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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본문 : | 유1:17-25 |
|---|---|
| 설교자 : | 신대현 목사 |
| 참고 : |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
유1:17-25
정욕을 따르는 자들과는 달리 성도는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 가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자들이어야 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를 보호하시고 넘어짐에서 지켜주시며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해 주실 것이다.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마지막 때에 나타날 경건치 않은 자들에 대해 형제들에게 경고한다. 그들의 모습 가운데 외적으로 드러나는 분명한 증거는 '기롱하는(남을 업신여기고 남이 한 일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과 '당 짓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가지는 근본 이유는 그들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이 없다'는 것만큼 육에 속한 자를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구분 지을 수 있는 뚜렷한 기준은 없다.
성령은 누구인가? 각 사람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더 이상 개인적이지 않으며,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로 묶인다. 각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이 나뉠 수 없는 만큼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본질적으로 '당을 지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또 하나님이 스스로를 기롱할 수 없듯이 각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은 형제들 사이에 기롱함을 허락지 않으신다.
위의 두 부류의 사람들을 쉽게 요약하면 성령이 없는 자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자들이요' 성령을 모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마음에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자들'이다. 정욕을 따라 사는 자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사는 자들의 삶은 이처럼 현저히 다르다.
유다는 성령의 사람들이 된 성도들에게 여러 권면을 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참 모습이 어떠해야 함을 20-21절에서 말하고 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이다. 정욕에 거하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나를 향해 보여주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20-21절의 헬라어 원문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는 말에 대해서 명령형을 쓰고 있고, 나머지 권면들은 분사형을 써서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부가적인 행동들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 성도들이 행하여야 할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모습들인가?
첫째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것이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가진 믿음이 우리 안에서 나온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란 뜻이다. 3절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말한다. 그 믿음을 주신 순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만난다. 이전에는 느낄 수도 없었고 깨닫지도 못했던 하나님을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해 가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알아보는 삶을 살면서 날마다 자기를 드러내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 하겠다.
둘째는 성령으로(혹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이 없는 자들은 오로지 육 안에서 육이 원하는 것을 바라고 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 안에 계신 성령의 바라는 것을 바라는 자들이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나의 생각이 거하는 영역을 육에서 성령으로 옮기는 것이다. 나의 육신의 소욕을 접고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생각과 인격 안에 들어가서 성령의 생각을 내 생각이 되게 하여 성령이 간구하는 바를 내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당신의 생각을 성경에 담으셨기 때문이다.
셋째는 영생에 이르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자들이다. 주님의 은혜는 한 번 입고 그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영생에까지 이어질 일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 입기를 항상 바라고 사는 자들인 것이다. 22-23절은 긍휼을 기다리되, 수동적으로만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행할 수 있는 실천의 모습을 가르쳐 주고 있다. 형제를 긍휼이 여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이는 단지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차원만이 아니다. 형제의 의심을 받아주고, 고난을 이기게 도와주며, 정욕에 사로잡혀 있더라도 그를 권면하는 것을 말한다.
성령의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보장'이 된 자들이다. 우리의 삶을 늦출 수 없고 우리가 주저앉아 있을 수 없으며 세상에 대해 무력해 질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능히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넘어짐에서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설 자들이다.
나의 신분이 이렇고 나의 삶이 이러해야 할진대... 제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여! 제 안에서 당신의 모습을 충만히 드러내시어 저의 육신의 생각을 감추시고, 저로 언제나 당신의 삶이 드러나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성령이 없는 자들의 모습과 성령을 모시고 있는 자의 삶이 얼마나 다른 것을 다시 가르쳐 주셔서 저로 경각심을 갖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의 품을 떠나 제가 누구에게 사랑을 구걸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사랑 안에서 저를 지켜 나갈 수 있게 힘을 주세요. 영광의 날에 저를 흠이 없는 자로 세워주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지금은 비록 제 모습이 초라해 보이지만 주님이 저를 능히 보호하시고 넘어짐에서 지키실 줄로 확신합니다.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신대현 목사
유1:17-25
정욕을 따르는 자들과는 달리 성도는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 가고 성령으로 기도하며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자들이어야 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성도를 보호하시고 넘어짐에서 지켜주시며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해 주실 것이다.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가르침을 떠올리면서 마지막 때에 나타날 경건치 않은 자들에 대해 형제들에게 경고한다. 그들의 모습 가운데 외적으로 드러나는 분명한 증거는 '기롱하는(남을 업신여기고 남이 한 일을 무시하고 조롱하는) 것'과 '당 짓는 것'이다. 이런 모습을 가지는 근본 이유는 그들 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이 없다'는 것만큼 육에 속한 자를 그리스도인들로부터 구분 지을 수 있는 뚜렷한 기준은 없다.
