선을 넘어가면 무(無)로 돌아가느냐? 없어지느냐 그 말이요. 아니면 목석으로 변하느냐? 아니면 불교의 주장대로 금수로 변하느냐? 아니면 죽어서도 생생하게 그대로 지속을 하느냐 그 말이요. 성경은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갈 곳은 천국이다. 확실히 갈 것이다 그 말이요. 그런데 ‘죽음 저 편에 가서 어떤 행복을 누리느냐’ 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 살면서 확정이 되는 겁니다.

 

이를 위해서 인간이란 인간은 아무리 선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것과 바꿔치기 해야 된다 그 말이요. 쉬운 예를 들면 자기가 미국에 가려면 미국의 것으로 바꿔야 될 거라 그 말이요. 그곳에서 바꾸든지, 이곳에서 바꾸든지 바꿔져야 할 거란 말이요. 말도 바꿔야 하고 돈도 바꿔야 하고, 바꿔야 된다 그 말이요. 바꿔야 살 수 있다 그 말이지요. 그래서 성전은 시은소, 또 인간 편에서는 수은소. 이것을 성전이라고 한다 그 말이요. 성전 속에는 시은소 수은소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구약에 보면 성전 회막 앞에서 양을 인계 받을 때에 안수하고, 그리고 인간이 지은 죄를 양이 짊어지고 죽지요. 넘겨주고 받으면 제사장은 그 양을 잡아서 속죄제물로서 바칩니다. 내 대신 양이 죽더라 그 말이요. 그 다음에야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오는 겁니다. 순서가 그렇게 됐어요.

 

우리가 기본은혜에서 볼 때에 기본은혜 속에는 영감의 감화가 있고, 중생이 되는 겁니다. 죽은 영이 살아난다 그 말이지요.

 

육신의 생명은 불신자도 있습니다. 미중생자는 육신의 생명은 살아있는데 영이 죽어 있어요. 물론 육신의 생명은 처음에 있었던 거지요. 중생자는 육의 생명과 함께 영의 생명도 가지고 있는데, 성도가 가진 이 영의 생명은 안 죽지요. 불신자는 영의 생명이 없는 겁니다. 불신자가 누구냐?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영의 생명이 없는 자가 불신자다 그 말이지요.

 

그런고로 기독교인은 영의 생명이 하나 있고 육의 생명이 하나 있습니다. 반면에 불신자는 영의 생명은 없고 육의 생명 하나만 가지고 있는 것인데, 문제는 두 가지 생명을 가진 기독자가 어느 생명 위주로 살았느냐? 영의 생명을 위주로 살았으면 이거는 믿음으로 살았다고 보는 거고, 예수 믿는 기독교인이라도 육의 생명을 위주로 살았다고 그러면 믿음 없이 살았다고 보는 거지요. 신앙으로 살았다고 보지는 않는 거지요. 불신자처럼 살았다고 보는 겁니다.

 

육의 생명은 죽을 생명인데 이 죽을 생명은 사람이 구태여 죽이지 않더라도, 가만 내버려둬도 죽는다 그 말이요. 그러나 영의 생명은 안 죽습니다. 사람이 육의 생명을 죽이더라도 중생한 영의 생명은 안 죽습니다. 못 죽인다 그 말이요. 이 영의 생명은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서 살린 것이라 그 말이요. 진리와 성령이 와서 살렸다 그 말이요. 그렇기 때문에 이 영의 생명은 안 죽는다 그 말이요. 죽을 생명이 아니다 그 말이요.

 

그래서 중생된 생명은 근원적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이요, 시간적으로는 영원한 생명이요, 본질적으로는 진리의 생명이요, 소유적으로는 영에 속하니 영의 생명이요, 본능적으로는 능력적 생명이요, 순서적으로 보면 구생명이 아니고 새생명이라 그렇게 보는 거지요. 인간이 출생할 때는 구생명을 가지고 나온다 그 말이요. 그러나 이제 예수 믿고 중생된 생명은 죽이려야 죽일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이다.

 

육체의 생명은 개체 개별적 생명이라서 각각 따로 따로 죽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질적으로 모두 한 생명이다 그 말이요. 이 중생한 사람의 영의 생명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생명이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이 죽는다고 그러면 중생된 사람들은 다 죽습니다. 이 중생된 영의 생명은 질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연결이 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죽으면 다 죽는다 그 말이요. 쉽게 말씀을 드린다면 뭣과 같은가 하니 각 집집마다 전기가 있는데 발전소의 발전기가 꺼지면 집집마다 전기는 다 죽는 거와 같다 그 말이요.

 

그러나 하나님은 죽지를 않지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안 죽는다’ 그렇게 되는 거지요. 중생된 그 영의 생명을 자기의 생명으로 삼고 사는 자는 하나님이 안 죽으니 그 자도 안 죽는다 그 말이요. 육신이 안 죽는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중생한 영의 생명은 안 죽는다. 그래서 중생한 영의 생명은 불멸의 생명입니다. 불사생명이요, 안 죽는 생명이라 그 말이요.

 

우리가 ‘죽는다’ 할 때 ‘어느 생명이 죽고, 어느 생명이 안 죽느냐’ 하는 이것을 잘 깨달아야 되겠어요. 예수 믿는 우리는 중생된 영의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은 안 죽습니다. 만일에 예수 믿는 내가 현재적으로 죄를 짓는다면 중생된 영이 죽는 게 아니라 이건 곰국(고통, 심판)을 먹게 된다 그 말이요.

 

그런데 영이 중생을 해서 새생명으로 살아난 것을 중생 즉시에는 자기 자신이 모른다 그 말이요. 어린아이가 자기 생일을 모르듯이. 자기의 생일을 부모가 가르쳐줌으로써 알지 안 가르쳐주면 그 아이가 어른이 돼도 자기 생일을 모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는 중생이 된 사람이고, 예수님을 보고 ‘주여’ 하는 사람은 중생이 됐다 그렇게 보게 되는 겁니다.

 

세례요한은 모태에서부터 중생을 했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아느냐? 부모가 가르쳐주니까 안다 그 말이요. 세례요한이 커서 어머니에게 묻기를 ‘내가 모태에서부터 중생을 했다고 하는 그걸 어찌 압니까?’ 하니까 그 어머니가 ‘내가 너를 배었을 때에 뱃속에 있는 네가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예수를 보고 뛰놀았느니라’ 하고 알려주니까 안다 그 말이요. 뱃속에서 뱃속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뛰놀았으니 중생이 됐다 그 말이요. 부모가 그걸 가르쳐 주니 안다 그 말이요.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것은 인간의 어떤 행동으로 된 것은 아니지요. 예수가 잉태된 그 생명은 인간의 어떤 행동으로 된 생명은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된 생명이냐? 다만 말씀으로 된 생명이었다 그 말이요.

 

그런데 ‘네가 잉태한다’고 하는 그 말씀을 마리아가 영접을 했을 때에 그 즉시로 자기에게 잉태된 그것을 마리아 자기가 알았느냐? 몰랐던 거지요. 점점 날이 가고 배가 불러오니 알았다 그 말이요. 그러나 엘리사벳 속에서 6개월째 있는 세례요한은 알았다 그 말이요. 마리아 속에 든 아기를 알았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중생된 자는 안다 그 말이요.

 

이처럼 자기가 뱃속에서 중생된 사실을 자기가 태어난 후에 부모가 가르쳐 주니 확실히 알았다 그 말이요. 그게 확신이라 그 말이요.

 

진심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이거는 중생을 한 사람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이 직접 생명을 이어받았기 때문이지요. 그러니까 그 영의 생명은 직접적으로 아버지로부터 받는 것이기 때문에 타인을 통해서 올 수는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마리아 태중의 그 생명은 아버지로부터 직접 왔단 말이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왔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인간을 통해서 온 생명이 아니라 그 말이요.

 

우리가 알기로 권OO이라는 그 분은 인간이 인간을 중생시키는 것으로 말을 했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이단이라 부르게 되는 겁니다. 죽은 영을 사람이 어떻게 살리느냐?

 

모든 인간은 죄 아래서 출생이 됐습니다. 원죄를 가지고 죄 아래서 태어났습니다. 따라서 모든 인간은 중생을 해야 천국을 갑니다. 구약시대에 양을 잡아 드리는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통한 구원을 형식계시로써 보여준 겁니다. 양이 인간을 구원을 시키지 못해요. 짐승의 피로써 인간이 구원을 얻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보여주는 것은 예수님이 대신 대형을 하고, 또한 대행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의를 인간에게 입혀주는 것을 형식계시로써 보여준다 그 말이요.

 

구원을 할 때 첫째는 대형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죽으심이지요. 이 대형으로 성도의 죄를 벗기고, 또한 대형을 입히니 성도는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죽을 대신 예수님이 죽었다 그 말이요. 그래서 나는 영원히 죽는 형벌은 면했다고 그랬지요?