성령은 누구인가? 각 사람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더 이상 개인적이지 않으며, 그들 안에 계신 하나님으로 인해 하나로 묶인다. 각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이 나뉠 수 없는 만큼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본질적으로 '당을 지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또 하나님이 스스로를 기롱할 수 없듯이 각 사람 안에 있는 하나님은 형제들 사이에 기롱함을 허락지 않으신다.
위의 두 부류의 사람들을 쉽게 요약하면 성령이 없는 자들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자들이요' 성령을 모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마음에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자들'이다. 정욕을 따라 사는 자들과 하나님의 은혜를 먹고사는 자들의 삶은 이처럼 현저히 다르다.
유다는 성령의 사람들이 된 성도들에게 여러 권면을 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참 모습이 어떠해야 함을 20-21절에서 말하고 있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것'이다. 정욕에 거하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나를 향해 보여주신 그 사랑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20-21절의 헬라어 원문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라는 말에 대해서 명령형을 쓰고 있고, 나머지 권면들은 분사형을 써서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한 부가적인 행동들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 성도들이 행하여야 할 모습을 더 구체적으로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모습들인가?
첫째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것이다. '지극히 거룩한 믿음'이라는 표현은 우리의 가진 믿음이 우리 안에서 나온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믿음'이란 뜻이다. 3절에 나와 있듯이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을 말한다. 그 믿음을 주신 순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만난다. 이전에는 느낄 수도 없었고 깨닫지도 못했던 하나님을 '알아보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해 가는 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알아보는 삶을 살면서 날마다 자기를 드러내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 하겠다.
둘째는 성령으로(혹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성령이 없는 자들은 오로지 육 안에서 육이 원하는 것을 바라고 산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 안에 계신 성령의 바라는 것을 바라는 자들이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은, 나의 생각이 거하는 영역을 육에서 성령으로 옮기는 것이다. 나의 육신의 소욕을 접고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생각과 인격 안에 들어가서 성령의 생각을 내 생각이 되게 하여 성령이 간구하는 바를 내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이 일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당신의 생각을 성경에 담으셨기 때문이다.
셋째는 영생에 이르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자들이다. 주님의 은혜는 한 번 입고 그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영생에까지 이어질 일이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는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은혜 입기를 항상 바라고 사는 자들인 것이다. 22-23절은 긍휼을 기다리되, 수동적으로만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행할 수 있는 실천의 모습을 가르쳐 주고 있다. 형제를 긍휼이 여길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다. 이는 단지 형제를 불쌍히 여기는 차원만이 아니다. 형제의 의심을 받아주고, 고난을 이기게 도와주며, 정욕에 사로잡혀 있더라도 그를 권면하는 것을 말한다.
성령의 사람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그들의 보장'이 된 자들이다. 우리의 삶을 늦출 수 없고 우리가 주저앉아 있을 수 없으며 세상에 대해 무력해 질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능히 우리를 보호하시고 우리를 넘어짐에서 보호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국 하나님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설 자들이다.
나의 신분이 이렇고 나의 삶이 이러해야 할진대... 제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여! 제 안에서 당신의 모습을 충만히 드러내시어 저의 육신의 생각을 감추시고, 저로 언제나 당신의 삶이 드러나는 통로가 되게 하소서.
*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성령이 없는 자들의 모습과 성령을 모시고 있는 자의 삶이 얼마나 다른 것을 다시 가르쳐 주셔서 저로 경각심을 갖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의 사랑의 품을 떠나 제가 누구에게 사랑을 구걸할 수 있겠습니까? 주의 사랑 안에서 저를 지켜 나갈 수 있게 힘을 주세요. 영광의 날에 저를 흠이 없는 자로 세워주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지금은 비록 제 모습이 초라해 보이지만 주님이 저를 능히 보호하시고 넘어짐에서 지키실 줄로 확신합니다. 감사를 드리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신대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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