 

그리스도의 이 대형으로 나의 죄를 없이 했으니 나는 무죄라 그 말이요. 그러나 이 무죄상태는 말 그대로 무죄인이지 아직 의인은 아닙니다. 대형을 한 그 다음에 그리스도의 대행으로 나에게 하나님의 의를 입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대행으로 성도에게 당신의 의를 입힌다 그 말이요. 그래서 이제 의인이라 인침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지공의 법을 지키심으로 대형을 하실 수 있었고, 또한 하나님의 지성의 법을 지키심으로 대행을 통해 당신이 행한 그 의를 성도에게 입힌다 그 말이요. 그래서 중생한 성도는 의인이라 인처진다 그 말입니다. 주님의 의로서 인처진다 그 말이요.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의의 예복을 입히는 겁니다. 나에게 당신의 의를 입히시려고 주님께서 대행을 하셨다 그 말이요. 나에게 의를 입히시고 의롭다 칭한다 그 말이요. 목욕을 시키고,(무죄상태) 그 후에 새 옷을 입힌다(의를 입힘) 그 말이요.

 

이처럼 인간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의를 입어야 만이 되는 건데,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는 것은 바리새인의 의로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이 바리새인들의 의는 신조 의가 아닌 인조의 의이기 때문에 천국에 못 들어간다 그 말이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은 성경구절대로 행했으니 의인이라고 주장을 했지만 그들이 행한 의는 신조 의가 아닌 인조 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라 그 말이요.

 

예수님의 의는 본질과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만들어진 하나님의 의를 성도에게 입힌다 그 말이요. 그래서 ‘중생한 성도는 의인이다’ 이렇게 칭함이 된다 그 말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할 때 물은 진리의 하나님의 말씀이요, 그러니까 중생 시에 진리와 생명 성령 이것이 복합적으로 동시에 나에게 들어오는 겁니다.

 

우리가 인간의 용어로 구분을 지어서 논리적으로 말을 하려니까 ‘진리와 생명 성령’ 하면서 분리해서 말을 하게 되고 ‘그 셋 중에 어느 게 먼저냐’ 하고 자꾸 논란을 하게 되지만 시간적으로는 동시성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기본구원(중생)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본구원이라 그럴 때에 이것을 논리적 순서적으로 말을 하면 ‘대형 대행’ 하고 말을 하는 것이고, 이걸 한 마디로 하면 예수님의 구속입니다. 이 구속 속에는 당신의 의행이 들어있지요.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만족을 드린 이 의행을 우리에게 입히는 거지요. 순서적으로 보면 그렇다 그 말이요.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죄인을 살리려면 예수님께서 죄인 대신 형벌을 받고 죽어야 된다 그 말이요. 이래서 나의 죽은 영을 살리고, 아울러 죄를 면하게 하는 겁니다. 그런 다음에 그대로 둔 것이 아니고 당신의 의를 입히니 의인이라 그렇게 인처진다 그 말이요.

 

이제 영이 중생된 우리의 몸은 성령님이 내재하고 계시니 성전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더불어 결합이 되어 있어요. 성경구절은 고전3:16, 롬8:16에 되어 있고, 또 마5:20입니까? ‘너희들의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못 들어간다.’

 

기본구원 속에는 그러한 내용들이 들어있는데, 그러면 예수 믿는 성도가 영이 중생이 되었는데 현재적으로 죄를 지을 때는 그 사람에게서 성령이 떠나가느냐?

 

중생된 영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중생한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은 중생한 영이 하니라 그의 이성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죄를 지어도 나의 중생된 영과 결합되어 내 속에 내주하고 있는 성령님은 떠나가지를 않습니다. 다만 사역적인 성령님은 떠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중생된 영과 결합되어 내 속에 내주하고 있는 그 성령님이 떠나면 중생된 내 영이 도로 죽게요?

 

내가 빵을 먹고 싶은 것은 나의 중생된 영이 아니고 육(이성 포함)이지요. 육이 그러는 거지요. 또한 중생한 영은 언제나 죄를 반대하지만 육은 죄를 찬성을 할 수가 있어요. 영은 영의 성질 성격상 하나님의 질과 같은 성분이므로 근본적으로 죄를 찬성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중생한 사람이 죄를 지을 때에 영은 양심을 통해서 그 사람의 마음을 두드린다 그 말이요. 그럼에도 그 양심을 밟아놓고 죄를 지을 수가 있는데, 이는 이성과 몸이 짓는 것이지 중생한 영이 죄를 짓는 게 아닙니다.

 

내 양심을 누가 짓밟느냐? 진리 따르는 양심을 누가 짓밟느냐? 남이 짓밟는 게 아니고 자기가 짓밟습니다. 이러게 돼놓으면 하나님이 손해가 아니고 자기가 손해가 돼요. 자기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중생한 사람이 자기의 몸이 진리를 따르는 양심의 말을 안 들으면 자기 속에 있는 영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의 이성을 통해 육이 듣고 나의 중생된 영과 함께 움직일 때 하나님의 뜻에 일치가 돼서 나가는 건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중생된 영이 자기의 양심을 통해서 죄를 짓지 말라고 마음을 두드리는데도 이 이성이 자기의 몸을 붙잡고 죄를 지으면 중생된 영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 말이요. 중생된 영이 강권적으로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에 보면 ‘마음은 원이로되 육이 약하도다’ 하는 게 있지요?

 

우리가 본문에 보면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성전을 짓는데 백성이 말을 안 들으면 성전을 못 짓습니다. 육이 살이 찌면, 돼지로서 비유할 수가 있는데 돼지가 살이 찌면 잔칫상에 올라가지요. 잔치할 때 뭘 잡느냐? 돼지를 잡는단 말이요. 육이 강하면 마음이 살이 찐 자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세상적으로 살이 찐 것을 ‘육이 강하다, 육이 살이 쪘다’ 그렇게 보는 거지요. 그렇게 되면 돼지가 잔칫날에 잡히듯이 하나님의 심판 날에 때려 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에 살이 찌니, 육이 강하니 성전을 못 짓게 되지요. 아닥사스다가 성전을 못 짓게 하더라 그 말이요. 이게 이제 외부의 사건 환경입니다. 아닥사스다가 성전을 못 짓게 하는 것은 외부의 사건 환경입니다. 왜냐? 육덩이라는 백성이 성전을 안 지으려고 하니까 그렇다 그 말이요.

 

성전을 안 지으면 어떻게 되느냐? 마음이 살이 찐단 말이요. 육이 살이 찐다. 세상에 살이 쪄 있다 그 말이요. 성도가 마음에 살이 쪄 있으면 생각과 마음과 소원과 목적이 세상으로 살이 쪄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경우에 자기 속에 성전이 안 지어진다 그 말이요.

 

자기 속에서 영이 주격이 돼가지고 새사람으로 나가면 하나님의 만능의 능력이 자기의 배경이 됩니다. 그런 경우에 모든 만물이 동원이 되고 호응 협조하면서 성전을 짓게 되는 겁니다.

 

모세는 장정만 해도 60만 대군을 출애굽을 하면서 빈손으로 데리고 나가지요? 남녀 아이들 노인들 여자들 모두를 합치면 약 150만 명 이상은 될 텐데, 그런데 모세는 빈손을 들고 나가지요. 그 배후에 누가 역사하느냐? 하나님께서 역사를 한다 그 말이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을 광야에 있어도 못 먹어서 굶어죽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 말입니다. 그러나 죄 해결을 못해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벼락을 맞아 죽은 자들은 있지요. 당신의 백성은 하나님이 책임을 진다 그 말이요. 자식이 굶고 있으면 누가 책임을 집니까? 부모가 책임을 지듯이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의 자녀들이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구걸하느냐? 이치에 안 맞는다 그 말이요.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형편을 아십니다. 인간 내가 내 자녀를 사랑함보다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형편을 더 잘 아시고 더 사랑하십니다. 나의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염려는 하나님이 더 하신다 그 말이요. 그러니 내 먹을 것 입을 것에 대한 염려는 아버지가 하시는 거고, 하나님의 자녀는 아버지께서 나에 대해 가지신 소원인 ‘네가 사람이 되어라’ 하는 그 면에 신경을 써 나가면 된다 그 말이요.

 

아이의 젖 걱정은 부모가 하지요? 그러니까 믿는 우리는 새사람이 중복적으로 만들어지는 일에, 주님 닮는 그 일에 신경을 쓰면 되고, 또 딴 사람에게도 그 일에 신경을 쓰자 그 말이요. 그렇게 되면 자기의 천국이 화려해지고, 자기 속에서 천국건설이 잘 되어나가고, 자기의 영적 성전건설이 잘 되어나가고, 더불어서 내 신앙실력이 커진다 그 말이요. 이것이 오늘 본문으로 보여주는 말씀이 되는 겁니다.

 

기도 올립시다.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신 것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신경을 쓰시는 그 일, ‘어떻게 하면 우리를 하나님 당신처럼 온전자로 만들어 줄까?’ 하는 그 면에 신경을 쓰며 살라고 하신 것인 줄 압니다.

 

우리가 그 면에 신경을 써서 주님처럼 닮고 싶어서, 깨닫고 싶어서, 지혜자가 되고 싶어서, 도덕성자가 되고 싶어서, 능력성자가 되고 싶어서 하나님의 것을 받아 가지려고 하고, 또 ‘나만이 아니고 너도 같이 받아 가지자’ 하는 그 면으로 신경을 쓰다보면 우리가 이방인들이 구하는 먹고 마시고 입고 하는 이것은 신경을 안 쓰게 되는데 자타의 구원을 위해서 신경을 쓰지 못하니까 이방인들이 구하는 그 면으로 구하는 그런 교인이 될 수밖에 없는 줄 압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래서 오늘날 많은 교인들을 보면 ‘무엇을 먹고 마실까 입을까’ 하는 그 면으로 구하고 치닫고 있을 뿐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고자 하는 그것은 안 받고, 신경을 쓰지 않고 있으니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것을 보실 때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오늘 주신 말씀의 이치에서 어찌하든지 저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닮는 이 일에 부지런히 힘쓰고 애쓰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에 기쁘게 갈 수 있도록 저희들에게 큰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이 모든 말씀 우리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하옵나이다. 아멘.

 

                                (계속)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타이핑 했습니다)

 

김경형목사님이 교역자 신학생을 대상으로 매 주 정례적으로 진행하는 신학 및 성경연구 모임을 통해 영원 전에 하나님의 의지세계에서 인간구원을 설정하게 된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깨닫고 하나님의 본질의 신앙으로 나가는 주의 종들이 누룩처럼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참석하실 분은 031-207-5159, 또는 010-8886-5159로 문의해 주세요.(평신도도 참석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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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00 히브리서 정복하는 믿음 히11:30  이정원 목사  2014-03-05 1093
10399 히브리서 홍해를 건넌 믿음 히11:27-29  이정원 목사  2014-03-05 2160
10398 히브리서 구원을 확신하는 믿음 히11:27-29  이정원 목사  2014-03-05 1420
10397 출애굽기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다. 출24:12-18  정용섭 목사  2014-03-05 1145
10396 마태복음 원수사랑, 가능한가? 마5:38-48  정용섭 목사  2014-03-05 1392
10395 고린도후 고난을 극복하는 세 가지 길 고후4:16-18  조용기 목사  2014-03-05 2372
10394 야고보서 언어를 선택하라 약3:1-12  조용기 목사  2014-03-05 1528
10393 고린도후 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후4:11-12  조용기 목사  2014-03-05 2084
10392 마태복음 적은 일에 대한 많은 보상 마25:21-23  강종수 목사  2014-03-02 1349
10391 야고보서 참된 신앙인과 구제 약2:15-16  한태완 목사  2014-03-01 1495
» 에스라 세상으로 살이 쪄 있는 자는 성전건축을 하지 못한다. 스3:8-13  김경형 목사  2014-02-28 1471
10389 에스라 보이는 성전이 목적이냐, 보이지 않는 성전이 목적이냐? 스4:7-16  김경형 목사  2014-02-28 1375
10388 누가복음 쓰임받는 자 눅8:1-18  최장환 목사  2014-02-27 1955
10387 요한복음 기다리시는 하나님 요2:1-25  최장환 목사  2014-02-27 1743
10386 시편 한 해의 시작, 하나님께 맡기기 시37:5-6  김필곤 목사  2014-02-26 2106
10385 사도행전 한 해의 시작, 세 가지 충만으로 행11:24  김필곤 목사  2014-02-26 1854
10384 다니엘 한 해의 시작, 뜻을 정하고 단1:8-9  김필곤 목사  2014-02-26 2107
10383 시편 한 해의 끝, 만족한 결산을 하려면 시81:8-16  김필곤 목사  2014-02-26 1936
10382 마태복음 행복한 가정(12) 성령 충만한 가정 마3:1-12  김필곤 목사  2014-02-26 1892
10381 창세기 행복한 가정(11) 발전의 의지가 있는 가정 창12:1-3  김필곤 목사  2014-02-26 1589
10380 마가복음 행복한 가정(10) 역경을 극복하는 가정 막5:35-43  김필곤 목사  2014-02-26 1929
10379 히브리서 행복한 가정(9) 새로운 세상 천국을 소망하는 가정 히11:7  김필곤 목사  2014-02-26 1579
10378 시편 행복한 가정(8) 기쁨을 잃지 않는 가정 시90:10-17  김필곤 목사  2014-02-26 1785
10377 시편 행복한 가정(7) 감사하는 가정 시136:1-6  김필곤 목사  2014-02-26 2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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